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식과 간구(시편 142:1-3)
다윗이 이 기도를 올린 곳이 "아둘람"의 동굴인지 혹은 "엔게디"의 동굴인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가 고난 중에 있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그렇게 자리를 바꾸고 매 순간 죽음을 예측하는 무서운 공포 속에서 쫓기는 것은 그렇게 위대한 용사에게, 그렇게 위대한 조신(朝臣)에게 커다란 불명예였다. 그러나 그는 그 때에 이러한 기도를 드릴 마음이 생겼다. 그가 어디에 있을지라도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항상 지니고 있었다 .기도와 눈물이 그의 무기였다 .그가 그의 손을 왕에게 뻗칠 수 없었을 때 그는 그의 하나님을 향하여 손을 들었다. 깊고 어두운 동굴이라곤 없으나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로써 우리의 영혼과 기도를 드려야 한다. 그는 이 시편을 "마스길" 즉 "교훈 시"라고 부른다. 동굴에서 무릎을 꿇고 좋은 교훈을 얻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가르치기를 소원했다. 이 구절 가운데서 다음과 같은 것을 고찰해 보자.
Ⅰ. 어떻게 다윗이 하나님께 탄식하였는가?(1, 2절) 위험이 끝났을 때 그는 그가 처했던 공포와 하나님께 드렸던 간구를 고백하는 일을(위대한 영혼들이 때때로 그렇게 하는 것같이)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가장 훌륭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놀라는 것이 있을 때 부모를 대하는 아이들처럼 부르짖는 것을 손상이나 경멸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다윗이 그의 탄식을 토했다." 이것은 숨김없고 완전한 탄식을 의미한다. 그는 이 점에서 풍부했고 유별났다. 그의 마음은 그의 슬픔으로 가득찼지만 여호와 앞에 탄식을 토함으로 평온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매우 열심히 행했다. "그는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었고"(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마음의 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었고"(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마음의 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었다. 그가 동굴에 있었기 때문에 그를 배반하지 않기 위하여 들릴 수 있는 소리로 말하지 못했다. 정신적인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소리다. 그는 말할 수 없는 감히 말하지 못하는 탄식을 들으신다(롬 8:26). 다윗은 이 같은 탄식에서 두 가지를 하나님께 내어 놓는다.
1. 그의 고난. 그는 자기 처지의 진정서와 기념을 제시했다. "내가 내 우환을 그 앞에 진술하는도다." 그리고 내 모든 상황을 보이는도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가 진술하지 않으면 모르신다는 것처럼 하나님께 그의 우환을 제시하거나 규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께 신뢰를 두고 그와 교통하기를 계속 원하며 그에게 자신이 전적으로 언급되기를 즐거워하는 자로서 하나님께 속마음을 밝혔고 겸손하게 그 앞에 문제를 내어 놓고 그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그에게 맡겼다. 우리는 우리의 환난을 너무 크게 과장해서 골몰하기 쉽다.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 이에 반하여 그것을 하나님께 나타냄으로써 우리의 염려를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께 맡길 수 있고 평안하게 될 수 있다. 우리가 자신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어떠한 탄식도 허용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배의 합당한 예의와 성실로써 하나님께 대할 수 없으며 그 앞에 설 수 없다.2. 그의 간구. 그가 탄식했을 때 그는 빛으로써 구원을 요구하지 않고 은총으로써 겸손하게 그것을 간청하면서 "간구하였다"(1절). 탄식하는 자들은 간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기 때문이다.
Ⅱ. 그가 무엇을 탄식하였는가? 위험이 없다고 생각되는 "나의 행하는 길에 저희가 나를 잡으려고 올무 숨겼나이다." 사울은 다윗에게 "그에게 올무가 되게 하려고"(삼상 18:21) 그의 딸 미갈을 주었다. 그는 모든 것이 그를 대적하려는 계획에서 이뤄진 것이라고 하나님께 탄식한다. 그가 그의 길을 벗어나고 올무에 걸렸다면 스스로 감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의무의 길에서 그것을 만났을 때 그는 겸손한 담대함으로 하나님께 그것을 말해야 했다.
Ⅲ. 무엇이 이러한 탄식 중에 그를 위로했는가?(3절)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할 때에" 그리고 비애와 공포의 짐으로 침식하게 되었을 때에, 내가 완전히 당황하고 절망에 빠지게 되었을 때에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즉, 주께서 내 길을 아신 사실을 생각하는 것이 내게 즐거움이 되었다. "주는 나의 성실을 아셨으며 내가 걸은 옳은 길을 아셨나이다. 나는 나의 박해자들이 나를 나타내는 자와 같지 아니하나이다. 주는 나의 상황을 그 모든 특수한 일에서도 아셨나이다. 내 영혼이 압도되었을 때에 내가 분명하게 그것을 보지 못하며 주께서 그것을 아신다는 사실이 나를 위로했나이다(욥 23:10). 주는 그것을 아셨나이다. 즉 주는 그것을 보호하시고 지키시고 구하셨나이다"(31:7; 신 2:7)
다윗의 탄식(시편 142:4-7)
시편 기자는 여기에서 우리의 교훈을 위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다.
1. 그가 그의 친구들에 의해서 어떻게 배신당했으며 버림을 받았는가?(4절) 그가 은총으로 궁성에 있었을 때 그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지만 그가 법률상의 보호를 박탈당한 사람이 되고 그를 숨겨 줄 어떠한 사람도 위태롭게 되었을 때에 (아히멜렉의 운명이 증언해 준다) "그를 아는 자가 없고" 모든 사람이 그를 부끄러워했다. 그는 옹호자로서 그의 "우편에" 서는 것을 보았다(시 109:3). 약간의 친구나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좋은 말을 해 주었다. 그러나 요나단이 그를 위해 나타나서 그의 생명을 구하려고 한 이래로 아무도 그의 무죄함을 방어해 주려고 모험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두가 그 일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른다고 말하려고 했다. 그는 혹자가 그에게 문을 열어 주었는지를 보려고 들러 보았다. 그의 옛 친구들 중 아무도 그에게 밤에 묵도록 하 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그에게 은밀하고 안전한 장소를 제시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피난처도 없었다." 얼마나 많은 선한 사람들이 겨울이 오면 떠나가는 그러한 제비 같은 친구에 의해서 속임을 당했는지! 다윗의 생활은 극히 존경할 만했지만 그가 부당하게 추방되었을 때 "그를 돌아보는 자도 없었고" 그를 보호하기 위해서 손을 움직이려는 자도 없었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우리를 위한 그의 고난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버림당하고 심지어는 그의 제자들에게서도 버림받은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홀로 포도즙을 짜는 기구를 밟았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도와 주는 자도 없고 붙들어 주는 자도 없었기"(사 63:5) 때문이다.2. 그러면 그가 어떻게 하나님에게서 만족을 발견하였는가?(5절) 사랑하는 사람들과 친구들은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서 있었다. 그들을 부르는 것은 쓸 데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말하기를 "내가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주는 나를 아시며 나를 돌보시며 다른사람들이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을 때에 주는 나를 버리시지 아니하시나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사랑에서 변함이 없는 분이기 때문이다. 다윗은 그가 동굴에서 하나님께 말한 것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주는 나의 피난처시오. 생존 세계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나는 비천한 가운데서 나를 건지시는 "나의 피난처' 가되시며 나를 행복하게 해 주시는 "나의 분깃"이 되시는 주를 의지하나이다. 내가 거하는 동굴은 빈궁한 피난처에 지나지 않나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은 내가 들어갈 강한 성입니다. 주는 내가 홀로 안전하다고 생각할 나의 피난처이십니다. 내가 희망하는 왕관은 빈궁한 분깃에 지나지 않나이다. 나는 내가 여호와께서 나의 기업의 분깃이요, 나의 잔의 분깃이 되심을 알기 전에 잘 되겠다 고생각하지 않겠나이다." 진실하게 여호와를 저희의 하나님으로 모시는 자들은 그가 피난처와 분깃으로써 충분하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악이 저희를 상하게 할 수 없는 것같이 선도 그들에게 결핍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겸손하게 저희의 관심을 주장할 수 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피난처시오, 나의 분깃이시라." 그밖의 모든 것은 거짓의 피난처요 가치없는 분깃이다. 주는 "생존 세계에서" 즉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가 목숨을 가지고 있는 동안 이 세상에서든지 더 좋은 세상에서든지 나의 피난처와 분깃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생존 세계의 모든 필요한 거세 응답하실 수 있는 충만 한 것이 있다. 우리는 위험과 결핍의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이시라면 우리가 무슨 위험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으며 그가 우리의 분깃이 되신다면 어떤 궁핍을 두려워하겠는가? 오직 "생존자의 세계"라고 불리울 가치가 있는 하늘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 피난처와 분깃이 될 것이다.
3. 이러한 확신에서 그가 어떻게 하나님께 자신을 말했는가?(6, 7절) "여호와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나의 고난의 부르짖음과 나의 간구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나는 심히 비천하나이다. 주께서 나를 도와 주시기 않는다면 나는 완전히 가라앉을 것입니다. 여호와여 나를 핍박하는 자에게서 건지소서. 저희의 손을 결박하시든지 저희의 마음을 돌리시든지, 저희의 힘을 파괴하시든지, 저희의 계획을 헛되게 하시든지 하소서. 저희를 억제하시며 나를 구출하소서. "저희는 나보다 강하니이다. 가장 약한 자들과 함께 하시는 것이 주의 영광이 될 것입니다. 그들로부터 나를 구원하소서. 그렇지 않으면 나는 그들에 의해서 파멸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아직 그들과 싸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여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소서. 나를 이 동굴에서 안전하게 인도하실 뿐 아니라 나의 모든 곤란한 점들에서 인도해 주소서."
우리는 그것을 영적으로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선한 사람들의 영혼은 때때로 의심과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괴로움을 당하며 신앙의 유약성과 타락의 전파를 통해서 속박되고 구속된다. 그것을 자신들에게 적용하며 그에게 자유롭게 그들을 정하며 저희의 마음을 확대하도록 간구하는 것이 저희의 의무이며 권리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의 계명의 길로 달려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4. 그가 그의 구원이 하나님의 영광에 돌려지기를 얼마나 기대했는가?(1) 그 자신의 감사에 의해서 그의 현재의 탄식은 이제 바뀔 것이다.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소서. 내가 자신과 친구들을 즐거워하여 편히 살고자 함이 아니요, 내 나라를 얻으려는 것이 더욱 아니라, 주의 이름을 감사케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에서 구원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우리의 기도에 서이 점에 주시해야 할 것이다. 즉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기회를 얻어야 하며 그를 찬양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이것은 우리를 풍요하게 해 주는 일상적인 자비 중 가장 위로가 되며 가장 훌륭한 찬양의 의무를 위해 기회를 우리에게 준다.
(2) 그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감사에 의해서(고후 2:11). 내가 커질 때에 "의인이 나를 두르리이다." "나로 인하여 그들 이주께 찬양의 면류관을 드리리이다." 갈대아 사본도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들이 나의 구원을 보고 나의 경험을 듣기 위하여 그리고 나로부터(마스길) 교훈을 받기 위하여 나를 축하하러 나를 돌러싸고 모일 것이다. 그들은 나의 감사에 연합하기 위하여 나를 둘러쌀 것이다." "주께서 나를 후대하시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의 자비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찬양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찬양이 우리 편에서 우리에 의해 갈망되고 기뻐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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