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반적인 황페의 통고 (이사야 24:1-12)
이 예언이 우리 이사야에 제시하는 것은 매우 어둡고 우울한 장면이다. 우리가 원하는 곳에서 눈을 돌려 보자. 사방이 암담해 보인다. 경고된 황폐를 여기에서는 한 가지 뜻을 매우 다양성있는 표현으로 묘사하고 있어서, 모두가 상황을 더욱 비참하게 하고 있다.
Ⅰ. 땅은 그 모든 장식물들을 빼앗기게 된다. 그래서 마치 땅의 기초가 제거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마치 처음의 혼돈 상태, 곧 WxT{(혼돈)와 WxBi(공허)로 되돌아간 것처럼(창 1:2) "공허하고 황무하게" 되었다(1절).
earth(한글 개역:" 땅")가 때로는 land를 의미한다는 것은 사실이며 land로 번역된(3절) 똑같은 히브리 단어 [d,a가 여기에서 earth로 번역되고 있다. 즉 "땅이 온전히 공허하게 되고 온전히 황무하게 되리라" 고 했다.(역주:한글 개역은 모두 "땅") 그러나 나는 3절의 말이 1절에서 처럼 the earth로 번역되어서는 안되는 이유를 모르겠다. 왜냐하면,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개는 land는 어떤 특정한 땅을 의미할 때, 거기에는 애굽의 땅 또는 가나안 땅, 또는 이 땅, 우리 땅, 또는 너희 땅 등의 적절한 말이나 아니면 적어도 그것과 약간 관련되어있는 단어가 앞에 나오기 때문이다. 그 단어가 사실상 어떤 특정한 지역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으며, 하나의 모호한 단어가 그러한 적용을 확실케 하기 위해 사용되어질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성경이 일반적으로 이 아래 세상의 모든 것들에게 따르는 마음의 허영과 번뇌에 관해 말한 것을 우리 자신과 우리의 땅에 적용시키는 것은 참으로 옳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상 여러 나라에서 자주 일어나고 있으며, 또 세상이 존립하는 한 일어날 수 있으며, 우리가 잘 알 수는 없지만 우리 나라에도 일어날 수 있고 모든 세상적인 것들의 전반적인 특성이 되고 있는 그런 일을 말하려는 것일 것이다. 이 세상 일에는 확고한 위안과 만족이 없다. 하찮은 것들이 세상의 것들을 허무하게 만든다.
우리는 이런저런 심판에 의해서, 또는 아마도 점차적이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쇠퇴에 의해서만도 수가 많던 집안들과 풍성한 재산들이 완전히 공허하게 되고, 온전히 황무하게 되는 것을 자주 본다. 죄는 세상을 "뒤집어 엎었다."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당신의 거처로 삼으시던 때의 세상과는 아주 다르게 되었다. 죄는 또한 "그 거민을 흩었다" . 바벨에서의(하나님께 대한) 반역은 거기에서 이스라엘이 뿔뿔이 흩어지게 된 이유였다. 마을과 각 집의 거민들이 모두 흩어지게 되어, 가까운 친척들과 옛 이웃들이 서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게 되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이와 같은 요지가 4절에 있다. "땅이 슬퍼하고 쇠잔하도다." 땅에다 자기의 행복을 두고, 거기에 큰 기대를 품는 자들을 그 땅이 실망시키며, 그들이 스스로에게 약속했던 것을 실현해 주지 않는다. 온 "세계가 쇠약하고 쇠잔하여", 그 사멸을 재촉한다. 세계는 고작해야 꽃과 같아서, 그것을 매우 좋아하여 가슴에 달아 놓는 자들의 손에서 시들어 버린다. 그리고 땅 자체가 점점 늙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거기에 거하는 자들도 황량하게 된다. 사람들은 병약한 육신을 끌고 다니며, 때로는 고통으로 고독에 빠져 유폐당한다(6절). 세상이 쇠잔하고 이전처럼 열매를 맺지 못할 그 때에, 거기에 거하는 자들 즉 그것을 자기의 집과 안식처, 그리고 분깃으로 삼는 자들도 황량해진다. 반면에, 믿음으로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들은, 무화과 꽃이 아직 피지 않은 때에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밖으로 눈을 돌려 수 많은 곳에 역병과 열병이 날뛰고 있는 것을 보며, 무수한 사람들이 그것으로 인하여 쓰러지며, 때로는 살아있는 자가 너무 부족하여 죽은 자를 묻을 수도 없게 되는 상황을 보게 된다면, 아마도 우리는 이 예언자가 "땅의 거민이 불타서," 또는 일부는 병으로 또 일부는 그 밖의 이유로 사멸되어 비교적 "남은 자가 적으리라" 고 말한 그 의미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기대에 어긋나는 세상, 눈물의 계곡, 그리고 죽어가고 있는 세상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그리고 그 속에 있는 인생들의 날수는 소수에 불과하며, 그것도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Ⅱ. 세상에 이 모든 재앙을 내리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세상을 만드셨고,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 안위를 주기 위해 그 세상을 비옥하고 아름답게 만드신 "여호와께서," 이제 "땅을 공허하고 황무하게 하신다" (1절). 왜냐하면 세상의 창조주가 또한 세상의 재판장이 시기 때문이다. 창조주는 세상에 형을 언도할 수 있는 명백한 권리를 갖고 계시며, 그 형을 집행할 수 있는 불가항력적인 권력을 소유하고 계신다. "이 말씀을 하신" 분은 바로 "여호와시다." 그리고 그가 그 일을 행하실 것이다(3절). "땅을 삼킨" 것은 바로 그의 저주였다(3절). 죄가 "사람으로 인하여 땅" 에다 가져온 그 전반적인 저주(창 3:12)와 그들의 거대한 악으로 인해 가족들과 나라들에게 임하게 했던 모든 특정한 저주가 하나님의 저주의 능력이 어떻게 모든 것을 공허하게 하며 황무하게 하는가를 보라. 하나님이 저주하는 자들은 정말로 저주를 받는다.
Ⅲ. 모든 부류와 처지의 사람들이 이 재앙을 받게 될 것이다(2절). "백성과 제사장이 일반일 것이라" 고 했다. 인생들이 당하는 재앙은 흔히 그러하다. 모든 인간은 똑같은 육신의 병과 마음의 슬픔, 그리고 친족들의 환란 등에 지배받고 있다.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동일한 사건이 일어난다. 시간과 기회도 그들 모두에게 동일하다. 하나님께서 때로 죄악된 민족들에게 멸망의 심판을 내리시는 것은 특별한 의미에서 사실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원하신다면 전 세계적인 심판을 일으켜, 아무도 거기에서 피하거나 제외되지 못하게 하실 수 있다. 그 때에는 사람들이 적게 가졌든 많이 가졌든, 그 가진 것 모두를 잃을 것이다.
비천한 부류의 사람들이 먼저 기근으로 벌을 받는다. 그러나 보다 높은 지위의 사람들이 먼저 포로로 잡혀가고, 반면에 그 땅의 가난한 자들은 남게 된다. 그 재앙은 모든 사람에게 일반일 것이다.
1. 높은 자와 낮은 자에게 일반이다. "백성과 제사장이," 또는 방백이 "일반일 것이다." 장관과 사역자들의 위엄, 그리고 그들에 대한 존경과 경의가 그들의 안전을 보장해 주지 않을 것이다. "장로들의 얼굴이 존경을 받지 못한다" 고 했다(애 5:12).제사장들이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타락했고, 사악했다. 그리고 그들의 특성이 그들을 죄에서 저지시키는 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면, 어떻게 그 특성이 그들을 심판으로부터 안전케 해 줄 것을 바랄 수 있겠는가? 이러한 면에서 "백성이나 제사장이나 일반이다" (호 4:8, 9).
2. 속박당하는 자와 자유로운 자에게 일반이다. "종과 상전이 일반일 것이며, 여종과 여주인이 일반일 것이다." 그들은 모두 행실이 타락했으므로, 땅이 황무하게 될 때 모두 비참해질 것이다(호 4:8, 9).3. 부자와 가난한 자에게 일반이다. 물건을 사들이며 변리로 돈을 꾸어 주는 부자들도, 너무나 빈곤하여 자기들의 가산을 팔고 변리로 돈을 꾸어 써야 하는 자들보다 더 낫지 못할 것이다.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함께 모이게 되는 그 큰 심판의 날 이전에도 여러 가지 심판들이 있다. 출세한 자들로 하여금 보다 낮은 자들을 지나치게 경원시하지 않게 하라. 그들은 언제 자기들이 그 낮은 자들과 똑같아지게 될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읍이라" (잠언 10:15)고 혼자 속는다. 그러나 항상 그러하지는 못할 것이다.
Ⅳ. 땅에 이러한 재앙을 가져오는 것은 바로 죄이다. 땅이 "그 거민 아래서 더럽게 되었" 으므로, 공허하고 쇠잔하게 된다(5절). 땅이 사람의 죄로 더럽혀졌다. 그러므로 땅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황폐하게 될 것이다. 죄의 추악한 본질이 그러하기 때문에, 죄는 그 죄악된 거민들 아래 있는 땅 자체를 더럽히며, 하나님과 선한 사람들의 눈을 불쾌하게 한다(레 18:25, 27, 28 참조).
특히 피는 그 땅을 더럽힌다(민 35:33). 그 거민들이 자기들의 죄로 먼저 자기 땅을 더럽히지 않는 한, 땅은 결코 그 거민들을 토해내지 않는다.
그들은 무엇을, 왜 행했는가?
1. 그들은 그들의 창조의 율법을 범했고, 창조의 목적에 응하지 않았다. 자연의 법의 질서가 그들에 의해 깨어졌고, 그들은 자연의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의무의 줄을 풀어버렸다.2. "그들은" 계시된 종교의 "율례를 어겼다." 즉 그들은 자기들에게 그 혜택을 주던 그 율례를 어겼다. "그들은 (혹자의 풀이대로) 율례를 소홀히 했고," 마음에 두어 지키지 않았다. 그들은 죄를 범함으로써 율법을 간과해 버렸고, 의무를 태만히 하여 율례를 소홀히 여겼다.
3. 이로써 그들은 "영원한 언약을 파하였다." 그 언약은, 그 언약을 영구한 축복으로 지키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구속력이 있으며 계속 그렇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계약의 방식으로 대하시기를 즐거워하시며, 그들에게 선을 베푸시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그를 섬기게 하신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겸양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계약의 혜택은 못받은 자들도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준 하나님의 계약 - 이것은 "영원한 계약" 이라 불리우고 있으며, 하나님이 밤과 낮과 더불어 맺으신 계약이기도 하다 - 의 혜택은 받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노아의 아들들의 계율을 준수하지 않았고, 밤과 낮 속에 있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 감사히 보답할 궁리를 하지 않았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 은혜로운 뜻과 계획을 좌절시켰다.
Ⅴ. 이 심판들은 사람들의 교만을 꺾을 것이며, 그들의 쾌락을 종식시킬 것이다. 땅이 공허하게 되면,
1. 그 땅은 교만하던 자들을 매우 수치스럽게 만든다. "세상 백성 중에 높은 자가 쇠약하도다" 고 했다(4절).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들의 교만을 가능하게 해 주었고, 또 자기들이 자랑거리로 찬미하던 것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기들의 머리를 한껏 쳐들고 다니는 자들의 머리를 칠 수 있다.2. 그 땅은 사람들의 쾌락에 찬물을 끼얹는다. 이것은 매우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7-9절). "마음이 즐겁던 자가 다 탄식한다" 고 했다. 이처럼 세속적인 쾌락의 본질은 "솥 밑에서 타는 가시나무의 소리같을" (전 7:6) 뿐이다. 큰 웃음 소리는 대개 한숨으로 끝난다. 세상을 자기들의 으뜸가는 기쁨으로 삼는 자들은 항상 즐거워할 수가 없다. 하나님이 땅에다 당신의 심판을 보내시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온전히 탐닉하고 있던 자들을 엄숙해지도록 만들려는 것이다. "너희의 웃음을 애곡으로 바꾸라." 땅이 공허하게 되면, "땅에서 즐거워하던 자의 시끄러운 소리가 그친다." 육적인 기쁨은 소란한 것이다. 그러나 그 소란함이 곧 그칠 것이며, 결국 비애로 끝나리라.
그들은 헛된 쾌락을 위해 두 가지를 이용했다. 그러나 그 유쾌한 무리들은 그 두 가지를 모두 빼앗기게 된다.
(1) 술을 잊게 된다. "새 포도주가 슬퍼한다" 고 했다. 새 포도주가 술마시는 자가 적어지자 점차 시어졌다. 왜냐하면, 포도주가 근심하는 자에게는 아무리 합당한 것일지라도(잠 31:6), 마음이 즐거운 자들을 기쁘게 해 주듯 그들을 그렇게 기쁘게 해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포도나무가 쇠잔하고" 포도 수확에 대한 희망을 거의 갖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음이 즐겁던 자가 탄식한다." 그들은 그들의 곡식과 새포도주의 풍성함에 대한 것 이외에 다른 기쁨은 모르는 자들이기 때문이다(시 4:7). 그리고 너희가 "그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거칠게" 하면, "너희는 그 모든 희락을 폐한다" (호 2:11, 12). 이제 "그들은" 이전처럼 "노래하며" 환성을 지르며,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고" 한숨으로 마실 것이다. 아니 "독주가 그 마시는 자에게 쓰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기에 자기들의 눈물을 섞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니면 질병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술마시는 기쁨을 잃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포도즙과 독주를 사랑하고, 그것을 가장 상미(賞味)하는 자들에게 그것이 오히려 해를 주는 것이 되도록 만드신다. 육신의 병, 마음의 번민, 가산 또는 나라의 파멸은 독주를 쓰게 만들 것이며, 모든 관능의 줄거움을 맛없고 무미건조한 것으로 만든다.
(2) 음악을 잊는다. "즐거워하는 자의 소리가 그치고, 수금타는 기쁨이 그친다" 고 했다. 이러한 것들은 잔치 때에 사용되곤 했었다(5:12). 바벨론의 포로들은 그들의 수금을 버드나무에 걸어두었다. 간단히 말해서, "모든 즐거움이 암흑하여졌다." 유쾌한 광경이나 미소를 자아내게 할 수 있는 어떤 능력도 없다. "땅의 기쁨이 소멸되었다" (11절). 그리고 만일 그것이 솔로몬이 "미친 것" 이라고 부른 그런 즐거움이라면, 그렇더라도 아무런 손실이 없을 것이다.
Ⅵ. 그 성읍들이 그 나라의 황무함을 톡톡히 맛볼 것이다. "혼란의 성읍이 훼파되어 버렸도다" (라고 KJA은 일고 있다 10절). 즉 그 성벽이 무너졌을 뿐만 아니라 그곳 거민들이 당황함으로 인해서, 성읍이 침략의 위협을 당한다. "집마다 닫히었다." 아마도 이것은 그 거민들을 몰살시킨 전염병에 의한 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들어가는 자가 없다" (6절). 대게 병에 감염된 집들은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밀폐한다. 또는 모든 집들이 버려지고 사람이 살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닫혀진다.
" 포도주가 없으므로," 즉 포도를 약탈당하여 포도주가 하나도 없어졌으므로 "부르짖게 된다." 사람들이 매우 자주 드나들던 "성읍," 예루살렘까지도 "황무하게" 될 것이다. 거리에는 잡초가 자라고, "성문은 파괴된다" (12절). 그 성문을 오가던 모든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그 성읍의 모든 힘이 사라진다. 하나님은 질서정연하던 도시를 얼마나 쉽게 혼란의 도시로 만드실 수 있으며, 그렇게 될 때 그 도시는 얼마나 빨리 황량한 도시가 되는가를 보라.
마지막에 있을 소망 (이사야 24:13-15)
진노가 내리는 중에도 긍휼이 엿보인다.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그 이웃 나라들이 산헤립이나 느부갓네살에 의해 모두 침략을 당할 때에도 그 전반적인 멸망에서 보존된 남은 자가 있을 것이다. 그 남은 자들은 믿음이 깊고 경건한 자들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대개 당신의 심판이 널리 퍼질 때에도 이 방법을 준수하실 것이다. 그는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않으신다(6:13).
아니면, 우리는 그것을 이렇게 받아들일 수 있다. 즉 비록 인류의 대부분이 땅이 공허해지고 황무해짐으로 말미암아 온갖 안락을 빼앗긴다 할지라도, 오히려 자기들의 유익을 더 잘 이해하고 있는 소수자들이 있게 된다. 그들은 자기의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않고 하늘에 쌓아둔 자들이다. 그러므로 "땅이 슬퍼하고 쇠잔할 때" 에도 그들은 계속 하나님 안에서 안위하심과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다음을 고찰해 보자.
Ⅰ. 남은 자의 수가 적다(13절). 모든 것이 멸망할 때에, "감람나무를 흔듬같고 포도를 주움 같이" (옛 세상이 홍수에 잠겼을 때 노아와 그의 가족처럼) 여기 저기에 그 일반 재앙을 피하게 된 자들이 "있으리라." 즉 그들은 모든 피조물들이 주는 위로가 변하여 된 그 쓰레기 위에 앉아, 그 때에도 여호와를 기뻐할 수 있는 자들이요(합 3:16-18), 모든 얼굴들이 사색이 될 때에도 기쁘게 머리를 들 수 있는 자들이다(눅 2:26, 28). 이 극소수는 추수 때의 이삭처럼 여기 저기 흩어져, 서로 멀리 떨어져 있게 되리라. 그리고 그들은 나뭇잎 아래 감추어져 있다. 여호와만이 자기에게 속한 것들을 아신다. 세상은 모르는 것이다.
Ⅱ. 남은 자들의 깊은 신앙심이 있다. 그들이 이 큰 멸망에서 아주 간신히 피했기 때문에, 그들의 신앙심은 더욱 깊었다. "무리가 소리를 높여 부를 것이다" 라고 했다(14절).
1. 그들은 자기들의 구원을 기뻐하여 노래부를 것이다. 세속적인 쾌락이 끝나게 될 때, 성도들의 기쁨은 어느 때보다 더욱 활기를 띠게 된다. 포도나무가 쇠잔하여져서 마음이 즐겁던 자가 탄식할 때, 마음이 정직한 자들은 은혜의 계약인 자기들의 위로의 근원과 소망의 근거가 결코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노래를 부른다. 주안에서 기뻐하는 자들은 환란 중에도 기뻐할 수 있으며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눈물 속에 있을 때에도 믿음으로 개가를 올릴 수 있다.2.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찬미를 노래할 것이다. "여호와의" 긍휼뿐만 아니라 그 "위엄을 인하여" 노래부를 것이다. 그들의 노래는 장엄하고 진지하다. 그리고 그들의 영적 기쁨 속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광대하심에 대한 경외감을 지니며, 그들이 찬미로써 하나님을 섬길 때도 겸손히 하나님과의 간격을 지킬 것이다.
악한 백성들에게는 두려움을 주는 원인인 여호와의 위엄도 성도들에게는 찬미의 노래로 제공된다. 그들은 여호와의 심판과 긍휼에서 나타난 그의 존엄성과 초월적인 탁월성을 노래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의 인자하심뿐 아니라 공의에 대해서도 노래해야 하기 때문이다(시 101:1). 육지에서 (땅이 공허하고 황무하게 되었기 때문에) 바다와 섬으로 피신했거나 또는 현재 피신하고 있는 자들은 그곳에서 크게 외칠 것이다. 그들의 분산이 하나님의 지식을 펴는 데 기여할 것이며, 그들은 멀리 있는 해안까지도 하나님 찬미가 울리게 만들 것이다. 아무리 어두운 시기일지라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그를 찬미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예를 크게 빛나게 하는 것이다.
Ⅲ. 그들의 열성이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헌신하도록 자극한다(15절). 그들은 고난당하는 동료들도 자기들과 같이 하도록 격려한다.
1. 동료들이란 "불 속에" 있는 자들, 환란의 용광로 속에 있는 자들이다. 그 불이 "그 땅의 거민을 불태웠다" (6절). 또는 골짜기의 낮고 음침하며 지저분한 곳에 있는 자들이다.2. "바다섬" 에 있는 자들이다. 즉 그곳으로 추방되거나 불가피하여 그곳으로 도망하여 그들의 모든 친구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숨은 자들이다. 그들은 "불과 물을 통과" 했다(시 66:12). 그러나 이 모든 일에서 그들로 하여금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고, 그를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서 영화롭게 할 것이다. 은혜로 말미암아 환란 중에 영광 돌릴 수 있는 자들은 환란 중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하며, 그들의 환란이 더할수록 더욱 풍부해지는 그들의 위로에 대해 그에게 감사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불 속에서 심지어 가장 뜨거운 불 속에서도 그리고 가장 먼 섬에서도 항상 하나님께 대한 선한 생각을 간직해야 한다. 비록 그가 우리를 죽이실지라도 우리가 그를 의지할 때 - 비록 그를 위하여 우리가 종일 죽임을 당할지라도 그 어느 것도 우리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때 - 그 때, 우리는 그 불 속에서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세 어린이들과 순교자들은 화형에 처하여서도 그 속에서 여호와를 영화롭게 했다.
위로를 주는 전망 (이사야 24:16-23)
이 대목도 앞에 나오는 대목처럼 명백히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
Ⅰ. 성도들에게 위로를 말해 주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살고 있던 곳에 떨어진 일반적 재앙으로 인해 "땅끝" 으로 쫓겨나거나, 아니면 신앙으로 인해서 땅끝으로 가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들은 탄식하지 않고 노래를 한다. 거기에서 들려오는 노래를 우리는 들었다. 그런 노래를 듣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위안이다. 즉 선한 백성들이 아무리 신앙과 거리가 먼곳으로 가더라도, 자기들의 신앙을 가지고 가며, 하나님께서 그곳까지 그들을 찾아가시며, 그가 거기서 그들을 모으시리라는 소망을 갖도록 격려하신다는 것을(신 30:4) 듣는 것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된다. 그리고 "의로우신 자에게 영광을 돌리세!" 하는 것이 그들의 노래이다. "의로운 자" 란 단어는 단수이며 "의로우신 하나님" 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행하시는 모든 일에 있어서 정당하신 분인 것이다. 이것은 불꽃 속에 계신 여호와께 영광돌리는 것이다. 또는 그것은 "이 노래들이 그것들을 노래하는 자들의 영광이나 아름다움에 이바지했다" 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영예롭게 하고 영광스럽게 하는 일에 사용될 때, 우리에게 최대의 영예를 행하는 것이 된다. 이 말씀은, 메시야의 날에 복음이 땅끝까지, 곧 섬나라 영국에까지 전파된 것을 가리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또는 모든 의로운 자들에게 영광이로다라고 한 천사들의 노래와 맞추어, 복음이 심어진 교회는 어디서나 의로우신 하나님께로 영광을 돌리는 즐거운 메아리가 들린다. 왜냐하면 구속(救贖)의 사업은 우리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창세 전부터 정해진 일이기 때문이다.
Ⅱ. 죄인들에게 두려움을 말해 주고 있다. 그 예언자는 구원받는 남은 자에 대한 전망 때문에 그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로한 후, 그 땅에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참함을 보고 다시 탄식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르기를 쇠잔하였고 나는 쇠잔하였으니 내게 화가 있도다. 바로 그것에 대한 생각이 나를 초조하게 하고 쇠잔하게 하였도다" (16절). 그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예견하고 있다.
1. 죄의 만연, 죄악이 넘칠 것이다. "궤휼자가 궤휼을 행하도다" (16절). 이것은 그 자체가 심판이며, 하나님을 격동시켜 또 다른 심판을 내리게 하는 것이다.(1) 사람들은 서로 속인다. 사람들 사이에는 믿음이 없고, 온통 부정뿐이다. 사회의 신성한 유대인 진실이 떠났고, 대인 관계 속에서 궤휼밖에 아무 것도 없다(렘 9:1, 2 참조).
(2) 그들은 모두 그들의 하나님께 거짓되다. 하나님에 대해서, 또 하나님과 맺은 그들의 계약에 대해서도, 사람의 자손들은 모두 궤휼한 짓(불실한 짓)을 행하고, 자기들의 하나님께 불실하게 대했다. 이것이 세상 죄의 기원이며 또한 악화시키는 원인이다. 사람들이 자기들의 하나님께 거짓될 때,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진실되겠는가?
2. 그 죄로 인한 분노와 심판의 만연을 예상했다.
(1) 땅의 거민들은 시시각각, 이곳에서 저곳으로 재앙에 쫓길 것이다(17, 18절). "두려움과 함정과 올무" (함정과 올무에 대한 두려움)가 그들이 어디를 가든 따라간다. 왜냐하면 사람의 자손들은 홀연히 임할 수도 있는 재앙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전 9:12). 이 세 가지 단어(" 두려움, 함정, 올무")는 단어의 압운을 맞추기 위한 배열로 보인다. 그 원어는 rox;P;(pachad)과 P;x;P;(pachath)와 ht(pach)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의미는 명백하다(18절). 즉 "재앙은 죄인을 따르고" (잠 13:21), 순종하지 않는 자에게는 저주가 미칠 것이며(신 28:15), 한 가지 심판을 피했다고 안심하고 있는 자들에게는 또 다른 심판이 언제 그들을 속박할지 모른다는 점이다.
이 에언자는 땅의 모든 거민들이 모압의 심판을 가이 겪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렘 48:43, 44). 그러나 우리가 어떤 한 가지 재앙을 피하려고 하는 동안 더 나쁜 재앙에 빠지게 되고 한 가지 환란이 끝나면 그것이 오히려 다른 또 하나의 환란의 시작이 되고 마는 사실이 인생의 흔히 겪는 불행한 사태에 대한 일반적인 사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든든한 상태에 있을 때에라도, 그리 안전하지 못하다.
(2) 땅 자체도 흔들려 조각이 날 것이다. 그것은 "땅에 있는 모든 것이 불타 버리게 되면" (벧후 3:10), 결국 문자 그대로 그렇게 될 것이다. "위에 있는 문이 열려" (18절), 세계적인 홍수 때처럼 진노를 쏟는다. "하나님은 악인에게 그물을 내려 치실 것이다" (시 11:6). 그리고 큰 깊음의 기초가 파괴되면, "땅의 기초가 물론 진동한다" (18절). 즉 자연의 구조는 안정을 잃으며 모든 것은 혼돈된다. 이것이 얼마나 유창하게 표현되어 있는가 보라(17, 20절). "땅이 깨어지고 깨어지며, 땅이 갈라지고 땅이 흔들리고 흔들리며," 그곳에서 움직인다고 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지농시키신다" (학 2:6). 보물을 땅에 쌓아두고 그것들을 염려하는 자들의 참상을 보라. 그들은 곧 "깨어지고 갈라질" 것들을 신뢰하는 것이다. "땅이 취한 자갈이 비틀비틀한 것이다." 이러한 것들의 모든 움직임은 매우 불안정하고, 매우 불확실하다. 세상적인 자들은, 마치 자기들이 궁전에 있는 것처럼, 성읍에 있는 것처럼, 난공불락의 요새에 잇는 것처럼 세상에 거한다. 그러나 "땅은 오두막 같이" 매우 쉽게, 매우 갑작스럽게 "옮겨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위대하신 지주(地主)에게는 아무런 손실이 되지 않으리라. 땅이 허물어지는 것은 "하나의 오두막(침망:개역)" 이 허물어지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그것은 거지들이 잠복하는 곳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 나라는 그것이 제거되는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그것을 다시 세우려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것은 "떨어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그러나 의로운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거하지 못할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을 것이다. 이처럼 땅을 흔들어 가라앉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땅을 짓누르고 있는 그곳의 죄악이다. 죄는 모든 피조불에게 무거운 짐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그것은 무거운 짐, 그 밑에 있는 것을 신음하게 하고, 마침내는 주저앉게 하는 그런 짐이다. 죄는 나라와 왕국과 가문의 멸망이다. 그들은 "납 조각처럼" 무겁다(슥 5:7, 8).
(3) 하나님은 땅의 왕들과 큰 자들과 특별히 다투실 것이다. "그가 높은 데서 높은 군대를 벌하실 것이다" (21절). 방백들의 군대도 하나님 앞에서는 일반 사람들의 군대에 불과하다. 높은 군대는 지극히 높으신 자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들의 높음을 낮게 하시고 그들의 군대를 흩으시고 그들의 모든 동맹을 끊으려고 그들과 다투실 때는, 그들의 연합된 군대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높은 데 있어서 자기의 높음과 장엄함을 자랑하고, 자기 자신은 매우 높음으로 어떤 위험도 다가올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의 모든 교만과 잔인함 때문에 벌을 내리실 것이다. 그들은 그 교만과 잔인함으로써 그들의 이웃과 신하들을 압제하고 상하게 했으나, 이제는 그 피해가 그들 자신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다.
" 땅의 왕들" 은 이제 "땅에서" 하나님의 헤아림을 받아야 한다. 그리하여 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정말 계시다는 사실과, 가장 교만한 왕들에게도 그들의 행실에 따라 심판할 자가 있음을 드러나게 될 것이다. 땅의 권세자들에게 밟힘을 받은 자들은, 비록 자기들이 권세자들을 거역할 수 없고 또 감히 거역하려 하지도 않으며, 또 거역해서도 안 되지만, 그들을 불러 헤아리시고 그들을 그들이 만든 거름더미 위에다 굴복시킬 하나님이 계시다는 이 사실로써 스스로를 안위하게 하자. 왜냐하면 그들이 왕 노릇하고 있는 땅은 하나님의 눈에는 거름더미보다 낫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지 일반적인 이야기다. 그들이 유죄 판결을 선고받은 "죄수처럼 호출" 을 받을 것이며, "깊은 옥에" 또는 토굴에 "모일" 것이며, 거기에서 철저히 갇힐 것이라는 사실이 구체적으로 예고되어 있다. 온갖 자유를 누리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을 가두어 두는 일에서 긍지와 즐거움을 누리는 왕들과 권세자들 자신이 이제 갇히게 될 것이다. 강한 자기 힘을 자랑하듯이 자유로운 자가 자기 자유를 자랑하는 일이 없게 하자. 왜냐하면 그는 그가 장차 어떤 속박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 날 후에 그들이 형벌을 받을 것이다" (Shall be visited)라고 했다.
[1] 즉 그들은 진노의 벌을 받을 것이다. 이 말은 다른 형식으로 사용된(21절) "여호와께서 그들을 벌하시리라" 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들은 선고받은 죄수들처럼 처형의 날까지 보존될 것이며, 타락한 천사들처럼 "큰 날의 심판까지 결박으로 흑암에 갇히게" 된다(유 6). 이 때문에 하나님의 복수의 날이 지연되는 것이라고 간주하자. 언도된 형은 빨리 진행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처형의 날이 아직 오지 않았고, 아마도 여러날 후에야 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인이 멸망의 날을 위해 보존되므로, 잠시동안은 보존되나 "진노의 날을 맞으러 끌어나감이 된다" 는(욥 21:30) 것은 확실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가 이르기 전에는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자.
[2] 그들은 긍휼을 받으리라. 감금에서 풀려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관작(官爵)을 되찾지는 못할지라도 자유는 되찾을 것이다.
느부갓네살은 자기의 정복지에서 많은 왕들과 방백들을 포로로 만들었고, 그들을 바벨론의 토굴에 가두었고, 그들 중에는 유다왕 여호야긴도 있었다. 그러나 여러 날 후 느부갓네살의 머리가 땅에 떨어졌을 때, 그의 아들이 그들을 방문했고 그들의 속박에서 어느 정도 해방시켜 주었다. 왜냐하면, 그가 "여호야긴의 위를 그와 함께 있는 왕들의 위보다 높인" 것은(렘 52:32), 여호야긴에게 베푼 그의 특별한 호의의 일례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이것을 인류의 보편적인 상태에 적용시킨다면, 그것은 인간 조건의 변화무쌍함을 의미한다. 여러 날 후에, 높았던 자들은 형벌을 받고, 형벌을 받았던 자들은 구조된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 있는 그 누구도 아무리 자기의 상태가 형통했을지라도 안심할 수 없게 하며, 아무리 자기의 상태가 절망적인 것일지라도 낙심하지 않게 한다.
3. 이 모든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23절). 이 모든 일이 일어날 때, 곧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교만한 원수들이 낮아지게 되고 파멸될 때,(1) 그 때, 반박할 여지도 없이 여호와께서 군림하고 계시다는 사실이 나타날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진리지만, 한결같이 명백히 드러나 있지는 않은 사실이다. 땅의 왕들이 그들의 폭정과 학대로 인해 형벌 받을 때, 그때 하나님께서 왕들의 왕이라는 사실이 온 세상에 선포된다 - 그들은 바로 그 왕의 허락에 의해 남을 정복할 수 있었다. 또한 하나님은 그들 위에 계시는 왕이시요, 그들은 그 왕에게 책임이 있다. 또 하나님은 그들을 지배하시는 왕이시다. 그리고 그는 "만군의 여호와" 곧 모든 군대의 "주(主)" 로서 통치하신다는 사실과,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곧 자기의 교회에서, 이미 세워진 그 약속을 좇아, 그것의 영예와 번영을 위해 통치하시며, 그의 말씀과 규례를 통해 통치하시며, 그가 "그 장로들 앞에서" 그의 모든 성도들 앞에서, 특히 그의 사역자들, 그의 능력과 섭리의 모든 결과를 주시하고 이 모든 사건들 속에서 당신의 손을 주목하는 교회의 장로들 앞에서 통치하신다는 사실이 만방에 선포된다. 하나님의 옛 사람들, 곧 옛 제자들이요 경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에게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흔히 시온과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소로 찾아가서, 하나님이 나타내신 당신 자신의 계시들을 익히곤 하던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이러한 섭리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에 대해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많은 것을 알게 될 것이다.
(2) 그때, 하나님이 "영광스럽게" 군림하시는 사실이 매우 찬란하고 눈부시게 나타날 것이다. 작은 빛이 보다 더 큰 빛에 의해 무색하게 되고 압도당하는 것처럼, "달이 무색하고 해가 부끄러워" 할 정도로 비할 데 없이 찬란히 빛날 것이다. 스스로 해와 달처럼 눈부신 광채와 광대한 주건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권세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 위에 나타나시며, 더욱이 그가 그들을 대적하시어 나타나실 때는,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 그 때, "그들의 얼굴은 수치로 가득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찾게 될 것이다.
동방 민족들은 해와 달을 숭배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위해 영광스럽게 나타나셔서 그와 저들의 대적을 치시게 될 때, 이 모든 거짓된 신들은 그들이 그 현혹된 숭배자들의 숭앙을 받았던 것을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다. 창조주의 영광은 가장 찬란한 피조물들의 영광이라도 무한히 능가한다. 저 큰 날, 즉 천지의 재판장이 영광 속에서 빛을 내실 때, 그의 초월적인 광채에 의해 "해가 흑암으로 변하고, 달이 피빛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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