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1
2. 높은 자들 선한 사람들과 선한 사역자들의 기도를 원하는 것이 합당하다. 히스기야는 이사야가 현재의 사건에 대해 얼마나 명확하게 예언했는가를 기억하고서, 그의 기도를 부탁하기 위해 사신들과 존귀한 자들과 제일인자들을 그에게 보냈다. 아마도 그는 이 예언이 이루어진 것을 보고서 그 일의 결과도 다행스럽게 되리라는 것만은 의심치 않았으나 기도의 응답으로 그러한 결과를 얻게 되기를 원했을 것이다. "오늘은 환날의 날이니 이 날이 기도의 날이 되도록 하자."
3. 우리가 매우 어려운 상태에 있을 때에는 아주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이제 "아이를 낳으려하나 해산할 힘이 없으니" 기도가 이루어지도록 필사적으로 돕자. 고통이 가장 클 때 가장 강렬하게 기도하자. 그리고 우리가 가장 큰 역경에 부딪힐 때, 그것은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을 꼭 붙잡도록 분기시켜야 할때이다. 기도는 긍휼이 나오도록 도와주는 산파인 셈이다.
4. 우리가 긍휼에 대해 약간의 소망밖에 가지지 않았을지라도 그것을 기도하도록 하는 격려가 된다(4절).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들으셨을 것이다."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실 줄 누가 알겠느냐?" (욜 2:14)축복의 안식처에 대한 일말의 전망으로 기도의 노를 두 배로 열심히 젓도록 해야 한다.
5. 남은 자가 있을 때, 단지 남은 자만이 있을 때 우리는 그 남은 자를 위해 기도를 올리도록 해야 한다(4절). 하늘에 이르는 기도는 강한 믿음으로써, 간절한 소망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직접적인 의도로써 올려져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마지막 궁지에 몰렸을 때 이 모든 기도는 민활히 이루어져야 한다.
6. 하나님을 적으로 삼는 자들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그들은 파멸할 운명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위협하는 소리를 낼지라도, 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 랍사게는 하나님을 모독했다. 따라서 히스기야는 그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6절). 그는 그의 독설로써 하나님을 그 사건에 관여하게 했다. 그러므로 심판이 그에게 반드시 임할 것이다. 하나님은 필연코 그 자신의 송사를 변론하실 것이다.
7. 죄인들의 두려움은 그들의 멸망의 서막에 불과하다. 산헤립은 그의 군대가 살륙당한다는 "풍성을 들을" 것이며, 그것은 그로 하여금 그의 고토로 돌아가게 만들 것이고 거기에서 그는 살륙당할 것이다(7절). 산헤립을 쫓는 무서운 것은 그를 마침내 "무서움의 왕" 에게로 끌어갈 것이다(욥 18:11, 14). 죄인들을 쫓는 저주가 결국 그들을 덮칠 것이다.
히스기야의 전갈 (이사야 37:1-7)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 볼 수 있다.
1. 우리를 치려는 적의 악의에 찬 계획을 좌절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그것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의 의무로 돌아와, 전화위복을 만드는 것이다. 랍사게는 히스기야를 놀라게 하여 여호와에게서 떠나게 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으나 그것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도망하게 하는 결과가 되고 있다. 바람은 나그네의 외투를 벗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더욱 단단히 감싸입도록 만드는 것이다. 랍사게가 하나님을 비방할수록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가해진 치욕에 대해 그의 옷을 찢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위해 그의 성소에 감으로써, 그를 영예로우시게 할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2. 높은 자들 선한 사람들과 선한 사역자들의 기도를 원하는 것이 합당하다. 히스기야는 이사야가 현재의 사건에 대해 얼마나 명확하게 예언했는가를 기억하고서, 그의 기도를 부탁하기 위해 사신들과 존귀한 자들과 제일인자들을 그에게 보냈다. 아마도 그는 이 예언이 이루어진 것을 보고서 그 일의 결과도 다행스럽게 되리라는 것만은 의심치 않았으나 기도의 응답으로 그러한 결과를 얻게 되기를 원했을 것이다. "오늘은 환날의 날이니 이 날이 기도의 날이 되도록 하자."
3. 우리가 매우 어려운 상태에 있을 때에는 아주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이제 "아이를 낳으려하나 해산할 힘이 없으니" 기도가 이루어지도록 필사적으로 돕자. 고통이 가장 클 때 가장 강렬하게 기도하자. 그리고 우리가 가장 큰 역경에 부딪힐 때, 그것은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을 꼭 붙잡도록 분기시켜야 할때이다. 기도는 긍휼이 나오도록 도와주는 산파인 셈이다.
4. 우리가 긍휼에 대해 약간의 소망밖에 가지지 않았을지라도 그것을 기도하도록 하는 격려가 된다(4절).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들으셨을 것이다."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실 줄 누가 알겠느냐?" (욜 2:14)축복의 안식처에 대한 일말의 전망으로 기도의 노를 두 배로 열심히 젓도록 해야 한다.
5. 남은 자가 있을 때, 단지 남은 자만이 있을 때 우리는 그 남은 자를 위해 기도를 올리도록 해야 한다(4절). 하늘에 이르는 기도는 강한 믿음으로써, 간절한 소망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직접적인 의도로써 올려져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마지막 궁지에 몰렸을 때 이 모든 기도는 민활히 이루어져야 한다.
6. 하나님을 적으로 삼는 자들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그들은 파멸할 운명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위협하는 소리를 낼지라도, 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 랍사게는 하나님을 모독했다. 따라서 히스기야는 그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6절). 그는 그의 독설로써 하나님을 그 사건에 관여하게 했다. 그러므로 심판이 그에게 반드시 임할 것이다. 하나님은 필연코 그 자신의 송사를 변론하실 것이다.
7. 죄인들의 두려움은 그들의 멸망의 서막에 불과하다. 산헤립은 그의 군대가 살륙당한다는 "풍성을 들을" 것이며, 그것은 그로 하여금 그의 고토로 돌아가게 만들 것이고 거기에서 그는 살륙당할 것이다(7절). 산헤립을 쫓는 무서운 것은 그를 마침내 "무서움의 왕" 에게로 끌어갈 것이다(욥 18:11, 14). 죄인들을 쫓는 저주가 결국 그들을 덮칠 것이다.
37:8
2. 전쟁을 즐기는 자는 전쟁을 충분히 하게 될 것이다. 산헤립은 어떤 자극이나 통고를 받음이 없이 유다를 치기 위해 싸움터로 나갔다. 그리고 이제 거의 어떤 형식을 갖추지 않은 채 구스왕은 그를 치기 위해 싸움터로 나가고 있다(9절). 싸움을 좋아하는 자들은 도전당할 것을 예상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때로 그의 대적들의 분노를 강하게 견제하심으로써 그것을 저지하신다.
3. 교만하고 불경스럽게 말하는 것은 나쁘다. 더구나 그렇게 기록하는 것은 더욱 나쁘다. 왜냐하면 기록된 것에는 고의적인 것과 계획적인 것이 더욱 많이 들어있으며 그것은 더욱 멀리 퍼지고 오래 남으며 더 큰 해를 끼치기 때문이다. 문서화된 무신론과 무신안은 반드시 언젠가는 추단(推斷)될 것이다.
4. 큰 성공은 흔히 죄인들의 마음을 죄악의 길에서 굳어지게 하며 더욱 대담하게 만든다. 앗수르 왕은 온 땅을 멸했기(사실상 그들의 수하에 떨어진 것은 소수에 불과했을지라도)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의 땅을 멸하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고 있다. 열방의 신들이 도울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 이스라엘의 하나님도 그러하리라고 단정한다. 우상을 섬기는 하맛과 아르밧의 왕들은 그들에게 쉽게 희생되었으므로 종교적 개혁을 단행하는 그 유다의 왕도 역시 그렇게 될 처지에 놓여있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교만한 자는 눈부시게 형통함으로써 자기의 멸망을 무르익게 하는 것이다.
5.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자유와 거기에서 말할 자유는 여호와의 백성들이 항시 지니고 있는 말할 수 없는 특권이며, 환난과 위험의 때에는 특히 그러하다. 히스기야는 산헤립의 편지를 받아 그것을 여호와 앞에 펴놓았는데, 그것을 산헤립 자신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가 손수 기록한 문제들을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그 일 자체로 하여금 말하게 하자. 여기에 그것이 글로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여 눈을 떠 보시옵소서." 하나님은 그의 기도하는 백성들이 그에게 겸손하고 허심탄회하게 행하도록 허락하시며, 입다처럼 그의 앞에 모든 말을 다하도록, 그리고 친구에 관한 것이든 원수에 관한 것이든 그 편지를 그의 앞에 펴놓고 그 내용과 문제를 그에게 맡겨 놓도록 허락하신다.
6. 믿음으로 적용되고 기도 속에서 증진되는 우리 신앙의 크고도 근본적인 원리는 우리의 특별한 위기와 환난이 어떠한 것이든 간에 그러한 상황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최고로 유용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기에 의뢰해야 하며 그것을 따라야 한다. 히스기야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 군대를 활기있게 해 주며 그들의 대적의 군대를 위축시키고 제지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이시라는 사실로써 그 자신을 격려했다. 즉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으로서 그와 비길 자가 아무도 없으며, 그는 "천하만군의 하나님" 으로서 그가 원하시는 대로 그들 모두를 주재하신다. 그는 천지를 만드셨기 때문에 그는 어떤 일이든 행하실 수 있으며 모든 일을 행하시는 것이다.
7. 큰 파괴자인 사람들을 두려워할 때, 우리는 겸손한 담대함을 갖고 위대한 구주이신 하나님께 호소할 수 있다. 그들은 사실상 열방들을 멸했다. 그 민족들은 거짓된 신을 숭배함으로써 참되신 하나님의 보호밖으로 그들 자신을 내어 던졌던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 유일하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하나님, 우리의 왕, 우리의 입법자이시며, "믿는 자들의 구주" 이신 그가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다.
8.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자유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즉 우리가 패한다면 그의 이름이 더렵혀질 것이며 우리가 구조된다면 그것이 영화롭게 되리라는 것을 진술할 수만 있다면, 기도로써 하나님과 씨름하는 가운데 붙잡을 만한 것을 충분히 지니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매우 중요한 탄원이 나올 것이다. "주의 영광을 위해 그것을 행하소서."
히스기야의 기도 (이사야 37:8-20)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살펴 볼 수 있다.
1.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 가운데에서 우리에게 내적인 만족을 주신다면,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잠잠히 우리의 훼방을 견디어 내도록 할 것이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에게 대답하셨다. 그러나 그가 심사숙고하신 후에 랍사게에게 대답을 보내셨는지는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일을 그의 손 안에 쥐고 계셨으므로 히스기야는 조용히 그 문제를 그에게 맡겼다. "랍사게도" 새로운 지시를 얻기 위해 그의 주인, 그 왕에게로 "돌아갔던" 것이다.2. 전쟁을 즐기는 자는 전쟁을 충분히 하게 될 것이다. 산헤립은 어떤 자극이나 통고를 받음이 없이 유다를 치기 위해 싸움터로 나갔다. 그리고 이제 거의 어떤 형식을 갖추지 않은 채 구스왕은 그를 치기 위해 싸움터로 나가고 있다(9절). 싸움을 좋아하는 자들은 도전당할 것을 예상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때로 그의 대적들의 분노를 강하게 견제하심으로써 그것을 저지하신다.
3. 교만하고 불경스럽게 말하는 것은 나쁘다. 더구나 그렇게 기록하는 것은 더욱 나쁘다. 왜냐하면 기록된 것에는 고의적인 것과 계획적인 것이 더욱 많이 들어있으며 그것은 더욱 멀리 퍼지고 오래 남으며 더 큰 해를 끼치기 때문이다. 문서화된 무신론과 무신안은 반드시 언젠가는 추단(推斷)될 것이다.
4. 큰 성공은 흔히 죄인들의 마음을 죄악의 길에서 굳어지게 하며 더욱 대담하게 만든다. 앗수르 왕은 온 땅을 멸했기(사실상 그들의 수하에 떨어진 것은 소수에 불과했을지라도)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의 땅을 멸하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고 있다. 열방의 신들이 도울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 이스라엘의 하나님도 그러하리라고 단정한다. 우상을 섬기는 하맛과 아르밧의 왕들은 그들에게 쉽게 희생되었으므로 종교적 개혁을 단행하는 그 유다의 왕도 역시 그렇게 될 처지에 놓여있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교만한 자는 눈부시게 형통함으로써 자기의 멸망을 무르익게 하는 것이다.
5.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자유와 거기에서 말할 자유는 여호와의 백성들이 항시 지니고 있는 말할 수 없는 특권이며, 환난과 위험의 때에는 특히 그러하다. 히스기야는 산헤립의 편지를 받아 그것을 여호와 앞에 펴놓았는데, 그것을 산헤립 자신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가 손수 기록한 문제들을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그 일 자체로 하여금 말하게 하자. 여기에 그것이 글로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여 눈을 떠 보시옵소서." 하나님은 그의 기도하는 백성들이 그에게 겸손하고 허심탄회하게 행하도록 허락하시며, 입다처럼 그의 앞에 모든 말을 다하도록, 그리고 친구에 관한 것이든 원수에 관한 것이든 그 편지를 그의 앞에 펴놓고 그 내용과 문제를 그에게 맡겨 놓도록 허락하신다.
6. 믿음으로 적용되고 기도 속에서 증진되는 우리 신앙의 크고도 근본적인 원리는 우리의 특별한 위기와 환난이 어떠한 것이든 간에 그러한 상황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최고로 유용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기에 의뢰해야 하며 그것을 따라야 한다. 히스기야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 군대를 활기있게 해 주며 그들의 대적의 군대를 위축시키고 제지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이시라는 사실로써 그 자신을 격려했다. 즉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으로서 그와 비길 자가 아무도 없으며, 그는 "천하만군의 하나님" 으로서 그가 원하시는 대로 그들 모두를 주재하신다. 그는 천지를 만드셨기 때문에 그는 어떤 일이든 행하실 수 있으며 모든 일을 행하시는 것이다.
7. 큰 파괴자인 사람들을 두려워할 때, 우리는 겸손한 담대함을 갖고 위대한 구주이신 하나님께 호소할 수 있다. 그들은 사실상 열방들을 멸했다. 그 민족들은 거짓된 신을 숭배함으로써 참되신 하나님의 보호밖으로 그들 자신을 내어 던졌던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 유일하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하나님, 우리의 왕, 우리의 입법자이시며, "믿는 자들의 구주" 이신 그가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다.
8.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자유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즉 우리가 패한다면 그의 이름이 더렵혀질 것이며 우리가 구조된다면 그것이 영화롭게 되리라는 것을 진술할 수만 있다면, 기도로써 하나님과 씨름하는 가운데 붙잡을 만한 것을 충분히 지니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매우 중요한 탄원이 나올 것이다. "주의 영광을 위해 그것을 행하소서."
37:21
2. 자기 자신을 높이는 자들, 특히 하나님과 그의 백성에 대적하여 자기 자신을 높이는 자들은 모든 지혜로운 사람들이 보기에는 사실상 그들 자신을 천하게 하며 경멸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처녀딸 시온이 산헤립을, 그리고 그의 모든 무력한 악의와 위협을 멸시하였느니라. 그녀는 자기의 순결을 보존하는 동안에는 확실히 거룩한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것과 비록 그 대적이 짖을지라도 물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의 모든 위협은 웃음거리이다. 그것은 모두 brutum fulmen-즉 단순한 섬광에 지나지 않는다."
3. 하나님의 백성을 학대하는 자들은 하나님 자신을 모욕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는 자기 백성에게 대해 말해지고 행해진 것을 그 자신에 대해 말해지고 행해진 것으로 여기신다. "네가 훼방한 것은 누구에게냐?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그가 거룩한 자이기 때문에 네가 훼방한 자에게니라." 산헤립 자신이 하나님을 훼방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종들도 똑같은 일을 행하도록 그가 만들었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그의 무엄한 행위를 더욱 가중시켰다. "네가 네 종으로, 천한 사람으로 "주를 훼방하였느니라."
4. 자기 자신과 자기의 업적을 자랑하는 자들은 하나님과 그의 섭리를 비방하는 것이다. "네가 이르기를, 내가 우물을 파서 물을 마셨도다. 내가 뛰어난 업적을 행하였고 앞으로도 더욱 행하리라 하였도다. 그리고 너는 이 일들을 내(하나님)가 행한 바라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24-26절). 가장 적극적인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이상으로 행할 수는 없으며, 하나님께서는 옛부터 그가 계획하셨던 것 이상의 상태로 그들을 만드시지는 않는다. "이 일들은 상고부터 영원한 계획 가운데 정한 바로서, 이제 내가 이루어(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뜻의 계획대로 모든 것을 행하시기 때문이다)너로 견고한 성을 헐게 하였노라. 그러므로 그것을 네 자신의 행위로 만드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오만이니라."
5. 교회의 원수들의 모든 악의, 모든 활동과 계획들은 교회의 하나님의 인지와 제지 아래 있는 것이다. 산헤립은 여기 저기에서, 그리고 모든 곳에서 활발하고 날렵했으나 하나님을 그의 행방을 알고 계셨고 항상 그를 주시하셨다(28절). 그리고 그것만이 아니다. 그는 또한 그에게 손을, 즉 엄격하고 강한 손을 얹어 두고 계셨고, "갈고리로 그의 코를 꿰며 자갈을 그의 입에 먹이셨다." 따라서 아무리 그가 매우 고집이 세고 제멋대로였을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으로써 "그를 오던 길로 되돌아가게" 하실 수 있었고, 또 그렇게 하시곤 했다(29절). "네가 여기까지 오고 넘어가지 못하리라." 하나님은 산헤립을 보내어 유다를 치라는 임무를 명하셨던 것이다(10:6). 여기에서 그는 그 임무를 찬탈하고 있다. 산헤립은 그들을 놀라게 했으나 그들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더 이상 행하지 못하도록 해고당했다. 아니, 그가 투옥당하도록 여기에 날인되어 있다. 따라서 그는 투옥되어 그의 직권 이외의 것을 행한 것에 대해 댓가를 받고 있다.
6.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너그러우신 은인일 뿐만 아니라 유력하신 보호자이시며, 그를 의지하는 자들에게 해와 방패가 되신다. 예루살렘은 방어될 것이어서(35절) 그 공격자들은 그 안으로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조직적인 공격을 감행하지 못하고 공격을 개시하기도 전에 패주당할 것이다(33절). 그러나 이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긍휼을 되돌려주실 것이며 그들에게 선을 행하실 것이다. 그들의 땅은 다른 어느 때보다 비옥해져서, 그들의 손실은 풍족히 보상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대적이 나라를 황폐케 한 것으로 인한, 또는 그들이 경작지를 빼앗긴 것으로 인한 나쁜 영향을 느끼게 되지 않을 것이다. 땅은 처음과 같이 그 소산을 낼 것이고 그들은 그 자연적인 산물을 풍족히 먹으며 살 것이다. 그가 원하시기만 하면 부지런한 자의 손이 없이도 여호와의 축복을 풍요하게 만들 수 있으시다.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나라가 황폐케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그 땅이 안식년을 누리지 않아도 되는 구실로 삼지 않게 하자. 안식해는 그 다음 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때 그들은 밭을 갈거나 씨를 뿌려서는 안 되었다. 아니, 비록 그 해를 위해 미리 저축해 둔 것이 지금 없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종교적으로 그것을 준수해야 했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마련해 주시도록 의지해야 한다.
7. 하나님의 심판이 임무를 띠고 왔을 때, 그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1) 가장 큰 수효의 무리들도 그 앞에서는 설 수 없다. 하나님께서 영을 내리실 때는 한 사자(使者)가 하루 밤만에 거대한 군사들을 즉석에서 죽게 할 것이다(36절) 여기에 순식간에 무수한 시체로 변한 185,000명의 용사들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시편 76편이 이 격파 사건을 맞이하여 지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때에 "마음이 강한 자가 탈취를 당하여" 오랫동안 잠을 잔 사실로부터(5절), 하나님은 "영화로우시며 약탈한 산에서 존귀하시다" 는 것(4절)과 "주 곧 주는 경외할 자이시라" 는 것(7절)이 추론되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천사들은 하나님의 정의의 일꾼으로서 고용되어 교만한 자를 벌하며 악한 자의 힘을 꺽는 것이다.
(2) 가장 큰 사람들도 그것 앞에서는 설 수 없다. "큰 왕, 앗수르 왕" 은 그가 크게 장담하던 그의 계획을 달성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매우 수치스러울 뿐만 아니라, 그의 군대를 멸한 사자가 그를 죽이지나 않을까 하여 두려움과 공포에 가득 차서 돌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될 때, 매우 보잘 것 없게 보인다. 그러나 산헤립은 그를 보호해 주었어야 할 그의 아들이 자신이 보호를 구하던 우상의 제물로 자신을 바치게 될 때 더욱 비참하게 보이게 된다(37,38절).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 대하여 "위협과 살기가 등등한" 자들의 호흡을 곧 멈추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심판을 행하사 자기를 알게" 하시며, 교만한 자를 대항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많은 예언들이 이 섭리 속에서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더 멀리 바라보도록 격려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많은 예언들은 그것이 성취되리라는 것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든 사람들과 교회의 안전을 일반적이고도 보편적으로 확신케 해 주기 위한 의도를 지니고 있다. 건지신 자가 지금도 건져 주시며 앞으로도 그렇게 하실 것이다. 여호와여, 우리의 원수를 용서하소서. 그러나 "여호와여, 주의 대적을 다 망하게 하시옵소서."
산헤립의 멸망(이사야 37:21-38)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살펴 볼 수 있다.
1. 사람들로부터의 두려운 소식을 인내를 갖고 받아들이며, 기도로써 믿음의 소식을 하나님께 보내는 자들은 그들이 가장 낙심 상태에 있을 때 그들의 안위를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은혜와 평강의 소식을 기대할 수 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히스기야의 기도에 긴 대답을 보냈다. 그것을 적어서 보냈고(왜냐하면 그것은 구두로 전하기에는 너무 길었기 때문이다), 그의 기도와 관련시켜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의 방식으로 보냈다. "네가 내게 기도하였으니 이제 그 기도가 들은 바 되었다는 것을 알고 네 자신을 안위하라." 이사야는 그로 하여금 자기가 전달한 예언들을 (특히 10장의 것을)참조하게 하여 거기에서 답을 뽑아내도록 지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히스기야가 풍성한 위로를 얻도록 하기 위해 일부러 소식을 보냈다. 하늘과 땅 사이의 교통이 결코 하나님 편에서 끊어지지는 않는다.2. 자기 자신을 높이는 자들, 특히 하나님과 그의 백성에 대적하여 자기 자신을 높이는 자들은 모든 지혜로운 사람들이 보기에는 사실상 그들 자신을 천하게 하며 경멸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처녀딸 시온이 산헤립을, 그리고 그의 모든 무력한 악의와 위협을 멸시하였느니라. 그녀는 자기의 순결을 보존하는 동안에는 확실히 거룩한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것과 비록 그 대적이 짖을지라도 물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의 모든 위협은 웃음거리이다. 그것은 모두 brutum fulmen-즉 단순한 섬광에 지나지 않는다."
3. 하나님의 백성을 학대하는 자들은 하나님 자신을 모욕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는 자기 백성에게 대해 말해지고 행해진 것을 그 자신에 대해 말해지고 행해진 것으로 여기신다. "네가 훼방한 것은 누구에게냐?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그가 거룩한 자이기 때문에 네가 훼방한 자에게니라." 산헤립 자신이 하나님을 훼방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종들도 똑같은 일을 행하도록 그가 만들었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그의 무엄한 행위를 더욱 가중시켰다. "네가 네 종으로, 천한 사람으로 "주를 훼방하였느니라."
4. 자기 자신과 자기의 업적을 자랑하는 자들은 하나님과 그의 섭리를 비방하는 것이다. "네가 이르기를, 내가 우물을 파서 물을 마셨도다. 내가 뛰어난 업적을 행하였고 앞으로도 더욱 행하리라 하였도다. 그리고 너는 이 일들을 내(하나님)가 행한 바라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24-26절). 가장 적극적인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이상으로 행할 수는 없으며, 하나님께서는 옛부터 그가 계획하셨던 것 이상의 상태로 그들을 만드시지는 않는다. "이 일들은 상고부터 영원한 계획 가운데 정한 바로서, 이제 내가 이루어(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뜻의 계획대로 모든 것을 행하시기 때문이다)너로 견고한 성을 헐게 하였노라. 그러므로 그것을 네 자신의 행위로 만드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오만이니라."
5. 교회의 원수들의 모든 악의, 모든 활동과 계획들은 교회의 하나님의 인지와 제지 아래 있는 것이다. 산헤립은 여기 저기에서, 그리고 모든 곳에서 활발하고 날렵했으나 하나님을 그의 행방을 알고 계셨고 항상 그를 주시하셨다(28절). 그리고 그것만이 아니다. 그는 또한 그에게 손을, 즉 엄격하고 강한 손을 얹어 두고 계셨고, "갈고리로 그의 코를 꿰며 자갈을 그의 입에 먹이셨다." 따라서 아무리 그가 매우 고집이 세고 제멋대로였을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으로써 "그를 오던 길로 되돌아가게" 하실 수 있었고, 또 그렇게 하시곤 했다(29절). "네가 여기까지 오고 넘어가지 못하리라." 하나님은 산헤립을 보내어 유다를 치라는 임무를 명하셨던 것이다(10:6). 여기에서 그는 그 임무를 찬탈하고 있다. 산헤립은 그들을 놀라게 했으나 그들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더 이상 행하지 못하도록 해고당했다. 아니, 그가 투옥당하도록 여기에 날인되어 있다. 따라서 그는 투옥되어 그의 직권 이외의 것을 행한 것에 대해 댓가를 받고 있다.
6.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너그러우신 은인일 뿐만 아니라 유력하신 보호자이시며, 그를 의지하는 자들에게 해와 방패가 되신다. 예루살렘은 방어될 것이어서(35절) 그 공격자들은 그 안으로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조직적인 공격을 감행하지 못하고 공격을 개시하기도 전에 패주당할 것이다(33절). 그러나 이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긍휼을 되돌려주실 것이며 그들에게 선을 행하실 것이다. 그들의 땅은 다른 어느 때보다 비옥해져서, 그들의 손실은 풍족히 보상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대적이 나라를 황폐케 한 것으로 인한, 또는 그들이 경작지를 빼앗긴 것으로 인한 나쁜 영향을 느끼게 되지 않을 것이다. 땅은 처음과 같이 그 소산을 낼 것이고 그들은 그 자연적인 산물을 풍족히 먹으며 살 것이다. 그가 원하시기만 하면 부지런한 자의 손이 없이도 여호와의 축복을 풍요하게 만들 수 있으시다.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나라가 황폐케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그 땅이 안식년을 누리지 않아도 되는 구실로 삼지 않게 하자. 안식해는 그 다음 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때 그들은 밭을 갈거나 씨를 뿌려서는 안 되었다. 아니, 비록 그 해를 위해 미리 저축해 둔 것이 지금 없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종교적으로 그것을 준수해야 했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마련해 주시도록 의지해야 한다.
7. 하나님의 심판이 임무를 띠고 왔을 때, 그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1) 가장 큰 수효의 무리들도 그 앞에서는 설 수 없다. 하나님께서 영을 내리실 때는 한 사자(使者)가 하루 밤만에 거대한 군사들을 즉석에서 죽게 할 것이다(36절) 여기에 순식간에 무수한 시체로 변한 185,000명의 용사들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시편 76편이 이 격파 사건을 맞이하여 지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때에 "마음이 강한 자가 탈취를 당하여" 오랫동안 잠을 잔 사실로부터(5절), 하나님은 "영화로우시며 약탈한 산에서 존귀하시다" 는 것(4절)과 "주 곧 주는 경외할 자이시라" 는 것(7절)이 추론되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천사들은 하나님의 정의의 일꾼으로서 고용되어 교만한 자를 벌하며 악한 자의 힘을 꺽는 것이다.
(2) 가장 큰 사람들도 그것 앞에서는 설 수 없다. "큰 왕, 앗수르 왕" 은 그가 크게 장담하던 그의 계획을 달성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매우 수치스러울 뿐만 아니라, 그의 군대를 멸한 사자가 그를 죽이지나 않을까 하여 두려움과 공포에 가득 차서 돌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될 때, 매우 보잘 것 없게 보인다. 그러나 산헤립은 그를 보호해 주었어야 할 그의 아들이 자신이 보호를 구하던 우상의 제물로 자신을 바치게 될 때 더욱 비참하게 보이게 된다(37,38절).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 대하여 "위협과 살기가 등등한" 자들의 호흡을 곧 멈추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심판을 행하사 자기를 알게" 하시며, 교만한 자를 대항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많은 예언들이 이 섭리 속에서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더 멀리 바라보도록 격려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많은 예언들은 그것이 성취되리라는 것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든 사람들과 교회의 안전을 일반적이고도 보편적으로 확신케 해 주기 위한 의도를 지니고 있다. 건지신 자가 지금도 건져 주시며 앞으로도 그렇게 하실 것이다. 여호와여, 우리의 원수를 용서하소서. 그러나 "여호와여, 주의 대적을 다 망하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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