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이사야 6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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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

죄의 고백 (이사야 64:1-5)

여기서는 다음 사실을 살펴 볼 수 있다.

Ⅰ. 이 탄원은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경이적으로 나타나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다(1,2절). 그들의 사정은 앞 장(章)의 끝에 매우 슬프고 처참하게 표현되었다. 이러한 경우에는 "여호와여, 도우소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목적과 힘을 나타내시옵소서!"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했다(63:15). 여기에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출애굽기 3장 8절에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내려오시기를 기도한다.

1. 그들은 하나님께서 섭리 안에서 자기들에게 그리고 자기들을 위해서 자신을 나타내 주시기를 바란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어떤 특별한 일을 하실 때는, "빛을 발하시사" 자신의 힘을 나타내신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기를......" 하고 기도한다(1절). 이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구원하실 때 "하늘을 드리우시고 강림하시는" 것 같다(시 18:9). 이러한 것은 특별한 방법으로 자신의 권능과 의와 선하심을 표현해서,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일들을 주의 깊게 보고 알도록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바로 그것을 기도한 것이다. 즉 자신들이 바다에서의 하나님의 행동을 통해서 그를 확실히 보았듯이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구름 위에서 행동하심을 통해 그를 알게 되기를 원했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적용될 수 있다. "주님께서는 환호성을 받으며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이다. 오소서, 주 예수여 속히 오소서."

2. 주께서 모든 대적들을 무찌르고, 주의 앞에 길을 예비하시기를 원한다. "모든 산들이 주의 앞에서 진동케 하소서" (3절)하는 것은, 주의 진노의 불길이 바위산들을 용해시키듯이 대적들을 사르실 것이며, 용광로에 있는 금속과 같이 그들을 주 앞에서 녹게할 것을 뜻한다. 그렇게 되면 바위가 액체로 되고, 조작하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모양을 부어 만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주께서는 2절에서 "불이 섶을 사르도록 하신다." "불이 물을 끓임 같게 하사" (2절)함은 교회를 사랑하셔서 웅장한 개혁을 하기 위해 모든 것들을 들끓게 하신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이것은 "화산들" 이나 불타는 산들에 대한 언급이라고 한다. 화산이 어떤 때에는 근방에 있는 강이나 바다를 끓이는 유황을 내보내기도 한다. 아마도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와 경고의 능력을 현저하게 나타낼 것이다.

3. 그들은,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매우 잘 드러내고, "주의 이름을 알게 하며" (2절), 그의 친구들(이들은 전부터 그것을 알고 주의 권능을 믿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대적들까지도 이것을 알게 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들이 주의 이름을 알고 "주의 앞에서 떨며 (사 64:2) 벧세메스에 있는 사람들과 같이 이렇게 말하게 하려는 것이다. "누가 이 거룩한 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으리요?" "누가 주의 진노하시는 능력을 알리요?" 조만간 하나님께서는 주의 앞에 오려고 하지 않고 섬기지 않는 대적들에게도 자신의 이름을 알게 하고, 그 앞에서 떨게 하실 것이다. 만약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가 거기에 달려들어가 안전하게 되는 우리의 요새가 아니라면 그때에는 우리를 대항하는 요새가 된다. 그래서 우리가 거기로 달려들어가도 안전을 얻을 수 없게 된다. 아무리 백성들의 수가 많고 강하다 하더라도, 모든 민족들이 하나님의 앞에서 떨게 될 때가 올 것이다.

Ⅱ. 그 탄원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을 위하여 이전처럼 경이적으로 나타나 주기를 간청하는 것이다. "주는 능력" 을 가지신 분이므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라는 말은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 하는 훌륭한 주장이다(시 10:17).

1. 그들은 주께서 자기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실 때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셨던 일을 위해 탄원한다(3절). 주는 애굽 사람들에게 전염병으로 "두려운 일을 행하셨다" (3절). 그것은 "그들이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높은 손과 편 팔로 구원을 받았다는 생각을 가지기는커녕 여호와의 구원에 대해 실망을 하였다. 그러자 여호와는 무서운 모습으로 시내산에 강림하셨고, "주의 앞에서 진동하고 양처럼 뛰게 하셨다" (시 114:4). 그리고 그가 서신즉 땅이 진동하며, 그가 보신즉 열국이 전율하며, 영원한 산이 무너지며, 무궁한 작은 산이 무너진다고 했다(합 3:6).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해 많은 훌륭한 구원 사건들을 통해서 그는 "사람들이 전혀 기대하지 않은 두려운 일을 행하시며" 산처럼 당당하고 강하다 할지라고 위인들도 그 앞에서 무릎을 끓게 하시고, 많은 적대자들이 항복을 하게 한다(삿 4,5장; 시 68:7, 8).

어떤 사람은 이것을 산헤립의 강력한 군대가 패배한 사실에 관계시킨다. 이 군대는 바위와 산을 녹일 수 있을 정도의 놀랄 만한 신적 힘을 실증하였다.

2.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하셨던 일, 하고자 하시는 은혜로운 목적을 선포하신 것을 일반적으로 탄원한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안전과 행복을 위하여 행하신 준비는 매우 풍부하고 잘되어 있으므로 실망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충분하고 확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1) 그 준비는 매우 풍성하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 준하고 계셨다" 는 말을 들은 적도 없다. 하나님의 백성이 가지는 특징을 관찰해 보자. 그들은 의무를 이해하면서 그를 기다리고 있고, 자기들을 위하여 약속하고 예비하신 구원을 기다리는 자들이다. 이러한 백성의 행복은 어디에 매여있는지 관찰해 보자.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준비하실 것" 이고, 그들을 위해서 권고하면서 계획했던 바요, 그의 섭리와 은혜 가운데서 그들을 위해서 준비하고, 그들로 하여금 준비하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하셨고 앞으로 하실" 것이다(위의 구절이 이와 같이 읽혀질 수도 있다).

어떤 유대 학자들은 이 구절을 메시야의 시대를 위하여 보존된 축복으로 이해하였다. 사도들도 그렇게 해석하였다. 그리고 다른 어떤 사람들은 그것들을 도래할 세상의 영광을 말하는 것으로까지 확장 해석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예비하셨고, 자기를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신 것" 은 모든 축복을 나타낸다(시 31:19).

이것에 대해서는 "세상의 시초로부터" 지금까지 가장 자세히 살피고 호기심 많은 사람들에게도 보는 것으로나 듣는 것으로도 이것을 완전히 깨달은 적이 없다는 사실이 지적되어 있다. 하나님 자신 외에는 아직도 현재와 내새를 위해 예비하신 신령한 축복이 무엇인가를 보지도 듣지도 못했고, 또 이해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1] 그 대부분이 이전 시대에는 감추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고" "지혜있고 총명한 사람들에게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에 그것들은 복음에 의하여 나타나게 되었다. 사도들은 그렇게 적용한다(고전 2:9).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그것들을 우리에게 계시하셨다" 는 말씀이 뒤따라 오고 있기 때문이다(고전 2:10). 그리고 로마서 16장 25,26절과 에베소서 3장 9절을 비교하라. 사람들은 자기들이 "태초 이래로" 듣지 못했던 것을 마지막 날 이전에는 보게 될 것이다. 그때에는 장막이 찢어져서 아직 나타나지 않았던 영광이 드러날 것이다. 하나님 자신은 그가 믿는 자를 위하여 무엇을 쌓아 두었는지 안다. 그러나 다른 자는 아무도 모른다.

[2] 그것은 인간의 총명에 의하여는 완전히 파악될 수 없다. 그것이 계시되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은 영적이고, 우리의 마음이 이 감각 세계에서 흔히 받아들이기 쉬운 그러한 사상들과는 다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가장 위대한 것이요, 우리의 최고의 기대를 훨씬 능가할 것이다. 믿는 자들의 현재의 화평과 미래의 축복은 모든 개념과 표현을 능가하는 것이다(빌 4:7). 하나님 자신 외에는 아무도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이해력은 무한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초월성을 그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의 저작자에로 돌리면서 이런 식으로도 해석한다. "당신 외에는 어떤 신(神)도 그런 눈을 가진 자가 없나이다. 당신은 당신을 기다리는 자를 위해서 이렇게 행하시나이다" (혹은 행하실 수 있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경이로운 능력의 역사뿐만 아니라, 그의 경이로운 은혜의 역사에서도, 그리고 위대한 일들에서 뿐만 아니라, 그가 하시는 친절한 일들에서까지도 "그와 같은 다른 신이 없다" 는 사실, 그와 견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조차도 없다는 사실을 추론해 낼 수 있다.



(2) 그것은 매우 준비가 잘 되어 있다(5절). "주께서는 기쁘게 의를 행하는 자와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신다. 즉 자기를 위해 예비하고 있는 자들에게 자비로 응하신다(4절)." 여기서는 은혜로운 하나님과 은혜스러운 인간 사이에 있는 교제가 어떤 것인지를 알아보자.

[1] 하나님께서 우리로부터 기대하는 것은 우리가 그분과 함께 사귐을 가지는 것이다.

첫째, 우리는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의 의무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의를 이루어야" 한다. 즉 선한 것, 우리 주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을 하되 잘 해야 한다.

둘째, 우리는 기꺼이 우리의 의무를 감당해야 하며, 그 일을 "기쁘게 하며 의를 행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과 그의 율법을 기뻐해야 하며, 즐거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미해야한다. 하나님께서는 즐겁게 헌신하는 자와 즐겁게 섬기는 자를 사랑하신다. 우리는 "기꺼이 주를 섬겨야" 한다.

세째, 우리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의 모든 방법에 따라야 한다. 그리고 좋은 감명을 받아서 "그의 행하심 속에서 그를 기억해야" 한다. 그가 어디를 가든지, 즉 우리를 향해서 오든지, 우리와는 반대쪽으로 가든지 우리는 그를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그의 모든 행하심이 자비롭고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기쁘게 할 때에는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기억해야 하며, 우리와 갈등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인내와 순종으로 그를 기억해야 한다. "우리 주의 심판 속에서 주를 기다려 왔습니다." 왜냐하면 "재난의 날에는 생각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전 7:14).



[2] 만약 우리가 그에게 의무를 다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를 보자. "주께서는 그를 만난다" (선대하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허락하신 우정과 교제와 친밀성을 암시한다. 그는 그들을 만나고, 그들과 이야기하며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며, 그들의 말을 받아들인다(출 20:24; 29:43). 이와 마찬가지로, 그 말은 그가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는데 있어서 자유롭고 민첩함을 암시한다. 그는 "그들에게 자비를 예상하실" 것이다. 그리고 "기꺼이 의를 행하는" 사람들에게 "즐거이 선을 베푸실" 것이다. 그리고 "그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서 은혜롭게 기다리실 것이다. 탕자의 아버지가 그의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맞아들인 것과 같이, 그는 호개한 자기 백성들을 용서로써 만나신다(눅 15:20). 그는 사람들이 아직 말하고 있을 동안, 기도하는 백성을 평화로운 응답으로써 만나신다(55:24).

3.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불변성과 그의 약속의 고정성을 탄원한다. 이것은 백성들의 죄와 그에 대한 불만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다. "보라, 우리들로 인하여 주께서 여러 번 격분하셨다. 이것은 우리가 죄를 지었고 우리가 주의 진노의 표적 아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현상은 우리가 주를 기억하였고 그 현이 이미 오래 지났다는 자비의 방법이거나," "그러므로 우리는 주께서 진노하셨고, 우리가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약의 취지와도 일치한다. "만일 그 자손이 내 법을 버리며 내 규례대로 행치 아니하며 내 율례를 파하며,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내가 지팡이로 저희 범과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저희 죄악을 징책하리로다" (시 89:30-32). 그리고 이로 인하여 백성들이 파멸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에도 여러 번 그 파멸로부터 구원을 받아왔다(시 87:38 을 보라). 이렇게 계약의 계속성에 의해서 우리는 구원받을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하나님의 영원한 계약은 모두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죄 때문에 우리에게 진노하심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분노는 잠깐이요 곧 잠잠해 진다. 그러나 "그의 은혜 안에 생명이 있나니" "그 안에서 계속되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그의 은혜의 방법으로써 계속해 나가시고 보존하시며, 그것 때문에 우리의 구원이 있게 된다(54:7, 8 참조). 우리의 구원에 대한 희망이 우리 자신의 어떤 공적이나 충분성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약속에 세워졌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

 

64:2 없음.

 

64:3 없음.

 

64:4 없음.

 

64:5 없음.

 

64:6

이사야의 애가 (이사야 64:6-11)

예레미야의 애가가 있듯이, 여기에는 이사야의 애가가 있다. 그 둘의 주제는 같다. 즉 예루살렘의 파괴와 또 그 원인이 된 죄이다. 그러나 차이점도 있다. 이사야는 이 파괴를 멀리 떨어져서, 예언의 영에 의하여 슬퍼한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것을 눈으로 보았다.

Ⅰ. 고생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의 죄를 고백하고 슬퍼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의를 인정하고 그들 자신은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 무가치한 것으로 고백하고, 나아가서 자기들의 고난을 선용하면서 구원에 대비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를 믿을 수밖에 없었으며, 그 자비가 계속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들 자신 중에는 도와 줄 사람도 없고 격려해 줄 사람도 없으며, 그 간격을 메우거나 중재시킬 사람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죄로 말미암아 타락되어서 중재할 만한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 의무에 부주의했고, 태만하였다. 그러므로 아무도 중재를 할 수가 없었다.

1. 일반적으로 도덕이 타락되었다(6절). "우리는 다 부정한 물건 혹은 사람 같다." 마치 문둥병은 사람들을 그 진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사람들의 몸은 의식적(儀式的)으로 타락한 사람과 같다. 이러한 사람은 회막 뜰에 들어갈 수 없다. 또한 사람들의 몸이 "머리 끝에서부터 발바닥까지" 이그러진 상처뿐인 어떤 지긋지긋한 병에 걸린 사람같이 되었다(1:6). 우리는 모두 죄 때문에 하나님의 의에 대해 불쾌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해 혐오스런 것이 되었다. 왜냐하면 죄는 "주께서 싫어하는 가증한 것" 이고, 쳐다볼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다'(6절).

(1) "우리 중 제일 선한 자도 그러하다. 우리는 모두 타락하고 퇴쇄되어 있으므로, 우리들 중의 어느 누구도 기쁘게 의를 행했던 우리의 선조들과 비교해 볼 때 더러운 옷에 불과하며 쓰레기통에 내던져져도 할 말이 없는 자들이다 그들 중에 제일 잘났다고 하는 사람이 엉겅퀴와 같다."

(2) "우리가 아무리 최선의 성취를 이루었다고 해도 그러하다. 일반적으로 도덕이 타락했을 뿐만 아니라 예배를 행함에 있어서도 역시 잘못이 많았다. 의에 희생된 자들로 통하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대개 분열된 자, 불구자, 병든 자들이어서 하나님을 격분시키고 더러운 옷처럼 보기 싫은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무엇인가를 이룩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더러운 옷에 불과하다. 그 옷으로는 우리를 가릴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를 더럽힐 뿐이다. 진정한 참회자들은 자기들의 우상을 더러운 옷처럼 내팽겨쳤다(30:22). 우리의 최선의 의무는 너무나 불완전하고, 육체를 잘 지키지 못해서 그들은 더러운 옷과 같고 죄와 타락으로 가득찼다. 우리가 어떤 선한 일을 하려고 할 때도 악이 우리와 함께 나타난다.

2. 그들 중의 대부분은 신앙이 냉담하다(7절). 사람들의 많은 죄악으로 그 한도가 다 찼고, 그 그릇을 비울 어떤 방도 취해지지 않았다.

(1) 기도는 어느 면에서 보면 소홀히 되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우리를 바로 잡고 죄를 제거하기 위하여 주께 은총을 구하는 자도 없고,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의 죄로 인하여 당하게 되는 심판을 피하기 위하여 자비를 구하는 자도 없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악했다. 즉 그들이 기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시 14:3, 4 를 비교하라). "그들이 주를 부르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가 타락하게 되었다." 기도가 없다는 것은 불길한 징조이다.

(2) 기도는 매우 소홀히 수행되었다. 만약 여기 저기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매우 무관심한 탓이다.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다" 고 했다. 다음을 명심하자.

[1]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붙잡는 것이다. 그리고 신앙에 의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선한 의지를 우리에게 하신 약속과 선포를 붙잡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과 함께 그들을 변호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를 떠나려는 자기를 붙잡는 것이요, 또 이미 떠난 자를 돌아오도록 간청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야곱의 자손이 그와 투쟁하여 이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붙잡을" 때, 그것은 바닷가에서 낚시줄을 당기는 자가 마치 해변을 끌어당기는 듯이 하지만 실상은 자기가 해변으로 다가가는 것과 같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임하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그의 마음에 다가가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2] 자기가 하나님을 이길 수 있을 만큼 하나님을 붙잡으려고 기도하는 사람은 스스로 그렇게 하도록 분발하여야 한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역량을 의무이행에 투여해야 하며, 우리의 사상은 흔들리지 말며 우리의 사랑은 불타올라야 한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는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이 그 봉사를 위해 투여되고 발휘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서 실제로 숙고를 하고 그 일에 대해 정확하게 적용을 함으로써 "우리 안에 있는 은사를 분발시켜야" 한다. 이런 것을 행하는 사람이 없고, 화해자들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단순히 간섭하는 사람에 불과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비하신 태도로 다가오시기를 기대할 수 없다.

Ⅱ. 그들은 자기들의 고난이 자신들이 저지른 죄의 소산이요, 동시에 하나님의 진노하는 것을 시인했다.

1. 그들의 고통은 그들의 어리석음에서 왔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6절). 우리의 아름다움은 시들어 없어질 뿐만 아니라 지옥에 떨어져 사라지고 만다(문자적 의미는 그런 것이다). 우리의 신앙 고백도 가을의 낙엽처럼 시들고 우리는 마르고 시들게 된다. 우리의 재산도 사라지고, 아무 것도 없게 된다. 우리는 밑바닥에 떨어져서 경멸을 하고 불평을 한다. 그래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간다." 그리하여 우리를 사로잡고 가을에 바람이 불면 몰려가서 잎이 시들어 버리고 만다(시 1:3, 4). 죄악으로 인한 해롭고 격렬한 바람에 의하여 죄인들은 쇠퇴하고 결국 없어져 버린다. 죄는 사람들을 시들게 하고 파멸로 이끈다.

2.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진노로 사람들에게 고난을 가져다준다(7절).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셨다. 그리고 주께서 우리를 미워하시고 우리에게 어떤 원조도 하지 않으신다." 그들이 모두 더러운 옷 같아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얼굴을 숨기시고 그들을 몹시 잃어하신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우리를 소멸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시편 110편 7,8절에 있는 것과 똑 같은 불평이다. "우리는 주의 진노를 인하여 소멸되었도다." 주께서 우리를 녹이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광로에 넣은 것은 우리가 쇠찌꺼기로 소멸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금으로 정련되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정제되고 새롭게 탄생된다.

Ⅲ.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자기들의 관계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겸손하게 그에게 이 주장을 한다. 그리고 그것을 깊이 생각한 후에 쾌히 자신들을 하나님에게로 관계시킨다(8절).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매우 황송하게도 우리 마음대로 행동하고 주 앞에 감사하는 생활은 하지 않았지만 아직도 우리에게 주를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하셨나이다. 그리고 주께서는 우리의 잘못을 지적하시기는 하셨지만 우리를 완전히 버리시지는 않으셨나이다. 우리가 어리석고 부주의하며, 가난하고 저주스러우며, 적들에 의하여 짓밟혀졌다 하더라도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니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방탕한 아들이 회개하고 자기 아버지에게로 오는 것과 같이 회개함으로 주께로 돌아가나이다. 또한 우리는 기도함으로써 주께로 돌아가나이다. 우리의 아버지 외에 누구에게서 구원과 도움을 기대할 것이옵니까? 우리는 지금 아버지의 진노 아래 있나이다. 그러나 주는 화해하실 것이고 분노를 영원히 유지하지 않으실 것이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그들의 아버지이시다.

1. 창조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실 때 우리에게 존재를 허락하시고, 사람으로 만드셨으며, 자기 좋으신 대로 형성하셨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께서 우리를 자기가 좋을 대로 취급했다고 하여 다툴 필요가 없나이다(렘 18:6). 아니 우리는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선대하시며, 우리를 만드신 주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며, 새로운 형상으로 만드시기를 바라나이다. 비록 우리가 우리 자신을 파괴하고 말았지만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더러운 옷과 같으나 우리 모두는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우리의 더러움을 없애셔서 우리가 주께서 사용하시기에 적당하게 하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버리지 마옵소서(시 138:8)."

2. 계약에 의해서 그렇다. 이렇게 청원되었다(9절). "구하오니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 주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세상 사람들 전부입니다. 우리는 주의 백성이라고 불리웁니다. 우리의 이웃들도 우리를 그렇게 간주하고 그러므로 우리가 고통을 당하는 것은 주를 생각하게 하며, 우리의 처지에서 필요로 하는 구원은 주로부터만 기대할 수 있나이다. 우리는 주의 백성이옵니다. 사람들이 자기들의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겠나이까?(8;19) 우리는 주의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소서" (시 119:94).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섭리에 의해 견책을 받을 때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계약 관계를 굳건히 붙잡는 것이 좋다.

Ⅳ. 그들은 하나님의 분노를 돌이키고 그들의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하나님을 매우 귀찮게 하였다(9절). "우리는 자격이 없지만, 여호와여 과히 분노하지 마옵시며, 죄악을 하여금 영영히 기억하지 마옵소서." 그들은 자기들이 처하고 있는 심판이 제거되기를 노골적으로 기도하지는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1.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화해해 주시기를 위해서는 기도했다. 그렇게 되면 고난이 계속되거나 제거되거든 그들은 편할 수 있었다. "끝까지 노하지는 마소서. 아버지의 인자하심과 연민에 의하여 주의 붑노를 누그러뜨리소서." 그들은 "주여, 우리를 질책하지 마옵소서" 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필요 없는 말이었으리라. 단지 "진노하심으로써, 격한 분노로써 질책하지 마소서" 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얼굴을 숨기시는" 것은 단지 "작은 진노로" 되는 일이다.

2. 그들은 자기들이 지은 죄에 대해 응분의 처분을 받지 않기를 위해 기도한다. "영영히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마옵소서." 그들의 죄악은 사실상 영원히 기억될 만하다. 이것이 그들이 애원하는 바이며, 영원한 죄의 결과이다. 어떤 심판보다도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공포와 그들 자신의 죄에 대한 치명적인 결과를 더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실제로 하나님의 손 아래 있는 참으로 보잘것 없는 존재들임을 명백히 하였다. 그들은 이것을 사망의 쏘는 가시로 여겼다.

Ⅴ.font> 그들은 하늘의 법정에서 그들이 처한 비통한 환경과 그들이 슬퍼하는 황폐에 대해서 매우 우울한 표현을 한다.

1. 그들 자신의 집들은 폐허가 되었다(10절). 유다의 성읍들은 바벨론에 의해서 파괴되고, 거기에 살던 사람들은 끌려갔으므로 그 성읍들을 회복시키려 하거나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하여 그 성읍들은 몇 년이 가지 않아서 완전히 사막처럼 될 것이다. "주의 성읍들이 광야가 되었도다." 유다의 성읍들은 "거룩한 도성" 이라고 불리운다. 왜냐하면 거기에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에게는 제사장들의 나라 국민이기 때문이다. 각 도성에는 회당이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하나님이 예배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성읍들이 황폐하게 된 것을 슬퍼하였고,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께 탄원을 하였다. 성읍들은 당당한 도성들일 뿐만 아니라 거룩한 도성이었고 그곳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알려지고, 고백되며, 불리워졌었다. "이러한 도성들이 광야가 되었도다. 성읍의 아름다움도 더렵혀졌도다. 이제는 사람들이 이전처럼 거주하지도 않고 찾아오지도 않는도다. 그들이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회당을 불살랐나이다" (시 74:8). 인적이 드분 보다 작은 도성들이 광야처럼 버려졌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시온도 광야가 되었다. 다윗의 성전도 황폐하게 되었도다. 우리 열조가 찬송하던 우리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예루살렘도 이제는 파괴되어 비웃음거리가 되고, 온 땅의 치욕이 되었도다. 거룩한 성읍이 파괴되어 쓰레기더미가 되었도다." 사람들이 죄를 지음으로 인하여 얼마나 무서운 재앙이 내리는가를 보라. 신성에 대한 외적인 고백은 그러한 재앙을 막을 수가 없다. 거룩한 성들도 사악한 도시가 되면, 들은 곧 광야로 변하게 되리라(암 3:2).

2. 하나님의 전이 황폐하게 되었다(11절). 무엇보다도 그들이 가장 슬퍼하는 것은 "성전이 불에 탔다" 는 사실이다. 그러나 성전이 세워진 직후에 이미 사람들이 죄를 지으면 성전이 그렇게 되리라는 말을 들었었다. "이 전이 비록 높을지라도 무릇 그리로 지나가는 자가 놀랄 것이다" (대하 7:21). 성전이 파괴되었다는 것이 그들을 얼마나 애처롭고 슬퍼하게 하는가를 보라.

(1) 성전은 그들의 "거룩하고 아름다움 집" 이었다. 그것은 가장 화려한 건물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보기에는, 성전의 성결함이 그 성전의 아름다움이었다. 따라서 성전의 신성 모독은 가장 비참한 부면이었다.

(2) 성전은 "그들의 조상들이" 희생과 찬송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던" 곳이다. 오랫동안 존속되었던 그들의 국가와 영광이 재로 변했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들의 조상들이 종종 하나님을 찬양했던 시온의 노래를 현재는 부를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을 더욱 괴롭혔다. 그들은 성전이 하나님께서 찬양을 받아왔던 집이라는 점을 탄원하면서 그와 같은 이유로 하나님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선조들이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을 주의 깊게 살펴 봄으로써 하나님과 그의 선조들과의 계약을 인식했다.

(3) "우리의 즐거워하던 곳이 다 황무하였나이다." 그들은 모든 욕망과 기쁨, 그리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서, 그들이 참여했던 모든 일들에서, 그들은 무한한 기쁨을 가졌었다. 성전의 장식들, 제단과 탁자 특히 안식일과 월삭, 그리고 그들의 모든 종교적인 축제들을 기쁘게 지켜왔었고, 그들의 제사장들과 엄숙한 집회 등과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들이 황무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백성은 자기들의 가장 성스러운 것들을 자기들의 가장 큰 기쁨으로 친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들로부터 거룩한 의식과 은혜의 수단들을 뺐으라. 그러면 너희는 그들의 "즐거워하는 것들을 모두 황무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그 이상 무엇을 더 가졌는가? 여기에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이해 관계가 서로 얼마나 깊이 뒤엉켜 있는가를 깨닫자.

그들은 자기들이 거주했던 성읍에 대해서 말할 때 그것은 "거룩한 도성" 이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그 성읍들은 하나님께 바쳐졌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에 대해서 말할 때 그들은 그것을 우리의 "아름다운 전" 이라고 말하였고, 그 장식들을 "우리의 즐거운 것들" 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을 진정으로 신봉하고, 그것의 모든 혜택을 누렸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는 우리의 모든 관심을 하나님 예배에 기울인다면, 우리는 만족스럽게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길 것이다. 그분은 완전하시기 때문이다.

Ⅵ. 그들은 현재당하고 있는 황폐에 대해서 겸손하게 하나님과 논쟁을 하면서 사랑이 넘치는 충고로 결론을 맺고 있다(12절). "여호와여 일이 이러하시거늘, 주께서 오히려 스스로 억제하시리이까. 곧 주께서 이런 것에 만족할 수 있나이까? 그래서 우리로 심한 괴로움을 받게 하시리이까?

주께서는 당신의 전이 황폐하게 된 것을 보지 않습니까?

그것에 분노하시지도 않고 복수하지도 않으시렵니까? 질투하시는 하나님께서 질투를 잊으셨습니까?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주의 원통을 푸시옵소서(시 74:22). 주여 당신께서는 모욕을 당하시고 비난을 받았나이다. 그래도 주께서는 침묵을 지키시고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시렵니까? 하늘에 대해서 할 수 있는 가장 심한 모욕을 질책하지 않고 지나가시렵니까?" 우리는 욕설을 들을 때도 복수가 우리에게 속해 있지 않고 우리의 논리보다 하나님을 더 생각하기 때문에 침묵을 지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존엄에 손상을 당할 때 그것을 설욕하셔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린다. "하나님이여 침묵치 마소서(시 83:1). 나의 찬송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시 109:1). 주의 대적들의 확신에 대해서 말하소서. 주의 백성의 편안과 구원에 대해서 말하소서. 주께서는 매우 슬프게도 우리를 곤궁에 넣으시고 영영히 우리를 고난에 처하게 하시렵니까?" 하나님의 전이 황무하게 되고 그 폐망으로부터 아무 것도 다시 일으키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은 선한 백성들이 보기에는 매우 쓰라린 고통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만족하시지는 않는 다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백성은 그들의 고난이 극한에 이르지도 않을 것이고, 영원히 갈 것도 아니며 가볍게 잠깐 나타났을 뿐이라는 것을 믿게 되는 것이다.

 

64:7 없음.

 

64:8 없음.

 

64:9 없음.

 

64:10 없음.

 

64:11 없음.

 

64:12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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