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에스더 0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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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그리고'의 의미인 접속사 '와우'(* )가 있다.이를 근거로 혹자는 본서가 이전에 일어났던 어떤 특정한 사건과 문장상의 연관성을가지고 시작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와에히'(* )는 종종 한 책의시작을 표하는 단순한 도입구로서 나타난다(수 1:1; 삿 1:1; 룻 1:1; 삼상1:1; 삼하 1:1; 겔 1:1; 욘 1:1). 따라서 여기서도 단순한 도입구로 이해함이 타당하다(Edwin Yamauchi, Keil, Schultz).
아하수에로 왕 - 에스라 4:6에서도 언급되는 B.C. 485-464년까지 통치했던 페르시아 왕이었다. 그는 다리오와 고레스의 딸 아토사(Atossa)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부친 다리오가 왕이 된 후 낳은 아들중에서는 맏이었다. 그는 크세르크세스(Xerxes)와 동일 인물이며(Josephus), 단 9: 1의 아하수에로와는 별개의 인물이다. 그에 관한 보다 자세한 사항은 본 단락 주제 강해, '아하수에로에 관하여'를 참조하라.
인도로 구스까지 - 여기의 '인도'는 인더스 강 서쪽 지역, 즉 오늘의 파키스탄 지역을 가리키며 인도 반도 지역을 뜻하지는 않는다(Baldwin). 이 지역은 아하수에로왕의 부친 다리오에 의해서 정복되었으나 아하수에로 당대에도 그곳 거민들과의 전쟁은 완전히 종식되지 않았었다(Herodotus vii, 65, 70). 한편, '구스'는 오늘날의 '이디오피아' 지역 곧 나일 강상류 지역을 가리킨다. 이 지역은 캄비세스 왕에 의해서정복되어 다리오와 아하수에로 시대에이르러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로 정식 편입되었다(Herodotus vii, 9, 65, 69). 아무튼 '인도'는 페르시아 영토의 가장 동쪽, '구스'는 가장 서쪽이었다.
일백 이십 칠 도(道) - 일부 자유주의 학자들은 당시 페르시아의 행정 구역이 20구역으로 나누어졌었다고 말한 헤로도투스의 언급에 근거하여 이 '일백 이십 칠도'는그 신빙성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무리한 주장이다. 페르시아 제국은 기본적으로 20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뉘어져 소위 '왕의 대신'들에 의해 통치되었고(3 :12), 보다 세부적으로는 127도로 구분되어 각 도의 '방백'들에 의해 다스려졌다고 이해된다. 물론 이렇게 127개 도로 세분화시킨 데에는 세금 징수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목적도 포함될 것이다(G. Arc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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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산 궁 - '수산'은 고대 엘람 지역에 위치했던 페르시아의 수도였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페르시아 왕들은 이 '수산'에서는 봄과 가을에만 통치를 하였을 뿐이고, 겨을에는 바벨론에서 여름에는 메대의 악메다에서 정무(政務)를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산'은 (1) 왕이 일년 중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이었으며, (2) 행정부 대부분의기관들이 위치했었으며, (3) 왕의보호를 목적으로 철저히 요새화되었다(느헤미야 1장)첫 단락 주제 강해, '수산 궁에 대하여' 참조)는점 등에서 단연 최고의 수도였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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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있은 지 삼 년 - 아하수에로 왕의즉위는 B.C. 458년 12월 23일에 있었다. 그러나 공식적 즉위 년도는 즉위 후 최초로 맞이한 정월이 속한 그 해로 간주된다는 점에서 즉위 '삼년'은 B.C. 482년이다(Paton). 그때는 애굽에서 반란이 일고 있었던 시점이기도 하다.
모든 방백과 신복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니 - 헤로도투스(Herodotus)에 의하면, 아하수에로 왕은 그리이스 정복을 위해 즉위한 이후부터 2년 동안 철저한 계획에 따라무력을 증강해갔다고 한다. 본절의 잔치는 아마도 전쟁에 돌입하기 앞서 최후 점검을하기 위한 목적에서 열린 듯하다(Baldwin, Huey, Keil, Schultz). 한편, 고대 사가인크테시아스(Ctesias)에 따르면, 페르시아 왕들은 보통 15,000명 정도가 참석할 수 있는 정도의 잔치를 베풀었다고 한다. 여기서 '잔치'(* , 미쉬테)는 '마시다'를 뜻하는 동사 '쉬타'(* )에서 온 단어로서, 다량의 술이 제공되는 큰 '연회'(宴會)를 가리킨다(Baldwin). 바사와 메대의 장수...각 도의 귀족...방백 - '바사와 메대'라는 독특한 표현은페르시아 제국 전체를 가리키는 술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바사'와 '메대'는페르시아 제국을 구성하던 가장 중요한 두 민족 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메대'는 '바사'에 의해 정복되었었다. 하지만 첫째, 두 민족은 동일하게 인구어족(印歐語族)에속하여 언어나 관습 및 종교 등이 서로 거의 같았으며 둘째, '바사'는 '제대'의 정치역사적 전통을 계승하였기 때문에(본 단락 주제 강해, '메대와 페르시아의 관계'참조), 그 두 민족은 거의 하나라고 할 만했다. 한편, '장수'와 '귀족' 그리고 '방백'은 앞의 '방백'과 '신복'이 구체적으로 어떤 계층의 사람들인지를 보여 준다. 그중'장수'(* , 헤일)는 2천 명의 창을 가진 병사, 2천의 기병(騎丙). 그리고 1만의보병 등 총 1만 4천의 병력을 거느렸던 지휘관을 뜻한다(Keil1, Paton, Baldwin). 그리고 '귀족'(* , 파르템)은 문자적으로는 '으뜸되는 사람'의 뜻을 갖는 페르시아어원(語源)의 단어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는 (1) 페르시아 전역을 스물로 나눈행정 구역을 맡아다스렸던 총독(Paton), (2) 왕의 곁에서 왕에게 필요한 조언을 하는모사(Baldwin) 등으로 이해되고 있다. 하지만 첫째, 페르시아 왕들에게는 실제로 조언을 해주던 모사들이 있었다는 성경의 언급이 있으며(스 7:14) 둘째, 이것을 뒷받침이나 하려는 듯 왕의 정무실(政務室) 계단에 모사들이 앉아 있는 모습을 양각(陽刻)한 고고학적 증거가 발견된 사실, 그리고 세째, 제국을 스물로나눈 행정 구역을 다스렸던 총독(satrap)은 광의적으로 이해할 때 '방백'에 포함될 수 있다는 사실 등으로볼 때, 위의 두 견해 중 후자가 보다더 타당성이 있다. 한편, '방백'(* , 사르)은 127개로 나눈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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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백 팔십 일 동안 - 모든 '장수'나 '귀족' 그리고 '방백'이 이 기간 동안 줄곧 잔치에 참석하고 있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제국의 각처를 다스리던 '방백'이나 '장수'는 그렇게 오랫동안 자신들의 임지(任地)를 떠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당시는 제국정부에 대한 피정복민들의 반란이 완전히 진압되지 않았던상황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우리는 '방백' 등이 번갈아 가면서 그잔치에 참여했었다고 본다.
그 영화로운 나라의 부함 - 이와 같은 페르시아 제국의 경제적 강성은 여러 고대저술가들에 의하여 언급된 바있다. 그중 헤로도투스는 페르시아 왕이 매년금 14,560달란트를 공물로 받아서 그것으로 커다란 금궤를 만들어 창고에 보관하였다고 했다.또한 아하수에로 왕은 금과 은으로 씌워진 장막, 금으로 된 긴 의자, 금으로 된 주발과 잔, 그리고 금주전자 등을 스파르타로부터 약탈하여 갖고 있었다고 하였다. 뿐만아니라 아이스퀼루스(Aeschylus)도 페르시아 왕궁의 방들이 금으로 씌워졌다고 말하였다(Pa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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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이 다하매 - 왕이 '방백'과 '신복'을 위하여 베풀었던 180일간의 잔치(3,4절)가 끝난 것을 가리킨다. 왕이...칠 일 동안 잔치를 베풀새 - 이것은 180일간의 잔치와는 그 성격상 매우 다르다. 즉, 180일간의 잔치는 중요한 신료들을 대상으로 한 정책 회의적 성격까지 내포한 것이었으나, 여기의 이 잔치는 서민까지도 그 대상으로 삼았던 순수한 유흥적(遊興的)성격이었던 것이다.
대소 인민 - 신분 고하를 막론한 모든 남자들을 가리킨다(9절).
왕궁 후원뜰 - 페르시아 왕궁은 요새화된 성벽으로 둘러싸인 정원의 중간에 자리잡고 있었다(Paton). 그리고 '뜰'에 해당되는 공간의 넓이는 약6천 6백평방 미터 정도였었다. 따라서 이 정도 넓이의 '후원 뜰'은 대단히 많은 시민들을 위한 잔치를 갖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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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색, 녹색, 청색 휘장 - 이러한 '휘장'은 잔치 장소를 화려하게 장식하기 위한 것이기도하지만, 따가운 햇살을 막으려는 목적 때문에 설치되었을 것이다. 180일간의잔치(4절)가 초봄에 시작됐다고 가정할 경우, 시민들을 위한 7일간의 잔치가 열린 때는 늦여름으로서 여전히 햇살이 따가왔을 것이다. 한편, '백색'과 '청색'은 페르시아의 왕들이 특별히 선호하던 제왕색(帝王色)이었다. 또한 '휘장'(* , 카르파스)은 헬라어 '카르파소스'(* )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무명천을 가리킨다(Schultz). 자색가는 베줄로...메고 - 상당히 긴 휘장을 땅에까지 늘어뜨려 고정시키기 위한방법이었다.
대리석기둥 - 뜰 중간에 위치했던 궁전의 옆에 별도로 세워진 기둥을 가리킨다.그런데 '대리석'(* , 쉐쉬)은 석회석과 그것의 변성암(變成岩)인 대리석 모두를가리키는 단어이다. 수산의 폐허를 탐사했던 고고학자들은 페르시아 왕궁의 기둥들이검푸른 석회석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여기의 '대리석'은 차라리'석회석'으로 번역함이 타당할 것이다. 한편, 이'기둥'은 그 꼭대기에 한 사람이 족히 누울 수있을 만큼 굵긁었다고 한다(Paton).
금과 은으로 만든 걸상 - 여기의 '걸상'은 편안히 기대어 앉을수 있었던 긴 의자이다(Rawlinson, 7:8). 이 의자의 골조는 그리이스 등에서 가져온 귀한 금속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표면은 금과 은으로 덮혀졌던 것 같다.
화반석, 백석, 운모석, 흑석을 깐 땅 - '화반석'(* , 바하트)은 칠십인역에서 '가짜 에머랄드'라고 번역했다는 점에서 '에머랄드'처럼 생긴 녹색 돌, 즉 공작석혹은 사문암을 가리키는듯하다(Keil). 그리고 '백석'(* , 쉐쉬)은 앞에서 '대리석'으로 번역된 단어이다. '운모석'(* , 다르)은 칠십인역에서 '진주같은 돌 '이라고 번역했다는 점에서, 진주조개의 껍질 혹은 진주 비슷한 광택과 불규칙한 균열이있는 진주암(眞珠岩)을 가리키는 듯하다. 마지막으로 '흑석'(* ,소헤레트)은방패같은 무늬가 있는 검은 돌을 뜻할 것이다(Ke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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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잔 - 유대 랍비들의 구약 성경 주석인 미드라쉬(Midrash)는 이 '금잔'을 금처럼비싼수정으로 된 '잔'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렇게 확정지을 만한 단서는 희박하다.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이 잔들은 결국 그리이스 군대에게 약탈되었다고 한다.
잔의 식양이 각기 다르고 - 잔 하나 하나가 개별적으로 디자인되어 만들어졌으며,이에 따라 무늬나 모양 등에서 서로 달랐다는 뜻이다(Baldwin). 아무튼 이것은 아하수에로 왕의 재력(財力)을 여실히 증명해주는 문구라 하겠다. 왕의 풍부한 대로...한이 없으며 - 문자적으로는 '왕의 손처럼 풍부한'의 뜻으로서왕의 능력과 풍부를 과시하기에 합당한 만큼의 많은 양을 가리킨다(Schultz, 2:18). 어주(* , 예인 말코트). 문자적으로는 '나라의 포도주'의 뜻이다. 추측컨대 이는 왕 자신이 마시기 위해 저장해 놓은 칼리본(Chalybon) 산(産)의귀한 술이었을 것이다(Schultz, Pa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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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가 있어...억지로 하지 않게 하니 - 본절을 해석하는 데에는 다소 어려움이있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규모'에 따른다고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억지로 하지 않게' 했다고 함로써 상호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규모'를 어떤 엄격한 법령으로서가 아니라 바사 왕의 일시적인 명령으로 이해하고 그 명령의 내용이 바로 각자의 자유 재량에 맡기도록 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해석이 보다원만해진다. 즉, 잔치석상에 참여한 사람들은 많이 마시도록 강요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많이 마셔도 제재를 받지 않았다는 뜻이다(Huey). 한편, 당시 페르시아 사람들은 대단히 큰 술잔에 술을 가득 채운 뒤 단숨에 들이키는 음주 습관을 가지고있었다. 만일 술 손님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그 술 자리에서 일어설 수 없었으며, 그 손님은 술 잔에 술을 다시 가득 채운 뒤,다시 단숨에 마시는 시도를 해야만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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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후 와스디 - 아하수에로 왕의 여러아내 중 세속사에서 밝혀진 사람은 일곱 모사중의 한 사람이었던 오타네스(Otanes)의 딸 아메스트리스(Amestris)이다. 대개의 성경 학자들은 여기의 이 '와스디'가 바로 그 '아메스트리스'였을 것으로 생각한다.추측건대 이 '와스디'라는 호칭은 본명이 아니라 다만 그녀의 성품을 나타내주기 위해 사용했던 별칭이었을 것이다. 분명치는 않지만, '와스디'는 '달콤하다' 혹은 '사랑을받는' 이란뜻이다(Rawlinson, Baldwin).
아하수에로 왕궁 - 수산 궁의 남쪽에 있던 왕후의 처소를 가리키는 것 같다(Rawlinson).
부녀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니라 - 페르시아의 관습으로 여자들이 남자들과 함께잔치석상에 참여하는것이 반드시 금지되었던 것은 아니다. 에스더가 왕 및 하만 등과 함께 잔치를 베풀었다는 점은 이 사실을 넉넉히 증명해줄 만하다(5:2-8 ;7:1-4). 와스디가 이처럼 남자들과 별도로 잔치를 배설한 까닭은 (1) 남자들의 잔치분위기는 여성들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며, (2) 남자들의 잔치장소인 '후원 뜰'(5절)은여자들까지 참석하기엔 장소가 협소하였기 때문일 것이다(Baldwin, Pa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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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칠 일에 왕이 주흥이 일어나서 - '제칠 일'은 백성들을 위해 베푼 잔치의 마지막 날이었다(5절). 한편, '주흥이 일어나서'는 문자적으로 '술로 인해 기분이 좋았다'는 뜻이다. 곧 이것은 술을 지나치게 마셔 자신의 온전한 정신을 상실한 상태, 혹은 황홀한 상태에 돌입했었음을 시사한다(삿 16:25 ; 삼상 25 :36 ;왕상 8 :66 ;잠15: 15).
어전 내시 - '내시'(* ,사리스)는 반드시 '거세된 환관'만을 의미치 않는다. 때로는 이 단어가 정부의 고위 관리를 가리키기도 하는 것이다(창 37:36). 그러나 여기서의 '내시'는 왕후의 처소에도 출입할 수 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짐작할때, '거세된 환관'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그들은 고레스 왕 시절이래 결코 적잖은 영향력을 소유했었다(Rawlinson).
무후만 - '위대한 훔(Hum)에게 속하는'의 뜻을 갖는 페르시아 이름 '메훔반'(Meh-hum-van)을 히브리어로 음역한 것으로 여겨진다(Paton).
비스다 - '거세한'의 뜻이 있는 페르시아 이름 '비스타'(Bista)의 히브리어 음역인듯하다(Paton).
하르보나 - '화려' 혹은 '광채'를 뜻하는 페르시아 이름 '우바르바우나'(Uvarbauna의 음역일것이다(Paton).
빅다 - '신의 선물'을 뜻하는 페르시아 이름 '바가다타'(Bagadata)의 음역이다(Paton).
아박다 - '선생'의 의미인 페르시아 이름 '아바기타'(Abagita)의 음역이다(Paton).
세달 - '승리자'의 뜻인 페르시아 이름 '사타르'의 음역이다(Paton).
가르가스 - '욕심장이'의 뜻인 페르시아 이름 '카르카사'의 음역이다(Paton).
일곱사람 - 이처럼 아하수에로 왕이 '일곱 사람'을 와스디 왕비에게 보낸 것은,'일곱'이라는 숫자가 중근동 세계에서 '완전한 수' 혹은 '신성한 수'로 인식되었다는점에 근거하여, 자신의 와스디에 대한 명령(11절)이 반드시 이행되어야한다는 단호한취지를 '와스디'에게 암시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1:11
왕후의 면류관 - 큼직한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끝이 뾰족한 것이었다고 한다(Rawinson, Keil) 그 아리따움을...보이게 하라 - 아하수에로 왕은 자신의 아름다운 아내를 모든이에게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탁월성을 과시하려는 욕망을 가졌던 것 같다. 그러나 이 같은 명령은 백성들에게 훌륭한 도덕적 귀감이 되어야만 했던 왕의 신분에는 걸맞지 않았다. 일찍이 루디아 왕 칸타울레스는 자신의 아내의 미모를 과시하려는 분별없는 욕망으로 인하여 마침내 왕좌와 생명까지도 상실하는 비참한 결과를 맞이했었다(Rawlinson). 어떤 유대 문헌은 당시에 아하수에로 왕이 와스디를 면류관만 쓰고 전라(全裸)로 나오게 했다고 해석하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

=====1:12
왕후 와스디가...싫어하니 - '와스디'의 이 같은 반응은 다음과 같은 이유 중의 하나에따라 나타난 결과일 것이다. 즉, (1) '와스디'가 낯선 사람에게는 아내의 얼굴을보이지 않아야만 한다는 페르시아 관습을 염두에 둔 때문에(Josephus), (2) 와스디가술취한 손님들 앞에서 왕후로서의 위엄을 손상당할까 염려한 때문에(Keil1,Rawlinson, Schultz), (3) '와스디'가 당시외모에 어떤 흠결이 있었기 때문에(유대 랍비들). (4)'와스디'가 왕으로부터 벌거벗고 나오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Midrash,Targum)등이다. 그러나 첫째, 페르시아의 관습이 여자가 남자들의 잔치 자리에 참여하는 것을 반드시 금지하지는 않았다는 사실(5:1-8 ;7:1-4) 둘째, 만일 '와스디'에게 외모상의 어떤 흠결이있었다면 왕이 결코부르지 않았을 것이라는사실 네째, 왕비의 나체를 신하들에게 보이려는 시도 는 역사상의 그 어떤 군왕(君王)에게서도 없었다는 사실 넷째, 고대 페르시아인들은 보통 술주정이 심했다는사실(Herodotus)등으로 미루어짐작할 때 위의 네 가지 이유 중 (2)의 것이 가장타당한 듯하다.
왕이 진노하여 - 이러한 반응은 많은 신하와 백성들 앞에서 자신이 직접 하달한 명령이 먹혀들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게 되었던 때문이었다.
중심이 불붙는듯하더라 - 이는 문자적으로는 '그의 속에서 불이탔다'의 뜻으로서,그의 '진노'가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설명적 문구이다=====1:13
본절의 내용은 일단 잔치가 끝난 뒤의상황이다 - 아하수에로 왕이와스디의 (11절,12절)로 진노를 한 것은 그 잔치의 마지막 날의일이었다(10절). 그는 잔치가 끝난다음 날 온전한 정신 가운데서 자신의 명령에 불복한 와스디의 징계 문제를 처리하려고 하였음이 분명하다.
왕이 사례를 아는 박사들에게 묻되 - '박사들'에게 자문을 구하던 일은 아하수에로왕의 습관(Herodotus, vii, 8, 48, 234; viii, 101) 이기도 했지만, 그는 이같이 함으로써 자신이 와스디에게 단순히 감정적 차원에서 보복을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남기려고 했던 것 같다. 한편, '사례를아는'(* , 요드예이 하이팀)은문자적으로는 '시대를 아는'의 따뜻이며 구체적로는 '규례와 법률을 아는'이라는 말로연이어 설명하고 있다. '박사들'(* ,요드예이 하이팀)은 문자적으로 '지혜로운 자들'의 뜻이다.
묻는 전례가 있는데 - 모사로부터 자문을 얻는 것이 반드시 아하수에로 왕만의 습관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즉, 페르시아의 모든 왕들은 모사들에게 자문을 구하는 과정을 거쳐서 자신들의 정책을 현실 정치로 펼쳐나갔던 것이다.

=====1:14
왕에게 가까이 하여 - 이것은 왕이 측근에 의하여 암살당하는 일이 빈번했던 고대국가들의 모습을 감안해 본다면, (1) 왕으로부터 특별한 신임을 받은 것, (2) 왕으로부터 특별한 지위나 권한을 부여받은 것 등을 의미한다. 이같은 점을 입증이나 해주듯이 왕으로부터 특별한 신임을 받은자는 왕궁 출입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침실 출입까지도 허용되었다고 증언하고있다.
왕의 기색을 살피며 - '기색을 살피며'는 문자적으로 '얼굴을 보며'의 뜻으로서 앞의 '가까이 하여'처럼 모사들이 왕과 얼마나 친밀한 관계에 있었는지를 보여주는(삼하 14: 24; 마 18:10) 문구이다(Schultz).
나라 첫 자리에 앉은 - 이것은 모사 곧 박사의 신분적 위치가 페르시아의 신하들중 최고였음을 시사한다. 물론 이는 세사람씩은 왕의 양편에, 그리고 한 사람은 왕의앞에 서는 등 실제로 높은 곳에 위치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Paton).
바사와 메대의 일곱방백 - '바사와 메대'에 대해서는 3절 주석을 참조하라. 그리고 '일곱'이라는 숫자에 대해서는 10절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방백'(* , 사르)은 높은 직위의 소유자들에게 두루 적용될 수있는 꽤 일반적 의미의 단어(3,11절)이어서 그문맥에 맞게 다양하게 이해될 수 있다. 여기서는 이 단어를 '장관'의 의미로 이해하면 보다 적절할것이다(대상 27:3 ; 대하 26:11 ; 렘 51:57).
가르스나 - '검은'의 뜻인 페르시아 이름 '케레스나'(Keresna)나 '호리호리한 사람'의 뜻인 '카라스나'(Karasnas)의 히브리어 음역으로 볼 수있다.
세달 - '별'을 뜻하는 페르시아 이름 '시타르'(Sitar) 혹은 '주'(主)를 뜻하는'크샤드라'(Kshathra)의 음역일 것이다. 10절의 '세달'(* )과 본절의 '세달'(* )은 전혀 다르다.
아드마다 - '정복되지 않은'을 뜻하는 페르시아 이름 '아드마타'(Admata)의 음역이다.
다시스 - '탐욕스런'을 뜻하는 페르시아 이름 '타르슈쉬'(Tarshush)의 음역이다.
메레스 - '시련'을 뜻하는 페르시아 이름 '마르사'(Marsa)의 음역이다.
마르스나 - '기억하고 있는 사람'의 뜻인 페르시아 이름 '마리드나'(Marithna)의음역이다.
므무간 - '구출된'을 뜻하는 페르시아 이름 '비무크나'(Vimukhna)혹은 '구름'을뜻하는 '무무카나'(Mumucana)의 음역이다.

=====1:15
본절에서 아하수에로 왕은 이처럼 자신을 1인칭이 아닌 3인칭으로 지칭함으로써,와스디에 대한 법적용을이 보다 엄격해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규례대로 하면 어떻게 처치할꼬 - 문자적으로는 '규례대로라면...에게 무일이 있을꼬'의 뜻(Rawlinson)이다.

=====1:16
므무간이...대답하여 가로되 - 왕이 와스디 처리와 관련한 자문을 구하자, 일곱 모사들은 서로 협의를 한 후 그 대변인격인 '므무간'이 그 협의 사항을 왕에게 품의(稟議)하고 있는것이다(Keil). 그런데 유대 랍비들의 주석서인 미드라쉬(Midrash)는 그가 서열상 가장 낮았기때문에 왕비 징계라는 미묘한 사항을 왕에게 고(告)하는 책임을떠맡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입증 자료는 없다.
와스디가 왕에게만 잘못할 뿐 아니라 - '와스디'의 왕에 대한 '잘못'은 왕의 엄명을 거역함으로써 왕의 위신을 여지없이 실추시켰다는 데 있었다(12절).

=====1:17,18
와스디의 왕명 거역이 어떻게해서 방백들이나 일반 백성에게도 그 여파를 미치는지를 말하는고 있다.
남편을 멸시할 것인즉 - '멸시할 것'(* , 레하브조트)은 '업신여기다' 혹은 '비웃다'란 뜻의 동사 '바자'(* )의 사역형 부정사(不定詞)로서, (1)마땅히 중요시해야 할 가치(價値)를 비천히 여기거나(창 25:34; 겔 22:8), (2) 반드시 따라야 할명령을 거역하는 것(민 15:31 ; 삼하 12: 9) 등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후자의 뜻일 것이다.
오늘이라도 - 이것은 (1) 와스디의 왕명 거역 사실이 신속히 알려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 (2) 따라서 와스디에 대한 징계가 신속히 이루어져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등을 아울러 시사한다(Paton).
멸시와 분노가 많이 일어나리이다 - 문자적으로는 '멸시와 분노가 꿀이지 않을 것입니다'의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멸시'는 방백의 명령에 대한 귀부인들의 반응 곧불복종을, '분노'는 귀부인들의 불복종에 대한 방백의 반응을 '가리킨다. 한편, 본절의 '분노'(* , 카체프)는, 와스디의 명령 불복종에 대한 왕의 반응을 표현하는 데사용한 단어 '진노하여'(* , 카차프)와 동족어(同族語)이다(12절).

=====1:19
왕이...선히 여기실진대 - 신하들이 왕에게 어떤 공식적인 제안을 하기에 앞서 사용하는 상투적인 술어이다(Paton, 3:9 ; 5:4, 8 ; 7:3 ; 8:5 ; 느 2:5). 와스디로...왕 앞에 오지못하게 - 왕후의 위(位)를 폐하여 일개 서민(庶民)으로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 특히 여기서 모사들의 협의 사항(16절 주석 참조)을 왕에게 고하면서 '와스디' 앞에 지금까지 게속 사용하였던 '왕후'라는 직위명(職位名)을 고의로빠뜨림으로써, 그녀에 대한 폐서인(廢庶人)조치가 필연적임을 암시한다.
조서를 내리되 - 문자적으로는 '왕국의 명령'의 뜻이다. 이것은 왕 자신의 사사로운 명령과 대조된다. 이처럼 왕이 일반 명령이 아닌 문서화된 공식적 명령을 내려야된다고 한 까닭은 공개석상에서 왕명을 거역한 와스디를 공개적으로 징계하며, 그렇게함으로써 부녀자들로 하여금 남편에 대한 불복종을 하지 못하도록 쐐기를 박을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Rawlinson).
법률 중에 기록하여 번역함이 없게하고 - 페르시아 제국의 전통(傳統) 중 하나는일단 왕의 도장이 찍혀 법률화(法律化)된 사항은 절대 그 효력이 취소되지 않았던 것이다(단6:8,9). 이처럼 왕실 내부의 문제 해결을 위하여 결코'번역'될 수 없는 법률을 만들기까지 한 것은, 와스디로 하여금 아하수에로 왕으로부터 총애를 받을 기회를 다시는 갖지 못하게 하고 그렇게함으로써 그녀가 권세를 회복하여 자신을 폐서인시킨 데 일조(一助)를 했던 사람들에게 복수하는 일이 없도록하기 위함이었다(Keil).
왕후의 위를 저보다 나은 사람에게 주소서 - '나은'(* , 토바)은 '더 아름다은' 혹은 '더 덕스러운'이란 뜻이며. '사람'(* , 레우타)은 원래 '동료' 혹은 '친구'의 의미로서 거의 비슷한 범주에 속하는 어떤 사람을 광의적으로 가리키는 단어이다(Paton, 삼상 15:28). 따라서 이것은 반드시 대궐 안에 이미 살고 있는 어떤 사람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1:20
조서(* , 피트감) - 19절의 '조서'와는 다른 단어지만, 동일한 내용임이분명하다. '피트가마'라고 하는 고대 페르시아어에서 유래했다(Huey).
이 광대한 전국 - 여기서 '전국'앞에 '광대한'이라는 형용사를 삽입시킨 까닭은(1)왕의 허영심을 부추겨서 그의 비위릍 맞추려는것(Keil), (2) 단순한 구두(口頭)명령이아닌 반드시 널리 고지(告知)되어져야 하는 문서화된 조서가 회람되어야 될 필요성을강력히 시사하려는 것(Rawlinson) 등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국가의 기강을 잡으려는 목적에 따라 반포되는 왕의 명령은 제국민 누구에게나 고지되어야 하지만, 그명령이 조서의 성격을 띠지 않으면 듣지 못할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 뻔하다는 점에서, 위의 두 견해 중 후자가 보다 타당성이있다.
귀천을 무론하고 - 문자적으로 '큰 자로부터 작은 자까지'의 뜻으로 5절의 '대소인민'과 동일한 문구이다.

=====1:21
왕과 방백들이...선히 여긴지라 - 여기의 '선히 여긴지라'(* , 이타브)라는동사는 3인칭 단수이고, 주어 '왕과 방백들'은 3인칭복수이므로 문법적 모순인 듯 보인다. 그러나 주어가 이같이 복수일 경우라도 동사의 적극적 주체자가 한 사람일 때는 3인칭 단수의 동사를사용할 수 있다. 즉, 여기서는 왕이 '므무간'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주체자로서 '선히여긴지라'라는 동사의 주어인 셈이다. 반면 '방백들'은 '므무간'의 그 같은 제안의 입안(立案)과정에 함께 참여했던 사람들이다.

=====1:22
각 백성의 문자와 방언 - 여기서 '문자'와 '방언'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당시 페르시아 제국 내에는 수많은 언어들이 사용되고 있었다. 페르시아인들은 주로 고페르시아어(Old Persian)나 아람어를 사용했고 바빌로니아 지역에서는 아람어와 앗시리아어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인도에서는 산스크리트어를 위시한 여러 동족어들이,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 및 팔레스틴 등지에서는 주로 아람어가 통용되었다(Paton). 한편,페르시아의 언어 정책에 대해서는 에스라 4장 둘째 단락 주제 강해, '페르시아 제국의 언어정책'을 참조하라.
모든 도에 조서틀 내려 - 본절은 페르시아 제국이 당시 매우 조직적인 우편제도를갖추고 있었기 때문에(Xenophon, Paton). 우편 업무가 신속히 이루어질 수 있었음을 시사하는 문구이다.
남편으로 그 집을 주관하게하고 - 이것이 '조서'의 주요한 내용 자체는 아닐것이다. 다만 '조서'의 목적 혹은 그 결과에 해당될 것이다. 즉, 백성들은 왕명을 거역한 왕비를 폐서인(廢庶人)시켰다는 조서의 내용을 살펴봄으로써, 한 가정내에서 남편에 대한 아내의 명령불복종은 결코 용납될 수 없음을 새삼 깨닫게되고, 또한 그 결과로 한 가정 내에서 남편의 위치는 더욱 높아지게 되는 것이다. 자기 민족의 방언대로 말하게 하라. 이는 한 가정 내에서 남편의 아내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시켜 주기 위한 명령이다. 즉,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두남녀가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었을 경우, 아내를 포함하여 그 가정 전체는 남편의 언어을 사용해야만 한다는 명령이다. 이렇게 할 경우, 그 가정 내에서의 남편의 위치는 보다 확고해질수 있었을 것이다. 어떻든 페르시아는 수많은민족들로 구성되었고, 또한 민족간의 교류도 활발하였기 때문에 부부간에 언어가 달랐던 경우도 결코 적지 않았을 것이다(느 13:23, 24).

 

 

 

   역사적인 내용을 단편 소설의 형식으로 담고 있는 본서는 유다 민족이 그 당시  처
한 역경을 어떠헤 극복해 나아갔는지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본서
에는 그 역경을 통하여 선택한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암시적으로
강하게 표현되어 있다. 즉, 본서 저자는 본서를 통하여 페르시아에 거주하고 있던  당
시의 유다인들에게 그들의 민족적인 정체성과 함께 변함없는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
도하심을 심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제가 점진적으로 소설의 전개 방식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 본서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1)전반부(1-4장)는 유다 민족에게 다가오는 위협과 함께 이  세상
의 모든 역사는 여호와께서 섭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암시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
리고 (2)위협의 극적인 해결과 함께 이어지는 후반부(5-10장)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으
로 인한 유다 민족의 승리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와 같은 본서의 구성 속에서 본
장은 전반부(1-4장) 가운데에서도 그 서막에 해당되는 대목으로 페르시아의 왕궁에 대
한 소개와 아하수에로 왕의 연회를 서술하고 있는 전반부(1-8절)와, 와스디 왕후의 거
절과 폐위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후반부(9-22절)로 구성되어 있다.이처럼 본서 저자는
본장을 '사건 발단의  개요 소개-사건의 도입' 형식으로 기술함으로써 앞으로  이어질
상황에 대해 기본적 이해 자료를 제공한다.
   이러한 본장의 전반부에서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은 페르시아 왕궁에 대해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당시 페르시아가 가졌던 권력과 부(富)를 감지할  수
있게 해주는 것으로서 그 당시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섭리하셨다는 점을  암
시해준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페르시아의 상황에 대한 이 같은 묘사는 점차 유다인들
이 처하게될 위험의 심각성을 전해 주려는 의도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막강한 부와 권력을 가지고 이스라엘 민족을 탄압하게 되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은 멸절당할 수밖에 없는 위기에 처해지기 때문이다. 또한 계속하여 이어지는  뒷
부분은 이 장의 핵심적인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장차 닥쳐올 유다 민족에 대
한 위협을 승리하는 결말로 바꾸어 놓으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뜻밖의  사건을  통하여
작용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지난 오랜 세월 동안 끊없이 당신의 백성들을 지켜오셨다. 그런데 이
러한 보호의 섭리는 주로 팔레스틴 지역 안에서 펼쳐졌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러한 역사를 애굽 땅에서도 전개하셨다. 즉, 하나님께서는 애굽 왕의  압제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시기 위해 당신의 사자를 준비하셔서(출2;1-10)
그를 지도자로 삼아 약속의 당 가나안으로 그들을 이끄셨던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하
나님의 섭리는 그로부터 약 천 년이 지난 페르시아 땅에서도 진행된다. 즉,  스룹바벧
을 심으로 한 바벧론으로부터의 1차 귀환 이후 성전 재건의 목표 아래 유다  땅에서는
어느 정도 안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바벧론에 남아있던 유다 백성들은 대학살을  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유다 민족의 구원을 철저하게 계획하시고 이끄
신다는 점이다. 즉, 아하수에로 왕의 권력이나 와스디 왕후의 폐위 등이 하나님의  섭
리 안에서 유다 민족의 구원을 위한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한편, 본장에서는 하나님과 관련시킬 수 있는 부분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왜냐하
면 본장 전체는 오로지 페르시아의 수도에 있는 왕궁과 거기에서 벌어진 왕의 연회(宴
會)만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등장 인물도 페르시아 왕과  그
주변 사람들인 이방인들로만 이루어져 있기에 본장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나  섭리가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본장은 유다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얼마나 치밀하고 깊으신가를 드러내 준다. 왜냐하면 이 이후의 장부터 등
장하는 주인고 에스더가 유다 민족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종으로서 활약할 수  있게
되는 근거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하여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1)우리는  때
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확신할 수 없게 되고 하나님의 구원 활동을 믿을 수 없을 때
가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고 느낄 때에도 구원 활동을 계
속화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확고한  믿
음이 필요한 것이다(약 1:6). 또한 (2)우리들은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든지 간에 하나
님의 보호 아래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막 16:15-18)

                    1. 아하수에로 왕의 연회(1:1-8)
   연극의 서막과도 같은 본 단락은 아하수에로 완의 궁전에서 베풀어진 잔치의  전체
적인 분위기를 묘사한다. 그런데 본 단락은 페르시아가 소유한 막대한 부와 권력을 그
어느 곳보다도 상세히 묘사함으로써 그 위력을 짐작케 해준다. 그리고 엄청난  권세를
지닌 한 고대 국가의 절대 군주가 벌이는 성대한 잔치를 통해 다윗 왕국에 대한  소망
을 암시적으로 갖게 함과 동시에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나약한 속성 또한 잘  드러냄으
로써 하나님 왕국의 통치자를 역설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본 단락은 (1)잔치의
시기(1-3절), (2)잔치의 목적(4절), (3)잔치에 대한 일반적  묘사(5-8절)로  이루어져
있는 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역설적으로 사용될 당시 상황, 페르시아의 부와  권력
을 자세하게 그리고 있다.
   한편, 페르시아 제국하에 있던 유다 백성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않고  바벧론
땅에 머무르고 있었으나 그곳 사람들과 그리 잘 조화되어 살지는 못한 듯하다. 그래서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한 하만이 유다 백성 전체를 처형하려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당
시 바사에 남아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적으로 매우 나태했거나 무지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본서 저자는 아하수에로 왕의 연회를 자세히  소개함으로써  예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렸던 다윗과 솔로몬 왕국의 영광을 암시하려 한 것 같다.
   이러한 내용의 본문을 그 특성별로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1)당시의 상황 소개(1-3절) : 본서 저자는 본 단락의 주인공인  아하수에로  왕과
잔치가 벌어진 장소, 즉 수산 궁을 언급하고 나서 잔치가 배설(排設)된 때와 무슨  일
이 진행되고 있었는지를 언급하고 있다. 이와 같은 본서는 소설 형식을  빌어  역사적
사실을 전개시키고 있는 것이다.
   (2)잔치의 목적(4절) : 웅대한 페르시아의 왕권이 자국(自國)의 통치력을 과시하기
위해 베푸는 잔치의 규모는 가히 그 위세가 하늘에 닿을 듯 하였다.  즉,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최대의 권력과 부를 이용하여 '영화로운 나라의 부함과 위엄의  혁혁함'
을 나타내려는 페르시아 왕권의 잔치에 대한 소개가 유다 백성들에게는 페르시아의 절
대 왕권이 보여 주는 위세와 부유함에 그대로 안주하려는 유혹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서 저자가 잔치의 규모와 목적을 자세히 언급한 것은 그  당
시 바벧론에 남아 있던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신정 국가에 대한  대
망을 갖게 하려 한 의도에서 였던 것 같다.
   (3)자신을 과시하려는 인간(5, 6절) : 본서 저자는 수산 궁의 잔치와 거기에  참석
한 인간들의 속성을 예리하게 파악하여 하나님 나라의 잔치와의 명백한 차이점을 보여
준다. 사실 수산궁에서 벌어진 아하수에로 왕의 연회는 단지 자신과 자신의  부(富)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온갖 장식품과 보석으로 치장된 연회장은 물질 만능주의
에 빠진 인간이 자신을 미화하려는 속성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
   (4)나쁜 목적을 위한 관대함(7, 8절) : 자기 도취에 빠진 아하수에로 왕은  방백과
신복들에게 술취히기를 권했을 뿐만 아니라 즐겁게 놀기를 바라며 쾌락에 대해 너그러
움을 베풀고 있다. 그런데 이는 좋은 의도에서였던 것 같지 않다. 한편 이와 같은  잔
치는 하늘 나라 잔치와 대도적인 속성들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애해될 수 있다.  그리고
본문에 나타난 아하수에로 왕 역시 자기를 과시하려는 헛된 유혹에 빠져 있어 그의 나
약하고 변던스러운 면들을 보여 준다. 이는 아하수에로에게서 자기 민족을 다스릴  하
나님의 대리자의 모습을 찾으려 했던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의 속성과는 질적으로 대비
되는 허약한 인간의 속성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본문에서 본서 저자는 하늘 나라의 잔치와 대비되는 아하수에로 와이  베푼
잔치의 성격, 그리고 하나님의 대리자의 자세와 대배되는 아하수에로 왕의 성격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본 단락에서 드러나는 본서 저자의 의도는 단지 세상 잔치를 능가하는 하나
님 나라의 잔치를 강조하는 데만 있는 것도 아니며, 아울러 하나님의 통치자와 뚜렷이
구별되는 아하수에로 왕의 속성을 부각시키려는 데만 있는 것도 아니다. 본서  저자는
더 나아가 보다 근본적인 신학적 교훈을 전달해 주고 있다. 즉, 유다 백성이 살고  있
던 주변적인 환경을 그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유다 백성의 구원을 위한 중요
한 요소로 작용했음을 나타낸다. 다시 말해서 전(全) 유다 백성의 생존을 위협할 정도
의 막강한 위력을 가진 페르시아의 권력이 역설절으로 작용하여 온 유다 백성을  구하
는 튼튼한 방패가 되었다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만  가능했다는  점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본서 저자는 본 단락을 통하여 타락한 권력도,  변덕스
럽고 자기 과시에 빠진 나약한 인간의 속성도,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 구원사에 이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본 단락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즉,
(1)인간은 소유한 권력이나 재력이 많을 때,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여  함부로
사용하기 쉽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힘과 부(富)의 주인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라는 사실을 깨달아 그 남용을 절제해댜 한다(단 4:15). 그리고 (2)하나님의 섭리와
역사하심은 지역, 민족, 상황을 초워래 전개된다는 사실이다.그래서 본서  저자는  이
같은 사실을 암시하기 위해 유다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앞으로 사용될 페르시아의  부
와 권력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허영심의 폐해(弊害).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자신의 실제 모습 이상으로 드러내
려는 욕구가 그 정도에 있어서 차이는 있겠지만 공통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데  이것은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개인이 속해 있는 공동체에게 큰 해(害)가 되므로 빨리  제거해
야만 한다. 그러면 과연 이러한 허영심은 자신에게 어떤 폐해를 끼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자신의 판단력을 흐리게 한다. 실제 자신의 허영심을 만족시켜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비록 처음에는 자신을 과시하려는 마음이 작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마음은 더욱더 커져 허영심으로 발전한다. 그래서 커져만가는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 헤매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의 행동이 얼마
나 어리석은 지를 인식하지 못하는 지경에 도달함으로써 파멸하게 된다.
   둘째, 검소한 생활을 방해한다. 허영심이 점차 커져서 판단력을 상실한 사람은  자
신의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큰 지출을 낭비로 생나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돈을
물쓰듯 하면서도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실로 그 자신은 오직 낭비를 통하여
자신의 위신이 세워지는데 대해서만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셋째, 이웃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세상 사람 모두가 많은 든을 갖고 있지는  못한
다. 그래서 돈을 적게 갖고 있는 사람은 오직 기본적인 의식주(衣食住)  문제  해결에
급급해 한다. 어떻게 보면 이와 같은 형편에 있는 사람이 우리 주위의 대분이다. 그런
데도 돈이 있다고 해서 자신의 허영심을 만족시킬 양으로 돈을 낭비하면 다른  사람들
의 마음에 큰 상처를 입히게 될 뿐이다.
   넷째, 하나님의 징벌을 받게 된다.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서 재물을 허비했던 개인,
가정, 그리고 사회가 멸망했던 경우는 허다하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경우에 징벌을 내
리신 까닭은 그들의 청지기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
께서 그들에게 재물을 주셨을 때는 그들로 하여금 이웃의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사
명도 함께 부여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같은 재물을 자신의 허영심을 만족시키
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기에, 그 결과 사치와 쾌락을 통하여 자신의 몸과 마음을  병들
게 하며, 또한 재물도 모두 잃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자신의 허영심을 만족시키려는 노력이  백해  무익(百害無
益)함을 깨달아 보고 고상한 목표, 즉 하늘 나라의 영과을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아하수에로 왕에 관하여.   '아하수에로'라는 이름은 '힘센 눈' 혹은 '힘센 사람'
이란 뜻이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 같은 이름의 소유자가 2명 나온다. 여기 이외에  나
오는 '아하수에로'는 메데 왕 다리오의 아버지이다(단 9:1).  그러면  여기에  나오는
'아하수에로'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이 '아하수에로 1세'(B.C. 485-464)에 대한  정보
는 주고 그가 건설했던 종교적 수도 '페르세폴리스'(Persepolis)에서  고고학적  발굴
작업을 통해서 발견된 한 비문(碑文)에서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고대  헬라의  역사가
헤로도투스도 그에 관한 적잖은 정보를 제공해 준다.
   그에게 있어 특이할 만한 점은 그가 군사적 행동들을 많이 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물론 그는 B.C.480-479(혹은 478)년에 헬라와 벌인 살라미스(Salamis), 플라테(Plat-
aea), 미칼레(Mycale) 전투 등에서 완패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다른 지역에서의  전투
에서는 승리함으로써 자신의 영토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헬라와의  전투에
서 패배한 후로는 거의 방탕한 생활을 말년까지 지속한 듯하다. 즉, 그는  전투에서의
패배감을 여색(女色)을 탐닉함으로써 상쇄(相殺)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가 에스더를
왕후로 맞이한 것도 헬라와의 전투에서 패배한 직후였다. 어쨌든, 그는 방탕항 생활을
계속하다가 B.C.464년 자신의 침실에 침입한 암살자에 의해 살해됨으로써 자신의 생으
마감하였다(2:21). 한편 성경상의 이 왕에 대한 언급은 에스더와 관계 말고도  사마리
아 사람들로부터 예루살렘 성벽 재건 중단을 노린 최초의 고소를 받은 인물로  나타난
다(스 4:6).
   
   *메대와 페르시아의 관계.   본문에 보면 잔치를 베풀 때 바사와 메대의 장수가 왕
앞에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3절). 그런데 다른 지방과는 달리 특별히 바사와 메대를
동일하게 지명까지 언급하면서 서술한 것은 이 두 국가간의 관계 때문인 듯하다. 이제
이 두 나라의 관계를 살펴보면서 성경 이해를 보다 깊이 돕고자 한다.
   사실 '메대'와 '페르시아'는 여러 가지 점에서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었다. 우선
두 민적은 모두 인도-유럽어족에 속하여 상호 유사한 언어를 갖고 있었다. 우선 두 민
족은 모두 인도-유럽어족에 속하여 상호 유사한 언어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보다  근
본적으로 살펴보면 두 민족은, 공히 '야벱'의 후예들이다(창 10;2; 대상 1:5). 그뿐만
아니라 두 민족은 서고 인근 지역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자연적  밀집성보
다 두 민족을 가까운 관계로 더 묶어 놓은 것은 정치적 밀집성이었다.
   메대는 B.C.7세기경에 세력을 형성하여, 바벧론과 동맹을 맺어 당대의 최강국 앗수
르를 무너뜨리는 데 큰 역할을 할 만큼 강성하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페르시아
는 통일 국가를 형성하지도 못하였다. 페르시아가 통일 국가가 된 것은, 고레스  대왕
(고레스 2세, B.C.539 혹은 559-529)의 출현에 의해서였다. 고레스는  페르시아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았던 안산(Anshan)의 왕위를 부친 캄비세스  1세(B.C.600-559)로부터
계승받은 후, 분열되어 있던 페르시아 민족의 통합 작업을 펼쳤다. 그 후 그는 자신의
외할아버지 아스튀아게스가 다스리던 메대 왕국을 군사적 행동을 취하여  물려받았다.
이렇게 하여 메대는 페르시아 제국에 속하고 말았으며, 그 지역의 속주들은  페르시아
지역의 다른 속주들처럼 페르시아 제국의 중요한 속주가 되었다. 결국 이것은 메대 출
신들이 페르시아 지역의 출신들보다 결코 열악(劣惡)한 대우를 받지 않았음을  의미한
다. 그런데 고레스가 이 같은 통치 방식을 취한 것은 그 자신이 메대의 합법적 계승자
임을 자처하려는 뜻에서였던 듯하다. 아무튼 그 결과 두 민족은 마치 하나인 듯한  관
계 속에서 페르시아 제국을 형성하는 두 개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2. 와스디의 거절과 폐위(1:9-22)
   전 단락(1-8절)이 아하수에로 왕의 잔치를 전체적으로 묘사하는 부분인  반면,  본
단락은 그 잔치에서 벌어지는 하나의 중대한 사건을 중심으로 기술하는 대목이다. 즉,
본 단락을 에스더을 구원 역사의 무대 위로 등장시키기 위한 본격적인 준비를  갖추어
가고 있는 장면으로 당시 왕후였던 와스디가 폐위되는 과정과 그에 따른 조처들을  언
급하고 있다. 그래서 본서 저자는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계획이  와스
디 왕후의 폐위라는 사건과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전개되어 가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
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앞 단락에서 아하수에로가 가진 권력의 위세를  충
분히 감지할 수 있었다면, 본 단락에서는 그 위세가 어떻게 뜻밖의 사건을 통하여  하
나님의 도구로 이용되는가를 극명하게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하수
에로와 그 주변의 인물에게 맞추어져 있던 무대의 조명은 잠시 와스디 왕후에게로  넘
겨진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은 와스디 왕후에게로 그 관심을 돌리기 위해서라기  보다
는 와스디 왕후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 즉 아하수에로 왕이나 왕을 보좌하는 방백들의
움직임을 전달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한편, 저자는 이 사건에 역사적 사실성을 객관적으로 부여하기 위해 등장 인물들의
이름을 일일이 나열(10, 14절)하거나 사건이 일어난 시점 등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 반면에 와스디 왕후에 대해서는 사실적인 어떠한 정보도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그녀
의 심리 상태에 감적의 변화가 본 단락의 핵심 사항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또한 이와
는 달리 왕의 행동에 대해서는 직선적이고 극단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지루한 심리 묘사
는 과감히 배격하고 있다. 이처럼 본서 저자는 당시의 역사적 사건을 소설 기법의  생
략법을 사용해 자신의 의도를 정확하게 나타낸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본문에는  오
로지 아하수에로 왕의 호출에 대한 와스디 왕후의 거절과 폐위 그리고 그것을  둘러싸
고 벌어지는 등장 인물들의 어리석은 행동과 그에 대조되는 하나님의 큰 지혜만이  암
시적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본문의 전반부(9-12절)는 우선 와스디 왕후의  거
절이라는 사건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그 뒤에 계속되는 후반부(13-22절)는  왕후의
거절이라는 사건에 따르는 왕과 방백들의 반응, 그리고 결과적으로  나타난  폐위라는
사건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본 단락의 사건의 주요  관심사는
와스디 왕후인데도 불구하고 저자는 그녀에 대해서는 이상할 정도로 특별히  서술하지
않는다. 아마도 이것은 와스디의 심리 변화 그 자체보다도 그녀의 거절이라는  행동을
통해 빚어지는 주변의 상황 전개,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구원 사건의  실마리
가 된는 폐위의 사실을 한층 더 부각시켜 큰 효과를 주려는 저자의  의도에서였던  것
같아.
   한편, 이러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단락은 그 내용 속에서 인간들이 행하는  여러
가지 오류들과 좁은 소견에서 나오는 어리석음을 잘 보여 주고 있는 바, 이를  정리하
면 다음과 같다.
   (1)그릇된 쾌락의 추구와 그 결과(9-15절) : 아하수에로 왕은 계속 이어지는  화련
한 잔치의 주홍으로 들뜬 나머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어무런 숙고도 없이 즉흥적으로
어리석은 명령을 내린다. 이는 그릇된 쾌락을 추구하는 아하수에로 왕의 자기  과시가
자신의 행위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왕후까지도 욕구 총족의 도구로 이용하려는  그릇
된 욕망에서 나온 명령이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도 와스디의 거절이라는 반대에  부
딪혀 자기 욕망의 성취가 좌절되었다. 그러자 불같은 진노를 일으킨 왕은 완전히 이성
을 상실한 추한 인간의 모습을 보인다. 또한 자신의 그릇된 욕망에서 나온 과오를  돌
아보고 반성할 냉정함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자신의 책임을 전가시켜 모면하고자  하는
이기적이고 성숙되지 못한 인간의 속성 또한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2)그릇된 조언자들의 자세(13, 14절) : 진노하여 자신의 책임을 물론 무엇이 올바
른 것인지 판단조차 낼릴 수 없게 되어버린 왕에게 그를 둘러싼 방백들의 자세는 아부
로 일관하고 있다. 그리고 이뿐만 아니라 그들의 어리석은 조언 때문에  왕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이들이 왕에게 주는 그릇된 조언의 내용은  16-20절에
나타난다.
   (3)잘못된 인간의 충고를 신뢰하는 어리석음(16-20절) : 자신의  분노가  타당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격한 감정의 표출 때문에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한 왕은 이제 자신
에게 아부하는 충고자들의 잘못된 말을 믿고 의지하여 자기 안전을  확인하고자  하는
오류를 범한다.
   (4)왕후 폐위 조서의 반포(21, 22절) : 그릇된 쾌락의 추구에서부터 현명하지 못한
판단으로 진행되는 일련의 어리석은 행동은 끝애 왕후의 폐위를 결정함으로써  끝맺는
다. 그런데 본서 저자가 이같이 사건의 진행 과정을 간략하면서도 핸바 내요만을 서술
한 것은 이러한 인간의 오류와 그릇된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지냐
시킨다는 사실을 암시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본서 기자는 본문에  하나님의  섭리나
역사라는 표현을 전혀 사용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진행 과정을 그리고 있
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 저자가 주는 신학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첫째, 공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의 무절제한 감정의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하나
님 나라를 통치할 인물의 이상적인 면모를 역설적으로 암시해 주고 있다. 그리하여 당
시 신앙적으로 침체해 있는 유다 백성들에게 신정 왕국을 대망케 할 뿐만 아니라 구원
자를 기대케 한다. 둘째, 왕 주변의 방백들의 자세를 통하여, 적절하고 올바른 판단과
조언을 통해 통치자를 보좌하는 사람들의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강조한다. 셋째,
와스디의 폐위는 아하수에로 왕과 그 주변 인물들의 악하고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빚
어진 결과였으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해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놀라운  은혜를
베푸신다는 신학적 진술이 담겨 있다.
   따라서 우리는 본 단락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우리는  다
른 사람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쾌락과  이득을  위해
다른 사람을 도구로 이용하고 마음대로 조종하는 것은 주께서 주신 자유를 빼앗는  것
이기 때문이다(고전 7;22, 23). 그러기에 우리는 어던 사람에 대해서든지  간에  그의
인격을 존중하는 마음을 갖고 공손히 대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2)인간의  부족하고
불미스러운 사건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계획을  진행시키신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주께 순종하는 믿음뿐만 아니라 주의 역사를  이해하는  신아적
안목 또한 가져야 하는 것이다(마 16:1-4).
   
   *진정한 조언자.   모든 인간은 순같 순간의 선택을 하면서 살아간다. 물론 그  선
택에는 자신의 삶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아니하는 것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인간
은 자신의 선택 여하에 따라서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는 중요한 순간을 맞이하기도  한
다. 이 같은 중요한 순간을 맞이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떠한 선택을  해야할지
를 묻기 위해서 조언자를 찾는다. 이러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바른 선택을 하여  자
신의 매래가 보다 행복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사
람들이 자신의 진정한 조언자가 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사실 얼마나 많은  사람들
이 아무런 책임감도 없이 조언을 하고 있는가? 또 그렇게 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조언을 들음으로써 파멸하고 있는가?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언행에 대해 책임질 줄 아는 조언자를 찾아야만 한다.  물론
그 최고. 최선의 조언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이시다(요 16:13).  그러나
믿음이 없거나, 연약한 자들은 그리스도나 성령님을 쉽게 찾지 못한다. 따라서 이들은
우리와 동일한 성정(性情)을 지닌 인간(약 5:17) 중에서 적절한 조언자를  찾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올바른 조언자가 될 수 있는가?
   첫째, 하나니믈 두려워할 줄 아는 조언자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조언을 구하는  사
람의 비위(脾胃)를 맞추려고 노력하지 않고(갈 1:10),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조언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조언을 필요로 하는 자의 기분만을 기쁘게 하는 조언을 한
다면, 그럿은 곧 조언을 구하는 사람을 파멸로 몰고 가는 행위와 다름없다.
   둘째, 하나님의 뜻을 분멸할 수 있는 조언자이어야 한다. 사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의 말씀을 여러 번 통독하여 신앙 지식이 풍부해지고 성령이 충만하지 않으면  하나님
의 온전한 뜻(롬 12:2)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기가 무척 어렵다. 따라서 우리들은  기도
를 많이 해서 신령한 사람이라고 일컬어지는 조언자만을 구해서는 안 된다. 또한 성경
은 많은 읽었지만 기도를 하지 않는 조언자만을 좇아서도 안 될 것이다.
  셋째,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는 조언자이어야 한다. 실제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체험한 사람일 경우에만(고전 11:1) 그 조언의  진정한
가치가 있다. 만일 조언을 구한 자가 조언자로부터 조언을 받았지만,  조언자의  삶이
옳지 못함을 발견하였을 때는 그의 조언을 거짓된 것으로 보고 자신이 받은 조언과 반
대의 선택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결과 파멸에 빠지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
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진정한 조언자는 어떠한 자격의 소유자이어야 하는  지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조언자를 만나기 위해서도 힘써야 하지만,  그보다
먼저 최고.최선의 조언자이신 그리스도와 성령님을 바라보는 신앙의 단계에  올라가기
위하여 힘써야 할 것이다.

  *올바른 통치자의 자세.  자신의 판단이나 행동의 결과가 많은 사람들의 생존에  커
다른 영향을 주는 위치에 있는 통치자의 자세는 무척 중요하다. 따라서 대다수 국민들
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며 한 국가를 운영해 나가는 통치자는 그 누구보다도  판단이
공명하고 행위가 진실해야 한다. 만약 나라 전체의 운영을 위하여 걷어들인 세금이 통
치자 개인의 만족과 이득을 위하여 사용된다면 그것은 분명 그릇된 일일 것이다. 그러
나 우리는 인류 역사상 통치자들이 자신의 이익과 권력에의 욕망 때문에 한 국가를 혼
란에 빠뜨린 사례들을 얼마나 많이 보아 왔는가!
   인간에게는 누구나 이기심이라는 타고난 본성이 있다. 그래서 어느 인간이든지  그
이기심을 잘 다스려 다른 사람을 향한 이타심을 지니게 될 때, 우리는 그를 훌륭한 인
격자로 간주한다. 이처럼 평범한 인간에게도 요구되는 이 덕성이, 하물며 한 국가에서
결정적인 책임권을 갖고 많은 사람들의 삶을 좌우할 수 있는 통치자의 경우는  어떠하
겠는가?
   따라서, 통치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는 다음과 같은 자세가 요구된다.
   첫째, 하나님의 두려워할 줄 아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현재 자신의 권세가 높아서
어느 누구도 감히 침범할 수 없는 것이라 해도 모든 권세는 유한한 것이며, 결국은 하
나님에 의해서 심판을 받으리라는 사실을 유념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
제든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고 그러한 하나님을 믿은 신실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둘째, 자신의 개인적인 이기심과 욕심을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 통치자의  자리에
있게 되면 어떤 인간이든 개인적인 이기심 때문에 권력과 재물의 많은 유혹을 받게 마
련이다. 그러나 올바른 통치자란 그런 이기심까지도 자제하고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지녀야 한다. 따라서 통치자에게는 올바른 인생의 태도뿐만 아니라 평범한 인간의  이기심까지도 용납하지 않는 더 엄격한 도덕성이 요구된다.
   셋째, 공적인 권력을 남용하는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이 현재  소유하고 누리는 권력이 자신에게 부여된 것이라 해도 그것은 통치자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많은 국민의 이익과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좀더  효율성을 갖춘다는 의미에서 통치자에게 맡겨진 것일 뿐 그 개인의 소유가 아닌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권력을 '공권력'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권력을 남용하는 많은 사람들을 해하는 잘못을 범하는 통치자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렇게 통치자에게 요구되는 이상적인 자세 몇 가지를 살펴보았는데  이것을  통해 자리는 통치자의 위치가 얼마나 어렵고 중요한 자리인가를 새삼 깨달을 수 있다. 따라서 통치자에게는 신앙인의 입장에서 한 나라를 운영한다는 공적인 역할과 아울러 무엇보다도 자신의 개인적인 성품과 인격을 다스리는 수양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진정 통치자는 늘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 길을 따라 걷는 겸손함을  지녀야  한다. 그리고 이와 아울러 국민들은 통치자가 이러한 자세를 가질 수  있도록  견제하고 요구하는 태도를 지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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