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에 대한 충고 (이사야 50:1-3)
하나님의 백성임을 고백했으나 냉혹한 대우를 받는 자들은, 마치 그가 그들에게 가혹하게 대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을 원망하고 비난하기 쉽다. 그러나 그들의 불평에 대한 대답으로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볼 수 있다.
Ⅰ. 그 싸움이 하나님 편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거나, 그것에 대해 어떤 증거를 대라는 도전이 그들에게 주어짐(1절). 그러나 그들은 그가 그들에게 잘못 행하셨다거나 독단적으로 행하셨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1. 그는 그들에게 남편이 되어오셨었다. 그 당시 남편들은 조금 싫증나면 자기 이러자마자 내들을 버릴 권한을 허용받았다. 만일 그들의 아내가 그들의 눈에 고임을 받지 못했다면, 그 아내는 그들이 이혼증서를 주는 것에 대해 아무런 항의도 할 수 없었다(신 24:1; 마 19:7).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렇게 다루셨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들이 이제 그에게서 떠나 여러 날 동안 에봇이나 제단이나 제물없이 살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의 잘못이었는가?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어미에게 이혼 증서를 주셨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이혼 증서는 이혼당한 여자의 손에 주어졌으니, 만일 그들이 할 수 있다면 그 증거를 제시하게 하라.2. 그는 그들에게 아버지가 되어 오셨었다. 그 당시 아버지들은 그들이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갚기 위해 그 채권자들에게 그 자녀들을 노예로 파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유대인들이 그 당시에는 바벨론 사람들에게 그 후에는 로마 사람들에게 팔렸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빚을 갚기 위해 그들을 파셨는가? 아니다. 그는 그들이 팔려간 자들에게 빚을 지지 않으셨다. 또는 그가 그들을 파셨다면 "저희 값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셨다" (시 44:12).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을 징계하실 때, 그것은 그의 즐거움이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다(히 12:10). 구원받는 모든 자들은 은혜의 대권에 의해 구원받으나, 멸하는 자들은 절대적인 주권의 행위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의 행위로써 끊어짐을 당하는 것이다.
Ⅱ. 그들 자신이 그들의 멸망의 장본인이었음을 그들에게 보이면서, 그들의 죄과가 제시됨. "오직 너희는 죄악을 인하여, 죄악의 즐거움과 네 야비한 욕망의 충족으로 인하여 팔렸다. 즉 너희의 죄악으로 인하여 너희가 팔린다. 부모들의 빚으로 인해 부모들에 의해 팔리우는 자식들처럼 팔린 것이 아니라, 자기의 범죄로 인해 벌을 받기 위해 재판장들에 의해 팔리우는 범인처럼 팔렸다. 너희는 악을 행하기 위해 너희 자신을 팔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너희를 너희 대적의 손에 파신 것은 당연한 일이다(대하 12:5, 8). 너희 어미는 너희의 허물과 그녀 자신의 간음으로 인하여 내어 보냄을 입었느니라." 간음은 항상 이혼의 정당한 사유가 되어 왔었다. 유대인은 우상 숭배와 결혼 언약을 파기한 죄로 인해 바벨론으로 보내어 졌고,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히게 한 것으로 인해 마침내 거부당했다. 이러한 것들이, 그들로 하여금 팔려내어 보냄을 입게 한 죄악이었다.
Ⅲ.이 도전과 고소의 확증.
1. 그들이 버림받은 것은 그들 자신 때문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오셔서 그들에게 은총을 제공하셨으나, 그들의 환난을 막거나 그들을 거기에서 구하시기 위해 그의 도움의 손길을 제공하셨으나, 그들은 그와 그의 은혜의 제공물들을 경시했다. "너희가 그것을 내 탓으로 돌리느냐?(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어찌해서, 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느뇨?(2절)" 하나님은 그의 종들인 선지자들을 통해 그들에게 오셔서 그의 포도원의 실과를 요구하셨다(마 21:34). 그의 사신들을 "그들에게 보내고 부지런히 보내셨다" (렘 35:15). 그가 그들에게 죄에서 떠나 그들 자신의 멸망을 막도록 요청하셨다. 그러나 사람이 "없었거나" 선지자들이 준 경고를 경청하는 자가 없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답하거나 그가 그들에게 보내신 메시지에 응하는 자가 없었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그들은 팔렸고 내어 보냄을 입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사자를 비웃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갈대아 왕의 손에 저희를 다 붙이셨다" (대하 36:16, 17). 마지막으로 "그가 자기 아들을 저희에게 보내셨다." 그러나 "그가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자기에게로 부르셨으나 대답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예루살렘의 자식들을 함께 모으려 하셨으나 그들은 그렇게 하려들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의 평강에 속한 일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재앙의 날을 알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죄로 말미암아 그들은 쫓겨남을 당했고 그들의 집은 황폐케 되었다(마 21:4; 23:37, 38; 눅 19:41, 42).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행복에로 부르셨으나 그들이 대답하려 하지 않을 때, 그들은 비참한 상태로 버려져도 마땅한 것이다.2.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전능하시어서 그들을 그처럼 큰 사망으로부터 회복시킬 수 있으셨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끝까지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바벨론에 있었던 믿음이 없는 유대인들은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을 건지실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구출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리스도 시대의 사람들은 비웃으면서 "저가 자기를 구원할 수 없거늘 우리를 구원할 수 있겠느냐?" 하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 손이 어찌 짧거나 연약하겠느냐?" 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전능자에게 한계가 있을 수 있겠는가? 위대한 구속자인 자가 구속할 수 없겠느냐? 모든 능력을 지닌 자가 "건질 능력" 이 없겠느냐? 그의 능력에 대한 그들의 의심을 잠잠케 하고 영원한 수치가 되게 하기 위해, 그는 여기에서 그것에 관한 의심할 여지없는 증거를 제시하고 계신다.
(1) 그는 원하신다면, "바다가 마르게" 하고 하수로 광야가 되게 하실 수 있다. 그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속하셨을 때 그렇게 행하셨으며, 그들을 바벨론에서 구속해 내기 위해 다시 그렇게 행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물을 변하여 피가 되게" 하셨을 때, "저희 물고기를 죽이셨도다" (시 105:29). 믿음의 능력에 관해 우리 구주께서 때로 사용하신 표현, 즉 그것이 "산을 옮기고 뽕나무를 바다에 심기우게" 하리라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만일 그들의 믿음이 그것을 행할 수 있었다면, 의심할 것없이 그들의 믿음이 그들을 구원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불신앙으로 멸망했다면, 그것은 변명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2) 그는 원하신다면 하늘의 빛을 가리우실 수 있다. 즉 그가 조정하시는 평평하게 뜬 뚜껍고 어두운 구름을 가지고(욥 36:32; 37:16)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며 굵은 베로 덮으실" (3절) 수 있다.
메시야의 과업과 고난 (이사야 50:4-9)
그 자신이 구원하실 능력이 있음을 증명하신 우리 주 예수께서 여기에서는 그가 기꺼이 도우실 수 있음을 보여 주고 계신다. 우리는 선지자 이사야가 이 구절들 속에서 자기 자신에 관해 어떤 것을 이야기하면서 그가 많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로서의 그의 과업을 추진시켜 나가는 일에 전념하도록 스스로를 격려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그를 도우시고 그를 힘있게 하시리라는 것만큼은 의심하지 않고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다윗처럼 그는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 그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그리스도는 구세주가 되실 것이 여기에 예언되어 있고 또 약속되어 있다.
Ⅰ. 훌륭히 받아들일 수 있는 전도자로서. 이사야는 선지자로서 부름받은 과업에 자격을 부여 받았다. 하나님의 나머지 선지자들과 그가 그의 사신으로 고용하신 사람들도 역시 그러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의 동료들 위에 성령으로써 기름 부음을 받으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케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일을 하신다.
1. "학자의 혀를 주사 그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교훈을 줄줄을 알게 하신다(4절). 사람의 입을 만드신 하나님은 모세에게 학자의 혀를 주시어 그로 하여금 바로를 무섭게 하고 죄를 깨닫게 하는 말을 하게 해 주셨다(출 4:11, 12). 그는 그리스도께 학자의 혀를 주시어 곤비하고 무거운 죄의 짐 아래 눌리워 있는 자들에게 적절한 때에 위로의 말씀을 하게 하셨다(마 11:28).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그들은 "향기로운 물약을 떨군다" 고 일컬어 졌다. 괴로워하는 양심을 위로하고 여러 종류의 불쌍한 영혼들에게 적절하고도 합당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말하는 방법을 알게 되는 사역자의 최고의 학식이 무엇인가 보라. 이렇게 행할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의 은사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간절히 바라야 하는 가장 좋은 은사 중에 하나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곤비한 자에게 말씀하신 여러 위로의 말씀 속에서 휴식하도록 하자.2. 학자의 귀를 주시어 교훈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신다. 선지자들은 학자의 혀와 마찬가지로 이것이 매우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이 가르침을 받은 것만을 전해야 하며, 부지런히 주의깊게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들어 그것을 정확히 말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겔 3:17). 그리스도는 그가 줄 수 있는 것을 받으셨다. 먼저 배우는 자가 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가르치는 자가 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먼저 제자들이었으며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 이었다(마 13:52). 그리고 듣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는 "학자같이 알아들어야" 한다. 듣고 깨달으며, 듣고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듣는 것으로써, 배우려하는 자들같이 알아들어야 한다. 학자같이 알아들으려는 자들은 깨어 있어야 하며 방심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시 졸고 잠들기 쉬우며 듣는 데는 아주 서툴러서 반쯤을 흘려 보내어 듣고서도 유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귀는 깨어있을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우리를 일깨우기 위해, 영적인 잠에서 깨워 우리가 우리 생명에 관한 것을 들을 수 있게 하기 위해 어떤 말을 들을 필요가 있다. 우리는 "아침마다," 낮이 돌아오듯 어김없이 깨우쳐질 필요가 있다. 그날 일은 그날 행하도록 깨우쳐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의 상황은 우리가 날마다 둔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끊임없이 거룩한 은혜를 신선하게 공급받을 것을 요하고 있다. 우리의 정신이 가장 깨끗한 침은 하나님과 교제하기에 적합한 시간이다. 그때 우리는 그에게 말씀드리고(" 내 목소리를 아침에 들으리라") 그로부터 말씀 듣기에 가장 좋은 상태에 있다. 백성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갔다(눅 21:38). 그는 아침에 설교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아침마다 우리를 깨우치는 것은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어떤 일로 그에게 봉사하기로 결심한다면, 그렇게 우리를 분기시키는 것은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만약 그가 아침마다 우리를 깨우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구히 졸고 있을 것이다.
Ⅱ. 참을성있게 고난당하는 자로서(5,6절). 혹자는 곤핍한 자를 말로 도와 줄 위임과 권한을 부여받은 그가, 그의 과업에서 어떤 난관도 만나지 않고 보편적으로 영접받으셨으리라고 생각할지라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달랐다. 즉 그에게는 행해야 할 힘든 일과 다섯 번 이어야 할 학대가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는 그가 어떤 불굴의 끈기를 갖고 그것을 해내셨는지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는 선지자 이사야가 여기에 가정되어 있는 그러한 어려움을 겪은 것에 대해서는 읽은 바가 없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신 그 일을 그가 단호하게 수행해 나갔으리라는 것 만큼은 의심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우리는 이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하게 실증되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알 수 있다.
1. 그가 일을 행하시는 가운데 참을성있게 순종하심.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 귀를 깨우치시어 그가 말씀하시는 것을 알아듣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내 귀를 여시어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좇게 하셨다" (시 40:6, 7,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게 하셨고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하였나이다"). "내가 거역치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였다" 는 그의 부가된 말씀은 표현되어 있는 이상의 것을 내포하고 있다. 즉 그가 큰 역경과 방해를 예견하셨을지라도, 비록 종으로서 고생을 하고 끊임없이 섬겨야 한다는 것을 예견하셨을지라도, 비록 매우 위대하신 자기 자신을 비우시고 스스로를 낮추어 가장 천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예견하셨을지라도, 그는 도망치거나 회피하지 않으셨고 낙심하지도 않으셨다는 것이다. 그는 자원하셨던 것이다. 그는 그의 과업의 가장 힘든 부분에 이르렀을 때에도 매우 대범하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그 과업을 추진해 나가셨다.하나님의 진리를 잘 깨닫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업과 봉사를 잘 행하려는 선한 의지도 하나님의 은혜에서 나오는 것이다.
2. 그가 고난을 받으시는 가운데 순종하면서 참으심. 나는 그것을 순종하는 인내라 부른다. 왜냐하면 그는 "이 계명을 내가 아버지께 받았나이다" 하고 탄원하면서 그리고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고 하나님께 복종하면서 그의 아버지의 뜻을 지키고 참으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복종하시면서,(1) 그는 채찍질을 당하셨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겼나이다." 그리고 그는 매를 맞았을 때 그 모욕에 복종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자진해서 겪으시려 했던 고통과 수치의 다른 사례들 속에서도 그것을 허락하셨다(아니, 오히려 용납 하셨다).
(2) 그는 희롱당하셨다. 나의 뺨을 때릴 뿐만 아니라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겼느니라." 수염을 뽑히는 것은 보다 심한 고통과 치욕이었다.
(3) 침뱉음을 당하셨다. "수욕과 침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그것으로부터 얼굴을 가리우실 수 있었고 그것을 피하실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하려 하시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의 비방거리로 만들어지셨고 이렇게 해서 그는 욥의 모형에 부합되려 하셨기 때문이다. 슬픔의 사람인 욥에 관해서는, 그들이 "그를 천대하여 뺨을 치고" (욥 16:10) "그의 얼굴에 침뱉기를 주저하지 아니하였다" (욥 30:10)고 적혀 있는데, 이러한 것들은 경멸에 대한 표현일 뿐아니라 혐오와 분노에 대한 표현이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이 모든 일을 겪으셨고, 그가 우리를 구원하기를 원하셨다는 것을 우리로 깨닫게 하기 위해 자원해서 그것을 겪으셨다.
Ⅲ. 용감함 전사로서(7-9절). 그 구속자는 겸손과 인내에서 뿐만 아니라 그 담대함에 있어서도 유명하시다. 그리고 그는 비록 양보하실지라도, 승리자 이상이시다. 여기서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셨다. 선지자 이사야의 받침대가 그리스도 자신의 받침대였다(7,9절).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셨도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사용하시는 자들을 도우실 것이며, 그들 자신이나 그들의 일이 요구하는 도움이 부족하지 않도록 돌보실 것이다. 우리를 위해 그의 아들에게 도움을 쌓아두신 하나님은 그를 도우셨고 그의 손은 줄곧 "그의 우편에 있는 자와 함께" 하셨다. 하나님께서 그의 과업을 도우실 뿐만 아니라 그를 용납 하실 것이다(8절). "나를 외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느니라." 이사야는 다른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릇되게 고소당하고 비방과 중상을 받았음은 의심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아마도 이 세상에서 그 비방을 도말하시고 특히 육체뿐만 아니라 평판이 부활될 그 큰 날에 가장 그의 공의를 빛같이 하시리라(시 37:6)는 것을 알고서, 그때에는 의인이 빛같이 드러나리라는 것을 알고서, 그 비방을 멸시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에게서 그렇게 확증되었다. 그의 부활에 의해, 그가 사람들이 진술한 그러한 사람이리라는 사실이, 즉 불경스러운 자이거나 속이는 자이거나 시저에게 대적하는 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그를 정죄한 그 재판관은 그에게서 아무 잘못도 발견하지 못했음을 인정했다. 그를 처형할 책임을 맡았던 백부장이나 장관은 그가 의로운 자임을 선포했다. 그처럼, 그를 의롭다 하는 이가 가까이 있었다.그러나 그것은 좀 더 멀고 좀 더 독특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었다. 그 아버지는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피를 속죄하신 것을 용납하셨을 때, 그를 의롭다 하셨고 우리를 위해 죄인이 되신 그를 "의로우신 여호와" 로 세우셨다. 그는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셨다" (딤전 3:16). 그렇게 한 자는 가까이 계셨다. 그를 의롭게 한 그의 부활이 그가 정죄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사건을 곧 뒤따랐기 때문이다. 그는 즉시 영광을 얻으셨던 것이다(요 13:32).
2. 여기에 대해 그는 그의 사업이 성공할 것을 확신하고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신다면, 나를 의롭다 하시고 지원하신다면, 자기 자신에게 소원 성취를 약속했으나 목적한 바를 달성하지 못한 자들처럼 내가 부끄러워 아니하리라. 내가 수치를 당치 아니할 줄 아노라." 비록 그의 원수들이 그를 수치스럽게 하기 위해 온갖 일을 감행할지라도, 그는 그의 터전을 지키셨고 그의 면목을 지키셨으며, 그가 수행하신 일과 수치를 당치 아니하셨다.하나님을 위한 일은 우리가 부끄러워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둔 소망은 우리가 수치를 당하지 않을 소망이다. 하나님께 도움을 의지하는 자들은 실망하지 않을 배우다. 그들은 그들이 의지한 자를 알고 있으므로 그들이 수치를 당하게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3. 이러한 확신 가운데, 그는 모든 압제자들과 대항자들에게 도전하고 있다.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리니 내가 내 얼굴을 부싯돌같이 굳게 하였노라." 그 선지자는 그렇게 했다. 그는 담대하게 죄를 꾸짖고 죄인들에게 경고했으며(겔 3:8, 9), 그의 예언이 진실됨을 주장했다.그리스도도 그렇게 하셨다. 그는 중보자로서 확고부동함과 주저함이 없는 결단력을 갖고 그의 사업을 추진시키셨다. 그는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는 그의 모든 대항자들에게
(1) 그의 도전에 응하도록 도전하고 계신다. 율법이나 칼로 "나와 다툴 자가 누구뇨?" 격투자로서 또는 원고와 피고로서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뇨?" (문자 그대로) "나를 신원하여 줄 주인" 이 누구뇨? "나를 상대로 소송하려는 자가 누구냐? 나타나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내가 도망하지 않을 것임이라."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논쟁을 청했으나 그는 그들을 잠잠케 만드셨다. 선지자는 이것을 모든 충성된 사역자들의 이름으로 말하고 있다. 메시지를 전달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에 단단히 매달리는 자들은 반박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누가 그들과 다투든지간에, 성경이 그들을 지지할 것이다. "큰 진리가 이기리라." 그가 친구가 되시는 자들을 누가 감히 대적하며, 그가 변호자가 되시는 자들과 누가 감히 다투려 하는가? 사도 바울은 그것을 이렇게 적용하고 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롬 8:33)
(2) 그는 그의 범죄함을 증명하도록 그들에게 도전하고 계신다(9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뇨?" 그 선지자는 아마도 사형을 선고 받았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그러하셨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정죄할자 누구뇨?" 하고 말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시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을 정죄한 자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헤어지리라." 그리스도와 그의 선지자들의 의로운 사유가 모든 반대를 물리칠 것이다. 그들은 조용히, 그리고 알지 못하는 사이에 "좀에게 먹히리라." 조그마한 것이 그들을 멸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울부짖는 사자는 하나님의 증인들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믿는 자들은 모두 "나를 정죄할 자 누구뇨?" 라고 도전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죽으신 그리스도시라."
슬픈 자에 대한 격려 (이사야 50:10,11)
Ⅰ. 우울한 성도들을 위해 여기에 위로의 말이 언급되어 있으며,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도록 격려받고 있다(10절).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하나님의 자녀의 성품은 항상 어떠한가? 그는 자식으로서의 존경심을 품고 주를 두려워하는 자, 그의 위엄을 경외하고 그를 불쾌하게 만드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이다. 이 위로의 말씀은 선한 백성들이 흑암 중에 행할 때, 그리고 다른 은혜가 나타나지 않을 때, 보통 나타나는 은혜이다. 그 때 그들은 "그의 말을 인하여 떨며" (66:2) "주의 판단을 두려워한다" (시 119:120). 그는 하나님의 종들의 음성에 복종하는 자이며, 위대한 사람의 구속사업에서 하나님의 종이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주 예수께 기꺼이 지배받는 자이고, 그리스도의 법에 신실하게 순종하고 그의 언약 관계에 즐거이 다가오는 자이다.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음성에 복종할 것이다.2. 하나님의 자녀의 사유는 때로 어떠한 것인가? 비록 그가 마음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리스도를 믿을지라도, 얼마 동안 그는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을 갖지 못하고, 불안하며 아무 위로도 얻지 못한다. 거기에서 그렇게 행하는 자가 누구인가? 이것은 그것이 신앙을 고백하는 자에게 가끔, 그리고 그리 흔하지 않게 일어나는 소송의 사유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언제 그것이 일어나든, 하나님을 주목하고 계신다. 때로 흑암 중에 거하는 잠시 동안 한줄기의 희미한 빛이나 섬광도 얻지 못하는 것은 빛의 자녀와 후사들에게 있어서 새로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이생의 위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위로를 아무리 풍성히 지니고 있을지라도, 그것을 그들의 빛으로 삼아 행하지 않는다) 그들의 영혼과 관련되어 있는 그들의 영적인 위로를 의미한다. 그들은 천국에 대한 그들의 증거가 가리워지고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기쁨이 방해를 받으며 성령의 증거가 의심당하고 하나님의 얼굴빛이 흐려질 때, 흑암 중에 행하게 된다. 시름에 젖은 그리스도인들은 우울해지기 쉬우며 항상 두려워하는 자들은 지나치게 두려워하기 쉬운 것이다.
3. 이 슬픈 상황에 있어서 무엇이 효과적인 치료가 될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은 흑암 중에 있는 자는
(1)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할지어다." 그의 선한 성품을, 그가 그 자신에 관해 알리신 것을, 그의 지혜와 능력과 선하심을 의뢰할지어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 이니 그로 하여금 그곳으로 도망하게 하라. 그가 여호와 앞에 행한다면, 그로 그것을 의지하게 하라. 사람은 흑암 중에 행할지라도 그렇게 할 수 있으며,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모든 것을 풍족하게 해 주심을 발견할 것이다.
(2) "자기 하나님께," 언약하신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 그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꼭 붙들게 하고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하고 부르신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 이라 부르게 하라. 그로 하여금, 언약의 약속을 의지하게 하고 거기에 자기 소망을 짓게 하라. 하나님의 자녀가 쓰러지려할 때, 그는 하나님이 자기를 충분히 부축해 주실 수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로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하라. 하나님의 "이름이 그에게 있기" 때문이다(출 23:21). 그로 하여금 "우리의 여호와" 라는 그의 이름을 의뢰하게 하고, 중보자 안에서 그를 통하여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서 의지하게 하라.
Ⅱ. 참람한 죄인들이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한 말이 여기에 언급되어 있으며 그들은 그들 자신을 의지하지 말도록 경고받고 있다(11절).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그들에 대한 묘사. 그들은 "불을 피우고 그 불꽃 가운데로 들어간다." 그들은 자기의 자신의 의를 의지하며, 그들의 모든 제물을 바치고(나답과 아비후처럼), 하늘로부터 온 불이 아니라 자기의 불로향을 피운다. 하나님의 열납하심을 바람에 있어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의를 존중치 아니한다. 그들은 자기의 공로와 능력을 생각하고는 스스로 기뻐하며 그것으로 자기 자신을 따뜻하게 한다. 그것은 그들에게 빛과 열이 된다. 그들은 "횃불을 둘러 띤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의를 의지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은총에 자기의 행복을 두지 않고 세속적인 소유물과 즐거움에 행복을 둔다. 피조들의 즐거움은 피조물이 지속하는 동안 그것으로 자기 자신을 따뜻하게 하고, 그 빛 가운데에서 교만하고 즐겁게 행한다.2. 그들에게 선고된 형. 그들이 "그들의 불꽃 가운데로 들어간다" 고 반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그것이 지속하는 한, 그것을 최대로 이용하라.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은 결국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은 내 손에 달려있다(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왜냐하면 그에게 심판이 맡겨져 있기 때문이다). "너희는 슬픔 중에 누우리라." 흑암 중에 잠자리로 가리라(욥 18:5, 6 을 보라). "악인의 등불은 꺼질 것이다." 세상을 즐거움으로 삼고 자기의 의를 의지하는 자들은 반드시 치명적인 실망을 맛볼 것이며 그것은 결국 쓴 것이 될 것이다. 겅건한 자의 길은 우울할 수도 있으나, 그의 결국은 평강과 영원한 광명이 될 것이다.
악한 자의 길은 즐거울 수도 있으나 그의 결국과 영원한 거처는 완전한 흑암이 될 것이다.
Previous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