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의 노래 (이사야 25:1-5)
앞 장 끝부분에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라고" 적혀 있다. 이제 이것에 응하여, 그 예언자는 여기에서 "주의 나라의 영광스런 위엄" 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시 145:12), 그에게 그 영광을 돌리고 있다. 그리고 이 예언은 바벨론이 멸망함으로써,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된 사건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더 나아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적 신자들에게 위로를 주시는 것에 대해, 복음의 교회가 하나님께 바쳐져야 할 찬미를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Ⅰ. 이 예언자는 하나님을 찬송하기로 결심하고 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을 선동하여 하나님을 찬송케 하고자 하는 자들은 먼저 자기 자신을 선동해야 하기 때문이다(1절).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 나와 언약하신 하나님이시라." 하나님께서 "땅에서 땅의 왕들" 을 벌하시며, 그의 앞에서 그들을 떨게 만드실 때에도, 초라한 예언자는 그에게도 갈 수 있으며 겸손한 용기를 가지고 "여호와 주는 나의 하나님" 이시므로,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자오리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여호와를 자기들의 하나님으로 가진 하들은 그를 찬송할 의무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우리를 그의 백성으로 삼으시어, "우리가 그의 이름과 칭예가 되게 하려" 함이기(렘 13:11) 때문이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운데서 우리는 그를 높인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실제보다 더 높게 찬양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그가 행하신 일 이상의 것을 행하실 수 있음을 우리 스스로나 다른 사람에게 나타내 보려한다(출 15:2 참조).
Ⅱ. 그는 다른 사람들도 또한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리라는 생각에 스스로 즐거워하고 있다(3절). "따라서 주께서 주의 섭리로 땅을 황무케 하셨고(시 46:8) 주께서 주와 주의 교회의 원수들에게 정당한 복수를 하셨기 때문에 강한 민족이 일제히 주를 영화롭게 하며 포학한 나라들의 성읍(수도, 또는 그러한 나라의 성읍들)이 주를 경외하리라이다" 라고 했다. 이 말은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다.
1. 하나님을 대적하는 강하고 포학했던 백성들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하며, 애써 하나님 나라의 이권을 대적하며 싸웠던 자들이 마침내 개종하여 하나님의 백성과 연합하여, 그의 일을 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마침내는 자기들 자신이 하나님께 정복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용사들에게 두려움을 주었던 자들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떨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며, 바위와 산을 찾아 숨을 것이나 헛되리라.2. 또는 전에는 약하고 짓밟혔을지라도, 이제는 하나님을 위해, 또 하나님에 의해 막강한 존재가 될 자들에 관한 예언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님은 당신을 경외하고 영화롭게 하는 자들을 위해서 그들 가운데 매우 분명하게 나타나실 것이므로, 모든 사람들이 그들이 강한 백성임을 시인하며 두려워할 것이다. "본토 백성이 유다인을 두려워하여, 유다인 되는 자가 많았던" 때가 있었고(에 8:17),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기를 발하였고(단 11:32) 그것으로 인해 그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던 때가 있었다.
Ⅲ. 이사야는 이 찬송의 제목과 또 마땅히 그래야 할 것을 주목하고 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높이고 찬송해야 한다.
1.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정하신 뜻에 따라서 기사(奇事)를 행하셨기 때문이다(1절). 우리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은 진실로 경이로운 일(기사)이라는 것을 알고 찬미하면, 그것으로써 하나님을 존귀케 할 수 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은 어떤 피조물도 모방할 수 없는 하나님 자신의 능력에 대한 경이로운 증거요, 우리와 같이 죄악된 피조물들이 감히 기대할 수 없는 그의 선하심에 대한 놀라운 증거이다." 이러한 기사(奇事)들" 은 새롭고 신기하며 우리가 전혀 생각해 보지 않은 것들인데, 그가 "옛적에 정하신 뜻" 대로 된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로써 고안되고, 그의 영광과 그의 백성의 위로를 위해 계획된 것이다. 섭리의 모든 작용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그리고 그 성실함과 진실함)대로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모두 그의 속성에 일치하고 서로 다른 것과 모순이 없으며, 반드시 합당한 때가 되면 이루어 진다.
2. 하나님은 특별히 세상 권세자들이 교만을 낮추셨고, 그들의 권력을 꺾으셨다(2절). "주께서 성읍으로 많은 성읍으로 쓰레기 무더기를 이루셨나이다. 자연과 인위적 기술이 있고, 군사들의 수가 많으며 용기가 있으므로 자체 방어가 잘되어 있다고 생각한 그 견고한 많은 성읍들을 주께서 황무케 하셨나이다." 피조된 힘이 어떻게 전능하신 자를 막아낼 수 있겠는가? "매우 값지게 건축되었으므로 궁성이라 불리울 수 있었고, 모든 지역에서 가장 높은 지위의 사람들이 매우 자주 방문했기 때문에 외인의 궁성이라 불리울 수 있었던 많은 성읍을 여호와께서는 성읍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그것은 하나의 돌도 다른 위에 남지 않고 땅과 같아지게 되었고, 또 영영히 다시 서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이것은 실상 세계 여러 지역, 특히 우리 나라(영구)에 있는 많은 성읍들의 경우에 사실로 드러났다. 한때 번성했던 성읍들이 쇠잔하여 상실되었고, 어디에 있었는지도(땅에서 파낸 항아리나 동전에 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얼마나 많은 이스라엘의 성읍들이 오랫동안 무더기와 폐허로 있었는가! 이것으로써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땅에는 약속한 성읍이 없다" 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으며, 우리는 결코 폐허로 되거나 쇠퇴하지 않을, 장차 임할 성읍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계신다.
3. 하나님은 빈궁하고 환란 당하던 당신의 백성들을 합당한 때에 안위하시고 구조하셨다. "주는 빈궁한 자의 보장(保障)이시며, 빈핍한 자의 보장이 되셨나이다" (4절). 하나님은 교만하고 방심 상태에 있는 강한 자를 연약하게 하시는 동시에, 겸손하고 신실하며 그를 의지하던 연약한 자들을 강하게 하신다. 아니 하나님은 그들을 강하게 만드실 뿐만 아니라 그가 친히 그들의 힘이 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서 그들은 자신들을 스스로 강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에 힘(보장)" 이 되는 것은 바로 그의 은총이다. 하나님은 힘(보장)이 필요한 때에, 그리고 환란을 당하여 그 환란이 당사자를 하나님께로 몰고갈 때, "환란당하고 빈핍한 자의 힘(보장)" 이 되신다. 하나님은 그들의 내적 쇠퇴를 막아 주시고 그들을 강건케 함과 동시에, 그들을 외적 공격으로부터 보호하신다. 하나님은 비나 우박의 "폭풍 중에도 피난처" 이시며, 몹시 뜨거운 여름에는 "폭양을 피하는 그늘" 이시다. 하나님은 어떠한 날씨에도 더울 때와 추울 때, 우중에와 건조기에 그의 백성에게 충분한 보호가 되신다. 의의 병기가 "좌우에서" 싸워 준다(고후 6:7). 하나님의 백성도 어떤 위험이나 환란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해나 손상을 입지 않도록 충분한 보호 조처가 취해진다.사태가 매우 위협적이거나 긴급할 때, 그 때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안전을 위해 나타나실 것이다. "포학자의 기세가 성벽을 충돌하는 폭풍과 같을 때에도," 그것은 매우 거센 소리를 내나 성벽을 무너뜨릴 수는 없다. 하나님의 빈궁한 백성들의 대적들은 무서운 자들이다. 그들은 그 빈궁한 자들에게 무섭게 보이기 위해 온갖 일을 다 행한다. 그들의 격노는 거세게 맹렬하게 몰아치는 일진 광풍과도 같다. 그러나 바람과 마찬가지로 그것도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바람을 당신의 장중에 붙들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그러한 피난처가 되시므로, 그들은 그 격동을 대항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또 그들의 땅을 보존하고, 그들의 정직과 화평을 지킬 수 있게 될 것이다. 배에 부딪치는 폭풍은 배를 괴롭히나, 성벽에 충돌하는 폭풍은 결코 그 성벽을 흔들지 못한다(시 76:10; 138:7).
4. 하나님은 당신을 의지하는 자들을 그 교만하고 포학자들의 오만으로부터 보호하실 것이다(5절). "주께서 의인의 훤화를 그치게 하시리이다." "마른 땅에 폭양이" 끼어든 "구름으로" 약화되고 완화되는 것과 같이, 주께서 그들의 소리를 약하게 하시고, 조용하게 하실 것입니다. "포학한 자의 가지" - 차라리 승리의 노래를 "낮추시리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기들의 음색을 바꾸고 음성을 낮추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고찰해 보자.(1) 하나님의 백성들의 포학한 자들은 "외인" (外人:strangers)이라 불리우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들이 학대하는 자들도 자기들과 똑같은 틀로 곧 똑같은 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잊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포학한 자" 라고 불리우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온화한 자가 되기 보다는 포학한 자가 되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랑받기 보다는 두려움의 존재가 되기를 원한다.
(2)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그들의 오만은 소란스럽고 격렬하다. 그것이 전부이다. 그것은 외인의 소란스러움에 불과하다. 외인(나그네)들은 자기들의 길을 방해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호통을 치고 협박하고, 허풍을 침으로써 목적을 수행하고자 하는 것이다. "애굽왕 바로는 소리뿐이라" (렘 46:17)고 했다. 그것은 한낮에 맹위를 떨치는 폭양과 같다. 그러나 해가 졌을 때는, 간곳이 없어진다.
(3) 그들의 소란스러움과 열기, 그리고 그들의 모든 승리는 그들의 희망이 좌절되고 그들의 모든 영예가 티끌 속에 묻힐 때, 함께 낮아지고 비천하게 될 것이다. 포학자의 가지(우리 성경 - "노래")는 심지어 그 꼭대기 가지까지도 꺾어져 쓰레기 더미에 던져질 것이다.
(4) 하나님의 포도원에 있는 일군이 언제든지 "온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디라는 부름을 받게 되면, 하나님은 친히 어떠한 방법으로든, 구름으로 가려주는 것 같이 그들의 활기를 소생시켜 주시어, 그들이 지치지 않게 해 주실 것이다.
복음의 축복 (이사야 25:6-8)
만일 우리가 (많은 사람들의 견해대로)본문은 앗수르 군대가 한 천사에 의해 패주당햇을 때, 또는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해방되었을 때, 또는 그와 맞먹는 놀라운 구출을 경험했을 때에 시온과 예루살렘에 임하게 될 그 큰 기쁨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더 나아가 복음의 은혜를, 그리고 그 은혜의 면류관이요 완성인 저 영광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여기에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는 것은 그리스도로 인한 우리의 부활 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우리가 사도 바울을 믿는다면) 그때에서야 비로소 그 말씀은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사망의 이김이 삼킨 바 되라라" (고전 15:54)고 했다. 이 점이 여기에 함께 연관되어 있는 나머지 약속들에 대한 열쇠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에게 임한 그 구원과 은혜에 대한 예언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그 구원과 은혜는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피던" 것이었다(벧전 1:10).
Ⅰ. 복음의 은혜는 모든 백성들을 위해 베푸는 궁중 잔치가 될 것이다. 그것은 단지 그 잔치를 베푼 주인의 위엄을 보이고자 한 아하수에로왕의 잔치(에 1:4)와는 다를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손님들을 흡족하게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기" (아하수에로왕의 잔치)에서의 모든 것은 보이기 위함이었던 반면, "여기" 에서의 모든 것은 실질적인 것이다. 회개한 자들과 하나님께 간청하는 자들을 친절히 받아들일 준비가 복음 속에 이미 되어 있다는 사실을, 흔히 신약 성서에서는 "잔치" 의 비유로 말했다(마 22:1 이하 등). 그것은 모두 이 예언에서 빌어온 것으로 보인다.
1. 하나님 자신이 그 잔치의 주인이시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받는 분이라기 보다는 우리에게 주는 분으로 등장하리라고 확신할 수 있다. "만군의 여호와" 께서 이 잔치를 베푸신다.2. 초대 받은 손님들은, "만민이다." 즉 유대인들은 물론 이방인들까지이다. "가서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하라" 고 했다. 그 잔치에는 모든 사람에게 충분한 것이 있으며, 원하는 자는 누구나 와서 자유롭게 참석할 수 있다. 그리고 길거리나 들에서 데려온 자들까지도 참석할 수 있다.
3. 그 장소는 "시온산" 이다. 거기에서부터 복음의 전파가 일어났다. 전도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야 한다. 복음의 교회는 신성한 예루살렘이다. 거기에서 이 잔치가 베풀어지며, 초대받은 모든 손님들은 그곳으로 가야하는 것이다.
4. 마련된 것은 매우 풍요하며 모두 가장 좋은 품질의 것들이다. 그것은 "잔치" 다. 잔치란 모름지기 풍요하고 다양한 음식이 있어야 한다. 또한 그것은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계속적인 잔치이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그들 자신의 잘못이다.
그것은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으로 연회" 를 베푼 잔치이다. 이처럼 복음의 즐거움은 그것으로 잔치를 열고 그것을 맛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매우 풍미가 있고 영양이 많다. 돌아온 탕자는 살찐 송아지를 대접 받았다. 다윗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자기에게는 골수와 기름진 살을 먹는 것같이 영혼이 즐겁다고 했다.
또 이 잔치는 "맑은 포도주" 가 있는 잔치다. 즉 아주 품질 좋고 강한 포도주가 있다. 오래 저장해 두었다가 잘 걸러서, 깨끗하고 순수한 포도주이다. 포도주를 건전하게만 쓰면 마음과 기분을 즐겁게 해 주듯, 복음 속에도 그런 것이 있으며, 그것이야말로 죄의 죄책으로 조심하는 자들에게 안성맞춤이다. 술을 마시면 자기들의 비참함을 잊을 수 있게 해 주듯(왜냐하면 그것은 포도주의 적합한 용도이기 때문이다. - 포도주는 그것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청량제가 된다. 잠 31:6, 7), 그들의 죄가 사함받았다는 것을 알고 마음을 유쾌하게 하고, 강건한 자는 포도주로 활기를 되찾듯이 그들의 영적 사업과 투쟁을 활발히 행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요, 그리하여 마음에 근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이다(바로 그것이 복음 안에 들어있다).
Ⅱ. 세상을 오랫동안 가리고 덮어왔던 무지와 과오의 흑암이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7절). "그가 이 산에서 그 가리워진 면박(얼굴을 가리는 것)을 제하시리라. 모든 백성들을 덮고 있어서(즉 눈을 가리거나 속이고 있어서) 그들이 자기들의 길을 볼 수 없고 또 일을 착수할 사도 없는, 그리고 그것 때문에 그들이 끝없이 방황하게 되던, 그 가리개를 하나님이 제하실 것이다. 그들의 얼굴은 정죄당한 사람이나 죽은 사람의 얼굴처럼 가리워져 있었다.
" 열방에는 그 덮은 휘장" 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가 흑암 가운데 앉아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알려지신 바 된" 유대 민족들에게 있어서도 "수건이 그 마음을 덮" 은 그런 때에, 이방인들이 그러하다는 것은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다(고후 3:15). 그러나 이제 여호와께서는 세상에 비추이는 당신 복음의 빛과 또 사람의 눈을 뜨게 하여 그 복음의 벌을 받아들이게 하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그 휘장을 제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오랫동안 범죄와 죄악으로 죽어 있었던 자들에게 영적 생명을 부여하실 것이다.
Ⅲ. 사망이 정복되리라고 했다. 즉 사망의 권세가 꺾여질 것이며, 그 성질이 바뀌어질 것이다. "그가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다." 라고 했다(8절).
1.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부활을 통해 친히 사망을 이기시고, 그 모든 속박과 피대와 빗장을 꺾으실 것이며, 그 모든 줄을 풀어버리실 것을 뜻한다. 무덤이 그를 삼키는 것 같았지만, 실상은 그가 무덤을 삼키셨다.2. 성도들의 행복은, 세상의 모든 즐거움을 종식시키고, 상하게 하며 그 아름다움을 얼룩지게 하는 사망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을 것을 뜻한다.
3. 신자들이 사망을 이기리라는 것을 뜻한다. 그들은 사망은 이미 정복된 원수라고 간주할 수 있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4. 성도들의 시체가 저 큰 날에 일어나게 되고, 그들의 죽어야할 숙명이 멸하게 될 때, 그 때 사망은 영원히 멸해질 것이다. 그리고 사망이 바로 마지막 원수이다.
Ⅳ. 슬픔은 추방될 것이며, 완전하고 끝없는 기쁨이 있게 되리라고 했다.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실 것이다" (8절). 죄로 인해 애통하는 자들은 위로를 얻을 것이며, 양심의 평화를 회복할 것이다. 은혜의 언약 속에는 이 현재의 모든 스름을 상쇄시키기에 충분한 것이 있다. 즉 우리의 눈물을 씻기고 우리를 소성케 하기에 충분한 것들이 있을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당하는 자들은 고통이 클수록 더 많은 위안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른 곳이 아닌 오직 천국의 기쁨 속에서 - 앞의 예언과 마찬가지로 - "이 말씀이"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계 7:17; 21:4). 그리고 거기서는 "다시 사망이 없기" 때문에 "애통하는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소망은 이제 엄청난 모든 눈물, 곧 씨뿌리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울음을 제거할 것이다.
Ⅴ. 신앙과 신실하게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에 대한 모든 비방은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했다. "그 백성의 수치," 즉 그들이 오랫동안 받고 있던 그 수치와 그들이 누명을 쓴 그 중상과 거짓보도. 그리고 그들의 핍박자들이 그들을 짓밟던 그 오만과 잔인성을 "제하시리라." 그들의 의가 온 세상의 눈에 불빛같이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저들이 자기들이 그렇게 불쾌하게 생각했던 그러한 자들은 아님을 깨닫게 될 것이다. 때로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그의 백성들을 위해 "그들의 수치를 사람들 중에서 제하시는" 일을 행하신다. 그러나 그런 일은 저 큰 날에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으니," 그가 그것을 이루실 수 있으며, 또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의 슬픔과 수치를 인내로써 견디고 그것을 잘 이용하도록 하자. 이 모든 것은 곧 제거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의 기쁨 (이사야 25:9-12)
Ⅰ. 교회는 앞 절에서 약속된 이 축복들을 환영할 것이다. "그날에" 겸손하고 거룩한 환희와 기쁨으로,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도다 할 것이다" (9절). 이처럼, 오랫동안 쓰라린 고통 속에서도 교회가 구원된 사실이 송축될 것이다. 그것은 사망에서 생명을 얻은 것처럼 될 것이다. 구원주와 그가 예루살렘을 구원하실 것을 기다리던 자들은, 이러한 환희와 찬송으로써 그에 대한 기쁜 소식을 맞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승리의 노래로써 영화롭게 된 성도들은 "그 여호와의 기쁨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1. 하나님 자신이 모든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이는 여호와시라. 이 일은 그가 행하신 것이요, 우리에게는 놀라울 뿐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그답게 행하셨고, 그의 지혜와 능력과 선하심을 크게 나타내셨다. 여기에서 그는 우리를 위해 우리의 하나님답게, 즉 우리와 계약을 맺으시고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답게 행하셨다."우리의 환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시고 우리에게 주시는 일을 기뻐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되고, 그것의 장본인이시며 그것을 주신 자인 하나님을 기뻐하는 데까지 도달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땅위 어느 민족이 이처럼 의지할 만한 하나님을 가진 민족이 있는가? 아니다. "이 반석은 우리의 반석과 같지 않도다. 여수룬의 하나님 같은 이가 없도다."
2. 그것을 기대하던 기간이 오랠수록 그것은 더욱 기쁘게 환영 받는다. "이분은 우리가 그의 약속의 말씀에 의지하여 기다렸던 분이요, 그리고 때가 되면 오시리라고 확신하였던 분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꺼이 그의 때가 오기를 기다렸도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그를 기다린 것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노라. 왜냐하면 여지껏 지체되었던 것을 충분히 보상할 만한 긍휼이 마침내 왔기 때문이로다."3. 그것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의 제목이 된다. "우리는 그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그 혜택을 누린 우리가 함께 협력하여, 그것에 대한 기쁜 감사를 올리리라."
4. 이 구원이 계속되고 완전케 되리라는 소망을 가지라고 격려가 된다.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그는 시작하신 일을 계속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완전하기 때문이다."
Ⅱ. 이러한 것들을 견고케 하고 영구케 할 더 많은 축복에 대한 전망이 있다.
1. 하나님의 능력이 그 축복에 사용될 것이며, 계속 그것에 이바지할 것이다. "여호와의 손이 이 산에서 나타나시리라" 고 했다(10절). 하나님의 교회와 백성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임재하시고 그들과 함께 거하시는 것에 대한 계속적인 증거를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손은 그들을 보호하고 지키시기 위해 끊임없이 그들 위에 있을 것이며,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기 위해 끊임없이 그들에게 역사하실 것이다. 시온 산은 "영원한 그(하나님)의 안식처" 이다. 거기에 하나님이 거하실 것이다.2. 그들을 치는 데 사용되었던 그들의 대적의 능력을 꺾을 것이다. 본문에는 "모압" 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모든 적들의 대표로 나와 있다. 그런데 그들이 "밟힐 것이다." 즉 타작될 것이다라는 뜻이다(왜냐하면, "그 당시" 그들은 곡식을 밟아서 타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 것에도 쓸모 없기 때문에 "거름물 속의 초개" 같이 버려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손을 이 산에 쉬게 하셨으니," 그 손은 늘어지거나 늘어 접혀졌거나 연약하고 게으른 손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헤엄치는 자가 헤엄치려고 손을 폄같이" 그의 백성들 "중에 그 손을 펼 것이다." 즉 이러한 말씀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당신의 능력을 활발히 상요하시고 발휘하시리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사방에서 그들을 위해 일하시고 계신다. 또 그들을 위해 은총의 계획을 방해하는 것을 손쉽고도 완전히 물리치시고 그로써 그들 중에 그의 선한 사업을 더욱 촉진하실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의 편이 되어, 계속 활동하실 것이다. 마치 헤엄치는 자가 계속 움직이듯이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행하실 일이 자세히 예고되어 있다.
(1) 그는 그들의 대적들이 자랑하고 있는 것을 빼앗는 연속적인 심판에 의해, 그 대적들의 "교만을(모압은 교만의 죄로 유명했다. 16:6) 누르실 것이다."
(2) 그는 "그들의 손의 노획물(우리성경 - "교환")을 뺏을 것이다. 즉 그들이 노략이나 약탈로써 얻은 것을 빼앗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 들어쓰시던 모압인들의 무기를 멸하실 것이다. 그는 그들의 힘을 완전히 꺾으시어, 그들로 하여금 다시는 재앙을 끼치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
(3) 하나님은 그들의 모든 요새를 허실 것이다(12절). 모압에는 성벽과 높은 요새가 있으며, 그것으로 자기들을 안전케 하리라고 바라고 있고, 또 그것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헐어 땅에 내리시되, 진토에 미치게 하실" 것이다. 따라서 그것을 의지하던 자들은 속을 것이다. 전능자에게는 난공불락의 요새가 없으며, 여호와의 팔이 헐어버릴 수 없는 높은 보루가 없다. 모압의 파멸은 죽음을 이기실(8절에 나와 있는) 그리스도의 승리에 대한 한 모형이다. 그는 그의 십자가에서 정사(政事)와 권세자들을 제하시고(골 2:15), 그의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사탄의 견고한 요새를 파하셨고(고후 10:4), 그의 모든 원수가 "그의 발등상이 되기" 까지(시 110:1) 다스리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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