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이사야 4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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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1

하나님의 대권 (이사야 44:1-8)

이 구절 속에서는 다음 두 가지 큰 사실이 잘 밝혀져 있다.

Ⅰ. 하나님의 백성은 행복한 백성이며, 특히 그들과 하나님과의 언약 때문에 더욱 행복하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처럼 복음 이스라엘의 표상이었다. 그들의 행복은 다음 세 가지에 의해 얻어지고 있다.

1. 그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 관계(1,2절). 이스라엘은 여기에서 "여수룬," 즉 "정직한 자" 라 칭해지고 있다. 그러한 자들만이 나다나엘처럼 간사함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만이 이 약속의 영원한 은택을 입을 것이다. 야곱과 이스라엘은 앞 장의 끝 부분에서 하나님의 노를 매우 격동시키고 그를 화나게 한 것으로 묘사되었고 이미 저주와 비방이 그들에게 내려졌었다. 그러나 마치 하나님의 동정심이 그에게 기울어지고 후회하심이 함께 일어난 것처럼, 긍휼이 non-obstante 즉 이 모든 다툼에도 불구하고, 주어지고 있다. "나의 종 야곱아! 이제 들으라.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너와 나는 다시 친구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나는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 라고 말씀하셨다(43:25). 허물이 이 거리감을 만들어 놓는 장본인이며, 그것이 제거될 때 긍휼의 시냇물은 예전의 수로로 다시 돌아온다. 죄의 용서는 언약의 모든 축복의 입구인 것이다.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므로" 그들을 위해 이러이러한 일을 행하시겠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히 8:12). 그러므로 "야곱아! 들으라." 이 반가운 말을 들으라. 그리하여 "야곱아! 두려워 말라." 네 죄를 두려워 말라. 그것이 사함받았느니라. 네 환난을 두려워 말라. 죄사함에 의해 그 환난의 성격도 바뀌었느니라.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관계는 그들에게 매우 용기를 주고 있다.

(1) 그들은 하나님의 "종" 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를 섬기는 자들을 인정하시고 편드실 것이며, 그들이 해를 당하지 않도록 보살피실 것이다.

(2) 그들은 하나님의 "택한" 자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택을 지키실 것이다. 그는 그의 것인 자들을 알고 계시며 그가 택한 자들을 특별한 보호 아래 두신다.

(3) 그들은 그의 창조물이다. 그가 "그들을 지으셨고" 존재를 부여하셨다. 그가 "그들을 조성하셨고" 모양을 만드셨다. 그가 일찌기 그들과 함께 시작하셨다. 즉 "그들을 모태에서 조성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그들이 어려울 때 도우실 것이며 그들이 봉사할 때 도우실 것이다.

2. 하나님께서 그들과 그들의 자손에게 보증하신 언약의 축복(3,4절).

(1) 자기의 영적 빈곤을 깨닫고 피조물이 그것을 충당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자각한 자들은 하나님 안에서 풍성한 만족을 얻을 것이다. "내가 갈한 자에게," 의에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리라." 그러한 자는 갈증을 채우게 될 것이다. 어떤 감각적인 즐거움보다도 영적 축복을 진실로 원하는 자들에게 물이 부어질 것이다.

(2) 메마른 땅처럼 갈한 자들을 하나님의 은혜가, 그 은혜의 강물이 촉촉히 적셔 줄 것이며, 하나님께서 친히 증대케 해 주실 것이다. 즉 땅이 몹시 말랐다면 하나님께서 은혜의 강물로 그것을 적셔 주실 것이다.

(3) 하나님께서 부어 주실 물은 그의 "성령" 이다(요 7:39). 하나님은 그 아들, 즉 그리스도에게 그것을 한량없이 부어 주실 것이며(갈 3:16) 믿음의 모든 후손들에게, 기도로 씨름하는 야곱의 모든 후손에게 정도껏 부어 주실 것이다(눅 11:13). 하나님께서 그의 종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붙드셨을 때, 그의 성령을 보내시어 우리를 붙들게 하시리라는 것이 바로 신약의 큰 약속이다.

(4) 거룩한 성령의 이 선물은 하나님께서 말세를 위해 풍성히 내려 주시기로 하신 큰 축복이다. "내가 나의 신" 을 즉 "나의 복을 내리리라." 하나님께서는 그의 성령을 내리시는 곳에는 그밖의 모든 복도 내리실 것이다.

(5) 이것은 교회의 자손과 후손을 위해 보유되어 있다.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하나님이 되리라." 은혜의 언약이 그렇게 흐를 것이다. 이처럼 양자(養子) 특권에 참여한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은 양자의 영을 주실 것이다.

(6) 이 결과 교회는 크게 증대할 것이다. 교회는 그처럼 먼곳까지 보급될 것이다. 그것은 장래에도 퍼질 것이며," 그처럼 빨리 자랄 것이다. 그리고 버들이 풀 가운데서 솟아나는 것같이 그들이 그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보다 덕스럽고, 칭찬할 만한 일에 있어서 탁월하고 뛰어날 것이다(4절). 자라나는 세대가 희망적이고 유망한 것을 보는 것이 교회의 큰 행복이며 선한 사람의 큰 즐거움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을 그 축복, 축복들 중의 축복을 내리신다면 그들은 그렇게 될 것이다.

3. 그들이 그들의 언약 부분에 기꺼이 한 동의(5절). 유다인들은 포로에서 귀환했을 때 하나님과의 언약을 갱신했고(렘 50:5) 특히 그들이 더 이상 우상과 상관하지 않을 것을 다시 약속했다(호 14:2, 3, 8). 타락한 자들은 이처럼 회개하고 첫 믿음을 행해야 한다. 밖에 있던 자들도 유다인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나타나신 것에 이끌리어 그 때에 그들과 연합할 것이다(슥 8:23; 에 8:17). 그리고 그들은 "무리가 여호와께 속하였다" 말하고, "야곱의 이름으로 자칭할" 것이다. 왜냐하면 "낯선 자들과 그 땅에 태어난 자들을 위해" 한 가지 율법, 한 가지 언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틀림없이 그것은 더 나아가 이방인의 개종을, 그리고 그리스도 승천 후 성령이 내렸을 때 이방인의 무리가 "여호와께 연합되고 교회에 더하여" 지리라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이 개종자들은 "연달았으며" 서로 지위와 민족이 다른 매우 많은 사람들로서, 모두 하나님께 환영받는다(골 3:11). 한 사람이 이렇게 행할 때 다른 사람이 그 본을 따라 그렇게 할 것이며, 그 때에 또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할 것이다. 이처럼 한 사람의 열심히 많은 사람들을 자극할 수 있다.

(1) 그들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맡길 것이다. 한 사람이 나머지 사람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이 스스로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여호와께 속하였다. 그가 나를 주관할 명백한 권리를 갖고 계신다. 그리고 내가 그에게, 그의 모든 명령과 그의 모든 뜻에 복종한다. 나는 오직 그의 것이며 전적으로 그의 것이고 영원히 그의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이며 그의 유익과 그의 명예가 될 것이다. 살거나 죽거나 나는 그의 것이 될 것이다."

(2)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과 결합할 것이며, 자기 백성과 자기 아비의 집을 잊고서 "야곱의 이름으로 자칭" 하고 하나님의 가문의 자격과 제복을 입기 원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사랑하고 그들과 사귈 것이며 그들에게 우정의 오른 손을 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송사를 지지하고 교회의 전체적인 유익을, 그리고 교회의 각 개인의 유익을 구할 것이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꺼이 그들과 운명을 나누고자 할 것이다.

(3) 그들은 이 일을 매우 엄숙히 행할 것이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은 계약을 확증하기 위해 사람이 거기에 서명하고 그것을 그의 결의서와 증서로써 전해 주듯이 "자기가 여호와께 속하였음을 손으로 기록하리라." 우리가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것을 표현할 수록 그것은 좋은 것이다(출 24:7; 수 24:26, 27; 느 9:38). 단단히 붙들어 맬수록 빨리 깨닫는다.

Ⅱ.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행복한 백성인 것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위대하신 하나님이며 그만이 하나님이시다. 이것은 또한 앞의 구절과 마찬가지로 그를 의지한 모든 사람들에게 풍성한 만족을 안겨 주고 있다(6-8절).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안위함에 대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보자.

1. 우리가 의지하는 하나님은 논쟁할 여지없는 주권과 불가항력적인 능력을 지니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여호와," 즉 스스로 존재하며 스스로 충만한 자이시다. 그리고 그는 "만군의 여호와" 이시며 천지의 모든 무리의 천사와 사람들의 여호와이시다.

2. 그는 그의 교회와 관련을 맺고 계시며 그것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계신다.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시며 그 구속자" 이시다. 이스라엘의 옹이므로 그의 구속자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을 자기의 왕으로 삼는 자들은 그를 자기의 구속자로 얻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만이 하나님이심을 주장할실 때 그 자신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선포하시어, 그의 백성이 그를 신봉하고 그 안에서 승리할 힘을 얻을 수 있게 하신다.

3. 그는 영원하시다. 즉 "처음이요 마지막" 이시다. 그는 영원부터, 세상이 있기 전부터 하나님이시며 영원까지, 즉 세상이 다시 있게 되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이실 것이다. 창조하시는 하나님이 없었다면, 아무 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탱하시는 하나님이 없었다면, 모든 것은 곧 다시 없어졌을 것이다. 그가 전부이시며 만물이 그로부터 나오는 제일 원인이시다. 그는 만물이 그에게서 나와 그에게로 돌아가는 마지막 목표이며(롬 11:36), "알파와 오메가" 이시다(계 1:8).

4. 그만이 하나님이시다.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6절). "나 외에 신이 있겠느냐?" (8절) 우리는 가장 위대한 학자에게 호소해 보자. 그들의 학식으로 모든 일이 해결되었는가? 세상을 가장 크게 아는 자들에게 호소해 보자. 그들은 모든 것을 경험했는가? 세상에는 "신이라 칭하는 많은 신" (고전 8:5, 6)과 가짜 신들이 있다. 그러나 무한하고 영원하신 우리 하나님 이외에, 세상의 창조자이며 온 창조물의 보호자이고 은인이신 그 이외에, 자기의 예배자를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행할 수 있으며 자기의 것인 자들을 위해 행하시고자 하는 그 이외에, 다른 신이 있는가? "너희는 나의 증인이라. 나는 너희에게 둘도 없는 자가 되어왔다. 너희는 다른 신들을 시험해 보았다. 그들 중에 네게 모든 것을 충족시켜 주는 신이 있거나 그들 중 나와 같은 자가 있는 것을 너희가 발견했느냐? 과연 나 이외에 하나님이 없느니라." 집을 지을 기초를 위한 반석이 되실 수 있는, 도망할 피난처를 위한 반석이 되실 수 있는 여호와 이외에(문자 그대로) "반석이 없다." 하나님은 반석이시며 "대적의 반석이 우리의 반석과 같지 못하도다" (신 32:4, 31). "나는 다른 신이 있음을 알지 못하노라." 그것은 마치 그가 이렇게 말씀하신 것과 같다. "나는 나와 겨루기를 제안하거나 감히 공명정대한 재판을 요구해온 자를 결코 만난 적이 없다. 나보다 더 잘 너희를 도울 수 있는 자를 내가 안다면, 나는 너희를 그들에게 위탁하겠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자를 아무도 모른다." 이와 같이 여호와 이외에는 하나님이 없다. 그는 무한하시다. 그러므로 다른 신이 있을 수 없다. 그는 모두 충족하신다. 그러므로 다른 신이 필요치 않다.

이것은 바벨론으로부터 그들을 건지리라는 약속에 대한 하나님의 백성의 소망을 견고케 하기 위한 의도를, 그리고 그것을 위해 그들의 우상 숭배를 치료하기 위한 의도를 지니고 있다. 환난이 목적을 이루었을 때, 우상 숭배는 제거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이신 여호와" 시라는 그들의 첫번째 대 강령을 상기하고 있다(신 6:4).



(1) 그러므로 그들은 다른 신에게 소망을 둘 필요가 없었다. 해가 비치는 자에게는 달이나 별, 또는 그들이 켠 등불이 필요치 않은 것이다.

(2) 그들은 다른 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의 하나님은 그들의 대적들의 거짓되고 위장된 어떤 신이 그들을 해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유익을 그들에게 행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5. 하나님 이외에는 그 누구도 장차 올 일을 예언할 수 없었다. 하나님은 이제 그의 선지자를 통해 2백년 후에 이루어질 일을 세상에 통고하셨던 것이다(7절). "나처럼 외칠자가 누구뇨? 고레스로 하여금 바벨론에 외치게 하고 이스라엘을 바벨론에게서 불러낼 자가 누구뇨? 효과적으로 부를 수 있으며, 각 피조물과 각 마음을 마음대로 지휘할 수 있는 자가 하나님 이외에 있느냐? 누가 나처럼 고하며, 그것이 어떻게 나에 의한 것처럼 되겠느냐?" 하나님은 그 이상이시다. 그는 각피조물 그것에 대한 선견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그것을 차례대로 보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단독적으로 조종하고 지시하시기 때문에 그것을 "차례로 베풀기(우리 성경와 다름;역주)" 도 한다. 어느 누구가 이것을 가장할 수 있는가? 그는 "그가 옛날 백성" 을, 이스라엘 백성을 "세운 이후" 로 항상 그가 뜻하셨던 계획대로 일들을 차례로 베푸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세상의 어느 나라가 자기 민족에 대해 할 수 있는 것 보다 더욱 확실하고 안전하게 그들 민족의 고대사에 대해 설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그 백성을 그의 고유의 백성으로 세운 이후로, 그의 섭리는 그들과 특별히 친숙했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일어날 사건, 즉 그들이 애굽에 속박당하고 거기에서 건져지며 가나안에 정착하리라는 것을 미리 알려 주셨다. 모든 것은 거룩한 목적 속에서 뿐만 아니라 거룩한 예언 속에 배열되어 있었다. 다른 신이 그렇게 행할 수 있었는가? 다른 신이 그들에게 그처럼 폭넓은 관심을 기울이려 했는가?

그는 사칭하는 자에게 장차 올 일을 보일 것을 요구하고 계신다. "가능하다면 그들로 하여금 바벨론을 멸하고 이스라엘을 건질 자의 이름을 우리에게 말하게 하라. 아니, 그들이 장차 올 일을 말할 수는 없다고 한다면, 그들로 하여금 될 일을, 가까이 문 앞에 온 일을 말하게 하라. 그들로 하여금 내일 일어날 일을 우리에게 고하게 하라.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러니 그들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말라. 그들이 너희에게 무슨 해를 가할 수 있겠는가? 너희 구원이 합당한 때에 이루어지리라고 내가 너희에게 말하고 엄숙히 표명했을 때, 그들이 어떻게 그것을 방해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는 자들은 그 밖의 어떤 반대되는 세력이나 책략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44:2 없음.

 

44:3 없음.

 

44:4 없음.

 

44:5 없음.

 

44:6 없음.

 

44:7 없음.

 

44:8 없음.

 

44:9

우상 숭배의 우매성 (이사야 44:9-20)

하나님은 저주 이 선지자를 통해 우상 숭배자들의 어리석음과 이상스러운 우둔함을 언급하셨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 항목을 확대하고 있으며, 그들이 경멸스럽고 우스꽝스러운 존재라는 것을 충분하고도 명백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 담화는 다음과 같은 의도를 지니었다.

1.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이 바벨론에 사로잡혀 가면 그 나라 풍속을 따라(그들은 그들의 종교를 지키는 성읍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의 군주와 주인이 된 자들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우상을 숭배하기 쉬운 그 강한 시험에 대비하여 무장하도록 하기 위해서,

2. 그들이 우상 숭배로 기울어져 가는 기질을 치료하고(우상 수배는 가장 쉽게 그들에게 달라 붙었던 죄였다), 그들을 바벨론으로 보내게 한 요인들을 시정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막대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시행하는데 유용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막대기를 설명하는 데 유용한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은 이 두 가지의 음성이 함께 청종되고 응답될 수 있게 한다.

3. 그들을 감독하는 갈대아 사람에게 말해 줄 만한 것을 그들에게 제공해 주기 위해서. 그 감독관들이 그들을 욕했을 때, "너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고 물을 수 있었다.

4. 그들의 하나님이 나타나시어 그들의 대적의 신에 대한 공포를 제거하고, 그와 보좌를 겨루는 이러한 우상처럼 괘씸한 경쟁자를 세우는 자들을 반드시 치시리라는 것을 기대하도록 그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여기에서 우상 숭배자들의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한 것으로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볼 수 있다.

Ⅰ. 우상 숭배자들이 할 수만 있다면 가장 수치스러운 어리석음과 말할 수 없는 무분별에 대한 비방을 제거하는 도전이 주어짐(9-11절). 그들은 꾀를 써서 계획하고 손으로 우상을 만들며 그것을 "그들의 기뻐하는 우상" 이라 부른다. 그들은 그것을 극히 좋아하며 거기에서 큰 것을 기대한다.

인간의 품성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증오해야 할 것들을 원하고 기뻐한다. 타락의 양식과 연료를 매우 기분 좋게 받아들이는 자들은 이미 병들어 있는 것이다.

1. 우리는 그들에게 그렇게 행하는 자를 다 허망하다고 말한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그리고 서로를 속이며, 그들이 이 우상을 만들어 준 자를 크게 기만한다.

2. 우리는 그들에게 "그들의 기뻐하는 우상은 무익한 것이며" 그 우상은 그들이 그것에게서 바라는 즐거움에 보답하지 못하리라고 말한다. 그것은 그들에게 유익을 제공하지 못하며 그들을 재앙에서 보호하지도 못한다. "그 부어만든 우상은 아주 무익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우상에게 경의를 표하여도 얻는 것이 없게 될 것이다.

3. 우리는 그들이 만든 신에게서 어떤 유익을 기대한다는 것이 얼마나 미련하고 어리석은 일인가를 그들 자신에게 호소한다. "그들은 그것의 증인들이다." 만일 그들의 양심이 그것을 신실되게 다룬다면, 이처럼 행하는데 있어서 그들이 눈멀고 무지하다는 것을 스스로 증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니, 그러므로" 그들이 "수치를 당하리라" 는 것을 그들로 시인하게 하라. 만일 사람이 진실로 자기의 죄를 깨닫기만 한다면 보통 그들은, 특히 우상 숭배자들을 개종하리라는 것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다. "신상을 만들 자가 누구뇨?" 자기가 신상을 만들었으며 그것을 자기의 주인으로 여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가 미치거나 정신이 나간 자가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4. 우리는 확신과 자신을 갖고 그들의 사유를 변호해 보라고 도전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신상을 만들 때 각자 무엇을 했는가를 알리기 위해 그의 동료들아 함께 모였을 때 뻔뻔스럽게도 자기가 그 신을 만들었다고 말한다면, 그들은 스스로를 속인 것을 부끄럽게 여길 것이며 그들이 속인 자들을 몰래 비웃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신상을 만들 "그 강색들은" 연약하고 무능한 사람이므로 전능하게 될 존재를 만들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얼굴도 붉히지 않고 그렇게 만든 척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데메드리오와 그 은장색들처럼, 그들의 천하여지는 영업을 지탱시키기 위해 "다 모이도록 하라." 서로 손을 연합하여 그들의 사유를 옹호하고 그 일에 최선을 다하도록 "다 모여" 서도록 하라. 그들도 그 일을 시작해야 할 때 그들의 사유가 빈약하고 악한 것을 깨닫고 그 일에 착수하기를 "두려워하며," 각기 따로 나타날 때 뿐만 아니라 함께 나타남으로써 서로 태연스러워 지기를 바랄 때에도 "수치를 당할 것이다."

우상 숭배와 불경건은 사람들이 그것을 옹호하려 나타날 때 당연히 두려워하고 얼굴을 붉히게 되는 일인 것이다.

Ⅱ. 신을 만드는 전체 과정에 대한 상세한 해설. 그것을 묘사하고 그 이야기를 알리는 것 이외에 더 상세한 진술은 필요치 않다.

1. 그 일에 고용된 자들은 그들 중 가장 보잘것없는 수공업자들로서 우리의 일반용 가구, 수레나 쟁기를 만드는 바로 그 사람들이다. "철을 숯불에 불리는 철공." 곧 대장장이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힘든 일이다. 그는 "강한 팔로 말리므로" 마침내 "주리고" 그 기력이 진하여진다. 그처럼 그는 열심히 일하며 그에게 일을 시킨 자들은 그처럼 성급하게 독촉한다. 그에게는 먹거나 마실 시간적 여유가 없다. 즉 그는 "물을 마시지 아니하여 곤비한" 것이다(12절). 강색들이 신상을 만드는 동안에 먹거나 마시지 않는 것은 그들이 지닌 일종의 미신이었을 것이다. 철공은 그 신상에 덮어야 할 금속판이나 거기에 사용되어야 할 모든 철제품을 "메로치고" 그에게 주어진 모형대로 매우 정확하게 만든다. 그런 후에 "목공" 이 와서 그 목조물에 큰 배려와 수고를 기울인다(13절). 그는 연장 궤를 가져온다. 왜냐하면 그는 그 모두가 다음과 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는" 나무조각에 "줄을 내려 재고" 깍아내거나 잘라내야 할 부분을 "붓으로 긋고," 처음에는 큰 "대패로" 다음에는 작은 대패로 "밀거나" 윤을 낸다. 그리고 정해진 크기와 모양을 따라 "자로 그어" 그 주인이 원하는 것과 똑 같은 것이 되게 한다.

2. 우상이 만들어지는 형태는, 초라하고 연약하며 죽어가는 피조물인 인간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상을 만드는 자가 알고 있는 가장 고귀한 형태와 모습으로 만들어지며 그의 것이기 때문에 그는 각별히 그것을 좋아하고 거기에 될 수 있는 한 온갖 명성을 기꺼이 부여하고자 한다. 그는 "사람의 아름다움을 따라," 사람의 아름다움인 사지와 외형을 아름답게 조화시켜 그것을 만든다. 그러나 그것은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엔 전혀 부적합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영혼의 능력과 기능에 관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시어 그에게 큰 영예를 부여하셨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을 만들 때, 사람의 형상대로 지체를 만들어 그를 모욕했다. 자기 신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그 원형을 사람의 자손들 중 가장 훌륭한 자에게서 모방해 오고 자기가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의 온갖 아름다움을 그에게 부여한다고 해도 결코 그 모욕을 보상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육체의 모든 "아름다움" 을 무한하신 성령이신 그에게 감히 부여하고자 할 때, 그것은 그를 추하게 만들고 격하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훌륭한 작품이 완성되었을 때, lares나 penates "집에," 그것을 위해 마련한 신당이나 사원에 "두게 했다." 또는 그 ----즉 가정의 수호신이라 하여 거처하는 집에 두게 했던 것이다.

3. 그것을 만드는데 사용된 대부분의 재료는 신을 만들기에는 형편없는 물건이다. 즉 그것은 나무조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1) 나무를 "삼림 중에서" 가져왔다. 그 나무는 거기에서 다른 나무와 같이 자란 것으로 그 주위에 있는 나무보다 더 좋거나 귀중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백향목" 이었으며, "디르사 나무" 이거나 "상수리나무" 일 수도 있었다(14절). 아마도 그는 이렇게 사용하기 위해 예전에 그것을 눈여겨 두었을 것이며 다른 나무보다 더 강하고 더 훌륭하게 자라게 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사용하여 "자기를 위하여 그것을 강하게" 했을 것이다.

또는 그는 "삼림 중에, 자기를 위하여 강하게 하거나 치켜올린" 나무들 중 가장 큰 나무를 골라내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또는 좀 더 빨리 자란 나무, 그리고 이것에 사용할 목적으로 자기가 손수 심은 나무, 하늘로부터의 비를 맞고 자라난 "나무" 를 택하여 신상을 만드는 것이 더욱 그의 상상력을 즐겁게 했을지도 모른다. 자기 자신이 심은 것으로 만든 신상을, 그리고 자기가 그 형태를 부여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재료를 마련하여 만든 신상을 자기의 피난처로 삼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보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비로, 의인과 악인에게 내리시는 비로 키워 주신 나무들을 하나님의 경쟁자로 세운다는 것이 얼마나 하늘의 하나님께 모욕을 되는가를 보라.



(2) 이 나무가지는 연료로 밖에는 소용이 없었다. 여기에 사용된 나무도, 그리고 우상을 만들다가 잘라낸 토막들도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람이 화목을 삼는" 것이다(15,16줄어들). 그 나무에는 그것을 보호할만한 가치가 본래부터 없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그것은 서슴치 않고 다른 나무처럼 불살라진다. 그리고 양심에 묻지도 않고 아무런 어려움없이 그 조각을 쓰레기나 폐물처럼 던져버리는 것은, 그것을 택한 자가 이전부터 그것을 다른 나무보다 더 귀중히 여기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1] 그것은 그의 응접실 난로를 위해 사용된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자기 몸을 덥게 한다" (15절). 그리고는 안락함을 누리며 그가 그 나무를 연료로 사용한 것을 애석하게 여기기는 커녕, "아하! 따뜻하다. 불을 보았구나" 하고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과 자연이 연료로 쓰이도록 마련해 주신 그런 나무를 연료로 쓸 때, 그가 그것으로 신상을 만드는 때보다도 틀림없이 더 큰 호의를 그에게 베풀며 그를 더욱 만족스럽게 해 주는 것이다.

[2] 그것은 그의 아궁이에 사용된다 한다. "그는" 그것으로 "고기를 삶아 먹는다." 즉 그는 그가 먹을 고기를 그것으로 요리한다. 그는 "고기를 구워" 먹으며, 그가 나무를 이런 데에 사용하게 된 것에 "만족을 느낀다" (한글역. 배불리기도 한다).

[3] 그것은 솥을 달구는데 사용된다. 거의 가치가 없는 장작은 그런 데에 사용되는 것이다. "그가 그것으로 불을 피워서 떡을 굽기도 하며" 그 누구도 그가 잘못한다고 꾸짖지 않는다.

(3) 그러나 결국, 그 나무토막이나 나무 전체가 신상을 만드는데 사용될 나무가 될 것이다. 그것은 어떤 나무조각처럼 당연히 의자로 만드는데 사용될 수도 있는 그런 나무인 것이다. 그들 중의 한 시인도 그것을 책망하고 있다. (Horat. Sat. 1.8)

Olim truncus eram ficulnus, inutile lignum,

Quum faber, incertus scammum faceretne Priapum,

Maluit esse deum; deus inde ego----

옛날에 우리의 신은

아주 쓸모없는 통나무로 세워졌도다.

우리에게 걸상이나 프리아푸스를 만들어 줄까

망설이던 그런 목수가

결국은 지혜롭다는 구실 아래 신을 만드니,

나도 그 신에게 나아가 기도 했도다.

Frarc

그들 중 또 어떤 시인은 그의 나무의 보관을 의탁했던 우상에게, 만일 그 우상이 그의 연료로 쓰일 나무를 간수해 주지 않는다면, 그 우상 자체가 그 목적으로 사용되리라고 위협하고 있다.

Furaces moneo manus repellas,

Et silvan domini focis reserves,

Si defecerit haec, et ipse lignum es.

그 약탈자들을 몰아내고

네 주인의 난로에 쓰일

장작을 간수해 두라.

그렇지 않으면,

네 자신이 연료로 변용될 것이니라.

Martial

완전히 홀린 우상 숭배자가 이처럼 이 나무 조각을 가장 천한 목적에 사용하고 나머지 나무 조각은 잠시 건조시켜 놓고 있을 때(그는 작업을 하고 있는 동안에 그의 상상 안에서 그것을 신으로 만들며 그것을 "숭배한다"), 그는 "그것으로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부복한다" (15절). 즉 "그 나머지로 신상," 곧 자기의 상상과 의도에 따른 "자기의 우상을 만든다" (17절). 그리고 그는 그 앞에 "부복하고 경배하며," 거기에 거룩한 존엄성을 부여하고 종으로서, 탄원자로서 가장 겸손하고 경외하는 자세로 그 앞에 끓어 엎드린다. 그는 그것에게 의지하고 큰 기대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게 기도한다." "그는 이르기를,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하는도다." 그는 자신의 경의와 충성을 바치는 것에 대해 당연히 보호와 구원을 기대한다. 자기 자신도 주체하지 못하는 우상에게서 도움을 바라는 것은 얼마나 넋빠진 일인가! 그러한 것을 신으로 만드는 것은 철공이나 목공의 행위가 아니라 그것에게 이렇게 하는 기도인 것이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신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신이다.

Qui fingit sacros, auro vel marmore, vultus

Non fccit ille deos; qui roga tille facit.

그 형상이 금으로 된 것이든

대리석으로 된 것이든,

그 형상에게 애원하는 자가

그것을 신으로 만드는 것이지,

단순히 그것을 만들기만 한 자가

그것을 신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Martial

Ⅲ.font> 이 일 전체에 대한 판단(18-20절). 간단히 말해서 그것은 이성적(理性的)인 존재가 범하리라고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어리석음과 경망스러움에 대한 증거이며 그 결과이다. 그리고 그것은 죽어 없어질 짐승보다 사람이 더 악하게 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성이 지시하는 대로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18절). "그들이" 일반 상식을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한다." 즉 다른 일에서 합리적으로 행하는 사람들이 이 일에서 가장 어리석게 행하는 것이다. 비록 그들이 일부 지식과 총명을 갖고 있을지라도, 그들은 문외한이다. 아니, 그들은 심사숙고하라는 큰 율법을 범한 반역자들이다(19절). "마음에 생각이 없고" 스스로 이치를 논할 만한 융통성도 없는 자이다. 비록 그에게 이치를 논하는 자가 아무도 없을 지라도 그가 쉽게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떡과 고기를 굽기 위해 그 나무의 얼마로 불을 사르거늘, 이제 내가 어찌 그 나머지로 가증한 물건을(즉 우상을,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 그리고 지혜롭고 선한 모든 사람들에게 가증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만들겠느냐? 내가 배은망덕하게도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하고자 택하거나, 무엄히도 감히 행하려 하겠느냐? 내가 나 토막에게, 지각없고 생명없으며 무력한 것에게 부복할 만큼 미련한 자가 되겠느냐? 내가 끓어 엎드림으로써 나 자신을 그 나무토막처럼 만들고 비하시키겠느냐?" 성장하는 나무는 아름답고 위풍있는 것일 수도 있으나 나무토막은 그 영광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그것에게 영광을 부여하는 자도 자기의 영광을 잃게 되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이 우상 숭배자들의 한심스러운 특징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그들은 스스로를 속인다(20절). "그는 재를 먹느니라." 그들은 이 우상을 섬김으로써 유익을 얻으리라는 기대로 산다. 그러나 그들은 재를 먹음으로써 영양분을 얻으려는 사람처럼 크게 실망할 것이다. 재를 먹고사는 것은 부패한 욕구와 병든 몸에 대한 증거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들이 숭배하는 중에 그들의 눈이 볼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을 보지 못할 때, 그 영혼이 매우 나쁜 습성에 압도된다는 신호이다. 그들은 비참하게 현혹당하며, 그것은 결국 그들 자신의 과오이다. 그들은 "미혹한 마음에," 다른 사람들의 속이는 혀 이상으로 "미혹되어서"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말못하는 우상을 믿고 숭배한다. 그들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되었느니라" (약 1:14).

죄인들이 하나님을 배신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들 자신의 탓이며 그들의 가슴속에 있는 불신앙의 악한 마음 때문이다. 패역하고 반역적인 마음은 미혹한 마음인 것이다.

2. 그들은 고의적으로 자기 현혹을 고집하며 진실을 깨달으려 하지 않는다. 그들 중에 어느 누구도 스스로에게 의혹을 품고서 "나의 오른 손에 거짓 것이 있지 아니하냐고?" 말하고, 자기 영혼을 건질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는다.

(1) 우상 숭배자들은 그 오른 손에 거짓이 있다. 왜냐하면 우상은 거짓이며 진실 그대로가 아니고 그것이 약속한 것을 이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거짓 스승" 이다(합 2:18).

(2) 안심하고 악한 길로 행하는 자들은 그들의 손에 거짓이 없는가를 정말로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주요 선으로써 만족하게 붙잡고 있는 것은 거짓된 것이 아닌가? 우리는 세상 재물과 쾌락에 마음을 두고 있는가? 그것이 분명 우리손에 있는 거짓된 것임이 증명될 것이다. 우리가 천국에 대한 소망의 근거로써 자신있게 붙잡고 있는 것은 거짓된 것이 아닌가? 우리가 우리의 표면적인 고백과 공적이 마치 우리를 구원하는 것처럼 그것을 의지한다면 우리는 우리 모든 손에 있는 거짓된 것으로 모래 위에 지은 집으로 스스로를 속이게 될 것이다.

(3) 자기를 의심하는 것은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길로 향하는 첫 단계이다. 우리 자신을 경계하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에게 충실해질 수가 없다. 자기 영혼을 건지려는 자는 "나의 오른 손에 거짓 것이 있지 아니하냐?" 고 자기 양심에 물어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4) 거짓된 것을 믿으려 하는 자들은 유혹의 세력 아래 놓이며 그것은 제거되기 힘든 것이다(살후 2:11).

 

44:10 없음.

 

44:11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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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21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격려 (이사야 44:21-28)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볼 수 있다.

Ⅰ. 야곱과 이스라엘의 의무. 이것은 지금 포로 상태에 있는 그들에게 계획된 그 구원에 대해 그들이 합당한 자격을 갖추고 대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의 첫번째 관심은 고통에 의해 유익을 얻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고통에서 벗어날 것을 기대할 수 있다. 그 의무는 두 단어로 표현되어 있다. "기억하라" 와 "돌아오라" 로, 그것은 에배소 사람들에게 준 충고와 같다(계 2:4, 5).

1. "야곱아, 이 일을 기억하라! 우상 숭배의 어리석음에 대해 네가 들어 온 것을 기억하라. 그리고 네가 그 죄에 유혹받을 때마다 네가 지금 깨닫고 있는 신념을 생각하라. 너는 내 종이므로 다른 주인을 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하라."

2.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22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간 사람은 급히 서둘러 그에게로 돌아오도록 주력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환난 중에 있을 때, 그리고 그가 그들에게 긍휼의 길로 돌아오고 계실 때, 그가 요구하시는 일이다.

Ⅱ.font> 야곱과 이스라엘이 포로 상태에서 보증받았던 은총. 하나님을 기억하고 돌아오는 그들에 대해 여기에서 약속되어 있는 것은, 영적인 의미에서 이처럼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약속되어 있다. 그것은 큰 위로를 주는 말이다. 그 속에는 표현된 것보다 더 많은 것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21절). "이스라엘아! 너는 비록 현재는 그렇게 보일지언정, 나의 잊음이 되지 아니하리라."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하기 시작할 때, 그는 우리를 기억하기 시작하실 것이다. 아니,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기억하신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보자.

1.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호의적인 의도가 토대로 하고 있는 근거. 그리고 그들이 그에게 기대를 걸 수 있는 근거. 그는 그들을 포로 상태에서 건지실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그들은 하나님의 종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을 감금할 자들과 마땅히 다투시는 것이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왕 중의 왕이신 자의 종들은 특별한 보호 아래 있다.

(2)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백성으로 조성하셨으며, "모태에서" 조성하셨다(24절). 그들이 백성으로 처음 번창하기 시작할 때부터, 그들은 다른 백성들보다 더욱 특별한 그의 배려와 다스림 아래 있었다. 그들의 국가적인 조직은 그가 구성하신 것이었고 그들과 맺으신 그의 언약은 그들을 결합시킨 현장이었다. 그들은 그의 것이며 그는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3) 그는 그들을 예전에 구속하셨으며, 여러 차례 큰 환난에서 구속하셨다. 그리고 그는 지금도 동일하시며, 그들과 한결 같은 관계를 맺고 계시고 그들에게 한결 같은 배려를 기울이신다. "그러므로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22절). 네가 내게로 오지 않는다면 어디로 가겠느냐?" 그는 그들을 구속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조성하셨으므로, 그들에 대해 더 많은 권리와 타당성을 획득하셨다. 따라서 이것이 그들이 의무적으로 그에게 돌와와야 하는, 그리고 그가 은혜롭게 그들에게 돌아오시게 될 좋은 이유이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속하셨다." 그는 그렇게 행하시고자하며(23절) 그렇게 하기로 결심하셨다. 왜냐하면 그는 여호와 그들의 구속자이시기 때문이다(24절).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의 사도들을 통해서 역사하신 그 구속사업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약속된 축복을 그에게서 바라도록 격려해 준다. 이처럼 막대한 비용을 들여 우리를 속량하신 그는 그가 사신 것을 잃지 않으실 것이다.



(4) 그는 "그들로 자기를 영화롭게 하셨다" (23절). 그리고 계속 그렇게 하실 것이다(요 12:28). 교회가 건져질 때 얻어지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은 우리에게 안위함을 준다. 따라서 그가 이처럼 자기를 영화롭게 하실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야곱을 구속하실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그의 성도들의 구속을 완전케 하시리라는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준다. 왜냐하면 그가 그들 모두로 영화롭게 되시고 숭앙받으실 날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5) 그는 그들의 죄를 용서하셨다. 죄는 그들 재앙의 원인이었고 그들의 구원을 방해한 유일한 것이었다(22절). 그러므로 그가 그들의 목에서 포로의 멍에를 끊으셨으니, 이는 그가 "그들의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도말하셨기" 때문이다.

[1] 우리 허물과 죄는 구름, 즉 빽빽한 구름과 같다. 그것이 하늘과 땅 사이에 끼어있으며 잠시 동안 윗 세상과 아랫 세상의 교통을 중지시키고 두절시킨다(죄는 우리와 하나님에게 사이를 낸다, 59:2). 그것은 짙은 구름처럼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내리실 광풍과 진노의 대 홍수를 초래할 우려가 있는 것이다(시 11:6).

[2]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실 때 이러한 구름을, 이 빽빽한 구름을 도말하신다. 그리하여 하늘과의 교제는 다시 열린다. 하나님은 은혜롭게 그 영혼을 굽어보시고, 그 영혼을 기쁘게 그를 우러러본다. 구름은 의로운 해의 힘에 의해 흩어진다. 죄가 사함받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인함이다. 사라지는 구름처럼 죄가 용서될 때, 그것은 다시 나타나지 않고 완전히 사라진다.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없을 것이다" (렘 50:20). 그리고 죄가 사하여졌을 때, 영혼 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위로는 "구름과 비 후의 광선" 과 같은 것이다.

2. 하나님의 백성이 구원될 때 겪는 보편적인 즐거움(23절). "하늘아, 노래할지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시사한다.

(1) 온 만물은 하나님의 백성이 구속됨을 기뻐하고 즐거워할 만한 이유를 갖게 될 것이다. 온 만물이 생존하는 것(그것은 사람의 죄가 땅에 엄하게 한 저주에서 구출되었다)은, 그리고 그것이 그 존재의 목적에 응하는 능력을 다시 갖추게 되고 비록 지금은 고통 아래서 신음할지라도 마침내 타락의 속박에서 건지우리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큰 국교(國敎)는 하나님의 나라이다(시 96:11-13; 98:7-9).

(2) 천사들과 윗 세상에 있는 거민들이 그 구원을 기뻐할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것을 행하셨으므로 천국이 찬송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이 화해했을 때 천국에 기쁨이 있으며(눅 15:7), 바벨론이 무너졌을 때 기쁨이 있다(계 18:20).

(3) 가장 멀리 있는 자들, 곧 이방 세계의 거민들도 이 기쁨을 나누며 이러한 찬미에 연합할 것이다. "땅의 깊은 곳들," 즉 거기에 있는 삼림과 나무들이 이스라엘의 구속에 대한 감사의 예물을 가져올 것이다.

3. 큰 어려움과 이겨내기 어렵게 생각되는 것들이 교회의 구원의 길에 놓여 있을지라도, 그 구원을 위한 때가 올 때 그것들이 모두 쉽게 극복되리라는 것을 우리가 기대하도록 격려함. "이스라엘의 구속자가, 나는 만물을 지은," 처음에 그것을 지었고 지금도 계속 그렇게 하고 있는 "여호와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섭리는 계속되는 창조이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 능력, 생명, 운동 그리고 완전함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그가 홀로 하늘을 폈으며" 어떤 도움을 받지 않으셨고 그 어느 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땅도 그 자신의 능력으로 베푸셨다. 그가 그렇게 행하셨을 때 사람이 그의 곁에 없었다(욥 38:4). 어떤 피조물도 충고하거나 조력하지 않았다. 그때에는 오직 그의 영원한 지혜와 말씀이 "양육받는 아이" 로서 그의 곁에 있었다(잠 8:30).

그가 홀로 하늘을 펴셨다는 것은 그의 한없는 권능을 시사한다. 가장 강한 자일지라도 어떤 것을 펼치려 할 때에는 다른 사람이나 도구의 조력을 얻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광대한 공간을 펼치셨고 항상 손수 그의 권능으로 그것을 펼치시고 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낙심하지 말라. 세상을 지으신 그에게는 행하기 어려운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시 124:8). 그리고 만물을 만드신 그는 모든 것을 그가 원하시는 대로 사용하실 수 있으며, 그것들이 그의 목적에 사용되도록 그의 능력 안에 두고 계신다.

4. 이것은 바벨론의 신탁을 논박함으로써 그것을 부끄럽게 함(25절).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바벨론으로부터 건져냄으로써 "거짓 말하는 자," 거짓말하는 모든 선지자의 "징조를 폐하려" 하셨다. 그 선지자들은 바벨론 왕조가 아직도 수 세대를 존속할 것이라고 말했고 그들의 예언이 어떤 표적이나 징조 위에 근거하고 있는 척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술책의 규정대로 그것의 번영을 예언한 것이었다. 이 마술사들은 그들이 마술이 실패한 것과, 그들이 매우 고대하고 확신했던 것과 반대의 결과가 나타난 것을 볼 때 얼마나 미친 듯이 노하겠는가. 그것은 그들의 사칭하는 선지자들을 폐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유명한 계략도 폐한다. "그는 지혜로운 자를 물리치신다. "그들은 그들의 계획을 성취할 수 없음을 알고서 부득이 그것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그는 재판관들을 미련하게 하며 "그 지식을 어리석게 하신다." 그리스도와 알게 된 자들은 그들이 예전에 지닌 지식이 그에 대한 지식과 비교해 볼 때 어리석은 것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에게 대적하는 자들은 그들의 모든 계획이 아히도벨의 것처럼 어리석게 되고 그들 자신은 "자기 궤휼에 빠지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고전 3:19).

5.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확증해 줌. 그 궤를 유대인들은 불신했고 그들의 대적은 멸시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종의 말을 응하게 한다" (26절). 그는 합당한 때에 그것을 성취하심으로써 그 말을 응하게 하신다. 그리고 여러 차례 그의 백성에게 보내어 그가 그들을 위해 마련해 두신 큰 축복을 말하게 하신 "그 사자의 모략을 성취하게 하신다."

성경 예언이 정확히 이루어진 것은 그 책 전체에 있는 진리에 대한 확증이며 그 거룩한 출처와 권위에 대한 명백한 증거인 것이다.

6. 포로 상태에 있는 그의 백성을 위해 계획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26-28절). 이 포로 사건은 그들이 사로잡혀 가기 오래 전에 예언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그들이 징계를 받을 만한 이유를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지, 마지막 멸망을 두려워하도록 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1)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이 얼마 동안 사람이 모이지 않고 주민이 거하지 않는 황폐한 상태가 될 것이라고 여기에서 예상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중건되고 사람들이 다시 모이리라는 사실이 여기에 약속되어 있다. 이사야가 살아있을 때,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에는 거민들이 가득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비게 될 것이며 불타고 파괴될 것이다. 이처럼 강하고 인구 많은 성읍이 비게 되리라는 것을 믿기란 그 당시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가 그것을 행하실 것이다. 그리고 황폐한 상태가 되고 나면, 그것들이 다시 복구되리라는 것을 믿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히 또한 그것을 이루실 것이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에게 "거기 사람이 살리라" 고 말씀하셨다. 세상이 서 있는 한 하나님은 거기에 교회를 두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예루살렘에 대하여 이르기를, 거기 사람이 살리라 할" 자들을 세우실 것이다. 그것이 건설되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거기에 거할 수 없는 것이다(시 69:35, 36).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를 세우실 때가 왔을 때, 그가 홀로 그의 백성을 위한 집(그들을 밖에 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과 그의 집을 위한 백성을 발견하시게 하자. 그리고 그것은 비게 되지 않을 것이다. 유다 성읍도 다시 증건될 것이다. 산헤립 아래 있는 앗수르 군대만이 그것들을 점령했으며, 그 군대가 폐했을때도 그들은 손해를 입지 않고 그 본 주인에게로 돌아왔다. 그러나 갈대아 군대는 그것들을 파괴했고 그 거민들을 잡아감으로써 그 성읍들이 쇠퇴하도록 버려 두었다. 이와 같이 보다 적은 심판으로 사람들을 겸손케 하고 개심시키지 못했을 때, 하나님은 보다 큰 심판을 보내실 것이다. 그러나 이 황폐함은 영구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그 황무하고 "황폐한 곳들을 복구시킬"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영원히 다투시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외인의 성읍은 파괴되면 결코 건설되지 못할 것이나(25:2), 하나님의 자손의 성읍은 얼마 동안만 중지될 뿐인 것이다.

(2) 성전도 파괴되어 얼마 동안 그 토대가 무너질 것이라고 여기에서 예상되고 있다. 그러나 그 토대가 다시 놓여져 틀림없이 건설될 것이 약속되어 있다. 성소가 황폐게 되는 것이 모든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가장 슬픈 파괴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의 복구와 재건은 가장 기쁜 구원이 될 것이다. 만일 예루살렘에서 성전이 중건되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곳의 증건에서 무슨 기쁨을 얻을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예루살렘을 거룩한 성으로, 그리고 진실로 아름다운 것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성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이 유대인들이 돌아올 때 마음에 두고 계획한 주된 일이었다. 즉 그들은 예루살렘에 돌아가 "거기 있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전을 건축하려" 했던 것이다(스 1:3).

(3) 그들이 빠져나가기가 불가능한 매우 큰 어려움이 이 구원의 길에 놓여 있을 것이라고 예상되고 있다. 그러나 거룩한 능력에 의해 그것이 제거될 것이 약속되어 있다(27절). "하나님이 깊음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마르라 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내셨을 때, 그렇게 하셨다. 그리고 기회가 있다면 그가 그들을 바벨론에서 이끌어 내실 때 다시 그렇게 행하실 것이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내가 그 길에 서 있느냐? 귀환하는 포로들의 총 사령관인 스룹바벨 앞에서 "내가 평지가 되리라" (슥 4:7). 또한 큰 강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그들의 길을 저지하고 그것을 방해하려 하느냐? 네가 마를 것이며 네게 물을 공급해 주는 것이 말라붙을 것이다. 고레스가 구스 강물을 여러 하천으로 내어보냄으로써 바벨론을 탈취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군대가 그곳을 통행할 수 있게 했을 때, 이 말씀이 실현되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의 구속의 길에 무엇이 가로 놓여있든지, 하나님은 한 마디 말씀으로 그것을 제거하실 수 있는 것이다.

(4) 유대인들 중 어느 누구도 힘과 완력으로 바벨론으로부터 나올 수 없을 것이라고 여기에서 예상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훌륭히 길을 열어 줄 외인을 멀리서부터 일으키실 것이 약속되어 있다. 그리고 이제 마침내 그는 바로 그 사람의 이름을, 그가 태어나거나 생각되어지기 수 십년 전에 지명하시고 있다(28절).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한다." 이스라엘은 그의 백성이며 그의 초장의 양떼이다. 이 양떼들은 지금 이리들 가운데, 도둑과 강도의 손안에 있다. 그들은 불법 행위 때문에 우리 속에 감금되어 있다. 이제 고레스는 이 양떼들을 풀어놓아 주도록, 그리고 그들의 푸른 초장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을 돌보아 주도록 하기 위해 그가 고용하신 그의 목자가 될 것이다. "이것으로 그는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내가 의도하고 나를 크게 기쁘게 할 일을 성취하리라."

[1] 가장 우연적인 일도 반드시 하나님의 선견지명에 의한 것이다. 그는 그의 백성을 건지울 자가 누구인지, 그 이름이 무엇인지 알고 계셨다. 그리고 그가 원하셨을 때 그의 교회로 하여금 그것을 알게 하실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이 세사에서 불리워지기 시작한 그 이름을 듣고 "일어나 머리를 들고, 그들의 구속이 가까와짐" 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2] 하나님을 위해 그의 백성에게 호의를 베푸는 도구로써 쓰임받는 것이 가장 큰 자의 최고의 영광이다. 바사의 황제가 되는 것보다 하나님의 목자가 되는 것이 고레스에게는 더 큰 영광이 되었던 것이다.

[3] 하나님은 사람을, 강한 자를, 그리고 최고의 자유를 갖고 행하는 자들을 그가 원하시는 대로 사용하신다. 그리고 그들이 그들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하고자 할 때에도 그는 그들을 지배하실 수 있고 그가 원하시는 대로 행하도록 하실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를 충족시키고 그 이외의 것은 바라지 않는 바로 그일 속에서도, 하나님은 그들을 그의 목적에 사용하시며 그들로 하여금 그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게 만드신다. 부유한 방백들이 초라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것을 행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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