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굽의 운명 (이사야 19:1-17)
애굽 땅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옛적부터 속박의 집이었다. 거기에서 그들은 가혹한 통치를 받아왔다. 그러나 불신앙적인 유대인들 중에는 여전히 그 조상들의 기질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그 조상들은 "한 대장을 뽑아 애굽으로 돌아가자" 고 말했었다. 매사에 그들은 도움을 위해 애굽을 의지했고(30:2), 나라가 극한 상황에 처했을 때도 하나님의 특별한 명령을 복종하지 않고 그리고 도망했다(렘 43:7). 랍사게는 이런 사실을 들어 히스기야를 책망했다(36:6). 그들은 애굽과 동맹을 맺고 있었다. 그것이 유력한 동맹이었을 동안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애굽이 그 심판을 막아 주리라고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언제나 곤경에 처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았고 애굽을 신뢰했다. 이 모든 불행을 막기 위해서, 애급이 굴욕을 당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기에서 그들을 굴욕스럽게 하실 여러 방법을 말씀하시고 있다.
Ⅰ. 애굽의 신들은 유다를 도울 능력이 아주 없다는 그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1절). "여호와께서 빠른 구름을 타고 애굽에 임하시리라. 재판장이 범인을 심리하고 판결을 내리기 위해 당당히 재판관석으로 가는 것처럼, 또는 대장이 반역자들을 진압하기 위해 그의 기병들을 데리고 출진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의 심판을 대동하고 애굽에 임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 때 그는 반드시 이기실 것이다." 여기에 나온 애굽에 관한 모든 경고에는 그들을 침입하는 어떤 외적에 대한 말은 조금도 없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친히 오시어 그들을 치실 것이며, 멸망의 동기를 그들 내부에서 일으키실 것이라 했다. 그는 반대나 항거가 미치지 못하는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다. 하나님은 빠른 구름을 타고 신속히 임하신다. 왜냐하면 그들에 대한 심판은 때가 왔을 때는 조금도 지체없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 군왕들의 최대의 웅장함보다 더욱 뛰어난 위엄을 가지고 "바람의 날개를 타신다." 그는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신다." (시 18:9, 104:3). 하나님이 임하실 때, "애굽의 우상들이 떨 것이라" 고 했다. 즉 하나님이 앞에서 제거될 것이며, 다곤신이 법궤 앞에서 넘어졌듯이 넘어지게 될 것이다. 이시스 애굽이 숭배하던 신(Isis) 오시리스(Osiris) 그리고 아피스(Apis)는 그들의 숭배자들을 구해줄 능력이 없다는 것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들에 의해 부인되고 거절당할 것이다. 우상 숭배는 어느 나라보다도 애굽에서 더 깊게 뿌리박고 있었다. 가장 어리석은 우상 숭배자들도 역시 그러했다. 그러나 이제 그 우상들은 떨 것이며, 그들은 그 우상들을 부끄러워할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데리고 나오실 때, "애굽 사람의 신들에게도 벌을 주셨다" (민 33:4). 그렇다면 하나님이 임하실 때, 그 신들이 떨기 시작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애굽 사람들의 기지가 다했을 때, 그들은 "우상에게 물을 것이며 마술사와 요술객에게 의논할 것이다" (3절).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헛되다. 그들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멸망이 그들에게 신속히 임하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Ⅱ. 용맹하기로 이름난 애굽 군인들은 완전히 기가 죽고 낙담하게 되리라 했다. 애굽 사람들보다 더 훌륭한 방법으로 상비군을 유치시킨 나라는 세상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 용맹을 떨치고 찬사를 받던 애굽의 영웅들도 겁장이로 알려질 것이다. "애굽인의 마음이 그 속에서," 불 앞에 초같이 "녹으리로다" (1절). "애굽인의 정신이 그 속에서 쇠약할 것이다" (3절). 그들은 그들의 나라와 자유와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일어설 마음이나 결단을 갖지 못할 것이다. 단지 그들은 비겁하고 불명예스럽게 그 침입자와 압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항복해 버릴 것이다. 애굽 사람들은 "부녀와 같이 될 것이다" (16절). 그들은 아주 작은 경종에도 놀라 혼비백산 할 것이다. 심지어는 그 나라 중심부 곧 한가운데 거하므로 위험과는 거리가 먼 자들도 변경지방에 위치해 있는 자들처럼 소스라치게 놀랄 것이다. 대담하고 용감한 자들은 교만하거나 방심 상태에 있지 말도록 하라. 왜냐하면 하나님은 쉽사리 "방백들의 심령을 꺾으실" 수 있고(시 76:12), "그들의 총명을 빼앗으실" 수 있기(욥 12:24) 때문이다.
Ⅲ. 애굽인들은 그들 자체의 끊임없는 불화와 다툼으로 혼란을 겪을 것이다. 애굽을 멸하기 위해서는 외세의 힘을 빌릴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멸할 것이기 때문이다(2절). "그가 애굽인을 격동하사 애굽인을 치게 하시리라." 이 분란과 증오심은 그들의 죄로 인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장본인은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욕심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재판장으로서 그들에게 그들의 벌을 허락하시며, 그들의 멸망의 불화로써 그들의 죄악된 협정에 대해 징계하신다. 서로를 돕고 공동 유익을 위해 각자의 위치에서 행동하기는커녕 "그들이 각기" 자기 자신들처럼 사랑해야 할 "형제를 치며 이웃을 칠 것이며, 성읍이 성읍을 치며 나라가 나라를 칠 것이다." 당시 애굽은 열두 도(道) 또는 왕조로 나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의 한 통치자 삼메티쿠스(Psammetichus)는 서로를 충돌하게 만듦으로써 마침내 그 자신이 그 모든 왕조의 주인이 되었다. 이처럼 스스로 나뉘어 서로 치는 나라는 곧 황폐케 될 것이다. En quo discordia cives perduxit miseros! - 백성들이 서로 불화를 일으킴으로 말미암아 그들 위에 불행이 임하게 되었도다! 이것은 "사특한 마음," 곧 서로 상치되는 마음으로 인해 되었다. 마취제가 여러 가지 성분으로 만들어지는 것처럼, 여호와께서는 애굽인들에게 그 사특한 마음을 섞으셨던 것이다(14절). 한편이 어떤 일을 하면, 다른 편은 파가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그 일에 반대하고 나설 것이다. 그것이 사특한 마음이다. 그리고 그런 마음이 공적인 계획에 섞인다면, 그것은 공적 유익을 직접적으로 파멸시킨다.
Ⅳ. 그들의 계략은 모두 허사로 되고 싱거운 것으로 되어버린 것이다. 하나님은 그 민족을 멸하실 때, 정치가들에게서 지혜를 빼앗으시거나(욥 12:20) 서로를 (후새와 아히도벨처럼) 치게 하심으로써, 또는 그들의 방안이 가장 훌륭하게 보일 때에 섭리를 통해 그것을 깨뜨리심으로써 "그 도모를 파하실" 것이다(3절). 그러므로 "소안의 방백은 어리석게" 되었다. 그들은 서로를 바보로 만든다. 각기 자기의 우둔함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거룩한 섭리는 그들 모두를 어리석은 자로 만든다(11절).
애굽왕 바로에게는 지혜로운 고문들이 있었다. 애굽은 이러한 자들로 유명했다. 그러나 그들의 "모략은 우둔하여졌다." 그들이 자기들의 모든 통찰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혹자는 그들이 백치가 되어 일반 상식도 잃어버린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누구도 자기의 지혜를 자랑하거나 그 지혜를 의지하지 말 것이요, 또 자기 주위에 있는 자들의 지혜를 의지하지 않도록 하자. 그리고 바로의 모사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기의 꾀를 자랑하는 것과 자기 자신을 공직에 올리기 위해 자기의 큰 총명이나(" 나는 지혜로운 자, 곧 지혜의 하나님, 지혜 자체의 자손이라" 고 혹자는 말한다. 또 "내 아버지는 당대에 지혜롭기로 이름단 뛰어난 고문관이었다" 고 한다), 유서깊은 가문이나 그 가풍(혹자는 말한다. "나는 옛 왕들의 후예라")을 자랑하는 자들은 그 자랑거리를 빼앗길 수도 있다는 것을 여기서 보아야 한다.
애굽의 귀족들은, 자기들이 1만년 이상 계승되어 온 전설적인 기록을 내놓으면서 그들의 오랜 족보를 매우 자랑했다. 애굽이 다른 민족보다 수천년이나 오래되었다는 것이 그들의 일반적인 자랑거리였기 때문에, 당시에도 그러한 생각이 그들 중에 만연되어 있었다. 그러나 "너의 지혜로운 자가 어디 있느냐(12절) 그들로 하여금 그 나라에 어떤 멸망이 임할 것인가를 예지하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을 막게 함으로써 이제 그들의 지혜를 보이라. 그들로 하여금 여호와께서 애굽에 대하여 정하신 뜻을 온갖 재주를 써서 알게 하고, 그에 대해 무장하게 하라. 아니, 그들은 그렇게 하기는 커녕 실상은 오히려 스스로 애굽의 멸망을 고안해 내고 그것을 재촉하고 있다(13절). 놉의 방백들은 그들의 왕이 독단적으로 처리하게 만듦으로써(그것에 의해 그들 자신과 그들의 백성은 곧 파멸했다) 스스로 미혹되었을 뿐만 아니라 애굽으로 그릇가게 하였도다. 애굽 지파들의 지주이며 모퉁이 돌인 그 장관들은 그것을 몰래 침식해 들어가고 있다.
백성들의 안전을 도모해야 할 자들이 그들의 멸망을 촉진하고, 그 나라 의사가 그 나라의 가장 나쁜 질병의 원인일 때, 공공 안녕에 속한 것들이 공적인 계획을 담당한 자들의 눈에서 아주 멀리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매사에 그들이 실수하고 일을 그르칠 때, 그것은 그 백성들에게 슬픈 일이다. 여기에서도 그러했다(14절). "그들이 애굽으로 매사에 그릇가게 하였도다" 고 했다. 그들이 내딛는 발걸음마다 그릇된 걸음이었다. 그들은 항상 그 목적이나 수단에 있어서 과오를 범했다. 그리고 그들의 계획은 술취한 자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또한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고 토하면서 말을 더듬고 비틀거리는 것처럼, 모두 불안정하고 불확실했다.
우리가 우리의 고문과 장관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보라.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지혜의 영을 부어 주신다면 그 나라의 큰 지주이며 축복이나,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에서 총명을 빼앗으신다면 그것과는 아주 반대가 된다.
Ⅴ. 정부의 지팡이가 학정과 압제의 뱀으로 변할 것이다(4절). "그가 애굽인을 잔인한 군주의 손에 붙이시리라. 외국의 군주의 손이 아니라 그들의 군주, 세습 권리에 의해 그들을 다스리게 되되, 사나운 왕으로서 그들을 냉혹하게 다스리게 될 그 군주의 손에 붙이시리라," 그 군주는 세돈(Sethon) 왕을 계승한 열 두 폭군이거나 아니면, 다시 왕정을 복고한 삼메티쿠스(Psammetichus)일 것이다. 이제 오래 전에 애굽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노역을 시켰던 그 야비한 처사가 그들에게 기억되어졌다. 그들은 또다른 왕 바로에 의해서 보복을 받았다. 교화를 힘써야 할 권력이 멸망을 위한 것이 되고, 백성들을 다스려야 할 자들이 그들을 파멸시키게 되는 그런 때는, 그 백성에게 슬픈 시기이다. 사무엘 상 8장 11절에서 왕의 태도가 그러한 때를(in terroem - 경종을 울리기 위해) 기록하고 있는 바와 같다.
Ⅵ. 애굽은 나일강으로 유명했다. 그것은 그 나라의 부이며 힘이며 아름다움이었고 그들에 의해 우상화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바닷물이 없어지겠고," 그 강이 "잦아서 마르리라" (5절)는 경고가 주어졌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는 자연도 이전처럼 그들에게 호의를 베풀지는 않게 될 것이다. 애굽은 결코 하늘의 비로 촉촉히 적셔지지 않는다(슥 14:18). 그러므로 그 나라의 풍작은 그 강이 넘쳐 흐르는 것에 전적으로 의존해 있었다. 따라서 그것이 마른다면, 그들의 풍성한 땅은 곧 불모지로 변할 것이며, 그들의 추수는 중단될 것이다. "나일강 가까운 곡식 밭이 다 마를" 것은 물론, "옮겨지고 없어질 것이다" (7절). 나일 가까운 곳, 나일 언덕의 초장이 다 마른다면, 더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거기에서 물을 끌어오는 밭에 놓여있는 곡식들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뿐만이 아니다. 그들의 강이 마르는 것은
1. 그들의 요새를 무너지게 한다. 왜냐하면 나일강은 대적의 접근을 어렵게 만드는 "방어의 강" 이었기 때문이다(6절). 깊은 강은 가장 좋은 방어선이며, 거의 빼앗길 염려도 없다. 바로는 "자기의 강들 중에 누워서," 그 강들의 보호를 받아 그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무시하는 "큰 악어라" 고 일컬어지고 있다(겔 29:3). 그러나 이 강물이 "줄어들고 마를 것이다." "자기 발바닥으로 모든 하수를 밟아 말리운" 산헤립(37:25)이나, 구스강을 여러 갈래로 만듦으로써 바벨론을 빼앗은 고레스 같은 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때때로 "샘으로 마른 땅이 되게" 하는 하나님의 섭리(시 107:33)에 의해 그렇게 될 것이다.2. 물고기의 죽음을 가져온다. 물고기는 애굽인들의 음식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그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해댄 천박한 불평에서 알아 볼 수 있다(민 11:5).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을 먹은 것이 생각나도다." 강물이 마르면 "물고기는 죽을" 것이다(시 105:29). 그렇게 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자들을 망하게 할 것이다.
(1) 낚시나 그물로 물고기를 잡는 일을 업으로 삼는 자들(8절). 그들은 "슬퍼하며 피곤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업이 끝장났기 때문이다. 이 세상 자손들이 그들이 돈을 버는 수단을 상실하게 된 일보다 더욱 진심으로 슬퍼하는 일은 없다. Ploratur lachnymis amissa pecunia veris - 돈을 잃고서 흘리는 눈물은 진심의 눈물이다.
(2) 사람들이 생선을 구할 때 내어 주기 위해 생선을 간수해 두는 것을 업으로 삼는 자들. "애굽의 기둥이며 품군" 들 이었던 자들이 있었으나(10절), "그들은 부숴지고 다 마음에 근심하리라" 고 했다. 그들의 생업은 그 연못을 채울 물이 없거나 그 물을 채울 고기가 없어서 망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 나라의 주요 상품까지도 빼앗으실 방법을 알고 계신다. 애굽 사람들은 "이전에 값없이 생선을 먹은" 것을 기억해도 좋으나, 이제는 돈으로도 그것을 얻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나일강이 주던 그 모든 혜택을 잃어버린 사실을 더욱 괴롭게 하는 것은 바로 애굽인들 자신의 소행 때문이라는 점이다(6절). "그들이 그 강을 없어지게 하리라" (한글 개역과는 다소 다름 - 역주). 즉 그들의 왕과 요인들이 자기네들의 공상을 만족시키기 위해 공중 유익보다는 그들의 사적 편익을 우선으로 하여 강에서 물을 그들의 집과 땅에까지 멀리 끌어 갈 것이다. 따라서 점차로 그 강물의 힘이 약해질 것이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생각하던 것보다 더 많은 해를 결국 스스로에게 끼치고 마는데, 다음 사람들이 바로 그런 자들이다.
[1] 자기들이 자연보다 더 지혜롭다고 생각하며, 자연이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일을 할 수 있는 척하는 자들이다.
[2] 공동 유익보다는 자기의 개인적 이득을 더욱 도모하는 자들이다. 이러한 자들은 자기 자신을 만족시키려 하나 결코 만족을 얻을 수 없다. 이들은 민중의 재앙을 획책하는 데에 관여했기 때문에, 결국은 그 재앙을 함께 당할 수밖에 없다. 헤로도투스는 말하기를, 바로느고(그는 이후 오래지 않아 즉위했다)는 나일강에서 홍해까지의 자유로운 수고를 계획하고, 막대한 인원을 동원하여 도랑이나 해협을 만들었고, 나일강을 결단내면서 그 공사로 자기 백성 12만 명을 잃었으나, 그 일은 완성되지 않았다 한다.
Ⅶ. 애굽은 세마포 제조로 유명했다. 그러나 그 상업이 망할 것이라 했다. 솔로몬의 상인들은 애굽과 세마포를 거래했다(왕상 10:28). 그 나라는 가장 좋은 세마포를 생산해 냈고 그 일을 하기에 가장 좋은 일군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세마포를 만드는 자들이," 세마포가 없어서 또는, 일하는 데 필요한 것이나 수출할 기회가 없어서 "쉬를 당할 것이라" 고 했다(9절). 무역의 쇠퇴는 한 나라를 쇠약하게 하고, 점차로 나라를 멸하게 한다. 애굽의 무역은 반드시 침몰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15절), "애굽에는 아무 할 일이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할 일이 없는 곳에서는 얻을 것도 없다. 전반적인 휴업이 일어날 것이다. "머리나 꼬리나 종려나무 가지나 갈대도 아무 할 일이 없으리라," 즉 높은 자나 낮은 자 연약한 자나 강한 자가 할 일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삯을 받지 못할 것이다" (슥 8:10).
나라의 번영은 그 백성의 산업에 크게 좌우된다는 것을 잊지 말자. 모든 일손들이 고용될 때, 즉 머리와 종려나무 가지가 노동을 멸시하지 않고 꼬리와 갈대의 노동이 멸시 받지 않을 때, "그때" 일들은 잘 되어갈 것이다. 그러나 전문직이 활용되지 않고, 주요 상품의 원료가 없으며 수공업자가 할 일이 없을 때, "궁핍이 강도같이 또 군사같이 이르리라" (잠 6:11).
Ⅷ. 애굽 사람들은 누구나 간담이 서늘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떨며 두려워할 것이다" 라고 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그들의 전반적인 타락을 증명해 주는 것이요, 또한 완전 멸망의 방법과 전조가 될 것이다. 그들을 그러한 경악으로 몰아넣을 것은 다음 두 가지의 일이다.
1. 그들이 "유다의 땅" 에서 듣는 소식이다. 그것이 "애굽의 두려움이 되리라" (17절). 그들이 산헤립의 군대에 의해 유다가 황폐해진 소식을 들을 때, 그들은 자기들과 유다가 가까운 이웃이었고 또 굳게 동맹하고 있다는 것을 고려하고는, 그 승리를 거둔 군대의 다음 희생물은 틀림없이 자기들이라고 단정지을 것이다. 이웃 집이 불타고 있을 때는, 자기들의 집도 위험하다는 것을 알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애굽에 관해 언급하는 애굽 사람들마다 그 쓴 잔이 곧 자기들의 손에 놓여지리라는 것을 예상하고는, 자연히 두려워할 것이다.2. 그들이 자기들의 땅에서 보는 것 때문이다. 그들은 "만군의 여호와의 흔드시는 손" (16절)과 "만군의 여호와의 모략을 인하여(17절) 두려워할" 것이다. 그의 흔드시는 손으로부터 그들은 "그가" 유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애굽에 대해서도 (파멸을) "정하셨다" 는 결론을 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심판이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된다면 그것은 어디에서 끝날 것인가? "푸른 나무도 이러하거든, 하물며 마른 나무야 어떠하랴?"
여기에서 다음을 알아보자.
(1) 그들 자신을 안전하게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을 준 것들까지도 하나님은 얼마나 쉽사리 그들에게 두려움으로 만드실 수 있는가! 단지 하나님이 그들에게 손을 흔드시거나 그들의 어떤 이웃에게 손을 놓으시기만 하면, 아무리 대담한 사람들이라도 즉시 떨게 된다.
(2) 하나님께서 우리 위에 그의 손을 흔드시기만 할 때에도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게 된다. 또한 그의 권능의 손이 우리를 위협하기만 할 때에도, 특히 우리를 치기로 정하신 그의 뜻을 보았을 때에는, 우리는 그의 전능한 손 아래 우리 자신을 겸손히 굴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누가 그의 뜻을 바꿀 수 있으리오?
애굽에 대한 약속 (이사야 19:18-25)
앞에 나온 예언의 짙고 위협적인 구름 속에서, 안위의 태양이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의의 태양이다. 아직도 하나님은 애굽을 위해 긍휼을 준비해 두고 계신다. 그리고 그는 그들의 무역을 회복시키고, 그들의 강을 다시 채워 주심으로써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참된 신앙을 넣어 주시고 그들은 오직 하나이시고 살아계시며 참되신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불러들이고 용납하심으로써, 그 자비를 보여주실 것이다. 그리고 이 은혜의 축복들은 애굽을 부요케 했던 자연의 모든 축복들 보다 훨씬 더 귀중하다.
우리는 이 예언이 완전히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는 사건을 알고 있다. 즉 애굽인들이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회심하게 된 사실이다. (아마) 그것은 복음 서기자 마가의 전도에 의한 것이다. 또한 애굽에 많은 기독교 교회가 설립되어 있으며 수 세기 동안 줄곧 발전해 오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많은 예언들이 메시야의 시대를 가리키고 있다. 그렇다면 이 예언도 그렇게 볼 수 있지 않겠는가? 구약 성서의 제도를 나타내는 용어로 복음 은혜와 규례를 말하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 예언 속에 나오는 "그날에" 라는 말은, 아마도 예언을 하는 그 직전의 때를 항상 말한 것은 아니고, 오히려 그처럼 오랫동안 확정되어 왔던 그 날, 즉 높은 곳으로부터 이 어두운 세상에 찾아올 그 여명의 때를 가리키는 독특한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종종 그러한 날에 대한 이야기가 있어 왔다.
그러나(혹자의 추측처럼) 산헤립이 유다를 침입하자 자기 나라를 떠나 애굽에 피신했던 유다인들이 신앙을 가지고 그곳에 들어가서, 그들이 처해있는 그 환란을 통해 큰 자각을 하고 그곳에서 공개적으로 그리고 열심히 그 신앙을 고백했으며, 많은 애굽 사람들에게 그 신앙을 받아들이게 하는 도구 역할을 하게 되었을 때 이 예언이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있을 법한 일이다. 그런데 그러한 일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됨으로써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이 더 풍성한 결실을 맺으리라는 것을 보여 주는 하나의 전조였다. 조세푸스(Josephus)는 실지로 우리에게 말하기를 대제사장 오니아스의 아들 아니아스 2세는 버외방치자(法外放置者)로 살았는데, 그 당시의 왕이었던 톨레미 필로메터(Ptolemy Philometer)와 그 왕비 클레오파트라(Cleopatra)의 허락을 얻어, 애굽의 부바스티스에다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위해 예루살렘 성전같은 성전을 짓고서, "애굽 땅에 여호와를 위한 제단" 이 있으리라는 이사야의 예언이 있으므로, 그 일은 정당한 일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리고 로마 사람들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한 직 후, 파울리누스(Paulinus)에 의해 그 성전이 폐쇄되었을 때까지 약 333년 동안 하나님 예배가 애굽에 계속되었다고 조세푸스는 증언하고 있다(Joseph·Antiq l.13 c.6 de Bell. Judaic l.7 c.30 참조). 그러나 경건한 유대인들은 그 성전을 율법을 위반한 것이요,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모독이라고 줄곧 간주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예언이 그 사건으로 이루어졌다고는 볼 수 없다. 애굽의 개종이 여기에 어떻게 묘사되어 있는가를 보자.
Ⅰ. 그들은 "가나안 방언을 말할" 것이다. 그 거룩한 언어, 성경의 언어를 말할 것이다. 그들은 그 말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사용할 것이다(18절). 그들은 그 말을 들여올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들과 자유롭게 대화할 것이고, 이전처럼 "통변자를 세워서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창 42:23). 마음을 변화시킴으로써 사람을 개심시키는 은혜는 언어를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 애굽 땅의 다섯 성읍이" 이 언어를 말하게 될 것이다. 매우 많은 유다인들이 애굽에 거주하여, 거기에서 번성할 것이기 때문에, 곧 다섯 성읍을 채우게 될 것이다. 그 성읍 중 하나는 헤레스(Heres) 도성, 곧 태양의 도성을 뜻하는 헬리오폴리스(Heliopolis)이다. 그곳은 태양을 숭배했다. 즉 애굽의 모든 성읍들 중 우상 숭배가 가장 악명 높은 곳이었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놀라운 개혁이 이루어져 가나안 언어를 말할 것이다. 또는 그것은 우리의 해석처럼 이렇게 간주될 수 있다. 즉 신앙을 받아들이게 될 다섯 성읍마다 그 신앙을 거절하는 하나(애굽 성읍의 육분의 일)가 있을 것이며(한글개역 - 1/5로 해석), 그 도성은 구원의 방편을 거절했기 때문에 "장망성" (파멸의 도성)이 될 것이다라고.
Ⅱ. 그들은 만군의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할 것이다. 제 민족이 자기들이 섬기던 신들에게 하듯, 그들이 하나님께 호소하는 영예를 드릴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엄숙한 맹세와 서약으로써 하나님의 영예에 기여할 것이며,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일에 힘쓰게 될 것이다. 그들은 마음의 결의로써 그에게 집착하기로 하되, 이따금씩이 아니라 끊임없이 그를 섬기기로 맹세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왕이신 그분, 곧 그리스도에게 충성을 서약할 것이다. 모든 심판은 그리스도에게 위임되어 있다.
Ⅲ. 그들은 자기들의 땅에서 하나님께 대한 공중 예배를 시작할 것이다(19절). "애굽땅 중앙에는 여호와를 위한 제단이 있겠고," 그 제단에 그들은 제물과 예물을 드릴 것이다(21절). 그러므로 이것은 영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즉 모든 예물을 성별케 하는, 저 위대한 제단 그리스도가 거기에서 인정을 받을 것이며, 기도와 찬미라는 복음적인 제물이 거기에서 바쳐질 것이다. 왜냐하면 모세의 율법에는 예루살렘 이외에는 제물을 드릴 제단을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나라간의 모든 구별이 없으며, 애굽 땅 중앙에 있는 영적 제단, 곧 복음의 교회는 이스라엘 땅 중앙에 있는 교회와 마찬가지로 용납될 것이다. 그리고 믿음과 사랑이라는 영적 제물과 죄를 깊이 뉘우치는 마음은 "소와 수양보다도 더욱 주님을 기쁘게" 할 것이다.
Ⅳ. 그 민족에게 신앙적인 측면이 있게 될 것이요, 가운데 온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는 공공연한 신앙 고백이 있을 것이다. 그 나라 중심에만이 아니라 그 "변경" 에도, 이전에 거짓된 신들을 위해 기둥을 세워 두었었던 것과 같이 이제는 "여호와를 위하여" 라고 새겨진 "기둥" 또는 기둥들이 "있을 것이며," 그것이 여호와를 영예롭게 할 것이다. 나그네는 애굽 변경에 들어서는 즉시, 그들이 어떤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가를 식별할 수 있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그를 시인하기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만군의 여호와를 위하여 표적과 증거가 될 수 있는 어떤 일이든 적극적으로 행해야 한다. 애굽 땅에도 그 하나님께 충성스러운 경배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자랑했고, 그의 이름을 그들의 변경에 있는 강한 망대나 보루로 삼았으며, 그 이름으로 그들의 해안은 모든 침략자들을 막았다.
Ⅴ. 환란 가운데 있을 때에, 그들이 하나님께 구할 것이며 그는 그들에게서 발견되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만군의 여호와를 위하여 표적과 증거가 될 것이다." (20절). 즉 "주께 나아오는 모든 육체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이시라는 사실에 대한 표적과 증거가 될 것이다(시 65:2 참조). 그들이 압제자들, 곧 "그들을 치리하게 될" 그 잔인한 군주들(4절)로 인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은 "그 간구함을 들으실 것이다" (22절). 반면에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그들 자신이 왕을 택하고 나서 그들이 "그 왕을 인하여 부르짖되," "그들에게 응답지 아니하시리라" 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삼상 8:18).
Ⅵ. 그들은 위대하신 구속주의 은덕을 입을 것이다. 그들이 잔인한 군주의 압제 하에 있을 때, 아마도 하나님은 사사들 시대에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셨던 것과 같이 때로 그들 중에 강력한 구조자를 일으켜 세우셨을 것이다. 그리고 비록 그는 그 땅을 치셨을지라도, 다시 고쳐 주셨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의무의 길로 돌아오자마자,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셨고, 그들의 불안정한 상태를 고쳐 주셨다. 왜냐하면 회개하는 애굽 사람들은 회개하는 니느웨 사람들처럼 역시 하나님의 은총을 입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위해 일어났던 모든 구원 사건들처럼, 그들을 위해 일어난 모든 구원사건들은 복음의 구원에 대한 상징에 불과했다.
의심할 것도 없이, 그리스도는 여기에서 말한 "구원자, 보호자" 바로 그분이시다. 하나님은 애굽 사람들에게도 그리스도에 대한 기쁜 소식을 보내실 것이며, 그를 통해서 하나님은 "그들을 원수의 손에서 건지시어", 그들이 "주를 두려움 없이 섬길" 수 있게 하실 것이다(눅 1:74, 75). 예수 그리스도는 이방 민족을 그 벙어리 우상들의 숭배에서 건지셨고, 친히 사로잡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셨다.
Ⅶ. 하나님의 지식이 그들 중에 보급될 것이다(21절).
1. 그들은 지식의 방편을 얻게 될 것이다. 여러 세대 동안 "유다에만 하나님께서 알려지신 바 되었다." 왜냐하면 유다에만 살아 있는 신탁(예언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과 뜻을 "애굽에 알게 하실 것이다" . 아마도 이것은 히브리어 구약 성서를 헬라어로 번역한 칠십인 역을 가리키는 뜻도 포함하는 것 같다. 70인 역은 애굽 왕 톨레미(Ptolemy)의 명령에 따라 애굽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번역된 성서이다. 그리고 그것은 성경이 다른 나라 언어로 번역된 첫 책이다. 이러한 도움(그리스는 자기들의 말을 애굽에 소개했다)으로 "여호와께서 애굽에 알려지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앞으로 더 멀리 알려지시리라는 것을 뜻하는 행복한 전조이며 또한 방편이었다.2. 그들은 그 방법들을 활용할 은혜를 얻게 될 것이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애굽에 알게 하시리라는 것뿐만 아니라 "애굽인이 여호와를 알리라" 는 것이 약속되어 있다. 그들은 그들에게 허락된 빛을 받아들이고 즐길 것이며, 그들 자신을 그 능력에 복종시킬 것이다. 여호와는 우리 민족에게도 알려지신 바 되었다. 그러나 나는 우리 민족 중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을까 두렵다. 그러나 새 언약의 약속은 "가장 작은 자에게 가장 큰 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여호와를 알리라" 는 것인데, 이 약속은 모든 후손에게 확실하다.
하나님의 이 지식의 결과는 "그들이 여호와께 서원하고 그대로 행하리라" 는 것이다. 기꺼이 여호와께 와서, 그에 대한 의무를 스스로 지려하지 않거나 그 의무를 이행하려 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을 올바로 알지 못한 것이다.
Ⅷ. 그들은 성도들과의 교제에 들어올 것이다. 그들이 여호와께로 연합되었기 때문에, 교회에 속하게 될 것이며, 모든 성도들과 결합할 것이다.
1. 모든 적개심이 죽임을 당할 것이다. 애굽과 앗수르 사이에는 불구대천의 반목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자주 싸웠다. 그러나 이제는 애굽과 앗수르 사이에 대로(大路)가 있을 것이다(23절). 두 나라 간에 행복한 교통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 통상할 것이며, 그들 사이의 모든 일들이 순조로울 것이다.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참되신 하나님을 경배할 것이다). 그러므로 앗수르 사람들은 애굽으로 애굽 사람들은 앗수르로 갈 것이다. 같은 중보자를 통해서 같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들은 서로 간에도 우호적 교통을 맺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우리가 같은 은혜의 보좌에서 만나고, 서로 같은 신앙의 일에 봉사한다는 것을 깊이 생각한다면, 분노와 증오를 버리고 거룩한 사랑으로 서로 마음을 묶어야 한다.2. 이방 민족들은 그 크신 목자 그리스도 아래 있는 복음의 우리 안에서 서로를 연합시키게 될 뿐 아니라, 모두 유대인과 연합될 것이다.
애굽과 앗수르가 하나님을 섬기는 협력자가 되어 이스라엘이 그들로 "더불어 셋이 될" 것이다(24절). 그들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는 세겹 줄이" 될 것이다(전 4:12). 오랫동안 유대인과 이방인 간의 간막이 벽이 되어왔던 의식적(儀式的)인 율법이 제거될 것이며, 그 때에 그들은 "한 목자 밑에 있는 같은 양떼가" 될 것이다. 이처럼 연합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을 주실 세계 중에 복" 이 될 것이다(24, 25절).
(1) 이스라엘은 그들 모두에게 복이 될 것이다. "육신으로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오셨기" (롬 9:5)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좋은 감람나무의 본 가지요, "그 뿌리의 진액" 이 원래 그들에게 속해 있었고, 이방인들은 "그들 중에 접붙임" 이 되었을 뿐이기 때문이다(롬 11:17). 이스라엘은 애굽과 앗수르 사이에 놓여 있었고, 예루살렘에서 나온 여호와의 말씀과 이스라엘 땅에 제일 먼저 세워진 그 교회를 그들이 만나도록 해줌으로써 그들에게 복이 되었다. Quico nveniunt in aliquo tertio inter se conveniunt - 제 삼자 안에서 만나는 자들은 서로 만난다. 이스라엘은 애굽과 앗수르가 그 안에서 화합하게 되는 게 삼국이므로 복된 존재이다. 사이가 나쁜 자들은 단결시키는 도구가 되는 자들은 그 세대의 참되고 큰 충복이다.
(2) 그들은 모두 여호와께 복받을 것이다.
[1] 그들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자기의 것으로 인정받을 것이다. 비록 애굽이 이전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속박의 집이었고, 앗수르는 불의한 침입자였지만, 그들은 이스라엘처럼 하나님께 환영받을 것이다. 그들도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같은 백성이다.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 형성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의 손으로 지으신 것" 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하나의" 백성으로서 뿐만 아니라 "그의" 백성으로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들은 그를 위해 형성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의 산업으로서 그가 보시기에 보배로우며 그에게 귀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이 낮은 세상에서 그들로부터 그의 명예의 세금을 받으시기 때문이다.
[2] 그들은 역시 공동으로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께 인정될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하나이며, 똑같은 축복을 나눌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으로 결합된 자들은 또한 사랑의 마음으로서도 결합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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