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에 대한 격려 (이사야 52:1-6)
Ⅰ.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의 구원을 위해 활기있게 나타나도록 촉구당하고 있다(1,2절) 그들은 하나님께서 "깨셔서 능력을 베푸실" 것을 원했다(51:9). 여기에서는 그가 그들에게 "깨어서 그들의 힘을 입도록," 스스로 분투하도록 요청하고 계신다. 그들로 하여금 실의에서 깨어나 용기를 북돋우며 모든 것이 잘 되리라는 소망으로써 그들 자신과 서로를 격려하게 하고, 더 이상 그들의 짐에 쓰러져 가라앉지 않게 하라. 그들로 하여금 불신에서 깨어나 위를 바라보고 주위를 둘러보며 약속들을 들여다보게 하라. 그리고 그들을 위해 역사되고 있었던 하나님의 섭리를 들여다보게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큰 일들을 기대하게 하라. 그들로 하여금 답답함과 태만과 무감각으로부터 깨어나 전력을 다하게 하라. 포로들에 관한 국법을 위배하고 그들 자신의 구조를 위해 어떤 불법적인 방법을 택하지 말고, 그들 자신을 정복자의 호의에 위탁하고 그에게 운동하기 위한 모든 적합한 방법을 사용하게 하라. 하나님은 여기에서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다짐하고 계신다.
1. 그들은 그들의 포로 사건에 의해 개혁될 것이다. "할례 받지 않은 자와 부정한 자가 다시는 네게로 들어옴이 없을 것임이니라" (1절). 그들의 우상 숭배의 풍습은 더 이상 들여오지 않거나 적어도 은닉되지 않을 것이다. 에스라 시대와 느헤미야 시대에 이방 여자들과 결혼함으로써 부정한 자가 들어왔을 때 그들은 곧 장관들의 경계와 열심으로 인해 다시 추방되었고 예루살렘이 거룩한 성이 되도록 보살펴졌던 것이다. 이처럼 복음 예루살렘은 그리스도의 피외 하나님의 은혜로 정결케 되며 실로 거룩한 성이 된다.2. 그들은 포로 상태에서 구조되고 구출될 것이며, 그들의 목줄은 풀러질 것이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압제 당하지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다시는 이전처럼 침입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할례받지 않은 자와 부정한 자가 다시는 너를 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이렇게 해석될 수도 있다). 열방이 다시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와 그의 성전을 더럽힐 것이다(시 79:1). 이것은 조건을 붙여 해석되어야 한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을 매우 가까이 하고 그와 함께 한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적으로부터 보호하고 적을 내어쫓으실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다시 타락한다면, 안티오쿠스가 그들의 성전을 더럽히고 로마 사람들이 그것을 파괴할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그들은 평안을 누릴 것이다. 그리고 지금 다가오고 있는 이 행복한 변화에 그들은 스스로를 순응시키도록 여기에서 요청받고 있다.
(1) 그들로 하여금 기쁨에 대비하게 하라.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 더 이상 상복과 과부의 의복을 입고 나타나지 말지어다. 새 얼굴, 웃는 표정을 하라. 이제 새롭고 즐거운 광명이 전개되고 있다." 수금이 버드나무 위에 걸려 있었을 때, 그 때 아름다운 옷이 그들에게 입혀졌다. 그러나 지금은 이 두 가지 모두를 위한 기회이니 그것을 다 다시 착용하도록 하라. "네 힘을 입을지어다. 그렇게 하기 위해, 승리와 기쁨의 표적으로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
"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이며" (느 8:10) 우리의 아름다운 옷은 유혹과 환난의 투창을 막는 갑옷으로 이바지할 것이다. 그리고 다음 사실을 주목하라. 즉 예루살렘은 거룩한성이 될 때 그 아름다운 옷을 입어야 한다. 거룩한 아름다움은 가장 아리따운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거룩할수록, 더욱 더 즐거워 할만한 이유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2) 그들로 하여금 자유에 대비하게 하라. "너는 티끌을 떨어버릴지어다. 그 속에서 너는 누워 있었고 네 교만한 압제자들이 너를 짓밟거나(51:23) 네가 극심한 슬픔에 빠져 그 속을 뒹굴었으나, 이제는 그것을 떨어버릴지어다." "일어나 설지어다" (그것은 그렇게 해석될 수 있다). "예루살렘아 네가 처하고 있던 노예 신세의 모든 흔적을 제거하고 네 거처를 옮길 준비를 하라. 네 목의 줄을 스스로 풀지어다. 네 자유를 주장할 대범한 원칙과 결단력을 얻으라." 복음은 두려움에 얽매인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며, 자유를 포착하는 것을 그들의 의무로 만든다. 죄의 짐에 무겁게 눌리어 피곤해진 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위로를 발견하고서 그들의 의심과 두려움의 티끌을 떨어버리고 그 줄을 풀게 하라. "아들이 그들을 자유케 하면, 그들이 참으로 자유케 될 것이기" 때문이다.
Ⅱ.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구원에 열심을 기울이도록 스스로 분발하실 것이다. 그는 여기에서 그들을 신원해 주고 계시며, 심지어는 그들에게 가시어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분발하고 계신다. 긍휼의 동기는 그 자신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는 여기에서 다음의 여러 가지 사실들을 간주하고 계신다.
1. 그들을 압제한 갈대아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지배할 권세를 얻게 된 일에서 결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다. 산헤립도 하나님께서 그를 그의 백성을 징계하고 개혁시키기 위한 도구로서 사용하셨을 때,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10:6, 7). "너희가 값없이 팔렸으니 너는 그것에 의해 얻은 것이 없고 나도 그러했도다(3절). 하나님은 죄에 의해 그들을 팔았을 때, 그들에 대해 선취권을 가지신, 독점적인 권리를 가지신 그 자신이 저희 값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신 것으로 생각하고 계신다(시 44:12). 그들은 그것으로 그에 대한 빚을 갚을 정도도 못되었다. 바벨론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그에게 감사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점에 있어서 그의 이름을 비방하고 모독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오랫동안 값없이 너희를 가졌으므로 마침내 값없이 너희를 반환할 것이다. 너희는 돈없이 속량되리라." 이것은 45장 13절에서 약속된 것과 같다. 아무 것도 주지 않는 자들은 아무 것도 얻지 못할 것을 예상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누구에게도 빚지지 않으신 것이다.2. 그들은 이전에도 흔히 비슷한 공경에 처했었고 그들의 공사 감독자의 횡포 아래서 얼마 동안 고통을 당했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항상 이 압제자들의 손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은 딱한 일이었다(4절). "내 백성이 애굽에 내려가서 타협적인 방법으로 거기 우거하였으나, 그들은 그들을 노예로 만들었고 그들을 혹독하게 다스렸다." 그러나 그때에, 그들은 바로의 교만과 권력과 지모에도 불구하고 건지워졌다. 그런데 왜 우리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지금 건지시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겠는가? 어떤 때 "앗수르인" 은 열 지파들이 앗수르 왕에 의해 포로로 사로잡혀 갔을 때처럼, "공연히 그들을 압박하였다." 그 직후에 다른 앗수르인 산헤립이 군대를 갖고 유다의 모든 성읍들을 쳐서 압제했고 그 주인이 되었다. 바벨론 사람들은 그들의 왕조가 앗수르인의 한 지류였기 때문에, 그들을 "앗수르인" 이라 칭해도 부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공연히 그들을 압박했다. 비록 하나님은 그들을 앗수르인의 손에 붙이심에 있어서 의로우셨을지라도, 앗수르인은 그처럼 그들을 다룸에 있어서 불의했고, 바로가 그들이 그의 나라의 한 지역인 고센땅에 정착되었을 때 그러했던 것처럼, 그들을 그들의 신하로서 지배하는 척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악인과 무모한 자들의 손에 의해 고난당할 때, 그것은 그들이 공연히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우리가 그들에게 어떤 자극을 주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느 정도 위로가 된다(시 7:3-5 이하).
3. 하나님의 영광은 그의 백성에게 가해진 손상에 의해 침해당했다(5절). "내 백성이 까닭없이 잡혀갔으니 내가 여기서 어떻게 할꼬," 내가 그것으로 무엇을 얻을꼬? 하나님은 예루살렘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경배받으시지 않는다. 거기에 있는 그의 제단은 없어졌고 그의 성전은 파괴되었다. 그러나 그대신에, 그가 그 포로들이나 본국인들에 의해 바벨론에서 좀 더 많이 그리고 더 낫게 경배받았다면, 사태는 달랐을 것이다. 즉 하나님은 그것에 의해 어떤 면에서는 그의 영예를 획득한 자로 간주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렇지 않았다.
(1) 포로들은 매우 위측되어 있으므로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다. 그러기는커녕, 그들은 끊임없이 울부짖고 그것은 그를 근심케 했고 그의 동정심을 자극한다. "그들을 관할하는 자들이," 그들로 탄식하게 만든 옛 애굽 사람들처럼(출 2:23) "그들을 떠들게 했다." 마찬가지로 바벨론 사람도 그들을 더욱 가혹하게 다루었을 때, 그들에게 더 크게 원망하고 울부짖도록 강요했다. 이것은 우리에게 그 포로들의 심정에 대한 즐거운 생각을 주지 않는다. 그들의 불평은 마땅히 그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합리적이고 경건하지 못하고 오히려 야비했다. 그들은 "슬피부르짖었다" (호 7:14).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들으셨고 애굽에서처럼(출 3:7, 8) 그들을 건지시기 위해 내려오셨다.
(2) 그 본국인들은 너무 무례해서 그를 찬양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끊임없이 불경스러운 말을 지껄여 그를 모욕하며 그의 노를 자극한다. 그들은 그들이 하나님께 대해서 매우 강했고----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매우 강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건질 수 없는 것처럼 그에게 도전했다. 그리고 이처럼 "그들 중에 있는 그의 이름을 종일 더럽혔다." 그들은 그들의 우상을 찬양했을때 "스스로를 높여서 하늘의 주재를 거역했다" (단 5:23).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것은 묵과되어서는 안 된다. 내가 내려가 그들을 건지리니, 내게 이름과 영예가 되어야 할 나의 백성들이 내게 치욕거리가 될 때, 내가 무슨 영예를, 무슨 기대를, 무슨 찬사를 세상으로부터 받겠느냐? 그들의 압제자들이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것이며 그들도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인용하여 유대인들의 사악한 생활에 적용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그들로 인해 그 당시에 이방인들 중에서 모독을 당하셨고(롬 2:23, 24) 여기에서도 그는 그들의 수난으로 그렇게 되셨다.
4. 그의 영광이 그들의 구원으로 인해 크게 나타날 것이었다(6절). "그러므로 내 이름이 이처럼 모독을 받으니 내가 일어날 것이며, 내 백성은 내 이름을, 내 이름 여호와를 알리라." 그는 이 이름으로써 그들을 애굽에서 건지신 일에서 자기 자신을 알리셨다(출 6:3). 하나님은 자기의 영예를 옹호하기 위해 일하실 것이며 그의 크신 이름을 위해 어떤 일을 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지식을 거의 잃어버린 그의 백성들은, 그것을 알고 안위함을 얻을 것이며 그것이 그들의 견고한 망대임을 발견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에 세상과 그 모든 일들을 지배한다는 것과, 말씀의 능력으로써 그들을 위해 구원을 말씀하시는 자는 하나님이라는 것과, 처음에 말씀하시어 그것이 이루어지게 한 자는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다른 나라들보다도 이스라엘을 축복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때가 이르면 반드시 성취되리라는 것과, 선지자를 옹해 말씀하시는 자가 그이시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시며, 그들은 스스로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한 점이나 일획도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메시야가 다가옴 (이사야 52:7-12)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자기 나라로 다시 이동하는 것이 긍휼로써 그리고 의무로써 여기에 언급되고 있다. 7절이 복음의 전파에 적용된 것은(사도 바울에 의해, 롬 10:15) 그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인류의 구속의 모형과 상징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시사해 주고 있다. 그들이 바벨론에서 구속되는 것에 대해 여기에 언급되어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그 구속에 적용되어야 한다.
Ⅰ. 그것은 여기에서 큰 축복으로써, 풍성한 기쁨과 감사로 환영 되어야 할 큰 축복으로써 언급되어 있다.
1. 그들의 석방의 소식을 가져오는 자들은 매우 환영받을 것이다(7절). "예루살렘 주위에 있는 산 위가, 이 사자들이 멀리서 올라오고 있는 것이 보이는 산 위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그들이 가져오는 소식이 어떤 것인가가 알려질 때 그들의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그것은 일반 배달부나 그 선언을 퍼뜨리기 위해 정부에 의해 급파된 사자를 의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일부 유대인들을 의미하고 있다. 그들은 지식의 첨단에 있었기 때문에 일찍 그것을 알고 즉시 그들 자신이 가거나 또는 모든 지역에 그들의 사자를 보내 그 소식을 전파하게 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도 거기에 남아있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그들의 형제가 곧 그들에게 돌아오리라고 말해 주었다. 그것은 단지 뉴우스의 내용으로써가 아니라 시온의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증거로써 공포되어 있다. 따라서 그것은 그러한 어투로 공포되어 있다. 즉 그들은 시온에게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고 말한다. 평강과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자들. 유대인의 해방에 관한 지시를 고레스에게 받은 자들, 이스라엘의 안위를 기다린 자들이 매우 오랫동안 기대했던 소식을 전하는 자들, 그 "좋은 소식" (우리 번역에는 "좋은 것에 대한 좋은 소식" 이라고 단어가 중복되어 있으나, 언문에는 그렇게 적혀있다).나쁜 소식이 퍼질 때, 시온의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시온과 언약하신 시온의 하나님이시며 통치하시는 그러한 자이시라는 것은(시 146:10; 슥 9:10) 좋은 소식이며, 좋은 소식이 퍼질 때, 이것은 가장 좋은 소식이 된다. "여호와께서 시온을 세우셨다" (14:32). 모든 사건은 그의 섭리의 왕국의 시여 속에서 발생하며 그의 은혜의 왕국을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향한다. 이것은 복음의 전파에 적용되어야 하며, 그것은 평강과 구원에 대한 선포이다. 그것은 진정 복음, 곧 좋은 소식, 기쁜 소식이며 우리 영적인 적을 이긴 승리의 소식과 우리 영적인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의 소식이다. 좋은 소식은 주 예수가 통치하시며 모든 권세가 그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처음 이 소식을 가지고 오셨다(눅 4:18; 히 2:3). 그리고 그에 대해 본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의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십자가에 못박힌 그의 발이, 갈보리 산의 그의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웠는고! 그가 산에서 달려 올 때(아 2:8) 그의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웠는고. 그의 음성을 알고 그것이 그들의 사랑하시는 자의 음성임을 안 자들에게 그것은 얼마나 아름다웠는고!" 그의 사역자들은 이 좋은 소식을 선포한다. 그들은 세상의 더러운 것으로부터 그들의 발을 깨끗하게 지켜야 한다. 그리고 나서 그들이 보낸, 그들의 발에 앉아있는 자들의 눈에, 아니 오히려 그들을 통해 말씀을 들으려고 그리스도의 발 아래 앉아있는 자들의 눈에 아름다워야 한다. 그들은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저의 메세지로 말미암아 "사람 안에서 귀히 여김" 을 받아야 하며(살전 5:13), 이것은 모두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2. 이 소식을 받는 자들은 그것에 의해 기쁨의 환희를 체험할 것이다.(1) 그때, 시온의 파수꾼들은 그것이 놀랍게 밝혀지기 때문에 즐거워할 것이다(8절). 예루살렘 성벽의 파수꾼은 이 승리 속에서 합창을 지휘할 것이다. 우리들이 듣고 있는 자들은 누구였는가(62:6).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벽 위에 세워 그의 이름을 언급하게 하고 그가 다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받게 하실" 때까지 쉬지 않고 그에게 기도하게 하신 자들이었다. 이 파수꾼들은 그들의 기도의 응답을 기다리면서 성루에 서 있다(합 2:1). 좋은 소식들이 그들에게 먼저 전해지며 그들이 오랫동안 계속해서 그리고 더욱 끈질기게 기도한 것일수록, 그것이 올 때 그들은 더욱 날아갈듯이 기쁠 것이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른 사람들도 그들과 함께 찬양에 연합하도록, "일제히 노래하리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을 기쁘게 만들 것은, "그들의 눈이," 얼굴이 "마주 보리라" 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셨고 그들은 환난의 어두운 구름으로 말미암아 그의 은총의 일을 거의 식별할 수 없었으나 이제 그 구름이 걷혀 그들은 그것을 명백하게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시온 왕의 눈을 눈으로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중에 거하시매 "그 영광을 보고" (요 1:14) "주목한" (요일 1:1) 자들이 있었을 때, 그렇게 성취되었다. 그들은 예언과 약속, 약속과 성취가 정확하게 일치하고 상응하는 것을 볼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그들이 눈을 마주 보는가를 알게 되고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이 사람에게 그리고 저 사람에게 말씀하신 것을 흡족하게 여길 것이다. 여호와께서 시온을 다시 포로 상태에서 구출하실 때, 선지자들은 그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한 의지를 거기에서 그 어느 때 보다도 더 풍성히 발견하고 또 알릴 것이다. 이것은 또한 앞 구절들처럼, 복음 시대에 적용해 본다면, 그것은 성령을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써 복음 사역자들에게 부어 주어 그들을 모든 진리로 인도함을 받으리라는 약속이다. 따라서 그들의 눈이 마주 볼 것이며 구약 성도들이 그렇게 했던 것보다 더 뚜렷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여기에 일치단결할 것이다. 구원에 관한 이 큰 일들 가운데에서 그들은 노래하는 것뿐만 아니라 감정에 있어서도 일치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라" 는 것을 우리의 미래의 특권으로 말할 때, 이것을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2) 시온의 황폐한 곳은 놀랍게 위로받을 것이므로 그때 즐거워할 것이다(9절). "너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이 기쁜 소리를 발하여 함께 노래할지어다." 즉 예루살렘의 모든 지역(그것은 모두 폐허가 되었다)과 가장 황폐하게 된 것으로 보인 지역들도 기쁨을 나누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거의 그것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꿈꾸는 사람들처럼 기쁨을 말할 것이다(시 126:1, 2). 그들과 함께 노래하게 하라.
긍휼을 나누는 자들은 찬미에 연합해야 한다. 여기에 기쁨과 찬송의 내용이 있다.
[1] 하나님의 백성은 이 구원의 위로를 얻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기쁨의 내용이 되는 것은 우리 감사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 그가 "예루살렘" (그 대적의 손에 팔린 예루살렘 거민들)을 "구속하셨고" 그렇게 함으로써 슬픔 중에 있는 "그 백성을 위로하셨다." 예루살렘의 구속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의 기쁨이며 그 구속을 바라는 것이 그들의 특징이다(눅 2:38).
[2] 하나님은 그 영광을 얻으실 것이다(10절). "여호와께서 열방의 목전에서 그 거룩한 팔을 나타내셨다" (그의 능력을 명시하시고 나타내셨다). 하나님의 팔은 거룩함을 옹호하고 그의 약속을 이행하여 정결하고 공의롭게 펼쳐진 거룩한 팔이다.
[3] 온 세상은 그 이익을 얻게 될 것이다. 우리 주 예수에 의해 역사된 큰 구원 가운데 "여호와의 팔이 나타났고 모든 땅 끝까지도 그 큰 구원을 보았다."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던지우는 것을 본 구경꾼으로서뿐만 아니라 그것을 함께 나누는 자로서 그 큰 구원을 보았다. 열방 중에 일부, 가장 멀리 있는 자들이 구속의 이익에 동참할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 구원에 적용되어 있다(눅 3:6).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Ⅱ. 그것은 여기에서 매우 배려 깊고 상세하게 다루어져야 하는 큰 과업으로써 언급되어 있다. 자유가 선포될 때,
1. 하나님의 백성들은 될 수 있는 한 속히 바벨론에서 나오도록 하자. 비록 거기에서 매우 잘 정착했을지라도, 그들로 하여금 바벨론에 뿌리박을 생각을 말게 하자. "떠날지어다. 떠날지어다. 그 가운데서 나올지어다" (11절). 국경에 있는 자들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 있는, 그 나라 중심부에 있는 자들로 하여금 가게 할지어다. 바벨론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한 장소가 아니다. 그들은 떠날 허락을 받자마자 조금도 지체하지 않게 하라. 이 말씀으로 하나님은 감동되어 올라가고자 한 자들의 심령을 분기시키셨다(스 1:5). 그리고 그것은 아직도 죄와 사단의 굴레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선포하신 사유를 이용하도록 하라는 부르심이다. 그리고 아들이 그들을 "자유케 하면 그들이 참 자유할 것이다."2. 그들로 하여금 바벨론의 타락을 지니고 가지 않도록 주의하게 하자. "중한 것을 만지지 말지어다." 하나님께서 너를 위해 자기 팔을 드러내셨으니 "너희는 스스로 깨끗케 하여 거룩할지어다." 그들은 애굽에서 나왔을 때, 애굽의 우상숭배의 풍속을 가져왔고(겔 23:3) 그것은 그들의 파멸이 되었다. 그들로 하여금 이제 바벨론에서 나올 때 그렇게 하지 않도록 유의하게 하자.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특별한 긍휼을 받을 때, 그 어느 때 보다도 더 세심하게 모든 부정을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특별히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들" 즉, 성소의 기물을 맡아(그것이 특별한 허락에 의해 반환될 때) 그것을 예루살렘으로 가져가는 제사장들(스 1:7; 8:24 이하)은 "깨끗게" 하라. 그들로 부정한 것을 피할 뿐만 아니라 "깨끗게" 하도록 매우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라. 그들은 여호와의 기구를 담당해야 하고 하나님의 의식을 정결하고 온전하게 지키도록 위탁받고 있다. 그들에게 위탁된 것은 선한 것이며 그들은 깨끗케 되어야 한다. 결백으로 그들의 손을 씻고 나서 하나님의 제단을 들고 그의 기구를 나르며 스스로를 깨끗케 지켜야 한다.
3.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이동할 때 하나님이 그들에게 임제하시고 그들을 보호하시는 사실을 의지하게 하자(12절). "너희가 황급히 나오지 아니하리라." 그들은 소돔에서의 롯처럼 지체하거나 주저하지 말고 급히 나와야 했으나 마치 그들이(애굽에서 나올 때처럼)추적당하거나 그들의 해방이 취소되고 철회되는 명령이 내릴까봐 걱정하는 것처럼, 믿음이 없어 겁을 집어먹고 황급히 나와서는 안 되었다. 아니, 그들은 하나님께 관해, 그의 일은 완전하므로 그들은 지나치게 서둘 필요가 없었다. 고레스는 그들을 영예롭게 석방시킬 것이며 그들은 몰래 도망쳐 나오지 않고 명예롭게 귀국할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들의 대장인 동시에 총사령관으로서 "그들 앞에 행하시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또는 뒤에 남은 자들을 모으실 그가 "그들 뒤에 호위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선두를 인도하시고 뒤를 호위하실 것이다. 그는 그들과 만나거나 그들을 따라오는 대적들에게서 그들을 안전케 하실 것이다. 즉 그는 은총으로써 그들은 에워싸실 것이다. 구름과 불기둥은 그들이 애굽에서 나올때, 때로 그들 뒤를 따라 그들의 뒤를 안전케 했다(출 14:19).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임재하시는 것이 그들에게는 지금, 눈에 보이는 표적이었던 그 기둥이 될 것이다. 의무의 길로 행하는자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는다. 그리고 이것을 믿는 자들은 서두르지 않을 것이다.
메시야의 굴욕(1) (이사야 52:13-15)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믿음을 견고케 하고 현세적인 구원의 약속에 대한 그들의 소망을 격려하기 위해 그 선지자는 때가 찼을 때 메시야에 의해 역사될 그 큰 구원에 대해 그들에게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예언이 그들이 앗수르 군대에서 건져지리라는 약속을 비준하기 위한 의도를 지니고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사망과 부활에 대한 이 예언을 그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오리라는 약속을 확증하기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구원들은 큰 구속을 상징했고 그것들에 대한 예언은 그것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예언은 여기에서 시작되어 있으며 다음장 끝까지 계속되어 있는데 될 수 있는 한 명백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 옛 유대인들은 그것을 메시야에 대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으나 현대 유대인들은 그것을 왜곡하기 위해 매우 애쓰고 있다. 그리고 우리 중 어떤 사람들(그들은 이점에서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동지가 아니다)은 그것을 예레미야에 대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 부분을 인용하여 내시에게 그리스도를 전파한 빌립은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그를 가리킴이고 타인을 가리킴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 어떤 반론도 제기하지 않고 있다(행 8:34, 35).
Ⅰ.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그의 과업을 위해 위임받았고 자격을 부여 받았음을 인정하고 계신다.
1. 그는 그것에 임명되셨다. "그는 내 종이라. 내가 그를 사용하므로 그를 지지하리라." 그는 그의 과업 중에서 그의 아버지의 뜻을 행하여 아버지의 영예를 구하며 그 아버지의 나라의 세력에 이바지하신다.2. 그는 그것에 대한 자격을 부여받으셨다. 그가 "지혜롭게 행하리니" 이는 "지혜와 총명의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실" 것임이니라(11:2). 그 말씀은 다윗에 관해 그가 "지혜롭게 행했을 때" 사용되었었다(삼상 18:14). 그리스도께서 곧 지혜이시다. 그리고 우리의 구속사업을 계획하고 수행할 때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 가 크게 나타났다(고전 2:7). 그리스도는 여기 이 땅 위에 계셨을 때, 매우 지혜롭게 행하시어 만인의 경탄을 받았다.
Ⅱ. 그는 그의 굴욕과 높이 들리심에 대해 간단한 일가견을 피력하고 계신다.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어떻게 그가 자기 자신을 낮추셨는가. 다윗이 슬픔과 환난으로 인해 우리에게 이상함이 되었던 것처럼(시 71:7) "우리가 그를 보고 놀랐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얼마나 비천한 대우를 받는가를 보고, 그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고질적이며, 얼마나 비인간적인가, 그리고 어떤 모욕이 그에게 가해졌는가를 보고 놀랐다. 그가 조롱당하고 뺨을 맞고 가시 면류관을 쓰셨을 때, "그 모양이 다른 어느 인생보다 상하였다" 그러나 "그는 수치와 치욕에서 얼굴을 돌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간고를 많이 겪은 자" 였기 때문이다. 그 얼굴에 온갖 모욕을 다 당하신 그는 "인생 중 누구보다 더 의로운" 자였다. 일찌기 그렇게 잔인하게 다루어진 자는 결코 없었다. 그의 모양은 그가 "종의 모양" 을 취하셨을 때, 그 어떤 사람의 아들들보다 더 천하고 초라했다. 그를 본 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분명, 그처럼 비겁하게 보인자는 결코 없었다. 그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시 22:6). "백성이 그를 미워했고" (49:7), 그를 "만물의 찌꺼기" 로 취급했다. "일찌기 그가 당한 고난처럼 큰 것은 없었다."2. 하나님은 그를 얼마나 높이 들어 올리셨으며, 그가 스스로를 낮추신 것을 인하여 얼마나 그를 높히셨던가!(13절) "그가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하나님은 그를 높이시고 사람들은 그를 격찬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로써, 그가 매우 존귀하게 될 것이고 가장 존귀한 자보다 더 존귀케 될 것이며, 하늘보다 더 존귀케 될 것이다.
(1) 열아들이 그에 대해 보다 더 낫게 될 것이다. 그가 유대인들에게만 아니라 "열방에 뿌릴 것이기" 때문이다. 뿌려진 피가 그들의 양심에 스며들어 그들을 정결케 할 것이다. 그는 고난을 당하셨고 죽으셨으며 그렇게 하여 열방에 부리셨다. 즉, 그가 죽으실때, "샘이 열렸던" 것이다(슥 13:1). 그가 그의 천국 교훈으로써 열방에 뿌릴 것이며 그것은 비처럼 내리고 이슬처럼 맺힐 것이다. 모세는 단지 한 민족에게 그러했으나(신 32:2) 그리스도는 열방에게 그러하셨다. 그는 세례로써 그것을 행하실 것인데 그것은 맑은 물로 몸을 씻는 것이다(히 10:22). 따라서 이 약속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사도들을 보내어 모든 족속에게 세례를 주거나 뿌려 줌으로써 그들을 제자로 삼게 하셨을 때 성취되었다.
(2) 그 백성의 큰 자들이 그에게 존경을 표할 것이다. "열왕은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리라." 즉, 그들은 이전처럼 그를 대적하기 위해, 그의 신성한 신탁을 반박하고 모독하기 위해 그들의 입을 열지 못할 것이다. 아니, 그들은 그가 그의 나라를 이 세사에 세우시기 위해 취하신 방법에 묵종하고 기뻐할 것이다. 그들은 욥의 지혜를 듣고 난 후에 "말을 내지 못한" 자들처럼(욥 29:9, 22) 매우 겸손하게 그리고 경외감을 품고 그의 신탁과 율법을 받아들일 것이다. "열왕이 보고 일어서리라" (49:7).
(3) 창세로부터 은밀히 감추어졌던 비밀이, 그 사도의 말처럼, 그에 의해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아레 하신 바" 될 것이다(롬 16:25, 26). "그들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것을 볼 것이다." 복음은 새로우며 알려지지 않은 것들을 드러내는데, 그것은 주의를 집중시키고 열왕과 나라들의 존경을 얻을 것이다. 이것은 이방 세례에 복음이 전파되는 것에 적용된다(롬 15:21). 이 말씀들은 거기에서 칠십인역에 있는 것대로 인용되고 있다.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계시된 계시를 받은 자들은 오랫동안 흑암 가운데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그들이 아직 듣지 못한" 하나님의 영광을, 측 그리스도의 얼굴에 비취는 그 영광을 보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철학의 모든 지식이나 점성술로써 또는 이교도의 신탁에 의해 결코 들을 수 없었던 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해 그들에게 드러내어질 것이다. 메시야에 관해 구약에 많은 것이 언급되어 왔었다. 많은 것이 그들에게 전해져 왔었고 그들은 그것을 들었다. 그러나, 시바 여왕이 솔로몬에 관해 발견한 것처럼, 그가 오실 때 그가 그에게서 보게 될 것은, 그들이 들어왔던 것을 훨씬 능가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세속적인 유대인들처럼, 자기 서대로 메시야를 바라던 자들의 기대를 실망시키셨으나 약속된 메시야를 바라던 자들의 기대를 능가하셨다. 그것은 그들의 믿음대로였다. 아니 그것을 능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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