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에스더 0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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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에스더의 잔치에 - 에스더가 베풀었던 두 번째의 잔치였다(2절;5:8). 여기의 '잔치에'(* , 리쉬토트)는 '마시다'를 뜻하는 동사 '솨타'(* )의 부정사로서문자적으로 '마시기 위하여'의 뜻이다. 이 단어는 다른 곳에서(1:3, 9;5:4, 8) '잔치'로 번역된 '미쉬테'(* )와 동족어이며 본질적 의미에 있어서도 동일하다. 다만이는 잔치석상에서 당연히 따르는 주흥에 좀더 강조점을 둔 것일 따름이다.

=====7:2
에스더에게 물어 가로되 - 아하수에로왕의 에스더에 대한 질문은, 첫 번째 잔치 때와 마찬가지로(5:6) 잔치상에 앉자 마자 던져졌을 것이다. 왕후 에스더의 요청 사항이무엇인지 무척이나 궁금하게 생각했던 아하수에로 왕이 술이 취하기까지 그 질문을 뒤로 미루었을 까닭이었다.
왕후 에스더여 - 여기서 왕은 이처럼 '에스더'에게 '왕후'라는 경어(敬語)를 붙임으로써, 자신의 마음이 그녀에게 깊이 쏠려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7:3
에스더는 그녀 자신의 소원이 무엇이냐는 왕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두 번씩이나 미룸으로써(5:4, 7, 8), 자신의 소청이 왕에게 흔쾌히 받아들여질 수 있을 만한 기회 혹은 분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5:4). 내가...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었으며 - 문자적으로는 '내가 왕의 눈 속에서 은혜를 발견하였으면'이다. 그런데 이것은 다음에 이어지는 문구처럼, 상대에게 어떤 간청을 하기에 앞서 그 상대가 자신의 간청을 받아들일 수 있게끔 하기 위한 상투적 문구이다. 내 소청대로 내 생명을...내 요구대로 내 민족을...주소서 - 이와 같은 이중적인답변은, 아하수에로의 이중적인 질문(2절)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Rawlinson). 그렇다고 한다면, '소청'과 '요구'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듯이 '내 생명'과 '내 민족'도 본질상 동일시되고 있다. 사실 '내 민족' 곧 유대 민족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그 공동체의 일원인 '내 생명', 곧 에스더의 운명도 불보듯이 뻔했다(4:14). 아하수에로의 입장에서 본다면 '내 민족'을 구해달라는 말보다 '내 생명'을 구해달라는 말에 보다 충격받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大)제국의 왕후가 생명을 구해달라는 요청을 해야 할만큼 위험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다는 사실은 가히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왕은 '내 민족'보다는 '내 생명' 곧 왕후 에스더의 생명에 관심이 집중됐음이 분명하다.에스더가 '내 민족'이라고만 하면서 자신의 민족이 구체적으로 어떤 민족임을 밝히지아니했는데도, 왕이 거기에 대해서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아니한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였을 것이다.

=====7:4
나와 내 민족이 팔려서 - 이것은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하려는 하만의 계획이, 왕에게 '은 일만 달란트'를 약속함으로써 왕에 의하여 승인되었던 사실을(3:-10) 염두에둔 말이다. 바로 이 같은 언급을 통하여, 에스더는 은 일만 달란트 때문에 자신의 민족에 대한 대량 학살을 승인한 왕을 암시적으로 원망하고 있다. 죽임...도륙...진멸함을 당하게 되었나이다 - 유대인 대학살과 관련된 왕의 조서속의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3:13)라는 내용에 상응하는 문구이다. 따라서 이것도 유대 민족 대학살을 승인한 왕에 대한 암시적 원망이라고 볼 수 있다.
대적이 왕의 손해를 보충하지 못하였으리이다 - 이 구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본문은 매우 애매하기 때문에 번역상에 난점이 따른다. RSV는 '우리에게 닥친 곤경이 왕에게 미칠 손실에 비교될 수 없기 때문이다'고 옮겼으며, NIV는 '그와 같은 고난이 왕을혼란스럽게 해드리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히브리어 원문상으로는 이 두 가지 번역이 모두 가능하며, 이 둘 중 어느 것을 취하더라도 나타내고자하는 의미는 거의 일치한다. 즉, 에스더는 유대인들이 차라리 노예로 팔려갔더라면 왕에게 그토록 손실이 되거나 왕을 괴롭히는 일로 나타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고있는 것이다(Huey). 개역 성경의 번역은, '곤경', '고난'으로도 번역될 수 있는 히브리어 '차르'(* )를 '대적'으로 옮긴 경우로서 이 역시 가능하다. 사실 아하수에로왕은, 하만이 준 은 일만 달란트로 유대인들이 학살됨으로써 발생되는 여러 손해들을보충하려는 생각을 갖고 었었다(3:9).

=====7:5
이 같은 아하수에로 왕의 분노는 (1)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 왕후 에스더와 그의 민족을 죽음에 빠뜨리려 했다는 것(3, 4절), (2) 자신에게 큰 손해를 입히려고 했다는것(4절)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아하수에로 왕은 자신과 직접 관계되는 (1) 및 (2)의두 사실을 알고 있는 이상, 이런 일을 도모하려고 하는 자를 극형에 처하게 하려했을것이다. 왕이 일러 가로되(* , 아마르 하멜렉...아마르) - 히브리원문대로 한다면 '왕이 말하고 말하였다'이다. 따라서 본 문구는 아하수에로 왕이 극도로 불쾌하며 흥분한 상태에서 다음의 이어지는 문구의 말을 하였음을 시사한다.
이런 일을 심중에 품은 자가 누구며 - 에스더가 자신과 자신의 민족이 돈에 팔렸다고 하는 등(4절) 많은 암시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아하수에로 왕이 누가 에스더와그 민족을 해치려고 했는지를 몰랐던 것은 약간 기이하다. 하지만 하만은 유대인을 학살하려는 계획을 왕에게 제시하면서 다만 '한 민족'이라고 말했기 때문에(3:7-11), 아하수에로 왕은 실제로 어떤 민족이 학살을 당하게 되는지 분명히 알려고도 하지 않고하만에게 전적으로 일임해 버렸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에 관해 또 한 가지 가능한 해석은 당시까지만 해도 아하수에로는 에스더가 유대인임을 몰랐기 때문에 하만이 그 사건의 주범인 줄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가 어디 있느뇨 - 본질상 앞의 질문에 대한 대답과 같은 동일한 대답이 요구되는질문이다. 저자는 이 같은 반복적 질문을 통하여, 그때 아하수에로 왕이 에스더의 소청을 전적으로 들어줄 마음 자세를 갖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7:6
대적과 원수는 이 악한 하만이니이다 - 에스더는 이같이 하만을 아하수에로 왕에게고발하기 위하여, 하만을 두 번씩이나 자신의 잔치에 참여시켰었다(5:4). 또한 에스더는 왕의 전적인 호응을 얻어 하만을 담대히 고발하기 위하여, 두 번씩이나 자신의 소청을 뒤로 미루면서까지 하나님의 지혜에 따라 기회를 엿보아 왔다. 하만이...두려워하거늘 - '하만'은 에스더와 그 민족을 해하려고 하는 어떤 사람이있다는 에스더의 말을 듣고도, 설마 그 사람이 자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그래서 하만은 그 '어떤 사람'이 바로 자기라는 에스더의 갑작스런 지적을 받자 놀랄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는 모사들의 불길한 예언(6:13)과 자신이 처한 그 시점의 상황을 아울러 생각해 보고 심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7:7
왕이 노하여 - 아하수에로 왕은 에스더와 그 민족을 해하려 하며 왕에게까지 큰 손해를 입히려는(4절) 어떤 사람이 있다는 그녀의 말을 들었을 때도 상당히 흥분되어 있었다(5절). 그러나 그 '어떤 사람'이 누구인지가 밝혀지자 왕의 흥분은 마침내 폭발하여 진노로 변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왕의 분노가 극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결국 왕에게 손해될 그 일이 자신이 아꼈던(3:1) 측근 신하에 의해 기도(企圖)되었다는데 있었다. 잔치 자리를 떠나...후원(後苑)으로 들어가니라 - 여기서 '후원'은 왕궁 주변의 넓은 정원을 가리킨다(1:5). 그러면 왕이 이같이 정원으로 나간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를 설명하려는 여러 견해들은 다음과 같다. (1) 그곳의 나무들을 도끼로 찍음으로써자신의 분노를 진정시키려는 것(Second Targum), (2) 하만의 미운 얼굴을 더 이상 보지 않으려는 것임(J.S. Menochius), (3) 하만에 대해서 어떤 형벌을 내려야 할지를 결정할 시간적 여유를 가지려는 것(Schultz, Rawlinson, Haupt), (4) 여전히 하만을 총애했던 나머지 그에게 형벌내리기가 곤란하였기 때문이라는 것(J.Drusius), (5) 술과분노로 몸이 달아올라서 찬 바람을 쏘임으로써 몸과 마음을 식히려는 것(E. Bertheau,C. Siegfried)등이 있다. 그러나 첫째, 왕궁 후원은 왕이 마음의 안정을 얻기 위해 매우 적절한 곳이라는 사실 둘째, 본 문구 다음에는 왕이 하만을 죽이기로 결심했다는내용이 있다는 사실 등으로 미루어 볼 때, (3)의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왕후 에스더에게 생명을 구하니 - 하만이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애걸한 것을 뜻한다. 그런데 여기의 '구하니'(* , 바카쉬)는 2절의 '요구'와 동족(同族)의단어이다. 본서의 저자는 이 단어를 자신의 생명을 구원키 위한 하만의 노력에 대하여도 사용함으로써, 에스더와 하만의 입장이 완전히 반전(反轉)됐음을 강력히 시사하고있다.

=====7:8
하만이 에스더의 앉은 걸상 위에 엎드렸거늘 - 혹자는 하만이 걸상에 앉아 있는 에스더의 발치에 엎드려서 간청을 하고 있었다고 본다(Paton, Keil). 그러나 히브리 원문상 위에 '걸상 위에'(* , 알 하미타)는 문자 그대로 이해되어야 자연스럽다. 하만은 에스더가 앉아있었던 긴 걸상의 옆부분에 자신의 상체를 올린채 엎드려 있었던 것이다. 하만이 처음부터 이같은 식으로 에스더에게 자기 목숨을 위한 간청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만은 왕이 후원에 나감과 동시에 어느 정도 거리 간격을두고 에스더에게 간청을 했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다급함도 더하여져서 나중에는에스더 가까이까지 접근하게 되었을 것이다. 왕이 가로되 저가...왕후를 강간까지 하고자 하는가 - 아하수에로 왕이 실제로, 걸상 위에 엎드려 있는 하만의 모습을 에스더에 대한 '강간' 행위로 오해한 것은 아니었다.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그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강간을 하려는 의사를 가질 수 있겠는가? 다만, 아하수에로 왕은 후원에서 하만을 극형에 처하기로 결심하고 여전히 분을 식히지 못한 채 잔치 자리로 돌아오던 중, 하만의 그 같은 모습을 보고는 하만에대한 극단적 혐오감을 표시하였던 것이다.
무리가 하만의 얼굴을 싸더라 - 고대 중근동 국가들에서는, 왕의 비빈이나 왕후에대한 타인의 접근을 엄격히 금지하는 법이 있었다(Baldwin). 따라서 왕이 어떤 사람을향하여 '왕후를 강간까지 하고자 하는가'라고 외친 것은, 곧 그사람에게 사형 선고를내린 것과 다름없었다. 그런데 죄인의 얼굴을 '싸는', 즉 '가리는' 행위는 정죄받은죄인은 더 이상 빛을 볼 자격이 없다는 생각에 따라 고대 국가들에서 이루어졌던 보편적인 관행이었던 것 같다(Rawlinson). 그리고 '무리'는 당시 왕을 보좌했던 내시들을가리킬 것이다(9절).

=====7:9
하르보나 - 1:10주석을 참조하라.
하만을 그 나무에 달라 하매 - 왕은 아직 하만을 어떻게 처형할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왕은 내시 하르보나의 보고에 따라 바로 이 같은 형벌을 하만에 내리기로 결정하였다. 결국 하만은 모르드개를 달기위하여 세운 높은 나무에 자신이 매달리게 되는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7:10
하만을 다니 왕의 노가 그치니라 - 형벌의 선고와 집행 사이에 어느 정도의 기간이흘렀는지에 대해서는 언급된 바가 없다. 그러나 왕의 진노의 정도를 보아 즉시로 형이집행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Huey). 하만의 운명은 어떤 면에서, '눈은 눈으로, 이는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갚는다고 하는 동해 보복(同害報復)의 원리에 따른 것이었다(출 21:24).

 

 

 

   하만의 몰락을 재촉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6:1-9)와 그의 몰락을 예견(6:10-14)
하는 내용을 언급한 전장(前章)에 이어지는 본장은 에스더가 하만의 음모(3:6;5:14)를
폭로함으로써 결국 하만이 처형 당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본장은 (1)에스더가 하만의 음모를 폭로하는 대목(1-7절)과, (2)왕의 진노로  하
만이 나무에 달리는 대목(8-10절)으로 구분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향하던 당신의 백성을 무자비하게 공격
했었던(신 25:18) 아말렉 족속을 멸절시킬 작장을 하셨었다(출 17;16; 민  24:20;  신
25:19).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시사(삿 3:15, 28-30)와 사울(삼상 14:48; 15;7-9),  그
리고 다웃(삼상 27:8, 9; 심하 8:11, 12) 등으로 하여금 그들을 진멸하려고 하셨지만,
바벧론 포로 시대 이후까지 그들의 세력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본장에 나타나는 하만
도 아말렉 족속의 후예로 기록되어 있다(3:1). 그런데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와 같은 하만을 아하수에로 왕을 통하여 본장에서 진멸하신 것이다.
   한편 그 당시의 상황은 중근동의 각 민족이 자신들의 주권을 향유하던 때와는 달리
민족이 민족을 군사적으로 공격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 다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군사력을 이용하여 아말렉 자손들을 진멸하는 일은 불가능하였다. 결국 하나
님께서는 그들이 페르시아 왕의 허락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도록 섭리하신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만이 유대인들을 진멸하려는 시도를 하다가 도리어  그가
죽게 하심으로써, 그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았음을 만인으로 하여금 알게  하
셨다.
   따라서 우리는 본장을 단순히 유대인들을 핍박하다 운이 없어 도리어 죽음을  당한
한 자연인(自然人)의 이야기를 다루는 부분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하
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시는 과정에서 그 확장을 막으려는  적그리스도
세력들을 진멸시키시는 작업의 하나로 보아야만 할 것이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는 당
신의 백성들을 보호하시어 그들로 하여금 당신을 더욱 신뢰케 하셨을 뿐만 아니라  당
신의 공의 또한 만족시키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심히 공의로우셔서 당신께서 한번 정하신 바는 반드시 이행하시는 분
이시다. 또한 악인들의 죄악을 결코 간과치 아니하신다. 물론 악인들이 한 순간  형통
하도록 내버려두신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악행에 대하여 결국 심판하시는 것
이다.
   우리는 이러한 본장을 통하여 (1)하나님께서는 오묘 막측한 섭리를 펼치시는  분이
라는 점에서 인간의 지혜는 그분의 지혜와 결코 비교될 수 없으며(롬 11:33; 엠 3:8),
(2)하나님 나라에 확장을 방해하는 대적들에게 하나님의 징벌의 손은 지금도 움직여지
고 있고(고전 15:24, 25), (3)하나님과 그 백성을 대적한 자에 대한 심판은  필연적임
(계 18:19, 10)을 깨닫게 된다.

                    1. 하만의 음모(7:1-7)
   본문은 하마의 아내와 친구들이 하만의 몰락을 예견한 후(6:13) 곧이어 발생한  사
건으로, 에스더가 지난번의 잔치(5:5-8) 때와는 달리 왕에게 하만의 음모를  폭로하는
사실을 다루고 있다. 이처럼 에스더가 금번의 잔치에서 하만의 음모를 폭로할 수 있었
던 것은, 자신의 폭로가 왕에게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 만큼  분위기가  조성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사실 아하수에로 왕은 에스더가 그녀 자신의  소청(訴請)  말하기를
거듭 연기하자 그녀의 소청이 무엇이든 반드시 들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2절). 이 사실을 깨달은 에스더는 자신이 하만의 음모를 폭로할 경우 왕이 반드시 자
신의 말을 믿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녀는 더 이상 하만의 음모  폭로를
뒤로 미룰 영우 실기(失機)하기 십상이라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한편 하만은 자신의 몰락을 어렴풋이 예감하면서도 벗어날 방도가 있을 것으로  보
았을 것이다. 사실 하만은 자신을 잔치에 두 차례씩이나 특별히 초대한 왕후가 유대인
이요 더 나아가 모르드개의 양녀(養女)라는 사실을 까마득히 몰랐었다.  그래서  그는
왕후 에스더를 다가올 위기에서 구원해줄 자신의 구원자로 여겼던  것이다.  하다못해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그 상황에서, 글가 자신을 특별히 그것도 두 차례씩이나 초청
한 왕후를 자신의 구원자로 여긴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따라서 하만은 근심과 소망
의 교차를 트끼면서 에스더가 배설한 잔치에 참석하였을 것이다.
   또한 에스더는 하만의 음모를 폭로할 때도 적절히 잡았지만, 폭로하는 방법도 지혜
롭게 잘 선택하였다. 그녀는 처음부터 자신이 속한 유다 민족을 구원해  달라고  하지
않고 먼저 자신의 생명 구원을 왕에게 간청하였다. 그런 다음 자신의 동족(同族)을 구
원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이는 에스더가 아직 분명히 밝히지 아니한 어떤 민족의 구원
이 곧 자신의 구원임을 왕에게 인식시키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아울러 그녀는  자신도
동일한 학살 대상이믈 밝힘으로써, 왕으로 하여금 그 민족을 죽이려고 하는 자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갖도록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에스더는 왕에게, 자신의 민족을 진멸
하는 일은 곧 왕에게 크나큰 손실을 입히는 것이랗고 진술함으로써, 왕이 극도로 분개
하도록 유도하였다.
   그 때문에 아하수에로 왕은 에스더가 입을 열기 전까지 과연 누가  자신의  아내를
죽이려고 했고 또한 손해를 입히려고 했는지를 심히 궁금해 하면서, 그  미지(未知)의
인물에 대해 적개심을 불태우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하만도, 에스더가 자신이 죽이려
고 했었던 유대인 인지를 몰랐었기 때문에, 그녀가 자신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고는 결
코 깨닫지 못하였을 것이다. 참으로 극도의 긴장된 순간에 왕과 하만  모두  에스더의
입에서 과연 어떤 이름이 지명될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긴장의 순간은 한 사람에게는 진노의 결과로, 다른 한 사람에게는  공포
의 결과로 표변(豹變)하였다. 사실 하만은 자신에게 다가올지도 모를 위기의 상황에서
자신을 구원해줄 자로 에스더를 꼽고 있었는데, 오히려 그 에스더가 자신을 원수로 갑
자기 지목하니 얼마나 놀랬고 또 두려웠겠는가! 반면에 왕은 와스디의 폐위 때처럼 혹
시 자신의 판단이 경솔하게 이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2:1) 후원(後苑)에서 마음
을 진정시켰으나 하만에 대한 진노의 입장은 바뀌지 않았다.
   물론 왕은 자신이 하만을 신임하여 유대니들을 죽이기로 조서까지 내린 이상, 자신
의 권위 손상을 막기 위하여 에스더의 고발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른  자
신의 현숙한 아내(1:12) 와스디를 간신들의 말 한마디(1;16-20)에 페위시키기로  결정
하지 않았던가! 따라서 아하수에로가 에스더의 고발을 믿지 않고 간신 하만을 계속 신
임했다고 해서, 그의 성품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마당에 그 누가 그를  욕할  것인
가? 또한 그의 잘잘못을 가리려고 하겠는가?
   그러나 하나님께가는 아하수에로 왕의 마음을 주관하시어, 에스더의 고발을 진실로
받아 들이도록 섭리하셨다. 그리고 자신이 총애하던 신하 하만에게  진노하였던  것이
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에스더을 유대인의 구원자로 부르신 후, 오직 믿음으로 왕께
나아가도록 그녀를 붙드셔서 본문에서와 같은 결과를 낳게 하셨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에스더를 도구로 삼아 당시의 뜻을 섭리 가운데 선하게 이루셨던 것이다.
   한편 에스더의 위와 같은 지혜는 갈채를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더욱 갈채를  받아
야 할 바는 그녀의 민족에 대한 사랑일 것이다. 이처럼 그녀는 하나님의 백성 곧 자신
의 민족을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담보하면서까지 막강한 권세를 쥐고 있었던
하만의 음모를 왕에게 고발할 수 있었다. 만일 그녀에게 민족에 대한  사랑이  없었다
면, 그녀는 자신의 왕후직에 만족해 하면서 민족의 위기에 대해서 무관심하였을  것이
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이 어찌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겠는가! 또한
이 어찌 신앙인들의 귀감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 같은  애족심
(愛族心)과 용기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본 단락을 통하여 (1)신자들은 믿음의 형제 자매와 혈연적
형제 자매 이상의 연대 의식을 소유해야 하며(마 12:50; 고전 12:25), (2)주님의 뜻에
따라 일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선한 결과가 보장되어 있다는 사실(요일 5:14), (3)하나
님께서는 이방나라의 왕일지라도 당신의 공의를 이루시기 위해 도구로  사용하신다(롬
1:4)는 교훈을 깨닫게 된다.

                    2. 처형되는 하만(7:8-10)
   본문은 하만의 계략을 알게 된 왕이 크게 진노하여 하만을 처형하는  장면을  담고
있는 부분이다. 특히 에스더레게 구명(救命)을 간청하다 처벌을 재촉했던 하만의 비참
함(8절)은 그가 처형된 방법에서도 드러나고 있듯이 악인이요 모사꾼의 최후가 어떤한
것인가를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본문에서도 6장에서와 같은(4-6, 10절) 희극적인 풍자가 사용되고 있다. 즉,  모르
드개를 달기 위하여 하만이 세워 놓은 나무에 도리어 하만이 매달리게 된다는  사실이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10절). 만일 보통의 경우라면, 하만은 나무에 달리는 방
식으로 처형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자신이 세워 놓은 나무에 자신이 달리는 일
도 결코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자신이 세워 놓은 나무에 매달리는
하만의 기이한 최후를 독자들에게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사실 왕을 모신 내시(1:10)도 한때는 하만에게 온갖 아첨을 했던 사람이었을  것이
다. 어쩌면 그 하르보나(9절)라는 내시는 하만과 밀착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지 모른
다. 실제로 모르드개를 높은 나무에 달아 죽이려는 모의(謀議)가 모사들 몇몇과  하만
사이에서만 이루어졌는데도 불구하고(5:10-14), 하르보나가 하만의 집에 높은  나무가
세워진 것과 그 나무에 모르드개를 달 계획이라는 것까지도 알았다는 사실은, 그가 하
만과 보통 관계가 결코 아니었음을 단적으로 증명해 준다. 따라서 그는 쉽사리 하만을
배신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최소한 하만의 문제에 대해서만은 침묵함으로써 중립을
지켜야만 할 사람이었으나 그렇게 하지를 못했다. 또한 그는 시류(時流)에 민감한  사
람이어서 모든 사태의 흐름이 하만에게 보다는 모르드개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
음을 진작 감지했었던 것 같다(6:13). 그러던 중 자신의 눈으로 모든 사태 추이를  확
이한 후에는 재빨리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여 하만을 배신하고 모르드개의 편에 선  것
이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내시 하르보나를 이가하셨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하만이 다른 모양으로 처형되도록 하실 수도 있으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섭리가 모든 사람들의 눈으로 확인될 수 있기를 바라셨다.  그래
서 하나님께서는 참수형(斬首刑)이 아닌 나무에 달아 죽이는 형벌을, 그것도 모르드개
를 죽이기 위해서 세웠던 나무에 하만 자신이 매달려 죽게 하셨던 것이다. 이  얼마나
하나님의 역사 개입 사실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장면인가! 이 같은 역전(逆轉)  드라마
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이러한 점에서 본문은 오직 하나님만이 역사의 주인되심을 확
연히 드러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본 단락을 통하여 (1)인간의 흥망 성쇠(興亡盛衰)는 철저하게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손에 달려 있으며(삼상 2:4-8), (2)세상의 권세는 결코 신뢰의  대상
이 될 수 없으며(겔 30:6; 단 4:31), (3)인생을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좌절과 허무만이
기다리고 있다(시 146:3; 미 7:5)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   우리 신자들은 하나님과 그 백성들을 대적하는  악
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징벌을 내리신다고 믿는다(잠 11:31). 그러나 현실적으로 볼 때,
악인들이 의인들보다 더 흥왕하는 경우가 많다(시 73:3-5). 바로 이와 같은 현실적 상
황의 모순은 많은 신실한 성도들을 실족시켜 왔다(시 73:3; 합 1:2-4).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것에 대해 보다 영적인 눈을 가질 필요가 있다. 즉,  육신의
눈으로는 알 수 없지만, 영적으로 보면 악인들은 하나님의 정죄 아래 있는  것이다(요
3:18). 따라서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필연적이다. 다만 그들이 언제  하나님의
징벌을 받게 되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또한 소돔과 고모라의 경우와 같이 어떤 사람들
은 현세에서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을 받아 비참하게 생(生)을 마치기도 한다.  일례로
하나님께서는 극도로 타락했던 봄베이 시민들을 베수비오 화산을 폭발시킴으로써 징벌
하신 경우도 있다.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개인적인 심판을 받은  사람도  역사적으로는
결코 적지 않음을 중요한 사실이다.
   비록 위에서와 같은 현세의 심판은 당하지 않더라도, 악인들은 사후(死後)의  두려운 징벌을 피할 수 없다(눅 16:23, 24). 이땅에서 징벌을 받지 않은 자는  사후에  더 큰 징벌을 받게 될 것이다(마 6:16).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을 모두 동일하게  징벌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죄악의 경중(輕重)에 따라 엄중히 징벌하시는 것이다(눅 19:26).
   이처럼 악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은 필연적으므로 신자들은 악인들이 이 세상에서 형통해도 결코 낙심치 말아야 한다. 다만 그들이 하나님의 징벌을 피할 수  없다는 데 대하여 안타까워 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그러한 징벌의 대상이 되지 않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혹시 실족하여 믿음을  버림으로써  그 두려운 형벌의 자리에 떨어지지 않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벧후 2:2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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