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이사야 2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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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1

책망받는 에브라임 (이사야 28:1-8)

여기에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이사야 예언자는 열 지파 왕국(북 왕국)에게 그들의 죄로 인해 그들에게 임할 심판을 경고하고 있다. 그 심판은 그 직후에 앗수르 왕에 의해 시행되었다. 앗수르 왕은 그들의 땅을 황무케 했고, 그 백성들을 포로로 잡혀갔던 것이다. 에브라임은 그 토양이 매우 비옥하고, 그 소산은 가장 좋은 것들이 풍성했기 때문에 "결실이 많음" 이라는 뜻으로 그런 이름이 붙었다. 그들에게는 "기름진 골짜기" 가 매우 많이 있었다(1, 4절).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사마리아는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 에 있었다. 그들의 나라는 부유하고 아름다웠으며, 여호와의 동산과도 같았다. 그것은 온 땅의 영광이었음과 동시에 가나안의 영광이었다. 그들의 수확과 소출은 곡식과 포도로 가득 덮인 그 골짜기 꼭대기에 있는 "영화로운 관" 이었다.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그들은 그들의 풍요함을 얼마나 악용했는가? 하나님께서 그를 섬기도록 하기 위해 그들에게 주신 것을 그들은 그들의 정욕에 대한 양식과 연료로 악용하고 남용했다.

(1) 그들은 그것으로 인하여 교만하게 우쭐거렸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세월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주신 자비 - 그들은 이것 때문에 마땅히 하나님께 찬미의 면류관이 되어야 했다 - 가 그들에게 "교만한 면류관" 이 되었다. 이 세상에 사는 부한 자들은 마음을 높이기 쉽다(딤전 6:17). 그 면류관을 쓴 그들의 왕은 자기가 그처럼 부한 나라를 다스린다는 사실을 자랑했다. 그들의 왕성 사마리아는 교만으로 유명했다. 아마도 그들의 축제나 주연을 베풀 때, 그들의 비옥한 나라를 축하하여 꽃과 낟알로 만든 화관을 쓰는 것이 관례였을 것이다.

교만은 보편적으로 그들 가운데 만연된 죄였다. 그러므로 그 예언자는 교만한 자를 대항하시는 그분의 이름으로 담대하게 "교만한 면류관에게 화" 를 선언하고 있다. 면류관을 쓴 자들이 그것 때문에 교만해졌다면, 그들로 하여금 이 화를 피하려는 생각을 갖지 말게 하자. 이처럼 스스로를 높이는 자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낮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교만은 그들의 멸망의 서문이다.



(2) 그들은 관능에 탐닉했다. 에브라임은 술취함과 방탕으로 유명했다. 사마리아, 그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는 "술에 빠진" 자들(난외에 있는대로) 곧 "술로 쇠잔해진" 자들이 가득했다. 술취한 자들은 얼마나 어리석게 행하는가를 보라. 그들은 그런 죄를 범함으로써 그들이 스스로를 바보와 짐승으로 만드는 동시에,

[1] 그 죄에 정복되고 만다는 사실은 놀랄 일이 아니다. 죄가 그들을 이긴다. 그들은 "그 종이 된다" (벧후 2:19). 그들은 죄에게 포로로 잡힌다. 그리고 그 사로잡힘은 자발적인 것이기 때문에, 더욱 수치스럽고 불명예스럽다. 이 비참한 노예 중의 어떤 자들은 폭음(暴飮)보다 더 큰 고역이 이 세상에는 없다는 것을 스스로 시인했다. 그들은 술에 의해서가 아니라 술에 대한 사랑 때문에 정복된다.

[2] 결국 그 죄로 파멸된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들의 체질은 그 죄로 인해 상하고, 건강이 파괴된다. 그들은 직업과 가산에 치명타를 스스로 가하며, 그 가족들은 그것으로 인해 망하게 된다. 하나님과의 화목도 깨어지며, 그들의 영혼은 영원히 멸망할 위험 속에 있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야비한 정욕을 만족시키려 한 때문이다. "에브라임의 취한 자" 에게 화 있을진저!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말씀 속의 일반적인 재앙을 구체적 장소와 사람에게 전해야 한다. 우리는 "술취한 자에게는 화 있을진저" 하고 말해야 한다. 그들의 상태는 재앙을 받을 만한 상태이다. 그들의 육욕적인 즐거움은 부러움의 대사잉 아니라, 동정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고전 6:10). 이 저주는 그들에게 시행된다(신 29:19, 20). 아니 우리는 더 나아가 그들이 듣고 두려워하도록 하기 위해 "이러한 곳의 술취한 자에게 화 있을진저" 라고 말해야 한다. 또한 술취한 자를 보면, "그 사람에게 화 있을진저" 하고 말해야 한다.

에브라임의 술취한 자에게 특별한 화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고백하는 백성들이며,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바로 그들이 술취하면 더욱 나쁜 것이 된다. 그들은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더 훌륭한 본을 보여야 한다.

혹자는 "교만한 면류관은" 술취한 자가 가지고 있는 면류관이요, 그것은 술마시기를 하는 사악한 시합에서 승리를 얻은 자에게 씌워주는 화관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술마시는 데에 강한 것을 자랑한다. 그러나 이처럼 수치스러운 것을 영예롭게 여기는 자들에게 화 있으리로다.

2. 그들이 이처럼 남용한 풍성함을 그들에게서 빼앗는 하나님의 공의를 보자. 그들의 "영화로운 관" 곧 그들이 자랑하던 그 풍성함은 "쇠잔해 가는 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소멸하는 음식이다. 가장 실속있는 과일들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시들어 버리게 하시면 쇠잔해가는 꽃에 지나지 않는다(1절). 하나님은 쉽사리 "그(한창) 시절에도 그들이 곡식을 도로 찾아가실 수 있으며(호 2:9), locum vastatum - 즉 소홀히 여겨져 황무케 된 땅, 곧 그들이 바알을 위해 마련해 둔 그의 재물들을 도로 찾아가실 수 있다. 하나님은 자기를 대신하여 차압해 줄 준비를 갖추고 있는 일군을 데리고 있다. 그 과업을 행할 능력이 있는 "강하고 힘있는 자" 곧 "손으로 그 면류관을 땅에 던질" 앗수르 왕을 마음대로 지휘하신다. 따라서 그는 그들이 자랑하고 기뻐하던 모든 것을 쉽고도 효과적으로 멸하실 것이다(2절). 그는 그것을 강한 손으로, 그들이 대항할 수 없는 손으로 땅에 던져 조각나게 하실 것이다. 그 때에 그 "교만한 면류관" 과 "에브라임의 취한 자가 발에 밟힐 것이다" (3절). 그들은 멸시를 받게 될 것이고, 스스로를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이다. 술취한 자는 어리석게도 교만하게 말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들이 스스로를 가장 부끄럽게 여겨야 할 때에도 가장 허풍을 떠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 자신을 더욱 우스꽝스럽게 만든다. 그들이 자랑하던 그 골짜기의 아름다움은

(1) "쇠잔해 가는 꽃" 같이(1절에서 처럼) 될 것이다. 그것은 저절로 시들 것이다. 그 내부에 그것을 부패케 하는 원리가 들어 있다. 그것은 그 자체의 좀과 녹 때문에, 조만간에 멸할 것이다.

(2) "처음 익은 무화과" 같을 거시다. 발견되자 마자 사람이 따서 먹는다. 이 세상 재물도 저절로 썩기 쉬우며, 간절히 바라던 처음 익은 열매처럼 다른 사람들이 황급히 먹어 버리기 쉽다(미 7:1).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한다" (마 6:19). 속물들이 자랑하던 그 수확물을 "주린 자가 먹는다" (욥 5:5). 그들은 먹이를 보자마자 움켜쥐며 손에 닿는 모든 것을 삼켜 버린다. 그것은 또한 채 자라기도 전에 익었기 때문에, 매우 작고 또 쉽게 먹어치울 수 있는 실파처럼 쉽게 먹히운다. 그리고 남겨둘 가치가 거의 없기 때문에 즉시 사용해 버린다.

Ⅱ. 이사야는 그 다음에 유다 왕국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다. 그는 유다 왕국을 "그 남은 백성" 이라 부르고 있는데(4절), 그 이유는 그것이 다른 열 지파에 대해 두 지파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1. 이사야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약속하고 있으며, 에브라임의 아름다움이 짓밟힘을 당하고 먹히우게 될 때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받게 되리라고 약속하고 있다(5, 6절). "그 날에," 즉 앗수르 군대가 이스라엘을 황무케 하고, 유다는 그 이웃집에 불이 낚으니 그들의 집도 위험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그 날에, 짓밟힘을 당하고 혼란스러운 그 날에, 하나님은 그의 남은 백성에게 그들이 필요로 하고 바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실 것이다. 유다 왕국뿐만 아니라, 자기들의 정직을 지킨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그러할 것이요, 선한 왕 히스기야의 보호를 받기 위해 유다 땅으로 도망한 일부 사람들에게도 역시 그러할 것이다. 막강한 왕 앗수르 왕이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쏟아지는 우박같이" 소란스럽게 괴로운 존재요, "파괴하는 광풍같이" 그 앞에 있는 모든 것 - 특히 바다에서는 더하다 - 을 뒤엎으며, "큰 물의 창일함 같이" 그 나라를 "압도한다" (2절). 그 때, "그 날에, 꾸준하게 단독적으로 하나님을 따름으로써 자기 자신들을 구별한 그의 백성을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특유한 은총으로써 구별하실 것이며, 그들에게 가장 필요로 하는 자가 친히 되어 주실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친히 모든 것을 풍족히 해 주시는 하나님이 되실 것을 언약하시면서, 직접 그들이 하나님께 바랄 수 있는 모든 것이 도어 주실 것을 보증하신 그 약속의 가치를 매우 크게 해 주고 있다.

(1) 하나님은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덕망과 존귀를 부여하시어, 그들을 멸시받지 않도록 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존경과 명성을 얻게 하실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시며, 아름다운 화관" 이 되실 것이다. 교만의 면류관을 쓴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경멸할 것이며, 짓밟을 것이다. 왜냐하면 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은 그들을 하찮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서 그들을 편드는 자로 나타나시사, 그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입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그들에게 영화로운 면류관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기 것으로 인정하신다는 것보다 사람에게 더 큰 영광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하나님은 은혜를 가지고 그들 가운데 나타나심으로써,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새롭게 입었다는 것을 명백하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저들에게 아름다운 화관이 될것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성결함이 주는 아름다움보다 더 큰 아름다움이 어디 ?겠는가?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있는 자들에게는 그분이 저들의 영화로운 면류관과 아름다운 화관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 있어서 왕과 제사장이 되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은 그들에게 자기들의 직무를 잘 수행하는 데에 필요한 모든 지혜와 은혜를 주실 것이다. 그는 "재판석에 앉은 자들에게는" 친히 "판결하는 신이 되어 주실" 것이다. 고문관들은 지혜와 분별력의 지도를 받게 되고, 재판관은 정의와 공평으로 다스림을 받을 것이다. 권세의 자리와 공직에 부름받은 자들이 그 직책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고 있고, 재판석에 앉은 자가 판결의 영, 곧 통치의 영을 지닌 자라면, 그것은 그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큰 긍휼이다.

(3) 하나님은 그들이 만날 수 있는 어려움과 방해를 단호히 물리칠 수 있는 온갖 용기와 대담성을 그들에게 주실 것이다. 그는 "성문에서," 곧 그들이 포위하고 있는 대적의 성문에서 또는 그들이 자기들을 포위한 대적을 쳐나갈 때 그들 쪽의 성문에서, "싸움을 물리치는 자에게는 힘" 이 되실 것이다. 군대의 힘은 재판장의 지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크게 좌우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런 두 가지를 주시는 그 백성에게는 친히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어 주실 것이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도 좋다. 갈대아 의역본도 그것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그 날에 메시야가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실 것이다." 시므온은 그리스도를 그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불렀다. 또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있어서도 지혜와 의와 힘이신 하나님이 되신다.

2. 이사야는 그들 중에서 발견된 부패함을, 그리고 많은 타락한 사람들을 한탄하고 있다. "이 유다 사람들도," 곧 유다의 많은 사람들도 "포도주로 인하여 옆 걸음을 치도다(7절)." 에브라임뿐만 아니라 유다에게도 술 취한 자가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에브라임에게 행하셨던 것처럼 유다의 영광도 시들게 하지 않으신 그 긍휼은 더욱 더 경탄되어야 한다. 용서의 긍휼이 이처럼 두드러질 때는 우리에게 독특한 의무가 부과된다. 에브라임이 범한 죄가 유다에서도 발견되었다. 그러나 에브라임이 당한 멸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들이 포도주로 인하여 옆걸음 친다." 그들의 과음은 그 자체로 실제적인 과오이다. 그들은 그것으로써 환상(fancy)을 얻으려 하나, 과음은 오히려 그들의 판단을 그르쳐서 그들 자신을 속게 한다. 그들은 그것으로써 건강을 보존하고 소화를 도우려 하나 그것은 그들의 건강을 빼앗고 질병과 죽음을 재촉한다. 그것은 또한 원칙적인 면에 있어서도 매우 많은 과오를 야기시킨다. 그들의 지각이 가려지고, 그들의 양심이 그것에 의해 더렵혀진다. 그러므로 그 속에서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그들은 타락한 백성들을 지지하며, 마음으로는 그들의 정욕을 좋아한다. 아마도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우상의 제건 때에 많이 있었던 포도주와 독주를 사랑함으로 인해서 우상 숭배에 빠졌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모압의 딸들을 사랑하여 바알브올과 연합한 이스라엘처럼, 포도주로 인하여 옆걸음쳤다.

이 죄를 악화시킨 것으로서 다음 세 가지 사실이 여기에 지적되고 있다.



(1) 다른 사람들이 죄를 범하지 않도록 경고하고 그들에게 더 나은 것을 가르쳐야 하는 직책을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자기 자신이 좋은 본을 보여야 했던 자들이 바로 그런 죄를 범했다는 사실이다. "제사장과 선지자도 포도주에 빠졌다" 고 했다. 그들의 직책은 완전히 술에 빠져 사라져 버렸다. 제사장은 제물을 드리는 자이므로, 율법에 분명히 금주를 명하고 있었다(레 10:9). 그리고 왕과 주권자들이 술을 마신다는 것은 합당치 않았다(잠 31:4). 예언자들은(암 2:11 에 나타난 대로) 나실인이었고, 직무상 남을 책망하는 자이므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꾸짖게 되는 죄를 가장 멀리하도록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이 죄에 유혹된 자들이 많았다. 제사장, 선지자, 그리고 사역자가 술에 취하다니, 어찌된 일인가! "이 소식을 가드에 알리지 말라." 이러한 치욕이 그들의 옷깃에 붙어다닌다.

(2) 그 죄악의 결과가 또한 매우 해로웠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행실이 나쁜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예언자가 취해서 "이상(vision)을 그릇 풀었다" 고 했다. 그릇된 예언자들은 술 취하면 본 바탕이 명백히 드러난다.

제사장은 "법을 잊어버리고 공의를 굽게 했다" (잠 31:5). 그는 몸짓뿐 아니라 머리의 작용에 있어서도 매우 비틀거리고 흔들거렸다. 이성(理性)과 덕과 양심, 그리고 값진 모든 것을 독주에 대한 사랑과 같은 비천한 정욕에 팔아버리는 자들에게서 무슨 지혜와 공의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대신들이 먹고" 마시되, "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력을 위해서" 그리하는 나라는 복되도다.



(3) 그 병이 전염되었다는 것이다. 한 식탁에서 먹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기에 감염되었다. "모든 상에는 토한 것이 가득하다" 고 했다(8절). 술취함의 죄가 얼마나 추악한 죄이며, 그것이 인간 사회에 대해 얼마나 큰 모욕인가를 보라. 그것은 보는 자로 하여금 혐오감을 느끼게 할 정도로, 조잡하고 흉한 모습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음식을 먹는 그 식탁은 이 죄의 흔적으로 더럽게 얼룩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은 그 죄인들이 소돔과 같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들의 상에는 토한 것이 가득하다. 따라서 그들을 정복한 승리자는 자기의 면류관을 자랑하는 대신 오히려 그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술취함과 같이 추잡한 죄가 전국가적인 죄가 될 때, 그것은 그 백성에게는 하나의 흉조이다.

 

28:2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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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의 타락 (이사야 28:9-13)

이사야 예언자는 여기에서 이 백성의 비참한 어리석음, 즉 그들이 가르침을 받지 않으며 자기들에게 주어진 은혜의 수단을 이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한탄하고 있다. 그들은 이전의 상태를 여전히 고집했다. 그들의 잘못은 시정되지 않았고, 그들의 마음은 갱생되지 않았으며, 그들의 생활은 개혁되지 않았다.

다음을 살펴보자.

Ⅰ. 그들의 예언자와 사역자들이 의도하고 계획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그들에게 "지식," 곧 여호와의 지식과 그의 뜻을 "가르치고 그들에게 도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다(9절).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다루시는 방법이다. 즉, 하나님은 먼저 그의 진리의 지식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밝혀 주고 나서, 그들의 감동을 얻고 그들의 뜻이 그의 법도에 순응하도록 만드신다. 이처럼 하나님은 문으로 들어오시나 도적과 강도는 다른 곳을 넘어온다.

Ⅱ. 그들은 이 의도에 준하여 어떤 방법을 택했는가? 그들이 선을 행하도록 하기 위해 그들에게 시도해 보지 않은 방법이란 없었다. 그들은 아이들, 곧 어머니의 품에서 갓 떠나 배우기 시작한 작은 아이들이 가르침을 받듯이, 가르침을 받았다(9절).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는 어머니들이 그 아이가 3살이 될 때까지, 그리고 거의 학교에 가기 전까지 양육하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가르치는 것이 좋다. 아이들이 배울 수 있는 능력을 갖자마자 곧 여호와의 선한 지식을 가르치고, 그들이 젖을 갓 뗀 때에라도 가르치는 것이 좋다. 예언자들은 아이들을 가르치듯 그들을 가르쳤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예언자들이 그들을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 꾸준했고 부지런했기 때문이다. 예언자들은 그들에게 큰 수고를 기울였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대로 또 감당해 낼 수 있을 만큼 매우 신중하게 가르쳤다(16절). "교훈에 교훈을 더하는도다." 그들은 아이들이 읽기를 배우듯 "교훈에 교훈을 더하여" 가르침을 받았고 "경계에 경계를 더하고,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어떤 것에 대해 조금, 또 다른 어떤 것에 대해 조금 하여, 쓰는 것을 가르침 받았다. 그리하여 다양한 교육에 그들이 더 흥미를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게 했다. 이번에는 이것을 조금, 또 다음 번엔 저것을 조금 하여, 그들이 기억하는 데에 부담스럽지 않게 했다. 한 예언자에게서 조금, 또 다른 예언자에게서 조금 하여 각 사람이 그의 친구들이나 자기가 존경하는 자와 함께 즐길 수 있게 했다. 하나님께 관한 것들을 배울 때에는 교훈에 교훈을, 경계에 경계를, 즉 하나씩 차례로 배우고, 따라서 하나씩 시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의의 교훈은 경건의 교훈에 따르고 자비의 교훈은 정의의 교훈에 따라야 한다. 아니, 똑같은 교훈과 똑같은 주의가 자주 우리에게 반박해서 가르쳐져서 우리에게 그것이 필요하게 될 때, 우리가 그것을 더 잘 이해하고 더 쉽게 생각해 낼 수 있게 해야 한다. 교사들은 피교육자의 능력에 맞게 해야 하며, 그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그들이 잘 감당해 낼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한 번에 조금씩 주어야 한다(신 6:6, 7).

2. 예언자들은 그들에게 배운 것을 설득하고 강권했다(12절). 하나님은 그의 예언자들을 통해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가 너희에게 지시하고 가르치는 이것이, 이 도(道)가 너희 안식이요, 유일한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영혼의 상쾌함이니, 너희는 곧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그리고 이것은 너희 나라를 오랫동안 괴롭혀 왔던 전쟁과 다른 재앙으로부터 안식하게 할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부르시되 실제로 우리에게 유익한 것으로만 우리를 부르신다는 것을 명심하자. 왜냐하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죄를 섬기기에 싫증이 나버린 자들에게 유일하고 참된 안식이며, 주 예수의 쉬운 멍에 아래에만 상쾌함이 있기 때문이다.

Ⅲ.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그 백성에게 준 영향을 지극히 적었다. 그들은 젖을 갓 뗀 아이처럼 배우기를 싫어했다. 그들에게 어떤 짐을 짊어지우는 것은 불가능했다(9절). 아니, 그들을 가르치는 것보다는 두 살 난 아이를 가르치는 편이 더 쉬웠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린아이처럼) 배울 능력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처럼 그들은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은 먹을 수 없었다" (히 5:12).

1. 그들은 "듣지 아니하였다" (12절). 그들은 자기들에게 안식과 상쾌함이 될 것들을 들으려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을 들을 마음이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에게 진지한 집중을 요구했으나 허사였다. 그들은 그것이 선포되는 장소에 있었으나 그것에 귀를 막거나 아니면 그것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렸다.

2. 그들은 유의하려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에게 "교훈에 교훈이며, 경계에 경계'였다.(13절). 그러나 그들은 계속 형식상의 일을 수행했다. 그들은 예언자의 가르침에 참석하는 옛 관습을 지켰고, 그것은 계속 그들의 귀를 울렸으나 그것이 전부였다. 그것은 그들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그들은 계율의 의문(儀文)은 지니고 있었으나, 그 능력과 정신은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것이 끊임없이 그들에게 부딪쳤으나, 그들 안에 무엇인가가 들어가게 하지는 못했다.

3. 아니, 그들이 그 예언자의 가르침을 조롱했고, 비웃는 것 같았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에게는 "뒤로 넘어져 부러지며, 걸리며 잡히게 하는" 것이 되었다. 이 말이 히브리 원문에는 운을 밟고 있다. 그들은 예언자의 말로 노래를 만들었고, 술에 얼근히 취했을 때는 그렇게 노래했던 것이다. 다윗도 술취한 자들의 노래거리였다. 이처럼 신성한 것을 희롱하고, 우리를 진지하게 만들어야 할 것에 대해 망령되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큰 불경이요, 지독한 모독이다.

Ⅳ. 이것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아주 냉엄하게 그들을 벌하시겠다고 하셨다.

1. 하나님은 명료한 설교라는 특권을 그들에게서 박탈하실 것이며, 그들에게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말씀하실 것이다(11절). 명료하고 그들의 능력에 알맞는 것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그것을 천하고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멸시하는 자들은, 당연히 그들의 수준에 어려운 것을 맛보아야 한다. 또는,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 군대를 보내시어, 그 나라를 황폐케 하실 것을 뜻하는 말씀이다. 안위함을 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 하지 않는 자들은, 징계하시는 무서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이다. 혹은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들의 능력에 맞게 다루시는 그 은혜로운 겸양을 시사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즉 하나님은 유모가 자기의 어린아이에게 하듯 그들을 만족시키시기 위해 말을 더듬거리면서, 혀짧은 소리를 내실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는 자기 음성을 바꾸실 것이다. 처음에는 이러한 방법을, 그 다음에는 저러한 방법을 시도해 보실 것이다. 바울 사도는 그것을 은총으로 인용하면서(고전 14:21), 그것을 방언의 은사에 적용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을 원망했다.

2. 하나님은 그들에게 완전 멸망을 내리실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과 그 말씀을 불경스럽게도 멸시함으로써, 그들은 자신의 멸망을 재촉했고 무르익게 할 따름이었다. 그것은 "그들로 가다가 뒤로 넘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것이며, 하나님께로부터 더욱 더 멀리 떠나게 하고, 연속적으로 죄를 짓게 하여 마침내는 그들로 "부러지며 걸리며 잡히고" 파멸되게 하는 것이다(13절).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여기에서 조금, 저기에서 조금 취한다. 그것은 그 말씀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여, "선견자에게 이르기를, 선견(先見)하지 말라 하도다" (30:10). 그러나 그것은 그들을 개심시키기에는 너무 미약했음이 입증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충분히 그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릴 수 있음을 입증할 것이다. 만일 그것이 "생명에서 생명에 이르는 향기" 가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죽음에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향기" 가 될 것이다.

 

28:10 없음.

 

28:11 없음.

 

28:12 없음.

 

28:13 없음.

 

28:14

심판의 예고 (이사야 28:14-22)

이사야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희롱한 자들을 꾸짖은 후, 여기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희롱한 자들을 계속 책망하고 도전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의 규례나 섭리가 멸시당하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을 것이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치리하는 경만한 자," 즉 그 성읍의 장관들에게 말씀하시고 있다(14절). 심판의 보좌가 바로 오만한 자의 자리가 되고, 치리자가 경만한 자일 때, 그 백성들은 불행하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치리자가 바로 그러한 성품의 소유자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경솔히 여기고 그의 진노의 표적을 주시하시기를 조소한다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조소하는 자들이라면, 누가 시온에서 애통하는 자가 될 것인가?

다음을 살펴보자.

Ⅰ. 이 조소자들은 그들 자신을 세상적인 방심 속에 잠재우고 있었고, 또 심지어는 전능자 하나님께 도전하여 그로 하여금 자신의 최악의 일을 행하시도록 했다. "우리는 사망과 언약하였고, 음부와 맹약하였도다" (15절). 그들은 자기들의 생명이 확실한 것으로 생각했다. 심지어는 가장 큰 멸망의 심판이 퍼졌을 때에도, 마치 그들은 소중한 심사숙고 끝에 사망과 흥정하여, 자기들이 그 사망을 부를 때까지는 오지 않도록 또는 어떤 이변이나 연로함을 통해서 자기들을 데려가지 않도록 해 놓은 것같이 생각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하고 그와 언약했다면, 사망이 가장 적합한 때에 오도록 언약한 것이다. 결코 우리에게 두려움이 되지 않을 것이며, 우리에게 어떤 실질적인 피해를 끼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라면 사망은 우리의 것이다(고전 3:22, 23). 그러나 우리가 죄로인해 하나님을 우리의 대적으로 만들고 그와 싸우고 있는 한, 사망을 우리의 친구로 만들거나 그것과 맹약하려고 생각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이다.

이 경만한 자들이 갖고 있는 것은 어리석은 착상이었다. "넘치는 재앙이 우리 땅에 유행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은 그 아래 떨어질지라도, 그것이 우리에게는 미치지 못하리라. 그것이 널리 퍼진다해도, 우리에게 닿지는 못할 것이며, 그것이 넘치는 징계라 할지라도 우리를 넘어뜨리지는 못할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이 이 세상이나 저 세상에서 자기들은 그 이웃들보다 더 나으리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최대의 어리석음이다. 그러나 그러한 그들의 확신의 근거는 무엇인가? 진실로, "우리는 거짓으로 우리 피난처를 삼았다" 고 말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1. 거짓된 그들의 예언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들은 그들에게 거짓이라고 허위였었고 그들을 속이는 것이었으나, 그들은 그것을 중요한 울타로 간주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우상의 보호, 그들의 거짓된 예언자들이 그들을 달래는 데 사용했던 그 약속들, 그들의 책략, 재물, 그리고 백성들에 대한 그들의 세력, 이러한 것들을 그들은 신뢰했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다. 아니, 그들은 이러한 것들을 위해서 하나님을 대적했다.

2. 아니면, 그것들은 flagellum Dei - 즉 하나님의 재앙, 곧 치는 재앙이었던 그 대적에게는 거짓과 허위였기 때문이리라. 그들은 전략을 통해서나 평화 협정에 굴복하는 척하는 가식을 통해서 그 대적을 속이고 자신들을 안전케 하려 했을 것이다. 유다의 다른 성읍들은 완강하게 버티었기 때문에 함락되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치리자들은 더 잘 버티기를 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야말로 시골의 정치가들보다는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신명기 33장 29절에 표현되어 있는 대로, 나중에 거짓말한 것이 드러날 것을 개의치 않고, 위험이 끝나자마자 그 멍에를 던져 버릴 목적을 품고서, 자기들의 성읍을 앗수르 왕에게 넘겨 주거나 그의 조공국이 될 것을 약속함으로써 앗수르 왕에게 아첨할 것이다. 자기가 거래하는 자들을 속임으로써 자기가 의도한 바를 획득하려 하는 자들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임을 명심하라. 속임수와 거짓으로, 천하고 야비한 술책으로 자기의 계획을 추진하는 자들은, 그 뜻을 성취할지라도 거기에서 위안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직은 최상의 정책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곁을 떠나고 그의 보호에서 스스로 도망친 자들은 그런 피난처로 달려간다.

Ⅱ. 하나님이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서 그들의 잠을 깨우고 그들의 방심의 어리석음을 그들에게 보이는 것을 살펴보자.

1.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들이 안심할 수 있는 그 터전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그는, 그들에게 그들이 근거할 수 있는 견고한 기초를 먼저 알려 주시기 전까지는, 그들의 거짓된 확신을 참해하시지 않는다.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라" (16절). 이 기초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일반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약속이다. 즉 그의 백성으로 하여금 소망을 갖게 해 준 그의 말씀, 그리고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하나님이 되어 주시겠다고 아브라함에게 했던 그의 언약이다. 이것이 그 기초, 즉 초석이다. 그것은 믿음이 세워질 수 있는 견고하고 영원한 초석이다. 그것은 "시험받은 돌" 이다. 왜냐하면 모든 성도들이 이미 거기에 의지해 왔고, 그것은 결코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2) 구체적으로 말하며 그리스도의 약속이다. 신약에서는 이 말씀이 명백히 그에게 적용되어 있기 때문이다(벧전 2:6-8). 그는 "모퉁이의 머리" 가 된 바로 그 돌이시다.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져 시작되기로 되어 있었던, 메시야와 그의 나라에 관한 큰 약속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최악의 사태에서도 안정되기 만들기에 충분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가 오실 때까지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온에 이 기초가 놓여져 있는 한, 시온은 존속될 것이다. "거짓으로 그 피난처를 삼으려 하지 않는 자들을 안위하시기 위해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그리고 한 돌을 시온에 두기로 약속한 자, 나를 주시하라' 하셨도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놓으신 기초이다. "이는 여호와의 행사(行事)라." 그는 시온, 곧 교회에, 성산에 놓여져 있다. 그는 시험받은 돌이요, (혹자의 견해대로) 시험하는 돌이요, 참과 거짓을 구별해 내는 시금석이다. 그는 귀한 돌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이 새 예루살렘의 기초석(계 21:13), 곧 건물의 옆에 붙는 모퉁이 돌, "모퉁이의 머릿돌"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약속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할 것이다." 즉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들처럼 황급히 이리저리 도망하지 않을 것이며, 자신의 안전을 위해 이리저리 요동하지도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악인들처럼 공포에 쫓기지도 않을 것이다(욥 18:11). 그것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뜻을 영접하라" 라고 말하면서, 확고한 마음을 가지고 조용히 그 사건을 기다릴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계획 안에 정해져 있는 그 시기를 재촉할 만큼 그렇게 그 기대에 있어서 서두르지 않을 것이며, 비록 그것이 늦어지더라도 "오실 그분은 오실 것이니, 결코 지체하지 않으리라" 는 것을 알고서, 정해진 시간을 기다릴 것이다. 믿는 자들은 필요 이상으로 서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이 정한 때가 가장 좋은 때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그것을 참을성 있게 기다릴 것이다.

사도는 70인역을 이용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벧전 2:6).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곧 그의 기대는 좌절되지 않고 훌륭히 성취될 것을 뜻한다.

2. 그는 지금 그들이 의뢰하고 있는 근거는 그들을 안전케 할 수 없다는 것과 그들의 신뢰는 "반드시 무너지리라는 것" 을 그들에게 말씀하고 있다. "나는 공평으로 줄을 삼고 의로 추를 삼으리라" (17절).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1) 그의 교회가 세워지리라는 것이다. 기초돌을 놓은 후에(16절), 하나님은 건축자들처럼 줄과 추로써(슥 4:10) 건물의 골격을 세우실 것이다. 정의가 그 줄이 될 것이며, 공평이 추가 될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 위에 건축되었기 때문에, 공평과 의의 영구적인 표준인 성경에 의해 형성되고 또 개혁될 것이다. "판단이 의로 돌아가리라" (시 94:15).

(2) 또는 교회의 원수들이 형벌을 받으리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율법에 경고한 대로 엄격한 정의로 그들을 다루실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당연한 응보를 주실 것이며, 그들이 도전해 온 그 심판을 내리실 것이나, 지혜는 물론이요 정확한 자를 가지고 판단할 것이기 때문에, 가라지가 곡식과 함께 뽑히지 않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처럼 심판을 수행하기 위해 오실 때는

[1] 이 오만한 자들이 미혹되어 가던 그 헛된 소망을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다.

첫째, 그들은 거짓으로 피난처를 삼으려는 뜻을 품었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박," 즉 2절에 언급되어 있는 쏟아지는 우박이 "소탕할" 거짓의 피난처임이 실제로 드러날 것이다. 거짓으로 자기의 피난처를 삼는 자들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자들이며, 그 집은 폭풍우가 닥칠 때 무너져 내리고, 그것을 지은 자도 그것이 허물어질 때 함께 묻힐 것이다.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것으로 은둔처를 삼는 자들은 노아의 방주 이외의 모든 피난처가 물에 잠기고 홍수에 쓸리고 말았듯이, 물이 넘쳐버리고 마는 결과를 발견할 것이다. 이러한 것이 바로 사곡한 자의 바라던 소망이다. 이것이 그가 신뢰를 둔 모든 것의 결국이 될 것이다.

둘째, 그들은 사망과의 언약과 음부와의 맹약을 자랑했다. 그러나 그 약속은 "폐할" (무효로 돌아갈) 것이다. 왜냐하면 그 계약은 음부와 사망의 열쇠와 또 그 최고의 지배권을 지니신 자의 동의 없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간계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모면하려는 자들은 스스로를 속일 뿐이다.

세째, 그들은 넘치는 재앙이 그 땅을 지날 때에도, 그것이 자기들에게는 미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예언자는, 다른 사람들이 공통 재앙에 의해 몰락할 때 그들도 함께 망할 것을 그들에게 말하고 있다. "너희가 그것에게 밟힘을 당할 것이다.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 재앙이 너희도 정복할 것이며, 너희는 쉽게 그 희생이 될 것이다."

그들은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듣는다(19절).

1. 그 재앙은 그들에게서 시작될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제일 먼저 그것에 넘어질 것이다. "그것이 유행할 때마다, 마치 너를 잡기 위한 목적으로 온 것처럼 너희를 잡을 것이라."

2. 그것이 그들을 바싹 추격할 것이다. "그것이 아침마다 유행할 것이다." 날이 돌아오는 것처럼 일정하게 그것이 무언가를 황무케 만드는 소식을 너희가 듣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정의가 그것의 습격에 뒤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낮에나 밤에나 결코 안전하지 못할 것이며, 편하지도 못할 것이다. 흑암 중에 행하는 역병과 한낮에 일어나는 파멸이 있을 것이다.

3. 그것을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그것이 다가오고 있다는 통보를 안다고 하여, 그것이 너희에게 그 재앙을 피할 기회를 주지는 않을 것이다. 피할 길이 열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소식을 안다는 것이 오히려 너희를 괴롭게 만들 것이며, 그것이 오는 것을 보고서도 너희는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될 것이다." 또는, "그것이 아주 먼 곳에 있다는 소식만 듣고도 너희는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 일은 어떻게 되겠는가?" 재앙의 소식은 오만한 자에게 두려움과 초조함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며" 마음을 견고케 한 자들은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반면에 넘치는 재앙이 올 때, 그 때에 경만한 자의 모든 위로와 그 의지하던 것은 함께 끊어진다(20절).

(1) 그들이 의지하고 있던 것은 그들의 기대에 응하지 못한다. "침상이 짧아서 능히 몸을 펴지 못한다" 고 했다. 따라서 그는 몸을 웅크리고서 꾸부려야 한다.

(2) 그들이 피난처로 삼으려 했던 것도 그 의도한 바에 충분히 응할 수 없음이 입증된다. "이불이 좁아서 능히 몸을 싸지 못한다" 고 했다. 그리스도를 초석으로 삼아 집을 짓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의로움 속에서 방심하고 있는 자들은, 결국 이처럼 스스로를 속였음이 판명될 것이다. 그들은 결코 편하거나 안전할 수 없으며, 또한 따뜻할 수도 없다. 침상이 너무 짧고 이불이 너무 좁다. 우리 첫 조상이 두른 무화과 잎사귀처럼, 그들이 벗은 몸이라는 수치스러운 사실은 여전히 드러날 것이다.

[2] 하나님은 자기 뜻이 성취됨으로써 영화롭게 되실 것이다(21절). 하나님께서 이 경만한 자들과 다투기 위해 오시면,

첫째, "그(하나님)는 자기 일을 행하실 것이며, 자기 공(act)을 이루실 것이다." 즉 그는 자기 목적대로 자신의 영예와 영광을 위해 일하실 것이다. 그 일은 그것을 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땅의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실을 드러낼 것이다.

둘째, 하나님은 이전에는 그의 백성의 대적에게 그 일을 행하셨으나, 이제는 그의 백성에게 행하실 것이며, 이로써 하나님의 정의는 공명정대하다는 사실이 나타날 것이다. 그는 다윗 시대에 "브라심산에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심같이(삼하 5:20) 일어나시어" 예루살렘을 치실 것이며, 여호수아 시대에 "기브온 골짜기에서" 가나안 사람들을 치신 것같이 행하실 것이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교회의 일원임을 고백한 자들도 교만과 오만으로 인해서 스스로를 블레셋 사람이나 가나안 사람처럼 만든다면, 그들도 그러한 자들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리라고 예상해야 한다.

세째, 이것은 "비상한 일," 곧 "기이한 일" 이요, 이질적인 행위가 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고 싶어하는 일은 아니다. 오히려 긍휼을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며, "괴롭히기를 기뻐하시지 않으신다." 그것은 그가 그의 백성에게 지금까지 행하시던 일이 아니다. 그는 그들을 보호하시고 총애하셨던 것이다. 만일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다면" (63:10), 그것은 정말 기이한 일이다(신 29:24).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멸망은 "놀랍" 이라고 언급되어 있다(렘 25:18).

끝으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활용하고 적용해야 한다(22절). "그러므로 너희는 경만한 자가 되지 말라. 하나님의 말씀의 훈계나 그의 심판의 접근을 감히 조롱하지 말라" 는 것이다. "여호와의 사자를 조롱하는 것" 이 예루살렘에 가득한 죄였다. 사곡한 신앙 고백자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신중히 생각한다면, 하나님을 조롱하던 자들은 능히 잠잠케 될 것이요, 그들은 신중해질 것이다. "너희는 경만한 자가 되지 말라. 너희 결박, 즉, 너희를 죄의 권세 아래 묶어 두는 그 결박" (왜냐하면, 경만한 자의 개종은 거의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과 "그리고 너희를 묶어 하나님의 심판으로 넘겨주는 그 결박이 우심할까 하노라." 하나님은 율법의 모든 결박을 끊어버리고, 그 모든 줄을 던져버리는 자들을 묶어 두기에 충분한 강력한 정의라는 줄을 갖고 계신다. 이 경만한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경고를 경홀히 여기지 않게 하라. 왜냐하면 그 예언자(여호와의 비밀을 갖고 있는 자들 중의 한 사람)가 그들에게 만군의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온 땅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셨다" 는 것을 단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 멸망을 피하리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아니면, 그들의 불신앙이 그 경고를 무효로 만들겠는가?

 

28:15 없음.

 

28:16 없음.

 

28:17 없음.

 

28:18 없음.

 

28:19 없음.

 

28:20 없음.

 

28:21 없음.

 

28:22 없음.

 

28:23

하나님의 경작 솜씨 (이사야 28:23-29)

이 비유는 (우리 구주의 여러 가지 비유와 마찬가지로) 농부의 천직에서 빌어온 것으로서, 그 앞에는 "들을 귀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듣고 깨달을지어다라는 주의 집중을 요하는 엄숙한 서언이 제시되고 있다(23절).

Ⅰ. 여기에 나오는 비유 자체는 매우 평이하다. 즉 농부는 secundumartem - 즉 규정대로 매우 수고하면서 신중하게 그의 천직에 전념하며, 자기 판단이 지시하는 대로 일의 방법과 순서를 따르게 된다.

1. 밭 갈고 씨뿌리는 일에 있어서 "파종하려고 가는 자가 끊이지 않고 갈겠느냐?" 그렇다 그는 그렇게 한다. 그는 "소망을 가지고 밭을 갈며 소망을 가지고 파종한다" (고전 9:10). 그가 "그 땅을 개간하며 고르게 하겠느냐? 그렇다. 그는 그 땅이 씨 뿌리기에 알맞게 하기 위해 그렇게 한다. 그리고 그가 지면을 이미 평평히 하였으면, 씨를, 토질에 알맞는 씨를 뿌리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농부는 진흙 땅에는 어떤 곡식이 알맞고, 모래 땅에는 어떤 곡식이 알맞는 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각 씨를 제 장소에 - (난외에 있는 것처럼) "소맥을 주요한 장소에 심으며" (왜냐하면 그것은 주요 곡물이었고, 가나안의 주요 상품이었기 때문이다. 겔 27:17) "대맥을 저한 곳에 심는다." 자연의 하나님의 지혜와 선하심은, 이 속에서 즉 그의 피조물에게 다양한 선물을 은혜롭게 주시려고 그 산물들이 각기 다양한 토양에 잘 적응하도록 하신 일 속에서 관찰할 수 있다.

2. 타작하는 일에서(27, 28절), 농부는 곡식을 타작하는 일도 할당해 놓는다. "소회향과 대회향" 은 그 껍질이나 이삭에게 쉽게 빠져 나오기 때문에 "작대기와 막대기" 로 떨어버리기만 해도 된다. 그러나 "곡식" 에는 더 큰 힘이 요구되기 때문에, 그것을 "도리깨" 로 떨어낸다. 그 위를 왔다갔다 하는 쇠를 단 망치가 그 곡식을 떨어낸다. 그러나 그는 곡식의 겨를 흩어지게 하는 데 필요한 기간보다 이상으로 "늘 떨기만 하지 아니하고 그 땅에 수레바퀴를 굴리고 그것을 말굽으로 밟게 할지라도, 부수거나" 으깨지는 "아니한다." 그것을 가는 일은 또 다른 작용에 의한다.

그런데, 돈을 벌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준비하기 위해서도 수고를 해야 한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썩는 양식" 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 을 위해 더욱 더 수고하기를 마다하겠는가? "곡식은 부수어진다." 그리스도도 그러하셨다. "여호와께서는" 그가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이 될 수 있게 하기 위해 "그가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셨다" (53:10).

Ⅱ. 그러나 이 비유에 대한 해석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대부분의 해설자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심판에 도전하는 자들이 앞으로 받을 보응으로 보고 있다. "농부가 항상 밭을 갈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는 씨를 뿌리는 것처럼, 하나님도 항상 경고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는 그 경고를 실행에 옮기시고, 죄인들에게 온당한 심판을 내리시리라는 것을 그들로 하여금 알게 하라. 그러나 그는 그들이 멸망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에 의해 개심하고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서 지혜를 가지고 그들의 힘에 알맞게 행하실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이 비유를 해설하는 데 있어서 그 범위를 더욱 확대시킬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1. 일반적으로 말하면, 그 농부에게 이러한 지혜를 주신 하나님 자신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무한히 지혜로우시다. "농부에게 적당한 방법(분발력)을 가르치신" 분은 바로 그의 하나님이시다(26절). 농부들에게는 자기의 일들을 처리할 수 있는 지각이 필요하다. 그들이 어느 정도 자기들의 행사를 이행하지 못한다면,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들은 관찰과 경험에 의해 농사에 대한 지식을 증진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왕 자신도 밭의 소산을 먹고 살기" 때문에, 농사의 기술을 향상시키는 것은 대부분의 다른 기술을 함양시키는 것보다 더욱 인류 공통에게 도움을 준다. 농부의 기술은, 훌륭하고 온전한 각 은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벌을 내리사 사람으로 하여금 땅을 경작하게 하시면서, 인간에게 땅을 아주 잘 경작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는 사실은 그 언도된 형에 대한 무게와 두려움을 어느 정도 경감시켜 준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람은 매우 어리석은 가운데 영원히 "바다의 모래를 갈고 있을지" 모르나, 그 수고는 헛되이 돌아갔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이 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과 그 일을 할 마음, 그리고 그 속에 즐거움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만일 어떤 사람들이(농부의 지파, 잇사갈처럼) 섭리에 의해서 농업을 위해 구별되고, 그러면서 비록 수고하고 근심하나 그들이 자기들의 장막에서 즐거움을 누리는 일이 없었다면, 우리들에게는 생명을 부지할 것이 부족되었을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이 일이나 다른 일들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더욱 지각이 있고 현명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로 인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농부들은 하나님께서 일을 위해 지시해 주실 것을 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직접적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섭리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곡식을 타작하는 농부의 일에 대한 다른 사례에 관해서는 "이도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난 것이라" 고 적혀 있다(29절). 판단력과 이성의 가장 명료한 지시도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난 것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일을 지혜롭고 사려 깊게 행하는 것이 그로서 난것이라면 우리는 "그의 모략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다" 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의 행사는 자신의 뜻에 의한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흔히 그러한 것처럼 결코 자기의 생각과 반대로 행하시지 않으며, 그의 전체 뜻 속에는 모략이 있다. 따라서 그의 모략이 기묘하기 때문에 그의 행사는 놀랍다.

2. 하나님의 교회는 그의 밭이다(고전 3:9). 그리스도께서 참포도나무라면, 그의 아버지는 그 농부이시며(요 15:1) 그는 끊임없이 그의 말씀과 규례로써 그 밭(교회)을 경작하신다. "파종하려고 가는 자가 끊이지 않고 갈고" 그 땅을 "고르게 하여," 그것이 씨를 받을 수 있게 하시며, 하나님은 그의 사역자들을 통해 휴경지를 개간하시지 않겠는가? 파종하는 자가 씨뿌리기에 알맞도록 땅을 만들고 나면, 그 적합한 토양에 씨를 뿌리지 않겠는가? 과연 그렇게 한다. 마찬가지로 위대하신 그의 사역자들의 손을 통해 그의 말씀의 씨를 뿌리신다(마 13:19). 사역자들은 진리의 말씀을 분배하고 각 사람에게 그 몫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마음의 토양이 어떠하든지 간에, 말씀 속에서 그것에 적합한 어떤 씨가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징계도 이처럼 지혜롭게 사용된다. 고통은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떠나게 하고, 우리와 우리의 겨를 분리하고, 우리가 쓰임 받도록 해 놓으려는 하나님의 도리깨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하나님의 기회가 생길 때 사용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우리 힘에 맞게 할당하실 것이다. 그것은 필요 이상으로 무겁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 막대기가 그 목적을 이룬다면, 그는 그의 수레바퀴와 말굽(더 큰 심판)을 사용하시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곡식을 부술 필요가 있을지라도(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그것이 그 겨에서 깨끗이 나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결코 그것을 떨지 아니하실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땅의 갇힌 자들을 그의 발 아래 부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점에서 우리는 그의 "모략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다" 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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