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고를 받는 앗수르 (이사야 33:1-12)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Ⅰ. 교만하고 거짓된 앗수르인은 공정하게도 그의 모든 속임수와 폭력 때문에 벌을 받아, 재앙 아래 놓이게 된다(1절).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1. 그 대적이 범한 죄를 보자.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학대했고 착취했다. 그리하여 그는 그들과의 평화 협정을 어겼고, 비겁하게 행했다. 진실과 자비는 두 가지의 신성한 것이다. 그 속에는 하나님의 속성이 매우 많다. 따라서 자기의 악한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 진실과 자비 중 그 어느 것도 마음에 두지 않고 완전히 잃어버린 자들, 곧 죄악을 행하거나 탈취하는 일을 꺼려하지 않으며 위선의 죄를 범하거나 엄숙한 약속을 깨뜨리는 것을 개의치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을 수밖에 없다. 잔인하고 기만적인 사람들은 가장 나쁜 자들이다.2. 이 죄를 더욱 악화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그 앗수르 인은, 결코 자기에게 해를 끼친 일이 없는 자, 또 다툴 구실도 없는 자를 학대했고, 항상 자기에게 성실하게 대했던 자들을 패역하게 대했다.
우리가 우리로 잘못을 행하도록 하는 자극을 사람들로부터 아주 적게 받았는 데도, 악을 행하면, 그만큼 하나님을 더 격노케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겠다.
3. 이 죄로 인해 그가 받게 될 형벌은 무엇인가? 유다 성읍을 탈취한 그 천사에 의해 자기 군대가 멸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며, 자기 진영이 탈취했던 자들에 의해 다시 약탈당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갈대아 사람들은 앗수르 사람들을 패역하게 대할 것이며, 그들을 반역할 것이다. 산헤립의 아들들 중에 둘이 그를 배반하여 그가 기도하는 중에 비겁하게 살해했다.의로우신 하나님은 흔히 죄인들에게 그들이 뿌린 열매를 거두게 하신다. "사로잡는 자는 사로 잡힐 것이다" (계 13:10; 18:6).
4. 그가 이렇게 될 시기는 언제인가? 그가 "학대하고 속이기를 마치고 나서" 회개하고 개심 - 이것은 그의 멸망을 막을 수 있다(단 4:27) - 하지 않으며, 최악의 일을 다하고 났을 때, 즉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한계인 막다른 지경에 이르를 그 때에, 떨림의 잔이 그의 손에 놓여질 것이다. 그가 사악함에 있어서 한계에 다다를 때, 즉 그의 죄악의 한도가 차게 될 때, 그 때에 모든 것이 다시 검열될 것이다. 그가 행하기를 마칠 때, 하나님은 시작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날이 오고 있기 때문이다.Ⅱ. 환난 중에 있는 그 땅을 위해 은혜의 보좌에서 간곡히 긍휼을 구하는 하나님의 기도하는 백성들이 있다(2절).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사람들은 잔인하나, 주께서는 너그러우소서. 우리는 주의 진노를 마땅히 받을 만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의 은총을 간구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호의를 베푸시는 것을 우리가 발견하게 된다면, 우리는 행복할 것입니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환난은 우리를 해할 수 없으며, 우리를 멸하지 않을 것입니다. 피조물들에게 도움을 기대하는 것은 헛된 것입니다. 우리는 애굽을 의지하지 않고 그 환난의 결과가 어떻게 되든지, 주께 복종하기로 결심하고, 이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을 기대하면서, 우리가 오직 주를 앙망하나이다."
믿음으로 겸손하게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은혜로우시다는 것을 반드시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기도했다.
1. 즉 자기들을 위해 군복무에 임하고 있는 자들을 위해 기도했다. "주는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소서. 히스기야와 그의 방백들, 그리고 모든 용사들은 주께로부터 힘과 용기를 끊임없이 공급받을 필요가 있사오니,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시고 그들에게 모든 것을 충족케 하시는 하나님이 되소서. 매일 아침 그들이 그날의 과업을 위해 나가고 아마도 새로운 일일 하게 되고 새로운 난국에 당면할 때, 그들로 하여금 활기를 되찾고 기운을 회복하게 하소서. 그리고 날(日)을 따라서 능력이 있게 하소서" (신 33:25 참조).영적인 싸움에 있어서도 우리의 손은 우리에게 충분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팔을 힘있게 하실 뿐만 아니라(창 49:24) 친히 우리의 팔이 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떤 일도 성취시킬 수 없다. 우리가 매일 아침 그를 우리의 팔로 믿고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아침마다 새로와지는 그의 긍휼과(애 3:23) 또 그의 능력을 끊임없이 의지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어느 날 아침 우리를 홀로 내버려 두신다면, 우리는 파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애일 아침 우리 자신을 그에게 의탁해야 하며, 그날에 그날 일을 행할 수 있는 힘을 하나님에게서 얻어야 한다.
2. 백성들 전체를 위해 기도했다. "주는 환난 때에 우리의 구원이 되소서. 가만히 앉아 있으며, 감히 높은 곳에 오르려 하지 않는 우리들의 구원이 되소서." 그들은 하나님을 자기들을 위해 구원을 역사하시는 구세주로서 뿐만 아니라 구원 자체로서 의지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세속적인 이익이 어떻게 되든지 간에 그들은 만일 그를 자기들의 하나님으로 삼는다면, 자기들은 안전하다고 여기며, 구원받은 것으로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그들의 구세주의 역할을 하신다면, 그는 그들의 구원이 되실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행사는 완전하기" 때문이다.혹자는 그것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고," 이미 우리 열조의 끊임없는 힘과 도움이 되셨던 주께서 환난 때에 우리의 구원이 되소서. 주께서 그들을 도우신 것처럼, 우리를 도우소서. 저희가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도다(시 34:5). 그러므로 우리는 흑암 가운데 행하지 말자."
Ⅲ. 멸망당한 앗수르 군대가 부유하게 되었지만 유다와 예루살렘에게 쉽게 희생물이 된 그들의 진영을 보자. 기도를 하자마자(2절) 그것은 응답된다(3절). 아니 그 이상의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그들을 대적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그는 그 이상으로 행하셨다. 그는 그들로 하여금 그 대적들을 이기게 해 주셨고 또 개가를 부를 만한 이유를 풍성히 주셨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그 멸망시키는 천사가 앗수르 군대의 수 천 명을 살해하자, 그들의 기운은 꺾어졌다. 죽어가는 사람들(우리는 이들이 조용히 죽어가지는 않았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의 비명으로 인해 "진동시키는 소리가" 났기 때문에 그 나머지 "민족들도 도망하여" 각자의 안전을 위해 피신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일어나자, 앗수르 군대를 구성하고 있던 여러 민족이나 씨족들이 흩어졌다. 생각지도 못했던 재앙일 일어났으므로, 그것은 분기해야 할 때였다. 하나님께서 일어나시면, 그의 원수들은 흩어진다(시 68:1).2. 요새화되었던 유다의 모든 성읍들이 황폐한 것을 복구하는 보복적인 조처로서, 앗수르 진영의 녹획물이 탈취된다(4절). "황충이 모임같이," "메뚜기의 뛰어 오름같이" 예루살렘 거민들이 "너희 노략물을 모을 것이다" 라고 했다. 즉 약탈자들(옐살렘 주민들)은 황충이나 메뚜기의 무리가 밭이나 나무를 황량하게 만드는 것처럼, 쉽게 그리고 신속히 앗수르의 재물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죄인은 그 재물을 의인을 위해 쌓아 두며," 이스라엘은 애굽 사람의 약탈물로 풍요케 된다.
혹자는 앗수르 사람들 자신을 황충과 메뚜기로 보고 있다. 그들이 죽임을 당했을 때, 애굽의 개구리떼처럼 무더기로 쌓여졌고, 사람들의 발에 밟혀 흙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Ⅳ. 이로써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영예롭게 되었다. 대적의 노략물이 이처럼 모아졌을 때,
1. 하나님은 그것으로 인해 찬미를 받으실 것이다. "여호와는 지존하시도다" (5절). 이처럼 교만한 자들을 낮추시고 그들을 모두 티끌 속에 감추시는 것이 바로 그의 영예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 자신의 이름을 존귀케 하시며, 애굽 사람들이 물에 빠졌을 때의 이스라엘처럼(출 15:1, 2 이하), 그의 백성은 그에게 그 영광을 돌린다. 그는 그들의 모독이 미치지 못하는 높은 곳에 거하는 자이며, 그들을 주관하는 권세를 지니신 자이므로 지존하시다. 그리고 그는 그들이 교만하게 자랑하는 그 점에 있어서도 그 자신이 그들보다 위에 계시다는 것, 즉 하나님은 자기가 원하시는 대로 행하신다는 사실과, 그들이 하나님을 거역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밝히신다.2. 그의 백성은 그 사건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일어나시어서 예루살렘을 치기로 맹약한 자들을 흩어지게 하실 때(3절), 그 때에 그 축복의 준비 단계, 또는 그 사건의 열매와 소산으로서, "그는 시온에 공평과 의를 충만케 하신다," 즉 정의감 뿐만 아니라 정의에 대한 열심과 정의가 잘 지켜지도록 하는 보편적인 배려가 시온에 충만케 하신다. 예루살렘은 다시 "의의 성읍" 이라고(1:26) 불리우게 될 것이다. 앗수르 군대의 멸망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가 존귀하게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럼으로써 하나님의 은총이 높임을 받는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공평과 의를 내리시고, 모든 사람들과 그들의 모든 행동과 일들이 그 공평과 의에 의해 다스려지게 되고, 그 공평과 의가 매우 풍요하므로 아무도 이것을 거역하는 다른 생각을 품지 못하게 될 때, 그 때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위해 자비를 예비해 두신 것으로 결론 지을 수 있다.
히스기야와 그의 백성들은, 환난 중에도 하나님께서 자기들 곁에서 계시리라는 확신으로 격려를 받고 있다(6절).
(1) 즉 그들이 의지할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이 있다. "너의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다." 여기에 보면 미리 계획된 바람직한 목적이 나와있다. 그것은 "우리시대의 평안함," 즉 나라가 소란하지 않고 어지럽지 않게 되는 것이며, "구원의 힘" 즉, 나라 밖의 대적에게서 건져지고 그들에게 이기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정하신 구원은 그 속에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의 뿔이다. 그리고 이 목표점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과 수단이 있는데, 그것은 "지혜와 지식" 즉 경건함뿐만 아니라 신중성이다. 그 구원의 방법은 하나님의 축복에 의해 오는 것인데, "우리 시대의 평안함과 구원의 힘" 이 될 것이다. 그곳은 곧 처음에는 순전하고, 그 다음에는 평화로운 지혜요, 또 사적 이익을 공적인 유익을 위해 종속시키는 지혜이다. 이러한 신중성은 진리와 평화를 세울 것이며 진리와 평화를 방어하는 성을 요새화해 줄 것이다.
(2) 히스기야와 그의 통치를 받는 그 백성들의 상태에 대한 경건한 격언이 있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너의 보배니라." 그것은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보배이며, 하나님은 그곳으로부터 조공을 받으신다. 나아가 그것은 군주의 보배이다. 선한 군주는 그것(하나님 경외)을 그렇게 (지혜를 금보다 낫게) 여기며, 그 진가를 알게될 것이다. 참된 신앙은 군주나 백성들의 참된 보배임을 명심하자. 그것은 그들을 부유한 자로 명명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자들과 또 신실하고 선한 백성들이 많은 곳이 정말로 부유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라를 이 세상에서 부요케 하는 데에 기여한다. 그러므로, 국민의 신앙을 지원해 주고, 그 신앙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경계하는 것이 국가의 이익이다.
Ⅴ. 예루살렘에 임한 큰 환난이 묘사되어 있다. 그것은 그 예언자의 말을 믿은 자들이 앞으로 어떤 환난이 올 것인가를 미리 알 수 있게 그것에 대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그들의 근원에 대한 (앞에 나온) 약속이 성취될 때, 그들의 극한적인 상황에 대한 기억이 그 속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을 찬미하는 일을 돕고 또 그들로 더욱 감사하도록 만들기 위해, 여기에 나와 있다(7-9절).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예고되어 있다.
1. 그 대적은 매우 무례하고 사나울 것이며, 그와 평화 협정을 맺는 일이나 (왜냐하면 그는 마치 그의 말에 충실한 것이 그를 낮아지게 하는 것처럼 주저함이 없이 "조약을 파하기" 때문이다), 사전의 협정 같은 것도 있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성읍들을 멸시하기" 때문이다. 즉 그는 그들의 호소를 정의대로 판단하거나 그들의 탄원을 자비롭게 들어 주는 일을 멸시한다. 그는 매우 쉽게 그들의 주인이 되었고(비록 그것들이 "견고한 성읍" 이라고 불리울지라도) 또 그들에게서 거의 저항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을 멸시하며, 모든 사람들을 칼로 칠 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 즉 그는 어떤 사람도 존중하지 않으며 그가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야 할 자들에게 동정이나 배려를 베풀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사람들을 존중하지 않으며, 모든 사람에게 오만하고 거만하다. 온 인류를 짓밟는 일에서 긍지를 느끼는 자요, 존귀한 자에게 존경심을 지니지 않고 비참한 자에게 동정을 베풀지도 않는 자이다.2. 그러므로 그는 어떤 조건으로도 화해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예루살렘의 용사들" 은 대적에 대한 자기들의 역할을 다 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소란스럽고 무례하게 짓밟힘을 당하는 것을 만족해야 하고,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밖에서 부르짖게 만들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국가를 위해서 당당한 적수를 만나서 할 바를 다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화친을 맺기 위해 히스기야가 보낸 "평화의 사신도," 그가 매우 교만하여 협상하기 힘들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실망으로 상심하여 "슬피 곡할" 것이다. 그들은 그를 달래기 위한 모든 시도가 실패한 것을 알고서 어린아이들처럼 울 것이다.
3. 그 나라는 그 대적으로 인하여 얼마 동안은 아주 황폐케 될 것이다.
(1) 아무도 그 길을 다니려 하지 않는다. 따라서 무역과 통상은 중지되었고, (설상 가상으로) 어느 누구도 엄숙한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안전하게 올라갈 수 없었다. 그래서 "대로(大路)는 황폐하였다." 밭이 대로처럼 짓밟혀져 황폐케 될 때, 대로도 "행인이 끊치기" 때문에 밭처럼 다니는 사람이 없게 되어 황폐케 된다.
(2) 어느 누구도 땅으로부터 유익을 얻지 못했다(9절). 땅은 지금까지 자기의 산물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봉사할 수 있는 것을 즐거워했으나, 이제는 이스라엘의 대적이 그 산물을 먹어 버리거나 짓밟아버렸다. 그래서 땅은 "슬퍼하고 쇠잔도하다." 그 땅은 우울해 보이고 그 땅 백성은 그들 자신과 그 가족들을 위한 필요한 양식이 모자라게 되어 그 얼굴이 수심에 찬다. 예전의 추수의 즐거움은 이제 탄식으로 변한다. 세상적인 모든 기쁨은 이처럼 덧없이 시들어 버린다.
황폐가 전박적인 것이 된다. 열 지파에 속했던 지역은 이미 황무케 되었다. "백향목으로 유명한 레바논, 장미꽃으로 유명한 샤론, 가축으로 유명한 바산, 곡식으로 유명한 갈멜은 모두 매우 비옥했으나 이제는 광야처럼 되었기 때문에, 그 옛 이름으로 불리우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그것들은 이전의 상태와는 매우 다르게 된 것이다. 때에 알맞게 그 주인의 손에 모아지곤 했던 그것은 그 때가 이르기도 전에 그 약탈자의 손에 다 그 열매를 떨어치는도다."
Ⅵ. 하나님께서 마침내 이 교만한 침입자를 치시기 위해 영광스럽게 나타나실 것이다(10-12절). 사태가 이처럼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1. 그 때 하나님은 그 자신을 귀히 드러내실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무관심한 방관자로서 계신 것같이 보였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이제 일어나리라. 이제 내가 나타나 행할 것이며, 그것을 통해서 내가 나를 증거할 뿐만 아니라, 높임을 받을 것이다." 그는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가 만유의 하나님이시며 가장 높은 자보다 더욱 높으시다는 것을 증명하실 것이다. "이제 내가 나를 지극히 높이리라. 내가 행동할 준비를 할 것이며 활기있게 행할 것이고, 그 일을 통해 영광 받으리라."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위해 나타나시는 시기는 그들의 상황이 가장 쇠퇴기가 되었을 때, 곧 "그들이 무력하고 갇히 자나 놓인 자가 없을 때" (신 32:36) 이다. 돕는 자들이 모두 끊어졌을 때, 그 때가 하나님이 도우실 시기이다.
2. 그가 앗수르 사람을 파멸시키실 것이다. "너희 앗수르 사람들은 너희가 예루살렘의 모든 재물을 소유하게 되리라는 희망으로 부풀어 있고, 또 그렇게 되기까지 수고를 하나, 너희 모든 희망은 허사가 될 것이다. 너희가 겨를 잉태하고 짚을 해산할 것이다. 그것들은 무가치하고 아무런 유익도 없을 뿐 아니라, 너희 호흡이 불이 되어 너희를 삼킬 때 좋은 연료 구실을 할 것이다. 즉, 너희 죄의 호흡, 너의 사악한 호흡은 하나님의 진노의 입금을 촉발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을 치기 위해 내뿜는 위협과 살기는 너희 자신을 삼킬 것이며, 하나님과 그의 이름을 거슬러 내뿜는 너희 불경스러운 호흡도 너희 자신과 저희 이름을 삼킬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혀(말)가 그들 자신에게 떨어지도록 (실현되도록) 하시며, 그들 자신의 호흡이 그들을 불사를 불에 부채질하도록 만드실 것이다. 그 때에 그 백성이 횟돌가마 속에 있는 "횟돌 불같이" 될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횟돌가마 속의 횟돌은 서로가 엉켜서 불에 타고 있다. 또 "잘려나간 가시나무같이" 된다는 것도 그렇다. 잘린 가시나무가 마라 시들었었으므로, 불이 잘 붙고 또 순식간에 다 타버린다. 앗수르 군대으 멸망이 바로 그러했다. 그 멸망은 잘 아껴두었던 가시나무를 불태우는 일이나 어떤 좋은 일을 위해 횟돌을 불에 굽는 것과 같다. 앗수르 군대를 불태움으로써 여호와의 능력에 관한 지식이 세상을 밝혀 주었고, 그의 이름은 눈부시게 빛나게 되었다.
희망의 예언 (이사야 33:13-24)
여기에 주의를 요청하는 서문이 있다. 또 가까이에 있거나 멀리 있거나 간에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시는 것에는 주의를 기울여야 마땅하다(13절).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너희 먼 데 있는 자들아 들으라." 먼 지역에 있는 자들과 미래의 세대에 속한 자들로 하나님께서 행한 것을 듣게 하라. 그들은 실상 그것을 듣는다. 그들은, 가까이에 있는 자들, 곧 그 이웃 민족들과 그 당시에 살았던 자들과 마찬가지의 큰 확신을 가지고, 성경으로부터 사건에 대해 들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듣는 자마다, 먼 데 있든지 가까이에 있든지 간에,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권능과 그는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하자.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듣고서도, 그의 권능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자들은 매우 어리석은 자들이다.
그러면 우리가 주목하고 그 속에서 그의 권능을 인정해야 하는 그의 행위는 무엇인가?
Ⅰ. 하나님은 시온에 있는 죄인들에게 두려움을 급파하셨다. "경건치 아니한 자들이 떨었다" 고 했다(14절). 시온에는 죄인들, 곧 시온의 특권을 누리고 시온의 봉사에 협력하나 그 마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지 않은 사곡한 자(위선자)들이 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외형적 신앙 고백을 미끼로 은밀한 죄의 소굴에 거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들이 위선자임을 증명한다. 시온에 있는 죄인들은 다른 죄인들보다 더욱 크게 문책받을 것이다. 그리고 시온에 있는 그들의 처소가 그들의 안전함을 보장해 주기는커녕 그들의 죄와 그들의 벌을 더욱 무겁게 할 것이다. 시온에 있는 그 죄인들은 항상 은밀한 놀람과 공포의 지배하에 있었을지라도, 이제는 자책감으로 인해 평소보다도 더욱 간담이 서늘해졌다.
1. 앗수르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곧 거기에 불을 질러 그것을 재로 만들 준비를 하며, 벌집을 불사르는 것을 보았을 때, 그들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들은 자기들은 애굽으로 피신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한 편으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건지시리라는 것을 그의 선지자들을 통해 들려주신 그 약속을 믿을 수 없었을 때, 어찌할 바를 몰랐고 미친사람처럼 이리저리 도망하면서 이렇게 부르짖었다. "우리 중에 누가 삼키는 불과 함께 거하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성읍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피신하자. 여기에서 사는 것은 영영히 불타는 불과 함께 사는 것과도 같다." "우리를 위하여 누가 삼키는 불을 막아 주리요?" (혹자는 그것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하나님의 심판이 퍼질 때, 시온의 죄인들이 어떠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를 여기에서 보라. 그들은 위협만 받고 있을 때는 그 심판을 경시하고 무시했다. 그러나 그들이 심판을 받게 되었을 때, 곧 다른 궁지에 몰리게 되었을 때, 그 때에 그들은 그 심판을 과장하여 큰 변인 듯이 말한다. 그들은 그것을 "삼키는 불과 영영히 타는것," 그리고 구제와 도움이 끊어진 것이라고 부르고 있다. 말씀의 명령을 거역하는 자들은 곤궁한 때에 안위함을 얻을 수 없다. 또는 오히려
2. 앗수르 군대가 멸망하는 것을 보았을 때, 그들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왜냐하면 그것의 멸망은 바로 앞에서 언급되었던 그 불이기 때문이다(11, 12절). 시온에 있는 죄인들이 하나님의 진노가 어떤 무서운 일을 행하는가를 알았을 때는, 자기들이 다른 신들을 은밀히 섬김으로써 이 하나님을 격동케 했다는 것을 알고는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렇게 외친다. "우리 중에 누가 삼키는 불과 함께 거하리요?" 즉 가시나무처럼 거대한 군대 앞에 거하겠는가? "우리 중에 누가 타는 불과 함께 거하겠는가?" 즉 앗수르 사람들을 불에 굽는 횟돌같게 만든(12절) 이 불과 누가 함께 있겠는가? 그들은 그렇게 말했다. 아니 그렇게 말했어야 했다.시온의 대적들에 내린 하나님의 심판을 보면, 시온의 죄인들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다윗 자신도 그런 심판을 보고 떨었다(시 119:120). 하나님 자신이 이 소멸하는 불이시다(히 12:29). 그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삼상 6:20) 하나님의 진노는 스스로 자기를 불태우는 연료가 된 자들을 영영히 태울 것이다. 그것은 결코 꺼지지 않을 것이요 저절로 소멸되지 않을 불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멸하는 영혼의 양심을 벌 주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진노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아무리 대담한 죄인들도 그것에 대항할 수 없으며, 그것의 시행을 견딜 수 없고, 그 무서움을 예상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우리의 피난처이신 그리스도께로 도망함으로써 장차 임할 진노를 피하도록 하자.
Ⅱ. 하나님은 은혜롭게도 자기를 의지하던 그의 백성들의 안전을 도모하셨다. "이를 듣으라. 그리고 의롭게 행하고 정직히 말하는 자를 높은 곳에 거하게 하시는 일에서 그의 권능을 알라" (15, 16절).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알 수 있다.
1. 선한 자의 성품이다. 그는 모두가 죄악에 빠진 시대에도 여러 가지 면에 자기의 선한 성품을 보존한다.(1) 선한 자는 의롭게 행한다. 그는 생활 전체에서 공의의 법대로 행하며, 모두에게 공평히 대하는 것, 즉 사람에게는 사람의 것을 돌리고 하나님께는 하나님의 것을 합당하게 돌리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의 행함은 의(義) 자체이다. 그는 조금도 부당한 일을 고의적으로 행하려 하지 않는다.
(2) 그는 정직히(문자 그대로 보면) "정직" 을 말한다. 그는 참되고 올바른 것을 정직한 의도를 품고 말한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서 저렇게 말할 수 없으며, 이 길을 보고서 다른 길로 배를 저어갈 수 없다. 그의 말은 그에게 있어 맹세처럼 신성한 것이며, '예' 하고 다시 '아니오' 하지 않는다.
(3) 그는 그릇된 방법으로 얻은 것을 탐내지 않고 경멸한다. 그는 그 이웃을 착취함으로써 스스로를 부요케 하는 것을 천하고 더러운 것으로 여기며, 그런 것을 존경받는 자로서는 합당치 않은 일로 생각한다. 그는 나쁜 일을 행하기를 멸시했고, 나아가 그렇게 함으로써 이득이 생길지라도 가혹한 일 행하는 것도 멸시한다. 그는 얻는 것 자체를 과대평가하지 않으므로, 정직하게 얻어지지 않은 것은 곧 가증히 여긴다.
(4) 그는 언제든지 정의를 굽게 하는 뇌물이 손에 들어오면, 그에게 뇌물이 자기에게 들어왔다는 사실 자체를 모욕으로 생각하여 크게 혐오하면서, "손을 흔들어 뇌물을 받지 아니한다."
(5) "그는 귀를 막아," 잔인한 일이나 피흘리려는 꾀를 또는 보복하도록 충동하는 어떤 암시도(욥 31:31) "듣지 아니한다." 싸움을 즐기면서 "함께 제비를 뽑자" 고 유혹하고(잠 1:14, 16) 자들의 말에 대해 그는 귀를 막아 버린다.
(6) 그는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한다." 이처럼 죄를 싫어하므로, 그는 다른 사람들이 범죄하는 것을 참아 보지도 못하며, 범죄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스스로 경계한다.
자기 영혼의 결백함을 보존하려는 자들은 육체의 소욕을 엄격히 감시해야 하며, 유혹에 대해서 귀를 막고, 허탄한 것을 보지 않도록 눈을 돌려야 한다.
2. 선한 자가 받는 위로를 보자. 그는 모두가 재앙에 빠지는 시기에도 위로를 보존할 수 있다(16절).(1) 그는 안전하게 될 것이다. 그는 삼키는 불과 영영한 불을 피하게 될 것이다. 그는 삼키는 불이신 하나님께 접근하여 그와 교제를 나눌 것이다. 그 하나님이 그에게는 오히려 기쁨의 빛이 될 것이다. 그리고 현세적인 환난에 대해서도 "그는 높은 곳에 거하여" 그것이 미치지 않는 곳, 아니 그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 있게 될 것이다. 그는 현세적 환난에 의해서 실제적인 해를 입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는 그것에 크게 놀라지 않을 것이다. "큰 물의 홍수가 그에게 가까이 하지 못할 것이다." 만일 그 물이 엄습해 온다 하더라도, "견고한 바위가" - 인공적으로 뿐만 아니라 자연적으로 요새화되어 - 강하고 끄떡없는 "보장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안전하게 지킬 것이며 그 능력에 대한 그의 믿음은 그를 편하게 할 것이다. 만세반석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높은 망대가 되어 주실 것이다.
(2) 그는 필요한 것을 공급받을 것이다. 그는 아무 것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가장 철저히 포위되어 식량 공급이 끊어질 때에도 "양식이 공급되는 물은 끊치지 아니하리라." 즉 그에게는 반드시 물이 끊임없이 공급될 것이다. 따라서 그는 물을 조금씩 그리고 놀라면서 마시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자기들에게 유용한 것이 결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Ⅲ.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보호하실 것이며, 그 침입자들의 손에서 건지실 것이다. 그들을 위협한 이 광풍은 그칠 것이며, 그들은 다시 번영을 누릴 것이다. 이들의 형통함에 대한 여러 가지 사례가 여기에 제시되어 있다.
1. 히스기야는 베옷과 얼굴의 모든 슬픔을 벗어버릴 것이며, 아름다운 모습으로 왕복을 입고 기쁜 모습으로 공중 앞에 나타나(17절) 사랑하는 모든 신하들을 크게 기쁘게 할 것이다. 의롭게 행하는 자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양식과 끊이지 않는 물을 먹게 될 뿐만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아름다움도 그들 위에 임할 것이다.2. 포위 공격으로 인해 그들이 예루살렘 성벽 안에 감금되어 있었지만, 이제 그들은 대적의 수하에 떨어질 위험이 없이 사업이나 즐거움을 위해 밖으로 나갈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그들은 광활한 땅을 보리라." 즉 그들은 그 나라에서 가장 먼 곳까지 방문하고 그 인접한 지방의 경치를 보게 될 것이다. 이처럼 오래 감금된 후에 그렇게 하는 것이 더욱 큰 즐거움을 줄 것이다. 이처럼 믿는 자들은 천국의 가나안, 매우 멀리 있는 그 땅을 바라보며, 환난 때에도 그것에 대한 전망으로 스스로를 안위한다.
3. 그들이 겪었던 그 두려움에 대한 기억은 그들이 구원된 것에 대한 즐거움을 더해 줄 것이다. "너의 마음에는 두려워하던 것을 생각하여 내리라." (18절). 즉, 그 두려운 일이 끝났을 때는, 즐겁게 그것을 회상할 것이다. 너는 아직도 너의 귀로 모두를 이렇게 외치는 경종을 듣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전투 준비, 전투 준비! 각자 자기 부대로 돌아가라. 계산하던 자 또는 서기관이 어디 있느냐? 그로 하여금 점호명부를 작성하게 하라. 공세를 칭량하던 자, 그리고 군대의 회계장관이 어디 있느냐? 각기 충분한 인원수를 확보할 수 있게 하기 위해 그로 하여금 그들에 관한 보고서를 가져오게 하라."
아니면, 이 말들은 앗수르 군대가 격파되었을 때 외친 예루살렘의 개가로 간주될 수 있다. 그리고 바울 사도도 이 세상 학문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해 격파된 것에 대해 개가를 부를 때, 이러한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고전 1:20).
그 처녀 시온의 땅은 그들의 모든 전투 준비를 멸시한다. 앗수르 군대의 서기관이나 검열관이 어디 있느냐? 그들의 무게를 다는 사람(즉 회계 장관)이 어디 있으며, 망대를 계수하던 기사들은 어디 있느냐? 그들은 모두 죽었거나 도망했다. 그들은 끝장이 났다.
4. 그들은 앗수르 사람들을 보아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앗수르 사람들은 본래 강포한 백성이었고 유대 백성에게는 특히 그러했다. 그리고 그 앗수르 사람들은 이상한 방언을 썼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탄원이나 호소를 이해할 수 없었고, 그것을 유대인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구실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앗수르 사람 자신의 의사를 이해시킬 수 없었다. "그들은 방언이 어려워서 네가 알아듣지 못한다. 이 사실이 그들을 더욱 무서워하게 만들었을 것이다(19절). 그러나 네 눈은 이처럼 강포함 그들을 다시 보지 않을 것이며, 그들이 모두 시체가 될 때의 그 변한 안색을 보게 될 것이다."5. 그들은 다시는 예루살렘 - 시온과 거기에 있는 성전 - 의 위험을 느끼지 않게 될 것이다(20절). "우리의 절기의 성읍 시온성을 보라. 거기서는 우리의 엄숙하고 신성한 절기가 지켜지며, 우리는 그곳에서 종교적 모임을 갖고 하나님께 경배하기 위해 만나곤 했다."
그들 중에 있는 선한 사람들은 이 환난의 시기에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시온을 위해 고심했다. 즉 그것은 그들이 절기를 지키는 성읍이었고, 그 정복자들이 그 성전을 불태워 그들이 다시는 엄숙한 절지를 지키지 못하도록 하려했던 것이다. 공적인 위험이 닥칠 때에는, 우리의 신앙에 대해 가장 관심을 기울여야 하며, 절기의 성읍은 강한 성읍이나 곡창 성읍보다 더욱 귀중한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구원하시리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셨기 때문이다. 즉 예루살렘은 거룩한 의식을 행하는 성읍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그 성읍을, 백성의 영광으로 알아서 그것을 지키도록 하자. 그러면 우리는 그 영광을 위해 하나님께서 한 방어책을 마련해 주리라고 믿게 된다.
예루살렘에 대해 여기에서 다음 두 가지 사실이 약속되어 있다.
(1) 확고한 기초가 있는 안전의 약속이다.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안정된 처소" 가 된다고 했다. 그들은 이전처럼 전쟁이나 핍박의 칼의 경보 때문에 괴롭힘을 당하고 방해당하지 않을 것이다(29:20). 그것은 우리의 절기의 성읍인 것과 마찬가지로 안정된 처소가 될 것이다. 우리 자신의 집에서 안정을 얻은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집에서 평안히 거하여, 거기에 우리를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이 없다면 그것은 더욱 바람직하다. 예루살렘이 그러할 것이다. 그리고 "네 눈에 그것이 보일 것이다" 라고 했다. 이것이 선한 사람에게는 매우 큰 만족이 될 것이다(시 128:5, 6). "너는 예루살렘의 복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 너는 생전에 그것을 볼 것이며 그것을 누릴 것이다."
(2) 옮겨지지 않는 안정의 약속이다. 예루살렘, 곧 우리의 절기의 성읍은 새 예루살렘과 비교해 볼 때, 실상 "장막" 에 불과하다. 현재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는 미래를 위해 보존되어 있는 그것과 비교해 볼 때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예루살렘은 "옮겨지지 아니할" 그러한 장막이다. 이 고통이 끝난 후, 예루살렘은 오랫동안 확고한 평강을 즐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장막의 말뚝과 줄 - 신성한 특권 - 은 옮겨지지 아니할 것이며, 또 그 종교적인 사업의 진로와 범위를 방해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땅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는 장막이다. 그리고 그것은 비록 이곳 저곳으로 이동될지라도, 세상이 서 있는 한, 뽑혀지지 아니할 것이다. 왜냐하면 각 시대마다 그리스도는 자기를 섬길 후손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언약의 약속은 결코 뽑히지 않을 교회의 말뚝이요, 복음의 규례와 제도는 결코 끊치지 아니할 그 줄이다. 그것들은 비록 천지가 요동할지라도 흔들릴 수 없는 것이요, 남게 될 것이다.
6.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보호자와 구주가 되실 것이다(21, 22절). 이것이 그들의 확신의 주된 근거이다. "영화로우신 여호와가 되시는 그가 우리를 위하여 자기 영광을 보이실 것이며, 우리에게 영광이 되실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그 대적이 겨루는 영광을 무색하게 할 것이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주님이 되심으로써 또한 영광스러운 주님이 되신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구주가 되실 것이며, 그의 영광스런 주님이 되실 것이다.(1) 외적으로는 그들의 적에 대한 호위자가 된다. 그는 넓은 하수나 강이 둘림 같을 것이다. 예루살렘은 대부분의 큰 성읍들과는 달리 기드론 시내 외에는 그 주위를 흐르는 중요한 강이 없었으므로, 무역과 통상에 가장 큰 편의를 주는 것들 중 한 가지이며, 가장 훌륭한 자연적인 요새 중의 한 가지가 결여되어 있었다. 이러한 면에서 그들의 대적은 그들을 업신여겼고, 그들을 쉽게 손에 넣으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은 우리에게 있어서 언제나 피조물의 결합과 피조물의 장점과 아름다움의 결함을 언제든지 충분히 메워 준다. 하나님 안에는 모든 것, 우리가 필요로 하고 바랄 수 있는 모든 것이 있다.
예루살렘은 다른 장소가 가지고 있는 많은 외적인 이점을 지니고 있지는 않았으나, 하나님 안에는 그에 상당하는 이상의 것이 있다. 그러나 예루살렘 둘레에 넓은 하수나 강이 있었다면, 침입자의 함대가 쉽게 그곳에 접근할 수 있겠는가? 접근 할 수 없다. 이것은 노질하는 배가 "통행치 못하고", 용사나 위풍당당한 배가 통행치 못할 하수와 강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강이 되신다면 대적들은 거기에 접근할 수 없다. 그들은 거기에서 길을 발견할 수도 없으며 그들의 길을 강행할 수 없다.
(2) 그들의 나라 안의 일에 대한 안내자로서 이다. "여호와는 우리의 재판자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에게 해명할 의무가 있으며, 그의 심판에 우리 자신을 의뢰하고, 또 그의 심판에 따라 처신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라건대) 그가 우리를 위해 재판하실 것이다.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자이시다. 그의 말씀은 우리에게 율법이며, 우리 안의 모든 생각은 그에게 복종한다.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우리는 그에게 경의와 조공을 드리고 어김이 없는 충절을 바친다. 따라서 그가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니라. 보호가 충성을 요구하듯이, 충성은 보호를 기대할 수 있으며, 또 하나님의 보호를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믿음에 의해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방백과 구주로 삼으며 또한 그를 의지하고 우리 자신을 그에게 바친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이 얼마나 높이 강조되어 있는가를 살펴보라. 그들은 이것으로써 그들 자신을 안위하고 있다.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자시요, 자존자(自存者)이요, 자족자이며, 우리의 모든 것을 넉넉히 채우시는 자이다" .
7. 그 대적들은 완전히 얼이 빠질 것이며, 그들의 모든 능력과 계획은 파선하리라. 마치 날씨가 험악해서 폭풍을 이겨낼 수 없으며, 돛대가 끊어져 돛대 밑을 튼튼히 하지 못하고, 또 아무런 수리도 할 수 없어서 파선된 배처럼 무너질 것이다(23절). 앗수르 사람의 "돛대 줄은 풀렸다." 그들은 선원들이 돛대 밑을 튼튼히 할 수 없음을 알고 포기해버려 곧 갈아 앉게 될 또는 도대 줄이 풀린 배와 같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틀림없이 예루살렘을 얻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예전처럼 그 항만에 마구 들어와서 모든 것이 자기들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때에, 배를 아주 멈추게 되었고, "돛을 달지 못한" 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의 진노를 퍼 부우실 때까지 항해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의 교회의 원수들은 자기들의 목적을 거의 다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그 때에, 흔히 무력하게 되고 무장해제를 당한다.8. 그들의 진영의 재물은 유대인들에게 풍성한 노획물이 될 것이다. "때가 되면 많은 재물을 탈취하여 나누리라" 고 했다. 앗수르 군의 절반 이상이 살륙당했을 때, 그 나머지는 혼비백산하여 다급하게 도망했으므로 (아람 사람들처럼) 그들은 "장막을 그대로 버려두고 갔다." 따라서 그들의 모든 보화는 포위당했던 자들의 손에 떨어졌다. 심지어 "저는 자도 그 재물을 취했다." 집에 머물러 있던 자들도 노략물을 나누었다. 그것은 매우 쉬운 일이었으므로, 강한 자뿐만 아니라 손이 불구여서 싸울 수 없고 발이 불구여서 추격할 수 없는 저는 자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들은 위험을 겪지 않고서도 승리를 얻게 될 뿐 아니라, 애쓰지 않고서도 약탈물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노획물이 매우 풍부하기 때문에, 먼저 서둘러온 자들이 원하는 만큼 많이 가져 간 후라도, 늦게 온 저는 자가 충분히 가져가게 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악한 것에서 선을 내셨고, 예루살렘을 건지셨을 뿐만 아니라 부요케 하셨고, 그들이 당한 손실을 풍족하게 보상해 주셨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두려움과 고통은 흔히 이처럼 기분좋고 만족스런 결과로 끝났다.
9. 병과 죄가 모두 제거될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결과가 이렇게 될 때, 병은 긍휼 가운데 제거되며 심지어는 죄까지도 제거된다.(1) "그 거민은 내가 병들었노라 하지 아니할 것이다. 저는 자도 그 재물을 취할 것이며," 마찬가지로 병든 자도 그들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몸을 움직여 그 버림받은 적진으로 가 스스로 무엇인가를 노획할 것이다. 또는 이 말씀은, 이 때를 맞이하여 전체적인 환희가 있을 것이므로, 병든 자들도 잠시 자기들의 아픔과 그 슬픔을 잊어버리고 함께 그 기쁨에 연합할 것을 뜻할 수도 있다. 그들의 성읍이 건지우는 것이 그들의 치료가 될 것이다. 또는 대게 오랜 포위 공격의 결과는 전염병이지만 예루살렘의 경우는 그렇지 않을 것이며, 그 거민들은 그들의 승리와 평화와 더불어 건강도 또한 지니게 될 것이며, 그들의 대문 앞에서는 병 때문에 원망하는 일이 없으리라는 것을 시사할 수도 있다. 또는 병든 자들은 예루살렘에게 일들이 잘되는 것을 보는 동안에는 불평없이 그들의 병을 견디어 낼 것이다. 우리의 개인적인 근심은 공적인 긍휼에 대한 우리의 감사 속에 갈아 앉아야 한다.
(2) "거기 거하는 백성이 죄사함을 받으리라." 민족적 심판이 제거됨으로써 민족이란 집합체의 죄책이 사함받게 될 뿐만 아니라, 거기에 거하는 각 사람이 회개하고 개심함으로써 죄를 사함 받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모든 은총의 기저가 되는 것으로서 약속되어 있다. 하나님은 실로 그렇게 하실 것이며, 그들을 위해 그렇게 하실 것이다. "그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실 것이다" (히 8:12).
죄는 영혼의 병이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용서하실 때 병을 고치신다. 그리고 죄라는 병이 용서의 긍휼에 의해 고쳐질 때, 육신의 병의 가시는 뽑혀지고 그 원인이 제거된다. 그러므로 그 거민은 더 이상 앓지 않게 되거나, 아니면 적어도 "내가 병들었노라" 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외적인 고통으로 인하여) 죄악이 제거된다면, 우리는 그 외적인 고통을 불평할 이유가 거의 없게 된다. "아들아, 기뻐하라. 네 죄가 사함받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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