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을 전하라는 명령 (이사야 40:1,2)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위로를 선포하라는 명령과 지시가 이 선지자에게 뿐만 아니라 그와 더불어 모든 여호와의 선지자들에게, 그리고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자들에게 내려지는 것을 볼 수 있다.
1. 이것은 그 선지자로 하여금 그의 시대에 살고 언제는 선한 백성들을 격려하도록 지시했을 뿐만 아니라 명령했다. 그 백성들은 유다와 예루살렘이 그들의 대담한 불경건한 행위로써 점차 멸망당하게 되는 것과 하나님께서 그의 섭리로 그들의 파멸을 재촉하시는 것을 보았을 때, 사태를 매우 암담하게 감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그들로 하여금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긍휼을 저장해 주셨다는 것을 확신하게 하자.2. 그것은 특히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포로시대에 살게 될 선지자들에 대한 지시였다. 그들은 포로들로 하여금 합당하게 석방되리라는 희망을 갖도록 격려해야 했다.
3. 보혜사이시며 또 그리스도인들의 기쁨을 돕는 자이신 복된 명령에 의해 고용된 복음의 사역자들은 여기에서 그들의 과업을 상기받고 있다. 이 구절 속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볼 수 있다.
Ⅰ.font> 일반적인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위로의 말들(1절).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로하도록 그들의 하나님으로부터 지시를 받는다(그분은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 이신 것이다. 계 22:6). 그 훈령은 배가되어 있다. 즉 "너희는 위로하라. 너희는 위로하라." 이것은 그 선지자들이 그것을 행하기 싫어하기 때문이 아니라(그것은 그들의 일 중 가장 즐거운 부분이다) 때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혼이 위로받기를 거절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위로자들은 그들이 어떤것에 고착되기 전에 거듭 거듭 일을 반복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인 사람이 있다.2. 그의 백성이 최악의 사태에서도 위로받는 백성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3.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 행하는 것이 사역자들의 일이며 과업이다.
4. 우리가 이 책의 전반부에서 보았던 그러한 회개의 말에는 우리가 여기에서 보는 것과 같은 위로의 말이 뒤따라야 한다. 왜냐하면 상하게 하신자가 우리를 치료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Ⅱ.font> 특히 예루살렘에 대한 특별한 위로의 말들.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말하라(우리 성경과 다름;역주. 2절). 그 마음을 조성시키고 예루살렘과 예루살렘에 속해 있으며 그것이 잘되기를 바라는 모든 사람들에게 원기를 돋우어라. 그 말을 속삭이지 말고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크게 외쳐 죄인들에게 그 범죄함을 보여 주고 동시에 성도들에게 위로를 보여 주라. 예루살렘으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소리를 듣게 하라."
1. "예루살렘의 환난의 날은 계산되어지고 끝났다. 그 복역의 때가, 그것이 노력하도록 정해진 때가 끝났느니라. 그 출정이 이제 끝났으니 그것은 그 숙소로 물러가 피로를 풀게 될 것이다." 인생은 전쟁이다(욥 7:1).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더 한층 그러하다. 그러나 투쟁은 언제까지나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전쟁은 끝날 것이고 그때에 선한 병정들은 안식으로 들어갈 뿐만 아니라 반드시 대가를 받게 될 것이다.2. "예루살렘에 환난의 이유가 제거된다. 그리고 그 환난이 사라졌을 때 그 영향도 가실 것이다. 예루살렘에게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다는 것을, 즉 하나님께서 예루살렘과 화해하셨으며 예루살렘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자로서 다루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말하라." "아들아, 담대하라. 너의 죄가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것보다 더 위로가 되는 말은 없다. 죄가 사함을 입었을 때, 그때에 환난은 사랑으로 제거된다.
3. 그 환난의 목적은 이루어진다.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예루살렘은 그 우상과 분리시키기에 충분하도록, 그리고 그 이상으로 그 모든 죄의 치료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우상 숭배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쟁론하시는 큰 죄였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들을 바벨론에 사로잡혀가게 함으로써 우상 숭배로부터 교정하시고자 했다. 그리고 그것은 효과를 가져왔다. 즉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우상 숭배에 대한 뿌리 깊은 혐오를 갖게 했고, 그 죄악을 추방하는데 두 배나 강한 약이 되었다. 또는 그것을 거룩한 긍휼을 나타내는 말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를 인하여 마음에 근심하셨느니라" (삿 10:16). 그리고 자애로운 아버지처럼 "그들을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셨으며" (렘 31:20), 그가 그들을 지나치게 징계하셨다고 말씀하신 지경이었다. 그들이 깊이 회개했을 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악보다 형벌을 경하게 하셨다" 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정이 많으신 그는 어느 정도 그들을 지나치게 벌하셨다고 생각하셨던 것이다. 진실로 회개하는 자들은 사실상 그리스도와 그의 고난 속에서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은" 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죽음으로 이루신 속죄는 무한히 귀중한 것이었으므로 죄과에 대해 두 배 이상으로 고귀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셨던" 것이다.
예언의 힘 (이사야 40:3-8)
시온에 은총을 내릴 때, 그 정해진 때가 이르를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회개가 믿음으로써 그들에게 마련된 은혜를 위해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이 두 가지 일에 임하게 하기 위해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는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광야와 같은 상태의 포로들과 함께 있었던 그 선지자들에게 적용될 수 있다. 선지자들은 그들의 구원의 날이 가까와지는 것을 보고 그들로 하여금 그것에 대비하도록 간곡히 요청했고, 그들의 구원의 길을 방해하고 있는 모든 역경이 끝나게
될 것을 그들에게 단언해 주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로 하여금 긍휼에 대비하도록 만드는 것을 우리가 발견한다면, 긍휼이 우리를 위해 예비되어 있다는 것은 좋은 징조가 된다(시 10:17).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세례 요한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하시는 자였을지라도, 그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과업은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는 것" 즉 사람들의 마음을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여 즐길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여호와의 길이 예비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Ⅰ.font> 죄에 대한 회개로써. 그것은 세례 요한이 온 유다와 예루살렘에게 전파했던 것이며(마 3:2, 5), 그렇게 함으로써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했다" (눅 1:17).
1. 경보가 주어지고 있다.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위기에 처했을 때 그 경보를 주목하게 하자. 하나님은 긍휼의 길로 오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를 위해 예비해야 한다(3-5절). 이 말을 그들의 포로 사건에 적용시킨다면, 그것은, 그들의 길에 어떠한 난관이 있든지 간에 그들이 돌아올 때 그 난관도 제거되리라는 약속으로 받아들여줄 수 있다. 광야에서의 이 음성(여기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따른다)은 선구자들로 하여금 그 길을 평탄케 하는 일을 하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의무에의 부름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혼에 들어오시게 준비하도록 우리가요청받고 있는 바로 그 의무이다.
(1)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마음상태를 지녀야 한다. "너희는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그를 위해 너희 자신을 예비하고, 그가 들어오시는 것을 방해할 만한 모든 것들을 없애라. 그리스도를 위해 자리를 만들라. 그를 위해 대로를 평탄케 하라." 그가 우리를 위해 목적지를 마련하신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를 위해 그 길을 마련해 놓아야 할 것이다. 구주를 위해 예비하라.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시 24:7, 9). 구원을 위해, 그 큰 구원을 위해, 그리고 그밖의 부수적인 구출을 위해서도 준비하라. 우리는 그것에 합당한 자들이 되도록 하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구원을 역사하실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빛 가운데 서 있거나 우리 자신의 문에 빗장을 지르지 말고, 사막에서도 그를 위하여 대로를 찾아놓도록, 또한 만들도록 하자. 이것이 그가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 기다리시는 일이다.
(2)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써 우리 마음을 고르게 해야 한다. 자기의 실의와 낙담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안위함을 얻지 못하는 자들은 돋우어져야 하는 골짜기이다. 또한 자기 자신의 공로와 가치를 자랑스럽게 여김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안위함을 얻지 못
하는 자들은 낮아져야 하는 산과 언덕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도에 대해 편견을 지니고 있는 자들, 분명하고 알기 쉬운 것까지도 그것이 그들의 부패한 기질과 세속적인 권익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에 방해하고 반박하며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평탄케 되어야 할 고르지 않은 곳이며, 평지가 되어야 할 험한 곳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올바로 듣기만 한다면 그것은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여호와의 길을 예비한다. 그리고 이처럼 하나님은 은혜로써 긍휼의 모든 그릇 속에 그 자신의 길을 예비하실 것이다. 그는 루디아에게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긍휼의 마음을 열어 놓으시기 때문이다.
2. 죄에 대한 회개가 이루어질 때,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리라(5절).(1) 포로된 자들을 건지기 위한 준비가 이루어졌을 때, 고레스가 그것을 선포할 것이다. 포로된 자들은 그 혜택을 입을 것이며,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용기와 결심을 불어 넣으시어 그 길에 놓여있는 낙심을 부수어 버리도록 해 주신, 그리고 작은 산과 골짜기와 모든 험한 곳을 없애도록 해 주신 그 사람들만이 그 혜택을 얻게 될 것이다.
(2) 세례 요한이 회개와 금욕과 개혁을 얼마 동안 가르치므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주를 위하여 예비하도록 했을 때(눅 1:17), 그때에 메시야께서 친히 그의 영광 속에서 나타나실 것이다. 요한은 행하지 못한 이적을 역사하시며, 그리고 요한이 유죄판결을 내려 상하게 했던 자들을 안위로써 싸매시고 치료하시는 이적을 행하시며 영광 속에 나타나실 것이다. 그리고 거룩한 영광에 대한 이 계시는 "이방인에게 비치는 빛" 이 될 것이다. 유대인 뿐만 아니라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즉 그들이 그것을 보고 경탄할 것이며 그것을 환영할 것이다.
사로잡혔던 자들이 돌아왔을 때 이웃 민족들이 그것을 주시했던 것이다(시 126:2).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일이 될 것이며 호리도, 또는 그것 중 극히 작은 것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여호와의 입이 말씀" 하셨으므로 여호와의 손이 그것을 이루실 것이다.
Ⅱ.font> 어떤 피조물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의지함으로써.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으며," 그 음성은 더 나아가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8절)고 외친다(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1. 구원에 대한 예언과 약속이 이루어지고 합당한 때에 그것이 최대한으로 실행됨으로써, 여호와의 말씀이 확실하다는 것과 그것을 안심하고 의지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의지할 때, 그것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으리라는 확신과 함께 거기에 우리 소망을 둘 때, "그때에" 우리는 건지워지도록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의지하는 가운데 "모든 육체는" 시들어 버리는 "풀" 임을 인정해야 한다.(1) 사람의 능력이 그 구원을 대적하는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여호와의 말씀 앞에서는 풀과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들어 버리고 밟히울 것이다. 능욕하는 바벨론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멸망이 영구할 것을 기대 약속하나 여호와의 성령이 그 모든 영광을 잃게 하고 시들게 하는 풀과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의 구원을 약속한 여호와의 말씀은 영영히 설 것이며, 그들의 대적의 힘으로는 그것이 수행되는 것을 방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사람의 능력이 그 구원을 돕는 것으로 나타날 때에도 그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여호와의 말씀에 비하면 풀과 같은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말씀은 우리의 소망을 둘 수 있는 유일하며 견고한 토대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의 구원을 역사하시고자 할 때, 그들에게서 피조물에 대한 신뢰를 제거하실 것이며, 언덕과 산으로부터 그것을 기대하지 않게 하실 것이다. 그들은 피조물에 실망할 것이며 그것에 대한 기대는 좌절될 것이다.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붐이라."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소망과 의지에 대해 그와 겨룰 만한 피조물들을 두
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영원히 설 것은 그의 말씀 뿐이며 동시에 우리는 그의 말씀 안에서만 서야 한다. 우리는 이렇게 될 때, 그때에야 비로소 긍휼을 받기에 합당하게 되는 것이다.
2. 지금 계시될 여호와의 영광인 우리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과, 그것과 더불어 우리에게 임하며 그것에 의해 우리 안에서 역사되는 그 은혜는 영영히 설 것이다. 그리고 믿는 모든 자들은 피조물이 주는 모든 즐거움이 풀처럼 시들어 버린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흡족함을 느낄 것이다. 이처럼 그 사도는 그것을 "우리에게 전한 복음이며," "우리를 거듭나게 한 썩지 아니할 씨처럼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 에 적용시키고 있다(벧전 1:23-25).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깨달아야 한다.(1) 피조물의 허탄함, 모든 육체는 연약하며 시들어 버리는 풀이다. 우리 자신도 그러하며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다. 또한 우리의 모든 친구들도 그러하므로 그들은 우리를 구원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피조물의 모든 아름다움은 고와 보일 수도 있으나 풀꽃에 불과하며, 곧 바람에 흩어져 버리므로 우리를 하나님께 위탁할 수 없고 또 그로 하여금 우리를 받아들이시도록 할 수도 없다. 우리는 죽어가는 피조물이다. 이 세상에서의 우리는 모든 열락은 죽어가는 것이므로 그것이 불멸의 영혼의 지복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구원과 분깃을 위해서는 더 앞을 바라보아야 한다.
(2) 하나님의 약속의 확실성.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육체가 할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해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을, 그것이 영영히 서 있으므로 우리 영혼의 존속과 방해될 행복을 우리에게 주시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지 않으나 믿어야 할 것들은 영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구속이 주는 행복 이사야(이사야 40:9-11)
Ⅰ. 어떻게 그것이 나타날 것인가?(9절)
1. 그것은 시몬과 예루살렘에 나타날 것이다. 시몬과 예루살렘에 남겨진 남은 자들에게, 포도원지기와 농부들이었던 그땅의 초라한 자들에게 그것이 주어질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형제가 그들에게로 돌아오리라는 것을 듣게 될 것이다. 이 소식은 또한 시몬과 예루살렘에 속한, 그리고 그것에 대해 애정을 품고 있는 자들에게 들려질 것이다. 시온이 "바벨론 딸과 함께 거한다" 고 적혀있다(슥 2:7 난외주). 그리고 거기에서 시온은 고레스의 너그러운 선포의 통지를 받을 것이다. "시온에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여" 라고 적혀 있는데, 이것은 그 선언을 널리 알리는 일을 맡고 있던 사람들을의미한다. 그들로 하여금 선한 의지를 갖고 그 일을 행하게 하라. 그들로 하여금 그 나라에 소식을 알리게 하고 자기네들의 방언으로 시온의 아들들에게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
2. 그것은 시온과 유다에 의해 공표될 것이다(원문에는 그렇게 적혀 있다). 거기에 남아있거나 이미 귀국한 자들의 완전한 구원이 시작된 것을 발견했을 때, 그들로 하여금 가장 공적인 장소에서 그것을 선포하게 하여 온 유다 성읍이 가장 잘 들을 수 있게 하라. 그들로 하여금 최대로 크게 그것을 선포하게 하라. 즉 그들로 하여금 "힘써 소리를 높이게" 하고 지나칠 것을 우려하지 않게 하라. 그들로 하여금, 그 대적이 그것을 듣고 그들과 다투지나 않을까 하여, 그것이 사실과 위배된 것으로 나타나지나 않을까 하여, 또는 처음에 선포된 것과 같은 아름다운 소식이 아니지 아닐까 하여 염려하지 않게 하라. 그들로 하여금 유다 성읍들에게, 그리고 그 나라 온 거민에게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려 할 때, 그들로 하여금 그 친구들에게 그 소식을 부지런히 전하게 하고 그것을 행하신 자가 하나님이심을 그들에게 말하게 하라. 누가 그 도구로 쓰이든지, 하나님이 그 장본인이시다. 그것은 "그들의" 하나님, 그들과 언약하신 하나님이시며, 그는 그들의 하나님으로서 그것을 행하신다. 그리고 그들은 그 혜택과 위안을 획득할 것이다. "그를 보라. 그 속에 있는 그의 손을 주시하라. 그리고 자연적 원인 이상의 것을 보라. 너희가 오랫 동안 기다렸던 하나님께서 마침내 오셨다.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도다" (25:9). 이것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유다 성읍들에게 전해진 초청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들은 포로에서 돌아온 즉시 제단을 세우고는 유다 성읍들에게 제물을 갖고 와서 참가하도록 초청했던 것이다(스 3:2-4). "하나님께 대한 경배가 다시 시작될 때 그것을 너희 모든 형제들에게 통고하여 그들이 너희와 함께 그 즐거움을 나누게 하라." 그러나 이것은 사도들이 예루살렘 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민족에게 공적으로, 그리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한 일에서 완전히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는 그가 오고 있음을 통지했으며, 그러나 이제는 그가 이내 오셨음을 알리고 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 너희 구속주를 잘 바라보라. 너희 왕을 보며, 너희 하나님을 보라.Ⅱ.font> 나타날 영광은 무엇인가? "너희 하나님께서 오시어, 그 자신을 보이실 것이다."
1. "그는 왕의 권세와 위대함을 갖고 오실 것이다(10절). 그가 장차 강한 자로, 비록 대적하는 무리가 있을지라도 매우 강하며 방해받지 않는 자로 임하실 것이니라. 그의 강한 손은 그의 백성들을 그에게 복종케 할 것이며, 그와 그들의 원수들을 속박하고 정복하실 것이다. 자기 길에 놓여있는 모든 어려움을 충분히 깨뜨릴 정도로 강한 자가 오실 것이다." 우리 주 예수는 능력이 충만하셨고 강한 구세주이셨다. 흑자는 그것을 이렇게 읽고 있다. "그가 와서 강한 자를 치실 것" 이며 강한 자를 압도하고 이기실 것이다. 사단은 무장을 한 강한 자요, 우리 주 예수는 그보다 더 강하시며,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로 자신의 강하심을 나타내실 것이다.(1) 그는 모든 저항에 도전하여 통치할 것이다. 그는 자신을 위해,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실" 것이며 지배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그 자신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2) 그는 의로우신 재판장으로서 모든 사람에게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실 것이다. "상급이 그에게 있느니라." 그는 돌아오시는 왕으로서, 반역자들에 대한 벌과 그의 충성스런 신하들을 위한 상급을 가지고 오신다.
(3) 그는 그의 목적을 시작하시고 이루실 것이다. "복음이 그 앞에 있느니라." 즉 그는 그가 행하셔야 할 것을, 어떤 길로 가야 할 것인가를, 그리고 어떻게 그것을 달성해야 할지를 완전히 잘 알고 계신다. "그는 그가 행하실 것을 친히 아신다."
2. "목자의 자애로움과 온유함을 갖고 오실 것이다" (11절). 하나님 "이스라엘의 목자" 이시다(시 80:1). 또한 그리스도는 선한 목자이시다(요 10:11). 왕의 강한 손으로 다스리시는 바로 그 자가 목자의 친절한 손으로 인도하시고 먹이신다.
(1) 그는 그의 모든 양떼를, 그 작은 양떼를 돌보신다. "그는 목자같이 양무리를 먹이시리로다." 그의 말씀은 그의 양떼가 먹는 음식이며 그의 의식은 그들을 키우는 들이다. 또한 그의 사역자들은 그의 시중을 들도록 임명된 부목자이다.
(2) 그는 가장 그의 돌보심을 필요로 하고 있는 자들을, 연약하여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으며 역경에 익숙치 못한 어린 양들을, 그리고 "젖먹이는 암컷들을," 즉 몸이 무거워 어떤 해를 당한다면 그 어린 것들을 팽게쳐 버릴 위험이 있는 암컷들을 특별히 돌보신다. 그는 특별히 자손을 돌보시어서 대가 끊어지거나 잘리우지 않게 하신다.
선한 목자는 온순하고 유망한 자손들에 대해, 천국의 질로 떠나는 어린 개심자에 대해, 연약한 신자들에 대해, 그리고 슬픈 심령을 가진 자들에 대해 자상한 배려를 기울이신다. 이들은 그의 어린 양떼로서 그들의 형편이 요구하는 것이 그 어느 것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1] 그는 그의 능력의 팔에 그들을 모으실 것이다. 그의 힘은 "그들의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질 것이다(고후 12:9). 그는 그들이 방황할 때 그들을 모으실 것이고, 그들이 쓰러질 때 일으키실 것이며, 마침내 그들을 집으로 모아 들이실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그의 팔에 있는 이 모든 자들을 아무도 빼앗을 수 없을 것이다(요 10:28).
[2] 그는 그들을 그의 사랑의 품에 안으시어 소중히 품어 주실 것이다. 그들이 지치거나 피곤할 때, 병들어 허약할 때, 그들이 더러운 길에 이르렀을 때, 그가 그들을 인도하실 것이며 그들이 뒤에 처지지 않도록 돌보실 것이다.
[3] 그가 그들을 온순히 인도하실 것이다. 그의 말씀으로써 그는 그들에게 합당한 것 이상으로, 봉사를 요구하지 않으시며, 합당한 것 이상의 괴로움을 가하지도 않으신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의 심경을 고려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권능 (이사야 40:12-17)
이 구절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며 구세주 이신 주 여호와께서 얼마나 위대하시고 영광스러운 존재인가를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바벨론에 사로 잡혀간 그의 백성들이 그를 바라도록, 그리고 비록 그들이 매우 약하고 그 압제자들이 매우 강할지라도 그가 그들을 구원하리라는 것을 의지하도록 격려 하고 있다.2. 그들이 그만을 붙들도록, 그리고 곁길로 나가 다른 신들을 쫓지 않도록 만들고 있다. 왜냐하면 그와 필적할 만한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3.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의 기쁜 소식을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두려움과 경외감을 갖고 받아들이게 하고 있다. "너희 하나님을 보라" (9절). 그러면 "그는 목자같이 양무리를 먹이시리라" (11절)고 적혀 있을지라도 이러한 그의 은혜로운 겸양이 그의 영광의 초월성을 감소시키는 것으로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가를 보고 그의 앞에서 두려워하도록 하자.
Ⅰ. 그의 능력은 무한하다. 그리고 그 어느 피조물도 그와 필적할 수 없으며 더욱이 다툴 수는 없는 것이다(12절).
1. 그는 거대한 영역을 소유하고 계신다. 천재를 보라. 그러면 너는 그 크기에 놀랄 것이다. 그러나 광대하신 하나님은 "뼘으로 하늘을 재신다." 그에게는 그것이 한 뼘에 불과하고 그 정도로 그의 손은 크시다. 지구를 보라. 그는 그것도 통솔하신다. 세상에 그 물을 조금밖에는 담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는 메마른 땅을 조종하신다. 즉 "그는 땅의 티끌을 되에," 또는 그의 세 손가락에 "담아 보신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우리가 엄지와 두 손가락으로 집어 올리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2. 그는 거대한 힘을 갖고 계시며 상인이 상품들을 저울에 달아보고 다시 내려놓는 것처럼 쉽게 산들과 작은 산들을 이동시킬 수 있다. 또 마치 저울에 다는 것처럼 정확하게 그의 손으로 그것을 달아 보실 수 있다. 이것은 창조의 역사를 가리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때에 하늘은 뼘으로 재어진 것처럼 정확히 펼쳐졌고 땅과 바다는 마치 측정된 것처럼 공정한 비율로 배열되었으며 산은 지구를 안정되게 해 줄 수 있는 무게로, 더 이상도 아닌 꼭 그 정도의 무게로 만들어졌다. 또는, 그것은 섭리의 역사(그것은 계속되는 창조이다)와 온 창조물이 서로 일관성을 지니고 있는 것을 가리
키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Ⅱ. 하나님의 지혜는 헤아릴 수 없으며 어떤 피조물도 그에게 정보나 지시를 줄 수 없는 것이다(13,14절). 그 누구도 하나님께서 이전에 행하셨고 지금 행하시는 것을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누구도 그 일을 행하는데 있어서 그를 돕거나 그가 생각하시지 못한 어떤 것을 그에게 시사할 수는 없다. 여호와께서 그 신(성령)으로 세상을 만드셨을 때(욥 26:13) 그의 성령에게 무엇을 행하라고 하거나 그것을 어떻게 행하는가에 대해 지시하거나 충고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가장 지혜로운 왕이 "
구례와 법률을 아는 자" 들에게 묻는 것처럼(에 1:13) 세상을 다스리는데 있어서 그에게 지시해 줄 어떤 모사가 필요하거나 그가 의논할 상대가 필요하지도 않다. 하나님은 해야할 일을 지시받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올바른 목적과 적합한 방법을 모두 아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이 여기에서 그게 강조되어 있는데, 그것은 그 불쌍한 포로들이 궁중에서 그들의 사건을 처리하거나 그들에게 자유를 얻을 방법을 알려줄 만한 정치가가 그들 중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가 너
희를 위해 행하실 하나님을 갖고 있으니 염려할 것이 없다. 그는 정치가들의 도움이 필요없는 자이시다." 그리스도에 의한 그 위대한 우리의 구속사업 속에서 모든 것들이 "만세 전에" 협약되었고(고전 2:7), 그때에 "하나님께 공평의 도를 가르친" 자는 아무도 없었다.
Ⅲ. 세상의 열방들은 우리의 하나님에 비하면 무의미한 것이다(15,17절). 그것들을 모두 모아 보라. 땅의 크고도 강대한 모든 나라들과 가장 화려한 왕과 가장 인구 많은 나라들, 그리고 가장 부유한 나라들을 모두 함께 모아 보라. 섬들, 무수한 섬들, 이방인의 섬들을 모아 보라. 그것들은 그와 비교되거나 그와 대적될 때, "그에게는" 광대한 대양과 필적되는 "통의 한 방울 물 같거나" 땅의 모든 티끌과 필적되는 저울의 적은 티끌 같다" (그것은 저울 눈금을 움직이지 못할 만큼 매우 적으므로 중히 여겨지지 않는 것이다). 그는 그것들을 "떠오르는" 말할 가치도 없는 "먼지같이" 집어 올리시어 던져버리신다. 그것들은 모두 그가 보시기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은 것과도 같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는 그들을 없는 것같이, 빈 것같이 여기시며" 우리도 그것을 그와 비교하여 그처럼 여겨야 한다. 그는 원하신다면, 그가 처음에 그들을 무(無)에서 만들어 내신 것처럼 쉽게 그것들을 무(無)로 만드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하실 일이 있을 때, 어떤 피조물의 도움이나 저항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신다. 그들은 모두 "빈 것" 이다. "빈 것" 이라는 말은 혼돈이라는 단어로 사용되어 있는데(창 1:2), 그들은 결국 혼돈케 될 것이다. 이것에 의해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 높은 생각을 품고 이 세상에 대해 낮은 생각을 품도록 하고, 사람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우리의 두려움과 소망을 두도록 하자. 이것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돋보이게 하는 일이다. 즉 세상이 그에게는 이처럼 보잘 것 없고 가치가 적은 것일지라도, 그것의 구속을 위해 그는 "독생자를 주셨느니라" (요 3:16).
Ⅳ. 교회의 농사는 하나님에게 어느 것도 더 할 수 없고 그의 무한하신 완전함에 조화를 이룰 수도 없다. "레바논은 번제 소용에도 부족하느니라" (16절). 레바논에 백향목이 매우 많이 저장되어 있을지라도 제단의 연료가 될 나무가 부족하며, 거기에 가축이 매우 많이 저장되어 있을지라도 제물이 될 짐승이 부족할 것이다(16절). 우리가 어느 것으로 하나님을 영예롭게 할지라도 그것은 그의 완전하신 공로에 영원히 못미친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축복과 찬양," 모든 번제와 제물 "위에 초월하시기" 때문이다.
우상의 무상함 (이사야 40:18-26)
선지자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자들을 책망하고 있다.
1. 피조물로써 하나님을 나타내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진리를 거짓으로 변하고 그의 영광을 치욕으로 변하게 된 자들. 그들은 우상들을 만들고 나서 그것들이 하나님을 닮았다고 말하고 거기에 경의를 표하는 자들이다.2. 피조물들을 하나님의 자리에 두는 자들. 그들은 마치 그것이 하나님과 상대가 되는 것처럼 그것을 하나님보다 더욱 사랑하는 자들. 여기에서 두 번씩 도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느냐" (18절과 25절). 거룩한 자께서 친히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느냐?" 고 말씀하고 계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것에 대한 어리석음과 수치를 보여 주고 있다.
(1) 신성을 불어넣은 상과 상에 의해 표현되는 신성을 마음속에 그리면서, 보이지 않는 분을 보이는 신상으로 만드는 우상 숭배. 인성의 타락에 대한 일례인 이것은 동시에 거룩한 성품의 영예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손상이 된다.
(2) 우리 마음으로 피조물들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만드는 영적인 우상 숭배. 교만한 백성들은 그들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되게 여긴다. 탐욕적인 백성들은 그들의 돈을 하나님과 동등되게 만든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욱 귀히 여기거나 사랑하여 두려워하거나 바라는 것, 우리가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기는 피조물들은 "만유의 하나님" 이신 자에게 가장 큰 모욕인 것이다. 이제 이러한 어리석음을 보여 주기 위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Ⅰ. 선지자는 우상을 보잘 것없는 것으로서, 그리고 가장 경멸할만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19,20절). 부유한 백성들이 세우고 경배하는 가장 낫다는 우상의 종류들을 보라. 그것들은 천한 금속으로 만들어지며 주조자가 원하는 모양으로 된다. 그리고 그것들은 금상으로 여겨지도록 도금하거나 금으로 입혀진다. 그것은 장인이 만든 피조물이다. 따라서 그것은 참 신이 아니다(호 8:6). 그것이 신이 될 것인지 그리고 어떤 모양이 될는지는 전적으로 그 사람의 뜻에 달렸다. 또한 그것은 사기이다. 왜냐하면 그것의 밖은 금이지만 안은 납이나 동이었으며, 이것으로써 그것들은 신성을 나타내고 위장된 것을 보여 주며 그 경배자들을 속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상들의 가장 나쁜 종류는, 즉 가난한 사람들의 신상은 얼마나 보잘 것 없겠는가! 궁핍하여 자기 신에게 거의 제물을 드리지 못하는 자도 그 신을 만들었을 때 거기에 신성을 부여할 것이다. 그리고 비록 그가 놋쇠나 돌로 된 신상을 마련할 수 없을지라도, 그는 없이 지내기 보다는 오히려 나무로 된 것이라도 가지려 할 것이며 그 목적을 위해 썩지 않는 나무를 택하고 거기에 신상을 새길 것이다. 이 두 가지는 그들의 신상을 한 곳에 고착시키기에 적당하여 그것을 도둑맞지 않게 한다. 보다 나은 종류의 신상에는 은사슬이 붙여져 있다. 그리고 그것이 나무로 된 신상에 불과할지라도, 흔들리지 않도록 배려가 기울여진다." 여기서 잠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 보기로 하자.
1. 이 우상 숭배자들은 그들 자신이 만든 신(Nehushtans, 즉 놋쇠 조각이나 나무조각)이 그들에게 친절을 행할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을 몽상할 때, 얼마나 수치를 당할 것이며 그 까닭으로 얼마나 비방을 받을까? 이처럼 그들의 상상은 헛되었다. 그들의 어리석은 마음은 얼마나 어두워졌는가!2. 이 우상 숭배자들은 홀로 살아계시며 참되신 하나님을 숭배하신 우리를 얼마나 부끄럽게 하는가. 그들은 그들의 우상에게 어떤 내용도 아끼지 않는다. 반면에 우리는 우리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사용되는 것을 낭비하는 것처럼 인색하게 여긴다. 그들은 그들의 우상이 흔들리지 않도록 돌본다. 그러나 우리는 고의적으로 우리 하나님을 격동시켜 우리를 떠나시게 하고 있는 것이다.
Ⅱ. 선지자는 하나님을 무한히 크신 자라고, 그리고 가장 숭배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자라고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과 우상들 사이에도 그러하다. 그 사이에 경쟁은 있을 수 있으나 서로 비교될 수는 없다.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다음 사실에 호소하고 있다.
1. 그들이 "주께 대하여 귀로 들은" 것과 그에 관한 모든 시대와 민족들의 동의(21절). "너희가 바로 그 자연의 빛으로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 열조와 선생들이 그들의 조상들과 선조들로부터, 곧 태초부터 받은 끊임없는 유전대로 (하나님께 대한 이러한 계시는 창세 만큼이나 오래 전부터 알려져 왔다) 너희에게 전하지 아니하였느냐?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 하나님은 광대하신 하나님이며 모든 신들 위에 있는 큰 왕이시라는 사실이 항상 인정되어 왔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느냐?" 모든 존재의 근위인 무한하신 존재가 계시다는 것은 보편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진리인 것이다. 세상이 시작된 이후 줄곧, 뿐만 아니라 우주의 기원으로부터 그리고 그것의 의해 이 진리가 터득되고 있다. 그것은 땅의 기초에 근거한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것들은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된다(롬 1:20). 네 아비에게 그리고 네 어른들에게 묻는다면 그들이 네게 이것을 설명할 것이다(신 32:7). 뿐만 아니라 "길가는 사람들에게 물으라" (욥 21:29). 네가 처음 만난 사람에게 물으라. 그도 똑같은 말을 할 것이다. 흑자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읽고 있다. "너희가 알지 않겠느냐? 너희가 들지 않겠느냐?" 이것을 모르는 자는 고의로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빛이 그들의 얼굴에 비치나 그들은 눈을 감아버리는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님께 대해 다음과 같은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1) 그는 모든 피조물들을 통솔하신다. 천지는 그의 조종 아래 있다. "그는 땅 위," 지구의 "궁창에 앉으신다" (22절). 윗 세상에서 특별한 그의 영광을 지니신 그가 이 아래 세상에 대한 주권을 보존하시며, 거기에 율법을 주시고 그의 영광이 되도록 그 모든 활동을 지시하신다. 그는 땅에 견고히 앉아 계시며 그처럼 견고하게 그것을 세우신다. 또한 그는 계속 하늘을 펴고 계시며 그의 권능과 섭리가 그것이 항상 펼쳐져 있도록 한다. 그리고 그것이 두루마리처럼 말릴 날이 올 때까지 그렇게 하실 것이다. 그는 우리가 아침에 커튼을 걷고 밤에 그것을 다시 드리우는 것같이 쉽게 그것을 펴신다. 그리고 이러한 하늘은 이 땅에 대해 "거할 천막 같다." 그것은 우리 머리 위에 드리워진 덮개이며, et quod tegit omnia Celun--즉 모든 것을 에워싼다(오비디우스, 시 104:2 참조).
(2) 사람의 자손들, 그 중 가장 큰 자와 가장 강한 자들까지도 그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이 땅의 무수한 거민들은 그의 눈에는 우리 눈의 메뚜기와 같다. 즉 매우 보잘 것없고 사소하며, 매우 가치가 적고 거의 소용이 없는, 그리하여 쉽사리 짓밟히는 메뚜기 같다. 교만한 자가 으쓱하는 것은 메뚜기의 뜀에 불과한 것이다. 즉 그들은 바로 다시 땅으로 뛰어 내려야 한다. 염탐꾼들이 아낙의 자손들 앞에서 스스로를 메뚜기로 생각했다면(민 13:33) 우리는 그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되겠는가? 메뚜기들은 개미와는 달리 잠시밖에 살지 못하며 게으른 생활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러한 것이다.
(3)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처럼 보이고 그렇게 행하는 자들은, 그들이 그 동료 피조물들에게 아무리 무서울지라도 하나님의 강한 손에 의해 반드시 낮추어지고 꺾여질 것이다(23,24절). 큰 권세를 갖고 있으며 그것을 압제와 불의의 일에 남용하는 방백들과 재판장들은 그 주위에 있는 자들을 어렵지 않게 해치운다. "저는 그 모든 대적을 멸시하느니라" (시 10:5; 12:5). 그러나 그 크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책망하실 때는 그들을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만드신다. 그는 그들을 낮추시며 길들이신다. 그리고 그들을 헛된 존재로, 거의 존중되지 않는 자로, 두려움이나 사랑의 대상이 못되도록 만드신다. 그는 그들이 그의 심판 앞에서 완전히 설 수 없게 만드신다.
[1] 이 심판은 그들의 권력이 자리잡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들은 심기우지 못하며 뿌리우지 못할 것이다" (우리 성경과 다름; 역주). 씨를 뿌리거나 접붙이는 것은 식물을 증식시키는 두 가지 방법이다. 아니, 그들이 아주 적은 이득을 얻기 위해 겨우 심기웠고 겨우 뿌리웠을지라도, "그 줄기가 땅에 뿌리를 박지 못할 것이며" 그 힘이 오래 지속되지 못할 것이다.
엘리바스는 우매한 자들이 뿌리를 내리나 "곧 그 거주지를 저주받는 것" 을 보았다. 그렇다면 무화과나무는 얼마나 쉽게 시들겠는가!
[2] 또는 그들이 정착했다고 생각할 때, 그는 그들을 시들게 하실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곧 "말라" 버려 아무 쓸모가 없게 되는, "회오리바람에 불려가는 초개 같도다." 하나님의 진노는 비록 처음에는 그들에게 가볍게 불어오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곧 강한 회오리바람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심판하실 때 이기실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굽히려 하지 않는 자들은 그의 앞에서 서지 못할 것이다.
2. 그는 "그에 대해 본 그들의 눈" 에 호소하고 있다(26절). "너희 눈을 높이 들라. 이 땅에 항상 골돌하지 말라(O curve in terras anime et celestium inanes!---- 즉 부패한 마음은 그렇게 땅으로 구부려 질 수 있으나 그 속에는 거룩한 것이 하나도 없다). "그리고 때때로 위를 보라" (Os homini sublime dedit, ceumque tueri jussit----즉 하늘은 사람에게 직립한 얼굴을 주셨고, 그에게 별들을 응시할 것을 명하셨다). "하늘의 영광스러운 빛들을 보고 누가 그것들을 창조했는가 생각하라. 그들은 스스로 만들거나 정렬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의심할 것도 없이 그들에게 그들의 존재와 능력과 동작을 주신 하나님이 계신 것이다." 우리가 창조물에서 본 것이 우리를 창조주에게로 인도해야 한다. 우상 숭배자들은 눈을 높이 들어 하늘의 무리들을 보았을 때 눈에 보이는 것에만 전적으로 몰두하여 더 멀리는 바라보지 못하였고, 우상들을 숭배했다(신 4:19; 욥 31:26). 따라서 선지자는 여기에서 우리의 감각뿐만 아니라 우리의 이성도 사용하도록, 그리고 그것들을 창조하신 자을 생각하고 그에게 경의를 표하도록 우리에게 지사하고 있다. 그것들에 대한 그의 주권의 영광을 그에게 돌리라. 그는 대장이 그의 기병대대와 보병대대를 이끌어내는 것처럼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내시고," 그것들에 대해 알고 계신다. 또한 그는 "각각 그 이름을," 각각의 위치와 임무에 적합한 이름을 "부르신다" (시 147:4). 그가 그들을 부르시며 어떤 봉사를 하게 하실 때, 그들은 매우 순종하므로 "그의 큰 권세" 에 의해 "하나도 빠짐이 없고, "마치 "별들이 그 운행에서 시스라를 대적하여 싸웠던" 것처럼 모두들 그가 명하신 것을 행한다. 그러므로 그에게 이미 종이 될 준비를 하고 있는 이 피조물들을 하나님과의 경쟁자로 만드는 것은 그를 모욕하는 것인 동시에 그것들을 해치는 것이 된다.
여호와의 위대함과 긍휼 (이사야 40:27-31)
Ⅰ.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책망하고 있다. 그들은 지금 그들의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과 의혹으로 인해 바벨론에 사로 잡힌것으로 여겨지며, 그리고 그 환난 아래서 그들의 심령이 낙심하고 절망한 것으로 보인다(27절)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네 자신에게, 그리고 네 주위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다 하느냐? 어찌하여 네가 네 자신과 네 현재의 상황에 관하여 마치 절망적인 것처럼 가혹하고 우울한 결론을 내리느냐?"
1. 그가 여기에서 그들에게 붙이고 있는 명칭은 그들의 불신을 수치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야곱아! 이스라엘아!" 그들로 하여금 어디에서 그들이 이 이름을 얻었는지를 기억하게 하라. 즉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신실하시다는 것과 모든 역경 속에서 친절을 베푸신다는 것을 발견한 자로부터 얻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라. 그리고 그들이 왜 그런 이름을 얻었는지를 기억케 하라. 그들은 하나님을 고백하는 백성, 그와 언약한 백성으로서 그 이름을 받았던 것이다.2. 그들을 책망하는 방법은 그들과 이치를 따지는 것이다. "왜 그런 말을 하느냐? 네가 그렇게 말할 근거를 갖고 있는가 생각해 보라." 우리의 많은 어리석은 불평과 어리석은 두려움은 그 이유를 엄격히 조사해 보면 사라져버릴 것이다.
3. 그들이 책망받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께 대해 마치 그가 그들을 저버리신 것처럼, 불쾌하고 꺼림칙하게 말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이 강조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네가 어찌하여 이르느냐?" 마음에 악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은 나쁘다. 그러나 그것을 imprimatur----즉 인가하고 악한 말로 바꾸는 것은 더욱 나쁘다. 다윗은 그가 환난 중에 있었을 때 성급하게 한 말을 회개로써 반성하고 있다.
4. 그들이 한 나쁜 말은 그들의 현재의 불행한 상태에 관한 절망의 말이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단정지으려 했다.
(1) 하나님께서 그들을 관여하지 않으실 것이다. "내 사정이 여호와께 숨겨졌도다." 그는 우리의 곤경을 주목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관심사에 더 이상 관여치 않으신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도 어찌할 수 없도록 우리의 형편이 매우 어려운 것이다. "자기의 길이 숨겨진" 자는 "하나님에게 둘러싸인" 자이다(욥 3:23).
(2) 하나님은 그들을 도우실 수 없었다.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숨겨졌다. 나의 송사는 도움을 얻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은 도와 주기 힘든 것이므로, 하나님께서도 그 슬픔을 바로 잡으실 수 없다. "우리의 뼈들이 말랐다" (겔 37:11).
Ⅱ. 그는 만일 그들이 잘 생각했다면 그들의 모든 두려움과 불신을 충분히 가라 앉힐 수 있었다는 것을 그들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이전에 우상 숭배자들의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 그렇게 했던 것처럼 (21절) 그들이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 그는 그들이 알았던 것과 들었던 것에 호소하고 있다. 야곱과 이스라엘은 알고 있는 백성들이거나 그렇게 될 수 있었던 백성들이었으며, 그들의 지식은 들어서 얻어진 것이었다. 왜냐하면 지혜자가 그들의 큰 광장에서 외쳤던 것이다. 이제 다른 여러 가지 중, 그들은 "하나님께서 한 두 번 하신 말씀을 들었다." 또한 그들은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신 말씀을 여러 번 들었다(시 62:11).
1.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그가 전능하시다는 것은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이시기 때문이다. 그는 영원부터 계셨고, 또 영원까지 계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부족함이나 쇠퇴함이 없다. 그는 스스로 존재하므로 그의 모든 완전하심은 무한하다. 그에게는 날의 시작이나 생의 끝이 없으므로 변화도 없다. 그모든 또한 "땅 끝까지," 즉 온 땅과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그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자" 이시다. 따라서 그는 모든 것의 정당한 주인이고 지배자이시며, 모든 것에 대해 절대적인 능력을 갖고 계시고 그의 백성들이 가장 큰 곤경에 빠져 있을 때에도 그들을 충분히 도우실 수 있다는 결론이 내려져야 한다. 의심할바 없이, 그는 처음에 세상을 만드실 수 있었던 것과 같이 언제나 그의 교회를 구원하실 수 있는 것이다.(1) 그는 그 구원을 설계할 만한 지혜를 갖고 계시며 그 지혜는 결코 모자람이 없다. "그의 명철이 한이 없으시다." 따라서 그 누구도 그 계획에 맞서고 그 의도를 좌절시킬 수 없으며, 뿐만 아니라 그가 행하실 것을 결정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는 혼자만의 길들을, 바다 속에 길들을 갖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지혜는 이 정도이며 그 이상일 수는 없다" 라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것도 그는 아시는 것이다.
(2) 그는 그 구원을 이루실 능력을 갖고 계시며 그 능력은 결코 고갈됨이 없다. "그는 피곤치 아니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다." 그는 만물을 지탱하시며 모든 창조물을 다스리시나, 피곤하거나 고되심이 없으시다. 그러므로 틀림없이 그가 그의 교회가 위기에 처할 때, 언제나 그것을 건지실 능력을 갖고 계시며 그 능력은 연약해지거나 피곤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2. 그는 그의 백성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며,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돕도록 하심으로써 그들을 도우신다. 강한 하나님이신 그는 곧 이스라엘의 힘이시다.
(1) 그는 약한 자를 도우실 수 있다(29절). 여러 차례 "그는 피곤한 자," 금방 쓰러질듯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이 필요할 경우가 생길 때마다 "힘을 더하신다. "육신적으로 연약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놀랍게 회복되고 강하게 된다. 그리고 심령이 연약한, 소심하고 낙심을 잘하여 봉사와 고난을 감당하기에 부적당한 많은 사람들도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속 사람이 강한 힘으로" 강하게 된다. 자기의 연약함을 느끼고 자신이 힘이 없다는 것을 쾌히 인정하는 자들에게 대해 하나님을 특별히 힘을 더하신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 안에서 "약할때, 우리는 주 안에서 강하기" 때문이다.
(2) 그는 자원하는 자들을 도우실 것이다. 겸손히 그를 의지하면서 스스로를 돕는 자들을 도우실 것이며, 자기의 최선을 다하는 자들에게 좋게 행하실 것이다(30,31절). 자기 자신의 충족함을 의지하고 그것을 신뢰하기 때문에 최대의 노력을 발휘하지 않으며,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도 않는 자들은 "소년들" 과 "장정" 들이다. 이들은 강하긴 하지만 그들 자신을 실재보다 더 강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들도 "피곤하며 곤비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봉사 속에서, 그들의 갈등과 무거운 짐 아래에서 '넘어지며 자빠질" 것이다. 그들은 곧 그들 자신을 의지하는 것이 어리석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 그에 대한 자기의 의무를 자각하고 믿음으로 그를 의지하며 그의 인도하심에 스스로를 맡기는 자는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1] 그들은 충족한 은혜를 얻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일이 소생되었을 때, 새로운 기회가 생겼을 때, "새 힘을 얻으리라." 그들은 신선한 기름 부음을 받을 것이며 그들의 등에도 기름이 채워질 것이다. 하나님은 "아침마다" 그들의 "팔" 이 되실 것이다(33:2). 그들이 좌절하거나 연약해졌다면 어느 때에라도 그들은 스스로를 되찾을 것이고 따라서 그 힘을 새롭게 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일이, 노고와 고생이 바꾸어지는 것처럼 "그 힘을 바꿀 것이다" (원문의 뜻). 그들은 일할 힘을, 싸울 힘을, 대항하고 견딜 힘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날이 바뀌는 것처럼 그 힘이 새롭게 될 것이다.
[2] 그들은 가장 훌륭한 목적에 이 은혜를 사용할 것이다. 힘을 얻었을 때, 첫째, 그들은 위로, 하나님께로 향하여 치솟을 것이다. "그들은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같이" 매우 강하게, 매우 날쌔게, 매우 높이 하늘을 향하여 오를 것이다. 거룩한 은혜의 힘 속에서 그들의 영혼은 이 세상 위로 오를 것이며 더구나 가장 거룩한 곳으로 들어갈 것이다. 경건하고 믿음이 깊은 감정은 독수리의 날개이며, 은혜로운 영혼은 그것을 타고 올라갈 것이다(시 25:1). 둘째, 그들은 하늘을 향해 돌진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의 길로 행할 것이다. 즐겁고 민첩하게(그들은 "피곤치 아니하리라"), 꾸준히 인내를 갖고(그들은 "곤비치 아니하리라") 그 길로 달려갈 것이다. 따라서 때가 이르면 거둘 것이다. 그러므로 야곱과 이스라엘이 가장 큰 환난에 처할지라도 계속 하나님을 앙망하도록 하자. 그리고 가장 합당한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효과적인 도움과 위로를 받게 되리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