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시편 066장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66:1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권고(1)(시편 66:1-6)

Ⅰ. 이 대목 속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만백성에게 요청하고 있다. "온 땅, 온 세상" 곧 하나님을 찬양할 능력이 있는 세상의 온 거민에게 요청하고 있다(1절).

1.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모든 자들의 찬양을 받을 가치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선하시며, 모든 민족에게 찬양의 소재를 공급해 주시기 때문이다.

2. 이것은 사람의 의무, 곧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양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창조의 법칙의 일부이므로 각 창조물에게 요구되어진다.

3. 이것은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리라는 개종에 대한 예언이다. 온 땅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때가 올 것이며, 분향이 각처에서 그에게 올려질 것이다.

4. 이것은 시편 기자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선한 사업에 대해 갖고 있었던 진실하고 선한 의지를 말하고 있다. 그는 풍성하게 찬양하려 한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땅에 의한 것만이 아니고 세상의 온 민족들에 의해 바쳐지는 찬사를 받게 되기를 원하고 있다. 그는 온 땅이

(1)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발하도록" 일깨우고 있다. 거룩한 즐거움은 우리의 모든 찬양을 북돋아 주어야 할 경건한 마음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찬양이 신앙의 고함은 아닐지라도 (사곡한 자들은 "저희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한다"고 일컬어지고 있다. 사 58:4), 하나님을 찬양함에 있어서

[1] 우리는 진실되고 열렬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온 힘을 기울여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으로써 우리가 행하는 것을 해야 한다.

[2] 우리는 우리의 주인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들이 되어 개방적이고 공개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소리를 말하는 것, 즐거운 소리를 발하는 것도 포함한다.

(2) 즐겁게 노래를 부르며, 다른 사람들을 교화하기 위해 "그 이름의 영광" 즉 무엇보다도 그가 자신을 알리셨던 그 모든 중의 "최고의 것인 그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도록 일깨우고 있다(2절).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은 우리 찬양의 소재가 되어야 한다.

(3) 할 수 있는 한 "영화롭게 찬양하라"고 촉구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때는 그를 영화롭게 할 수 있을 만큼 찬양해야 하며, 그것이 우리의 모든 찬양의 범위와 요지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너희의 최대의 영광으로 간주하라" (이렇게 보는 견해도 있다). 피조물에게 창조주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찬양할 자격이 있다는 것은 최고의 영예이다.

Ⅱ.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온 땅에 요청했었다(1절). 그리고 그는 이제 그들이 그대로 하리라는 것을 예고하고 있다(4절). "온땅이 주께 경배하리이다." 땅의 모든 지역, 심지어 가장 먼 지역에 있는 사람들도 경배할 것이다. 왜냐하면 "영원한 복음이 여러 나라와 족속에게 전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하늘과 땅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는 말씀의 취지이다(계 14:6, 7). 이처럼 전파되기 때문에, 그 말은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얼마가 되었던간에, 온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를 찬송하도록 만들 것이다. 복음의 시대가 되면, 하나님이 시편의 노래로서 경배를 받을 것이다. 시편의 노래가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즉 "주의 이름을 찬양"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이름으로써 그 자신을 알리신 것은 단지 그의 서술적인 영광에 불과하며 그의 본질적인 영광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찬양으로써 그의 본질적인 영광에는 조금도 기여할 수 없다.

Ⅲ. 우리가 찬양의 소재를 공급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여기에서 "와서 하나님의 행하신 것을 보라"고 요청받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찬양하든 안하든, "주의 행하신 것이 주를 찬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더욱 그리고 더 잘 찬양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올바로 주의깊게 살펴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행하신 것을 보고 그 속에 있는 그의 지혜와 능력과, 행하심에 대한 실례를 살펴 보자(5절). 그리고 나서 성실하고 그것들에 대해 그에게 말하자(3절). "주의 일이 어찌 그리 엄위하신지요, 주의 행하심이 어찌 그리 엄위하신지요 할지어다."

1. 하나님의 일은 그 자체로서 훌륭하며, 이러한 것들을 잘 생각해 볼 때 우리는 당연히 놀라움으로 가득차게 된다. 하나님은 그의 크신 권능은 그의 모든 행하심 속에서 매우 찬란하게, 매우 강하게 빛나고 있으므로, 정말로 "주의 일과 같은 일이 없다" 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까닭에 그는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다" 고 일컬어지고 있다(출 15:11). 인생에게 행하시는 그의 모든 역사속에서 그는 엄위하신 분으로 알아서, 거룩한 두려움을 가지고 주목해야 한다. 신앙의 대부분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경의에서 온다.

2. 하나님의 일은 그의 대적들에게 무서운 것이며, 그들은 여러 차례 위압하고 놀라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억지로 복종하는 척 하도록 만들었다(3절). 아무도 그 앞에 설 수 없는 "주의 큰 권능으로 인하여 주의 원수가 주께 복종할 것이며"(단어 그대로) "저희가 주께 엎드릴 것입니다." 즉, 그들은 자기들의 뜻과는 아주 반대로, 어떠한 조건에서라도, 주와 함께 억지로 화평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두려움으로 인해 복종하는 것은 거의 진실되지 못하다. 그러므로 강압은 믿음을 전파하는 적합한 방법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교회로 개종된 자들에게는 큰 기쁨이 있을 수 없으므로, 결국엔 교회를 치는 거짓말장이들로 나타날 것이다(신 33:29).

3. 그것은 그의 백성들에게 위로가 될 것이며, 유익할 것이다(6절).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그는 그들 앞에 있는 바다를 변하여 육지로 되게 하셨으며." 이 사실은 광야에서로 하나님의 안내에 따르도록 그들을 격려했다. 그리고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그들의 싸움을 격려하기 위해 요단강이 그들 앞에서 갈라졌고 "무리가 도보로 강을 통과했다." 그리고 하늘에 의해 뚜렷이 인정받은 이러한 발걸음은 여호와의 전쟁에서의 보병대라기 보다는 기병대를 뜻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서 그들 앞에 있던 대적들은 참으로 덜었으나(출 15:14.15; 호 5:1). "거기서 우리가 주로 인하여 기뻐하였다." 즉 주의 능력을 믿고(하나님을 의뢰하는 흔히 그를 기뻐하는 것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주의 찬송을 불렀다(106:12). 거기서 우리가 기뻐했다. 즉 우리의 선조들이 거기서 기뻐했고, 우리는 그들의 허리 속에 있었다. 우리 조상의 기쁨은 우리의 기쁨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도 그 기쁨에 동참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4. 이 노래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명령을 한다. 하나님은 자기의 말씀으로써 이 세상에 대한 자기의 주권을 지키신다(7절). "저는 그 능력으로 영원히 처리하시며, 눈으로 열방을 감찰하신다."

(1) 하나님은 통솔하는 눈을 갖고 계신다. 높은 하늘에서 그의 눈은 세상의 모든 거민들을 지휘하시며, 그들 모두를 선명하게 그리고 완전하게 살피신다. "주의 눈은 땅을 이리저리 살피신다."고 했다.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곳, 또 세상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열방도 그의 감찰 하에 있다.

(2) 그는 통솔하는 팔을 갖고 계시다. 그의 권능은 영원히 처리하시며, 결코 약화되거나 방해 받지 않는다. "그의 손은 강하며 그의 오른 손은 높으시다"고 했다. 여기에서 기자는 "거역하는 자는 자고하지 말지어다"라고 결론을 끌어내고 있다. 패역하며 반역적인 마음을 가진 자는, "내가 왕이 되리라고" 말하면서 스스로를 높이 올렸던 아도니야처럼, 하나님께 대한 공공연한 반역 행위를 하려고 감히 일어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반역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뜻을 이루리라고 자긍하지 말라. 아니, 그들은 잠잠하라.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고 말씀하셨고, 사람은 거기에 반역할 수 없기 때문이다.

 

66:2 없음.

 

66:3 없음.

 

66:4 없음.

 

66:5 없음.

 

66:6 없음.

 

66:7 없음.

 

66:8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권고(2)(시편 66:8-12)

이 대목 속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특별히 요청하고 있다. 온 땅이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땅은 특별히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 하나님을 송축하라. 그를 우리의 하나님으로서, 우리와 언약하신 하나님, 그리고 우리를 자기의 백성으로 돌보시는 하나님으로서 송축하라. 그들의 "송축소리가 들리게"하라(8절). 그가 특별히 총애하시고 택하신 수행인 들에게서가 아니고 누구에게서 그 소리가 나오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송축해야 할 이유로 다음 두 가지가 있다.

Ⅰ. 일반적인 보호(9절).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두신다"(붙드신다). 그리하여 그 영혼이 저절로 떨어지지 않게 하신다. 우리 영혼은 계속해서 우리 손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기 쉽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명과 영혼을 함께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선한 섭리이며, 우리의 영을 보존하시는 것은 그의 은총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는 (단어 그대로) 우리의 영혼을 생명 안에 주신다." 우리에게 존재를 부여하신 그가 끊임없이 소생시키는 행위로써 우리로 하여금 존재하도록 붙들어 주신다. 그리하여 이전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위로를 주심으로써 우리로 새생명이 되게 하신다. Non est uiuere, sed ualere, uita - 즉 생명이란 이름을 붙일 값어치가 있는 것은 존재가 아니라 행복이다. 그러나 우리는 비틀거려 넘어지기 쉬우며, 병에 의한 죽음이나 재난으로 인한 죽음 따위의 여러 가지 해로운 사건의 위협 속에 놓여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시 이런 것들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권능의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는 여러 가지 예측하지 않은 화, 즉 우리가 그 위험을 알지도 못하고 있던 화를 막으시어,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지 아니하신다." 우리가 오래 전에 끝없는 멸망 속으로 떨어져 버리지 않는 것은 그의 덕분인 것이다. "그는 자기 성도들의 발을 지키시리라."

Ⅱ. 큰 환난으로부터의 특별한 구원. 다음을 관찰하자.

1. 그 환란과 위험은 얼마나 심했던가? (11,12절). 본문이 가리키고 있는 교회의 구체적 환란은 나타나 있지 않다. 그것은 아마도 어떤 개인이나 사사로운 가족들만의 환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그들은 올무에 놀란 새처럼 놀랐고, 그물에 걸려든 고기처럼 포위되어 얽혀 들었었다. 그들은 그 재난으로 위압되었고, "허리에" 짐을 진 것처럼 억제당했다(11절). 그러나 그들은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손을 인정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물 속으로 끌어들이지 않는다면 결코 그물에 들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환란을 내리시지 않는다면 결코 환란 아래 있게 되지 않는다. 불과 물보다 더 위험한 것이 있는가?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을 모두 통과했도다." 즉 여러 가지의 역경을 겪었도다. 하나의 고통이 끝나자 또 다른 고통이 시작되었다. 우리가 한 가지 위험에서 벗어났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또 다른 종류의 위험속에 들어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나님의 가장 훌륭한 성도들의 환란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사 43:2). 그러나 교만하고 잔인한 자들은 불과 물처럼, 그리고 그 이상으로 위험한 존재들이다. "사람들을 삼가라"(마 10:17). 사람들이 우리를 치러 일어났을 때 그것은 불이었고 물이었으며, 그 모든 것은 위협적이었다(124:2, 3, 4). 그리고 여기에서의 경우도 그러했다. "주께서 사람들로 우리 머리 위로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를 짓밟고 우리를 욕하고 우리를 괴롭히고 모욕하고, 더욱이 우리를 완전히 노예로 삼게 하셨나이다. 그들은 우리 영혼에게 엎드리라 우리가 넘어가리라(사 51:23)라고 말했나이다." 신하들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선한 방백들의 즐거움인 반면, 그들의 머리 위로 타고 가는 것이 폭군들의 자랑이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도 고통당하는 교회는 또한 하나님의 손을 시인한다. "주께서 그들로 이처럼 나를 학대하게 만드셨나이다." 왜냐하면 가장 포악한 압제자들도 위로부터 그에게 주어진 것 이외에는 어떤 능력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2. 그들을 이 환란과 위험 속으로 이끄신 일 속에는 얼마나 은혜로운 하나님의 의도가 있었던가? 그 의미가 무엇인가를 보자(10절).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셨나이다." 우리가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의 고통을 바라 볼 때, 우리는 환란에 의해 유익을 얻을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그 밑바닥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그리고 그 목적 속에 있는 우리 자신의 영광과 이득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고통에 의해 우리는 불 속에 있는 은처럼 단련된다.

(1) 단련됨으로써 우리의 은혜는 더욱 분명해지고, 그렇게 함으로써 다듬어져 순은으로 판명되었을 때의 은처럼 우리는 인정받을 것이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와 또 아마도 이 세상에서도 "우리의 칭찬"이 될 것이다(벧전 1:7). 욥의 순전함과 꾸준함은 그의 고통에 의해 증명되었다.

(2) 훈련됨으로써 우리의 은혜는 더욱 강하게 그리고 활발하게 될 수 있다. 그리고 은이 불로써 정련될 때 불순물이 제거되어 더 깨끗해지는 것처럼,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자신도 향상될 수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유익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되기 때문이다(히 12:10). 공공연한 환난은 교회를 정결케 하기 위한 것이다(단 11:35; 계 2:10; 신 8:2).

3. 마침내 그 결과는 얼마나 영광스럽게 되었던가? 교회의 환란은 분명히 좋게 끝날 것이다. 이 환난도 그러하다. 왜냐하면

(1) 그 환난의 출구는 행복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불과 물 속에 있으나 그것을 통과한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불꽃이나 만조로 인해 멸망당하지 않았도다." 성도들은 어떤 환란을 당할지라도 하나님을 송축하라. 그들을 통과시킬 길이 있는 법이다.

(2) 더 나은 상태로 향해 있는 입구는 더욱 큰 행복이다.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여호와의 동산처럼(단어 그대로) 물이 잘 되어 있는" 곳에, 따라서 비옥한곳에 "들이셨나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들을 환란 가운데로 끌어들이사 그들의 위로가 그 후에는 더 달도록, 그리고 그들의 고통이 이처럼 의로움의 평화로운 열매를 맺도록 해 주신다. 따라서 그것은 이 세상에 있는 가장 보잘 것 없는 곳을 풍부한 곳으로 만드실 것이다.

 

66:9 없음.

 

66:10 없음.

 

66:11 없음.

 

66:12 없음.

 

66:13

다윗의 결심(시편 66:13-20)

시편 기자는 앞에서 만백성들을 그리고 특별히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일깨워 여호와를 송축하도록 한 후, 여기에서 그 자신을 선동시켜 스스로 그렇게 하고 있다.

Ⅰ. 그의 하나님께 대한 헌신 속에서 송축하고 있다(13-15절).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것으로써 즐거운 소리를 발하도록 요청했었다, 그러나 이제 스스로 그는 더욱 굳게 결심하고 있으며, 하나님을 찬양하려 하고 있다.

1. 즉 율법 시대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바쳐졌던 값진 제물을 가지고 찬미하려 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제물을 바치지 않았거나, 하나님을 찬미하는 데 그처럼 비싼 것을 바칠만한 성의를 못가졌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할 능력이 있었고, 또 기꺼이 자기의 의무인 하나님께 경의를 표하고 있다(13절). "내가 번제를 가지고 주의 집에 들어가리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성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영적 예물을 그에게로 가져가야 한다. 그리고 그에 의해 우리의 예물은 성별된다. 또 다윗의 제물은 가장 좋은 "번제물"로 바쳐야 했다. 번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제단에서 완전히 살라야 하며, 바치는 자가 그것을 나누어 갖지 못하는 제사였다. 그리고 그것은 "살찐 것"으로 드린 번제, 즉 절룩거리거나 야윈 것이 아니라 가장 살찐 것, 그리고 하나님의 상에 올려 놓았을 때 가장 잘 용납될 수 있는 것이라야 했다. 가장 훌륭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갖고 있는 가장 훌륭한 것으로 대접받으셔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베푸시는 연회는 "기름진 것과 골수가 가득한 것으로 베푸시는 연회이다"(사 25:6). 우리도 이러한 제물들을 그에게로 가져와야 한다. 다윗은 "수소와 염소를 드릴"것이다. 그처럼 후하게 찬미를 할 것이며, 결코 거기에 인색하지 않을 것이다. 다윗은 자기에게 별 소용이 없는 것을 바치려 하지 않고, 자기에게 아주 귀중한 것을 바치려 했다. 그리고 그것을 "양의 향기와 함께" 바쳤다. 그 향기는 그리스도의 중보를 상징하고 있다. 그의 중보없이는 우리의 가장 기름진 제물도 용납되지 못할 것이다.

2. 양심적으로 그의 서원을 이행함으로써 찬미하고 있다. 우리가 환란 속에 있을 때 했던 서원을 양심적으로 갚지 않는다면 우리를 환란에서 건지신 것에 대해 입으로 하나님을 찬미할지라도 그것은 용납받지 못한다. 시편 기자의 결심은 이것이었다(13, 14절). "내가 나의 서원을 갚으리니, 이는 환란 때에 내 입이 말한 것이니이다." 다음 사실들을 유의하자.

(1) 우리가 어떤 고통에 눌려 있을 때 또는 긍휼을 추구할 때, 서원을 하고 주님 앞에 말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죄에서 떠나도록 채찍질하고, 우리의 의무에 더 철저하도록 우리 자신을 붙들어 두는 매우 일반적인 방식이며, 또 매우 장려할 만한 일이다. 그 이유는 이것이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 상응되거나 귀중한 생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은총의 징표를 받기 위한 준비이기 때문이다.

(2) 우리가 환란 가운데 있을 때 한 서원은 그 환란이 끝날 때 잊혀져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잘 이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서원하고 갚지 않는 것이 서원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기 때문이다.

Ⅱ. 다윗은 자기 친구들에게 선포하는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송축하고 있다(16절). 그는 자기에게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풀어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리는 이야기를 들으라고 선한 사람들의 회중을 부르고 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너희들아, 다 와서 들으라." 그리하면

1. "너희는 나와 함께 연합하여 찬송할 것이며, 내가 감사드리는 일을 도울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간구하는 일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받은 긍휼에 대해 감사드리는 일에 있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의 도움을 원해야 한다.

2. "너희는 내가 해야 할 말에 의해 교화되고 격려받을 것이다. 곤고한 자가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34:2). 주를 경외하는 자가 나를 보고 기뻐하리라(119:74). 그러므로 나로 하여금 그들과 함께 하도록 하라. 그러면 나는 그들에게 선포할 것이다. 그것을 조롱하고 그것을 희롱할 허탄하고 정욕적인 백성들에게가 아니고(진주를 돼지에게 던져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것을 선용할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내 영혼을 위해 행하신 것을 내가 선포하리라." 이것은, 자기가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욱 하늘의 총아라고 생각되도록 하려는 자만이나 헛된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으며(우리는 정당한 부채로서 이것을 그에게 빚지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사람들을 교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들의 경험을 서로 나누어야 한다. 우리는 매사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 특히 그가 우리 영혼을 위해 행하신 위대하고 친절한 일에 대해, 또 그가 거룩한 일들로 우리를 축복하신 그 영적 축복에 대해 서로에게 이야기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이 일에 매우 열심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로써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키기를 원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윗의 영혼을 위해 행하신 것은 무엇이었는가?

(1) 하나님은 그에게 단련하시어 기도의 의무를 사랑하게 하셨고, 그의 은혜로서 그 의무에 그의 마음을 쏟도록 해 주셨다(17절). "내가 내 입으로 그에게 부르짖었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을 위해 행하신 일들 가운데에서 우리에게 "아바 아버지라" 부르도록 가르치고, 또 부를 수 있게 해 주시는 양자(養子)의 영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하도록 명하셨으며, 기도하도록 격려하셨고, 또 기도할 마음을 주신(모두에게 면류관을 씌우신) 바로 그것이, 우리가 감사한 마음으로 그를 찬송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입으로 그에게 부르짖었을 때, "우리 혀로 높이 찬송하였다"면 즉 우리가 그로부터 긍휼과 은혜를 구할 때, 믿음과 소망으로 그에게 영광을 돌릴 능력이 있었고, 아직 소유하지는 못했을지라도, 기대하고 있는 긍휼에 대해 그를 찬송할 능력이 있었다면, 더욱 그러하다. 그에게 부르짖음으로써 우리는 실지로 그를 찬송하게 된다. 그는 정직한 자의 겸손하고 믿음에 찬 기도에 의해 그 자신이 영예롭게 되신 것으로 여기시길 즐거워한다. 그리고 그가 우리와 함께 관심을 결합시키는 것을 매우 크게 기뻐해왔으므로 우리 자신의 번영을 구하는 가운데 우리가 그의 영광을 구한다는 것은 그가 우리 영혼을 위해 행하신 하나의 위대한 일이다. "그의 찬송이 내 혀 밑에 있었다"(그것을 이렇게 풀이할 수도 있다). 즉 나는 어떻게 그의 이름을 높이고 찬미할 수 있을까를 내 마음에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기도가 우리 입에 있을 때, 찬송이 우리 가슴에 있어야 한다,

(2) 하나님은 그에게 역사하시어, 기도의 적인 죄를 두려워 하게 하셨다(18절).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는" 것을 나는 매우 잘 알고 있다. 유대학자들 중 어떤 자들은 위선자인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지닌 자들인데 그들은 이말에 매우 부패한 주석을 달아놓고 있다.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즉(그들은 말한다) 내가 마음의 죄만을 허락하고 내 말이나 행동으로 죄악을 범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듣지 아니하시리라." 즉 그가 나를 불쾌하게 여기시지 않을 것이며, 그것을 주목하지 않으실 것이며, 따라서 나를 책망치 않으시리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마치 마음의 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죄가 아닌 것처럼 책망하지 않으시리라는 것이다. 이것이 그릇되다는 사실을 우리 구주는 율법에 대한 영적인 해설 속에서 보여 주셨다(마 5장). 그러나 이것에서의 이 의미는 명백하다.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뿜으면," 즉 "내가 그러한 생각에 호의를 가지면, 내가 그것을 사랑하여 그것에 몰두하고 내 자신을 그것에 허용하면, 또 내가 그것을 친구로 대우하고 그것을 환영하며 그것을 준비하며 그것과 헤어지기를 싫어하면, 비록 이처럼 장려하고 많이 범한 것이 마음의 죄에 불과할지라도 내가 그것을 달콤한 음식처럼 내 혀 밑에 굴리면, 내가 속 마음으로 그것을 즐거워하면,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들으시지 않고 그것을 용납하시지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즐거워 하시지도 않을 것이다. 또한 "나는 그것에 대한 평화의 응답을 기대할 수 없다" 는 뜻이다. 마음에 품은 죄악은 분명히 기도의 위로와 성공을 망친다는 것을 유의하자. 왜냐하면 "사악한 자의 제물은 여호와께 가증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죄를 계속 사랑하고 그것과 동맹하는 자는 약속 속에서나 중보자 안에서 유익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기도에서 성공하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다.

(3)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대해 은혜롭게 평화의 응답을 허락해 주셨다(19절). "그러나 하나님이 실로 들으셨도다." 비록 나 자신이 내 안에 잘못된 것을 많이 자각했기 때문에 내 기도가 거절될까봐 두려워하기 시작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나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존중하기를 즐거워하셨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을 하나님은 그의 영혼을 위해 행하셨다. 그의 기도에 응답하심으로써, 하나님은 그에게 그의 은총의 표적을 그리고 그가 그 안에 선한 일을 역사 하셨다는 증거를 주셨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하고 결론 맺고 있다(20절). 앞에 두 귀절은 삼단 논법의 대명제와 소명제이다.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하나님이 듣지 아니하시리라." 그것이 명제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실로 들으셨도다." 이것은 가정이다. 여기에서 그는 합리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추론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 마음에 죄악을 품지 아나하나이다." 그러나 그 자신이 위로를 취하는 대신, 그는 하나님께 찬미를 돌리고 있다. "하나님은 찬송하리로다." 전제가 어떠한 것이든, 하나님의 영광이 항상 그 결론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들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우리가 기도로써 얻은 것은 찬미와 함께 써야 한다. 기도에 응답하는 긍휼은 특별히 우리로 하여금 감사하게 만든다. 그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 그 구원이 그의 어떤 기도가 가치 있었기 때문에 허락된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게 하기 위해, 그는 그것을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덕분으로 돌리고 있다. 이것을 그는 수정하는 방식으로 첨가하고 있다. "구원을 끌어온 것은 내 기도가 아니라, 그것을 보낸 그의 인자하심이었다."고.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신다. 그는 우리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므로 그것은 우리 소망의 근원이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 찬미의 내용이어야 한다.

 

66:14 없음.

 

66:15 없음.

 

66:16 없음.

 

66:17 없음.

 

66:18 없음.

 

66:19 없음.

 

66:20 없음.




































 


Articles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