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1
2. 여기에 하나님께 대한 존경이 나타나 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향하여 그의 "눈을 들었다." 선한 사람의 눈은 "항상 여호와를 앙망한다"(25:15). 우리는 모든 기도에서 우리의 영혼과 우리의 영혼의 눈을 하나님께 들고 특이 경우와 같은 고난 중에서 더욱 하나님께 향해야 한다. 선한 백성들의 "눈이 여호와를 바란다"(2절). 우리는 "세상 사람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눈이 여호와를 우러러 볼 때"(슥 9:1) 백성들에게 자비가 임하는 것을 발견한다. 육체의 눈은 하늘을 향하는 것이다. 마음의 눈을 지시하는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기 위해서 Os homini sublime dedit - 즉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똑바로 선 풍채를 주셨다. "우리 눈이 여호와를 기다리나이다." 갈구와 기도의 눈, 애걸하는 눈, 의지와 희망과 기다림의 눈, 열망하는 눈이 여호와를 기다리나이다. 우리 눈은 "여호와"이시며,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우리는 그로부터 자비를 갈망하며 그가 긍휼을 우리에게 보이실 것을 희망하고 우리는 자비가 임할 때까지 하나님께 대한 열심을 계속할 것이다. 이것은 비유로써 묘사되었다(2절). 우리 눈은 종의 눈이 그 상전의 손을 여종의 눈이 그 주모의 손을 바람같이 하나님께로 향해야 한다.
(1) 그 주인의 지시하는 곳으로 을 향해야 한다. 주인의 종에게 그의 일을 명할 것을 기대하고 그를 위해 예정한 것을 바라고 그가 해야 할 것을 어떻게 하라는지 명심해야 한다. "여호와여, 주께서 무엇을 내게 하라고 명하실 것입니까?"
(2) 그의 공급하는 손을 바라보아야 한다. 종들은 적당한 시기에 따르는 저희의 음식의 몫을 상전과 주모에게 바라고 있다(잠 31:15).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 충분한 은총을 위해서 일용할 양식을 바라야 한다. 하나님께로부터 우리는 그것을 감사하게 받아야 한다.
(3) 그의 도우시는 손을 바라보아야 한다. 만일에 종이 그의 일을 혼자서 할 수 없다면, 그의 주인 이외에 어디에서 도움을 청해야 하는가? 그러므로 우리 여호와 하나님의 힘을 얻어 전진하며 계속할 수 있는 것이다.
(4) 그의 보호하시는 손을 바라보아야 한다. 만일에 종이 일하는 중에 적과 만나고 하는 일에 의문을 품게되고 혹 잘못하거나 해를 입는다면 그 일을 정해 준 그의 주인 이외에 누가 그를 지원해 주며 올바르게 해 줄 것인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박해를 받게 될 때 그들은 저희의 주인에게 호소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주의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소서."
(5) 그의 고치시는 손을 바라보아야 한다. 종이 그의 주인을 치기 위해 거역하였다면 그는 그의 주인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를 때리는 것을 볼 때 이렇게 말하는 종 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내가 영원히 거역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제 그의 책망 하에 있다. 그러면 저희가 "자기들을 치시는"(사 9:13) 자 이외에 어디로 돌아 올 것인가? 그들이 저희의 심판자에게 말고는 누구에게 호소할 것인가? 그들은 자기에게 곤경이 닥쳤을 때 여주인에게서 도망간 하갈과 같이(창 16:6) 행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을 복종시키며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에 자신들을 겸손하게 둘 것이다.
(6) 그의 보응하시는 손을 바라보아야 한다. 종은 그의 임금(賃金)을 기대하며 구의 주인으로부터 "잘 했도다"하는 말을 기대한다. 위선자들은 저희의 눈을 세상으로 향한다. 그러므로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다"(마 6:2). 그러나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상 주시는 분인 하나님께로 저희의 눈을 돌린다.
2. 그들은 저희의 슬픔을 토로한다. "심판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훼방이 바로 그들이 탄식한 상처요 유린당한다. 다음의 사실들을 관찰해 보자.
(1) 누가 멸시를 받았나? "주께 눈을 향한 우리." 하나님을 고백하는 자들은 때때로 세상에 의해서 멸시받고 유린당한다. 어떤 사람들은 "평안한 자," "교만한 자"라는 말을 비난하고 멸시받는 사람들은 나타내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우리의 영혼이 평안한 자들과 빼어난 자들이 비난하고 멸하는 것을 보고 고통하나이다." 성도들은 평화스러운 백성이지만 능욕을 당하고(시 35:20) 세상의 우수한 자들도 평안하지만 경시된다 (얘 4:1, 2).
(2) 누가 그들을 멸시하였는가? 우리가 읽은 말씀을 볼 때 그들은 평안하게 산 향락주의자이며 육체적이며 감각적인 사람들이었다(욥 12:5). 멸시하는 자들은 그들의 정욕에 따라 행하며 자기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데에 섬긴다. 그리고 교만한 자들은 하나님을 대항하며 자기들에 대한 높은 주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조롱하고 남을 비방함으로써 자신들을 과장하고자 한다.
(3) 그들이 어느 정도로 멸시를 받았는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우리가 멸시로 넌더리가 났나이다. "멸시가 우리 심령에 넘치나이다." 적들은 그들을 충분히 조롱하지 못했다고 생각했고 그들을 충분히 경멸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멸시를 마음에 세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저희의 뼈를 찌르는 칼과 같았다(시 42:10)
[1] 비난과 멸시는 이 세상에 있는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에 과거에 있었고 현재도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이스라멜은 이삭을 멸시하였다. 그것은 그를 "핍박했다"(갈 4:29)고 불리워진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2] 사람들의 비난과 멸시에 비교해서 하나님께 자비가 있다는 사실과 그들이 야만적으로 사용할 때 우리의 선한 이름에 자비가 있다는 사실은 이로의 내용이 된다. "들으소서. 오 우리의 하나님이시여 우리가 멸시를 받았나이다."
은혜로운 감사의 고백(시편 123:1-4)
Ⅰ.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희망으로 형성한 장엄한 고백이 나타나 있다(1, 2절).
1. 여기에서 하나님께 주어진 칭호를 관찰해 보자. "하늘에 계신 주여." 우리 주 예수는 기도에서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바라볼 것을 가르치셨다. 그가 하늘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특히 하늘에서 그의 보좌에 앉은 왕으로서 그의 영광을 나타내신다. 하늘은 전망(展望)의 자리이며 권능의 자리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의 모든 질고를 보시며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보내실 수 있다. 때때로 하나님은 세상을 저버리신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의 대적자들은 "너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그들은 위로를 하면서 "우리의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다." "하늘에 계신 주여" 주는 심판자로서 하늘에 계십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하늘에 그 보좌를 예비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받은 무죄를 그 보좌에 호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2. 여기에 하나님께 대한 존경이 나타나 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향하여 그의 "눈을 들었다." 선한 사람의 눈은 "항상 여호와를 앙망한다"(25:15). 우리는 모든 기도에서 우리의 영혼과 우리의 영혼의 눈을 하나님께 들고 특이 경우와 같은 고난 중에서 더욱 하나님께 향해야 한다. 선한 백성들의 "눈이 여호와를 바란다"(2절). 우리는 "세상 사람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눈이 여호와를 우러러 볼 때"(슥 9:1) 백성들에게 자비가 임하는 것을 발견한다. 육체의 눈은 하늘을 향하는 것이다. 마음의 눈을 지시하는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기 위해서 Os homini sublime dedit - 즉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똑바로 선 풍채를 주셨다. "우리 눈이 여호와를 기다리나이다." 갈구와 기도의 눈, 애걸하는 눈, 의지와 희망과 기다림의 눈, 열망하는 눈이 여호와를 기다리나이다. 우리 눈은 "여호와"이시며,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우리는 그로부터 자비를 갈망하며 그가 긍휼을 우리에게 보이실 것을 희망하고 우리는 자비가 임할 때까지 하나님께 대한 열심을 계속할 것이다. 이것은 비유로써 묘사되었다(2절). 우리 눈은 종의 눈이 그 상전의 손을 여종의 눈이 그 주모의 손을 바람같이 하나님께로 향해야 한다.
종의 눈은
(1) 그 주인의 지시하는 곳으로 을 향해야 한다. 주인의 종에게 그의 일을 명할 것을 기대하고 그를 위해 예정한 것을 바라고 그가 해야 할 것을 어떻게 하라는지 명심해야 한다. "여호와여, 주께서 무엇을 내게 하라고 명하실 것입니까?"
(2) 그의 공급하는 손을 바라보아야 한다. 종들은 적당한 시기에 따르는 저희의 음식의 몫을 상전과 주모에게 바라고 있다(잠 31:15).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 충분한 은총을 위해서 일용할 양식을 바라야 한다. 하나님께로부터 우리는 그것을 감사하게 받아야 한다.
(3) 그의 도우시는 손을 바라보아야 한다. 만일에 종이 그의 일을 혼자서 할 수 없다면, 그의 주인 이외에 어디에서 도움을 청해야 하는가? 그러므로 우리 여호와 하나님의 힘을 얻어 전진하며 계속할 수 있는 것이다.
(4) 그의 보호하시는 손을 바라보아야 한다. 만일에 종이 일하는 중에 적과 만나고 하는 일에 의문을 품게되고 혹 잘못하거나 해를 입는다면 그 일을 정해 준 그의 주인 이외에 누가 그를 지원해 주며 올바르게 해 줄 것인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박해를 받게 될 때 그들은 저희의 주인에게 호소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주의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소서."
(5) 그의 고치시는 손을 바라보아야 한다. 종이 그의 주인을 치기 위해 거역하였다면 그는 그의 주인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를 때리는 것을 볼 때 이렇게 말하는 종 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내가 영원히 거역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제 그의 책망 하에 있다. 그러면 저희가 "자기들을 치시는"(사 9:13) 자 이외에 어디로 돌아 올 것인가? 그들이 저희의 심판자에게 말고는 누구에게 호소할 것인가? 그들은 자기에게 곤경이 닥쳤을 때 여주인에게서 도망간 하갈과 같이(창 16:6) 행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을 복종시키며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에 자신들을 겸손하게 둘 것이다.
(6) 그의 보응하시는 손을 바라보아야 한다. 종은 그의 임금(賃金)을 기대하며 구의 주인으로부터 "잘 했도다"하는 말을 기대한다. 위선자들은 저희의 눈을 세상으로 향한다. 그러므로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다"(마 6:2). 그러나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상 주시는 분인 하나님께로 저희의 눈을 돌린다.
Ⅱ. 하나님의 백성들이 역경의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께 제시한 겸손한 표현이 나타나 있다(3, 4절).
1. 그들은 자비를 간청한다. 하나님께서 저희들을 위해서 무엇을 해달라고 서술하거나 자비를 받을 만한 그들의 공적을 말하지 않고 "여호와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한다. 우리는 인간들에게서 거의 자비를 찾지 못한다. 그들의 인자한 것은 잔학하다. 거기에는 잔인한 "멸시"가 있다. 그러나 "여호와께 긍휼이 있다는 것"은 우리의 위로가 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 이외의 것에서 우리의 구원과 평안을 갈구할 필요가 없다. 교회의 환난이 어떠할지라도 하나님의 긍휼이 주도적인 치료가 된다.2. 그들은 저희의 슬픔을 토로한다. "심판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훼방이 바로 그들이 탄식한 상처요 유린당한다. 다음의 사실들을 관찰해 보자.
(1) 누가 멸시를 받았나? "주께 눈을 향한 우리." 하나님을 고백하는 자들은 때때로 세상에 의해서 멸시받고 유린당한다. 어떤 사람들은 "평안한 자," "교만한 자"라는 말을 비난하고 멸시받는 사람들은 나타내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우리의 영혼이 평안한 자들과 빼어난 자들이 비난하고 멸하는 것을 보고 고통하나이다." 성도들은 평화스러운 백성이지만 능욕을 당하고(시 35:20) 세상의 우수한 자들도 평안하지만 경시된다 (얘 4:1, 2).
(2) 누가 그들을 멸시하였는가? 우리가 읽은 말씀을 볼 때 그들은 평안하게 산 향락주의자이며 육체적이며 감각적인 사람들이었다(욥 12:5). 멸시하는 자들은 그들의 정욕에 따라 행하며 자기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데에 섬긴다. 그리고 교만한 자들은 하나님을 대항하며 자기들에 대한 높은 주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조롱하고 남을 비방함으로써 자신들을 과장하고자 한다.
(3) 그들이 어느 정도로 멸시를 받았는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우리가 멸시로 넌더리가 났나이다. "멸시가 우리 심령에 넘치나이다." 적들은 그들을 충분히 조롱하지 못했다고 생각했고 그들을 충분히 경멸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멸시를 마음에 세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저희의 뼈를 찌르는 칼과 같았다(시 42:10)
[1] 비난과 멸시는 이 세상에 있는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에 과거에 있었고 현재도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이스라멜은 이삭을 멸시하였다. 그것은 그를 "핍박했다"(갈 4:29)고 불리워진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2] 사람들의 비난과 멸시에 비교해서 하나님께 자비가 있다는 사실과 그들이 야만적으로 사용할 때 우리의 선한 이름에 자비가 있다는 사실은 이로의 내용이 된다. "들으소서. 오 우리의 하나님이시여 우리가 멸시를 받았나이다."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