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1
(1) 그가 자기 자신의 의견이나 공로를 자부하지 않았다는 사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나이다." 겸손한 성도들은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자신들을 높이 평가하지 않으며, 자신의 옛모습을 사랑하지도 않으며 자신들의 달성이나 성취를 과장하지 않는다. 마음을 지배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지나친 자애(自愛)를 정복할 것이다.
(2) 그가 업신여기는 자세나 높은 것을 바라보는 자세를 갖지 않았다는 사실.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옵니다. 나는 내 위에 있는 자들을 부러워하여 바라보지도 않으며 나보다 아래에 있는 자들을 경멸하여 바라보지도 않나이다." 교만한 마음이 있는 곳에 주로 교만한 모습이 있다(잠 6:17). 그러나 겸손한 정치가는 그의 눈을 그리 높게 올리지 않을 것이다.
(3) 그가 그의 지위보다 높은 일에 관여하지 않았고 그에게 너무 큰 일이나 높은 일에 종사하지 않았다는 사실. 그는 너무 높은 것을 연구하는 데에 시간을 소비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묵상으로 삼고 즐거운 사색이나 의심스러운 논쟁거리로 즐거워하지 않았고 쓰여진 것 이상으로 현명하게 되기를 탐하지 않았다. 하나님과 우리의 의무를 안다는 것은 우리에게 충분히 높은 것을 배우는 것이다. 그는 너무 큰 일에 힘쓰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추구했고 결코 정치가가 되기를 준비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병사(兵士)가 되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그의 형이 전쟁터에 나갔을 때 그는 집에서 양을 지키기 위해서 머물러 있었다. 우리의 영역을 지키며 우리가 보지 않은 것을 참견하지 않고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것을 간섭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지혜이며, 우리의 찬양이 될 것이다. 방백들과 학자들은 사람들에게 너무 크거나 높은 일에 관심하지 말아야 한다. 낮은 자리에 있는 자들과 평범한 능력을 가진 자들은 그들의 영역 밖에 있는 것을 바라지 말아야 하고 실속없이 뽐내지 말아야 한다. 과도한 명예에 매혹되는 자들은 부끄러움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2.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상황에 잘 적응했다(2절).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다." 그가 교만하게 왕국을 노리지 않았던 것과 같이 하나님께 그에게 기름부으신 이래로 그는 오만하게 누구에게도 대하지 않았으며, 때가 이르기 전에 왕관을 얻으려고 시도하지도 않았다.
(1) 그는 어미 품에 있는 어린 아이와 같이 겸손했고 높은 것을 바라보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다루기 쉽고, 다스려지기 쉬울 정도로 겸손했다. 어머니가 유모의 뜻에 따르는 아이처럼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다. 그는 품에 있는 아이처럼 왕으로 임명되었지만 자기 자리를 고수하거나 발전된 미래를 전망하면서 자신을 높이 평가하지도 않았다. 우리의 구원자는 이와 같은 비유로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치셨다(마 18:3). 우리는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어야" 할 것이다.
(2) 그는 어린 아이가 완전히 젖을 뗐을 때 가슴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부귀와 영광에 무관심한 것 같았다. (그러므로 하몬드 박사는 이렇게 해석한다) "나는 젖뗀 아이처럼 고요하고 평온했다." 이것은 어린 아이가 어머니 품을 갈망하듯이 우리의 마음은 본성적으로 세상적인 것들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와 같은 방법으로 그것을 좋아하며, 그것을 위해 부르짖고 그것을 기뻐하고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성화된 영혼은 그러한 세상적인 것들을 버린다. 섭리는 가슴에 쓴쑥을 발라 놓고 젖을 떼도록 우리를 돕는다. 아마도 어린 아이는 젖을 떼는 동안 성을 내며 안달할 것이다. 그리고 젖을 잃었을 때 원상태로 돌아 오기를 기대할 것이다. 그러나 하루 이틀이 지나면 그것은 잊혀질 것이다. 애타는 것이 지나가고 새로운 음식물이 충분히 공급되며, 이제는 젖이 아니라 단단한 음식에도 견디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은혜로운 영혼은 사랑하던 것의 상실과 바라던 것 실망에도 평온하며 어떤 일이 일어나도 고요하며, 하나님과 계약의 은총에 의해서 안전하게 살아간다. 그 때에 피조물이 메마른 젖가슴이라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 우리의 상황이 마음에 맞지 않을 때 우리는 마음을 상황에 맞추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평안하게 될 것이며, 만족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영혼은 "젖 뗀 아이와 같이" 될 것이다.
겸손한 신뢰(시편 131:1-3)
여기에 우리에게 위로가 될 두 가지 일이 나타나 있다.
Ⅰ. 우리의 성실성에 대한 자각, 이것은 다윗이 기뻐하는 것이었다. 그의 마음은 그가 받았던 비난과 그가 처해 있던 유혹에도 불구하고 겸손하게 하나님과 같이 걸었다는 것을 증언할 수 있었다.
1. 그는 높은 지위를 원하지 않았고 세상에서 두드러진 위인이 되기를 갈망하지도 않았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명령하셨다면 그는 양의 우리에게 젊은 시설을 보낸 것같이 그의 일생을 지내기에 만족했을 것이다. 그의 형은 자존심을 가지라고 그에게 말했지만(삼상 17:28) 그 요구는 근거가 없는 것이었고, 부당했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아신다.(1) 그가 자기 자신의 의견이나 공로를 자부하지 않았다는 사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나이다." 겸손한 성도들은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자신들을 높이 평가하지 않으며, 자신의 옛모습을 사랑하지도 않으며 자신들의 달성이나 성취를 과장하지 않는다. 마음을 지배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지나친 자애(自愛)를 정복할 것이다.
(2) 그가 업신여기는 자세나 높은 것을 바라보는 자세를 갖지 않았다는 사실.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옵니다. 나는 내 위에 있는 자들을 부러워하여 바라보지도 않으며 나보다 아래에 있는 자들을 경멸하여 바라보지도 않나이다." 교만한 마음이 있는 곳에 주로 교만한 모습이 있다(잠 6:17). 그러나 겸손한 정치가는 그의 눈을 그리 높게 올리지 않을 것이다.
(3) 그가 그의 지위보다 높은 일에 관여하지 않았고 그에게 너무 큰 일이나 높은 일에 종사하지 않았다는 사실. 그는 너무 높은 것을 연구하는 데에 시간을 소비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묵상으로 삼고 즐거운 사색이나 의심스러운 논쟁거리로 즐거워하지 않았고 쓰여진 것 이상으로 현명하게 되기를 탐하지 않았다. 하나님과 우리의 의무를 안다는 것은 우리에게 충분히 높은 것을 배우는 것이다. 그는 너무 큰 일에 힘쓰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추구했고 결코 정치가가 되기를 준비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병사(兵士)가 되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그의 형이 전쟁터에 나갔을 때 그는 집에서 양을 지키기 위해서 머물러 있었다. 우리의 영역을 지키며 우리가 보지 않은 것을 참견하지 않고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것을 간섭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지혜이며, 우리의 찬양이 될 것이다. 방백들과 학자들은 사람들에게 너무 크거나 높은 일에 관심하지 말아야 한다. 낮은 자리에 있는 자들과 평범한 능력을 가진 자들은 그들의 영역 밖에 있는 것을 바라지 말아야 하고 실속없이 뽐내지 말아야 한다. 과도한 명예에 매혹되는 자들은 부끄러움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2.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상황에 잘 적응했다(2절).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다." 그가 교만하게 왕국을 노리지 않았던 것과 같이 하나님께 그에게 기름부으신 이래로 그는 오만하게 누구에게도 대하지 않았으며, 때가 이르기 전에 왕관을 얻으려고 시도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1) 그는 어미 품에 있는 어린 아이와 같이 겸손했고 높은 것을 바라보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다루기 쉽고, 다스려지기 쉬울 정도로 겸손했다. 어머니가 유모의 뜻에 따르는 아이처럼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다. 그는 품에 있는 아이처럼 왕으로 임명되었지만 자기 자리를 고수하거나 발전된 미래를 전망하면서 자신을 높이 평가하지도 않았다. 우리의 구원자는 이와 같은 비유로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치셨다(마 18:3). 우리는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어야" 할 것이다.
(2) 그는 어린 아이가 완전히 젖을 뗐을 때 가슴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부귀와 영광에 무관심한 것 같았다. (그러므로 하몬드 박사는 이렇게 해석한다) "나는 젖뗀 아이처럼 고요하고 평온했다." 이것은 어린 아이가 어머니 품을 갈망하듯이 우리의 마음은 본성적으로 세상적인 것들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와 같은 방법으로 그것을 좋아하며, 그것을 위해 부르짖고 그것을 기뻐하고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성화된 영혼은 그러한 세상적인 것들을 버린다. 섭리는 가슴에 쓴쑥을 발라 놓고 젖을 떼도록 우리를 돕는다. 아마도 어린 아이는 젖을 떼는 동안 성을 내며 안달할 것이다. 그리고 젖을 잃었을 때 원상태로 돌아 오기를 기대할 것이다. 그러나 하루 이틀이 지나면 그것은 잊혀질 것이다. 애타는 것이 지나가고 새로운 음식물이 충분히 공급되며, 이제는 젖이 아니라 단단한 음식에도 견디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은혜로운 영혼은 사랑하던 것의 상실과 바라던 것 실망에도 평온하며 어떤 일이 일어나도 고요하며, 하나님과 계약의 은총에 의해서 안전하게 살아간다. 그 때에 피조물이 메마른 젖가슴이라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 우리의 상황이 마음에 맞지 않을 때 우리는 마음을 상황에 맞추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평안하게 될 것이며, 만족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영혼은 "젖 뗀 아이와 같이" 될 것이다.
Ⅱ. 하나님에 대한 확신. 다윗은 신뢰의 은택에 대한 자신의 경험에서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의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 대한 확신을 갖도록 추천한다(3절).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다윗은 그에게 주어질 왕관을 인내심있고 조용하게 기다릴 수 있었지만 그가 사랑하는 이스라엘과 백성들은 때가 차기 전에 그를 위해서 어떤 일을 시도하려고 준비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을 조용하게 하려고 노력하며, 그들이 적당한 시기에 사건의 국면이 평화롭게 변화되는 것을 보도록 하기 위해 "여호와를 바랄지어다"라고 명한다. "이와 같이 여호와의 구원을 희망하며,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 유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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