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이사야 2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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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

핍박자의 운명 (이사야 27:1-6)

이사야 예언자는 여기에서 심판과 긍휼을 노래하고 있다.

1. 하나님의 교회의 원수들에 대한 심판(1저)을 노래한다. "그것(하나님의 교회)으로 환란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란으로 갚음" 이 있으리라(살후 1:6).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사 땅의 거민을 벌하실" 때에는(26:21) 반드시 "리워야단(leviathan) 곧 "바다에 있는 용" 이요, 리워야단처럼 용사들에게도 두려움이 되며, "너무 격렬하여 아무도 그를 격동시킬 수 없으며," "그 마음은 돌같이 굳고," "그가 일어나면 용사들도 겁을 내게 되는" (욥 41:10, 24, 25) 그런 모든 압제자들을 멸하실 것이다. 교회에는 많은 대적들이 있으나, 흔히 어떤 대적은 다른 대적들보다 더 가공스럽다. 산헤립이 자기 시대에 그러했으며, 느부갓네살이 그러했고, 안티오커스(Antiochus)가 그러했다. 또한 바로가 예전에 그러했었으며, "리워야단" 과 "용" 이라 불리우고 있다(51:9; 시 74:13, 14; 겔 29:3). 신약 교회에도 리워야단들이 있다. 우리는 신약의 교회를 삼키려 하는 큰 붉은 용에 대해 읽을 수 있다(계 12:3).

그 압제하는 사악한 권세들이 여기에서는 이 세상에서 발휘하는 그 크기와 힘과 강한 소동 때문에 "리워야단" 으로 비유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의 분노와 열기는 "용" 으로 비유되었다. 또한 계획에 치밀하고 동작에 민첩하며 일단 자기의 머리에 넣은 것을 곧 그 몸 전체를 감아버리는 성질은 뱀 곧 "날랜 뱀" 으로 비유되었다. 또 그 모든 이웃의 길을 막고 방해하기 때문에(난외에 있는 대로) "빗장을 지르는 것" 으로 비유되었다. 또 교묘하고 정교하나 완악하고 해로운 성질은 "꼬불꼬불한 뱀" 으로 비유되어 있다. 크고 강한 방백들도,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저주거리인 용과 뱀으로 간주하신다. 그리하여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벌하실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이 다루고 문책하기에는 너무 거대하므로, 광대하신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친히 다루실 것이다. 하나님은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을 갖고 계시며 그들의 죄악의 분량이 다 차게 되어, 그들의 "날이 오면," 하나님은 그 칼로 그들을 처형하신다.

원문에는 이 점이 강조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그 잔혹하고 크고 강한 칼" 로 이 다루기 힘들고 제어하기 힘든 범인을 "벌하실 것이다" 라고 했다. 그리고 그 죄는 사형에 해당하는 벌을 받을 것이다. "그가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왜냐하면 그의 죄의 값은 사망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용이 들짐승을 죽이는 따위의 해를 더 이상 끼칠 수 없게 할 뿐만 아니라, 배반자나 반역자들처럼 그 용이 행한 죄악에 대한 정당한 형벌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행하기 위한 강한 칼을 가지고 계신다. 즉 아무리 교만한 자도 겸손케 하시고, 가장 막강한 적도 충분히 꺾으실 수 있는 다양한 심판법을 알고 계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처형의 날이 오면 그 심판을 행하실 것이다. "그 날에" 곧 그의 날이 이를 때, 하나님은 벌하실 것이다(시 37:13).

이 사건은 우리 주 예수께서 암흑의 권세를 이기심으로써 얻어진 영적 승리에 적용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 왕의 무기를 빼앗고 늑탈하고 던져버리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강한 칼 곧 그의 죽으심과 복음 전파로써 "사망의 권세를 지닌 자 곧 마귀," 그 큰 리워야단, 그 옛 뱀, 그 용을 "멸하시고" 있으며, 앞으로도 멸하실 것이다. 그 용은 더 이상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도록 묶일 것이다. 그것이 그에 대한 벌이다(계 20:2, 3). 그리고 마침내 만국을 미혹했기 때문에 그는 "불못에 던지울" 것이다(계 20:10).

Ⅱ. 교회에 대한 긍휼을 노래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리워야단을 벌하시는 바로 그 날에 교회와 그 모든 친구들은 즐거워하게 되리라. 교회에 참예하던 자들로 하여금 교회의 평안을 노래하게 하자. 이러한 큰 확신들을 가지고 교회가 자장가를 부르게 하자. 교회의 집회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노래하게 하자.

1. 교회는 하나님의 포도원이므로, 하나님의 특별하신 배려 아래 있다(2, 3절). 그것은 하나님의 시야에 있는 "아름다운 포도원" 이다. 세상은 결실이 없는 무가치한 광야와도 같다. 그러나 교회는 포도원처럼, 독특하고 값진 장소처럼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다. 거기에는 큰 배려와 큰 수고가 기울여지며, 거기에서 모은 귀중한 열매로써 그들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예롭게 한다. 그것은 가장 좋은 그리고 선택된 포도를 내는 "아름다운(영문 - "붉은") 포도원" 이다. 그런데 이것은 전에는 교회 자신이 그 열매를 취하거나 들포도를 맺었는데(5:4), 이제는 하나님께 훌륭한 열매를 드리는 교회의 개혁을 시사한다.

이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것을 보살피신다.



(1) 포도원의 안전을 살핀다. "나 여호와는 포도원 지기가 됨이여, 밤낮으로 간수하여 아무든지 상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포도원은 피해를 당하기가 매우 쉽다. 그것을 상하게 하고 짓밟아 황무케 하려는 자들이 많이 있다(시 80:13). 그러나 하나님은 그 포도원이 어떤 실질적인 피해나 손상을 입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이 내버려 둘 때는 그것이 오히려 유익을 가져올 것이다. 그는 그 포도원을 끊임없이 밤낮으로, 그리고 요긴하게 지키실 것이다. 왜냐하면 원수들이 쉬지않고 그 포도원을 칠 계획을 꾸미고 있으며, 밤낮으로 그것을 해할 기회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환란과 핍박의 밤에도 그리고 평안과 형통의(그렇다고 위험이 없는 것이 아니라 큰 유혹이 있는) 낮에도 그것을 지키실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 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 로부터도 보호될 것이다(시 91:6). 이 포도원은 잘 방비될 것이다.

(2) 이 포도원의 풍작을 보호할 것이다. "내가 때때로 물을 주나," 그것은 물이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라는 조용하고 고요한 이슬이 끊임없이 그 위에 내려, 그것이 많은 열매를 맺도록 해 줄 것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끊임없이, 계속적으로 내려야 한다. 언제든지 그것이 끊기면, 우리는 시들어 없어지고 만다.

하나님은 그의 종 예언자들을 통한 말씀의 사역으로써 그의 포도원을 적시신다. 그리고 그의 교훈은 이슬처럼 내릴 것이다. 바울은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나, 하나님은 번창케 하신다. 그가 없이는 파숫군이 깨어있는 것과 농부가 물을 주는 것이 허사이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이 때로는 그의 백성과 다투시지만, 그들이 굴복하면 그들과 화해하실 것이다(4, 5절). "그는" 포도원에 대하여 "노함이 없으시다." 비록 그가 그 포도원 속에서 자기를 불쾌하게 만드는 많은 요소들을 보지만, 그는 그것을 기회로 삼아 멸하려 하거나, 그 속에 있는 잘못된 것을 지나치게 가혹하게 책하시지도 않는다. 그가 그 속에서 포도대신 찔레와 가시나무를 발견하고, 그것이 자기를 대적하여 싸울 때(그를 위하지 않는 포도원은 실상 그를 대적하는 것이다), 그것을 밟고 불사를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야, "내가 내 백성에게 화를 내더라도, 그들은 어떤 결과가 올지 알고 있다. 그들을 스스로를 겸비케 하고, 기도하며, 내 얼굴을 구하게 하라. 그리고, 나와 화평하기를 진심으로 원하면서 나의 힘을 의지하게 하라. 그러면 내가 곧 그들과 화친할 것이고, 모든 것은 잘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죄를 보시고 불쾌히 여기신다. 그러나 회개하면 하나님은 그의 진노를 돌이키신다. 바로 이 사실이 복음의 교리의 요약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복음의 교회는 매 순간 그 교훈으로 양육받아야 한다.



(1) 본문에 보면,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 다투고 있다는 가정이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 보면 이미 일어난 전쟁이 있고, 앞으로 이루어져야 할 화친이 있기 때문이다. 그 싸움은 죄가 처음 들어온 이후 계속되었던 옛 싸움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편에서는 의로운 싸움이나 사람의 편에서는 매우 불의한 싸움이다.

(2) 또한 이 다툼을 종식시키고 불화를 조정할 수 있는 길로 우리를 초대하는 은혜로운 초청이 제시되어 있다. "하나님과 화친하기를 원하는 자들은 죄인들을 죽이기 위해 들어올려진 하나님의 힘과 강한 팔을 붙들라. 그리고 간구함으로써 그 공격을 막으라. 야곱처럼 자기를 축복하지 않으면 가게 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하고서, 하나님과 씨름하라. 그러면 그가 "이스라엘" - "하나님과 겨루어 이김" 이 될 것이다.

용서하는 긍휼이 바로 우리 주님의 권세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하나님과 화친하려는 자는 바로 그를 의지하라. 그리스도는 "여호와의 팔" 이다(53:1). 십자가게 "못박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 이다(고전 1:24). 물에 빠지는 자가 손에 닿는 나무가지나 끈이나 널판지를 붙잡는 것처럼, 또는 어떤 범인이 자기를 구원할 수 있고 하나님과 화목케 할 수 있는 다른 이름이 없다는 것을 믿고 제단의 뿔을 잡은 것처럼, 살아있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붙잡으라.



(3) 또한 본문에는 우리에게 3가지를 주장하고 있다.

[1] 그런 일일 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노함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높은 자들이 부하에게 하듯,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화를 내지 않는다. 사람은 한편이 잘못하면 다른 한편이 화를 낸다. 그리고 성난 사람은 깊이 생각할 여유를 갖지 못한다. 생각해 본다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허풍에 불과할 뿐이다. 격정적인 자들은 쉽게 화를 내며, 그들이 화를 내면 진정시키기 어렵다. 조그마한 일로 화를 내나, 작은 것으로 그들을 누그러지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다. 그는 인간의 성질을 생각하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신다. 그리고 그의 온갖 노를 충동하지도 않으며, 항상 꾸짖기만 하시지도 않는다.

[2] 하나님과 겨루려고 하는 생각은 헛된 일이다. 우리가 그와 다투기를 고집하면서 그것이 우리에게 유리하게 되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타오르는 불 앞에 찔레와 가시나무를 놓는 것에 불과하여, 그 진행을 저지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더 맹렬하게 타오르도록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우리는 전능자와 겨룰 만한 상대가 아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조물주와 다투는 자에게 화 있으라!" 그러한 자는 하나님의 노의 능력을 모르고 있는 자이다.

[3]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는 유일하고 확실한 길은 이것이다. 즉 "그로 하여금 이 방법을 택하여 나와 화친하게 하라. 그러면, 그가 나로 더불어 화친할 것이니라.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선 곧 모든 선이 그에게 임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화친하기를 원하기만 한다면, 기꺼이 우리와 화친하려 하신다.

3.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는 성장하는 몸이 될 것이며, 마침내는 큰 몸이 될 것이다(6절). "장차는," (혹자는 그것을 그렇게 읽고 있다) 이 재앙이 끝나는 "후일에는," 또는 복음의 날에는 "야곱의 뿌리가 박히리라" 고 했다. 그 어느 때보다 더 깊게 박힌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의 교회는 유대 교회보다 더욱 확고히 세워지고 더 널리 퍼질 것이기 때문이다. 또는, 포로에서 돌아온 "야곱에 속한 자들" 또는 "야곱의 뿌리가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히리라." (37:31).

그들은 번영의 상태를 맞을 것이다. 그리고 그 때에 그들이 "움이 돋고 꽃이 피며," 소망스러운 큰 수확의 전망을 주리라. 그리고 그것이 사실로 입증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 결실로 지면을 채울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인도될 것이다. 개종자가 무수할 것이며, 교회 주변의 민족 중에서 얼마나 이스라엘 하나님께 찬송을 돌릴 것이다. 그리고 그 개종은 의의 열매를 풍요히 맺을 것이다. 복음의 가르침은 "온 천하에 열매를 낼 것이요" (골 1:6), 그 열매는 세상에 남게 된다(요 15:16).

 

27:2 없음.

 

27:3 없음.

 

27:4 없음.

 

27:5 없음.

 

27:6 없음.

 

27:7

징계와 자비 (이사야 27:7-13)

여기에서 그 예언자는 긍휼과 심판에 대해 다시 노래하고 있으나, 그것은 앞에서 처럼 원수들에 대한 심판과 교회에 대한 긍휼이 아니라, 교회에 대한 심판과 그 심판 가운데 섞인 긍휼이다.

Ⅰ. 야곱과 이스라엘에게도 심판이 경고되어 있다. 그들은 "움이 돋고 꽃이 필 것이다" (6절).

1. 그러나 그들은, 곧 그들 중의 일부는 "공격을 받아" "죽임을 당할" 것이다(7절). 하나님은 그들 중에서 어떤 잘못된 것을 발견하시면 그들을 당신의 진노의 대상으로 삼으신다. 심판은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될 것이며, 세상의 모든 족속 중에서도 하나님이(그들에게) 알려진 자들을 제일 먼저 벌하실 것이다.

2. 예루살렘, 곧 그 "견고한 성읍은 적막하게 될 것이다" (10, 11절).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들을 개혁시키려고 노력하셨으나 효과가 나타나지 않으므로, 얼마동안 그 나라를 황무케 하실 것이다." 이것은 예루살렘이 갈대아 사람들에 의해 멸망 당했을 때 이루어졌다. 그 때 그 "거처" 는 오랫동안 "버린" 바 되었던 것이다. 보다 적은 심판이 뜻을 이루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더 큰 심판을 보내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심판하실 때, 이기실 것" 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은 인간의 기술이나 자연 조건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은혜와 하나님의 보호 때문에 견고한 성읍이 되어 왔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노하시어 물러가시면, 그 견고함도 그 성읍을 떠난다. 그 때에는 예루살렘이 광야처럼 버려졌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아름다운 동산에 송아지가 먹고 거기에 눕되, 그들을 방해하거나 내어 쫓는 자가 없을 것이다. 송아지들이 거기에 숨고 웅크릴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 열매 나무의 연한 가지를 먹을 것이다." 아마 이 말은 더 나아가 그 백성이 그 대적들에게 쉽게 먹히우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가지가 자라다가 바람과 서리에 의해 시들었으나 제거되지 않은 채 있다가 마르면, 꺾이나니 여인과 아이들이 와서 그것을 땔감으로 불사를 것이라. 거기에는 완전한 파멸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 나무가 멸하여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포도원이 "드로도를 맺었을" 때의(5:2) 그 비참한 상태에 대한(2절) 상징이다. 그리고 우리 구주께서 "그에게 거하지 않는" 포도나무 가지는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른다." 는 것을 말씀하셨을 때는(요 15:6), 이것을 생각하시고 하신 것 같다. 그런데 이것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는 특별한 의미에서 이루어졌다.

이 비유는 "이 백성에게는 지각이 없다" 는 그 다음 말에서 설명되고 있다. 즉, 그들은 우둔하고 어리석으며 하나님의 지식을 싫어하고, 속에 수액이 없는 마른 가지처럼 거룩한 것의 풍미를 갖고 있지 않은 자들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황무케 내버려 두는 원인이 된 모든 죄, 곧 처음에 있었던 그들의 우상 숭배 죄와 나중에는 그들의 불신이라는 죄의 밑바탕에는 "지각의 결핍" 이 깔려있다. 그러나 자기들의 최대의 관심사에는 지각없는 사악한 자들이 다른 일에서는 꾀가 많은 책략이 많다. 그리고 그들의 무지(無知)는 고의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변명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정죄받는 이유가 된다. 따라서 "그들을 지으신," 곧 그들에게 존재를 부여하신 "자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며," 그들이 자초한 멸망에서 구원해 주시지 않으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한 민족으로 "조성하신 자," 하나님 자신의 찬양거리가 되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조성하신 자가, 이제 그들이 그 조성의 적에 부합하지도 못하고 개혁되거나 새로 지음받는 것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들을 배척하려 하며, "은혜를 보이려 하지 않으신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파멸한다. 우리를 그 능력으로 지으신 자가 다시 은총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차라리 지음을 받지 않은 편이 낫기 때문이다. 죄인들은 자기들에게는 벌이 없든가, 있더라도 사역자들이 말하던 것처럼 그렇게 가혹하지는 않으리라고 스스로 속삭인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자기들의 조물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그러한 변호가 얼마나 무조건하고 불충분한 것인가를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지각이 없다면, - 비록 하나님이 그들을 지으셨고 자기가 지은 것은 아무 것도 미워하시지 않으며, 그와 같은 관계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지으신 자에게 나아와 간구하는 자들에게는 자비를 예비해 두신 분이지만 - 그들에게는 긍휼을 보이시지 않을 것이며, 은혜를 베푸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Ⅱ. 이 심판 속에는 큰 긍휼이 섞여 있다. 왜냐하면 부패하고 타락한 자들과 섞여 있는 선한 백성들, "은혜로 선택된 남은 자들" 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은혜를 보이시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말은 교회의 모든 비참상을 지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은 은혜롭게도 교회의 참상 때문에 이러한 길을 마련해 놓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1. 비록 남은 자들도 그들의 공격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이나, 원수들이 공격받고 죽임당하는 그런 정도로, 그러한 방법으로까지 되지는 않을 것이다(7절). 하나님은 "야곱을 치셨다." 야곱은 살륙당했다. "백성 중에 지혜로운 많은 자가 칼날과 불꽃을 인하여 여러날 쇠패할 것이다" (단 11:33). 그러나 그것은 다음과 같은 자들이 살륙당하는 것과는 다를 것이다.

(1) 전에 야곱을 치던 자들과는 다르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막대기가 되었고, 그 손의 지팡이였었다. 그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징계하기 위해 그들을 사용하셨었으나, 이제 그것 때문에 그들이 벌을 받을 차례가 올 것이다. 어린아이는 목숨을 구하나 그 막대기는 불살라진다.

(2) 이후에 야곱이 주권을 잡고, 보복하며, 자기의 진상을 변호할 때에 죽게 될 자들과도 다르다.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대적은



[1] 서로 투쟁한다고 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서로 투쟁하였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이 싸움에서 양편이 죽임을 당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치는 일뿐만 아니라 살륙하는 일에서도 악인들을 사용하신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칼이기 때문이다(시 17:13). 그러나 전율의 잔이 그들의 손에 놓여지게 될 때는, 최악의 사태에 있던 하나님의 백성들보다 그들은 더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 여자의 후손은 단지 그 발꿈치를 상했으나, 뱀은 머리가 으스러져 버린 것이다.

비록 핍박당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잠시 동안은 크게 손해를 입고 크게 고난을 당할지라도, 그들을 학대한 자들은 결국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 그들보다 더 큰 손해를 입고 더 큰 고난을 당하는 자들임이 증명되고 만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갑절로 갚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계 18:6).



[2] 이 현재의 참상을 그들이 모두 당한다고 했다. 하나님의 백성이나 그 원수나 모두 하나님의 손에 맞으면 살륙된다. "의인에게나 악인에게 동일한 사건" 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곱이 그의 대적들처럼 그렇게 맞았는가? 아니다. 결코 그렇지는 않다. 그에게는 그 재난의 성질이 바뀌어져서 전혀 다른 것이 된다. 우리에게는 어떻게 보이든지 간에, 선한 백성들의 고통과 죽음과 악한 백성들의 고통과 죽음 사이에는 실제로 거대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2. 하나님께서 그 백성과 쟁론하실지라도 그것은 한도가 있을 것이며, 그 고통은 완화되고 누그러질 것이며,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만한 벌이 아니라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벌이 될 것이다(8절). 하나님은, 지혜로운 의사가 그의 환자에게 각 성분이 정확하게 들어 있는 약을 처방해 주거나, 혈관이 열렸을 때 얼마큼의 피를 넣어야 하는가를 지시해 주는 것과 같이, 그들에게 고통을 명령해 주실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고통을 명하시되, 그들이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는 아니하신다" (고전 10:13). 하나님은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이상의 무게에 눌리우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한 번에 조금씩 그들의 고통을 측량해서 주신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의 성질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심판으로 그들을 징계하시며, 자기의 분노를 모두 발하시지는 않는다. 고통이 쏟아지고 있을 때, 즉 하나님은 다투시는 것이다. 그러나 극한적으로가 아니라 정도껏 하신다. 하나님은 징계를 내리려 할 때, 우리가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를 고려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쟁논하실 때에도 - 그 때는 "동풍 부는 날" 이 되며, 노호하고 소란스러울 뿐만 아니라 강한 바람이 불고 불쾌한 날이다. 그는 그의 사나운 바람을 멎게 하시며, 저지하시며, 한계를 정하신다. 그래서 바람이 지나치게 불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자기 곡식을 키질하실 때 미풍으로 하신다. 그래서 겨는 날려 보내지만 알곡은 남겨 둘 것이다. 하나님은 바람을 명령하시며 모든 환란을 그의 저지 아래 두신다. "여기까지는 오라. 그러나 더 이상은 안 된다." 우리는 최악의 경우에도 낙심치 말자. 바람이 아무리 거세고 거칠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에게 "잠잠하라, 고요하라" 고 말씀하실 수 있다.

3.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괴롭히실지라도 그들의 고통이 그들의 영혼에 유익하도록 역사하실 것이며, 아비가 자식을 징계하듯이 그들의 마음에서 어리석음을 제거하기 위해 징계하실 것이다(9절). "야곱의 불의가 속함은 이것으로 얻음을 인함이다." 이것이 바로 환란의 의도이다. 환란은 그것을 위한 적합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그리고 환란은 그것과 함께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런 복된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환란은 죄의 습관을 억제한다. 또 그 환란 때문에 영혼의 더러움이 제거될 것이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죄의 행실을 끊게 할 것이다. "이것이 곧 그들의 죄를 제하는 결실이다." 즉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것이 바로 그것이요, 그들에게 끼치게 될 피해의 전부이다. 비록 고통이라는 댓가를 지불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이보다 더 큰 친절을 얻을 수는 없었다.

고통은 완화되고 누구러지며, 거센 바람은 멎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의도는 그들의 멸망이 아니라 개혁이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또 하나님은 우리를 이처럼 유하게 대하시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고통으로 그들을 치료하게끔 만든 그 구체적 죄는 바로 우상 숭배의 죄, 그 백성들을 가장 크게 유혹했고 또 그들이 이상하게도 쉽게 빠져 버렸던 죄였다. "에브라임은 우상과 연합하였다." 그러나 바벨론 포로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그(우상 숭배) 죄에서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대적하게 되었다. "에브라임은 이르기를, 내가 우상과 무슨 상관인고 하리라." 야곱은 "제단," 곧 우상을 숭배하던 제단의 "모든 돌로," 즉 그에게 소중했고 신청했던 그 돌을 "부서진 횟돌 같게 하였을 때," 그가 사랑하던 그 죄에서 떠났던 것이다. 그는 우상들을 경멸하고 횟돌 만큼도 여기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에 대한 분노를 품고, 거룩한 복수심을 가져서, 횟돌이 조각조각 부서지는 것처럼 그 제단의 돌을 부수어 버린다. "아세라와 태양상도" 이 참회자 앞에서는 "서지 못할" 것이며, 부수어져서 다시는 세워지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모든 우상의 유물을 부수어 버리고 멸하라는 율법에 따른 것이었다(신 7:5). 그리고 이 약속대로, 바벨론 포로 사건 이후에는 유대인은 우상과 우상 숭배에 대해서 이 세상에 가장 철저한 혐오를 느끼는 민족이 되었다. 환란의 의도는 우리와 죄, 특히 "우리의 불의" 가 되었던 것을 우리와 분리해 놓기 위한 것임을 명심하자. 또한 우리가 죄의 기회를 멀리 떠나 있고 우리가 거기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유혹받지 않으려고 필요한 온갖 경계를 기울일 때는, 환란도 우리에게 유익을 주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시 119:67).

4. 비록 예루살렘이 얼마동안 황무케 되고 버림받을지라도, 그 흩어졌던 친구들이 각기 쫓겨났던 그 모든 지역으로부터 다시 그곳으로 모일 날이 올 것이다(12, 13절). 비록 그 민족의 무리는 지각없는 백성으로 버림당할지라도, 참 이스라엘 자손인 자들은 양들을 흩어지게한 목자가 다시 찾을 때의 양떼같이(겔 34:10-19) 다시 함께 모아질 것이다.

이제 이 흩어진 이스라엘 사람들에 관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찰해 보자.



(1) 어디에서 그들이 데려옴을 당할 것인가? "여호와께서" 나무에 있는 과실처럼 "그들을 떠나게 하실 것이다" 또는 낟알에 있는 알맹이처럼 그들을 두들겨서 빼내실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발견 해 내시고, 그들과 함께 살고 있는 자들로부터 병합된 것처럼 보이는 자들로부터 그들을 분리하실 것이다. 유브라데스강 북동쪽에 있는 "하수에서부터," 남서쪽에 놓여 있는 나일강 곧 "애급" 시내에 까지" 살고 잇는 자들을 부르실 것이다. 그들은 앗수르 땅으로 쫓겨나, 그 대적의 땅에서 포로가 되었고, 거기에서 일용할 양식이 없어 곧 굶어 죽어가고 있으면서, 구출에 대해서는 거의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자들이다. 그리고 바벨론 포로 사건 이후에,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을 거역하여(렘 43:6, 7) 애굽에 그대로 남아 있다가 -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 "애굽 땅에서 버림받고 살던 자" 들을 부르신다. 하나님은 그들 모두를 위해 긍휼을 예비해 두고 계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이 비록 쫓겨났을지라도, 완전히 버림받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이실 것이다.

(2) 어떠한 방식으로 그들이 데려옴을 당할 것인가? "그가 너희를 일일이 모으시리라. 다수로서가 아니라, 행군하는 무리로서가 아니라, 몰래 훔치는 것처럼 조용히, 먼저 한 사람을 그 다음에 또 한 사람을 데려오실 것이다." 이것은 구원받을 남은 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며, 매우 어렵게 구원받을 것이고 불에 의한 것처럼 구원받을 자가 지극히 적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들은 무리로 오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마음을 충동시켜 하나씩 오게 할 것이다.

(3) 어떠한 수단에 의해 그들이 함께 모여질 것인가? "큰 나팔을 울려 불리니" 그 때 "그들이 돌아오리라." 포로들에 대한 고레스의 해방 선언이 바로 이 큰 나팔이다. 그것은 속박 속에서 졸고 있는 유대인들을 깨워 분발하게 했던 것이다. 그것은 면제년(해방의 해)에 공포되었던 희년 나팔의 울림과도 같았다.

이것은 복음의 선포에도 적용될 수 있다. 복음의 선포에 의해 쫓김을 당하여 거의 멸망케 된 그러한 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모이게 되는 것이다(멀리 있던 자들이 가까이 오게 된다. 복음은 여호와께 받아들여질 만한 해를 선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마지막날 천사장의 나팔 소리에 적용될 수 있다. 그 나팔 소리에 의해, 무덤에서 버림받은 자처럼 누워있던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모여지게 될 것이다. "예루살렘 성산에서 여호와께 경배하리라." 포로들이 다시 모여 그들의 땅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이 시선을 집중한 주된 일과 그들이 전념한 첫번째 일은 바로 여호와께 경배하는 것이었다. 그 거룩한 성전은 파괴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성산, 곧 "단을 쌓는 곳" 이 있었다(창 13:4).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유는 가장 귀중하고 바람직한 자유이다. 그리고 속박을 당하고 흩어짐을 당한 후에 그의 집으로 자유롭게 접근하는 일은 우리 자신의 집에 자유롭게 접근하는 것보다 우리에게 더욱 반가운 것이 되어야 한다. 복음 나팔의 울림에 의해 모여진 자들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에 들어와 교회에 추가된다. 그리고 모든 큰 나팔은 성도들을 함께 모아 "성전에서 주야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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