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1
인자와 공의 - 물론 이 둘은 다윗의 찬양의 주제가 되는 하나님의 고귀하신 속성들이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통치 원리를 본따서 그 자신의 통치와 그의 왕국의 틀을 형성하려는 왕으로서 그와 같은 속성들을 노래의 주제로 삼고 있다. 말하자면 그는 하나님의 자비와 의를 묵상하여 그 하나님의 자비와 의가 자신의 통치 가운데서도 드러나게끔 하기 위하여 애쓰고 있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탁월하신 통치 원리가 자신의 삶과 통치 속으로 이전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원이 그의 마음에 가득 찰 때까지 하나님의 자비와 의를 묵상할 것이다. 이런 의미를 중시할 때 여기서의 '찬송하겠나이다'는 '기도하겠나이다' 혹은 '묵상하겠나이다'로 바꾸어 보아도 무난하리라 여겨진다.
=====101:2
내가 완전한 길에 주의하오리니(* , 아스킬라 베데레크 타밈) - 여기서 동사 '아스킬라'(* )는 '헤아리다'(사 41:20), '가르치다'(32:7), '지혜롭게 행하다'(2:10), '형통하다'(사 52:13), '깨닫다'(106:7) 등을 뜻하는데 뒤에 나오는 '타밈'(* )이 어떤 '고결한(흠없는)행동'을 뜻하는 명사임을 고려할 때 '지혜롭게 행하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좋겠다. 이 같은 사실들을 종합해 재번역하면 '나는 온전한 행동 방식의 표본을 따라 지혜롭게 행하겠습니다'가 되겠다(I will myself wisely in a perfect way, KJV). 결국 본 구절은 도덕적으로 고결하며 흠이 없는 통치 방식을 따르고자 하는 다윗의 각오를 포괄적으로 밝히는 내용인 것이다. 절대 권력을 소유한 자는 너무도 흔히 자기 기만과 부패에 빠져 버릴 수 있다. 절대 권력을 쥐어서 모든 속박 내지는 제한으로부터 자유로운 독재자들은 흔히 자기 감정 혹은 어리석음을 따라 불의하고 불공평한 통치를 일삼기 마련이다(Perowne). 그러나 신정국(神政國)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나라로 이끌어가고자 했던 경건한 지도자 다윗은 남다른 각오를 다지고 있는 것이다.
주께서 언제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 바로 앞 구절을 연결시켜 본문을 번역하면 이렇다 : '당신이 내게 임하실 때 나는 온전한 행동 방식의 표본을 따라 지혜롭게 행하겠나이다.' 이것은 고결한 정치의 길 걷기를 각오하는 마음속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감동되고 자극되어 표출된 강한 신앙심의 표현이다. 부패하고 연약한 인생이 자력으로 어찌 주의 법도를 따라 고결성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기자는 그 일을 그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음을 절감하고서 정직하고 순전한 마음으로 외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문은 법궤가 시온으로 옮겨진 이후 다윗의 통치 조직이 공고해 지던 때에 되어진 언급으로 추측해 볼 수 있으며 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약속의 일부를 연상시키는 표현으로 볼 수도 있다 :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출 20:24).
=====101:3
비루(卑陋)한 것을 내 눈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이요 - '비루한 것' (* , 데바르 벧리야알)의 문자적인 뜻은 '벧리야알의 말(혹은 행동)'이다. '벧리야알'(* )은 '...이 없이'를 뜻하는 부정사 '벧리' (* )와 '유익한 것' 혹은'가치있는 것'을 뜻하는 '야알'(* )이 합쳐진 합성 대명사이다. 따라서 '벧리야알'은 '무익한(무가치한)것'이 되며 '데바르 벧리야알'은 '무익하거나 무가치한 말, 행동'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을 그 눈앞에 두지 않겠다는 것은 무익하거나 무가치한 말과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구체적으로 무익하거나 무가치한 말이나 행동은 고결한 통치를 해나가는데 저해가 되는 언행을 뜻한다. 바로 앞절 말미에 '재 집안'이란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저자는 자기 집안에서부터 그 같은 결심을 실천에 옮기고자 한 것 같다.
배도자들의 행위를 미워하니 이것이 내게 붙접지 아니하리이다 - '배도자들의 행위'(* , 아소 세팀)를 직역하면 '벗어난 행위'인데 결국 이는 정도(正道)에서 벗어난 그릇된 행위를 뜻한다. 저자는 그와 같은 행위를 미워한다고 말한다. 계속해서 그는 진리와 고결(순결)로부터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으로부터의 일탈(逸脫)의 유혹이 자신을 붙잡을 수 없다고 선언한다. 물론 일탈을 꾀하게끔 하는 온갖 유혹이 그를 에워쌀 수 있다. 예컨대 '정치를 하다보면 다 그럴 수 있다. 기묘한 술책을 계속해서 짜내야 한다. 권력은 사용하라고 주어진 것이다. 왕은 율법을 초월해 있다'등등과 같은 유혹이 그러하다. 그러나 그는 사단의 속삭임에 귀기울이기를 거절한다.
=====101:4
사특한 마음이 내게서 떠날 것이니 악한 일을 내가 알지 아니하리로다 (* , 레바브 이케쉬 야수르 밈멘니 라 로 에다) - 직역하면 '구부러진 마음을 가진 자는 나로부터 멀어질 것이며 악한 자를 나는 알지 않을 것이다'이다. 먼저 다윗은 자신이 따르게 될 규칙을 강조한 후 그가 일국(一國)의 왕으로서 행할 때 구체적으로 만나게 될 인사 경영에로 관심을 돌리고 있다. 그는 그의 왕국과 가정의 구성원이 될 자격이 없는 자의 성격을 개괄적으로 '그 마음이 구부러진 자', '악한 자'라고 말하고 있는데 후속절에서 그 성격을 좀더 세부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101:5
그 이웃을 그윽히 허는 자(* , 멜라오쉬니 바세테르 레에후) - 직역하면 '몰래 그의 이웃을 중상하는 자'이다. 왕의 은총을 얻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면서 아부하는 사람을 가리키는데 이 같은 사람은 권력이 있는 곳이면 어느 곳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간신배의 한 유형이라 할 수 있다.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 - '눈이 높고'에 해당하는 '게바 예나임' (* )은 구약에서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나오는 용어이나 18:27의 '교만한 눈'을 가진 자와 그 의미가 유사하다(Anderson). 또 '마음이 교만한 자'에 해당하는 '레하브 레바브'(* )는 그 문자적인 뜻이 '마음이 넓은 자'이지만 문맥상 '탐욕, 욕심이 그 마음에 가득한 자'가 맞겠다. 어떤 학자는 본 용어를 '욕심으로 그 마음이 부푼자'로 번역하고 있다(Perowne).
=====101:6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 왕 다윗이 선택한 신하의 자격은 고상한 가문 출신이나 재력, 재능, 업적, 아첨하는 입술, 비굴할 정도의 고분고분함 등이 아니라 변함 없는 충성심이 될 것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물론 여기 '충성'이란 말에는 그 왕에 대한 충성의 기초가 되는 하나님께 대한 신실성이 함축되어 있다.
=====101:7
본절은 거의 같은 말을 반복함으로써 기자의 굳은 각오를 잘 표현하고 있다. 다윗은 여기서 거짓을 도모하는 자는 결코 중용(重用)하지 않을 것이며 설령 실수로 기용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내 쫓겨나게 되고 말 것을 피력하는 것이다. 한편 본절의 '내 집안에'라는 표현은 2절과 그리고 '내 목전에'는 3절과 각각 대응을 이루어 시적 기교를 더해 준다(Alexander).
=====101:8
아침마다...멸하리니 - 악이 암흑의 그늘에서 그 싹을 드러내기가 무섭게 빛과 같은 공의의 광성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아침에 재판건을 처리하던 고대의 풍속을 연상시키는 표현이기도 하다. "아침마다 공평히 판결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자의 손에서 건지라"(렘 21:12);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치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간단없이 자기의 공의를 나타내시거늘..."(습 3:5).
본시는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다윗이 공의로 나라를 다스리겠다고 서약하는 '통치자
의 시'이다. 하나님의 통치를 찬양하는 일련의 시들(95-100편)이어서 신정국 왕으로서
의 다윗의 통치 자세를 배치함으로써 하나님과 왕 다윗의 통치 자세를 연관시키고 있
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대부분의 학자들은 본시를 '군왕시'(royal psalm)의 범주에
예속시킨다. 물론 군왕시는 직접적으로는 왕에 대한 찬양이지만 사실상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음에 대한 찬양의 의미가 있으므로 왕에 대한 찬양 이지만 사실상 여호와의 기
름부음 받음에 대한 찬양의 의미가 있으므로 결국 매시야를 예시하는 예언적 성격을
지니게 된다(2, 8, 20, 110편). 또한 본시는 통치자들의 태도를 알려주는 '지혜시'라
고도 볼 수 있다. 다윗은 자비와 공의를 통하여 성실하게 왕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하겠
다고 밝힌다. 따라서 본시는 왕의 경건한 자세와 서약을 보여주는 동시에 장차 이스라
엘을 영원히 다스릴 메시야의 모습을 예표적으로 드러내는 이중적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어떤 학자들은 본시를 '군왕시'보다 '개인적 탄식시'의 범주에 넣기를 좋아
한다. 이들은 2절에 쓰여진 '언제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라는 의문 형식이 주로 탄
식과 비통의 의미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6:4;42:3;90:13). 하지만 히브리 시
에서 자주 표현되는 이러한 의문 형식은 부정적 한탄의 의미라기보다는 오히려 급히
성취되기를 소원하는 시인의 간절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후자의 주장은 받아들
여질 수 없다.
한편 본시의 기록 배경에 대해서도 학자들마다 논쟁이 되고 있다. 이를 크게 두 가
지로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1 본시는 언약궤가 오벧에돔의 집에 있을 때 쓰여졌다는
견해이다(삼하6:1-11). 다윗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아비나답의 집으로부터
언약궤를 옮기려 했다. 그러나 웃사의 죽음으로 인하여(삼상6:6, 7) 다윗은 언약궤를
옮기지 못하게 되었다. 그때 그는 여호와의 궤가 거룩치 못한 자에게 올 수 없음을 깨
닫게 되었고(삼하6:9), 이러한 상황에서 다윗은 맹세의 형식을 통해 자신의 왕적 행동
이 깨끗하고 공의에 입각한 행동이 될 것을 결심하며 본시를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2 본시는 법궤가 옮겨진 이후에 진행된 다윗의 통치 초기에 쓰여졌다는 견해이다. 당
시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새로운 정부조직을 갖추어야 했다. 특히 요직의 관리들
은 충성되고 거룩한 성품의 소유자여야 했다. 결국 다윗은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통치 속성을 상기하며 먼저 자신의 거룩함을 맹세하고 이어서 자신과 함께하는 관리들
역시 흠없는 자들로 뽑을 것을 결심하게 되었던 것이다(2, 3, 6, 7절).
이상에 살펴본 두 가지 견해 중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주장은 두 번째 입장이
다. 본시는 다윗의 통치 철학을 소상하게 밝혀주고 있는데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구
하며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게 행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부각되어 있다. 사실 가나안
에 정착한 이스라엘은 처음에 무정부적 상태가 지속된 사사(士師)시대가 있었으나 혼
란이 극심함으로 점차 하나님의 택하신 왕이 이스라엘을 다스려야 한다는 왕정 사상으
로 발전하게 되었다. 결국 왕은 하나님의 대리통치자로서 항상 하나님의 기준과 원칙
을 그의 통치 전반에 적용하여야만 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시에 나타난 다윗의 결의
와 마음 자세는 신정 국가에서의 이상적인 왕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본시는 내용 전개에 따라 1 다윗의 개인적인 행동 기준(1-4절) 2 다윗의 타인에
대한 통치 원리(5-8절)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를 좀더 세부적으로 분류해 보면 왕
이 하나님에게 헌신을 다짐하는 부분(1-2a절), 왕이 마음에서부터 정결한 행위를 다짐
하는 부분(2b절-4절), 그리고 왕이 신실하고 충성된 자와 함께할 것을 다짐하는 부분
(5-8절)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내용으로 볼 때 결국 본시는 진실되고 경건한 마
음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고 아울러 거룩하고 공의롭게 살 것을 다짐하는 다윗
의 신앙심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본문 외적 상황(context)에 기초하여 본문 자체(text)를 점더 세밀하게 살
펴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 특징적인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 본시에 나타난 다윗의 충성심은 바로 하나님의 인자와 공의에 근거한 것이었
다(1절). 시인은 자신의 결심을 고백하는 초두에서 하나님의 인자와 공의를 먼저 찬양
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모든 백성들의 행위의 근거가 되는 것
으로 다윗 또한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에 근거하여 왕으로서의 직분을 수행하려는 생각
임을 보여준다. 사실 하나님이 인자하시고 공의로신 분이라는 사상은 출애굽 후 이스
라엘 백성에게 주었던 율법의 조항들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예를 들면 가
난한 자들과의 이자 거래는 금지하고(출22:25;레25:35-37;신15:7-11), 그들의 옷을 전
당잡았을 경우에 해지기 전에 돌려 보낼것(출22:26, 27)등은 하나님이 자비하신 분임
을 보여준다(출22:27). 하지만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공의가 다음 조항인 재판의 공정
성 속에서 드러나고 있다. 즉 가난한 자와 송사라고 할지라도 편벽되이 두호(斗護)하
거나 불공평스런 입장을 취하지 말라고 명령한다(출23:3, 6). 이는 결국 고아와 과부,
가난한 자들을 자비로 선대하시는 하나님은 공의와 공정함을 또한 요구하시는 분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하나님과의 언약에 입각한 '인애와 공의'의 실천을 초국했던 것이다(호12:6;미
6:8). 따라서 다윗 역시 하나님의 통치를 대햄함에 있어서 그 통치 원리를 '인자와 공
의'라는 하나님의 속성에서 찾고 있음을 알 수 있다(1절).
둘째, 다윗의 통치 원리의 개인적 표준은 하나님 앞에서의 완전함이었다(2-4절).
시인은 먼저 통치자로서 자기 자신의 깨끗함과 완전함을 다짐한다(2절). 이러한 태도
는 다윗이 중심에서 우러나온 진실과 정직에 따라 이스라엘을 통치하겠다는 강력한 의
지의 표명이다. 그러나 이러한 완전한 마음과 행위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결코
이룰 수 없는 것이기에 시인은 주의 임재와 도우심을 사모하고 있다. 또한 다윗은 비
루한 것, 배도자의 행위, 사특한 마음등과 같은 악한 일을(3, 4절)자신의 속에 두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상에서 우리는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아 완
전하고 흠없는 마음을 갖추고 하나님의 계속적인 도움을 간구하면서 이스라엘을 통치
해 나가려고 노력함을 볼 수 있다. 다윗 왕은 사울 왕이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 신뢰와
순종을 포기하고 스스로 올무에 빠져 멸망당한 것처럼 되지 않기 위해(삼상15:10-35)
자신을 살피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셋째, 다윗의 신하들에 대한 인사 원칙 또한 충성과 완전함이었다(5-7절). 시인은
교만한 자와 거짓된 자들(5, 7절)을 멀리하고 오직 충성된 자와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들을 관직에 참여시키겠다고 다입한다(6절). 이는 일개 국가와 왕으로서 참신한 길
에 행하는 자들을 관작에 참여시키겠다고 다짐한다(6절). 이는 일개 국가의 왕으로서
참신한 내각을 구성하겠다는 결의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의 왕으로서 하나
님을 대신해 그 나라를 다스리겠다는 다윗의 신앙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실 교만, 거
짓 등의 악은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인 이스라엘을 파괴하고 약하게 하는 것들이다. 그
렇기 때문에 시인은 결론적 선언에서 악인과 죄인을 왕으로서 성에서 멸하겠다고 말하
고 있다(8절). 결국 다윗이 언약 공동체를 강하게 보넣하려는 열심은 죄와 사망의 모
든 악한 세력들을 타파하고 그 나라를 깨끗케 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숭고한 열의를 예
포하고 있는 것이다(고전15:24;요일3:8).
이처럼 본시 전체에 흐르고 있는 왕으로서의 다윗의 신앙과 열심은 결국 예수 그리
스도의 메시야적 통치에 실현을 묵시적으로 나타내고 있다(사11:1-5). 따라서 본 시편
은 다윗언약의 실현에 따라 메시야가 완전한 공의와 사랑에 입각해 여호와의 성을 다
스릴 것을 찬양하는 메시야 시편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상의 내용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배울 수 있게 된다. 1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인 교회의 성도들은 모든 행위의 기준을 하나님의 속성인 '공의와 사랑'에 두어야 한다(호12:6;미6:8). 2 통차지나 대표자의 위치에 있는 자들은 먼저 주의깊게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 하나님 앞에서 바난받을 일이 없는지를 살펴야 한다. 2 통치자나 대표자는 자신의 수하에 성실하고 정직한 자들을 둠으로써 정의로운 사회 구현에 힘써야 한다. 2 그리스도의 통치는 결굴 모든 백성을 악에서 구별하여 오직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도록 하는 것이다(출19:5, 6;계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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