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이사야 5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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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1

의무에의 권면 (이사야 56:1,2)

이 구절들의 의도는 하나님께서 자비의 길로 우리에게 오실 때 우리는 의무의 길로 그 분을 만나러 나아가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대한 그의 자비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말해 주고 있다.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다" (1절). 그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룩하신 커다란 구원이다(그것은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찾았던" 구원인 때문이다 벧전 1:10). 이 구원은 산헤립이나 바벨론으로부터의 구원으로 상징되고 있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복음의 구원은 "여호와의 구원" 이다. 구원은 여호와에 의해 안출되고 성취되었다. 그 분은 그 구원을 자기에게 속한 것으로 자랑하신다.

2. 그 구원에는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 있다. 하나님의 의는 사도 바울이 자기 자랑의 기초로 삼으리 만치 복음의 아름다움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복음 안에는 하나님의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롬 1:17). 율법은 하나님의 의가 모든 죄인들을 죄 가운데 서게 하는 것이라고 나타냈지만 복음은 하나님의 의가 모든 믿는 자들을 방면시키는 것이라고 나타낸다.

3. 구약 시대 성도들은 이 구원이 오고 있으며 더욱이 도래하기 오래 전에 이 구원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예언자들을 통해 구원의 접근을 알았다. 다니엘이 70년이 다 채워져 갈 무렵 바벨론으로부터의 해방이 닥아왔다는 것을 예레미야서로 알았듯이 다른 사람들은 칠십 이레 말에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이 가까왔다는 것을 다니엘로써 이해했다.

Ⅱ.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한 그의 기대가 무엇인지 말씀해 주신다. 우리는 구원이 가까왔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하는대로 살아도 좋다. 왜냐하면 지금은 구원을 놓치거나 "구원에 다다르지 않을 위험이 없기 때문이다" 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방탕한 것으로 바꾸는 행위이다. 반면에 구원이 가까이 올 때는 죄에 대한 여러분의 경계도 갑절로 늘여라. 하나님께서 자기의 약속 이행에 대한 확신을 우리에게 충분히 주면 줄수록 우리는 보다 강한 순종의 의무 아래 있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이제 왔다. 그러나 구원은 아직 더 기대할 수 있기 때문에 사도는 동일한 논리로 기독교인 들에게 의무를 강조하고 있다.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롬 13:11). 임박한 구원을 위해 우리가 준비하고 갖추어야 할 것은 다음과 같다.

1. 모든 거래에서 정직하며 공평하라는 것이다. "너희는 공명을 지키며 의를 행하라(1절). 너희는 말하고 행하는 것을 양심적으로 하고 규칙대로 행하며 남에게 해가 될 일을 행하지 말아라. 남에게 마땅히 돌릴 것은 꼭 그대로 돌리고 너희가 응당받아야 할 것을 강조할 때는 너희 가슴에 공평의 법정을 개설하여 엄한 법을 조정하라. 너희가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율에 의거하여 처신하라.' 행정관은 현명하고 충실하게 공평과 정의를 시행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믿음과 회개의 신실성을 증거하고 자비의 길을 여는 데 필요하다.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진실하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상호간에 진실하기를 원하신다.

2. 안식일을 경건히 지킬 것(2절). 우리가 하나님의 시간을 도적질한다는 것은 정당치 못하다. 안식을 성수는 여기서 제 1 석판의 계명들을 대표하고 있다. 이 계명들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의 결실이다. 이것은 이웃에 대한 우리 사랑의 열매인 제 2 석판의 계명들이 공평과 정의로 표현되고 있는 것과 같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요구된 의무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틀림없이 지키라. 정성과 주의로 지키라. 더럽히지 말라. 나 남할 것없이 거룩한 안식을 범하지 말며 그날의 거룩한 일과를 빠뜨리지 말라." 만약 이것이 원래 바벨론에 있는 유대인들을 위해 의도한 것이라면 그들은 특별히 이것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것이 온당했다. 왜냐하면 성전에서 먼 거리에 있었으므로 그들은 율법의 규례를 지킬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날과 다른 날을 구별하므로써 이교도와 그들 자신을 구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으로 "사람과 인자" (한글 개역:인생)에게 요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안식일 성수는 복음 시대의 의무임을 시사한다. 복음 시대는 교회의 경계가 확대되고 다른 의례와 의식들이 철폐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안식일을 더럽히지 않기를 원하는 자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결심해야만 한다. 우리는 안식해야 할 뿐만 아니라 안식일을 지켜야만 한다. 왜냐하면 안식의 시간은 귀중하면서도 우리가 만약 크게 조심하지 않는다면 달아나 버리기 쉬운 까닭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식일을 붙잡아야 하며 꼭 잡고 놓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 일을 해내지 않으면 안 되며 꾸준히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이 의무를 수행하도록 하는 격려. "그것을 행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2절). 일 주 내내 일하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비결은 안식일 성수를 우리의 의무와 본분으로 삼는 데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공평과 정의를 보다 잘 행할 수 있게 된다. 경건하면 할수록 더욱 더 정직해진다(딤전 2:2, 한글 개역:단정하다).

3. 죄와 아무런 관계를 맺지않는 것. "그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치 않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2절). 신체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명예로나 자기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을 노엽게 하거나 자기 자신의 영혼에 상처를 주는 어떤 일도 행치않는 자는 복이 있다. 안식일을 잘 지켰다는 최선의 증거는 일 주 내내 선한 양심을 간직하려는 정성이 될 것이다. 거룩한 행위로 우리 얼굴이 사람들 앞에서 빛난다면 우리가 산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 나타날 것이다.

 

56:2 없음.

 

56:3

진실한 자에게 대한 격려 (이사야 56:3-8)

여기에서 선지자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격려하는 대상은 충심으로 하나님께 합세하면서도 큰 수고 아래서 낙심하고 있는 자들이다.

1.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기 때문에 실망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여호와께 연합하고" (3절) 언약으로 자기들의 영혼을 묶어서 영원히 그의 소유가 되게 하였다(세상과 혈육으로부터 관계를 단절하고 자신을 헌신하여 전적으로 하나님께 봉사하고 영광을 돌리는 것은 신앙의 요체요 생명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방인의 자손" 이기에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열납하실지 의심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방인이었고 이스라엘에 대한 나그네였으며 언약에 생소한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약속의 언약에 분깃이나 한 몫을 차지하지 못할까봐 우려했던 것이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나를 그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실 것이며 나를 자기 백서의 일원으로 인정하지 않으시고 내게 백성의 특권을 허용하지도 않으시리라" 고 말했다. "율법은 본토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동일해야 한다" (출 12:49)는 말씀이 왕왕 있었음에도 그들은 이런 우울한 결론에 도달하였다. 불신앙은 왕왕 선한 백성들로 하여금 실망되는 일을 생각하게 만든다. 불신앙이 꼬드기는 생각은 하나님이 직접하신 말씀과 상반되며 하나님께서 분명히 경계하신 것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그러므로 이방인이라 해서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방인은 그렇게 말할 아무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목회자 모든 연약한 교인의 불안이나 시샘을 진정시킬 수 있는 해답을 마련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교인의 생각이 아무리 비이성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목사는 그들의 생각을 눈여겨 봐야 한다.

2. 이스라엘에서 자식을 낳지 못했다고 하여 낙심하는 자들도 있었다. 고자가 말하기를 "나는 마른 나무라" 고 했다. 그는 자신을 그렇게 간주했으며 그것은 그의 슬픔이었다. 또 남들도 그를 그렇게 간주했으며 그것은 그의 수치였다. 그는 자녀가 없음으로 해서, 또 자녀를 가질 가망도 없었기에 무용지물로 생각되었다. 고자는 제사장 자리가 허용되지 않았고(레 21:20) "총회 중에 들어오는 것" 이 금지되었기(신 23:1) 때문에 그의 슬픔은 더욱 컸으리라. 자녀가 바다의 모래같이 하늘의 별같이 많아지리라는 약속은 이스라엘의 특별한 축복이었다. 그러나 고자라 해서 슬퍼하지 말 것은 메시야가 그들 중에서 나오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고자를 최악의 상태로 버려 두시기를 원치 않으셨다. 하나님은 그들이 이스라엘 회중과 레위 제사직으로부터 봉쇄되었다고 해서 복음 교회와 영적 제사장에서 제외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셨다. 아니, 칸막이 벽을 헐고 이방인들을 영입함으로써 그들의 규레 속에 들어오게 하셨듯이 제사법에 의해 접근이 금지된 자들도 복음의 규례 속으로 포용되게 되었다. 이런 시사에 대한 대답이 여기에 나오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고자가 신세 한탄을 하는 것은 주로 무자하다고 기록되는 때문인 것 같다. 이제 이 양 부류에 대한 적절한 격려가 주어지고 있다.

Ⅰ. 자녀가 없는 자들에게 대한 격려. 그들은 교회와 언약의 자녀가 되는 영예를 누린다곤 하나 그 영예를 전해 줄 대상이 없었다. 그들은 할례의 표적과 그 표적에 의해 획득되는 특권을 남겨 줄 대상이 없었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그들은 비록 이런 불명예와 고통에 처해 있지만 얼마나 좋은 특성을 지니고 있는가! 다소나마 이런 특성을 지니는 자만이 그에 따른 위로를 받을 자격이 있다.

(1) 그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대로 "하나님의 안식일" 을 지킨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주의 날을 거룩하게 지키느냐?" 라는 질문을 받으면 단번에 "나는 기독교인이다. 그러므로 나는 감히 다른 일은 하지 않는다" 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2) 그들은 모든 처신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선택했다." 그들은 선한 일을 행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목적으로 선한 일을 행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목적으로 선한 일을 행한다. 그들은 자신의 선택에 의해 기꺼이 그 일을 행한다. 그들은 때때로 연약함 때문에 하나님의 기쁨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일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일을 선택하여 이루려고 노력하며 목표로 삼는다.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일이라면 논란의 여지가 없이 우리의 선택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3)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잡는다." 이것은 다른 어떤 일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은혜의 언약은 복음 인에서 우리에게 제안되고 제공된다. 언약을 굳게 잡는다는 것은 그 언약에 동의하는 것이며, 그 제의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 조건에 응하는 것이며, 신중하고도 진실하게 하나님을 우리 하나님으로 삼고 우리 자신을 바쳐 그의 백성으로 되는 일이다. 언약을 굳게 잡는다는 것은 그 언약에 대해 완전히 그리고 단호히 동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계약에 도달하지 못할까봐 두려워하거나 수지맞는 흥정을 절대로 놓치지 않으려고 꽉 붙드는 자들처럼 우리가 언약에 동의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범죄자가 도피처인 지성소로 도망가서 제단의 뿔을 꼭 붙잡듯이 언약을 굳게 잡는다.

2. 비록 그들이 가족을 형성하지 못하더라도 이 성격에 부합되면 매우 수많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보다 나은 기념물(원의:장소)과 이름을 줄 것이다" (5절). 사람은 아들과 딸로부터 가치있고 바람직한 장소와 이름을 얻는다는 것이 여기에 가정되고 있다. 우리가 죽더라도 우리 자녀들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은 흐뭇하다. 그러나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자들은 보다 나은 장소와 이름을 소유하게 된다. 그것은 전자의 부족을 메꾸고도 남음이 있다. 장소(기념물)와 이름은 휴식과 명예를 의미한다. 즉 이것은 스스로 안락하게 사는 장소와 이웃 사이에서 추앙을 받으며 사는 이름을 가리킨다. 그들은 행복할 것이며 집에서나 밖에서나 편안할 것이다. 자식은 가정의 음악이요 전통의 화살이며 성문에서 원수와 말할 때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는(시 127:5) 존재이다. 비록 이런 자녀를 소유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들은 이 이상 가는 장소(기념물)와 이름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하나님께서는 그런 장소와 이름을 그들에게 주실 것이며 약속으로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몸소 그들의 거소와 영광이 되실 것이며 그들의 장소와 이름이 되어 주실 것이다.

(2) 하나님은 그것을 "자기 집과 자기 성 안에" 서 주실 것이다. 그들은 거기서 장소를 얻을 것이며 거기에 심어져 뿌리를 내게 될 것이며 평생토록 거기에 거하게 될 것이다(시 92:13, 27:4 참조). 그들은 "주야로 성전을 떠나지 않은" 안나(눅 2:37)처럼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리게 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집에서 이름을 얻게 될 것이다. 하나님과 선한 자들에게 얻는 이름은 "자녀의 이름 보다 나을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권리 언약의 축복에 대한 권리, 영생에 대한 우리의 소아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집에서 얻는 축복된 장소와 축복된 이름이 아닐 수 없다.

(3) 그것은 결코 단절되지 않고 "끊치지 않는 영원한 이름" 이 된다. 이것은 죽지 않으므로 결혼하지 않는 천사들의 장소나 이름과 같다. 영적 축복들은 자녀의 축복보다 훨씬 더 낫다. 왜냐하면 자녀는 근심 걱정의 빌미라고 할 수 있으며 자녀는 인간 생활 중 최대의 슬픔과 수치로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집에서 분배받는 축복은 확실한 기쁨과 항구적 영광과 흔들리지 않는 위안이다.

Ⅱ. 이방인의 자녀들에게.

1. 여기서는 이방인이 교회에 영접되리라는 것이 약속되고 있다(6,7절).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서 나올 때는 그들의 이웃을 설득시켜 되도록 많이 데리고 나오게 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자기집에 그들 모두를 수용하고도 남을 만한 장소를 마련해 두실 것이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어떤 조건으로 그들은 환영을 받게 되는가?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나올 때 그들을 따라와도 재앙을 입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아야 했다. 출애굽시에는 애굽인들이 신실하지 못한 마음으로 따라왔기 때문에 재앙을 입었던 것이다. 아니, 이방인의 아들들은 다음과 같이 행할 때 하나님의 집에서 장소와 이름을 얻게 될 것이다.

[1] 다른 신들과 모든 경쟁자들과 신으로 자처하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 여호와에게 연합하여 한 영이 될" 때(고전 6:17).

[2] 신하가 왕에게, 병졸이 장군에게 충실과 복종의 맹세로 연합하듯, 여호와께 연합하여 섞일 때, 이것은 순번에 따라 이따금씩 섞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그의 종이 되며 전적으로 그의 명령에 복종하며 그의 이익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다.

[3] 세상에서 그의 왕국의 세력과 그의 영예를 위해 애쓰는 친구로서 그에게 연합하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할 때." 이것은 하나님의 모든 계시와 하나님께 대한 모든 기념물을 아주 기뻐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동행한다는 데 주의하자. 왜냐하면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는 그를 신실히 섬길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원리에서 나오는 순종은 우리에게 가장 큰 기쁨이 될 뿐만 아니라 그 분에게도 가장 열납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때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 5:3)

[4]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않을 때. 성문 안에 있는 이방인에게는 특이 이것이 요구된다.

[5] 언약을 굳게 지킬 때 즉 언약의 예속 하에 들어오며 그 혜택 속에 들게 될 때.

(2) 그들이 앞으로 환영받을 특권은 무엇인가?(7절) 하나님께로 오는 이방인들에게 세 가지 일이 약속되고 있다.

[1] 도움. "내가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리라. 그들이 올 때 내가 그들을 환영할 뿐만 아니라 올 마음이 생기게 하며 그들에게 길을 가르쳐 줄 것이며 그들을 그리로 인도하겠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주의 빛과 진리를 보내어 인도하사 성산에 이르게 해 주시도록 기도한다(시 48:3). 이방인의 아들들도 똑 같은 안내를 받을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성산이다. 그는 그 위에 왕을 세우시고 그들을 시온 산으로 인도하심으로써 시온 성전의 예배자가 되게 하시는 동시에 시온 왕의 백성이 되게 하신다.

[2] 열납.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어에 기꺼이 닫게 되리라." 비록 이방인의 아들들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 제물의 열납성이 감소되는 것은 아니다. 경건한 이방인들의 영적 희생인 기도와 찬송은 경건한 유대인들의 기도와 찬송과 같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다. 그 사이에는 어떤 차이도 없다.

그들은 비록 이방인으로 태어났지만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신실한 자손으로 간주될 것이며, 기도함으로써 씨름하던 야곱의 자손으로 간주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헬라인도 유대인도 할례받은 자도 무할례자도 없기 때문이다.



[3] 위로. 그들은 영접받을 뿐만 아니라 그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나는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다." 그들은 은혜를 받아 하나님을 섬기게 될 뿐만 아니라 기쁘고 즐거이 섬기게 될 것이다. 이로 인해 하나님 섬기는 일은 하나님께 더욱 더 열납될 것이다. 우리가 여호와의 길에서 노래할 때는 우리 하나님의 영광이 큰 때다. 그들은 가서 "기쁨으로 자기 식물을 먹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는 일을 기쁘게 받으셨기 때문이다(전 9:7). 아니, 그들은 슬퍼하며 기도하는 집으로 왔지만 떠날 때는 기뻐서 돌아갈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처럼 걱정과 무거운 짐을 하나님께 털어놓고 하나님께 의뢰함으로써 평안을 찾아 돌아가며 다시는 얼굴에 수색이없을 것이다. 슬픔에 찬 영혼이 기도하는 집에서 기쁨에 차게 되는 경우는 비일비재이다.

2. 수많은 이방인들이 교회로 오리라는 것이 약속되고 있다. 우연히 방문하는 소수의 무리들이 환영을 받을 뿐만 아니라 큰 무리도 들어올 것이며 그들에게는 문이 활짝 열릴 것이다. "내 집은 만민의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7절). 그 당시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었다. 그리스도께서도 이 말씀을 인용하시면서(마 21:13) 이것을 복음 교회의 한 예표로 가리키신다(히 9:8, 9). 그리스도께서는 성전을 "그의 집" 이라고 하신다(히 3:6). 이제 이 집에 관하여는 다음과 같은 약속이 주어지고 있다.

(1) 그것은 희생의 집이 아니라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종교적 모임은 기도를 위한 모임이 될 것이다. 이로써 그들은 단결된 신앙과 상호간의 사랑에 대한 표시로 연합할 것이다.

(2) 그것은 유대인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베드로가 이것을 직접 깨달을 뿐만 아니라 세상에 알렸을 때 이 일은 성취되었다.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행 10:35). 가까이 오는 이방인은 죽이라는 것이 공포된 율법이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이제 더 이상 낯선 사람들이나 외국인으로 간주되지 않을 것이다(엡 2:19). 성전의 주된 목적은 기도에 있고 이방인도 환영해야 한다는 것은 성전 봉헌식에서 한 솔로몬의 기도에 나타난다(왕상 8:30, 41, 43). 부름을 받은 이방인들은 유대인과 한 몸을 이루게 되리라는 것이 암시되고 있는데 이것은(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대로, 요 10:6) "한 우리와 한 목자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쫓겨난 자를 모을 것이기 때문이다. 불신앙으로써 스스로를 내버렸던 많은 유대인들이 신앙으로 다시 인도될 것이며,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을 것이다(롬 11:5).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위해서이며(마 15:24),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를 모으기 위해서이며(시 147:2)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이며(사 49:6) 이스라엘의 영광이 되기 위해서이다" (눅 2:32).

[2] 그는 이들 추방자 외에 다른 사람들도 자신에게 모으실 것이다. 또는 일부 이방인들이 종종 교회로 들어왔지만 이들은 약속에 부합할 정도로 많지는 않다. 아니, 아직도 인도받을 사람은 더욱 더 많이 있다. "내가 이미 모은 본 백성 외에 또 모아 그에게 속하게 하리라(8절). 이들은 열방 중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모아들여 질 수확과 비교하면 첫 소산에 지나지 않는다. 그 때는 이방인으로 교회가 차고 넘칠 것이다." 교회는 성장하는 몸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사람들이 교회에 모일 때 우리는 신비로운 몸이 완성될 때까지 아직 더 많은 숫자를 희망할 수 있다. "내게는 다른 양들도 있노라" (요 10:16).

 

56:4 없음.

 

56:5 없음.

 

56:6 없음.

 

56:7 없음.

 

56:8 없음.

 

56:9

신자들에 대한 책망 (이사야 56:9-12)

여기에 선지자의 어조는 급변하여 위로의 말이 책망과 각성의 말로 바뀐다. 그리고 대체로 다음에 오는 세 장도 대부분 같은 액센트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부터는 새로운 설교가 시작된다. 선지자는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포로의 생활에서 건져 내시라는 것을 백성에게 확신시켰었는데 그 목적은 하나님께서 이 일을 행하실 때 살 자들을 위로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그들의 죄와 도발이 무엇이었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그들을 포로로 보내시리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이것은 포로전 약 100년전 이사야 당대에 살던 자들을 각성시키기 위한 말씀이다. 그들은 국가적 죄의 양을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 위에 이런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것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원수들의 흉포로 그들을 황폐케 하실 것이다. 이는 그들의 선지자들이 거짓을 행한 때문이다.

Ⅰ.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황폐케 하는 심판을 부르시고 있다(9절). 하나님의 목장의 아들은 이제 그의 도살장의 양이 되며 그의 공의의 희생물로 된다. 그러므로 "들의 짐승들과 삼림 중의 짐승들이 와서 삼키라는" 부름을 받고 있다. 이들은 야수로서 탐식하는 식성에서 이 일을 행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주신다. 아니, 그는 그들이 이 일을 행할 때 그들을 종으로써 고용하시는 셈이다. 비록 그들이 공의의 사자도 아니고 그들 마음속에 그렇게 생각지도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공의의 사자로 고용하고 계신 것이다. 이것이 주로 바벨론 군대의 침공과 그들의 병탄을 가리킨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들 추방자들이 교회로 모아 들여진 뒤(8절) 있을 로마인에 멸망을 가리킬 수도 있다. 로마 군대는 삼림 중의 짐승이 먹이를 삼키듯 예루살렘과 유대 민족을 멸망시켰던 것이다. 로마인들은 그들의 장소와 국가를 아주 빼앗아 가버렸다. 하나님께서 유혈의 역사를 행해야 하실 때는 그 일에 이용할 맹수를 지호지간에 두고 계신다는데 주목하자.

Ⅱ. 이 심판의 이유가 제시되고 있다. 목자는 양떼의 파숫군이다. 맹수의 접근을 감시하고 막으며 양을 보호하는 것이 바로 목자의 임무이다. 이런 파숫군이 되어야 했던 목자들이 충실하지 않고 부주의했으며 자기 일에 전념하지 않고 의탁된 일을 본분으로 삼지 않아서 양들이 맹수의 손쉬운 먹이가 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것은 이사야와 예레미야와 에스겔 당시의 거짓 선지자들(악한 길로 백성에게 아첨하며 악행을 계속할지라도 평강할 것이라고 말했다)과 마음대로 통치하던 제사장을 가리키는 것이다. 또는 이것은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 을 행했던 요시아의 아들들과 그들 밑에서 신뢰받던 대신들을 가리킬지도 모른다. 그들은 신뢰를 저버리고 타락하여 더렵혀져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유발사킨 비행을 개선하기는 커녕 더욱 확대시켰고 여호와의 맹렬한 노를 돌이키기는 커녕 오히려 더욱 부채질하였다. 그들은 공평을 지키며 의를 행해야 했으나(1절) 이 두 가지를 버렸다(렘 5:1). 또는 이것은 우리 구세주의 시대에 민족의 파숫군되었던 자들을 가리키는 말일 수도 있다. 즉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그 시대의 징조를 구별하고 메시야의 오심에 대해서 백성들에게 알려 주어야만 했는데도 오히려 메시야를 반대했으며 백성들로 하여금 그 분을 알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그 분께 편견을 갖도록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온갖짓을 행했다. 여기에는 파숫군에게 대한 아주 슬픈 평판이 나온다. "땅이여 네게 화로다." 너의 안내자가 그러할 때

1. 그들은 자기들의 직무에 대해 아무런 지식도 없었다. 그들은 비참하게도 자기 일에 대해서 무지했으며, 그들 스스로가 잘못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가르치기에 아주 적합치 않았다. "그 파숫군들은 소경이다" (10절). 그러므로 그들은 파수군이 되기에 적합치 않은 자들이었다. 만약 선견자가 보지 못하면 누가 우리를 위해 볼 것인가? "만약에 우리 안에 있는 빛이 어둡다면 그 어두움은 얼마나 클 것인가!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새파 사람을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라고 말씀하신다(마 15:14). 들의 짐승들은 삼키러 오는데, 파숫군들은 소경이어서 들짐승이 오는 줄 모른다. "그들은 다 무지한 자들이며" (10절) "몰지각한 목자들이다" (11절). 그 목자들은 양에 대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를 모르고 있으며 또한 "지식으로 그들을 양육할 수도 없다" (렘 3:15).

2. 그들은 그나마 가지고 있는 쥐꼬리만한 지식을 사용하지 못했다.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눈먼 파숫군이어서 위험을 식별할 수 없었듯이 그들은 그 위험을 경고하지 않는 벙어리 개였다. 만약 개들이 짖어서 목자를 깨우고 늑대를 놀라게 하지 못한다면 개를 양지기로 세울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의 경우가 바로 그러했다. 영혼의 책임을 맡은 자들이 사람들의 잘못을 결코 꾸짖지 않았으며, 그 일의 결국이 어떻게 될지 말하지 않았으며, 그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예언자들을 향해 짖고 물고 양들을 불안케 하면서도 늑대나 도둑에게는 어떤 대항도 하지 않았다.

3. 그들은 매우 게을러서 어떤 수고도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안일을 사랑했고 일을 싫어했다. 그들은 항상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였다" (10절). 그들은 슬픔과 피로에 못이겨 잠든 제자들과는 달리 일부러 잠을 청하려고 누웠으며 "영혼아 편히 쉬자" (눅 12:19)고 말했다. "좀 더 자자" (잠 6:10; 24:33). 그들의 목자들이 잠을 잘 때 그것은 백성들에게 화가 된다(나 3:18). 이스라엘을 지키는 목자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복이다.

4. 그들은 탐욕이 심한 자들이며 세상 것에 열렬한 자들이다.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11절). 그들은 아무리 많이 가지더라도 그것은 너무 적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은을 사랑하나 은으로 만족하는 법이 없다(전 5:10). 그들의 모든 물음은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얻을 것인가?" 이다. 그들은 삯만 받으면 일이야 되든 안되든 개의치 않는다. 그들은 양떼를 먹이지 않고 오히려 노략질한다. 그들은 어느 누구든지 다 자기 길만 바라보며 자신의 사리사욕만 염두에 둔다. 그리고 공공복리 따위는 눈꼽만치도 존중하지 않는다.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한다" (빌 2:21)는 것은 그 사도 바울이 그 당대의 파수꾼에 대해 터뜨리는 불평이었다. 대중의 공동 관심사들은 비참할 정도로 소홀히 되고 지체되고 있는 반면에 사람들은 모두가 제각기 자신의 의견을 선전하고 자기 편만 내세우며 자기 가정만 일으키며 모든 것을 제 마음에만 들게 한다. 그들은 어디있는 자이든 자기 이익만 도모한다. 그들은 어느 곳에서나 이익을 도모한다(Rem, Rem, quocunque moderem----즉 돈, 돈, 우리는 좋은 수단으로든 나쁜 수단으로든 돈을 벌어야만 한다). 만약 누군가가 그들의 입에 무엇을 채워 주지 아니하면 그들은 그를 섬기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전쟁을 준비하기" 까지 한다(미 3:5).

5. 그들은 즐거움만을 목적으로 삼는 더할나위 없는 쾌락주의 자들이었다. 그들은 본질적인 것보다 주연 속에 탐닉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오라, 내게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그들의 포도주 저장실은 서재보다 훨씬 더 잘 진열되어 있어서 마음대로 술을 꺼낼 수 있다). "독주를 잔뜩 마셔서 취하고 우리 자신을 넘치게 하자" 고 말한다. 그들은 종종 술이 취하는데 이것은 소위 마지못해 먹다가 술에 먹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의로 취하는 것이었다. 파숫군은 이와 같이 서로 초대하여 과응하도록 권장했다. 그들은 백성들을 자기들과 동석하여 술을 마시도록 유혹했다. 그래서 그들은 사악한 길에 있는 저들을 더 악하게 하고 그 마음을 더 완악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마땅히 책망을 했어야 했는데 그 반대로 행한 것이다. 파수군들 자신이 그들과 연합하여 그들을 방탕으로 인도하면서 어떻게 술취함이 해로운 것이라고 생각했겠는가! 그들은 아주 안심했고 자기들의 재산과 평안이 계속될 줄로 확신했다. 그들은 말하기를 "내일도 오늘처럼 크게 넘치리라. 우리는 오늘처럼 내일도 우리의 향락을 위해 소비할 수 있는 것이 많으리라" 고 한다. 그들은 무리한 생활로 자신의 수명과 죽음을 재촉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약함과 죽을 존재임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매일같이 하나님을 격분시키고 스스로 그의 분노와 저주 아래 노출시키면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든 관능적 즐거움의 불확실성을 결코 생각하지 않았고 육욕의 충족으로 자기들이 멸망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의 양심이 어떤 빈대를 하든지간에 그들은 악한 행로를 계속하기로 작정하고 오늘처럼 내일도 환락을 누리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잠 27:1)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라" (눅 12:20).

 

56:10 없음.

 

56:11 없음.

 

56:12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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