메튜 헨리 주석, 이사야 6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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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1

메시야의 승리 (이사야 63:1-6)

여기서 먼저 물은 다음 설명하고 있는 주제는 영광스러운 개선이다.

Ⅰ. 그것은 이스라엘의 원수들에게서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아 얻어진 승리다. 혹자는 이것이 바벨론 사람에게 대한 승리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고레스는 바벨론 사람들을 정복했고 이것은 하나님이 시키신 일이라는 것이다. 에돔에서 고레스의 개선 장면을 처음으로 발견한 이는 선지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인정될 수 없다. 왜냐하면 바벨론 제국은 항상 북방 나라로 언급되는데 반해 에돔은 예루살렘 남쪽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복자 고레스는 그 나라를 통하여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에돔족에 대한 승리이다. 에돔인들은 갈데아 사람들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될 때(시 137:7) 승리감에 도취하였고 대적에게서 에돔으로 도망쳐 오는 유대인들을 멸절시켰었다(욥 12,13). 따라서 바벨론이 멸망될 때 그들도 셈을 치르게 된 것이다. 비록 우리가 역사 속에서 예언의 성취를 확인할 수가 없지만 이 예언이 성취된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렘 49:13 참조). 그러나 에돔에 대한 이 승리는 이스라엘의 기타 적대국에 대한 유사한 승리를 표본적으로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 승리는 야곱에 대한 에서의 구원(仇怨)을 위해 명명된 것이다(창 27:41). 이것은 아마도 애돔족에 대한 다윗의 영광의 승리를 암시해 주는 것일 것이다. 그가 승리할 때마다 명예를 얻었다(시편 60편 제목; 삼하 8:13, 14).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2.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적인 원수들을 지배하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얻어진 승리다.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계 19:13). 그는 우리가 아주 잘 아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권세자와 왕들의 정복자 이상이 된 것은 십자가에서 그런 자들을 늑탈하시고 승리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승리에 대한 설명 속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 볼 수 있다.

Ⅰ. 한가지의 찬양하는 질문이 이 정복자에게 던져지고 있다(1,2절). 질문을 던진 주체는 교회 또는 교회의 이름으로 질문하는 선지자이다. 그는 혈투에서 승리하여 돌아오는 위대한 영웅을 보면서 정복자에게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질문을 대답하게 된다.

1. 그 정복자는 누구인가? 그는 에돔에서 오는 영웅을 응시하고 있다. 그 영웅은 군인으로서는 영광스러운 의복을 입고 있다. 그러나 그 정복자의 옷은 훈장으로 장식되지도 않았고 레이스가 달린 옷도 아니었다. 그것은 피와 얼룩으로 더렵혀져 있었다. 그는 그 정복자가 겁에 질리거나 지쳐서 오는 게 아니라 큰 능력으로 걸어오고 있다는 것을 관찰하고 있다(1절). "의기양양함과 승리가 그에게 보이는구나. 그의 외모와 복장은 영광으로 옷 입혀졌도다. 그는 얼마나 힘찬 발걸음을 내디디시는가! 그분은 얼마나 당당하게 발걸음을 내디디시는가! 성대하고 엄숙한은 그의 평화로다. 그의 얼굴은 위엄으로 충만하도다. 이 힘센 영웅은 누구냐 도대체 누굴까?" "이 자가 누구뇨?" 라는 질문은 아마도 여호수아가 칼을 손에 빼어들고 있는 자에게 나아가 물은 똑 같은 질문을 의미할 것이다.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수 5:13) 또는 이스라엘 백성이 예배드릴 때, "당신과 같으신 하나님의 누구이니이까" (출 15:11)라는 질문을 의미할 것이다.

2. 또 다른 질문이 나오고 있다.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뇨?(2절) 이 수고와 위험의 표식을 보건대 너는 얼마나 어려운 봉사를 해왔는가?" 그 용모 속에 위엄과 공포를 가진 분이 "포도즙 틀을 밟는 비천한 노예의 일을 하도록 고용되었다는 것은 가능할까? 확실히 불가능할 것이다. 실제로는 구속자의 영광이 되는 일이 처음에는 그에게 불명예스러운 것처럼 보인다. 강대한 군주가 포도즙들을 밟고 농부의 일을 한다면 체면이 여간 손상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취하셨고 종의 흔적을 몸에 지니고 다니신 때문이다.

Ⅱ. 그가 하시는 놀라운 대답이 여기에 나온다.

1. 그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말한다. "의를 말하는 나는 구원을 베풀기에 능한 자니라" (1절). 그분은 구원을 베푸시는 자이시다. 하나님은 압제자들의 손아귀에서 이스라엘을 건지신 구주셨다. 주 예수는 우리의 구주이시다. '예수'라는 이름은 "구세주" 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분은 자기 백성들을 저희들의 죄에서 건지실 자이시기 때문이다. 구원의 역사 속에서 그분은 다음과 같은 것을 주지시키신다.

(1) 그의 약속의 진실성. 구원은 이로써 이루어졌다. 그는" 의를 말하는 자이시다" (1절).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모든 말을 이행하실 것이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자기 말과 행위를 비교하고 대조하게 하시며 자기의 말을 자기 행위로 확증시키고 정당화시키실 것이다.

(2) 그의 능력의 효능. "그는 구원하시기에 능하신 분이시다" (1절). 난관의 방해가 아무리 그것을 가로막는다고 할지라도 그는 약속된 구원을 가져오실 수 있다. "약속한 것을 충실히 지키는 자는 바로 나다. 죽음이나 지옥이나 무덤의 권세를 가진 자도 나다. 모든 정복하는 손을 좌절시키는 자도 나다. 구원할 준비가 잘되어 있고, 또한 구원할 힘이 있는 자도 바로 나인 것이다" 노리스(Norris).

2. 그는 자기가 어떻게 이런 피빛으로 나타나게 되었는지를 말한다. "내가 홀로 포도즙 틀을 밟았다" (3절). 포도즙 틀을 밟는 자로 비유되면서 이 비유를 멸시치 않으시고 용납하시며 그 비유를 계속들으실 정도로 그는 자신의 승리 속에서도 겸손하시다. 그는 참으로 포도즙 틀을 밟으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즙 틀이며 (계 14:19) 우리는 그 포도즙 틀로 던지워 마땅한 죄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원수들을 거기에 던지시기를 원하셨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사망 권세를 가진 자를 멸하시기를 바라셨다. 하나님께서 유대 민족의 원수들에게 종종 행하시고 여기서 예언되고 있는 유혈극은 바로 그런 일의 예표요 상징이다. 이 정복자가 자기 승리를 어떻게 묘사하는지 관찰해 보자.

(1) 그는 순전히 자기 힘으로 승리를 얻으신다. "내가 홀로 포도즙 틀을 밟았다" (3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대적을 멸망시키실 때 도구를 사용하셨다면 함께 할 자가 필요없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구원이 베풀어질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아무런 원조도 제공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연약하고 무력했으며 도와 줄 자도 없었고 자기 구원을 도모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낙담하고 불안하여 어떤 일을 할 마음도 없었다. 그들은 자유를 위해 극히 작은 투쟁을 할 마음도 갖지 못했다. 포로들 자신이나 그들의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본즉 도와주는 자도 없었다" (5절). 기대와는 달리 그들에게는 대담하고 활동적인 정신이 부재하였다. 인도할만한 지도자가 없을 뿐만 아니라, "붙들어 주는 자" 조차 없었다는 것은 더욱 이상했다. 그들의 압제자를 대항하여 고레스와 합세할 용기를 가진 사람도 없었다. "그러므로 내 팔이 구원하였다." 이 구원은 피조물의 힘이나 권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나의 팔" 곧 만군의 여호와의 영에 의하여 창조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모든 돕는 자들이 실패할 때 도울 수 있다는 것을 주목하라. 아니 그런 때가 바로 하나님이 도우시는 때이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는 자신의 권능을 보다 더 영광스럽게 베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영적 원수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그는 홀로 싸우심으로써 이 승리를 얻었다. 그는 홀로 아버지의 진노의 포도즙을 틀을 밟았다. 마침내 그는 혼자 십자가로써 정사와 권세자에게 승리하셨다(골 2:15). 만인 중에 그와 함께 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가 흑암 권세와 결전하러 가셨을 때, "그의 제자들은 모두가 그분을 버리고 도망쳤다. "도와 주는 자도 도울 수 있는 자도 또 감히 도우려고 하는 자도 없었다." 그의 관심은 인간에게 쏠려 있는데 정작 그 인간들 중에는 붙들어 줄 자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할 수만 있으면 대적하고 훼방하려는 자들뿐이었다. 그는 이것을 이상히 여길 만도 하셨다.

(2) 그는 순전히 자신의 열심에서 이 전쟁을 시작하신다. 그가 원수들을 짓밟으시는 것은 그의 진노에서이다(3절). 또한 "분이 그를 붙들어" 이 일을 수행하게 한다(5절). 하나님께서는 억눌림을 받는 유대인들에게 구원을 주셨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압제하는 바벨론 사람들을 보고 화가 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우상 숭배와 마술과 교만과 잔인과 자기 백성에게 입힌 피해에 대해 매우 노하셨고 그들의 가증함이 증가함에 따라 하나님의 노여우심도 격분으로 변하였던 것이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과 인류의 행복을 위해 거룩한 열정으로 우리의 구속 사업을 이루셨다. 또 그는 이 양자에 대한 사탄의 대담한 공격을 보고 거룩한 분개를 느끼셨다. 이러한 열정과 분개는 그의 전체적인 일을 위해 철저하게 그를 붙들고 있었다. 그를 활동시키는 이 열정에는 두 가지 성질의 열정이 있었다.

[1] 그는 자신의 원수와 자기 백성으로 원수들에게 대해 열심을 품으셨다.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다" (4절). 원수 갚는 날은 영원하신 계획 속에 정해져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마음속에 기록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잊을 수 없었고 놓칠 리도 없었다. 그의 마음은 복수로 차 있었고 원수 갚는 일은 그에게 하나의 추처럼, 책임처럼 맴돌고 있었다. 그것은 그로 하여금 매우 활기있게 이 거룩한 전쟁을 밀고 나가게 하였다. 하나님께는 원수 갚는 날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주목하자. 그날은 오랫동안 지체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 그날은 올 것이며 우리는 복수의 날을 기다린 것에 대해 보람을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구속자 자신이 이 일을 행하시며 원수 갚는 날이 그의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2] 그는 자기 백성들과 구원에 동참하도록 예정된 모든 자에 대해 열정을 품고 계셨다. "내 구속할 해가 왔도다." 그 해는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정해진 해이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정해진 해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날까지 시간을 지키셨다(출 12:41). 또한 바벨론으로부터 해방시킬 날도 정해져 있었다(단 9:2).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가 오시는 날은 악마의 간계가 파괴되는 날이었다. 그날은 교회의 모든 구원을 위해 있으며 구원자는 그날을 지켜보고 계신다. 다음을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그는 어떤 기쁨을 가지고 자기 백성들에 대해 말하는가? 그들은 그가 구원을 베풀 대상자들이며 바로 그 자신의 소유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에게 소중한 자들이다. 비록 그들의 구원이 아직 성취되지 않았지만 그러나 그는 그들을 "구원받을 자" 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마치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앞으로 틀림없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그는 어떤 기쁨을 가지고 자기 백성들의 구원에 대하여 말하는가? 비록 아주 통열한 만남이 되겠지만 "그때가 왔다" 는 것을 그는 몹시도 기뻐한다. "이제 나의 구원의 때가 왔도다. 자, 보라." 더 이상 지체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내가 일어나리라. 이제 너는 내가 일어나리라. 이제 너는 내가 바로에게 행하는 일을 보게 되리라" 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약속된 구원은 정해진 때가 올 때까지 인내로써 기다려야만 한다는 것을 주의하자. 그러나 우리는 기도로써 그 약속들을 기억해야만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진실로 속히 오겠다" 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정말로 그럴지어다" 라고 마음으로 화답하자. "구속할 해가 오게 하소서."



(3) 그는 그 모두에게 안전한 승리를 거두실 것이다.

[1] 이미 많은 것이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그는 이제 붉은 의복을 입고 나타나기 때문이다. 정복자의 의복의 피로 물들여질 정도로 많은 피가 흐른 것이다. 이것은 오래 전 야곱의 임종시에 실로(즉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에서 언급되었다.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곱 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라는 말씀은 아마 이것을 암시할 것이다(창 49:11). "나는 늘어뜨린 고리로 장식하였고, 나의 승리를 나의 원수들의 피로써 기록하였다" 고 노리스(Norris)는 노래했다. 우리는 적 그리스도 세력의 파멸시에 굉장한 유혈이 있다는 것을 읽게 된다(계 14:20, 19; 13). 그러나 그것은 예언의 방언에 따라 영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여기에 나오는 말씀도 그렇게 해석할 수 있다.

[2] 그러나 아직도 더욱 더 많은 것이 이루어질 것이다. "내가 내게 대항하는 자를 분함을 인하여 짓밟을 것이다(6절). "구속할 해는 올 것이다." 그 때 승리의 구속자가 계속해서 이기며 또 계속 이기려고 하실 것이다(계 6:2). 그는 시작하시면 끝을 보실 것이다. 그가 자기 교회의 원수들에게 어떻게 승리하시는가 보라.

첫째, 그는 그들을 얼빠지게 만드실 것이다. 그는 그들을 술취하게 만들어서 그들의 계획을 두서도 일관성도 없게 만드실 것이다. 그들은 그의 분노의 잔을 마실 것이며, 그로 인하여 취할 것이다. 또 그는 그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피로 취하게 할 것이다" (계 17:6). 소요의 잔을 마시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진노의 잔" 즉 떨림의 잔으로 취하게 하시지 않도록 회개하고 돌아서야 한다.

둘째, 그는 그들을 약하게 할 것이다. 그는 그들의 선혈로 땅에 쏟아지게 하실 것이다. 어느 누구도 전능자를 당해낼 수 없지 않은가?

 

63:2 없음.

 

63:3 없음.

 

63:4 없음.

 

63:5 없음.

 

63:6 없음.

 

63:7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감사 (이사야 63:7-14)

여기서 선지자는 교회의 이름으로 지금까지의 하나님 처사를 음미하며 또 감사하고 있다. 선지자는 본장의 맨 마지막과 다음 장에서 성벽 위의 파수꾼처럼 비참한 상태에 있는 교회를 불쌍히 여기시도록 하나님께 진지하게 기도한다. 기도로 이와 같이 회고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흔히 있는 일이다.

Ⅰ. 여기에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일반적 치하가 나온다(7절). 대체로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백성들은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 (62:2)라고 일컬어진다. 우리는 여기서 그들이 특히 하나님의 주의를 끌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이다. 선지자는 여기서 자기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아무리 말해도 모자란다고 생각하기라도 하는 듯이 그의 인자하심을 입에 올리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를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 이때 인류를 향한 그의 사랑은 너무도 분명하고 뚜렷한 자비를 타나내었다(딛 3:4). 그는 자비와 긍휼과 그 찬송도 언급하고 있다. 이런 것은 소중한 모든 것에서 나타난다. 아니 하나님의 자비의 샘은 너무나 풍성하고 그 물줄기는 너무나 다양하다. 그는 하나님의 자비를 복수형으로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그의 사랑과 친절의 열매들에 대해 계산한다면 그것들은 "그 수가 모래보다도 더 많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의 사랑과 친절로써 그의 찬송을 말하고 있다. 즉 그것은 성도와 천사들이 그의 사랑과 친절에 대해 고백하는 감사이다. 그의 사랑과 친절을 생각하고 다른 모든 피조물이 드리는 찬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언급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는 얼마나 풍부하게 말하는지 살펴보자.

1.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유래하는 선하심과 그의 자비의 선물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즉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를 세부적으로 언급하며 우리의 개인적 가족적 생명과 경건을 말하고 있다. 각자는 자기가 자비를 얻은 대로 스스로 말해야 한다. 그는 하나님의 관대함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아주 많은 것을 보았다는 것을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 하나님께서 자기 교회에 베푸신 은총 곧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도 말해야 한다. 우리가 누린 자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누린 자비를 인해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송축해야만 한다. 우리는 또한 "이스라엘의 집" 에 베풀어진 것을 우리 자신에게 부여된 것으로 간주하기도 해야 한다.

2. 그는 하나님 안에 있는 선하심에 대하여 언급한다. 하나님께서는 선을 행하시는 분이시다. 왜냐하면 그는 선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을 베푸신 이유가 무엇인지 그 기원을 추적해 보자. 그것은 우리의 공로대로가 아니라 긍휼과 많은 자비를 따라 베푸신 은총이다. 그의 많은 자비를 결코 다함이 없을 만큼 무진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미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귀하게 말해야 한다. 탄원할 때 뿐만 아니라(다윗과 같이, 시 51:1)찬미할 때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영광스럽게 말해야 한다.

Ⅱ. 이스라엘이 한 민족으로 형성된 이래 하나님의 자비로운 조치가 어떠했는지 특별히 언급하고 있다.

1. 하나님께서 그들에 관하여 가진 기대는 그들이 스스로 잘 행동하리라는 것이었다(8절).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그들과 언약을 맺으실 때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라" 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들을 나의 백성으로 간주할 것이며 그들이 거짓을 행치 않는 자녀로 나타나기를 기꺼이 바라노라" (8절). 그들은 하나님과 맺은 계약을 모르는 체하지 않을 것이다. 부러진 화살처럼 비켜나서 그를 떠나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이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출 24:7)라고 말한 것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을 자기의 특별한 백성으로 인정하시면서 "실로 그들은 거짓을 행치 않는 자녀" 라고 말씀하셨다(8절).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신실하고도 공평하게 다루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도 자기에게 신실하고 공정해 주기를 기대하신다. 그들은 "언약의 자녀들" 이다(행 3:25). 또 그들은 여호와께 고착된 자들의 자녀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이 조상들의 변함없는 발자취를 따를 것으로 기대하신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거짓을 행하지 않는 자녀들" 이라는 데 주목하자. 거짓을 행하는 자녀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악마의 자녀인 까닭이다.

2. 하나님께서 이런 기대를 하시면서 베푸신 은총.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애굽의 속박으로부터 건지신 구원이셨다. 그는 광야 상태의 모든 재난에서도 그들을 건지시고 그 뒤에도 적지 않게 구원하셨다. 특히 하나님께서 구원자로서 그들을 위해 행하신 일을 보기로 하자(9절).

(1)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구원을 베푼 것은 "사랑과 긍휼" 에서였다. 그들을 위한 단순한 동정과 애정에서였다. 그것은 그 분이 그들을 필요로 하거나, 그들에 의해 이익을 얻고자 함이 아니었다. 이것은 이상하게도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그들의 모든 환난에서 그가 괴로움을 당하셨다" (한글개혁:환난에 동참하셨다). 이것은 영원하신 마음이 슬퍼할 수 있다거나 하나님의 무한히 복된 고난은 극히 작은 손실이나 피해도 입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환난을 당하실 수가 없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괴로움 속에 처해 있을 때 그들을 위해 사랑과 관심을 쏟기를 기뻐하신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피해를 자신의 피해로 간주하시고 그에 따라 그 가해자와 계산하실 정도로 그들을 동정하신다. 그들의 부르짖음은 그 분의 마음을 움직인다(출 3:2). 그는 그들이 고통 중에서 아파하고 있을 때에 마치 그분 자신이 아픔을 당하고 있는 것처럼 단호히 그들에게 나타나신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 하여 너는 나를 핍박하느냐?"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통 중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커다란 위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고생하고 근심하며 지내도록 하시지 않으신다(애 3:33). 만약 그들이 하나님의 손길 아래서 스스로를 낮춘다면 그는 그들의 환난에 동참하실 것이다. 그것은 마치 자애로운 부모가 심한 수술을 요하는 자식의 병에 동참하는 것과 같다. 원래 이 말은 다음과 같이 읽을 수도 있다. "그들의 모든 환난에는 괴로움이 없었다." 비록 그들이 큰 환난에 처해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을 위해 그 고통을 성별시키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이익으로 전환되고 고통이 경감됨으로써 사실상 아무런 괴로움도 없었다. 고통은 아주 누그러지고 자비로 균형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들은 아주 놀랄 정도로 다시 힘을 얻게 되었으며, 위로를 받게 되었다. 고통은 아주 잠간이었고 끝도 잘 마치었기 때문에 사실상 어떠한 괴로움도 없었다. 성도들의 고통은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비해 아무 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괴로움이 아니라 의약이다. 성도들은 괴로움들을 "잠시 동안만 비치는 빛" 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하늘에 전적으로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그런 괴로움을 하찮게 여긴다.

(2) 그들의 구원에 발탁된 자는 하나님 앞의 사자이다. 혹자는 그를 창조된 천사로 이해한다. 하늘에서 가장 높은 천사, 심지어 하나님 존전 곧 그 영광의 보좌의 천사 앞에서 시중드는 천사라할지라도 이 심부름을 위해 보냄을 받기에는 적합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하늘에서는 소자의 천사들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는" 자들이라 했다(마 18:10).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영원하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즉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언급하신 사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그의 말씀을 따라야만 한다" (출 23:20, 21). 그는 "여호와" 라 불리운다(출 13:21; 14:21, 24). 그분은 언약의 천사이며,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자다(말 3:1). 그는 하나님 앞의 사자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을 표현해" 주기 때문이다(히 1:3). 하나님의 영광은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비친다. 영원한 구원을 이루실 분은 그 증거와 징표로써 현세적 구원을 이루셨다.

(3) 이 은총의 발전과 인내. 그는 그들을 속박으로부터 구원했을 뿐만 아니라, "옛적 모든 날에 드시며 안으셨다." 그들은 연약했지만 그는 그들을 자기 권능으로 지지했고 관대함으로 그들을 떠받쳐 주었다. 그들이 중한 짐으로 막 가라 앉게 됐을 때, 그는 그들을 드셨다. 그들이 열국과 전쟁을 할 때도 그는 그들을 편에 서셨고 후원해 주셨다. 그들이 투정꾼이었지만 그는 그들과 함께 해주었으며 "그들의 소행을 참으셨다" (행 13:18). 비록 그들은 누구의 팔이든 피곤케 했지만 그는 마치 아버지가 자녀를 돌보듯 그들을 안으셨다. 그는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새끼를 날개 아래 주듯이 그들을 데리고 다니셨다(신 32:11). 그가 그들에게서 고통을 받으신 것은 오랜 동안이었다. 말하자면 "옛적 모든 날" 이었다(10절). 그들에 대한 그분의 관심은 그들이 성장해서 가나안에 정착될 때까지 끊이지 않았다. 이런 모든 것은 "그의 사랑과 긍휼에서" 나온 것이며 그의 자비와 선한 의지로부터 유래하였다(9절). 그는 그의 말대로 그들을 사랑하시려 원하셨기에 그들을 기뻐하시고 택하셨다(신 7:7, 8).

3. 그에게 대한 그들의 불성실한 행동과 그로써 자초한 고통(10절). "그러나 그들은 반역했다" (10절). 모든 것들은 아주 희망에 차있고 전도가 유망한 것같이 보였다. 그들이 하나님께 신실한 자녀로 계속 남아 있었다면 하나님도 그들의 자애로운 아버지 역할을 계속하셨을 것이었다. 그러나 쌍방에게는 슬픈 변화가 일어나며 언약을 어긴 것은 그들이었다.

(1) 그들은 하나님께 반역하고 그에게 대항하여 무기를 들었다. "그들은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다." 금송아지 숭배의 죄 외에 불신앙과 불평으로 성신을 근심케 했다. 그리고 이것은 그 뒤로 그들의 버릇과 습성이 되었다. 그는 그들이 거짓을 행하지 않는 자녀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들을 위해 그토록 많은 일을 하셨으며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지만 그들은 우매무지한 백성처럼 그에게 이처럼 악하게 보답하였다(신 32:6). 이것은 그를 슬프게 했다(시 95:10). 하나님의 자녀들의 배은망덕과 반역은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것이다.

(2) 그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그들의 보호를 취소하실 뿐만 아니라 마치 군주가 반역자들에게 응징하듯 그들을 치셨다. 그토록 우호적이셨던 그분께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다" (10절). 광야에서나 가나안 땅의 정착 후에도 잇달은 심판으로 그들을 치셨다. 죄의 악성과 해독을 보라. 죄는 하나님이 위해서 좋은 친구의 역할을 해왔던 사람들까지도 원수가 되도록 만든다. 죄는 사랑과 긍휼이 충만하신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만든다. 죄인들의 어리석음을 보라. 그들은 가장 바람직한 친구를 기꺼이 버리고 그를 가장 무서운 원수로 만든다. 이것은 특히 나중 우상 숭배와 기타 죄악으로 자초한 바벨론 포수라는 재난을 시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대적이 되셨다는 것은 그들의 환난을 크게 악화시키는 것이었고 원초적 환난이기도 했다.

4. 여기에는 특별한 회고가 나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처음 이스라엘을 민족으로 형성시키셨을 때 그들에게 베푸신 일의 회상이다(11절).

(1) 이것은 백성의 회상 또는 하나님의 회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1] 먼저 우리는 백성들 편에서 그것을 이해해 보자. 그때 이스라엘은 "옛적 모든 날들을 기억했다" (11절). 이스라엘은 성서를 보고 하나님이 애굽으로부터 그들의 조상들을 이끌러 낸 기사를 읽었다. 그들은 마치 기드온이 생각했던 것처럼(삿 6:13) 그렇게 추론했다. "우리 열조가 우리에게 말한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애굽으로부터 그들을 건지신 분은 누구인가? 바로 그분께서 우리를 바벨론으로부터 건질 수 있지 않는가? 엘리야의 여호와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우리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그들은 이와 같은 물음을 회개와 하나님께로 돌아서게 하는 권유와 격려로 생각한다. 그들의 조상들은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백성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용서하시는 분이심을 알았다. 그러므로 만약 그들도 하나님께로 돌아선다면 어찌 용서를 얻지 못하겠는가? 그들은 포로 상태를 환원시키기 위한 기도에서 그것을 하나님께 대한 탄원으로써 이용한다(51:9, 10). 현재의 상태가 어둡고 구름이 낄 때 "옛적 모든 날들" 에 대해서 기억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나님의 권능과 선하심에 대한 우리 자신의 경험과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모으고 그것들을 이용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또 "지존자의 오른 손의 해" (시 77:5, 10)에 대해 괴고해 본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또한 그는 하나님이시며 변치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2]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 편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옛적의 모든 날들에 대해 기억하신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과 맺은 계약을 기억하시는 것이다(레 26:42).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을 바다에서 올라오게 한 자는 지금 어디 계시뇨?" 바로 그분 자신이 물을 헤쳐 오도록 하며,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내가 현재보다 더 가치가 없고 벌을 받아 마땅한 그들의 조상들에게도 나타났는데 어찌하여 지금 이들에게는 나타나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자비가 얼마나 멀리 미치며 얼마나 멀리 회고하는지 보라. 그의 백성들에게서 선을 행하는 것을 본다는 것은 얼마나 막막한가를 보라. 현재의 생각으로는 그들을 반대할 것 외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아니 그 반대로 그의 자비는 그들을 영영 버릴 수 있는 이유를 그들을 구원할 이유로 바꾸어 버린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수도 있었다. "나는 이전에 그들을 건져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그들 스스로 고통을 자초했다(잠 19:19). 그러므로 나는 그들을 더 이상 구원하지 않을것이다" (삿 10:13). 그러나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으셨다. 자비가 심판을 이기고 기뻐한다. 그래서 그 심판을 다른 길로 변화시킨다. "나는 이전에 그들을 구원했고, 따라서 앞으로도 구원할 것이다."

(2) 하나님께 탄원하는 백성의 말로 해석하든 하나님 자신의 변론으로 해석하든 상세하게 살펴보면 이것은 포로기의 자녀들이 금식일에 행한 기도나 고백과 무척 상통하는 데가 많다(느 9:5 이하). 이 금식의 날 기도문은 모세와 그의 백성들을 상기시키는 구절의 강해에 도움이 된다. 다시 말해서 이 양자가 언급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자기 백성에게 행하신 일 특히 홍해를 건너 인도해 내신 일이다. 여기서 아주 강조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것이다. 그것은 그가 크게 자랑한 일이었고 그의 백성이 기억하고 특별히 용기를 얻은 일이기도 하다.

[1]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오른 손을 통해 그들을 인도했다" (12절). 그의 손에는 기적을 행하는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주의 백성들을 우리 양같이 모세의 손으로 인도하셨도다" (시 77:20). 그들을 인도한 것은 모세가 아니었다. 또한 그들을 먹인 것도 모세가 아니었다(요 6:32). 오직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했을 뿐이다. 그러나 모세에게 자격을 부여하신 자는 그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불러 이 큰 임무를 나쁘기시고 도왔다. 형통하게 하신 분도 그였다. 여기서 모세는 "양 무리의 목자" 라고 호칭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양의 주인이었으며, 이스라엘의 목자장이었다(시 80:1). 모세는 그 아래있는 목자였다. 모세는 노력과 인내로 단련을 받았다. 모세는 "그의 장인 이드로의 양을 지키는데" 훈련을 잘 받았기 때문에 그는 양을 돌보는데 적합한 목자가 되었다. 이 점에서 그는 "양을 위해 생명을 다 받치는"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었다. 그러나 비록 모세가 자기 백성들을 위해 큰 일을 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행하신 일은 모세 이사이었다.

[2] 하나님께서는 성신을 그에게 두시고 "성신은 그들 가운데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섭리 뿐만 아니라 은혜로도 그들을 위해 역사하셨다. "주께서는 주의 선한 신을 주사 그들을 가르치셨다" (느 9:20). 예언의 영뿐만 아니라 지혜와 용기의 영도 모세에게 부어 주어 부름받은 일에 적합하게 하셨다. 그의 영 중 일부는 칠십 명의 장로들에게도 임했다(민 11:16). 이스라엘에게 영감받은 책뿐만 아니라 영감받은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은 커다란 축복이었다.

[3]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무사하게 홍해 바다를 건너게 하시고 바로의 손에서 그들을 구하셨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그들 앞에서 물을 갈라지게 하셨다" (12절). 그래서 홍해 바다는 그들을 통행시켰을 뿐만 아니라 보호를 해주었고, 그들에게 길을 만들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양쪽으로 벽을 세워 주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말이 광야 또는 평지에서 행함과 같이 그들을 깊음으로 인도하셨다" (13절). 그들과 그들의 아내들과 자식들은 모두 잠을 든 채 바다의 밑을 편리하고 쉽게 통과했다. 비록 바다 밑은 질퍽거리고 돌이 많았더라도 말이 평평한 땅을 따라 가듯이 그들은 쉽게 통과했던 것이다. 비록 그 길은 아무도 밟지 않은 길이었지만, 그들은 실족하지 않았다. 그 길은 다른 어떤 사람들도 걸어 보지 않은 길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신다면 그는 그 길을 평탄하고 안전하게 만들어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길을 열어 주실 것이며 인도하실 것이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완성시키기 위하여 그들을 바다에서 올라오게 할 것이다" (11절). 비록 그 오르막길이 매우 가파르고 더럽고, 미끄러지고 정복할 수 없을지라도(여자들과 자녀들 그리고 남자들이 매우 많은 짐을 지고 피곤했다니 것을 고려하며, 출 12:34), 하나님께서는 그의 권능으로 그들을 질퍽한 땅에서 올라오게 하셨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일종의 부활과 같았다. 그것은 "죽음으로부터 올라오는 삶" 이었다.



[4]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안전하게 편안한 곳으로 인도했다. "여호와의 신이 그들로 골짜기로 내려가 편히 쉬는 가축처럼 조심스럽게 그리고 점차적으로 그들을 편히 쉬게 하셨다(14절). 광야의 행진에서 그들은 모세가 여호와의 신의 지시에 따라 안식처를 제공해 주는 일을 여러 번 경험하였다(11절). 그리고 드디어 그들은 가나안에서 쉬게 되었다. 여호와의 신은 약속대로 그들에게 안식을 주셨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와 그분 안에서 휴식하게 되는 것은 바로 여호와의 영에 의해서다.

[5]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자신의 권능으로 그리고 자기 자신의 찬양을 위하여 하셨다.

첫째,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권능으로 된 일이다. 그는 자연의 하나님이시며 자연을 자기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의 보유자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영광의 팔로써 행하셨다. 그 팔은 "용감하고 힘센 팔이었다" (영광의 팔이란 말은 원래 그런 뜻이다). 그것을 행한 것은 모세의 지팡이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팔이었다.

둘째, 그렇게 행하신 것은 그분 자신의 찬양을 위해서다. 즉 "그 이름을 영영케 하기 위해서다" (12절). 오직 "영광스러운 이름을 위해서인 것이다" (14절). 그분은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영원히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의 팔로써 세상에 하고 있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만들고 있으며 이것은 영원토록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이 땅의 위대한 인물들 중에 가장 유명한 이름들일지라도 티끌 속에 기록될 것이다.

 

63:8 없음.

 

63:9 없음.

 

63:10 없음.

 

63:11 없음.

 

63:12 없음.

 

63:13 없음.

 

63:14 없음.

 

63:15

간절한 기도 (이사야 63:15-19)

앞에 나오는 찬양들은 이 기도에 대한 서론으로써 의도되었다. 이것은 다음 장의 끝까지 계속된다. 이것은 사랑에 넘치며 끈질기게 졸라대는 간청의 기도다. 이 시기는 포로 시대에 추정되었다. 그들에게는 약속이 있었듯 기도도 있었다. 그들은 궁핍한 때에 대비하여 준비를 했다. 그들은 여호와께 돌아옴으로써 말씀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분 자신은 그들이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가르치셨다. 즉 하나님 자신이 쓰신 말씀을 가르쳤다. 일부 훌륭한 해석자들은 이 기도가 더욱 먼 장래를 겨냥한 것으로 하나님의 최종적 배척한 받고 로마인에게 멸망된 유대인들의 호소를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복음의 은혜에 적용된 구절이 한 나오며(사 64:4) 그 복음의 은혜는 배척당한 자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2:9). 이 구절들 속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살펴 볼 수 있다.

Ⅰ. 그들은 하나님께서 탄원을 한다.

1.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처지와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사모를 인식하시도록 탄원하고 있다. "하늘에서 굽어 살피소서" (15절). 그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보신다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보신다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주시하도록 기도하였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어 은혜를 베푸시고 동정과 관심의 시선으로 보시도록 간청한다. 하나님께서 애굽에 있는 자기 백성들의 고통을 보셨을 때 즉시 구원하려고 하셨듯이 이제 자기들을 살피시라는 간청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자기들을 굽어보시기만 하라고 간청하지만 사실상 이것은 그들의 대적에게 대한 심판을 호소하는 것이며, 기도하는 것이다. 이제 저희가 우리에게 갚는 것을 보옵소서. 우리 하나님이시여 어찌하여 저희를 징벌하지 않나이까(대하 20:11, 12). 그들은 자기들의 구원에 대해 암암리에 하나님의 자비와 지혜를 신뢰하고 있다(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소서. 시 25:18).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 (15절).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바로 그의 영광이다. 하늘은 그의 거주지이며 그의 영광의 보좌이다.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자기 영광을 나타내시며 거기서 이 땅을 내려다 보신다고 한다(시 33:14). 그의 거룩하심은 거기서 특별한 방식으로 복된 천사에게 축하를 받는다(6:3; 계 4:8). 거룩한 자들은 거기서 그에게 시중들고 끊임없이 그 주위에 서 있다. 그러므로 그곳은 "그의 거룩한 처소" 인 것이다(15절). 하나님께서 거룩한 곳에 사신다는 것은 그가 거룩하듯 거룩해지려고 염원하는 모든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격려가 된다.

2.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구원을 위하여 어떤 방침을 취하시도록 간청한다. "돌아오시옵소서. 당신의 길을 바꾸셔서 우리를 향하소서. 당신께서는 우리와 더 이상 다투지 마옵소서. 자비로 돌아오소서. 우리를 향한 은혜의 시선뿐만 아니라, 당신의 은총을 우리에게 나타내소서" (17절).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떠나시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돌아오는 것을 무엇보다도 좋아한다.

Ⅱ.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불평은 다음 두 가지가 있다.

1.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 스스로 버려 두시며 은혜로써 자기들을 회복시키지 않으신다고 불평한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의 마음을 강퍅케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17절)라고 불평할 이유를 가진다. 후자는 이 말을 그들 중의 불경건한 자들이 한 말로 이해한다. 선지자들이 그들의 잘못된 길과 강퍅한 마음과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멸시를 책망했을 때 그들은 대담하고 뻔뻔스럽게 자기들의 죄를 하나님께 뒤집어 씌우며 하나님을 죄의 창조자로 만들고는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롬 9:19)라고 반문했다. 자기들의 사악함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은 정말로 악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그러나 나는 이것을 백성들의 불신앙과 불회개를 한탄하는 자의 말로 해석하고 싶다. 그들은 자기들의 사악함의 저작자를 하나님이라고 배반한 것이 아니라 그 사악함을 하나님께 호소한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길에서 떠났고" 마음은 강퍅해져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게 되었으며 따라서 마음의 감동도 받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시인하고 있다. 이것은 그들의 모든 탈선의 원인이었다. 주를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예배를 의미할 수도 있다. 짝할 이 없을 만큼 크고 선하신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마음은 참으로 강퍅한 마음이다. 그들이 여기서 큰 불행과 무거운 부담으로 불평하고 있는 일은 곧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죄 중에 버려두시며 주의 길을 떠나도록 허용하시고 그의 은혜를 거두어 들이심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강퍅케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들이 "어찌하여 주께서 이렇게 하셨나이까?" 하고 묻는 것은 잘못을 추궁하는 것이 아니라 쓰라린 심판을 한탄하며 울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슬프게 했고 괴롭혔고 억눌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기 영을 그들에게서 감추심으로써 그리고 정당한 판결과 섭리로써 그들을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고 그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다(10절). "가서 이 백성들의 마음을 둔하게 하라" (6:9, 10). 이것은 하나님을 떠났을 때의 슬픈 처지를 입증해 준다. 다윗은 자기의 추방에 대하여 불평을 한다. 왜냐하면 사실상 그는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도록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삼상 26:19). 많은 사람들이 고통으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고 또한 고통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방해하였다. "악인의 권세가 의인의 업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의인으로 하여금 죄악에 손을 대지 않게 한다(시 125:3). 이것이 그들의 불평이었다. 괴로움은 그들에게 시험이 되었으며 대개는 극복할 수 없는 시험이었다. 자각하는 양심이라면 많은 영적 심판들을 호소하며,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의무로부터 이탈하게 하는 괴로움을 두려워한다는 데 주목하자.

2. 그들은 원수들에게 정복을 당했으나 하나님의 섭리는 그들을 보호해 주지도 않았으며, 구원해 주지도 않으셨다. "우리의 대적이 주의 성소를 유린하였나이다" (18절). 포로 시대에 그들 중 대부분이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싶은 마음을 잃어버렸었고 그들의 마음이 환난 때문에 더 강퍅해졌던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슬픔이었다. 마찬가지로 그들이 엄숙한 회중 속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기회가 상실되었다는 것은 더욱 더 큰 슬픔이었다. 그들은 대적이 자기들의 집과 성을 유린한 것을 불평하기보다 하나님의 성소를 짓밟는 자들에 대하여 비판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일로 인해 직접 모욕을 당하신 때문이다. 더욱이 그들은 극히 귀중히 여기고 극히 즐거워하던 위로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Ⅲ. 자비와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촉구하던 그들의 탄원.

1.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보여 주셨던 긍휼과 능력과 자진성을 이제도 보여달라고 탄원했다(15절). 기도에 있어서 가장 설득력 있는 논증은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취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행동이 이제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의 영광과 자기 백성들의 위로를 위해 열성을 가지고 계신다. 그의 이름은 질투한다는 뜻이다. 그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분 자신의 영광과 자기 백성들의 이익을 확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지금 이것들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들은 지금 나타나지 않는가? 무한히 현명하고 공정하신 하나님의 열성이 식어질 리기 없으며, 무한한 하나님의 힘이 약화될 리가 없다. 아니, 그의 백성들은 "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행동을 경험했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간곡한 긍휼을 경험했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리워했으며, 그것은 사람들이라면 마음속에서 동요와 흥분을 자아낼 정도의 동정심이었다. "나의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하도다" (호 11:8). "그를 위하여 내 마음이 측은한즉 내가 반드시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렘 31:20).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향하여 사랑을 베푸시며 그들을 위해 많은 자비를 나타내곤 했다. 그러나 지금 그런 사랑과 자비는 어디 있는가?"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진노하심으로 막아졌는가" (시 77:9) 과거에는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으로 자주 기억되었는데, 이제는 은혜 베푸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잊어버렸다는 말인가? "하나님께서는 노여움으로 인해 그의 온유하신 자비를 닫아버렸다는 말인가?" 그것은 결코 그럴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전에 베풀어주신 자비를 근거로 자비의 계속적 시여를 기대할 수 있다.

2.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자기들의 아버지라고 하면서 탄원했다(16절). "당신의 온유하신 자비는 억제되지 않사오니 그것은 아버지의 부드러운 자비인 까닭입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잠시 동안 그의 자녀를 노여워하실지 모르나 천륜의 애정의 힘을 통하여 곧 화해를 받으실 것입니다. 의심할 바 없이 주는 우리 아버지, 즉 당신의 긍휼은 우리를 향해 그리워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이런 훌륭한 생각들을 항상 간직해야만 한다. "아무리 무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이다. 그들은 만약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아버지가 아니라면 스스로 고아가 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분에게 투신하여 마침내는 "고아가 주께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는다" (호 14:3).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가진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영광이었다(마 3:9).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였으며,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왕자였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하나님을 친아버지로 모시지 않았다면 어쩔 뻔했는가?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은 우리를 도울 수 없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가지시는 능력을 가지지 못했다. 그들은 죽은 지 오래다. 그들은 우리를 모르고, 우리를 알아보지도 못한다.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은 우리의 처지가 어떠한지를 모르며,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친절을 베풀려고 하더라도 그 방법을 알지 못한다. 만약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이 우리와 같이 살아 있다면 우리를 변호해 주고 충고해 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다른 세계로 가버렸다. 그러나 그들은 이 세계와 어떤 교통을 하고 있는 것 같지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자손으로 불리우는 영광밖에 어떤 친절도 얻을 수가 없다. 그 아버지가 죽으면 "그의 아들이 영광으로 오고 있으나, 그는 그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욥 14:21).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16절). 우리의 육의 아버지들은 "영원토록 사랑할" 것 같지만 그들은 영원토록 사랑하지 못한다. 오직 죽지 않으시는 분은 하나님뿐이시다. 그분은 우리를 항상 알고 계시며 우리에게서부터 먼 거리에 있지 않으시고 항상 가까이 계신다. 그러므로 "상고로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고 하였다" (16절). 그것은 옛날부터 우리에게 알려졌던 이름이다. 백성들은 항상 그를 하나님으로 생각했다. 그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슬픔을 제거해 주실 것이며 그들의 목적을 이루어 주실 것이다. 아니,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이 도울 수 없고 돕지도 않을 것이나, 하나님께서는 도와 주실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가지신 긍휼을 가지지 못했다. 우리는 아주 타락하고 부패했기 때문에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은 우리를 그들의 자녀라고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로 나아간다.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 이스라엘을 버렸다. 야곱은 그의 아들 르우벤에게서 상속권을 박탈했고, 시몬과 레위를 저주했다. 그러나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시지 인간이 아니시다" (호 11:9).

3.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주, 즉 그들의 소유자이었으며, 경영자였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에게 있는 하나님의 이권을 들어 간청했다. "우리는 당신의 종들입니다. 당신께서는 우리가 섬기는 일에 대해 권리를 갖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방 왕들이나 이방신들을 섬겨서는 안 됩니다. 그런 즉 당신의 종들을 위하사 돌아오시옵소서" (17절). 마치 한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구원하고 보호하는 것이 종을 구원하고 보호하는 것이 명예상 자기 도리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가장 고귀한 사랑은 물론 가장 튼튼한 약속으로써도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께서는 우리의 지배를 담당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당신 자신의 이익을 주장하시고 당신 자신의 권리를 유지하소서. 이는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당신 말고 어디로 가서 시정되고 보호를 받으오리까? 우리는 주의 것이오니 우리를 구원하소서(시 119:94). 우리는 당신 자신의 것입니다. 우리를 인정하소서. 우리는 주의 산업인 지파들 입니다. 우리는 주의 종들이 아니라 주의 소작인 들입니다. 우리는 당신의 것이므로 당신을 위해 일할 뿐만 아니라, 당신에게 세도 지불합니다. 이 산업은 하나님이 하계에서 받는 조그만 찬송과 예배가 나오는 곳입니다. 그런데 주께서는 당신의 종이자 소작인인 이스라엘을 이렇게 능욕받게 하시렵니까?"

4. 그들은 약속의 땅의 즐거움과 성소의 특권을 잠시 동안밖에 향유하지 못했다는 것을 호소했다. "주의 거룩한 백성들이 이 땅을 차지한 지 오래되지 아니하여서" (18절)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에 이르기까지 단지 열 네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네대 뿐이었다(마 1:17). 그것은 "가나안 땅을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한다" 는 약속과 비교해 볼 때, 단지 잠깐에 지나지 않았다(창 17:8). 또한 그들을 그 땅으로 인도하고 정착시키기 위해 나타난 권능과 비교해 볼 때, 더욱 그렇다. "비록 우리가 다른 민족과 구별되어 주께 바쳐진 주의 거룩한 백성들이지만 우리들은 곧 있을 곳이 없어지나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을 자기들 탓으로 돌려야 했다. 그들은 "주의 거룩한 백성들" 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 땅의 소유권을 잃게 된 것은 바로 그들의 사악함 때문이었던 것이다.

5. 그들의 땅을 차지하고 소유하게 된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 영광도 예배도 드리지 않은 자들이라는 것을 그들은 탄원했다. "주께서는 그들을 결코 다스리지 않으셨으며, 또한 그들은 주께 어떤 순종도 하지 않으셨나이다.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칭함을 받지 못하는 자였나이다" (19절). 그들은 다른 신들에게 신앙을 고백하고 그 신들을 섬기는 자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와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관계있는 자들에게 이렇게 행하도록 그냥 내버려두실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우리는 주께서 영원히 다스리지 않아 주의 이름으로 칭함을 받지 못하는 자들이 되었도다(19절)." 우리는 거절당했고, 포기되었고, 멸시를 당했고, 짓밟힘을 당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주께 예배를 드리지 않았고, 우리에게 일컬어진 주의 이름을 가지지 못한 것처럼 짓밟힘을 당한 것이다. 이와 같이 "사울의 방패도 마치 그가 기를 부음을 받지 않았던 것처럼 헛되이 배척을 당했다. "그러나 잊혀졌던 것처럼 보였던 언약은 장차 다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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