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이사야 6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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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1

가증스러운 예배 (이사야 66:1-4)

Ⅰ. 하나님은 성전보다 은혜로운 심령을 존중하신다(1,2절). 예언자 시대와 그리스도 당시의 유대인들은 성전을 대단히 자랑했으며, 성전에서 아주 큰 일을 기대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을 겸비케 하며 그들의 헛된 신뢰를 불식하기 위해 그리스도와 선지자들은 성전의 멸망을 예언하였고 하나님이 성전을 떠남으로 곧 황폐해질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성전은 갈데아인에 의해 멸망되었다. 그러나 그런 뒤 성전은 독재건되고 예배 의식은 그에 따라 부활된다. 그러나 로마인은 성전을 영원히 파괴하고, 따라서 의식법은 철폐될 것이다. 이런 사태에 미리 대비시키기 위해 선지자는 본문에서처럼 성전이 하나님께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그들에게 자주 말하게 되는 것이다.

1. 하나님은 성전을 필요로 하지 않으셨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보좌요, 통치의 보좌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보좌에 앉으셔서 가장 고귀하고 존귀하신 통치를 하시며 모든 송축과 찬송을 받으신다. 땅은 그의 발등상이다. 그는 그 발등상 위에 서서 땅 위의 모든 사건을 자기 뜻대로 다스리신다. 하나님의 보좌가 그렇게 빛나는 것이며, 그의 발등상이 그렇게 크다면 인간들이 하나님을 위해 무슨 집을 지을 수 있으며 그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 있으랴? 그의 영광이 거할 수 있는 곳은 인간의 손이 지을 수 없다. 영원하신 마음이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에서 어떤 만족을 얻을 수 있겠는가?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고(사 40:28)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는 분이(시 121:4)인간처럼 안식할 집이 필요하겠는가? 또는 설사 필요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집을 지으라고 말씀하시지도 않으실 것이다(시 50:12). 왜냐하면 그가 직접 하늘과 천국, 이 땅과 모든 경계, 그리고 천지의 모든 생물을 지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만물이 있기 영원 전부터 스스로 자족하시므로 인간의 덕을 볼 리가 없다.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다." 만물은 자기를 창조한 바로 그 권능에 의해 계속되고 유지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행은 하나님에게까지 영향을 끼칠 수 없다. 만약 하나님이 스스로 거하실 집이 필요하다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이미 만드셨을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자기 집을 만드셨다면 그 집은 그의 법칙에 따라 다른 피조물과 함께 오늘날까지 계속 존재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의 손으로 지은 성전을 필요로 하지 않으셨다.

2. 하나님께서는 겸손하고 참회하는 은혜로운 심령을 바라심으로 성전에는 관심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이 만든 성전을 함께 소유하고 계시지만, 이 모든 것을 하찮게 여기시고, 심령이 가난하며, 겸손하고 진지하며, 자기를 낮추고 부정하며 자기 심령의 죄를 통회하고 안타까이 용서를 비는 자를 의롭게 여기신다. 또 벨릭스처럼 설교가 끝나면 곧 없어져 버리는 일시적인 가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엄위로우심과 순결하심 그리고 그의 공의와 진노에 대한 항구적 경외감을 갖는 자들은 "그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들" 이다. 바로 그러한 심령이 하나님의 살아있는 성이어서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거하신다. 그런 심령이 하나님의 안식처요, 그런 심령이 하늘과 땅처럼 하나님의 보좌요, 발등상인 것이다.

Ⅱ. 제사는 불경건하게 행해질 때 경시된다. 악인의 제사는 열납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기까지 한다(잠 15:8). 이것은 대개 3절과 4절에서 나타난다. 다음을 보자.

1. 그들의 제사는 하나님께 얼마나 역겨운 것이었던가? 포로 귀환 후 세속화한 유대인들은 우상 숭배로 전락하진 않았지만 하나님 예배에 매우 부주의하고 소홀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눈멀고 절고 병든 짐승을 희생물로 바쳤다(말 1:8, 13). 그들의 제사는 이처럼 하나님께 가증한 것이 되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희생물을 눈여겨 보지 않고 중시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어찌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제사를 존중하시고 중시하실 줄로 생각할 수 있겠는가? 복음은 큰 희생 제물의 드림을 선포하고 그것은 모든 기존 의식 예배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런 뒤에도 불신 유대인들은 마치 모세 율법이 계속 발효 중이며 해마다 나아오는 자들을 온전케 할 수 있기라도 하는 듯이(히 10:1), 계속해서 제사를 드렸다. 이것은 가중한 짓이었다. 자기 식탁을 위해 "소를 잡는" 자는 얼마든지 잡아도 좋다. 그러나 하나님의 제단을 위해 소를 잡는 사람은 마치 "살인함과 다름없다. 제사를 구실로 소를 잡는 것은 살인만큼이나 하나님을 격노케 하는 것이 된다. 소를 죽이는 자는 결국 그리스도의 희생을 도외시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히 10:29)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것이 된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철폐시키기 위해 죽으신 일을 다시 확립하는 것이다.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긴커녕 그를 모욕하는 셈이다. 설사 자기 양떼 중 가장 좋은 새끼 양을 바치더라도 그런 물질로써 하나님을 만족시키겠다는 생각이라면 그것은 이만 저만 잘못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개의 목을 꺾는 것과 같다. 개는 율법에서 몹시 악한 동물로 간주되었으므로 나귀는 속건 제물로 열납하는데 반해 개의 소득은 결코 성전에 바칠 수 없었다(신 23:18). 예물 즉 소제나 전제를 드리는 자는 돼지의 피로 속죄하려는 것과 같다. 돼지는 먹거나 만져서 안 되는 동물이었다. 돼지고기의 국물도 가증한 것인데(사 65:4)하물며 그 피랴! 하나님께 분향하면서 그리스도의 중보의 향을 경멸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없다. 그것은 그들이 거짓 신을 숭배할 때 하나님을 대단히 모독하는 것과 다름없다. 위선과 속됨 역시 우상 숭배 만큼이나 저주스러운 것이다.

2. 제사를 이처럼 가증스럽게 만든 그들의 악은 무엇이었나? 그것은 그들이 자기의 길을 택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택한 길은 자기의 악한 마음의 길이었다. 그들의 손 뿐만 아니라 "마음도 가증한 것을 기뻐했다." 그들은 행위가 악하고 부도덕했으며, 하나님이 명심하신 길보다 죄의 길을 택했고 하나님께서 노여워하실 일을 기뻐하였다. 이것이 그들의 제사를 하나님께 역겹게 만든 것이었다(1:11-15). 신앙 고백으로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하면서도 악한 생활을 하는 자들은 마치 하나님이 악의 후원자라도 되는 듯이 그를 모독하는 자들이다. 더욱이 그들의 악을 더욱 가중시킨 것은 회개와 개혁을 촉구하는 소리가 자주 들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 악을 고집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모든 경고와 은혜로우신 모든 제안에 귀를 막고 듣지 않았다. 이 부분은 앞 장 12절과 유사하다.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도다." 이것은 앞 장에도 나왔다(65:12).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무엇을 보시는지 관심하지 않으며 따라서 하나님이 즐겨하지 않으시는 일을 택하였다(사 65:12). 일상 생활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주의하기는커녕 도리어 그를 도발시키려고 하는 자들이 어찌 자기들의 예배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으로 기대할 수 있을까? 이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살 것이 아닌가?

3. 이로써 심판이 그들 위에 임하였다.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나도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리라" 고 말씀하신다. 가테이커(Gataker)선생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선택을 했다. 그래서 나는 이제 나의 선택을 하겠노라. 그들은 내게 하고 싶은 길을 택했다. 그러니 나도 그들에게 하고 싶은 길을 택하겠노라." 혹자는 유혹을 환영 또는 "조롱" 거리로 해석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악으로 하나님을 우롱하고 그를 모욕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원수에게 넘겨 유린당하고 모욕박게 하실 것이다. 또는 그들은 자기 기만의 헛된 자만으로 미혹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벌로 삼으실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막대기와 채찍으로 자기를 때리게 될 것이며 헛 것을 보고 제발로 파멸을 향해 뛰어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실 것이다. 즉 그들에게 큰 공포가 될 일을 내리시거나 아니면 그들이 두려워하여 죄많은 계략으로 모면해 보려고 생각하던 일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실 것이다. 믿지 않는 마음과 고요하지도 정화되지도 않은 양심에게는 그들 자신의 두려움이 임하는 것보다 더 불행하게 하는 일은 없다.

 

66:2 없음.

 

66:3 없음.

 

66:4 없음.

 

66:5

교회의 위로와 확대 (이사야 66:5-14)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하고 그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는 위선자들에게 심판을 선포하던 선지자가 여기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로 예언을 돌려서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한다. 그들은 불신 민족에게 내릴 심판에서 면제될 것이다. 목사들은 악인에게 두려운 심판을 말할 때 이와 같이 "의인의 마음을 근심하게 하지" 않도록(겔 13:22)조심해야 한다. Bone Christiane, hoc nihil ad te---- 즉 선한 그리스도인이여 이 일은 당신에게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로운 모습을 확신케 했다.(2절) 여기에서는 다시금 하나님의 은혜로운 말씀을 전달해 주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위로가 비축되어 있어서 진정한 회개로 위로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곧 위로의 곳간이 된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에 어떤 자들은 듣지 않지만 또 어떤 자들은 귀를 기울인다. 심령이 말씀을 인하여 떨면, 귀는 말씀에 대해 열려질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는 그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가?

Ⅰ.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박해자들에게 대해 신원해 주시며 정당한 데도 피해입는 그들의 사정을 옹호해 주시리라는 것을 알아야 했다(5절) "너희를 미워하는 네 형제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를 쫓아내면서도 여호와께서 영광을 받으리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너희 기쁨으로 나타나실 것이다" (한글 개역과 다름:역주). 아마 이것은 포로 귀환시의 일부 유대인들의 경우를 가리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에서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것은 복음을 유대인들 사이에 처음으로 선포하고 고백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낫다. 그것은 복음 선포 당시의 유대인에게 꼭 부합한다. 다음을 살펴보자.

1.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은 어떻게 핍박을 받았는가? 그들의 형제들은 그들을 미워했다. 사도들은 나면서부터 유대인이었지만, 이방 도시에서 만난 유대인조차 그들을 미워하고 괴롭히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고, 이방인들을 선동하여 그들을 치게 하였다. 신부는 자기 어미의 자식들이 자기에게 노했다고 호소한다(1:6). 빌라도는 "네 나라 사람이 너를 내게 넘겨 주었다" 고 예수께 말한다(요 18:35).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사업을 격려해야 마땅할 형제들이 오히려 그들을 미워하고 회당에서 쫓아내며 그들이 실제로는 국가와 교회의 최대 축복이 되는데도 마치 최대의 손해가 되기라도 하듯 파문에 처했다. 이것은 뱀의 후손에게 들어있는 묵은 원한이었고 여자의 후손에게 대한 오래된 적의였다. 그리스도를 미워한 자들은 그의 제자도 미워했다. 왜냐하면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왕국과 그 나라의 세력을 지지하기 때문이다(요 15:18). 그들은 그의 이름을 인하여 사도들을 내쫓았다. 왜냐하면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부름받아, 그의 이름으로 불리우며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내걸기 때문이다. 보라! 교회의 책망이 오용되고 교회의 방어를 위한 대포가 교권자의 배신 때문에 거꾸로 교회의 가장 친한 친구에게로 향하는 것은 전혀 뜻밖의 일이 아니다. 이런 짓을 한 자들은 "여호와께서 영광을 받으리로다" 라고 말했다. 그들은 양심을 가장하며 하나님의 명예에 대해 열심히 있는 체하며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정열도 가장했다. 그리고 그들은 형식적 예배로 이 모든 일을 행했다. 우리의 구주께서는 이 일을 설명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요 16:2)고 하시는 것 같다. In nomine Domini incipit omne malum ---- 즉 온갖 종류의 악은 주의 이름에서 시작된다. 또 이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말로 해석될 수도 있다. 너희들은 너희가 구원받을 때 하나님이 영화롭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렇거든 그가 그 일을 속속히 이루게 하여 우리로 보게 하라(사 5:19).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케 하라(마 27:43)" 혹자는 이것을 포로기의 타락한 유대인의 말로 이해한다. 그 유대인들은 해방을 대망하는 동포들을 조롱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곧 유대인의 해방으로 영광을 받게 되실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위로받던 형제들을 조소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와 같이 불쌍한 자의 경영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 온갖 일을 행하였다(시 16:6).

2. 그들은 이런 핍박 아래서 어떤 권면을 받았는가? "네 신앙과 인내를 조금만 더 부지하라. 너희 대적이 너희를 미워하며 압제하고 너희 형제가 너희를 미워하며 쫓아내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셔서 다른 사람들이 감히 너희를 위해 나서려고 하지 않을 때 나타나실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너희에게 위로가 되도록 사태를 조종하실 것이다. 여호와께서 나타나셔서 너희를 기쁘게 하시고 핍박자와 유린자들을 혼란케 하실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너희에게 대한 적의를 수치로 여기게 될 것이다." 이 일은 예루살렘에 임박한 멸망의 징조를 보고 유대인들이 공포에 떨 때 성취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미워하고 핍박했던 그리스도의 때가 닥아온 것을 알게 될 것이다(눅 21:26, 28).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은폐하시는 것 같지만, 적합한 시기에 나타나실 것이다.

Ⅱ.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나타나실 때 세상에는 큰 소리가 난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6절). "훤화하는 소리가 성읍에서부터 오며, 목소리가 성전에서부터 들릴 것이라." 혹자는 기것을 교회의 친구들이 기뻐하여 부르짖는 환호성으로 해석하는데 또 다른 자들은 교회를 대적하는 자들의 비명과 곡성으로 해석한다. 교회의 원수들은 그때 도성에서 놀라 비명을 지르며 성전으로 도피하려 하나 소용이 없어 슬픈 소리를 낼 것이다. 이 목소리는 이제 그 대적에게 보응하고 계신 여호와의 목소리의 반향에 지나지 않는다. 심판을 선언하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소리가 슬픈 비명의 소리로 되돌아 오는 것을 듣게 될 것이다. 오랜 포위 끝에 예루살렘의 로마인에게 함락되었을 때 그 도성과 성전에서 얼마나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는지 상상하기란 어럽지 않다. 혹자는 이 예언이 예루살렘 멸망 전에 있은 이상에서 성취되었다고 한다. 이 이상은 조세푸스의 "유대 전쟁사" 7권 31장에 기술되어 있다. 즉 그때 성전문들이 갑자기 저절로 열렸고 제사장들은 지성소에서 부산하게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으며 그리고 곧 "우리가 여기서 떠나자" 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얼마 후 [예수 바 -- 안나스](Jesus Bar-Annas)라는 사람이 초막절에 도성을 오르내리면서 "동방에서도 소리, 서방에서도 소리, 사면팔방에서 소리가 난다" 고 계속 외쳤다는 것이다.

Ⅲ.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실 것이며 그 교회는 순식간에 편만하게 퍼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했다(7절). "구로하기 전에 생산했다." 이 말은 바벨론 포로의 해방에 적용된 수 있다. 출애굽 때와 마찬가지로 바벨론에 포로되었던 유대인들은 매우 용이하게 또 매우 조용한 가운데 해방되었던 것이다. 출애굽은 "권세" 와 권능으로 된 일이었다(신 4:34). 그러나 바벨론 포로의 해방은 만군의 "여호와의 신으로" 된 일이다(슥 4:6). 태어난 남자 아이는 기쁨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산모는 결코 출산 때문에 구로하지 않았다. "고통을 당하기 전에 낳았다." 애굽 사람들이 히브리 여민을 일컬어 "그들은 건강하여 산파가 이르기 전에 해산한다" (출 1:19)는 말만 아니라면 이 일은 극히 놀랍고 희귀하고 유례없는 일이었으리라. 그러나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는가? 땅이 어찌 하루에 열매를 내겠는가?(홈정역) 봄철이라도 지면을 새롭게 하여 그 소산물로 뒤덮이게 하는 데는 수 주일이 걸린다. "민족이 어찌 순식간에 생기겠는가?" 여인이 한꺼번에 한 나라를 이룰 자녀를 낳아서 그 자녀가 곧 성숙하리라고 상상할 수 있는가? 이 같은 일이 천지창조시에 행해졌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후 모든 그런 일에서 안식하자 만물이 점차로 그 열매를 생산하게 하셨다. Nihit facit per saltum ---- 즉 그는 아무 것도 돌연히 행하지는 않으신다. 그럼에도 이 경우에는 "시온이 구로하기 전에 생산했다." 고레스의 칙결이 포고되자 마자 포로들은 무리를 이루어 고국에 돌아갈 수 있는 최선의 길을 모색했다. 9절에는 이 일을 가능케 한 이유가 여시되어 있다. 그 일은 여호와가 하신 일이었다. 그 일을 떠맡으신 분은 그 행위가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다. 그가 임신케 하셨으면 해산케 않으시겠는가? 그가 자기 백성의 해방을 준비하셨다면 그들의 해방도 성취시키지 않으시겠는가? 그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모든 일이 준비를 완료하고 성숙되며 해방의 달 수가 차서 아이가 나오게 될 때 내가 어찌 해산할 힘을 주지 않고 산모와 아이가 극히 비참하게 죽도록 내버려 두겠는가? 이것이 어찌 나의 긍휼과 부합하겠는가? 내가 어찌 시작만 해놓고 끝을 맺지 않겠느냐? 그것이 어찌 나의 능력이나 완전과 부합하겠느냐? 하나님은 인간과 모든 생물을 땅에 번성하게 하시는 분인데 그가 어찌 시온을 금할 것인가? 하나님은 축복받을 후손들로 하여금 교회를 신앙적으로 만들게 해서 교회가 널리 퍼지게 하시지는 않을 것인가? "나는 해산케 하는 자인즉 어찌 태를 닫겠느냐?" 하나님께서는 그의 목적과 약속 가운데서 해방을 잉태하셨는데 성취와 완성 가운데서 그것을 해산케 하사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세상에 세울 그리스도 교회 수립의 예표였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가정이 융성해지는 모습이었다. 성령이 쏟아지고 복음이 시온에서 나왔을 때 무리들은 순식간에 회심했고 그 큰 성과와 비교할 때 그 고통은 없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사도들은 구로하기 전에 생산했고 그리스도께 낳은 자녀들은 너무나 쉽게 급증하여 그들은 어머니의 모태에서 난 아들들 이라기보다는 아침 이슬의 아들들 같았다(시 110:3). 복음의 성공은 경이적인 것이었다. 복음의 빛은 마치 아침 햇살처럼 땅 끝까지 그 빛을 비추었다. 성읍들과 민족들이 단번에 그리스도께로 출산되었다. 성령이 강림한 날에 삼천 명의 심령이 교회에 들어왔다. 이 영광스러운 일이 일단 시작되지 신기할 정도로 수행되었고 그 성과는 상상을 초월한다. 주의 말씀은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었다" (행 19:20). 죄 가운데 태어났던 사람들도 하나님께 돌아옴으로써 거듭나게 되었다.

Ⅳ. 그들은 현재의 고통이 곧 충만한 기쁨으로 바뀔 것을 알아야 했다(10,11절).

1. 교회의 친구들은 어떻게 묘사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그들은 "그를 사랑하며 그를 위하여" 그와 함께 슬퍼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루살렘도 사랑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여 언제나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교회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며 교회와의 교제를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자들이다. 교회를 진실로 사랑하는 자는 교회가 투쟁적 상황에서 괴로워할 때 온갖 근심 걱정으로 진심으로 동정한다. 그들은 교회를 위해 슬퍼한다. 교회의 온갖 비탄은 그들의 슬픔이 된다. 예루살렘이 환난 중에 있으면 그들은 수금을 버드나무에 걸어 놓고 수심에 잠긴다.

2. 그들은 어떻게 격려를 받는가? "함께 기뻐하라." 이 말은 거듭 반복된다. "함께 즐거워하라." 이것은 예루살렘이 즐거워할 만한 일을 맞게 될 것을 암시해 준다. 애곡의 날은 종결되고 받았던 고난에 비례하여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교회의 모든 친구들이 교회와 함께 즐거워하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다. 교회가 받을 축복을 나누워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와 교회의 고난에 동참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하게 될 것이며 교회와 함께 즐거워하게 될 것이다.

(1) 우리는 교회의 영광에 동참할 것이다. "와서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하라. 너희가 교회의 고난을 함께 나누어 가졌기에 교회와 같이 즐거워해야 할 것이다."

(2) 우리는 교회가 위로받을 때 동참한다. 우리는 교회의 위로하는 품에서 젖을 빨며 만족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의 언약(특히 그 언약의 약속들)과 하나님의 규례 그리고 하나님을 모시는 온갖 기회와 교제는 곧 교회의 위로하는 품이다. 교회는 위로는 거기에 쌓여 있다가 기도와 신앙에 의해 반출된다. 우리는 교회의 이런 품에서 젖을 빨아야 한다. 즉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 스스로 적용하고 하나님의 규례를 부지런히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얻는 위안에 만족해야 하며 거의 위안을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불만을 가져서는 안 된다. 교회가 주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모시는 것은 영광이며 양자됨과 하나님 예배가 교회에 속한(롬 9:4)것도 영광이다. 이런 영광의 풍성함을 인하여 우리는 즐거워해야 한다. 우리는 인간적인 기쁨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즐거워하며 그와의 교제를 더 즐거워해야 한다. 교회의 영광은 무엇이나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다. 특히 교회의 순결과 일치와 증가는 우리가 기뻐해야 하고 영광으로 삼아야 한다.

Ⅴ. 그들에게 기뻐하라고 부르시는 분이 기뻐할 만한 일과 기쁨 마음을 주실 것이다(12-14절).

1.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기뻐할 만한 일을 주실 것이다.

(1) 그들은 중단되지 않는 번영의 길을 누릴 것이다. 대양에 합류될 때까지 물이 계속 빠지면서도 여전히 불고 계속 흘러가는 강처럼 내가 그에게 평강(즉 모든 선한 것)을 주리라. 복음은 이와 같아서 그 권능을 어디서 받든지 평화를 강같이 흐르게 하고 온갖 선한 것을 영혼에 공급하며 마치 강이 그 통과하는 땅을 비옥하게 하듯 영혼으로 많은 열매를 맺게 한다. 평강의 강은 세상을 위로하는 샘 근원 같아서 세상의 혼난의 댐도 그 물길을 멈추거나 저지할 수도 없고 역류시킬 수도 없다. 그 강은 우리를 한없이 행복한 바다로 운반할 것이며 세상의 고통의 모래톱에 메워지지도 않는다.

(2) 그들에게는 크고도 유익한 것이 첨가될 것이다. 이방인들의 영광이 넘치는 시내처럼 그들에게 올 것이다. 이방인 개종자들이 교회로 쏟아져 들어올 것이며 교회의 평화와 번영의 강물을 불어나게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영광과 함께 올 것이며 자기들의 부와 명예, 권력과 이익을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바칠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그 위로하는 가슴에서 젖을 빨게 될 것이다. 너희가 교회의 위로에 동참하는 무리를 보더라도 자신의 몫을 더 바라고 더 힘차게 확보하게 될 것이며 남들이 그리스도께 동참한다고 해서 네 몫이 적어질까봐 염려하기는 커녕(그럴 위험은 없다. 그는 모든 사람과 각자를 다 먹이고도 남음이 있다). 그들의 열심이 아주 많은 사람을 격동시키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복된 일이 된다" (롬 11:14; 고후 9:2).

(3) 하나님께서는 만유 중에서 영화롭게 되실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무엇보다 기뻐해야 할 것이다. "여호와의 손은 그의 종들에게 나타나리라." 그것은 그의 전능하신 권능으로 보호하시고 지켜주시는 손이며 다 할 수 없는 선을 베푸시고 풍성하게 하시는 손이다. 그의 종들이 이 손으로써 얻는 은혜는 그들의 영광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으로도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을 더욱 혁혁하게 하기 위해서 그는 그 원수에게 그의 진노를 더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는 밝히 드러날 것이며 영원히 칭송을 받게 될 것이다.

2. 하나님은 기쁘게 하실 뿐 아니라, 안위의 말씀을 그들의 마음에 베푸실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자는 그 뿐이다. 그가 시온의 모든 아들들을 어떻게 위로하시는지 살펴보자.

(1) 그들의 나라는 자비로운 양육자가 될 것이다. "너희는 어린아이처럼 그 옆에 즉 그의 팔에 안길 것이며 특히 피곤하고 언짢아서 잠재워야 하는 어린애들처럼 그의 무릎에서 놀 것이다. 교회에 가입하는 사람들 역시 이렇게 애정으로 대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위대하신 목자께서는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고 가신다" (사 40:11). 그와 같이 우리들 목자들도 양들이 용기를 잃지 않게 해야 한다. 개종자들은 사랑받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2) 여호와께서 그들의 강력한 안위자가 될 것이다. "병이 나거나 슬픔에 잠겨있을 때 어미가 아들을 위로함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 그는 슬기로운 아버지의 이성적인 설득은 물론 사랑하는 어머니의 따스한 사랑으로써도 위로하신다. 자애로운 어머니는 자식이 넘어져서 다칠 때 고통받는 자식을 인하여 슬퍼한다. 자애로운 어머니는 자식을 책망하고 나서 달래며 편안하게 해 주며 진정시키려고 애쓴다(렘 30:20). "내가 그를 책망하며 말할 때마다 내 마음이 그를 위하여 측은하노라." 그는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식이다. 어머니는 그와 같이 위로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라. 너희는 교회에 내리시는 은총과 교회가 드리는 감사에서 위로를 받으리라. 너희는 그 은총에 동참할 것이며 그 감사에 동감할 것이다."

(3) 그들은 그 위로가 자기들의 영혼에 미치는 복된 결과를 느끼게 될 것이다(13절) "너희가 이를 보고 즉 교회가 얼마나 복된 상태로 회복되었는지를 보고 너희의 혀와 얼굴 뿐 아니라 마음까지도 기뻐할 것이다. 이러한 것은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자기들의 사역이 성공하자 놀라운 만족을 느낀 일로 성취됐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를 보시고 말씀하신다" (요 16:22).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뺐을 자가 없으리라. 그 때에는 너희의 마르고 시든 뼈가(골수까지도 고갈되어)청년의 힘과 활력을 회복하여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 하나님의 위로는 속 사람에게 이르며 활력소로써 골수를 윤택케 한다(잠 8:8). 뼈는 신체를 부지하는 근간이다. 이들은 "여호와를 기뻐함이 네 힘이다" (느 8:10)는 위로로써 무성하게 될 것이다.

 

66:6 없음.

 

66:7 없음.

 

66:8 없음.

 

66:9 없음.

 

66:10 없음.

 

66:11 없음.

 

66:12 없음.

 

66:13 없음.

 

66:14 없음.

 

66:15

심판과 자비 (이사야 66:15-24)

이 구절은 구름 기둥과 불기둥처럼 하나님의 왕국과 그의 왕권에 대해 패역한 모든 원수에게는 어두운 면을 가지며 그의 충실한 신복들에게 밝은 면을 가진다. 아마도 이것들은 유대인의 바벨론 유수를 가리킬 것이다. 그들 중 일부는 피해를 입도록 하기 위해 그리로 보내졌다고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기서 자신의 다툼을 계속하시겠다고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기서 자신의 다툼을 계속하시겠다고 위협하신다. 그들은 개혁을 싫어했으므로 재난에 의해 파멸되어야 한다(렘 24:9). 다른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복이 되도록 하기 위해 바벨론으로 보냄을 당하였는데 그들은 고난을 성별해야 했다. 그들은 고난을 통해 자신을 성화시킴으로써 때가 되면 그 고난을 벗고 좋은 날을 보게 될 터였다. 여기에서 사용되고 있는 많은 표현들은 영광스러운 신의 섭리와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예언자가 보다 멀리 그리스도의 심판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리스도는 심판하러 이 세상에 오셨으며 다시 오실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 심판에서 귀한 것과 천한 것을 지을 것이다.

Ⅰ. 그리스도가 나타나셔서 자기에게 대항하는 모든 자들을 혼란과 공포 속으로 몰아 넣을 것이다. 그는 때때로 일시적 심판으로도 나타나실 것이다. 불신앙을 고집했던 유대인은 그의 불과 칼에 멸절당했다. 파멸은 매우 광범위했다. "여호와는 모든 혈육에게 심판을 베푸실 것이다." 그들은 그의 칼에 멸절되므로 여호와께 살륙된다고 한다. 그들은 그의 공의에 희생되며 그렇게 살륙당할 자는 많을 것이다. 저 큰 날에 하나님의 진노는 그의 불과 칼이 될 것이며 그는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진노로써 멸절시키고 회신시킬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죄인의 양심을 붙잡을 때는 불처럼 타오르며 좌우에 날선 검보다 예리하다. 우상 숭배자들은 그 진노의 날에 괴로움이 있을 것이다(7절). 아마 바벨론으로부터 돌아온 일부는 여기에 언급하는 미신이나 우상 숭배를 계속지키며 그들의 동산에 우상을 세웠을 것이다(감히 높은 곳에는 공공연하게 배우지 못했다). 그들은 거기서 스스로 거룩히 구별하였다(참! 신을 경배하는 자들이 그러하듯). 그들은 차례 차례로 우상 숭배 의식에 몰두했다. 또는 본문처럼 그들은 그 가운데 있는 나무 뒤에서" 즉 그들이 경배하던 아하드나 에하드 목상 뒤에서 의식에 열중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 목상을 경배하며 "돼지 고기를 먹었으며" (이것은 하나님의 계명에 정확히 금지된 것이다). "쥐나 다른 가증스런 동물" 을 먹었다. 그러나 이 예언은 하나님의 진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임하는 심판이다. 죄인들은 하나님을 경멸하면서 생활하고 세상과 육에 열중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 함께 망하리라(원의:소멸되리라)." "우상 숭배자들과 가증한 것을 행하는 자마다" 하늘의 행복으로부터 확실히 배척됨을 우리는 알 수 있다(계 21:27; 22:15). 원수를 갚는 날에는 은밀하던 사악도 밝히 드러날 것이요, 심판대에 오르게 될 것이다. "내가 그들의 소위와 사상을 아노라" (18절).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무엇을 행하며 어떤 원리에서 무슨 목적으로 행하는지 아신다. 그러므로 그는 세상을 심판하시기에 적합한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할 수 있기" 때문이다(롬 2:16).

Ⅱ. 하나님은 자기에게 충실한 모든 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의 위로와 기쁨이 되실 것이다. 그들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충실히 세웠고 은혜와 왕국을 수립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광된 나라의 상징적 첫 소산이다. 때가 이르면 멸망과 멸족을 자신에게로 모아서 "그들로 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빛 같은 영광을 보게" 하실 것이다(18절). 이 예언은 열방이 제자가 되며 방언의 은사를 받았을 때 성취되었다. 교회는 그 때까지 하나의 나라에 국한되었고 하나님은 오직 한 언어로 예배되었다. 그러나 메시야 시대에는 성전의 간막이가 헐리고 하나님께 생소한 이들이 그를 알게 되며, 유대인이 지성소에서 영광을 바라보았듯이 그의 복음 속에서 그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것이 여기에서 약속 되고 있다.

1. 유대 민족 중 일부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나머지 유대인과 구별되며 구원의 표를 얻게 될 것이다. "나는 그들 중에 모으는 기호를 세울 것이며 열방들은 그것을 찾으실 것이다(11:12 에 약속되었듯이). 뿐만 아니라 그들 중에는 내가 다르게 하는 징조를 세울 자도 있으리라(말 뜻은 그렇다)." 그들은 부패하고 타락하는 세대이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 중에서 남은 무리를 갈라내실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께 성별되고 그를 위해 일하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확실히 인정하실 표가 세워질 것이다(에 9:4). "하나님의 종들은 그 이마에 인침을 받을 것이다" (계 7:3). 주께서는 자기에게 속한 자들을 아시며 그리스도의 양떼는 표가 난다.

2.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구별된 이들은 다른 사람도 와서 그 은총을 받도록 초대하라는 사명을 받게 될 것이다. 그들은 민족 전체를 불신 속에 얽어매는 편견의 세력에서 도피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열방으로 보내어질 것이다. 그들은 복음을 듣고 열방 중에 가서 모든 사람에게 전파하도록 파송될 것이다. 스스로 장차 올 진노하심에서 도피한 자들은 타고 있는 나무를 불 속에서 끄집어 내듯 온갖 노력을 다해 남들도 이끌어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메시지를 감동적으로 전할 수 있는 자들을 보내시려고 하신다. 체험에 의해 자기들 스스로 위험을 간신히 벗어났기 때문에 그들은 남에게도 죄의 위험을 경고할 수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1) "그들은 열방으로 보내질" 것이다. 이 중 몇몇 지명은 지명되고 있다(다시스, ?, 룻 등등). 여기서 가리키는 곳이 어디인지는 확실하지 않고 해석자들의 견해도 일치하지 않는다. 다시스는 일반적으로 "대양" 을 의미한다. 하지만 혹자는 길리기아의 다소로 해석한다. "?" 은 때때로 앗시리아 왕의 이름으로 언급되었는데 아마도 그곳에는 이 이름의 지방이 있을 것이다. "룻" 은 활로 유명한 호전적 민족인 루디아를 의미하는 것 같다. 루디아인은 "활로 당기는 자" 로 불리워졌다(렘 46:9). "두발" 은 이탈리아나 스페인이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그리고 야완이 그리스 즉 이오네스라는 데는 거의 의견이 일치한다. 먼 섬들은 야벳의 후손이 거주하는 곳으로 아마(창 10:5) "나의 명성을 듣지도 못하고 나의 영광을 보지도 못한 멀리 떨어진 섬들" 일 것이다. 하나님은 유대에서만 알려졌었고 그의 명성은 거기에서만 수 세대를 거쳐 위명을 떨치는 큰 이름이었다. 다른 나라들은 흑암에 앉아 기쁜 소리를 듣지 못했고 반가운 빛을 보지 못했다. 여기서는 이 한스러운 그들의 상태를 동정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자기를 지으신 이의 이름을 듣지 못하고 그의 영광을 보지 못할 만큼 창조주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은 유감이다.

(2) 하나님의 심부름으로 열방에 보내진 자들은 "이방인들 가운데 그의 영광을 선포할" 것이다. 열방 속에 흩어질 유대인들은 유대 민족에게 대한 그 동안의 하나님의 영화로운 섭리를 선포할 것이며 이로써 많은 사람들이 그들과 연합하도록 초대받을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은 자기 규례 속에서 영화롭게 그들 중에 나타나실 것이다. 방언이 다른 열방의 온갖 사람들이 유대 사람의 옷자락을 잡고 자기들을 보다 달라고 간청하며 그와의 교제를 허락받으려 하며 자기들의 준비될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한다.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하노라 하리라" (스 8:23). 하나님의 영광은 이렇게 해서 이방 중에 부분적으로 전파되었다. 그러나 보다 분명하고 완전히 전파된 것은 사도들과 복음의 첫 전도자들에 의해서이다. 그들은 온 세상 먼 섬들까지 파송되어 복되신 하나님의 영화로운 복음을 전파했던 것이다.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 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셨다" (막 16:20).

3. 이로 인하여 많은 개종자들이 생길 것이다(20절).

(1) "그들은 너희 모든 형제들을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 것이다" (왜냐하면 개종자들은 형제로서 인정되고 환영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들에게 헛되이 전파되지 않을 것이며 그들은 여호와께 결속하도록 초대받고 지시받을 것이다. 그들에게 파송된 자들은 협상에 성공할 것이어서 사방의 모든 자손들이 예물을 가지고 올 것이다. 마치 절기 때 모든 남자들이 예물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듯 그들은 큰 무리가 되어 모여들 것이다.

[1] 그들이 올라올 때 어떤 사람은 말을 타고 올 것이다. 이는 유대인들이 절기 때 그랬듯이 걸어 오기에는 너무도 먼 길이기 때문이다. 신분 높은 사람들은 마차를 타고 올 것이다. 노인과 병약자, 어린이들은 교자나 수레에 또 젊은이들은 노새나 발이 빠른 짐승을 타고 올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그들의 열의와 오고싶은 마음을 잘 나타낸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위해 수고와 비용을 아끼지 않는다. 말을 탈 수 없는 자들은 교자를 이용해서 올 것이다. 그들은 늦을까봐 안달을 낸 나머지 가능한 한 사람들은 노새나 빠른 짐승들을 이용할 것이다. 이러한 표현들은 비유적이다. 이런 다양한 수송 수단들은 여호와의 택하신 가정들을 그리스도께로 보내기에 필요한 은혜로운 보조 수단이 풍성히 예비돼 있음을 암시한다. 모든 사람들이 환영받을 것이며 별다른 노력이나 용기가 요구되지 않을 것이다.

[2] 나아오게 될 자의 특징. 그들은 이전에 예루살렘으로 나아올 때와는 달리 예물을 드리기는 드리되 그들 자신이 여호와께 제물이 될 것이다. 이것은 자신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롬 12:1). 사도는 이것을 가리켜 "이방인을 위해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한다" 고 설명한 듯하다(롬 15:16). 그들은 자신을 바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전향에 결정적 역할을 한 자들은 그들을 하나님께 예물로 드리는 셈이 된다. 즉 사도들은 이방인과 회심자들을 탈취하여 그리스도께 바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존귀와 봉사에 헌신된 전리품인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예물을 깨뜻한 그릇에 담아 드림같이 그들은 여호와께 드려질 것이다. 그들이 성스럽고 죄에서 결백하고 하나님께 성결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큰 정성이 기울여질 것이다.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게 했다" (행 15:9). 이 말은 개심한 이방인을 일컫는 표현이다. 여호와께 드려지는 모든 것은 성별되고 깨끗한 그릇에 담겨졌다. 하나님은 자신이 정하신 방법으로 공경받고 예배 받으실 것이다. 하나님이 세우신 규례는 이런 신령한 예물을 담기에 적합한 그릇이다. 영혼이 하나님께 바쳐질 때 "그 몸은 영혼을 담는 깨끗한 그릇이 되어야 하며 색욕이 아닌 거룩함과 존귀함을 담고 있어야 한다" (살전 4:4, 5). 그리스도께로 회심한 자들은 마음에 피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이 깨끗해지고 맑은 물에 몸을 씻은 자들이다(히 10:22).

(2) 이것은 다음 두 가지 부류에 가리킬지 모른다.

[1] 예루살렘에 모여 메시야의 나라가 나타나길 대망하던 유대의 경건한 자들과 모든 열방의 개종자들(행 2:5, 6, 10) 그들은 사면 팔방으로부터 여호와께 대한 예물로써 성산 예루살렘에 이르렀다. 그들 중 상당수는 사도들에게 임한 방언의 은사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생각컨대 이 예언과 그 역사 사이에는 얼마간 일치점이 있다.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는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리기 위해 병거를 타고 왔다가 그리스도께 대한 지식과 거룩한 신앙을 얻어서 돌아갔다(행 8:27 이하).

[2] 그리스도께로 돌아서서 그의 교회를 흥왕케 할 이방인 사도는 모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이른 곳은 시온 산과 하늘의 예루살렘이라고 하는데(히 12:22) 이것은 바로 본 구절을 설명하는 것이다. 즉 본문에 나온 이 모든 행렬의 의미는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교회로 나아오며 마치 병거와 교자를 타고 오듯 주의깊고 안전하고 평안하게 은혜의 수단을 이용하게 된다는 뜻이다. 결국 여호와는 야벳으로 하여금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실 것이다(창 9:24).

4. 복음을 책임진 자들이 교회에 세워질 것이요, 21절에서 보듯이 그들은 점점 수적으로 확장될 것이다. 즉 나는 그들 중(회계자와 개종한 이방인들)에서 택하여 제사장과 레위인을 삼으리라. 그들은 성스러운 일과 종교적 집회를 인도하고 관장할 것이며 그들은 교훈과 예배와 훈련에 필요할 것이다. 이 때까지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모두 유대인 가운데서만 뽑았고 그들은 다 한 지파 출신이었다. 그러나 복음의 시대에는 여호와께서 회개한 이방인들을 불러 성직을 맡기고 사람들을 가르치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실 것이다. 그들은 하니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가 될 것이다. 그들은 율법 아래 있던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말씀 전파와 기도하는 일을 전담할 목사나 교사(또는 감독)가 될 것이다. 그들은 식탁을 공궤할 집사가 될 것이다. 레위인은 하나님 전의 외부적 소임을 맡았던 것이다(빌 1:1; 행 6:2-4 참조). 사도들은 모두 유대인이었으며 70명의 사도들도 그러하였다. 이방의 대 사도 바울은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다. 그러나 교회가 이방에 심겨지자 각 교회에서는 장로들을 택하여 관장하게 했으며(행 14:23; 딛 1:5) 이로 인해 주의 사업은 더욱 용이하게 되고 더욱 친숙하게 되었다. 그들은 설령 보다 존경을 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보다 환영을 받을 수는 있었다. 복음의 은혜는 선지자를 자기 고향에서 환영하지 않으려는 타락된 사람들을 치료한다. 하나님은 그 중에서 택하리라고 말씀하신다. 비록 그들이 영적 의미로는 하나님께 전부가 왕이요, 제사장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 중 그러나 일부만 택하여 제사장과 레위인으로 삼겠다고 하신다. 사역자를 택하여 봉사할 자격을 구비케 하고 봉사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하는 것은 사명을 주어 사역자로 만드는 일과 함께 하나님의 고유한 일이다. 그들을 삼으리라고 함은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받아들이며 그들의 제사직을 기뻐하신다는 의미다. 하나님이 저희 아들 중에서 선지자를, 저희 청년 중에서 나실인을 세우신 것(암 2:11)이 유대 교회의 영광이었던 것처럼 이것은 이방 교회의 큰 영광이 될 것이다.

5. 세워진 교회와 성직이 대대로 계속되고 유지될 것이다(22절). 메시야 왕국의 수립으로 생길 변화는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1) 우주적인 큰 변화가 있을 것이다. 앞에서 약속된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세계가 도래할 것이다(65:17). "이전 것이 지나고 보다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옛 특별 언약은 지나가고 새 언약, 은사의 언약이 세워졌도다" (히 8:13). "이제 우리는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섬기지 아니할지라" (롬 7:6). 하늘과 땅에 연관된 새 계명이 주어지며 이에 관한 새 약속이 함께 신약을 이룬다. 이들이 하나님이 창조하실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이는 끝날에 계획된 새 하늘과 새 땅을 예비함이다(벧후 3:13).

(2) 하나님이 만드는 변화. 즉 그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지으실 것이다. 그 변화는 새 세계를 만든 능력과 새 규례를 만들 권세를 소유한 분에 의해 야기되었다.

(3) 그것은 영원히 변치않는 변화요, 새 세계는 항상 새로울 것이며 곧 사라져 버리는 것처럼 쇠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내 앞에서 변치 않고 항상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의 혜택은 끝날까지 지속될 것이며 딴 어떤 것으로 대치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요동치 않는 왕국이요, 그것의 법도와 특권은 진동치 않는 것들이기에 영존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있으므로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히 12:27, 28). 여호와의 특별하신 보호, 그의 염려, 그의 지켜보심으로 결국 그것은 영존할 것이다.

(4) 그것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손에게서 지속될 것이다. "너희 자손과 그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너희 이름은 너희 자손에게 유지되어 남으리라." 사역자와 그리스도인들은 한 세대가 가도 다른 세대가 그 뒤를 이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은 그리스도인의 이름과 더불어 땅이 존속하는 한 계속될 것이며 그의 보좌는 하늘의 날처럼 오래 남을 것이다. 음부의 권세는 비록 교회와 대항하여 싸울지라도 이기지 못할 것이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을 괴롭게 하지 못할 것이다(단 7:25 참조).

6. 하나님께 대한 예배는 이처럼 여호와께 예물로 드려진 모든 자들(23절)에 의해 경건한 집회에서 정성스럽게 끊임없이 행해질 것이다. 이것은 구약 은혜에 알맞게 표현되어 있는데 그것은 의식 법이 철폐되고 성전 예배가 종말을 고하더라도 하나님 예배는 규칙적으로 항구적으로 기쁘게 시행될 것을 나타낸다. 그때까지는 오직 유대인만이 하나님 앞에 나가 경배했고 일 년에 세 번만 참석해야 했으며 그나마도 남자에 국한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모든 혈육이 예루살렘의 성전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세계 도처에 퍼진 신앙 집회에서 하나님 앞에 이르러 경배드리게 될 것이다. 그 집회처들은 유대인의 장막처럼 될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그들 중에 기록하실 것이며 두셋이 함께 모이더라도 그들 중에 계실 것이며 그들을 만나실 것이고 그들을 축복하실 것이다. 전과 같이 세 연례 절기만이 아니라 매 월삭과 안식일까지도 그들은 축복받을 것이다. 옛적 성전처럼 특정 단일 장소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성전이시다. 모든 신자는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만난다. 교회가 이처럼 확장된 이상, 모든 신자가 한 장소에 모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예배를 확실히 그리고 빈번히 드리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 시기가 확정되어야 하며 모든 그리스도인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신령한 교제를 하기 위해서는 그 상징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곧 주일이다. 그런데 매 월 삭과 안식일이 언급되어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집회의 모형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다. 율법으로는 예루살렘에서 연례 절기를 지내도록 되있었지만 전국 도처에서는 매 월삭과 안식일을 지켰다. 처음에는 선지 학교에서 지켰고 나중에는 회당에서 지켰다(왕하 4:23; 암 8:5; 행 15:21). 주의 날은 매주 성수되고 주의 만찬은 매달 지켜지는데 여기서 이 약속은 성취되었으니 이들은 곧 그리스도인의 월삭과 안식일이다. 다음을 살펴보자.

(1) 하나님은 엄숙한 집회에서 경배되셔야 할 분이며 기회있는 대로 그런 집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모든 사람의 의무다. 모든 혈육이 이르러야 한다. 비록 약하고 죄많고 ?을 혈육이더라도 모든 사람은 그 혈육을 극복하기 위해서 나아와야 한다.

(2) 하나님을 경배함에 있어 우리는 자신을 그 앞에 나타내야하며 우리는 특별한 모습으로 그 앞에 나아간다.

(3)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정해진 시기가 있어야 한다. 실제로 우리에게는 주일과 집회 시기가 있다. 우리는 빠짐없이 그리고 양심적으로 이 시기를 지키는 것이 곧 우리의 의무이자 이익이라는 것을 간파해야 한다.

7. 그들은 불신과 불경건을 고집하다 망하는 이들의 두려운 운명을 깨닫고 자기들의 파격적 은총에 대한 감사 의식이 크게 증가할 것이다(24절). 만군의 여호와를 경배하며 그 앞에서 그의 성전에서 기뻐하는 자들은 악인의 불행을 보게 될 것이며 따라서 자기들의 행복감을 더욱 많이 느끼게 될 것이다. 다음을 관찰하자.

(1) 여기서 비참하게 묘사하는 대상은 누구인가? 그들은 하나님께 패역한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을 어길 뿐만 아니라, 그와의 언약을 파기하고 스스로 하나님과 다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다. 특히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배척한 불신 유대인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2) 그들의 불행은 어떤 것인가? 여기에는 전쟁터의 참혹한 장면으로 묘사되고 있다. 즉 살륙당한 시체들이 땅 위에 널려 있으며 구데기와 벌레가 기어다니며 부패하는 시체들을 파먹고 있는 전쟁터로 나타난다. 그 시체들을 불태우려고 하면 너무나 흩어져 있어서 다시 모은다는 것은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닐 것이다. 그 작업은 끝이 없을 것이며 그 불은 꺼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혈육에게 가증함이 될 것이며 아무도 가까이 오기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때로 현세적 심판으로 성취되었다. 아마 로마인에 의한 예루살렘과 유대 민족의 멸망만큼 이 예언에 근사한 것도 없으리라. 이 멸망에서 칼에 죽은 자가 이 백만 이상이요, 기근과 열병에 쓰러진 자도 무수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것은 불신 유대인들에게 임한 영적 심판을 가리킬 수도 있다. 바울은 이를 겨냥하고 설명한다(롬 11:8 이하). 그들은 죄 중에서 죽었고 두 번 죽은 자들이었다. 유대 교회는 교회의 시체였다. 그 교회의 모든 지체와 신도들은 부패한 시체였다. 그들의 벌레는 죽지 않았고 그들 자신의 양심은 그들을 끊임없이 불안하게 만들었으며 복음에 대한 그들의 분노의 불길은 꺼지지 않았다. 이것은 그들의 죄와 벌이었다. 그들은 세상 어느 민족보다 모든 혈육에게 가증함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구주께서는 이것을 회개치 않는 죄인의 영원한 불행과 고통에 적용하신다. 그것은 죄인이 장차당하게 될 상태여서 거기서는 구데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막 9:44). 왜냐하면 양심에게 끊임없이 고문을 당하는 영혼은 죽지 않으며 끊임없이 두려움이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시기 때문이다.

(3) 그들은 무엇을 주목하게 될 것인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은 나가서 그들의 시체를 보고 구속주께 대한 사랑이 더욱 용솟음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어떤 불행에서 구속함을 받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다른 자들이 천국에 있고 자기들은 내쫓겨난 것을 보게 될 때 저주받은 자들의 불행은 더욱 가중될 것이다(눅 13:28). 마찬가지로 허물 가운데서 죽은 자들이 어떻게 되는지 보게 되면 복된 자들이 기쁨과 영광은 더 크게 될 것이며 자기들이 그런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라는 것을 생각하면 찬미가 절로 나올 것이다. 여호와께 구속함을 받은 이와 같은 자기들을 구별해 주신 자유로운 은혜를 위해 온갖 겸손과 거룩한 떨림으로 승리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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