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돌보시는 하나님 (이사야 51:1-3)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하나님의 백성들이 여기에서 어떻게 묘사되어 있는가? 이 위안의 말이 그들에게 보내어지고 그들이 그것을 청종하도록 요청되고 있다(1절). 그들은 "의를 좇는" 자들이고, 의롭게 되고 거룩하게 되기를 매우 바라고 갈구하며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을 회복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을 수 있는 일을 열심히 추구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자들이다. 오직 의의 길에서만 우리가 그를 발견할 것을 바라고서 그를 찾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2. 그들은 그들의 기원을, 그리고 그들의 발생의 미소(微小)함을 회상하도록 여기에서 어떻게 지시받고 있는가? "너희를 떠난 반석을 생각하여 보라(갈대아 우르에 있는 우상 숭배의 가정을, 즉 아브라함을 취하여 낸 그 가정을 생각하여 보고 그 자파들의 족장과 열조들로 이루어진 애굽에서의 노예 시대를 생각하여 보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하나님께서 너희로 백성을 조성하셨을 때 진흙과 같았던 것을 생각하여 보라."
새로 태어남으로써 특권을 얻은 자들은 자기가 처음 태어났을 때 어떠했는가를, 자기가 어떻게 "죄악 중에 출생하고 죄 중에 잉태되었는가" 를 생각해 보는 것이 좋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다." 우리를 떠 낸 반석은 얼마나 딱딱하고 잘 패여지지 않았으며 "우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 는 얼마나 초라했는가! 이러한 생각으로부터 우리는 자신을 낮게 여기고 거룩한 은혜를 높게 여기는 생각으로 우리를 가득채워야 한다. 이제 출세한 자들은 그들이 얼마나 낮은 상태에서 시작했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좋다(2절). "너희 조상, 믿는 모든 자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의를 좇은 모든 사람들의 조상(롬 4:11)인 아브라함과, 너희를 생산한, 그리고 너희가 잘 행하는 한 모두 그 딸들이 되는 사라를 생각하여 보자. 아브라함이 혈혈 단신으로 있을 때에 어떻게 그가 부름을 받고 복을 받고 창성케 되었는가를 생각해 보라. 그리고 너희는 그것에 힘입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고, 사형 선고가 약속을 성취되게 하는 모든 수단 위에 엄습하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그렇게 하라. 특히 바벨론에 있는 포로들은 그것으로 격려를 얻어 비록 그들의 수효가 감소되고 극소수만 남아있을지라도 그들이 그들의 땅이 다시 찰 정도로 창성케 되리라는 것을 바라게 하라." 야곱은 매우 작을지라도, 열국의 아비가 된 아브라함 만큼 작지는 않을 것이다. "아브라함을 생각하고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써 무엇을 얻었는가를 보라. 그리고 복종으로써 하나님을 따른 그의 본을 따르라."
3. 그들은, 그들이 현재 눈물로 뿌린 씨를 마침내 기쁨으로 추수하게 되리라는 것을 여기에서 어떻게 다짐받고 있는가?(3절) 땅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복음 시온은 때로 황폐하고 적막한 곳이 되었고, 교회의 여러 부분은 타락이나 박해로 인해 광야같이 되어 하나님께 실과를 드리지 못하거나 그 거민에게 편의를 제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온에게 위로의 말씀 뿐만 아니라 그것을 위해 은혜롭게 행하심으로써 "시온을 위로할" 시기와 방법을 찾아 내실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교회의 "황폐한 곳" 을, 중요시되거나 귀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부분을 위로하신다.(1) 그는 그들을 풍요하게 만드시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에게 즐거워할 이유를 주실 것이다. 시온의 황무함은 새로운 면모를 띨 것이며 에덴처럼 아름답게 보이고 "여호와의 동산같이" 모든 훌륭한 실과가 풍성할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바지하는 것과, 그가 기뻐하시는 그의 등산같이 되는 것이 교회의 가장 큰 위로가 된다.
(2) 그는 그들의 기분을 북돋워 주시고 그렇게 하여 그들에게 즐거워할 마음을 주신 것이다. "의의 열매" 와 함께 "그 가운데 기뻐함과 즐거워함이 있으리라." 즉 사람들은 거룩함을 많이 지닐수록 그리고 선을 많이 행할수록 더욱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기쁨이 있어 그들이 만족하게 될 때에, 감사를 드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가 기뻐하는 일은 곧 감사해야할 일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의 보답은 창화하는 소리로써 송축되어야 하며, 그것은 하나님께서 "밤에 노래" 를 주실 때, 사막에 노래를 주실 때, 더욱 아름다운 선율로 들릴 것이다.
교회에 대한 격려 (이사야 51:4-8)
이러한 선포들은(이렇게 칭해도 좋을 것이다) 하나님의 의와 그의 구원이 영존할 것을 다짐하는 것과 같이 끝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와 구원은 모두 하나님의 백성을 안위하기 위한 의도를 지니고 있으므로 우리는 그것들을 함께 놓고 보아야 한다. 이제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Ⅰ. 이 위로는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 "내가 나 자신을 위해 따로 세워 놓은, 그리고 나를 인정하며 나의 인정을 받고 있는 내 백성, 내 나라에게 이것이 속해 있다." 하나님을 자기의 옹, 자기의 하나님으로 여겨 그에게 복종하고 그에게 충성을 바치며 또한 그의 보호를 받는 자들은 그의 백성이며 그의 나라이다. 그들은 "의를 아는" 백성이며 지식의 수단을 갖고 있고 의가 알려지게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수단들을 이용하고 참과 거짓, 선과 악을 바르게 판단할 능력이 있는 백성이다. 그리고 그들은 선한 머리를 갖고 있는 동시에 선한 마음을 갖고 있다. 그들은 그 속에 기록되어 있고 그곳에서 주관하는 하나님의 율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마음에 그의 율법이 있는" 자들을 자기 백성으로 인정하신다. 의를 알고 있으며 자기 마음에 하나님의 율법을 두고 있는 자들고 큰 환난과 슬픔에 처하고 비방과 멸시를 받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하나님께서 그들이 알고 있는 의와 그들이 그 마음에 두고있는 율법으로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다.
Ⅱ.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속한 위로는 무엇인가?
1.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계에 전파되고 공포될 것이다. "율법이," 복음적인 율법, 그리스도의 율법, 믿음의 율법이 "내게서부터 발할 것임이라" (2:3). 이 율법이 그의 공의(심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상이 지배를 받고 판단받게 될 자유의 법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발하여질 뿐만 아니라 지속되고 잔존할 것이다. 즉 그것은 이 세상에 견고하고 깊게 뿌리박을 것이다. 그것은 처음으로 그것을 주시한 유대인들의 유익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만민의 빛" 을 위해 존재할 것이다. 우리가 위험을 무릅쓰고 귀를 기울여 청종 하도록 요청받고 있는 것이 곧 이 율법, 이 공의이다. 우리가 그것을 무시하고 귀를 막아버린다고 해서 어떻게 그것을 피할 수 있겠는가? 율법이 하나님께로부터 발하여질 때, "들을 귀있는 자는 들을지어다."2. 이 율법과 공의는 의와 구원을 초래할 것이며, 사람의 자손들에게 준비된 길을 열어 주어 그들이 의롭다함을 얻고 구원잡을 수 있게 할 것이다(5절).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의" 와 "그의" 구원이라 칭하여지고 있는데, 그것은 그가 그것들을 계획하고 성취하시기 때문이다. 전자의 것은 그가 우리를 위해 받아들이시고 그것을 위해 우리를 받아들이시는 의이며, 그가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고 너그럽게 용납하실 의이다. 후자의 것은 "여호와의 구원" 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에게서 나오고 그에게서 끝나기 때문이다. 의가 없이는 구원이 없다는 사실을 주목하라. 그리고 "하나님의 의" 가 있는 곳은 어디든지 그의 구원이 있을 것이다. 의롭다함을 얻고 성별케 된 자들, 그들만이 영화롭게 될 것이다.
3. 그의 의와 구원이 매우 빨리 나타날 것이다. "내 의가 가깝도다." 그것은 시간적으로 가깝다. 보라, 이제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 또한 그것은 공간적으로 가깝다. 즉 멀리서 구할 필요가 없다. 말씀이 우리 가까이게 있고 그 말씀 안에 그리스도가, 그 말씀 안에 의가 있다(롬 10:8). "내 구원이 나갔느니라." 구원에 관한 포고가 나갔다. 그 포고는 마치 그것이 이미 나간 것처럼 반드시 전해질 것이며, 그 시기가 가깝다.
4. 이 복음적인 의와 구원은 유대 민족에게만 한정되지 않고 이방인들에게도 미칠 것이다. "내 팔이 만민을 심판하리라." 하나님의 입의 심판에 항복하려 하지 않는 자들은 그의 손의 심판에 의해 박멸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심판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도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 "섬 사람들이 그를 앙망하고" 그의 복음을 청할 것이며, 복음의 위로뿐만 아니라 그 명령을 환영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과 그의 나라에게는, 무리가 그들에게 더하여지고 그 수효가 불어나 그들의 힘과 아름다움이 증가되리라는 것이 위로가 되었다. "그들이 내 팔에 의지하리라" 는 사실이 부가되어 있으며 그것은 곧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여호와의 팔" 이다(53:1).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주목하라. 즉 하나님의 팔이 회개하지 않는 백성들을 심판할 것이나 다른 사람들은 그 팔을 의지하여 구원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만드는 데에 따라 우리에게 생명이나 사망의 냄새가 되기 때문이다.
5. 이 의와 구원은 "영원히 있고" 결코 폐하여지지 않을 것이다(8절). 그것은 메시야가 들여오신 영원한 의이며(단 9:24), 그가 장본인이 되시고 있는 그 영원한 구원이다(히 5:9). 그것은 세계 만방에 퍼져나갈 것이며 동시에 세세토록 지속될 것이다. 우리는 복음 속에서 우리가 얻는 것 이외에 구원의 다른 길을, 평강의 다른 언약이나 의의 다른 원리를 결코 기대해서는 안 되며, 우리가 거기에서 본 것은 끝까지 지속될 것이다(마 28:20). 그것은 영원하다. 그 결과가 영원까지 있을 것이며 이 자유의 법에 의해 사람들의 영원한 상태가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의 영존과 그것이 가져오는 복된 것들이 이 세상과 그속에 있는 만물의 시들음과 멸함에 의해 예증되어있다.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라. 그것은 여지껏 존속되어 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존속할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곧 소멸되어 없어지는 "연기같이 사라질" 것이다. 그것은 두루마리처럼 말려질 것이며 그 빛들은 가을의 잎처럼 떨어질 것이다. 땅을 내려다보라. 그것도 잠시 동안은 지속된다(전 1:4). 그러나 그것은 입기에 남루한 '옷같이 헤어질' 것이다. 그리고 거기 거한 자들이, 땅의 모든 거민들이, 심지어 거기에서 가장 훌륭히 정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자들이 "한결같이 죽을 것이다." 영혼은 이 세상에서는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며 육신은 헤진 옷처럼 벗겨질 것이다. 그것은 쉽게 으스러질 것이며(욥 4:19) 하나도 남겨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천지가 없어질" 때, 모든 육체와 그 아름다움이 풀처럼 시들 때, "여호와의 말씀은 영영히 있으며 그 일점이나 일획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와 구원 속에 자기의 행복을 두는 자들은 때와 날이 찼을 때 그 위로를 얻을 것이다.
Ⅲ. 그들은 이 위로를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의와 구원이 그들 가까이에 있다면, 그때 그들은 "사람의," 죽어야 하는 비참한 인간의 "훼방을 두려워 말라." 뿐만 아니라 사람의 비방에, 또는 악의에 찬 희롱에, 너희에게 시온에 노래를 부르라 하거나 "지금 너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고 비웃으면서 묻는 그들의 비방에 "놀라지 말라." 복음의 의를 받아들인 자들은 그들을 바알세불이라 칭하는 자들을, 그리고 그들에 대해 사악하게 모든 악한 말을 하려는 자들을 두려워 말라. 이러한 자들을 두려워 말라. 이 모욕적인 언사에 동요되지도 말고 마치 그것이 그들의 명성과 영예를 훼멸하고, 그들이 영원히 그 짐 아래 눌려 있어야 하는 것처럼 그것에 의해 불안을 느끼지도 말라. 그자들이 협박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의무를 단념하거나 놀라서 어떤죄에 순응하지 말려, 자기의 안전을 위해 바르지 못한 과정을 택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그리스도를 위해 한 마디 가혹한 말도 참지 못하는 자는 그를 위해 거의 어느 것도 참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의 훼방을 두려워 말자. 왜냐하면,
1. 그들은 곧 잠잠할 것이다(8절). "그들은 옷같이 좀에게 먹힐 것이다" (50:9). "그들은 양털같이" 또는 털옷같이 "벌레에게 먹힐 것이다." 만일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허가를 얻는다면, 우리는 죽어가는 사람의 비방을 멸시할 수 있다. 즉 벌레의 먹이가 되어야 하는 자들이 우리에 대해 말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또는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한 그들의 악의로 인해 그들을 벌하고 사를 하나님의 심판을 시사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그들을 벌하러 오실 때(유 14,15), 서서히 그리고 조용히, 그러나 효과적으로 파멸될 것이다.2. 우리가 고난당하는 사유는 비방될 수 없다. 그들의 훼방의 거짓됨이 간파될 것이며 진리가 승리할 것이다. 그리고 상처를 입은 신앙적인 사유의 의로움이 영원히 명료하게 나타날 것이다. 구름이 해를 가리우나 그 진로를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위한 기도 (이사야 51:9-16)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볼 수 있다.
Ⅰ. 하나님께서 그의 섭리 가운데 나타나시어 그의 백성을 구해주시고 그와 그들의 원수를 굴욕스럽게 만드시기를 바라는 기도.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9절)." 여호와의 팔은 그리스도이거나, 또는 그것은 시편(44:23)에서와 같이 하나님 자신의 팔을 뜻한다.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가 깨시기를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은, 그가 그의 백성을 망보시고 항상 그들에게 선을 행하시기 위해 깨어있다는 것을 나타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여호와의 팔은, 자기 백성을 돕기 위해 평시보다 더욱 크게 하나님의 능력이 발휘될 때 깨어 있다고 일컬어 질 수 있다. 손이나 팔이 마비될 때, 우리는 그것이 잠들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행동하기 위해 그것이 펼쳐질 때, 그것이 깨어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로 인해 어떤 일을 상기하시거나 자극받으실 필요가 없으시나, 우리가 겸손히 그에게 간청하는 것을 이처럼 허용하신다. 이와 같이 그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그의 찬미를 위한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능력을 베푸소서. 즉 능력을 발휘하소서. 우리가 옷을 입고 나타나듯이 주의 능력을 갖고 나타나소서" (시 21:13). 교회는 자기의 상황이 불리한 것을 본다. 그 원수들은 많고 강하며 친구들을 매우 적고 연약하다는 것을 본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기의 구원을 위해 단지 하나님의 팔의 힘만을 의지한다. "옛날에 깨신 것같이 하소서. 즉 옛날에 우리 열조를 위해 행하신 것처럼 지금 우리를 위해 행하소서. 우리 열조가 우리에게 이른 이적을 되풀이하소서" (삿 6:13).
Ⅱ. 이 기도를 강력히 하기 위한 탄원.
1. 그들은 선조들과 저희 조상의 경험과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신 큰 일들을 진술하고 있다. "여호와의 팔이 우리편에 노출되게 하라. 그것은 이와 같은 사유를 옹호하기 위해 옛날에 큰 일들을 행했고,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짧아지거나 연약해지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에게 그의 장자를 노예로 만들어 학대한 애굽 사람들에 대해 이적들을 행했다. 하나님은 연속적인 무서운 재앙으로 라합을 갈기갈기 저미시고, 바로와 용과 악어를(그것은 그렇게 칭해지고 있다. 시 74:13, 14)찌르셨다. 그것은 그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위해 이적을 행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 팔로 바다를, 즉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속에 길을 내어 구속 얻은 자들로 건너게 하셨다" (10절).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 관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 방법을 몰라 결코 당황하시는 일이 없고 어떤 방법을 찾아 내시거나 이루실 것이다. 과거의 경험은 믿음과 소망을 크게 부축해 주는 동시에 기도의 좋은 제목이 된다. "주께서 하셨나이다." 이제 "주께서 아니하시겠나이까?" (시 85:1-6)2. 그들은 약속들을 진술하고 있다(11절). "여호와께 구속된 자들이 돌아오리이다." 즉(다음과 같은 말은 보충될 수 있을 것이다) "주께서 이르시기를 그들이 돌아오리라고 하셨나이다." 이것은 35장 10절을 가리키는 것으로써, 우리는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석방되었을 때, "노래하며 시온에 돌아오리라" 는 약속을 거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죄인들은 죄의 속박에서 풀려나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스러운 자유로 들어올 때, 새장에서 풀려난 새처럼 노래하며 올 수 있다. 믿는 자들의 영혼은 그들이 육체의 감옥에서 풀려날 때, 노래하면서 천국의 시온으로 간다. 그때 이 약속은 온전히 성취될 것이며, 우리는 그 동안에 그것을 탄원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를 위해 이러한 기쁨을 계획하시는 그가 우리의 상황이 요구하는 그러한 구언을, 그동안에 우리를 위해 역사하시지 않겠는가? 성도들이 천국에 올 때 그들은 "여호와의 즐거움에 참여하리라." 그것은 그들의 머리에 불멸의 영예의 화관을 씌운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을 완전한 만족으로 채운다. "그들은" 그 눈물의 골짜기에서는 그들이 결코 얻을 수 없는 "즐거움과 기쁨을 얻을 것이다." 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그것은 기쁨에서 슬픔으로 가는 작은 한 걸음이지만 저 세상에서는 "슬픔과 탄식이 달아날 것이며" 결코 돌아오거나 다시 보이게 되지 않을 것이다.
Ⅲ. 이 기도에 즉시 응답이 주어짐(12절).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이니라." 그들은 그의 능력이 작용하기를 기도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은혜의 위로로써 그들에게 응답하고 계시는데, 그것은 그 기도에 대응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하나님께서 옛날처럼 용을 찌르시고 바다를 말리시지 않으실지라도, 그가 고통 중에 있는 우리 영혼을 위로하신다면, 우리는 불평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의 오른손의 구원의 힘으로" 즉시 응답하시지 않는다 할지라도, 한 천사가 응답받은 것처럼 그가 우리에게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으로" (슥 1:13) 대답하신다면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의 백성을 위로하실 것을 결심하고 계신가를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행하리라. 그는 그의 사역자들에게 그것을 행하도록 명령하셨다(40:1). 또한 얼마나 그가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시는가를 보라. 그는 "낙망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 이라는 것을 그의 명예로운 권리로 여기신다. 그는 그렇게 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하나님께서 위로하시는 자들은 정말 위로를 받는 것이다. 그들을 안위하시는 그의 일은 그들에게 충분한 위로가 된다.
1. 그는 두려움 가운데 있던 자들을 위로하신다. 두려움에는 고통이 있으며 그것은 위로를 요한다. 사람의 두려움에는 올무가 있으며 그것을 제거하는 데는 위로가 필요하다. 그는 겁많은 자들을 구짖으심으로써 위로하신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나 우리 자신을 위로하는데 있어서 조금도 부적합한 방법이 아니다.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두려워하는고?" (12,13절) 자기 백성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은 그들이 사람들의 비방(7절)이나, 사람들의 힘과 크기가 위협적으로 자라나는 것이나, 그들이 우리와 우리 백성에게 어떤 해를 끼치려 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몹시 당황하면서 불안해 하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으실 것이다.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1) 그러한 두려움의 어리석음. 우리가 두려움에 지는 것은 수치이다.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두려워하느냐?" 원문에는 그 대명사가 여성으로 되어 있다. 즉 사람이라 정할 가치가 없는 "여자여 너는 어떠한 자인고?" 당황케 하는 두려움에 지는 것은 이처럼 연약하고 여자 같은 일이다.
[1] 죽어가는 사람을 이처럼 두려워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죽은 사람을," 반드시, 그리고 이윽고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같이 될 인자" 를, 시들어 짓밟히거나 먹히울 자를 "두려워하느냐?" 가장 큰 자들과 가장 거대한 자들, "생존자의 땅에서 강대한 자의 두려움" 이 되는 자들은 "인생일 뿐" 이며(시 9:20) "범인같이 죽을" 뿐이다(시 82:7). 그리고 그들은 땅을 쪼개고 나와서 다시 그곳으로 들어가는 풀에 불과하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죽어야 할 자로 여겨야 한다. 우리가 존경하고 사랑하고 의지하는 자들은 사람이며, 죽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지나치게 기뻐하거나 의지하지 말도록 하자. 또한 우리가 두려워하는 자들은 연약하고 죽어야할 자로 여겨야 하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종들이, 오늘은 여기 있다가 내일이면 없어지는, 죽어가는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2] "항상 종일 두려워하는" 것(13절). 결코 안정을 얻을 수 없을 정도로 또한 어떤 즐거움도 누리지 못할 정도로 우리 자신을 항상 고문대 위에 두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때로 위험이 절박하고 위협적일 수 있으며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분별있는 일일 때가 있다. 그러나 항상 시달리는 것은, 즉 매순간 위험을 몹시 경계하고 나뭇잎이 흔들릴 때마다 떠는 것은,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것이며(히 2:15) "네가 주야로 두려워하리라" 라는 경고되어 있는 그 쓰라린 심판을(신 28:66, 67) 우리 자신에게 임하게 하는 것이다.
[3] 필요 이상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네가 학대자의 분노를 두려워하도다. 학대자가 있다는 것과 그가 광포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는 기회가 있을 때 너를 해할 계획을 세울 수도 있다. 그러므로 조심하는 것이 지혜롭다. 그러나 너는 너를 멸하려고 예비하는 그를 마치 그가 방금 네 목을 자를 것처럼, 그리고 그것을 막을 가능성이 없는 것처럼, 두려워한다." 소심한 심령은 이처럼 매사를 최악으로 생각하기 쉬우며 위험을 실제보다 더 크고 더 가까운 것으로 느끼기 쉽다. 때로 하나님은 그러한 어리석음을 우리에게 즉시 보여 주시기를 원하신다. "학대자의 분노가 어디 있느냐? 그것은 눈깜짝할 사이에 사라지며 그 위험은 네가 알아채기도 전에 끝난다." 그의 마음이 돌이켜지거나 그의 손이 묶어진다. "애굽왕 바로는 소리뿐이며" 바벨론 왕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호통을 치고 그들을 위협하여 두렵게 했던 모든 광포한 압제자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들은 사라졌고 없어졌다. 그리고 이들도 그렇게 될 것이다.
(2) 그 두려움의 불경건함. "너는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잊어버렸다. 그는 또한 온 세상을 지은 자이며 하늘을 펴고 땅을 기초로 정하셨으므로 모든 군대와 모든 권세를 통솔하시며 경영하시는 것이다."
사람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은 하나님께 대한 무언의 망각이 된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으로 우리 자신을 불앙하게 할 때, 그것은 우리가 그 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가장 큰 자라도 위에서 허락한 것 이외의 능력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잊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잊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섭리로써 그 자신의 뜻대로 모든 일들을 명하시고 주관하신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가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겠다고 하신 그 약속들과 그가 우리를 돌보시는 것에 대한 체험을 잊은 것이며, 그 학대자가 우리를 멸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 그가 여러 차례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 알맞는 때에 개입하셨다는 사실을 잊은 것이다. 우리는 여호와 이레(Jehovah-jirehs), 여호와 신의 긍휼의 기념물들을 잊은 것이다. 하나님을 우리의 두려움과 무서움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했다면, 우리는 그처럼 사람들의 찌푸린 얼굴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8:12, 13), 하나님을 항상 경외하는 자는 복된 것이다(잠 28:14; 12:4, 5).
2. 그는 속박 가운데 있었던 자들을 위로하고 있다(14,15절). 여기서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1) 그들이 그들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은 무엇인가. "결박된 포로가 속히 놓여" 추방되었던 자기 나라로 돌아가게 할 것이다. 그의 관심은 "그가 구덩이로 내려가지 않게 하는 것" (불편한 감금 생활로 인해 죄수로 죽지 않는 것)이며 "그 양식이," 감옥에서 생존하기 위해 그가 먹어야할 양식이나 그가 그의 가정에서 책임지어야 할 양식이 "핍절하지 아니하는" 것이다. 즉 그의 곳간이 거의 비었으므로 그는 석방되도록 서두르는 것이다.
혹자는 이것을 그의 과오로 해석하고 있다. 그는 지체되는 것에 대해 의혹을 품으며 참지 못한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그가 곧 해방되지 않으면 파멸하여 구덩이로 내려가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혹자는 그것을 그를 칭찬하는 내용으로 해석한다. 즉 문이 열려질 때, 그는 지체하지 않고 석방을 얻기 위해 매우 열심을 기울인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 다음에,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 라는 구절이 따르고 있는데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시사한다.
(2) 하나님 그들을 위해 그들 자신이 행하지 못하는 어떤 일을 행하실 것인가. 하나님은 결박된 포로를 도울 수 있는 모든 능력을 그의 손에 갖고 계시다. 왜냐하면 그가 흉융한 파도가 교만한 학대자들의 무력한 위협보다 더욱 무서울 때, "바다를 지으셨기" 때문이다. 혹자가 주장하는 해석대로 그가 바다를 "진정시키" 거나 "평정케" 하셨다(시 65:7; 89:9). 이것은 자기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다는 증거일 뿐만 아니라, 그가 행하셨고 또 행하시리라는 것에 대한 모형이기도 하다. 그는 흉융한 광풍을 진정시킬 방법을 찾아내실 것이며 그들을 안전하게 피난처로 인도해 내실 것이다. "내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 그것은 영원한 그의 이름이며 그의 백성이 그것으로써 오랫동안 그를 알아온 이름이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도우실 수 있으며, 동시에 그렇게 하기를 원하셨고 약속하셨다. 그는 결박된 포로, "네 하나님" 이시고 언약상 네 하나님이신 것이다. 이것은 포로가 낙심하는 것을 저지시키고 있다.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곧 놓이거나 구덩이에 들어갈 것임이 틀림없다는 단정을 내리지 않게 하라. 만군의 여호와이신 그가 그들이 매우 약해졌을 때 그들을 건지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근면한 포로들을 격려한다. 그들은 자유가 선포될 때, 조금도 지체하지 않을 자들이다. 그들로 하여금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시며, 그들 자신이 이처럼 분투하는 한 그가 그들을 도우시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라.
3. 그는 선지자들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말한 것을 의지하고 거기에 소망을 두는 그의 모든 백성들을 위로하신다. 선지자들이 말한 그 구원이 그들이 바라던 것처럼 빨리 오지 않거나 그들의 기대의 높이만큼 오르지 않았을 때, 그들은 낙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에 대해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선지자에게 말씀하신 것에 의해, 이 선지자에게 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에 의해 격려받고 있다(16절). 그러나 대체로 이것은 이 선지자나 그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그 큰 선지자이신 그리스도에게 하신 말씀이다. 진리와 능력의 하나님이 여기에서처럼 그의 사자에게 "내가 내 말을 내 입에 두고" 그것으로써 "내가 하늘을 폈도다" 라고 말하는 것을 듣도록, 이 메시지를 전해받는 자들에게 그것은 큰 만족을 준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로하셨다(12절). 그러나 아직도 그는 그의 선지자들과 그의 복음을 통해서 그렇게 하신다. 그리고 그가 이것을 통해 위로하시기 위해, 그는 여기에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씀하신다.
(1) 선지자들에게 주신 그의 말씀은 매우 참된 것이다. 그는 그들이 그가 지시하시고 명하신 것을 말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계신다.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으니, 너와 그 말을 받아들이는 자는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리가 그의 것이 아니라 그를 보내신 자의 것이며,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입에 두신 그의 말씀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의 신앙의 큰 지주가 된다. 하나님의 성령은 그들이 말한 것들을 그들에게 계시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말해야 하는 말씀을 그들에게 구술하셨다(벧후 1:21; 고전 2:13). 따라서 이것들은 하나님의 거짓말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참된 말씀인 것이다.
(2) 그것은 매우 안전하다. 내가(49:2 에서와 같이) "내 손 그늘로 너를 덮었다." 이것은 선지자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예언을, 그리스도 뿐만 아니라 기독교. 그리스도의 복음을 특별히 보호하시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선지자들이 우리에게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미쁘신 말씀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이 빛을 끄려는 흑암 권세의 끊임없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교회의 유익을 위해 성취될 때까지 정성들여 보존될 것이다. 그들은 "다시 예언하게" 될 것이나(계 10:11) 그들이 직접 예언하지 않고 기록한 것으로 예언할 것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항상 그의 손 그늘로 덮으셨고 특별한 섭리로 보존하셨으며, 그렇지 않았다면 그것은 벌써 없어졌을 것이다.
(3) 이 말씀은 그것이 성취될 때, 매우 위대할 것이며, 그 예언의 위엄과 장엄함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으니 이는 그 말을 성취하여 민족을 세우거나 성읍을 만들려는것이 아니라, 내가 하늘을 펴며 땅의 기초를 정하려 하였음이니라. 내 백성을 위해 새 창조의 일을 행하려 하였음이니라."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해 이루어지는 큰 역사와 그의 거룩한 종교를 이 세상에 세우는 것을 멀리 내다본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처음에 지으시고(히 1:2) 그로 말미암아 구약 교회를 지으신 것과(슥 6:12) 마찬가지로, 그로 말미암아 그리고 그의 입에 두신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는,
[1] 새 세상을 세우실 것이다. 다시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실 것이다. 죄가 온 창조물을 혼돈으로 몰아 놓았으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죄를 제거하시어 만물이 다시 질서를 회복하게 하셨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 것이 되었도다."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땅에 있는 것들이 화목케 되고 그렇게 하여 새로운 면모를 띄게 된다(골 1:20).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약속대로,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벧후 3:13), 선지자들은 이것의 증인이 되고 있다.
[2] 그가 새 교회를, 신약 교회를 세우실 것이다. "그가 시온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다 하실 것이다." 복음 교회가 "시온" (히 12:22), 또는 "예루살렘" (갈 4:26)이라 칭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방인들이 거기로 들어올 때, 그들에게 대해 "너는 내 백성이라" 고 일컬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를 위해 큰 구원을 역사하실 때, 그리고 특히 그가 큰 날에 그 구원을 완성하실 때, 그는 그 말씀으로써, 그 초라하고 멸시당하는 소수인들이 그가 택하시고 사랑하신 그의 백성임을 인정하실 것이다.
예루살렘의 환난 (이사야 51:17-23)
그의 백성을 위로하시기 위해 깨어계신 하나님께서, 여기에서는 52장 1절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깨어 있도록 요청하고 계신다. 그것은 죄의 잠에서 깨어나라는 요청이라기보다는(비록 그것도 역시 구원을 위한 준비로써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절망의 혼수 상태에서 깨어나라는 요청이다. 예루살렘 거민들이 포로 상태에 있을 때 그들은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자들과 마찬가지로 불안감에 크게 눌려 있었으므로, 그들을 안위하거나 위로할 만한 어떤 것을 생각할 마음이나 여유가 없었다. 그들은 동산에서 "슬픔을 인하여 잠든" 제자들과 같았다(눅 22:45). 그러므로 그 구원이 이르렀을 때, 그들은 "꿈꾸는 것 같았다" 고 기록되어 있다(시 126:1). 그것은 마른 뼈에 생기를 불어 넣으라는 것처럼(겔 37:9) 잠에서 뿐만 아니라 사망에서 깨어나라는 부름이다. "깨어나, 네 주위를 보라. 그리하여 구원의 여명이 밝았음을 보고 그것을 환영할 준비를 하라. 네 의식을 되찾으라. 네 짐 아래 눌리워 있지 말고 일어나서 네 자신을 돕기 위해 분투하라." 이것은 사도 바울 시대의 예루살렘에 적용될 수 있는데, 그것이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갈 4:25) "혼미한 심령" 의 권세 아래 있었다(롬 11:8)고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깨어나서 그들의 영원한 평강에 속한 것들을 마음에두도록 요청받고 있다. 그렇게 될 때 떨림의 잔이 그들의 손에서 떠나고 평강이 그들에게 전해지며, 그들은 그들의 눈을 멀게하고 그들을 잠들게 한 사단을 무찌르게 될 것이다.
Ⅰ. 예루살렘이 오랫동안 매우 한심한 상태에 놓여 있었고 깊은 비참함속에 빠져 있었음이 인정되어 있다.
1.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진노의 표적 아래 놓여 있었다. 그는 그것의 손에 "이 분노의 잔" 을, 즉 그의 진노의 몫을 두셨다. 예루살렘에 관한 그의 섭리의 시야가 이러했기 때문에 그것은 그가 자기에게 화나셨다고 생각할 만하였다. 예루살렘은 그를 격동시켜 몹시 화내시도록 만들었고 그 섭리의 쓴 열매를 맛보게 되었다. 하나님의 분노의 잔은 그것을 그 손에 쥔 모든 자들에게 "떨림의 잔" 이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 잔의 찌끼까지도," 그 밑바닥에 있는 역겨운 앙금까지도 "땅의 모든 악인이 기울여 마시리라" 고 적혀 있다(시 75:8). 그러나 여기에서 예루살렘은 자기 자신을 땅의 악인처럼 만들었기 때문에 그것을 기울여 마시도록 강요받고 있다. 간음의 잔이 있는 곳에는, 예루살렘이 우상을 숭배했을 때 그 손에 그 잔이 있었던 것과 같이, 조만간에 분노의 잔, 떨림의 잔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떨며 범죄치 말지어다."2. 예루살렘이 환난 중에 있을 때 도왔어야 할 자들이 그것을 실망시켰다. 그리고 그들은 기대될 수 있었던 것만큼 예루살렘을 도울 능력이 없었거나 도우려하지 않았다(18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분노의 잔에 취하고, 그렇기 때문에 비틀거리며 그 계획과 시도에 있어서 매우 불안정하다. 예루살렘은 자기가 말하거나 행하는 것을 모르고 있으며, 더욱이 말하거나 행해야 하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리고 이처럼 불행한 상태에서 그것이 "양육한 모든 아들 중에," 즉 예루살렘이 낳아 교육시킨(거기에는 유명한 자들이 많이 있었다. 시온에 관하여 "이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다" 고 적혀있는 것이다. 시 87:5) 아들 중에 "그 손으로 그것을 이끌 자가 없다. 예루살렘이 쓰러지거나 수치를 당하지 않게 그것을 붙잡아 주고 고통 중에서 도울 손이나, 그러한 예루살렘을 위로할 혀를 빌려 줄 자가 없다. 지혜롭고 선한 자들이 자기 자녀들에 대해 실망하는 것과 기대한 도움을 그들로부터 믿지 못하는 것을 이상스럽게 여기지 말라. 예루살렘이 가장 도움을 필요로 할 때에 그것의 모든 아들 중에, 방백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들 중에 그것을 도울 만한 의무감이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는 자가 없을 때, 그들의 손에 있는 화살이었던 자들은 없을 때, 그들의 마음에 있는 화살로 드러나게 된다. 그들은 이렇게 원망한다(시 74:9).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랠는지 우리 중에 아는 자도 없나이다." 이 실망을 더욱 가중시킨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었다.
(1) 예루살렘의 고통을 매우 컸으나 그것을 동정하거나 도와 줄 자가 아무도 없었다. "이 두 가지 일이 네게 당하였으니" (19절) 네 황폐함과 멸망이 극심하도다. 또한 "기근과 칼" 의 두 가지 혹독한, 그리고 매우 무서운 심판이 네게 임하였다. 또는 그 두 가지 일은 성읍을 황무하게 한 "황폐와 멸망" 이며 그 시민들을 모든 멸망하게 한 기근과 칼이라고 볼 수도 있다. 또 이 두 가지 일은 환난 그 자체(그것은 황폐, 멸망, 기근, 그리고 칼을 뜻한다)와 그 속에서 그녀가 도움을 받지 못하고 버림받으며 위로를 얻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진정 슬픈 두 가지 사실은, 네가 이처럼 슬픈 상황에 있다는 것과 너를 불쌍히 여길 자가 없다는 것이다. 네 픔을 공감하거나 네 근심의 짐을 덜어 줄 자가 없다는 것이다. 네 슬픔을 완화시켜 줄 수 있는 사실을 네게 암시하거나 너를 위해 네 불행을 바로 잡아줄 수 있는 일을 행함으로써 너를 위로할 자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예루살렘에 임한 이 두 가지 일은 후에 바벨론에게 임한 두 가지 일, 즉 "자녀를 잃으며 과부를 잃는" (47:9) 그 비참한 경우와 같다. 그러나 "네가 네 자신의 죄와 어리석음으로 인해 그것을 네 자신에게 임하게 했을 때, 누가 너를 위하여 슬퍼하랴? 그 경우는 위로를 요구하나 네가 네 고통 아래서 애태우고 불안해 할 때, 내가 어떻게 너를 위로하랴?" 충고를 받으려하지 않는 자들은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2) 예루살렘의 위로자가 되었어야 할 자들이 오히려 괴롭히는 자가 되었다(20절). "그들이 곤비하여" 완전히 기를 꺽이고 절망속에 빠졌다. 그들은 자신의 영혼의 자제와 스스로의 즐거움을 지킬 만한 인내를 갖고 있지 않으며, 그 위로를 얻게 해 주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고통에 격분하여 자기 자신을 땅에 내어던지며 거기에서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소연하면서(애 1:12), 필요한 식량의 부족으로 수척해져 가면서 "온 거리 모퉁이에 누워있다." 거기에서 그들은 "그물에 걸린 영양" 같이 불안해하고 소란하게 하면서, 스스로를 돕기 위해 발버둥치고 그물을 잡아당기나, 그럴수록 그들은 더욱 스스로를 얽혀 들어가고 자신의 걱정과 불만으로써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다. 온유하고 평온한 심령을 가진 자들은 고통 하에서, 그물에 걸린 비둘기처럼 진정 슬퍼하나 조용히 참는다. 심술궂고 역정을 잘내는 심령을 가진 자들은 그물에 걸린들소처럼 불안해 하며 그 친구들에게 화를 내고 그들의 하나님을 격동시킨다. "그들에게 여호와의 본노와 우리 하나님의 견책이 가득하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노하시며 그들과 다투신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그러한 것만이 가득하며 그들은 자기를 고통스럽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 속에 있는 지혜롭고 은혜로운 의도를 주목하지 않고, 왜 그가 그들과 다투시는지를 결코 묻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단지 하나님께 노하고 그와 싸우는 것밖에는 없다. 그들은 그들에 관한 하나님의 섭리의 시여에 대해 그에게 화를 내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예루살렘의 비참한 상황이 오랫동안 이러했으며 하나님은 그것을 인지하셨다.
Ⅱ. 그러나 예루살렘의 환난이 마침내 끝나고 그 환난이 그것의 핍박자들에게 옮겨지리라는 사실이 약속되어 있다(21절). "그러므로 너 곤란한 자여, 이 말을 들으라." 괴로움을 당하는 것은 흔히 교회의 운명이 된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럴 때, 교회가 듣고서 잘 행할 수 있는 어떤 것을 말씀해 주실 만한 것을 항상 갖고 계신다. "너는 옛날처럼 포도주가 아니라도, 바벨론 기생들과 우상 숭배자들의 취하는 잔이 아니라고 고통의 잔으로 취한다. 이제 네 자신이 위로받기 위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라."
1. "주 여호와는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네 여호와이며 네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강조적으로 표현되어 있다(22절). "주 여호와 네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셨다. 너를 도우실 능력이 있고 너를 구제할 것을 갖고 계시는 여호와, 네게 대해 변론의 여지가 없는 권리를 갖고 계시며 그것을 소홀히 여기시지 않을 네 주, 너와 언약하시고 너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에 전념하고 계시는 네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환난이 어떠하든지간에, 그는 그들에 대한 그의 관계를 부인하지 않으실 것이며, 그들은 그와 그의 약속 가운데 있는 그들의 권익을 상실하지 않을 것이다.2. "그는 그 백성을 신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즉 그는 그들의 후원자이며 보호자로서, 그들에 대해 벌어지는 일을 자기 자신에게 행해지는 것으로 간주하신다." 하나님의 백성의 사유와 그들이 고백하는 거룩한 신앙의 사유는 의로운 사유이다. 그렇지 않다면,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옹호하기 위해 나타나시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잠시 무너지고, 마치 소멸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양심을 깨우치거나 그것과 싸우는 자들의 악한 계획을 격파함으로써 그것을 옹호하실 것이다. 그는 세상에 공의와 탁월함을 뚜렷이 나타나게 함으로써, 그리고 그것을 옹호하는 자들을 성공케 함으로써 그것을 신원하실 것이다. 그것은 그 자신의 사유이다. 따라서 그가 예루살렘을 지지하고 계시며 앞으로도 열렬히 그것을 변호하실 것이다.
3. 그들은 이윽고 그들의 환난에서 벗어나 그것에게 안녕을 고할 것이다. "내가 비틀걸음치게 하는 잔을, 그 쓴 잔을 네 손에서 거두리라. 그것이 네게서 지나가리라." 우리는 비틀걸음 치게 하는 잔을 거두지 못할 것이며 "우리가 그것을 마시지 아니하겠고 마실 수도 없다" 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참을성 있게 복종한다면, 그것을 우리 손에 두신 자가 그것을 우리 손에서 거두실 것이다. 다음과 같이 사실이 약속되어 있다. "너도 다시는 마시지 않게 하리라. 하나님께서 너와의 쟁론을 그만 두셨고 그 재앙을 다시 환원시키지 아니하실 것이다."
4. 그들의 학대자와 압제자들은 그들이 그처럼 깊이 들어마신 바로 그 쓴 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23절).
(1) 그들은 얼마나 오만하게 하나님의 백성들은 능욕하고 짓밟았는가? "그들은 일찌기 네가," 네 생명에이르기를 "엎드리라. 우리가 넘어가리라 하였도다." 그들은 너로 우상을 숭배하게 만드는 것에서 긍지와 즐거움을 느끼면서 네 양심에 그렇게 말했다. 이와 같이 신약 바벨론은 사람들의 양심을 압제하고 그들에게 법을 주며, 그들은 고문대 위에 올려놓고 죄를 따르도록 강요하면서, 그 옛 압제자들의 길을 답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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