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로의 운명(1) (이사야 23:1-14)
두로는 항구 도시이기 때문에 그 멸망에 대한 예언을 적합하게도 "다시스의 선척들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을지어다" 라고 시작되고 끝나고 있다. 왜냐하면 두로의 모든 사업, 재물, 그리고 명예가 그 해운업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해운업이 망하게 되면, 그것들은 모두 망하게 될 것이다.
다음 사실들을 관찰하자.
Ⅰ. 두로의 번영을 보자. 두로의 몰락이 더욱 암담하게 보이리라는 사실이 주목되고 있다.
1. 바다에서 통상하던 "시돈의 상인들이" 처음에는 두로를 "부요케 했다" (2절). 시돈은 두로보다 더욱 오래된 성읍으로서, 똑같은 해안에 위치해 있었고, 북방의 나라들과 더 많은 동맹을 맺고 있었다. 한편 두로는 처음에는 시돈의 식민지에 불과했다. 그러나 딸이 그 어미보다 더 자라나서, 더 주목을 받게 되었다. 대성읍들이 처음에 대단히 부요했던 사실을 생각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굴욕이 될 수도 있다.2. 애굽은 두로를 발전케 하기 위해 매우 많이 도왔다(3절). 시홀은 애굽의 강이었다. 시홀강과 그 강과 연결되는 해양을 통해 애굽은 두로와 통상을 했다. 시홀강의 추수가 곧 애굽의 수입원이었다. 바다의 재물과 수출 상품에 의한 수익은 목초와 곡식에 의한 수익이 시골에게 큰 수확물이듯, 무역 도시에게 있어서는 큰 수확물이다. 그리고 때로 "그 강(개역:" 나일" 도 됨)의 추수" 는 그 땅의 수확물보다 더 나은 재원이었다. 또는 이 말이 애굽 땅의 모든 산물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두로 사람들은 애굽의 소산을 수입했다. 그리고 그 산물들은 그 강의 범람에 기인하는 그 강의 수확이었다.
3. 두로는 열국의 시장, 곧 그 지역의 큰 상업 중심지가 되었다. 세상의 각국 사람들을 거기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특히 상인들의 총집결지가 되는 특정한 시기에는 더욱 그러했다. 이런 사정은 다른 예언자에 의해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겔 27:2, 3 이하). 부지런한 손이, 그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축복에 의해 어떻게 부요함을 만드는가 보라. 두로는 물을 가는 쟁기만 가지고 있었으나, 근면하여 부유하고 크게 되었다.
4. 두로는 환란과 쾌락으로 이름난 "희락의 도성" 이었다(7절). 희락에 마음이 매우 끌렸던 자들은 거기에서 온갖 종류의 오락물과 사람의 아들 딸들의 온갖 즐거움과 무도회, 연극, 오페라, 그리고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각종의 것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그들을 안이하고 교만하게 만들었고, 그들은 그러한 종류의 어떤 기쁨을 알지 못하거나 맛을 보지 못한 시골 사람들을 멸시했다. 이것은 또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에 의해 그들에게 주신 경고를 믿거나 숙고해 보는 일을 매우 싫어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너무 즐거워서 하나님의 경고를 마음에 둘 수가 없었다. 두로는 또한 "고대에 건설된" 도성으로서, 그 고대성을 자랑했으며, 결국 그것은 방심을 조장했다. 이것은 마치 두로가 아득한 옛날에 건설된 고대 성읍이 되었기 때문에, 결코 종말이 없는 성읍이어야 하며 틀림없이 영원의 시기까지 지속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5. 두로는 "면류관을 씌우던 자" (8절), 곧 스스로 면류관을 쓰던 성읍이었다. 두로의 장관들의 권세와 위풍은 대단하여, 자기들에게 의지하고 거래하는 자들에게는 면류관을 더 씌워 주기도 했던 것이다. 그것은 다음 말들 속에 설명되어 있다. "그 상인들은 방백이다" 라고 했다. 즉 그들의 상인들은 방백처럼 편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역자들은" 어디로 가든지 간에,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세상에 존귀한 자들" 이라고 했다. 지금은 성인들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매우 경멸조로 말하고 있으나 이전에는, 그리고 가장 지혜로운 나라들 중에는, 세상에서 존경을 받았던 상인들과 무역자들이 있었던 것 같다.
Ⅱ. 여기에 두로의 멸망을 보자. 두로가 그 이웃들과 다툼을 일으켰기 때문에 환란을 초래했다는 사실은 나타나 있지 않다. 오히려 자기의 재물로 그들을 유혹함으로써 환란을 초래했다고 했다. 그러나 두로의 재물이 느부갓네살로 하여금 두로를 망하게 하도록 유인한 것이라면, 느부갓네살은 실망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두로는 13년 간의 포위에 맞서다가,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게 되자, 그 거민들은 그들의 가족과 물건들을 가지고 수로를 이용하여 자기들이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지방으로 도주함으로써, 느부갓네살에게는 텅 빈 성 읍만 남겨 주었기 때문이다 - 렐레경(Sir watler Raleigh)의 저서 History of the World에 있는 "두로의 역사" (lib ii Cap. 7 sect. 3, 43.p. 283)를 보라. 그 책은 이 예언과 두로에 관한 에스겔의 예언에 대해 큰 빛을 줄 것이다.
1. 여기에 두로의 멸망이 어떻게 예고되어 있는가를 보자.(1) 그 항구는 노략당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사람들에게 무시되고 말 것이다. 다시스의 배들이 쉴 편리한 항구가 없어지고, 모두가 "황무하여" 질 것이다(1절). 따라서 집이나, 배를 댈 부두나, 수부들을 위한 주막집이나, 항만의 입구가 없어질 것이다. 암도 두로는 모래로 막히거나 대적에 의해 봉쇄될 것이다. 또는 두로가 파괴되고 황무하여졌기 때문에, 다시스와 깃딤에서 그 항구로 들어가곤 하던 배는 이제 더 이상 그리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소식이 그들에게도 전파되" 거나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두로가 파괴되어 황무케 되었다는 이 암담한 소식을 받았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에게는 더 이상 두로에서 할 일은 없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깨닫자, 대적들에게 약탈당한 자들은 오랜 친구들에게서도 대게 멸시당하는 것이 이 세상의 실정이다.
(2) 그 거민들은 경악하여 충격을 받는다. 두로는 섬이었다. 세상에서 매우 분요하고 소란스러움을 피우고 큰 환호를 치르곤 했던 그곳 거민들은 이제 조용해지고 잠잠하게 될 것이다(2절). 그들은 애곡하는 자들처럼 앉아 있을 것이며, 슬픔에 크게 위압당하여 그것을 표현할 기력조차 없게 될 것이다. 자신을 자랑하고 이웃을 무시하던 그들의 교만은 이제 잠잠케 될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분요하게 만드는 백성들을 곧 조용하게 만드실 수 있으며, 그들의 말문이 막히게 하실 수도 있다. 가만히 있으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행하시리라(시 46:10; 슥 2:13). 너희는 그에게 저항할 수 없다.
(3) 그 이웃들은 놀라며, 부끄러워하며, 저들도 비탄에 잠긴다. 처음에 두로를 부요하게 해 주었던 "신돈이 부끄러워한다" (4절). 왜냐하면, 굽이치는 파도가 두로의 소식을 시돈에게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로에서 "바다의 보장" (保障:영문에는 Strength - 힘), 그 절정에 이르는 물결이 선포하여 말하기를, "나는 이전처럼, 구로하지 못하며, 생산하지 못하였도다. 나는 예전의 습관대로 젊은 사람들의 위탁물들을 두로로 가져와 거기에서 장사와 사업으로 그들을 양육하지 못하게 되었다" 고 했다. 장사와 사업은 두로를 매우 부유하게 하고 사람이 들끓게 만든 것이었다. 또는, 두로 주변에 배들이 적재되어 있었던 바다는 자기의 모든 자식을 여의고, 양육하고 기를 자가 아무도 없게 된 슬픈 과부처럼, 이제 황무케 될 것이다. 실상 애굽은 두로보다 훨씬 더 넓고 더 이름 난 나라였다. 그러나 두로는 통상면에서 매우 넓은 거래 관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주위의 모든 나라들은 그 후 오래지 않아 모든 애굽의 멸망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 했던 것처럼, 그 한 성읍 두로가 멸망한 소식을 듣고 매우 가슴 아파할 것이다(5절). 또는, 혹자의 풀이대로, "그 소식이 애굽에 이르면, 그들이 두로의 소식을 인하여 통도하리라." 그것은 애굽의 통상이 두로 성읍으로 인해 손실을 입게 되었기 때문이며, 또한 그것은 그들 자신의 멸망으로 향하는 위협적인 단계였기 때문이다. 이웃집에 불이 났으므로 그들의 집도 위험하게 된 것이다.
(4) 상인들은 가능한 한 자기의 물건들을 다른 지역으로 보낼 것이며, 그들이 재산을 모은 곳이고 확고하게 생각했던 두로는 버리게 될 것이다(6절). "오랫동안 섬 거민(개역은 "해변" - 역주)이었던 너희는(왜냐하면 두로는 대륙으로부터 반 마일 가량이나 떨어져 잇는 바다에 있었기 때문에 섬이라 했다) 이제 부르짖을 때가 되었다. 너희는 이제 다시스로 이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너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노정은 다시스 바다로(혹자의 견해대로는 스페인 도시 파르테스스) 또는 너희의 다른 식민지로 서둘러 가는 길이다." 자기들의 산은 튼튼히 서있으며 요동할 시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이 세상에는 영원히 있을 도성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산들이 떠나고 작은 산들은 옮겨지리라" (54:10).
(5) 피신할 수 없었던 자들은 포롤 잡혀가는 길 이외는 다른 것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 당시 정복자들은 자기들이 정복한 자들을 자기 나라의 농노로 데려가고, 자기들의 농노는 자유민으로 본국으로 보내는 것이 하나의 관습이었기 때문이다. "자기 발로 먼 지방까지 가서 거하리라" 고 했다(7절). 그들은 도보로 급히 사로잡혀 갈 것이며, 그들의 비참을 향하여 피곤하고 먼 발걸음을 옮길 것이다. 아무리 화려하고 장엄하게 살았던 자들이라도 죽기 전에 어떤 역경이 처하게 될지 모른다.
(6) 도망가려고 시도했던 자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추적당하여 적의 수중에 떨어질 것이다. 두로는 차례차례 비극의 대양이나 심연으로 흘러내려, 마치 "강(개역:" 나일")과 같이 땅에 그의 화가 넘치게 될 것이다." 또는 비록 위험을 피하려고 최대한으로 급속히, 마치 강물처럼 달아날지라도 "더 이상 힘이 없으리라" (개역과는 전혀 다름 - 역주). 그들은 빨리 피로해져 더 이상 나갈 수 없으며, 대적의 손에 쉽게 희생물이 된다. 그리고 두로가 더 이상 힘이 없는 것과 동시에 그 자매 시돈도 더 이상 위안을 얻지 못한다(12절). "너 학대받은 처녀 딸 시돈아 이제 이겨서 뽑내는 갈대아 살람들에 의해 곧 제압당할 네게 다시는 희락이 없으리라. 다음은 네 차례다. 그러므로 일어나 깃딤으로 건너가라. 그리이스로, 이탈리아로, 네 안전을 위해 피신할 수 있는 곳으로 도망하라. 그러나 거기서도 네가 평안을 얻지 못하리라. 네가 약간의 휴식을 얻기를 원하는 곳에서도 네 대적이 너를 방해할 것이며, 네 두려움은 너를 불안하게 만들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이 세상 어느 곳에서 안식을 누리리라고 약속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한 장소에서 불안한 자들은 다른 장소에서도 그러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죄인들을 쫓는다면, 반드시 그것은 붙잡을 것이다.
2. 그러나 어디에서 이 고통이 올 것인가?(1) 하나님이 그 장본인이 되실 것이다. 그 고통은 "전능자에게서 오는 멸망" 이다. 이런 질문들을 할 것이다. "두로에 대한 이 일을 누가 정하였느뇨? 누가 그것을 고안했느뇨? 누가 그것을 결의했느뇨? 누가 이처럼 당당하고 아름다운 성읍을 멸할 것을 마음에서 발견할 수 있느뇨?" 그리고 이 멸망이 이루어지리라는 것이 어찌하여 가능한가?"
여기에 대해 다음 같이 대답될 것이다.
[1] 하나님, 즉 무한히 지혜로우시고 공정하시며 그의 어떤 피조물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셨고 또 앞으로도 결코 해를 끼치지 않으실 하나님이 바로 그것을 계획하셨다(9절). 모든 것들을 주관하시며, 자신의 일의 전말을 밝히시지 않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다." 그 재난은 그의 뜻의 계획대로 행해질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가 의도하고 있는 것은 "모든 영광의 교만을 욕되게" 하고, 그것을 더럽히고, 모욕하며, 짓밟히도록 던져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존귀한 자로 멸시를 받게" 하고, 비루하게 만들어, 그들이 스스로를 자랑하지 못하고, 여느 때처럼 다른 사람들에 의해 칭찬받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절대적이고 불가항력적인 권능을 드러내보이기 위해 횡포를 부려서 두로에 이러한 참화를 내리시지는 않았다. 그는 두로 사람들의 교만을 벌하시기 위해 그런 이를 하신 것이다. 그 밖의 많은 죄들, 곧 우상 숭배, 정욕, 그리고 남을 압제하는 일이 그들 중에 만연되었을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교만의 죄가 하나님이 두로와 다투시는 그 특별한 이유라고 밝혀져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기 때문이다. 온 세상이 두로의 황폐함을 주목하고는 놀라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여기에서 그 황폐에 대한 한 해설을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그가 그 사건으로 의도하신 바가 무엇인가를 세상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첫째, 하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의 모든 영광이 허탄하고 무상함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다. 즉 그 영광이 아무리 본질적인 것으로 보일 때일지라도 얼마 안가서 곧 사라져 버리는 것임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비록 이처럼 큰 멸망의 댓가를 치르고라도 사람들이 이 교훈을 완전히 배울 수 있다면, 다행한 일이었을 것이다. 학식과 재물, 화려함과 권세, 자기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신용을 얻고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사람들의 영광인가? 장엄한 집, 값진 가구, 그리고 화려한 외양이 그들의 영광인가? 두로의 멸망을 보라. 그리고 얼룩지고 더렵혀져 티끌 속에 묻힌 이 모든 영광을 보라. 하늘 나라에서 존귀한 자들은 영원히 존귀한 자로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로의 귀인들을 보라. 일부는 추방되었고, 일부는 사로잡혀 갔다. 모두들 빈곤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세상에서 존귀한 자는 - 심지어 가장 존귀한 자일지라도 - 얼마나 쉽게 멸시를 받게 될지 모른다는 결론을 내릴 것이다.
둘째, 하나님은 이것으로써 그들이 그 영광을 자랑하고 우쭐거리며, 그 영광이 지속되리라고 확신하는 일을 막으려 하셨다. 두로의 멸망이, 모든 장소와 사람들로 하여금 교만을 주의하도록 하는 경고가 되게 하자. 왜냐하면 스스로를 높이고자 하는 자는 낮아지리라는 사실이 온 세상에 선포되고 있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이 그 일을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권세를 그 손에 잡고 계시사, 그것을 충분히 행하실 수 있다(11절). "여호와께서 바다 위에 손을 펴셨다" 고 했다. 그는 여러 차례 그렇게 행하셨고, 홍해가 갈라진 것과 바로가 그 속에 빠진 것이 그 증거가 되고 있다. 그는 때때로 매우 튼튼한 나라들까지도 흔드셨다. 그리고 이제 그는 그 상업 도시에 대해 명을 내려, 그 견고한 성을 훼파하게 하셨다. 그 도성의 아름다움이 그 도성을 위해 중재하지 못할 것이며, 오히려 욕되게 될 것이다. 동시에 그 힘은 그것을 보호해 주지 못할 것이며, 부러질 것이다. 이처럼 잘 요새화되었고 또 강력한 여러 동맹국들을 관계하고 있던 성읍이 완전히 전멸되리라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자들이 있었다면, 그들로 하여금 그 견고한 성을 훼파하도록 명을 내리신 자는 만군의 여호와라는 것을 알게 하라. 누가 그의 명령을 반박하거나 그 일의 집행을 방해할 수 있겠는가?
(2) 갈대아 사람들이 그 사건의 도구가 될 것이다. "갈대아 사람의 땅을 보라" 고 했다(13절). 갈대아 사람과 그들의 땅은 앗수르 사람들에 의해 얼마나 쉽게 멸망되었는가? 비록 그들의 손이 바벨론의 "망대를 세우고 궁전을 일으켰을" 지라도, 앗수르 사람들이 그것을 헐어 황무케 했다. 여기에서 두로 사람들은 옛 갈대아 사람들이 앗수르 사람들에 의해 쉽게 정복되었던 것과 같이 두로도 다른 갈대아 사람들에 의해 쉽게 격파되리라고 추론할 수 있었다. 바벨은 "광야에 거하는 자들" 을 위해 앗수르 사람들이 세웠다. 두로는, "선척" 을 위하여(앗수르 사람들은 그 광대한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에서 바샤 사람들과 거래하며 인도 바다에서 거래하는 배들과 수부들을 위해 그것을 세웠다), 곧 "광야 사람들을 위해서" 세운 것일 것이다. 왜냐하면 바벨론을 "해변의 광야" 라고 부르기 때문이다(21:1). 아뭏든 두로는 이와 비슷한 목적으로 바다 위에(한글:" 해변에") 건설되었다. 그러나 앗수르 사람들은 - 라이트푸트(Light foot) 박사의 말에 의하면 - 그 낮에 즉 히스기야 시대에 두로를 멸망시켰었다. 그리고 이제 다시 두로는 느브갓네살 왕에 의해 멸망되게 되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몰락을 더 관찰해 본다면 볼수록 - 우리는 흔히 우리 자신의 번영과 지위가 지속되리라고 생각하지만 - 그런 확신을 가져서는 안 된다.
두로의 운명(2) (이사야 23:15-18)
Ⅰ. 두로가 계속 황폐해 있도록 정해진 시기가 나와있다. 두로가 영구히 황폐해 있지는 않을 것이다. "두로가 칠십 년을 잊어버림이 될 것이다" (15절)라고 했다. 두로는 그처럼 오랫동안 무시될 것이며 세상에 알져지지 않은 채 묻혀 있을 것이다. 두로는 예루살렘이 멸망되던 무렵에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멸망되었고, 예루살렘이 황폐해 있는 기간 만큼 두로도 황폐해 있었다.
그 교만하고 야망에 찬 정복자의 어리석음을 보라. 모든 거민이 두로를 떠났고, 두로를 다시 채우고 튼튼케 할 만한 백성이 하나도 없는 처지가 되었는데, 더 부유한 자가, 더 강한 자가 그곳의 주인이 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사람들이 성읍을 파멸시키고,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게 만드나(시 9:6), 그런 일로 그들이 무슨 낙을 찾는지 알아보면, 실로 놀라게 될 것이다. 느브갓네살은 두로의 교만을 짓밟았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목적에 이바지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후 곧 그의 더 큰 교만도 꺾으셨다.
Ⅱ. 두로가 다시 그 영광을 회복하리라고 예언되어 있다. "한 왕의 연한 같이" 또는 한 왕조나 왕가 곧 느브갓네살 왕의 변함같이 "칠십 년이 필한 후에" 그렇게 될 것이다. 실제로 만기가 되면, 두로의 황무함은 끝났다. 그리고 고레스가 유대인들을 해방시켜 주고 예루살렘을 증건하도록 장려했을 때, 아마 그와 동시에 두로 사람들도 해방시켜 주고 두로를 중건하도록 장려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처럼, 어떤 장소의 번영과 역경은 사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두 가지가 병행한다" (전 7:14 참조). 따라서 가장 영광스러운 성읍들도 방심해서는 안 되며, 가장 황폐한 성읍들도 낙심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예고된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하나님의 섭리는 이 파괴된 성읍에 대해 다시 미소를 보낼 것이다(17절). "여호와께서 두로를" 긍휼로 "권고하시리라" 고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다투실지라도 영원히 다투시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두로의 옛 친지가, 즉 두로가 받아들인 식민지들과 그들이 거래하던 무역 도시들이 두로를 권고하리라고 적혀 있지는 않다(그것들은 두로를 잊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뜻하지 않은 어떤 기회에 두로를 권고하실 것이다. 그는 두로에 대한 그의 분노를 멈출 것이다. 그러면 모든 일들은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것이다.2. 두로는 그 무역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했다. 두로, 너무나 음탕하여 얼마동안 징계를 받고 있던 기생처럼 노래할 것이다. 그러나 자유케 될 때,(타락의 성향은 매우 강렬하다) 두로는 다시 옛 유혹의 기교를 사용할 것이다. 두로의 사람들이 사로잡혔다가 귀환하고 남은 자들이 거기에서 활기를 되찾을 때, 그들은 무역을 추진시킬 방법을 고안해 낼 것이며, 가장 좋은 상품을 조달하고, 그 이웃에게 염가로 판매할 것이며, 모든 고객들에게 은혜를 베풀 것이다. 그 때에는 한동안 잊혀졌던 기생이 다시 화제의 대상이 되며, 노래와 춤으로 고객들에게 소개되고 "수금을 가지고 성읍에 두루 행하며," 밤에는 세레나데를 부르면서 "기묘한 곡조로 많은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될 것이다. 이러한 노래 자체는, 온건하고 절제있게 그리고 정중하게 사용된다면, 흠잡을 데 없고 무방한 오락이다. 그러나 정조를 귀중히 여기는 자들은 그것을 지나치게 좋아하거나 그 면에서 뛰어나고자 하는 야망을 가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 지금은 어떠하든지 간에 - 고대에는 노래란 기생들이 어리석은 자들을 유혹하던 미끼 중에 하나였기 때문이다.
두로는 이제 점차로 다시 열국의 시장이 될 것이다. 두로는 "다시" 그 거래를 "취리(取利)하여" 이전에 형통하던 때에 무역했던 "지면에 있는 열방과 음란을 행할 것이다" (즉, 상거래를 가질 것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 예언자는 기생의 비유를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재물을 사랑하는 것은 영적 간음이다. 그러므로 탐욕에 차있는 백성들은 "간음하는 자들" 이라고 불리우고 있다(약 4:4). 그리고 탐심은 영적인 우상 숭배이다.
3. 그 무역을 다시 회복하게 되면, 두로는 이전보다 더 잘 이용할 것이다. 그리고 두로는 바로 자기의 참화를 통해서 그런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18절). "그 무역한 것과 이익을 거룩히 여호와께 돌리라" 고 했다. 두로의 무역과 그 무역의 모든 이익은 여호와와 그의 영예를 위해 바쳐질 것이며, 하나님의 사업에 사용될 것이다. 그것은 이전처럼 그들의 교만을 일으킨 물건이나 그들의 세상적인 확신을 지지하는 것으로서 간직하고 쌓아두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경건과 자선의 행위에 투자될 것이다. 그들이 그들 자신과 가족들의 생계에서 저축해 둘 수 있는 것은 "여호와 앞에 거하는 자," 곧 제사장들과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봉사하는 여호와의 사역자들의 "자료가 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생활을 화려하고 장엄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관심을 조금도 다른 곳으로 쏟지 않고 오직 그 직무에만 쏟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그들과 그 가족들이 "배불리 먹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값지고 좋은 옷을 입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튼튼하고 오래 입을 수 있는, 잘 입을 자료를 얻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비록 젊더라도 제사장들은 노인들이 흔히 입는 그러한 소박하고 위엄있는 옷을 입어야 했던 것 처럼(혹자의 풀이대로) "노인들의 옷" 을 입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1) 한편 이 예언은 신앙이 새로운 두로에 세워지리라는 것, 곧 그들이 참되신 하나님의 지식을 얻게 되고 하나님의 이스라엘과의 교제를 맺게 되리라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
아마도 두로인들이 바벨론에 있는 유대인들(그들에게도 예언자들이 있었다)의 포로들과 같이 지낸 일이, 그들로 하여금 거기에서 유대인들과 함께 하나님 예배에 참석하고 싶은 마음을 불어 넣었을 것이다. 바벨론 유배가 유대인들을 우상 숭배에서 치료했던 것처럼, 두로인들을 우상으로부터 돌아서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유대인들과 함께 해방되고, 그것이 유대인들 때문이라고 믿을 만한 이유를 지니게 되자, 그들이 다시 두로에 정착했을 때는, 그 성전에 예물과 희생 제물을, 그리고 제사장들에게는 선물을 바치고자 했던 것이다. 우리는 그 당시에 유다 땅에 거하던 두로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다(느 13:16). 두로와 시돈은 이스라엘 성읍들보다 그리스도 시대에 와서 신앙에 더욱 호의를 갖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들 중에 가셨다면, "그들은 회개했을" 것이기 때문이다(마 11:21). 그리고 우리는 두로에게 그리스도인들을 만날 수 있다(행 21:3, 4). 또한 여러 해 후에 거기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융성했다.
일부 랍비들은 두로의 개종에 대한 이 예언을 메시야의 날에 관련시키고 있다.
(2) 이 예언은, 재산을 가진 자들에게는 그것을 하나님의 봉사와 신앙을 위해 사용할 것이며, 그리고 그렇게 투자한 것은 가장 훌륭히 쌓아 둔 것으로 여기라고 지시하고 있다. 상인들의 무역한 것과 날품군들의 이익도 모두 하나님께 바치라 했다. 무역한 것(우리가 종사하는 일)과 이익(우리 일의 소득)은 "여호와께 성결하다" (" 거룩히 돌리라")고 했는데, 이 말은 대제사장의 견대 위에 새겨진 표어(출 29:30)와 율법이 명한 십일조(레 27:30)를 바치라는 것을 말해 준다. 복음의 시대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한 약속이 있는 것을 보라(슥 14:20, 21). 우리는 무엇을 행하든 얻게 되든, 먼저 우리 자신을 여호와께 거룩히 바쳐야 한다. 우리가 특별한 소명(직업)을 통해서 하나님과 함께하며, 경건을 좇아 행하는 일반적인 행동을 할 때, 곧 우리에게 경건과 자비의 일이 많이 행하며, 가난한 자를 후하게 구제하고 사역자를 도우며 복음을 장려할 때, - 만일 우리가 그런 행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신실하게 목적하고 했다면 - 그때 비로소 우리가 사업한 것과 그 유익을 하나님께 거룩히 바쳐진 것이 된다. 따라서 우리의 재물을 땅 위에 간직하거나 쌓아둘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늘 곧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 에 간직되고 쌓여지기 때문이다(눅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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