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이사야 4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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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1

이방인에 대한 격려 (이사야 49:1-6)

Ⅰ. 청중을 불러모아 경청을 요구하고 있다. 앞 장에서의 설교는 야곱의 집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 것이었다(1,12절). 그러나, 이것은 "섬들" 에(즉 이방인들에게. 왜냐하면 그들은 "이방인들의 섬" 이라 불리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나라에 외인" 이었고 멀리 떨어져 있는 "원방 백성들" 에게 대한것이다. 이들로 하여금. 약간 멀리 있으나 그들이 들어야 하는 것에 소망을 갖고 경청하면서 귀를 기울이게 하자(1절).

1. 구속자의 소식이 이방인들에게, 그리고 가장 멀리 있는 자들에게 전해진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들어야 하는 것이다.

2. 유대인들이 귀를 막고 있었을 때 이방인들은 복음을 들었다.

Ⅱ. 그 구속의 위대하신 장본인이며 그 발표자이신 자가, 그가 수행하신 사업에 대한 권위를 하늘로부터 나타내고 계셨다.

1. 하나님은 그 구원을 위해 그를 정하셨고 그를 따로 세워두셨다. "여호와께서 내가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이 직책으로 나를 부르셨고 내 이름을 말씀하셨다. 나를 지명하여 구세주가 되게 하셨다." 한 천사를 통해, 하나님은 그를 "예수" 즉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 할(마 1:21) "구세주" 라 부르셨다. 아니, 창세 전 거룩한 계획의 내부로부터 그는 이 봉사에 부르심을 받았고 그에게 도움이 제공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 부르심에 왔다. 즉 그는 "두루마리 책" 에 그에 대해 기록된 것을 주목하고서 "보라, 내가 왔노라" 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모형인 일부 선지자들에도 언급되었다(렘 1:5). 바울은 그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하심을 받았다(갈 1:15).

2. 하나님은 그를 계획하신 그 봉사에 적합하도록 만드셨고 자격을 부여하셨다. 하나님은 "그의 입을 날카로운 칼같이 만드시고 그로 마광한 살" 을, 또는 빛나는 화살을 "만드셨다." 흑암 권세를 쳐부술 하나님의 전투에, 사단을 정복하고 그리고 그의 말씀으로써 하나님의 반역한 종들을 충성하도록 만들기에 필요한 모든 것을 그에게 공급해 주셨다. 그것은 그의 입에서 나오는(계 19:15) "좌우에 날선 검" 이다(히 4:12). 말씀의 깨달음은 죄인들의 마음을 찌르게 될 화살이다(시 45:5).

3. 하나님은 그에게 예정하셨던 그 봉사에 그를 등용하셨다. "그는 나를 그 손 그늘에," 그리고 그 전통(화살통)에 "숨겼다." 그런데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시사한다.

(1) 음폐. 그리스도의 복음, 그리고 그것에 의해 이방인이 부름을 받는 것은 여러 시대 동안 하나님 안에 오래 숨겨있으며(엡 3:5; 롬 16:25), 의식상의 율법과 구약 모형들의 그늘에 숨겨졌다.

(2) 보호. 다윗 집은 그 속에 복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섭리의 특별한 돌보심을 받았다. 또한 유년기의 그리스도는 해롯의 분노로부터 숨기워졌다.

4. 하나님은 그를 인정하셨고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가 고용한 나의 종이요 형통할 것이라. 너는 사실상 이스라엘, 즉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이다. 그리고 내가 너로 영화롭게 되리라." 하나님의 백성은 "이스라엘" 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흉패에 모든 지파의 이름을 단 대제사장으로서 모든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가장 크신 자인 그리스도 안에 모두 함께 모이고 출두한다. 그리고 그의 안에서 하나님은 영화롭게 되시고 또 앞으로도 그러하실 것이다. 그는 하늘로부터의 음성으로써 그렇게 말씀하셨다(요 12:27, 28). 혹자는 이 말을 "너는 나의 종이라" (그리스도는 그러하시다. 42:1)와 "너는 내 영광을 나타낼 이스라엘이다" 의 두 개의 절로 나누고 있다. 그것은 영적 이스라엘,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자이며, 그의 그런다치더라도 없는 은혜로 영원히 찬미될 그 구원 안에서 택함 받은 자이다.

Ⅲ. 그는 그의 사업의 훌륭한 성과를 확인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가 부르시는 자들을 형통케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에 관하여

1. 그는 처음에 그의 시도를 훼방한 것에 항의하고 있다(4절). "그 때, 나는 슬픈 마음으로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다 하도다. 무지하고 태만하며 하나님께 외인인 자들은 항상 그렇게 한다. 내가 부를지라도 저희가 듣기 싫어했느니라.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 손을 벌렸노라." 이것은 이사야의 원망이었으므로 그것은 그가 듣고 예상했던 것 이상은 아니었다(6:9). 예레미야도 이와 같은 시험으로 더 이상 수고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었다(렘 20:9). 그것은 빈둥거리지 않고 수고한, 자기 힘을 아끼지 않고 그것과 함께 자기 자신을 소비한 많은 충성된 사역자들의 원망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모두 헛되며 수포로 돌아간다. 그들은 회개하고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것은 유대인들의 완악함을 지적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는 인간으로 오셔서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셨고 수고하며 그의 힘을 소모하셨으나, 그 민족의 관원들과 백성들은 그와 그의 교리를 거부했었던 것이다. 그 누구도 버텨서는 안 된다고 생각될 때에 매우 극소수의 사람들이 이끌려 왔으므로 그는 당연히 이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었다.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헛되이 그처럼 많은 설교를 가르쳤고 이적을 행했다. "우리의 주인 자신도 멸시를 받았거늘, 그 일꾼들은 멸시받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아야 할 것이다.

2. 그는 이러한 낙심 아래서, 그가 관여된 것은 하나님의 송사이며 그를 그것으로 이끌어 들인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생각으로써 자기 자신을 위로하고 있다. "정녕히 나의 신원이" 만유의 재판장이신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내가 그 종이 되고 있는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 충성된 모든 사역자들이 그들의 수고가 거의 성공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볼 때, 그와 그들을 안위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1) 어떻든, 그들이 탄원하고 있는 것은 의로운 사유이다.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있으며 하나님을 위해 존재한다. 그들은 그의 편이며, 그와 함께 하는 일꾼이다. 그들은 그들의 판단, 그들의 규정을 좋아하지 않으며 그들의 일, 그들이 종사하고 있는 사업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불신앙은 그의 교리의 진리를 의심할 만한 이유를 그들에게 주지 않는다(롬 3:3).

(2) 이 사유에 대한 그들의 경영 수완과 이 과업의 수행은 하나님께 알려졌고, 그들은 성실함에 관해 그에게 탄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수고가 헛된 것은 그들의 일이 무시당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시느니라. 나의 판단은 여호와와 함께 하리라. 따라서 내가 내 영혼을 내어 주지 않고 사멸하는 자들의 피를 그들의 머리 위에 남겨두지 않았는지를 그가 결정해 주시리라."

(3) 비록 그 수고가 그 수고의 대상에게는 헛될지라도 수고한 사람 자신에게는, 만일 그가 충성된다면 헛되지 않다. 그의 신원이 여호와께 있으므로 비록 사람들이 그를 정죄하고 비난할지라도 여호와께서 그를 의롭다 하시고 지지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일(그의 일에 대한보상)은 하나님께 있으므로 그 하나님께서의 헛된 수고에 의해 그가 손실자가 되지 않도록 보살피실 것이다.

(4) 비록 그 신원이 승리를 가져오거나 그 일을 완전케 하지 않을지라도 이 모든 것은 여호와께 있으므로 그가 그의 뜻대로, 그의 방법과 시기대로 그것을 수행하시고 성공케 하신다.

3. 그는 이 반론에 대한 더 많은 대답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있다(5,6절). 그는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일에 착수케 하셨고 "그를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자기 종을 삼으셨다" 는 것을, 그를 매우 일찌기 그의 종으로 부르셨을 뿐만 아니라 매우 일찌기 그로 하여금 그것에 합당케 하셨고 그를 그렇게 배정하셨다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하나님은 그의 종으로 사용하시기로 계획한 자들을, 아마도 그들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할 때에, 그처럼 오래 전에 그들을 그렇게 만드시며 준비하신다. 사람의 심령을 만들어 내는 자는 하나님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종이 되시어" 패역하게 그에게서 떠난 "야곱을 자기에게 돌아오게" 하실 예정이었다. 그러므로 육신으로 난 야곱의 자손은 제일 먼저 다루어져야 하며, 그들을 돌아오게 하는 수단이 사용되어져야 한다. 즉 그리스도와 그에 의한 구원의 말씀이 제일 먼저 그들에게로 전해져야 한다. 아니, 그리스도는 오직 그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만 인간으로 오신다. 그러나 야곱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고 이스라엘이 모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은 그렇게 입증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다음과 같은 것으로 배상된다.

(1) 그리스도는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존귀하실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존귀한 자들은 진정 그러하다. 비록 유대민족 중 소수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이적에 의해 개종했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그를 치욕스럽고 불명예스럽게 만들었지만, 하나님은 그의 세례로 그에게 영예를 부여하셨고 그를 영광스럽게 만드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모습을 변화시키면서 하늘로부터 그에게 말씀하셨고, 천사들을 보내시어 그를 수종들게 하셨으며, 그의 수치스러운 사망까지도 그것에 따른 여러 가지 불가사의한 일들로써 그의 부활보다도 한층 더 영광스럽게 만드셨다. 그리스도의 고난 중에 하나님은 그의 힘이 되셨다. 그러므로 비록 그가 그처럼 많은 은혜를 베푸셨던 한 백성의 멸시로 인해 그가 말할 수 없는 온갖 고초를 당하셨지만, 그는 "죄짓지 아니하며 낙망하지 않았다." 사자(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도왔다" (눅 22:43). 충성된 사역자들은 비록 그들이 수고의 열매를 보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의 용납하심을 얻을 것이며, 그것으로 그들은 진정 영화롭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은총이 우리의 영예이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의 수고를 계속 고수해 나가도록 도움을 얻을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손을 연약하게 하나, 그들의 힘이 되실 것이다.

(2) 복음은 세상이 보기에 영화로울 것이다. 비록 그것이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그렇지 않을지라도, 그것은 열방들에 의해 환대 받을 것이다(6절). 메시야는 그가 마치 주로 "야곱을 돌아오게" 하기 위해 예정되셨던 것처럼 보였었다(5절). 그러나 여기에서 그는 그것을 비교적 작은 일에 불과하다는 말을 듣고 있다. 그것보다도 더 높은 영예의 궤도와 더 넓은 유용함의 범위가 그에게 설계되어 있는 것이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그들이 메시야를 통해 기대하는 위엄과 주권에게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그리고 그들로 이전처럼 번창하는 교회와 나라로 만든 것은 오히려 경한 일이라(아니, 그들이 한 줌밖에 안 되는 적은 백성임을 고려해 볼 때, 그것은 오직 그들만의 구주되신 메시야께서는 비교적 작은 일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그리스도 복음에 의해 크고 강대한 많은 민족들이 참되신 하나님을 알고 그를 경배하게 될 것이다)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즉 잃어버린 자들을 위해 내가 계획한 그 구원을 베풀어서 땅끝까지, 가장 먼 곳에 있는 나라까지 이르게 하리라." 여기에서 시므온은 그리스도를 "이방을 비추는 빛" 이라 칭하는 것을 배웠고(눅 2:32), 본문에 대한 사도 바울의 해설은 우리가 따라야 할 것이니, 그것은 그 문맥에서 열쇠의 역할을 하고 있다(행 13:47).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돌아서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자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으리라 하셨느니라." 비록 이스라엘이 모이지 않았을지라도, 이 속에서 구속자는 진실로 영화롭게 되셨다. 이방 세계에 그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 야곱의 모든 지파를 일으키는 것보다 더 그에게 영예로운 일이었다. 이 약속은 이미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만일 그 사도가 말하고 있는 시기, 곧 이방인들이 가득 들어오게 될 때가온다면, 그것은 더 성취될 것이다.

여기서 다음 사실을 주목하라. 하나님은 그것을 그의 구원이라 부르고 계시는데, 혹자는 그것이 그가 매우 구원을 기뻐하셨으며(이렇게 말할 수 있는지 모르지만) 그가 매우 거기에 마음을 기울이셨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더 나아가 그리스도께서 그가 구원이 되시는 모든 자들에게 빛이 되시는 것을 주시하고 있다. 사람은 어두움 속에서 사멸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사람들의 눈을 밝히시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을 거룩하고 행복하게 해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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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야의 굴욕과 고양 (이사야 49:7-12)

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메시야의 굴욕과 고양(7절). "이스라엘의 구속자,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이신 여호와," 유대 교회를 돌보시고 그 큰 구원의 표상이었던 구원들을 그들을 위해 역사하셨던 자, 그 구원의 기획자께서 여기에서 그리스도께 말씀하고 계신다. 그리고

1. 그는 그의 굴욕. 특이하고 비할 바 없는 그 굴욕의 사례들을 주목하고 계신다. 그는 "사람에게 멸시를 당하는 자" 였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다" (53:3). 그처럼 천한 피조물(벌레인 사람)에게 멸시를 받는다는 것은 거의 상상할 수 없는 가장 천하고도 경멸스러운 상태를 말해 준다. 그가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영예롭게 하기 위해 오셨으나, 그들은 그를 멸시했고 경렬했다. 그를 핍박한 자들은 그처럼 매우 비열하게 배은망덕했다. 그가 겪으신 모욕은 그의 고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를 멸시당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미움받게 만들었다. 그는 "백성에게 미움을 받는 자" 였다. 그들은 그를 가장 악한 자로 취급했고 "그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라. 십자가에 못박게 하라" 하고 외쳤다. 그 백성은, 즉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했고, 이 점에 있어서 유대인들 보다 더욱 악했다. 왜냐하면 그의 십자가는 "이 사람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 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관원들의 종" 이었다. 그는 밟힘을 당하고 능욕을 당했으며 채찍질을 당하고 노예처럼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빌라도는 그에 대한 권세를 자랑했다(요 19:10). 그러나 그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여기에 복종하셨다.

2. 하나님은 그리스도께 그가 높임받을 것을 약속하고 계신다. 그가 깊은 굴욕 가운데 있었을 때에도 그에게 영예가 부여되었다. 헤롯왕은 그를 두려워하여 말하기를 "이는 세례 요한이라" 했다. 존귀한 자들과 관원들과 백부장들이 그에게 와서 무릎 꿇었다. 그러나 이것은 왕들이 그의 복음을 받아들이며 그의 명예에 복종하고, 그의 경배에 참가하고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의 신하라 칭하였을 때 더 안전히 이루어졌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신하라 칭하였을 때 더 완전히 이루어졌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자들 보다 부유한 자들을 더 존중하셨기 때문이 아니라(그들은 그와 동등한 위치에 있다), 땅의 큰 자들이 그를 위하고 그에게 경의를 표할때 사람들 가운데 있는 그의 나라의 영예를 위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가 될 것이니, 하나님은 그에게 기업으로 이방을 주실 것이다. 자기 약속에 신실하고 "미쁘신 여호와" 께서 그것을 이루실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이 위임받으신 일이라는 것과,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를 택하셨고 그가 하신 선택을 인정하시리라는 것에 대한 증거가 될 것이다.

Ⅱ.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려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저장해 두신 축복.

1. 하나님은 그의 과업을 인정하시고 도우실 것이다(8절).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도다." 즉 네게 응답하리라. 그리스도는 "육체로 계실 때에, 심한 통곡을 올렸고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히 5:7).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항상 그의 말을 들으시는 줄을" (요 11:42), 그 자신을 위해 그의 말을 들으시는 줄을 아셨고(비록 그 자신이 그에게서 지나가지 않을지라도, 지나갈 수 없었을지라도 그는 그것을 마실 능력을 허락 받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것인 모든 사람을 위해 그의 말을 들으시는 줄을 아셨다. 그러므로 그는 권위를 가진 자로서 그들을 위해 중보하셨다. "아버지여 원하옵나이다" (요 17:24). 우리의 모든 행복은 하나님께 대한 그 아들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하나님께서 항상 그의 말을 들으시는 그의 중보의 효과에서 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복음 시대를 은혜로운 때로, 우리에게 환영받는 때로 만든다. 왜냐하면 그 때에는 우리가 용납하심을 얻어 그에게 화목케 되고 위탁되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구속자의 말을 들으시기 때문이다(히 7:25). 하나님께서 그의 말을 들으실 뿐만 아니라, 그의 과업을 철저히 도우실 것이다. 아버지는 그의 우편에 항상 그와 함께 계셨고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를 떠났을 때도 그를 떠나지 않으셨다. 흑암의 권세는, 그들이 그의 과업에서 몰아내는 시기였을 때 우리 주 예수를 그리고 격렬히 공격했으나, 하나님은 그를 보존케 하시고 계속 그것을 고수해 나갈 능력을 그에게 부여하실 것을 약속하고 계신다. "한 돌에 일곱 눈이 있었느니라" (슥 3:9). 하나님은 그를 보존해 주실 것이고 그의 세력을 지키실 것이며, 비록 사방에서 칠지라도 사람들 가운데 있는 그의 나라를 보존하실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기독교가 있는 동안 보존되시는 것이다.

2. 하나님은 그가 역사하실 그 구속의 특전을 그의 교회에 적용하도록 그리스도께 권한을 부여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하고 도우시는 것은 그의 복음의 날을 구원의 날로 만드는 것이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지금은 그리스도에 의한 화목의 말씀이 전파되도다" (고후 6:2).

(1)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 간의 평화 협정의 보증이 되실 것이다. "내가 너로 백성의 언약을 삼으리라." 우리는 이것을 앞에서도(42:6) 보았으며, 여기에서 다시 신실된 것으로서, 그리고 모두 받아들여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서 되풀이되어 있다. 그는 언약을 위해, 즉 언약의 모든 축복의 담보를 위해 주어졌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자기와 화목케 하시는" 것은 그를 통해서였고, "자기 아들을 아끼시지 아니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거절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는 언약을 위해 주어졌다. 그것은 그가 언약의 중보자, 즉 "우리에게 손을 얹을 판결자" 이시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그가 그 언약 속에서 모든 것이 되시기 때문이다. 언약의 모든 의무는 우리가 그의 것이라는 사실로 요약된다. 그리고 언약의 모든 특권과 행복은 그가 우리의 것이라는 사실로 요약된다.

(2) 그는 교회의 썩은 곳을 수리하고 반석 위에 그것을 세울 것이다. 그는 "땅을," 또는 오히려 "나라를," 교회의 모형인 유대 나라를 "일으킬 것이다." 그는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곡케" 될 것이다. 포로들이 돌아온 후의 유다 성읍들이 황무하였고 그 교회가 그러했다. 이것들은 유대 민족의 마지막 부패한 시대에 황무한 나라처럼 되었었으나, 복음의 가르침의 열매에 의해 다시 채워졌던 것이다.

(3) 그는 사람들의 영혼을 죄와 타락의 속박에서 자유케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스러운 자유를 얻게 하실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하여 결박되었고 또 사단의 세력 아래 묶여있던 "잡혀있는 자에게 이르기를 '나오라' 하실" 것이다(9절). 용서하는 긍휼은 율법의 저주로부터의 해방이며, 소생하는 은혜는 죄의 지배로부터의 해방이다. 이 두 가지는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며 큰 구원의 가지들이다. "나오라" 고 말씀하는 것은 그이시다.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은 그 아들이시며, 그때 우리는 진정 자유롭다. 그는 "흑암에 있는 자에게 이르기를 나타나라" 하셨다. "볼 뿐만 아니라 보여서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네 자신은 안위함을 얻으라." 그는 문둥병 환자를 감금에서 해제하셨을 때,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라" 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빛을 볼 때, 우리의 빛이 비추이게 하자.

(4) 그는 그가 자유롭게 하시고 휴식처를 얻어 행복하게 정착하도록 만드신 자들에게 편안한 길을 마련해 주실 것이다(9-11절). 이 구절들은 사로잡혔다가 귀환한 유대인들을 위해 필요한 것들이 공급되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그때 그들은 하늘의 총아로써 하나님의 거룩한 섭리의 특별한 돌보심 아래 있었고, 지금도 특별한 면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이것은 속박에서 풀려 천국의 가나안에 정착한, 하나님의 영적인 모든 이스라엘이 받고 있는 거룩한 은혜의 인도하심에 적용될 수 있다.

[1] 그들은 그들의 짐을 견뎌낼 것이며 필요한 양식을 무료로 얻을 것이다. "그들이" 양같이 "길에서 먹으리라." 하나님은 옛날처럼 지금도 "요셉을 무리 양같이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대로(大路)의 땅도 그의 초장의 양들을 양육하기에 좋은 땅이 될 것이다. 그들의 풀밭은 골짜기에 뿐만 아니라 대개 건조하며 불모지인 "모든 자산( 山)에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인도해 내신 곳에서 그들에게 이로운 것이 부족하지 않도록 돌보실 것이다(시 34:10). 그리고 그들은 매우 잘 공급받을 것이므로 굶주리거나 갈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궁핍함이 극단적인 상황에 이르기 전에 적절한 때에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들은 그들을 괴롭히려는 모든 것으로부터 숨겨지고 보호받을 것이다.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그의 양떼로 오정에 쉬게" 해 주시기 때문이다(아 1:7). 거룩한 보호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어떤 화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즉 그들은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딜" 능력을 얻게 될 것이다.

[3]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인도 아래 있게 될 것이다. 그들을 포로 상태로부터 이끌어 내시는 가운데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자가," 구름과 불기둥으로 광야에서 그들의 열조에게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그들을 이끌되," 그들이 행진할 때 이미 그들에게 준비되어 있을 "생의 근원으로 인도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적합하고 때에 알맞은 위로를 주실 것이며, 그것은 바카 골짜기의 빗물 못과 같은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따른 반석의 룰과 같을 것이다. 거룩한 인도하심 아래 있으며 그것을 철저히 따르는 자들은 그들이 그렇게 하는 동안, 거룩한 위로와 감로주를 바랄 만한 좋은 근거를 갖는다. 세상은 그 추종자들을 파괴된 저수지나 여름이면 물이 마르는 시내로 인도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추종자들을 샘물로 인도하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안내하시는 자들은 길이 마련되어 있고 모든 장애물이 제거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11절). "내가 나의 모든 산으로 길을 삼으리라." 과거에 바다에 길을 만드신 그는 비록 산이 통행하기에 불가능하게 보일지라도 거기에 길을 만드실 것이다. 대로나 둑길이 만들어져 그것을 보다 더 평평하고 좋게 만들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인도하시는 길을 감독하실 것이며. 옛적에 도피성으로 인도한 길처럼 그것이 잘 손질되고 수선되어 있도록 돌보실 것이다. 예언된 바대로(40:2, 3)바벨론으로부터의 길을 평탄케 하는 것은 복음 사업에 적용되었고 이것도 그렇게 될 수 있다. 비록 천국으로 가는 길에 우리가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난관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도와 그것을 극복하게 하고 산까지도 길로 만들기에 충분할 것이다(35:8).

(5) 그는 그들 모두를 온 지역으로부터 이끌어 내어 함께 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들이 한 몸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그들이 서로 격려하여 더욱 주목받을 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대적이 원했던 대로 바벨론 땅의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그들이 결속되는 것을 방해받았다. 그러나 그들을 함께 인도해 내려는 하나님의 때가 이르를 때, 한 심령이 그들 모두를, 서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자들을 고무해 줄 것이며 다른 나라로 피신하였던 자들도 유다 땅에서 그들을 만날 것이다(12절). 여기에 한 무리가 "원방에서," 혹자는 "북방에서," 혹자는 "서방에서," 혹자는 "시님 땅에서 올" 것이다. 아마도 시님 땅은 바벨론의 어떤 도일 것인데 여기 이외에서는 성경에 지명된 바가 없다. 그러나 혹자는 그것을 우리가 에스겔(30:3, 16)에서 볼 수 있는 "신" 이라 칭하여졌던 애굽의 주요 성읍들 중에 속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약속은 개종자들의 큰 무리가 교회로 들어갈 때 더 성취될 것이었고 하나님의 택하신자들이 동으로부터 와서 하나님 나라에 족장들과 함께 앉게 될 때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다(마 8:11).

 

49:8 없음.

 

49:9 없음.

 

49:10 없음.

 

49:11 없음.

 

49:12 없음.

 

49:13

시온에 대한 격려 (이사야 49:13-17)

이 구절들의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포로로부터 귀환하는 것과 그리스도에 의해 역사될 영원한 구속(그것은 이 구속의 모형이었다)은 교회의 기쁨에 큰 이유들이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교회를 자상히 돌보신다는 것에 대한 큰 증거들이 될 것이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Ⅰ. 그 어느 것도 우리에게 찬송과 감사의 노래보다 나은 것을 공급할 수 없다(13절). 온 창조물은 우리와 함께 기쁨의 노래에 참가하도록 하자.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와 함께 구속의 은혜를 나누기 때문이며, 그들이 이 신성한 멜로디에 기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처럼 측정할 수 없는 은총에 대한보답으로는 너무 미약하기 때문이다(시 96:11). 하늘에는 기쁨이 있고 하나님의 천사들은 그 위대하신 구속자를 송축할지어다. 땅과 산들은, 특히 땅의 큰 자들은 "기뻐하며 즐거이 노래하라. 피조물이 바라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 이고(롬 8:19, 21) 그것은 이제 "충분히 응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의 축복이요 장식물이다. 그러므로 범우주적인 기쁨이 있을지어다. "하나님이" 슬픔 속에 있는 "그 백성을 위로하였은즉," 그의 긍휼을 인하여 "그의 고난당한 자를," 그의 연약을 인하여 "그의" 고난 당한 자를 "긍휼히 여길 것임이기" 때문이다.

Ⅱ. 그 어느 것도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에 대해 지니고 있는 가장 자상하고 애정 깊은 관심과, 교회의 유익과 위안을 증명하기 위해 더욱 설득력있는 이론을 우리에게 공급해 줄 수는 없다.

1. 교회의 환난은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과 배려를 의심할 만한 계기가 되고 있다(14절). "시온이" 환난 중에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더 이상 돌보시지 않는다. "주께서 나를 잊으셨으며" 앞으로도 더 이상 나를 돌보시지 않으시리라 "하였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형편이 때로는 매우 비참하여 그들이 그들의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고 잊어버린 바 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라. 이러한 때에, 그들의 시험은 놀랄 만큼 맹렬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신앙심이 없는 자들은 무엄하게도, "하나님께서 이 땅을 버리셨고" (겔 8:12) "저희 죄를 잊으셨다" (시 10:11)고 말한다. 또한 믿음이 연약한 자들은 낙심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버리셨고 그 백성의 슬픔을 잊으셨다" 고 말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섭리와 공의를 의심해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약속과 은혜를 의심해서는 안 된다. 그는 보수하시는 자이심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보답해 주시는 자이시다. 그러므로 우정의 독소인 경계심을 제거하라.

2. 환난이 지난 후에 오는 교회의 환희는 적당한 때에 그 환난을 문제시되지 않게 만들 것이다.

(1) 하나님께서 시온을 위해 행하실 일을 들을 수 있다(17절).

[1] 교회의 친구들, 즉 그것을 버리고 떠나갔던 자들이 그곳으로 모일 것이며, 교회를 돕고 위로하는데 최선을 다해 기여할 것이다. "네 자녀들은 속히 돌아오리라." 그리스도 신앙으로 개종한 자들은 교회의 자손들이다. 그들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크게 즐거워하면서 교회에 연합할 것이며 창가에 모여드는 비둘기처럼 성도의 교제에 올 것이다. "너를 건축할 자들은 속히 돌아오리라(혹자는 그것을 그렇게 해석하고 있다). 그들이 네 집과 네 벽을, 특히 네 성전을 지을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신속히 행할 것이다." 교회일은 보통 천천히 이루어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이를 때, 그것은 갑자기 이루어질 것이다.

[2] 교회를 위협하고 공격했던 그 대적들은 거기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너를 헐며 너를 황폐케 하던 자들은," 그 나라를 점령하며 파괴하던 자들은, "너를 떠나가리라." 그리스도에 의해, 이 세상 군왕들, 즉 그 큰 파괴자들은 쫓겨나가고 탈취당하며, 그 힘을 꺾이우고 그 시도를 완전히 좌절당한다.

(2) 이것에 의해, 하나님께서 시온을 버리거나 잊으셨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시라는 시온의 말은 모두 터무니없는 것임이 나타날 것이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신하라.

[1] 하나님은 그의 교회와 백성에 대해 자상한 애정을 품고 계신다(15절). 시온의 두려움에 대해,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영광을 염려하는 자로서(그는 만일 시온이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셨다" 고 말한다면, 자기 자신의 체면을 손상당한 것으로 여기시며 자기의 깨끗함을 입증하실 것이다), 또한 자기 백성의 안위함을 염려하는 자로서 답변하고 계신다. 그는 그들이 풀이 죽어 낙심하게 내버려 두시거나 불안한 생각에 빠지도록 하지 않으실 것이다. "너는 내가 너를 잊었다고 생각한다.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느냐?"

첫째, 그 자식을 잊는다는 것은 여인답지 않은 일이다.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연약한 성(性)이라는 것이 그 영예가 되어야 하는 여인은 자식에 대한 동정을 품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자식은 순진하고 무력하므로 마땅히 동정을 받아야할 대상인 것이다. 어머니는 특히 자기 자식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자식은 그녀의 것이며 그녀 자신의 분신이고 근래에 그녀와 함께 한자이기 때문이다. 누구보다도 그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는 자기의 젖먹는 자식에 대해 자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가 그것을 잊는다면, 그녀의 유방이 곧 그것을 상기시켜 줄 것이다. 그러나

둘째, 그녀가 잊을 수도 있다. 여자는 자기의 젖먹이는 아이를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불행할 수도 있으며(그녀는 병들어서, 죽어가며 망각의 땅으로 갈 수도 있다), 또한 자기의 수치를 감추기 위해 자기의 자식이 생명으로 태어나자마자 죽이는 자들처럼(애 4:10; 신 28:57)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을 정도로 비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고 말씀하신다.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은 자기 자식을 향한 가장 자애로운 부모들의 것을 무한히 능가한다. 하나님의 그 자식들에 대한 본연의 애정은 얼마나 큰 것인가!



[2] 그는 그의 교회와 백성을 끊임없이 돌보신다(16절).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노라." 이것은 각 사람의 운명이 손금으로 새겨져 있고 거기에 있는 금으로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수상술을 언급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을 잊어 버릴까 염려해서 그것을 염두에 두기 위해 손이나 손가락에 줄을 감아두는 관습이나, 어떤 귀중한 친구를 기념하여 도장이나 기념반지를 지니고 다니는 것을 언급한 것이다. 그가 그들을 이처럼 그의 팔의 인장으로써 정하신 것은 그가 그들을 그의 마음에 인장으로써 두신 것을, 그리고 그가 항상 그들과 그들의 권익을 마음에 두시는 것을 시사한다(아 8:6).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우리 손목에 매어 기호로 삼는다면" (신 6:8, 11, 18), 그는 우리의 권익을 우리 손에 기호로 새길 것이며 그것을 바라보시고 그 언약을 기억하실 것이다. 그는 이렇게 덧붙이고 계신다.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으리라. 네 파괴될 성벽이 비록 즐거운 광경은 아닐지라도, 나의 긍휼의 생각 안에 있을 것이다." 시온의 친구들이 "그 티끌을 연휼히 여기는가?(시 102:14) 시온의 하나님은 그러하시다. 또는 "건축되어야 할 네 성벽의 설계도가 내 앞에 있고 그것은 반드시 그것대로 건축될 것이다." 혹은 "네 성벽(즉 네 안전함)을 네 성벽의 파수꾼처럼 끊임없이 돌본다" 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혹자는 그가 손에 교회를 새기시는 것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 그 손에 생긴 상처에 적용시키고 있다. 즉 그가 그 자국을 보시고 자신이 위하여 죽으셨던 자들을 기억하실 것이다.

 

49:14 없음.

 

49:15 없음.

 

49:16 없음.

 

49:17 없음.

 

49:18

여호와의 돌보심 (이사야 49:18-23)

두 가지 사실이 여기에 약속되어 있는데, 그것은 유대인이 포로가 되었다가 귀환한 후에 유대교가 소생하는 일에서 부분적으로 성취될 것이었고, 또한 그리스도 복음의 전파에 의해 기독교가 심어지는 일에서 더 완전히 성취될 것이었다. 우리는 이 언약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Ⅰ. 교회는 그것에 부가되는 다수의 군중으로 다시 채워질 것이다. "그 자녀들이 속히 돌아오리라" 는 것이 약속되었다(12절). 그 약속은 여기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고 매우 격려를 주는 것으로 되어있다. 약속된 사실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무리들이 온 지역에서부터 교회로 모여들 것이다. "사방을 보라." 유대교에로의 지역적인 접근으로 인해 "다 모여 내게로 오느니라" (18절). 그들은 모든 인접 마을로부터 예루살렘으로 왔다. 그 당시 그것은 그들이 집합하는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 아래에서는 믿음과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에 영적으로 도달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께 오는" 자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시온 산," 곧 "장자들의 총회에 온다" (히 12:22, 23). "눈을 들어" 얼마나 "밭이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는가" 를 보라(요 4:35).

그리스도께로 오는 개종자들의 무리를 보는 것은 교회에게 기쁜 일이 된다.

2. 교회에 더 더하여지는 자들은 교회에게 있어서 짐이나 결점이 되지 않고 그 힘과 장식이 될 것이다. 이 약속의 부문은 맹세로써 확증되어 있다. "내가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네가 반드시 그 모든 무리로 몸에 차리라." 교회에 이러한 무리가 더하여지는 것은 교회의 옷을 완전하게 해 줄 것이다. 그리고 택함받은 모든 자들이 충분히 부름을 받을 때, 그때에 신부, 즉 어린양의 아내가 예비할 것이며 완전한 옷차림을 할 것이다(계 19:7). 그들은 교회를 우아하고 유력하게 나타나도록 만들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신부가 자기의 장식물을 손질하듯 매우 배려깊고 즐겁게 그들을 결속할 것이다. 교회에 더하여진 자들이 신중하고 거룩하며 그 대화에 있어서 모범이 될 때, 그들은 교회의 장식이 된다.

3. 이처럼, 황폐하고 적막하며 거할 자가 없는 땅에(5:9; 6:11)다시 사람들이 모일 것이다. 아니, 사람들이 넘칠 것이다(19절). "네 황폐하고 적막한 곳들과, 즉 오랫동안 그렇게 버려져 있던 곳과, 네 파멸을 당하였던 땅, 즉 너와 함께 파멸되었고 아무도 거하려 하지 않던 네 땅이 이제는 백성들로 가득 찰 것이므로 거할 곳이 없을 것이다." "복을 쌓을 곳" 이 없을 때까지 복이 쏘아진다(말 3:10). 그러나 거기에 그 대적들로 들끓거나, 그 땅에 있는 가나안 사람들 때문에 아브라함과 롯이 그러했던 것처럼 거할 곳이 없어 곤경을 당하리라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너를 삼켰던 자들이 그리고 그것에 대한 네 소유권이 취하되었을 때 네 땅을 소유한 자들이 멀리 떠날 것이니라. 네 백성이 무수할 것이며 그들 중에는 나그네나 대적이 없을 것이다." 이처럼 일부는 유대교의 부패함으로 인해, 그리고 일부는 이방 세계의 가증스러움으로 인해 황폐케 되고 거의 거민이 없었던 "하나님의 나라" 에 기독교가 세워지고 그 은혜와 영광으로 말미암아 다시 사람들이 거하고 풍요케 될 것이다.

4. 새로운 개종자들이 놀랍도록 불어나고 증가될 것이다. 칼과 기근과 포로로 인해 많은 자녀를 잃어버린 예루살렘은 그들 대신 자라나는 새 가정을 얻게 될 것이며, "아벨대신에 다른 씨를 주신" 셋처럼 "고난 중에 낳은" 자녀들과(20절). 집이 무너졌을 때 죽임을 당한 자녀들 대신 하나님께서 주신 욥의 자녀를 얻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교회와 손실을 보상하시고 그 속에 그를 섬기는 자손을 확보해 두실 것이다. 유대인들이 돌아온 후에, "예루살렘 거리에 동남과 동녀가 가득하여 거기서 장난하리라" 는 사실이 약속되어 있다(슥 8:5). 교회는 자기의 불신앙으로 인해 끊어질 수밖에 없는 유대인들을 잃은 후에도, 유대인들이 교회에 속했을 때 그러했던 것 이상으로 여전히 많은 자녀들을 갖게 될 것이다(갈 4:27 참조). 그들은 매우 수효가 많을 것이다.

(1) 그리하여 그 자녀들은 장소가 좁은 것을 불평할 것이다. 그들은 선지자들이 아들들이 불평했던 것처럼(왕하 6:1) "우리 수효가 급격히 늘어나니 이곳은 우리에게 좁다" 고 말할 것이다(그것은 듣기 좋은 말이다). 그러나, 장소가 좁을지라도 들어오려는 욕구는 여전히 더 많을 것이며, 교회는 기꺼이 그들을 받아들일 것이고 장소가 불편하고 비좁다는 사실이 조금도 장애가 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찌 생각하든,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올지라도, "오히려 자리가," 들어온 자들에게 충분한 진리와 아직도 더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있기" 때문이다(눅 14:21, 22).

(2) 어머니는 자기 가족이 불어나는 것에 놀랄 것이다(21절). 그녀가 이르기를 "누가 나를 위하여 이 무리를 낳았는고?" "이 무리를 누가 양육하였는고?" 할 것이다. 그들은 그녀에게로 와서 온갖 의무를 다하고 애정을 쏟으며 자녀로서 복종한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그들을 위해 어떤 수고도 하지 않았고, 그들과 더불어 고생을 하지도 않았고, 그들은 이미 양육되어 그녀의 손에 주게 되어 있었다. 이것은 그녀에게 즐거운 놀라움을 안겨 주고 그녀는 그녀가 근래에 매우 오랫동안 처해 있었던 형편을 곰곰이 생각해 볼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유대 민족은 자기 자녀들을 떠나 버렸고 그들은 끊어졌다. 그 민족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지하신다는 표적들인 궤와 제단과 성전 봉사가 없어지고 황폐케 되었다. 아니, 그 민족은 포로였었고 불안정한 상태에서 끊임없이 이리저리 이동했으며 하나님을 위해서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자녀를 키울 것 같지 않았다. 그 교회는 알려지지 않은 가운데 홀로 남겨졌고(" 이것은 아무도 구하지 않는 시온이라") 매우 고독하고 슬픈 과부 상태로 남겨졌다. 그리고 나서 그것은 어떻게 이처럼 다시 채워지게 되었는가?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보자.

[1] 교회는 영구히 현존하지 않고, 그것이 황폐하여 홀로 남겨지고 숫자적으로 극히 적을 때가 있다.

[2]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황폐함도 영구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것을 회복시키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을 뿐 아니라 돌들을 일으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음이 발견될 것이다.

[3] 때로는 이것이 나라가 하루에 생길 때처럼(66:8) 매우 놀랍게 이루어진다.

5. 이것은 이방인들의 도움으로 이루어질 것이다(22절). 유대인들은 버림을 받았다. 그들 가운데에서 교회가 세워질 것이 기대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를 이 땅에 심으실" 것이며, 거기에서 풍성한 수홧을 거두실 것이다(호 2:23).

(1) 어떻게 이방인들이 부름을 받을 것인가? 하나님께서 종일 손을 펴서 유대인들을 불렀으나(65:2) 헛되이 돌아가자, "그들을 향하여 그의 손을 들고" 그들을 인도하거나 부르실 것이다. 또는 그것은 전능하신 능력이 발휘되는 것으로, 즉 그들이 기꺼이 오도록 하게끔 그의 성령과 은혜가 발휘되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향하여 그의 기호를," 영원한 복음의전파를 "세울" 것이며, 그들은 거기로 모여들고 거기에 편입할 것이다.

(2) 어떻게 그들이 올 것인가? "그들이 그의 아들들을 품에 안을 것이니라." 그들이 자기 나라로 돌아올 때 그들 중에서 발견된 시온의 아들들을 도울 것이며, 연약하고 무력한 아기를 부모가 품에 안는 것처럼 매우 자상하게 그들을 인도할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이방 사람들 중에서도 친구들을 일으키실 수 있다. "땅이 여자를 도왔도다" (계 12:16). 또는, "그들은 올 때 그 자녀를 데리고 올 것이며, 그들은 그의 자녀로 만들 것이다(60:4 와 비교). "누가 이 무리를 낳고 양육하였는고? 하고 네가 묻느냐? 그들은 이방인들 가운데서 낳아 양육되었지만 이제 네 가족이 되리라는 사실을 알라" 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어린 개종자들, 그리고 신앙적으로 어린 초보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 그 어린양들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는" 것처럼 매우 자상하고 조심스럽게 그들을 다루어야 한다는 것을 배우도록 하자.

Ⅱ. 교회는 열국들에게서 크고도 유력한 세력을 얻을 것이다(22,23절).

1. 열왕들 중의 일부는 교회의 후원자와 보호자가 될 것이다. "열왕을 네 양부가 되어" (모세처럼, 민 11:12) 네 아들을 그들의 품에 안을 것이다. 그리고 여자가 가장 적합한 양육자이므로, "앙비들은 네 유모가 될 것이니라." 이 약속은 유대인들이 사로 잡혔다가 귀환했을 때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다. 고레스 다리오, 그리고 아닥사스다와 같은 여러 바사 왕들은 그들의 권익을 보살펴 주었고, 그들을 장려 하고 격려했다. 또한 에스더 왕비는 포로로 남아있는 유대인들의 양모로서 불 속에서 그 아기를 꺼내기 위해 자기 생명의 위험을 무릎썼다. 오랜 감금 상태 후의 기독교 교회는 교회를 온갖 배려와 자상함을 갖고 양육했던 콘스탄티누스와 그의 어머니 헬레나 같은 왕들과 왕비들 가운데서 행복했으며, 그 후에는 데오도시우스와 그밖의 왕들 가운데에서 행복했다. 통치의 홀이 신앙적인 군왕들의 손에 놓일 때마다, 이 약속은 이루어진다. 이 세상에 있는 교회는 유아 상태에 있으며, 교회를 위해 큰 봉사를 행할 수 있는 군왕과 장관들의 권세 안에 있다. 그들이 그렇게 행할 때, 그들의 권세가 잘 행하는 자들을 칭송을 할 때, 교회는 행복한 것이다.

2. 그들 중에서, 교회의 세력이 도전하는 사람들은 항복하고 그들의 반항을 후회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들은 네게 절하고 네 발의 티끌을 핥을 것이니라."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한 약속은 이 말씀을 빌어온 것으로 보인다(계 3:9). "내가 사단의 회의 몇 사람으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리라." 또는,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서 자기 자신을 명시할 때, 왕과 나라들이 교회의 왕이신 그리스도께 기꺼이 복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시 72:11). "만왕이 그 앞에 부복하리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 의해 다음과 같은 사실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1) 하나님은 여호와, 만유의 주재이시며, 그 어느 것도 끝까지 그에게 대항하거나 버틸 수 없다.

(2) 그를 바라는 자들, 즉 그의 약속에 의지하며 그의 뜻에 맡기는 자들은 그들의 소망에 대해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평강에 대한 비젼은 정해진 시기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말에는 이것이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니라."

 

49:19 없음.

 

49:20 없음.

 

49:21 없음.

 

49:22 없음.

 

49:23 없음.

 

49:24

여호와의 전능하심 (이사야 49:24-26)

Ⅰ. 바벨론에 있는 유대인들의 해방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음을 제시하면서 그것에 대한 이의가 제기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강한 자, 그 당시 땅에서 가장 큰 군주의 손에 떨어진 먹이였으므로, 그들이 폭력적으로 구조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24절).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었다. 즉 그들은 합법적인 포로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전쟁에서 잡혔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그들이 속전되거나 교환될 때까지는 마땅히 포로로 감금되어 있어야 했다. 이것은 다음 두 가지 면으로 해석될 수 있다.

1. 그들의 대적들은, 자기네들이 그들을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러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들은 권력과 권리를 주장한다. 교만한 자들은 그들이 손을 대는 모든 것이 그들의 것이고, 그들이 가장 큰 칼을 갖고 있기만 한다면 훌륭한 직함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2. 그들의 친구들이 구원에 대해 낙심하여 불신하는 투로(" 우리를 감금한 자들을 누가 완력으로나 화친으로 다룰 수 있겠느냐?") 또는 그 구원에 대해 감탄하는 감사의 어투로 이러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

" 그 희생물을 용사에게서 빼앗을 것을 누가 생각했겠느냐? 그러나 그것은 이루어졌다."

이것은 그리스도에 의한 우리의 구속에 적용된다. 우리는 사단에게 용사의 손에 있는 먹이였으나, 생명의 권세를 지니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망의 권세를 지닌 사단에게서 건져졌다.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는 합법적인 포로였으나 헤아릴 수 없이 귀한 대가에 의해 건지워졌다.

Ⅱ. 이러한 의미에 대해 특별한 약속. 즉 또 하나의 약속이 주어져 있다. 하나님의 약속들은 모두 예와 아멘이기 때문에 그 약속들은 서로 확증해 주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1. 대적의 힘에도 nonobstante- 즉 불구하고 특별한 약속이 주어져 있다(25절). "용사의 포로는 그 용사가 아무리 강할지라도 그에게서 벗어날 것이며, 용사는 그것을 막아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강포자의 빼앗은 것은, 그 강포자가 아무리 무시무시할지라도 건지워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온갖 힘을 기울여도 그 구원과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무찌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파렴치하다 할지라도 태연할 수가 없다." 여호와는 그의 손에 모든 권세와 마음을 쥐고 계시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는 그의 말씀을 성취하실 수 있다.

2. 하나님께서 그 구원을 어떻게,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이루실까를 보여주면서, 또 하나의 약속이 주어져 있다. 그는 학대하는 자들에게 심판을 내리시고 그렇게 함으로써 학대당하는 자들을 위해 구원을 역사하실 것이다. "내가 너를 대적하는 자를 대적하고, 너를 학대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자들에 대한 네 사유를 변호하리라. 너와 다투는 자가 누구든지 간에, 비록 그가 단 한 사람일지라도, 자신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니, 이처럼 내가 네 자녀를 구원할 것임이라." 포로된 자들은 "사로잡는 자를 사로잡히게" 함으로써, 즉 하나님의 백성을 포로로 만든 자들을 포로로 보냄으로써(계 13:10) 건지워질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피의 보복을 피로 받게 될 것이다(26절). "내가 너를 학대하는 자로 자기의 고기를 먹게 하며, 자기의 피에 취하게 하리라. 교만한 바벨론 사람들은 서로에게 쉽게 먹이가 될 뿐만 아니라 마음에 드는 먹이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분열하는 마음을 보내실 것이며, 외세의 침입에 의해 시작된 그들의 멸망은 내부의 분열에 의해 완결될 것이다. 그들은 피차 멸망할 때까지 물고 삼킬 것이다. 그들은 자기의 피와 살들을 게걸스럽게 그리고 즐겁게 먹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교회의 압제자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괴롭히고 멸망시키는 자로 만드실 수 있다. 신약 바벨론은 자기 자신으로 하여금 성도들의 피를 마시게 만들었으므로, "그것이 마실 피를 얻을 것이니, 그것은 합당한 연고라." 사람들은 때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서로에 대해서 얼마나 잔인한가를 보라. 사실상 다른 사람들에게 그러한 자들은 자기 자신에게도 그러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람들의 보복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가늠했던 것에 의해 그들을 잴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피에 갈급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매우 게걸스럽게 마시기 때문에 그것에 취하며, 마치 그것이 달콤한 술인 것처럼 매우 즐겁게 마신다. 죄인들이 서로에게 노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죄인들에게 긍휼을 베푸시지 않는다면, 세상은 곧 아겔다마(피밭)나 또는 폐허가 되었을 것이다.

Ⅲ. 바벨론이 멸망한 결과가 어떠할 것인가를 보라. "모든 육체가 나 여호와는 네 구원자인 줄 알리라." 하나님은 그것을 나타내시어, 비록 이스라엘이 실종당하고 버림을 받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구속자를 갖고 있으며, 비록 그들이 용사에게 희생이 될지라도 야곱은 그의 모든 대적을 다루실 수 있는 전능자를 갖고 계신 것을 온 세계에 깨닫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교회를 건지심으로써 자기 이름을 공고히 하고 높이시려는 의도를 지니고 계시다.

 

49:25 없음.

 

49:26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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