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이사야 10장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10:1

압제자에게 내려진 선고 (이사야 10:1-4)

그 예언자로부터 이러한 재앙을 통고 받고 있는 자들이 이스라엘의 방백과 재판장들인지 또는 유다에 속한 자들인지, 아니면 그 양국의 사람들 모두인지 분명치가 않다. 그들이 이스라엘에 속한 자들이라면, 이 구절들은 전 장(前章)의 끝부분과 연결되어야 한다. 그럴 가능성이 충분하다. 왜냐하면 그 예언의 후렴("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하리라") 이 여기에도 반복되어 있기(4절)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유다 사람들이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앗수르 군대를 통하여 유다에게 행할 특별한 의도, 곧 악정을 하는 치리자들을 벌주려 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법적으로 그들을 심판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위로의 말을 들려주기 전에, 먼저 재앙을 말해 주고 있다.

Ⅰ. 이 압제자들에 관한 고발(1, 2절)을 보자. 그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 고발당하고 있다.

1. 악한 법과 칙령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연적 공정성과 하나님의 율법을 거역하며 "불의한 법령을 발포한다." 그리고 그러한 법령들이 "발포한" 해악을 "기록하여" 정규적 법 조문에 기입한다. "이러한 법령을 고안해 내고 발포한 상급 관리들에게 화있을 진저! 그들이 하나님의 저지를 못받을 정도로 높지는 않다. 그리고 그것을 작성하고 기록한 하급 관리들, 곧 불의한 말을 기록한 자들에게 화있을진저! 그들은 하나님의 감찰에서 벗어날 정도로 비천하지 않다. 주동자와 방조자들이 똑같이 화를 당할 것이다." 남을 해하는 것은 나쁘다. 그러나 심사숙고하고 계획하여 악을 행하고,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주며, 많은 사람들을 악행의 범죄로 끌어들이는 일은 더욱 나쁜 일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2. 만들어진 법을 집행함에 있어서는 정의를 왜곡시켰다. 이스라엘처럼 의로운 율례와 규례를 가지고 있는 백성은 없었으나, 타락한 재판장들은 "빈핍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고," 그들이 자기들의 권리를 주장하거나 되찾는 것을 방해할 길을 찾았다. 그들은 빈핍하고 가난했으므로, 그들에게는 뇌물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3. 그들의 수하에 있으므로 보호해 주어야 할 자들을 오히려 압제함으로써 자기 자신들을 부유케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과부의 집과 재산을 토색했고, 물려받은 재산을 조금 가지고 있는 "고아의 것을 약탈한다." 왜냐하면 고아들에게는 그들을 위해 대변해 줄 친구가 없기 때문이었다. 고아들이 빈핍할 때 위로해 주지 않는 것, 그들이 해를 당할 때 그들의 권리를 회복시켜 주지 않는 것은, 재물과 권세를 지닌 자에게는 충분한 죄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학대하는 자에게 줄 권세가 있고 학대받는 자에게 위로자가 없기 때문에(전 4:1), 그들을 약탈하는 것은 인간성이나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는 자들이 범할 수 있었으리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하려 하지 않을 정도로 야비한 일이다.

Ⅱ.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하는 그들의 교만과 권세에 대한 도전을 보자(3절).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 누구에게로 도망하려느냐? 너희는 과부와 고아를 짓밟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일어나실 때에는 너희가 어떻게 하겠느냐?" (욥 31:14) 가난한 자를 압제하는 큰 자들은 그들이 그들의 학정에 대해 결코 문책당하지 않을 것이며, 결코 그것에 대해 다시 듣게 되거나 그것으로 인해 더 나쁘게 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일들을 인하여 벌하지 아니하겠는갸?(렘 5:29) 남들을 황폐케 하는 자들에게 황폐함이 임하지 않겠는가? 아마 그 황폐는 "멀리서 올" 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것은 더디 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침내 올 것이며(집행 유예는 사면이 아니라), 멀리서 거의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에서 오기 때문에, 더 놀랍고 더 무서운 것이 될 것이다. 그 때에 이 불의한 재판장은 어떻게 되겠는가? 지금 그들은 "도와 주는 자가 성문에 있음을 본다" (욥 31:21). 그러나 그 때에 그들은 누구에게로 도망하여 도움을 구하겠는가?

다음 사실들을 기억해 두자.

1. 징벌의 날, 심문하고 밝혀내는 날, 조사하는 날이 오고 있다. 그 날은 각 사람과 각 사람의 일을 밝히, 참으로 밝히 드러낼 것이다.

2. 그 징벌의 날은 모든 악한 사람들에게는 환란의 때가 될 것이다. 그 때에 그들의 모든 위조와 희망은 사라져 멸망 속에 묻힐 것이며, 그들은 비극에 빠질 것이다.

3. 회개하지 않던 죄인들은 완전히 당황하게 될 것이며, 그 징벌의 날과 환란의 날에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몰라 쩔쩔 맬 것이다. 그들은 도망하여 숨을 수 없으며, 끝까지 싸워 그들 자신을 방어할 수도 없다. 그들에게는 현재의 재앙에서 그들 자신을 보호하거나(" 누구에게로 도망하여 도움을 구하겠느냐?"), 이 후에 보다 나은 때를 그들에게 보장해 줄 만한 피난처가 없다. "너희 영화를, 폭풍이 그쳤을 때 다시 찾기 위해, 어느 곳에 두려느냐?" 그들이 얻은 재물이 곧 그들의 영화였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그것을 맡겨두기에 안전한 장소가 없다. 그들은 반드시 그것이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의 영혼이 우리의 영화이고(마땅히 그래야 한다), 우리가 그것을 주요 관심사로 삼는다면, 우리는 어디에다 그 영화를 맡겨야 하며, 누구의 손에 의탁해야 하는지를, 곧 신실하신 창조주의 손에 맡겨야 한다는 사실까지도 알고 있다.

4. 그것은 우리 모두가 그 징벌의 날에, 그 환란의 날에, 죽음과 심판의 날에 어떻게 된 것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잘 행동할 수 있도록 해 준다.

Ⅱ. 그들에게 언도된 선고를 보자. 이것은 저들의 운명적 파멸이었다. 어떤 사람은 감금되고 포로가 되며(" 그들은 포로된 자 중에서" 또는 "그들 밑에서 절하게 될 것이다" - 죄 속에서 가장 득의만연했던 자들은 가장 무겁게 짐을 지게 되고, 가장 깊게 고통 속에 갈아 앉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사형을 선고받는다. 그들이 먼저 처음에는 엎드러질 것이고, 죽임을 당한 자들 밑에 엎드러질 것이다. 과부와 고아를 짓밟은 자들이 이제는 밟힘을 당하게 될 것이다(4절).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없으면 - 너희가 나를 버리고 나를 너희에게서 몰아냈으므로 - 너희는 이렇게 될 것이다" 라고 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사는 자들, 즉 하나님을 버렸으므로 스스로 하나님의 보호에서 떠난 자들은 철저한 파멸 이외의 것은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하리라" 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다투신다는 사실뿐 아니라 그들이 계속 그 싸움을 두려워하게 되리라는 것을 시사한다. 그들은 자기들을 치기 위해 계속 퍼져 있는 하나님은 손을 보고 말할 수 없는 고오를 맛보리라. 그들에게는 "무서운 심판" 이외에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다.

 

10:2 없음.

 

10:3 없음.

 

10:4 없음.

 

10:5

앗수르 왕의 교만 (이사야 10:5-19)

앗수르 왕 살말에셀에 의해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하리라는 것은 앞에서 예고되었었다. 그것은 히스기야(유다 왕) 제 6년에 이루어 졌다(왕하 18:10). 그 멸망은 전반적이고 최종적인 것으로서, 머리와 꼬리가 모두 끊어졌다.

본장에서는 앗수르 왕 산헤립에 의한 유다 왕국의 징계가 예고되어 있다. 이 예언은 히스기야 왕 14년에 이루어졌다. 그때 산헤립은 자기의 선왕이 10 지파(이스라엘)를 거쳐 승리한 일에 힘을 얻은 "올라와서 유다 모든 견고한 성들을 취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고 했다(왕하 18:13, 17). 그 결과 히스기야와 그의 나라 유다왕국은 크게 놀랐을 것이 틀림없다. 그들에게는 근래에 선한 개혁사업이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건의 결과는 좋았다. 앗수르 사람은 혼비백산되었고, 히스기야와 그의 백성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큰 용기를 얻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살펴보자.

Ⅰ. 하나님께서 당신의 주권으로써 앗수르 왕을 쳐 종으로 삼고, 그를 당신의 목적을 이루는 단순한 도구로만 사용하셨다는 것을 본다(5절). "앗수르 사람이여! 너희는 나의 진노의 막대기라는 이 사실을 알지어다. 그리고 나는 너희를 보내어, 나의 진노를 받을 백성을 치는 채찍이 되게 하리라."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관찰해 보자.

1. 유대인들은 비록 선하게 보였지만, 실상 그 성품은 얼마나 악했던가. 그들은 "사곡한 민족" 으로서, 신앙을 고백했었고, 특히 이 때에는 개심하겠다고 고백했지만, 진실한 신앙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진실로 개심하지도 않았으며, 히스기야가 선한 개혁을 단행했을 때 보였던 것처럼 그리 선하지도 않았다. 지도자들의 믿음이 깊고, 종교가 또한 존중되는 때에도, 일반 백성들은 위선적일(사곡한) 수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들은 "불경스러운 민족" 이다(혹자는 그렇게 풀이한다). 히스기야는 그들의 우상 숭배를 대단히 많이 바로 잡았다. 그러나 아직도 그들은 불경스러운 면으로 흘렀다. 아니, 위선이란 불경건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호칭되고 그것을 부르나 여전히 죄 속에서 살고 있는 자들처럼 그 이름을 모독하는 자들이란 없다. 그들은 위선되고 불경스런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백성이다. 즉 그들은 그의 진노 아래 있어, 그것에 의해 불살라져야 할 판이었다. 위선된 민족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백성이다. 위장된 신앙보다 하나님을 더 불쾌하게 하는 것은 없다.

죄가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가 보라. 모든 백성 중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거룩하게 된 백성이었던 자들이, 이제 "그의 노한 백성" 이 되었다(암 3:2 참조).

2. 앗수르 사람들이 비록 위대하게 보였지만, 그 성품은 얼마나 천박했는가! 앗수르는 "하나님의 진노의 막대기" 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징계하시기 위해 사용하시려는 도구에 불과하다. 그러나 "여호와의 징계를 받는" 것은 "세상과 더불어 정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세상의 폭군들은 섭리자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하자. 사람들은 하나님의 손이며, 때로는 그의 칼이 되어 죽이며(시 17:13, 14), 어떤 때는 그의 막대기가 되어 징계한다. 하나님의 백성을 치는 "그들(세상 폭군들)의 손에 있는 막대기는 그(하나님)의 분개심이다." 그들의 손에 막대기를 주며, 자기들이 그들에게 적수가 된다고 생각하는 그런 자들에게 유쾌하게 강타를 가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진노이다. 때로 하나님은 당신을 전혀 섬기지 않는 우상 숭배의 민족을 들어서 성실과 진실로 당신을 섬기지 않는 위선적 백성들의 채찍이 되게 하신다.

앗수르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사용되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진노의 막대기라" 일컬어지고 있다.



(1) 앗수르 왕의 힘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다. "내가 그를 보내어 치게 하리라." 악인에게 있는 모든 능력은, 비록 그들이 흔히는 그것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데 사용할지라도,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임을 잊지 말자. 빌라도는 "위에서 주지" 아니 하였더라면, 그리스도를 해할 권세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요 19:11).

(2) 그 능력은 하나님에 의해서 사용된다. 앗수르 왕은 조금도 피를 흘림이 없이 "탈취하며 노략해야" 했다. 그들이 살해한 사실에 대해서는 읽을 수 없다. 그러나 그가 그 나라를 약탈하고 그 집들을 강탈하고 가축을 끌고 가며 그 백성들의 모든 재물과 장식품을 빼앗고, "가로 상의 진흙같이 짓밟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읽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백성들이 죄의 진흙 속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적들로 하여금 그들을 진흙처럼 짓밟게 내버려두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왜 그 앗수르 사람이 이처럼 그들을 쳐야 했는가? 그것은 그들이 멸망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철저히 개심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Ⅱ. 앗수르 왕이 교만하여, 그 자신을 자기의 주인으로서 착각하고, 절대군주인양 가장하면서, 자기는 순전히 자기 뜻대로 자기 마음대로 척 자기를 과장하는 것을 보라. "하나님은 심판하기 위하여 그를 두셨다." 즉, "전능하신 하나님은 경책하기 위하여 그를 세우셨다." (합 1:12).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을 회개케 하려는 도구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앗수르 왕)의 뜻은 이같지 아니하며 그 마음의 생각도 이같지 아니하다" (7절).

1. 앗수르 왕은 자기가 하나님의 종이라거나 이스라엘의 친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또한 그는 자기가 하나님이 허락하는 것만 "할 수 있다" 거나, 하나님의 백성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만을 "하게끔 되리라" 는 사실은 조금도 모르고 있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위선됨을 징계하시므로써, 그들을 치료하고, 또 그들을 좀더 당신께 가까이 오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계셨다. 그러나 그것이 산헤림의 뜻이었던가? 아니다. 그런 것은 그의 생각에서는 조금도 없었다. "그의 뜻은 이같지 아니하다" 고 했다.

(1)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인간의 악한 감정과 계획까지도 당신의 크고도 거룩한 목적에 이바지하도록 만드신다.

(2)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당신의 일을 행할 도구로 사용하실 때는, 흔히 "그가" 의도하는 일과 "그들이" 의도하는 일은 전혀 다를 수 있다. 아니, 그들은 하나님의 의도와 정반대 되는 뜻을 품는다. 요셉의 형제들이 해할 뜻을 품었을 때도, 하나님은 그것이 복이 되게 하셨다(창 50:20; 마 4:11, 12 참조). 사람과 하나님은 각각 자기 나름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호와의 뜻이 실현되리라" 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교만한 앗수르 왕이 뜻한 바는 무엇이었는가? 왕들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마음 상태를 아셨다.

2. 그는 오직 "허다한 나라를 파괴하며 멸절하고," 그 자신을 그들의 주인으로 만들려는 뜻만을 품었다.

[1] 그는 자기의 잔인성을 충족시킬 뜻을 품었다. 파괴하며 멸절하는 것 이외에는 그 어느 것도 그것을 충족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는 피와 살륙으로 그 자신을 즐겁게하기를 원했다. 어떤 개인의 멸망이 그를 만족시키지 못하므로, 그는 나라들을 멸절해야 한다. 소매로 거래하는 것은 그를 격하시키는 일이었다. 따라서 그는 도매로 살륙을 거래했다.

[2] 그는 그의 탐심과 야망을 충족시킬, 세계적인 왕국을 세우고 "자기에게로 만국을 모을" (합 2:5) 뜻을 품었다. 재물과 권력에 대한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이 그로 하여금 이러한 사업을 수행하게 한다.

3. 그 예언자는 여기에서, 호언장담하고 허세를 부리는 그를 소개하고 있다. 앗수르 왕의 이름으로 그의 부하 장군이 히스기야에게 가져간 편지를 보면, 그의 허영과 오만이 그 마음과 정신에 매우 깊이 박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거만과 무례함이 여기에서 매우 상세히 묘사되어 있으며, 그의 말투가 그대로 베껴져 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그를 우스꽝스럽게 묘사해 주고, 또 부분적으로는 그가 멸망되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확신시켜 주고 있다. 왜냐하면,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는 격언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사람들이 하늘과 땅을 무시하고 함부로 내뱉는 모든 교만과 오만한 말들을 하나님은 주목하시고 기억해 두신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 입으로 자랑하는 헛된 말을 내는" 자들은 그런 말을 다시 듣게 될 것이다.

(1) 앗수르 왕은 그가 다른 민족들에게 행한 큰 일을 자랑했다.

[1] 그는 왕들을 신하로 만들었다(8절). "나의 방백들은 다 왕이다. 즉 지금의 나의 방백들은 왕이었던 자들이다." 또는, 그는 그의 종들과 그 아래서 명을 받는 자들이 다른 나라의 왕들과 같이 매우 위대하고 매우 호화롭게 살 정도로 그의 보좌가 높아졌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다. 또는 자기의 영토 내에서는 절대적인 왕인 자들이 앗수르 왕 아래서는 왕관을 벗어 놓고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이것은 허영된 자랑이다. 그러나 우리가 섬기는, 사실상 왕들의 왕이신 그리고 그 신하를 왕으로 삼으시는(계 1:6) 우리 하나님은 얼마나 위대하신가!

[2] 그는 그 자신을 그들 성읍의 주인으로 만들었다. 그는 한결같이 자기가 정복한 여러 이름을 들고 있다(9절). "갈로" 는 "갈그미스" 처럼 곧 항복했고, "하맛" 은 "야르밧" 이상으로 견뎌낼 수 없었으며, "사마리아" 도 "다메섹" 과 마찬가지로 그의 것이 되었다고 했다. 자기 자랑을 저지하는 척하기 위해 그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선왕의 승리를 언급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를 정복한 것은 산헤립 자신이 아니라 그의 선왕 살만에셀이었기 때문이다.

[3] 그는 그들의 우상, 그들의 수호신에게도 막강했다. 그는 "이미 신상을 섬기는 나라에 미쳤고," 그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 방법을 발견했다(10절). 그들의 나라는 그들이 숭배한 우상들의 이름으로 명명되었다. 따라서 모압 사람들은 자기들의 신이 자기들의 후원자이며 보호자인 것으로 상상했으므로, "그모스 백성" 이라 불리우고 있다(렘 48:46). 그러므로 산헤립은 각 나라의 정복을 그들의 신에 대한 정복으로 헛되이 상상했던 것이다.

[4] 앗수르 왕은 그의 나라의 경계 안에 있는 큰 영토를 에워싸고, 그의 조상들이 세워 놓은 옛날 경제표를 훨씬 멀리 이동시켜 놓음으로써, 그의 영역을 확장했고, "열국의 경계를 옮겼다" (13절). 그는 그처럼 좁은 울타리 속에서는 참을 수 없었다. 더 번영할 여백이 있어야 했다. 그가 "열국의 경계를 옮겼다" 는 것은 화이트(white) 씨에 의하면, 그가 마음대로 이곳 저곳으로 거류민을 이주시킨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앗수르 사람들은 자기들이 점령한 땅에는 언제나 그런 일을 행해 왔기 때문이다.

[5] 그는 피정복자들의 재물로 자신을 부유케 했고, 그것을 국고로 가져갔다. "나는 그 재물을 약탈하였다" 고 했다. 여기에서 그는 정확하게 말했다. 큰 정복자는 흔히 큰 도적에 불과하다.

[6] 그는 모든 장애를 극복했다. "나는 용감한 자 같이 위에 거한 자를 낮추었다. 높이 앉아 있고, 자기가 견고히 앉아 있다고 생각한 자들을 내가 낮추고 떨어지게 했다."

(2) 그는 자기가 그들에게 행한 그 수법을 자랑한다.

[1] 그는 자기의 수완과 능력으로 이 모든 것을 행했다(13절). "나는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이 일을 행하였나니 나는 용감하다. 그리고 나는 총명한 자라" 고 했다. 그는 하나님의 축복과 섭리의 허락으로 그런 일을 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는 그를 현재의 그로 만든, 그리고 그 손에 막대기를 쥐어 준 자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모르고, "자기 자신의 그물에다 제사한다" (합 1:16).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는 것이다(신 8:17). 교만과 허영처럼, 철저한 무신론주의와 불신앙의 ?바닥에도 자기가 번영하고 성공한 것은 자기 자신의 행동의 덕택으로 보며 자기의 성실을 자랑하려는 인간의 습성이 깔려 있다.

[2] 그는 마치 이제껏 새의 보금자리를 찾고 있던 자처럼, 매우 편하게 이 모든 일을 행했고, 그것을 단지 기분 전환이나 오락으로 삼았다(14절). "내가 손으로 열국의 재물을 얻은 것은 새의 보금자리를 얻음 같다." 그리고 실제로 그가 열국에 도달했을 때는, 새의 보금자리를 덮치는 것처럼 아무런 어려움 없이 그들을 차지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까마귀 둥지를 파괴할 때처럼, 그 마음에 별로 언짢아하거나 후회함이 없이 그 성읍의 거민들과 성읍을 멸했던 것이다. "내가 온 세계를 얻은 것은 어미가 둥우리에 남겨둔, 내어버린 알을 주움같이 매우 쉬웠다" 고 한 것이다. 알렉산더처럼 그는 세계를 정복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어떤 약탈물을 잡든지 간에, 새가 그 보금자리를 약탈당할 때 그러한 것처럼, "날개를 치거나 입을 벌리거나 지저귀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감히 대항하거나 불평하려 하지 않았다. 이러한 두려움을 그들은 이 강대한 정복자에 대해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매우 연약했으므로 항거하는 것이 소용없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매우 독단적이었으므로 그들은 불평하는 것이 소용없음을 알았다. 선을 행하도록 만들어진 사람이 악을 행하며, 그 주위에 있는 자들을 모두 멋대로 해하는 데 긍지와 즐거움을 느끼고 수치스러운 일을 영광스러운 것으로 여긴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연약한 자녀들에게는 더욱 그렇지만 "산 자들의 땅에 있는 용사들에게도 공포의 대상" 이 되었던 "그들이" 멸망할 날이 반드시 다가온다.

(3) 앗수르 왕은 자기가 지금 예루살렘에게 행하고자 하는 일, 즉 그 성을 지금 포위하겠다고 경고한다(10, 11절). 그는 다른 지역들과 그곳의 우상들을 쳐부수었듯이, 특히 사마리아처럼 예루살렘과 그 우상까지도 지배하고자 했다.

[1] 그는 마치 자기가 숭배하는 미드라스, 즉 태양 신 이외에는 참 하나님이 없다는 듯이, 불경스럽게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신상" (idols)이라 칭하고 있으며, 그 하나님을 열방의 거짓 신들과 같은 수준에 두고 있다. 그가 얼마나 무지했는가를 보라. 그러면 우리는 그가 그처럼 교만한 것에 대해 보다 덜 놀랄 것이다.

[2] 그들은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의 것보다 다른 나라의 조각한 신상을 더 좋아했다. 그때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예배자들에게는 조각한 신상을 만드는 것이 특별히 금지되었다는 것을 알았을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몰래 행해져야 했다. 그러므로 혹 우상이었더라도 다른 나라의 신상만큼 그렇게 화려하고 장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만일 그가 의미하는 것이 언약궤와 하나님의 보좌라면, 그는 자기 자신처럼 매우 어리석게, 그리고 육신의 눈으로 판단하므로 영적인 문제에 관해서 쉽게 오해할 수 있었던 자로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외적인 화려함과 장엄함을 참교회의 증거로 보는 자들은 이와 같은 판단을 하는 자이다.

[3] 그는 사마리아를 정복했기 때문에 예루살렘도 물론 함락되리라고 단정했다. "내가 이같이 예루살렘에게 행치 못하겠느냐? 내가 이같이 쉽게 행할 수 없겠으며, 이같이 당연히 행해서는 안 되겠느냐?" 그러나 결과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사마리아는 하나님을 버린 반면,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굳게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Ⅲ. 어떻게 하나님께서 산헤립에게 벌을 내리시어 그의 교만을 꾸짖고 그의 멸망을 알리시는가를 보자. 우리는 그 위대한 왕, 앗수르 왕이 허풍을 쳤다는 사실을 이미 보아 왔다. 그 위대하신 하나님이 그의 종 그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셔야 할 것을 들어보자. 그러면 우리는 비록 왕이 잘난 체했지만 하나님이 그 왕보다 위에 계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1. 그 예언자는 그 왕의 무례와 무엄한 자랑이 헛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15절).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하겠느냐?" 이 교만한 자의 자랑은 이토록 어리석은 것이었다. "내가 이런 티끌을 만들다니!" 하고 우화 속에서 수레바퀴 위에 앉은 파리가 말했다. "내가 나무를 파괴하다니" 하고 도끼는 말한다.

다음 두 가지 면에서 도끼는 "찍는 자에게 거슬러 자신을 자랑한다" 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 저항하고 방해한다는 면에서 산헤립은 하나님을 모독했고 모욕했으며, 그가 열방의 신들을 다룬 것처럼 하나님을 다루겠다고 위협했다. 이제 이것은 마치 도끼가 찍는 자의 얼굴로 날아오는 것과도 같다. 일군과 다투는 연장은 토기장이와 다투는 진흙만큼이나 어리석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기지와 재물과 능력을 가지고 싸우는 것이 합리화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묵인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만일 사람들이 이처럼 교만하고 대담하며, 또 정당하고 신성한 모든 것에 대하여 도전 하려한다면, 그들은 하나님께 그들에게 응보하실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들이 무례하면 할수록, 그들의 멸망은 더욱 쓰라린 것이 될 것이다.

(2) 경쟁하고 겨룬다는 면에서이다. 도끼가 도구 노릇을 하여 이룬 그 일에 대한 칭찬을 스스로 취하겠는가? 산헤립이,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이 일을 행하였다" (13절)고 말한 것은, 매우 지각없고 매우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것은 마치 막대기가, 자기가 휘두르는 손을 자기가 안내한다고 자랑하는 것과도 같다. 그러나 "몽둥이가 들려질 때도, 그것은 여전히 나무가 아닌가?" (마지막 절은 이렇게 해석될 수 있다) 그 막대기가(귀족들이 가지고 다니던 지팡이처럼 민 21:18) 권위의 상징이라 할지라도, 또 그것이 연약한 사람을 부축하고 악한 사람을 징계하기 위한 봉사의 도구라 할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나무이며 그것을 사용하는 자에 의해 지시되는 대로만 행할 수 있다.

시편 기자는 모든 사람들이 각자 자기들은 "단지 인간에 지나지 않음" 을 알게 되기를(시 9:20), 즉 막대기들은 자기들이 단지 나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2. 이사야는 그의 몰락과 파멸을 예고하고 있다.

(1) 하나님은 그 왕을 사용하시어 당신 자신의 일을 수행하시고 난 후, 다시 그에게 역사하실 것이다(12절). 산헤립의 침입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해 - 비록 그 때가 그들에게 암담한 때였을지라도 - 그들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하고 있다.

[1] 하나님은 이 섭리로 인하여 시온과 예루살렘에 선을 행할 뜻을 품으셨다는 것이다. 그들이 당할 일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이루실 사건들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와 백성의 원수들을 풀어놓으시고 잠시 그들이 권세 잡는 것을 묵인해 주실 때, 그것은 교회를 위해 어떤 위대하고 좋은 일을 행하시기 위함임을 기억하자. 그리고 그것이 행해진 그 때, 그 때에서야 비로소 그는 그들을 건지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환란에 처하게 하신다면, 그것은 그들을 연단하기 위한 것이다(단 11:35).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죄를 기억하고, 그것으로 인해 스스로를 낮추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그들의 의무감을 일깨워 주고, 그들에게 기도하고 서로를 사랑하고 돕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 죄를 없이함을 얻을 결과는 이로 인한다" (27:9).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가 그 고통에 의해 어느 정도 이루어졌을 때는, 긍휼을 베푸사 그 고통을 제거할 것이다(레 26:41, 42). 그 뜻이 이뤄지지 않으면 제거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단어 그대로, 그 막대기는 "하나님께서 위하여 보내신 그 일을 완수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2]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위해 이 은혜를 역사하셨을 때, 그들의 침입자들에게 진노와 복수를 내리시고자 했다. "내가 앗수르 왕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를 발하리라." 그의 허풍은 그 완약한 마음에서 나왔고, 그것은 그 열매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 그의 높은 눈의 자랑" 이 주목되고 있다. 왜냐하면 교만한 눈은 교만한 마음의 표시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원수들은 대게 매우 교만하고 오만하다. 그러나 조만간에, 하나님은 그들의 거만을 보응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능력과 주권에 대한 명백한 증거로서,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낱낱이 낮추는" 것(욥 40:11 이하)을 자랑스럽게 여기신다.



(2) 시몬과 예루살렘에 대한 이 시도는, 아무리 위협적일지라도, 분명 좌절되어 꺾이고 허사로 돌아갈 것이며, 산헤립은 그의 기획을 달성하지 못할 것이다(16, 19절). 다음을 살펴보자.

[1] 산헤립을 멸망시킬 장본인은 누구인가? 그는 히스기야나 그의 방백 또는 유다와 예루살렘의 군인이 아니라(어떻게 그들이 이처럼 힘센 세력에 대항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친히 "만군의 여호와" 로서 그리고 "이스라엘의 빛" 으로서, 그 일을 행하실 것이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이 그것을 행하실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왜냐하면 그는 "만군의," 곧 천지 만군의 "여호와(主)" 이시기 때문이다. 모든 피조물들은 그의 명령을 받는다. 하나님은 그가 원하시는 대로 그들을 사용하시며, 그들을 규제하신다. 그는 유다와 앗수르 군대의 여호와(主)이시며, 그가 원하시는 군대에게 승리를 주실 수 있다. 우리가 우리를 위하시는 만군의 여호와를 모시고 있을진대, 어떤 적의 무리도 두려워하지 말자.

둘째, 우리는 하나님이 그것을 행하시리라는 것을 바랄 만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그는 "이스라엘의 빛이며 그 거룩한 자" 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빛이시다. 그의 안에 완전한 밝음, 결백 그리고 행복이 있다. 그는 빛이시다. 왜냐하면 그는 거룩한 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거룩함이 그들을 위해 개입되고 사용된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곧 성도들의 위안이 된다. 성도들은 그것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매우 기쁘게 그를 "그들의 거룩한 자" 라 부른다(합 1:12).



[2] 그 멸망은 어떻게 무어라고 묘사되어 있는가?

첫째, 병으로 몸이 쇠약해지는 것 같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살찐 자로 파리하게 하실 것이라" 고 했다. 비계로 덮인 살같았던 그의 무수한 군대는 감소되고 쇠약해져, 해골처럼 될 것이다.

둘째, 집이나 나무나 수풀이 불에 타 소멸되는 것 같을 것이다. "그 영화의," 곧 그가 자랑하는 바로 그 "밑에 불이 붙는 것같이 맹렬히 태우실 것이다." 그것은 맹렬한 불이 장엄하던 집들을 재로 만들어 버리는 것처럼, 갑작스럽게 그의 군대를 멸망시킬 것이다.

혹자는 그것을 희생 제물 밑에 불이 타오르는 것을 암시한 것으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교만한 죄인들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희생 제물로 전락되기 때문이다. 다음을 살펴보자.

1. 이 불이 어떻게 붙을 것인가?(17절). 그를 성실하게 섬기는 자들에게 즐거운 빛이 되시는 바로 그 하나님께서 그를 경히 여기거나 그를 반역하는 자들에게 소멸하는 불이 되실 것이다. 바로 그 구름 기둥이 홍해에서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빛이요, 애굽 사람에는 두려움이었던 것과 같이 "이스라엘의 빛은" 앗수르 사람들에게 "불이 될 것이다." 이러한 불을 무엇이 대항할 수 있겠으며 무엇이 끌 수 있겠는가?

2. 그 결과는 얼마나 참담해질 것인가? "그의 가시나무와 찔레나무가 소멸되리라" 고 했다(17절). 즉 별로 값어치도 없으나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괴롭혀 오던 앗수르의 관원들과 군인들이, 결국에는 가시나무와 찔레나무처럼 맹렬히 타는 불에 쉽고 빠르게 소멸되고 말 것이라는 뜻이다. "누가 찔레나무와 가시나무로 하여금 나를 대적하여 싸우게 하겠는가? 그런 것들은 그 불을 끄기는커녕 오히려 부채질해 주는 격이 되리라. 내가 그것을 밟고 모아 불사르리라(27:4). 그것들은 어느 날엔가 소멸될 것이고, 삽시간에 모두 없어질 것이다." 그들이 평화와 안녕뿐만 아니라 승리와 개가를 부르짖을때, 바로 그때에 갑자기 멸망이 왔다. 그 멸망은 놀랍게 왔고 순식간에 완결되었다. "그 삼림의 영광마저도(18절), 그가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며 가장 의지하는 사람들이 자기의 목재용 나무(그들의 삼림의 영광)나 열매나무(그들의 갈멜의 영광)에 대해 그러하듯이, 그가 귀중히 여기는 그의 선택된 부대, 정예 부대, 근위대, 그가 거느리고 있는 가장 용감한 연대마저도 불 앞의 가시나무와 찔레나무처럼 될 것이다. 그들의 영혼과 육신 모두가 완전히 소멸될 것이다. 사지가 살라질 뿐 아니라 생명도 없어질 것이다." 하나님은 영혼과 몸을 모두 멸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만을 죽일 수 있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그 앞에서는 큰 군대도 큰 나무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당신이 원하시면 그것을 쓰러뜨리거나 불사를 수 있다.

[3] 이 큰 살륙 의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 예언자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첫째, 이 일로 인해 그 군대의 수효는 크게 감소될 것이다. "그 삼림에 남은 나무의 수효가 희소하리라" 고 했다. 극소수만이 그 멸하는 사자의 칼을 피하게 될 것이다. 그 수가 매우 희소하므로 그들을 계수할 명장이나 검열관이나 서기관이 필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이" 라도 곧 그 수를 "계산할 수" 있으며, "그들의 이름을 기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남겨진 극소수의 사람들도 완전히 실의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들은 병인이 점점 쇠약하여 감 같을 것이라" 고 했다. 그가 쓰러지거나 도망하여 그의 군기가 적에 의해 빼앗길 때, 이것은 모든 군사의 사기를 꺾고 그들을 모두 당황하게 만든다. 전반적으로 우리는 "이 광대하시고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 앞에 누가 능히 설 수 있으리요" 하고 말해야 한다.

 

10:6 없음.

 

10:7 없음.

 

10:8 없음.

 

10:9 없음.

 

10:10 없음.

 

10:11 없음.

 

10:12 없음.

 

10:13 없음.

 

10:14 없음.

 

10:15 없음.

 

10:16 없음.

 

10:17 없음.

 

10:18 없음.

 

10:19 없음.

 

10:20

이스라엘에 대한 격려(1) (이사야 10:20-23)

그 예언자는 "여호와께서" 산헤립으로 하여금 그 땅을 침입하게 함으로써 "그(하나님)의 모든 일을 시온산과 예루살렘에게 행하리라고 말했다(12절).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이 의도하는 그 2중적인 일이 무엇인가를 읽을 수 있다.

Ⅰ. 일부 사람들의 회심이다. 이 섭리는, 비록 현재는 기쁘지 않고 괴롭지만, 일부 사람들을 성결케 할 것이며, 그들에게 화평한 의의 열매를 줄 것이다. 이들은 남은 자(22절), 곧 "이스라엘의 남은 자" (20절)요, "야곱의 남은 자" (21절)에 불과하며, 바다의 모래 같았던 이스라엘 백성의 거대한 수효에 비교할 때 극소수에 불과하다. 회심시키는 일은 오직 남은 자들을 위해서만 일어난다. 그런 자들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어 있고 하나님을 위해 성별된 자들이란 것을 기억하자. 바다의 모래처럼 이스라엘의 수효가 지극히 많았다는 것, 그리고 가시적 교회의 교인도 그렇게 많다는 것, 그러나 곧 그리로 부름받은 많은 자들 중에서도 극소수의 선택받은 자들만이 구원되리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노력" 하게 될 것이고, "길을 잘못들까" 두려워하게 되리라.

이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 곧 야곱 족속의 타락에서 피하고 모든 자들이 배신하는 그런 때에도 그 순전함을 지킨 자들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족속의 황폐함에서 피하여 모두가 재앙을 당하고 그런 때에도 안전하게 보존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또한 공명정대하고 어려운 피난처가 될 것이다. 그들은 "노략물 대신에 생명을 얻은 자들이다" (렘 45:5). "의인들도 간신히 구원받는다."

1. 남은 자는 인생들에 대한 모든 신뢰를 끊게 될 것이며, 이 섭리는 바로 그러한 점을 치료해 줄 것이다. "그들은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뢰치 아니할 것이다. 앗수르 사람들이 그들의 가장 나쁜 적이라는 것을 발견하고서, 이전에 다른 적을 치기 위해 도움을 구했을 때처럼 결코 그들을 의뢰하지 않을 것이다." Iotus piscator sapit - 고난은 조심을 가르친다. 그들은 이제 귀하게 얻어진 경험에 의해, 지금까지 그들의 지주였던 것이 그들을 때리는 막대기였다는 것이 드러난 그 막대기를 의지하는 것이 어리석다는 사실을 배웠다. "우리가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리라" 는 것을 돌아온 백성들은 언약했다(호 14:3). 환란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피조물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2. 그들은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것은 메시야에게 주어진 이름 중의 하나이다. 9:6),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남은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돌아올 것이다(그것은 그 예언자 아들의 이름 스알야숩이 뜻하는 바이다. 7:3), 그들은 예루살렘의 포위가 해제된 후 돌아와 그들의 집과 토지를 평화롭게 소유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그들의 의무를 굳게 지킬 것이다. 그들은 회개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자기들의 생활을 개혁할 것이다." 피난하는 남은 자란 곧 돌아오는 남은 자이다. 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를 의지할 것이다. 하나님께로 돌아온 자들만이 위로를 받으며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즉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를 자각하는 그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겸손히 의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들은 겉모습과 고백에서만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진실히 의뢰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가 회심하고 구원받으리라는 이 약속을, 바울 사도는 복음이 처음 전해졌을 때, 그 복음을 반갑게 받아들인 유대인의 남은 자들에게 적용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많은 자손들을 멸망으로 내버려 두실지라도 아브라함에 대한 약속만은 전적으로 유효하게 보존하신다는 것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충분히 입증하고 있다. 왜냐하면 지금도 사정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는(약속대로 나 22:17) "바닷가의 모래 같았지만," 오직 남은 자만이 구원받을 것이다.

Ⅱ. 다른 일부의 사람들의 멸망을 의도하셨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소멸하실 것이라" (23절, 한글 개역에는 "끝까지 행하리라" - 역주). 이것은(18절에서 처럼) 앗수르 군대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앗수르 군대에 의한 많은 유대 사람의 재산과 가족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구별된 남은 자들을 피난시킨 것은 하나님의 권능과 선하심을 드러내 주는 것임을 밝히 말해 주는 것이요, 하나님께로 돌아오려 하지 않는 자들의 종말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게 하기 위해서 명시된 사건이다. 그런 자들은 이 소멸, 곧 "온 세계 중에" 있는 이 일반적인 몰락에 의해 멸망되고 말 것이다.

다음을 살펴보자.

1.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행하시는 파멸이다. 하나님이 그 사건의 장본인이시다. 아무도 저항할 수 없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 파멸을 일으킬 것이다.

2. 그 파멸은 "이미 작성된" 것이다. 그것은 갑자기 결정된 산물이 아니라, 미리 정해진 것이었다. 그러한 파멸이 있으리라는 것 뿐만 아니라(단어 그대로) 그것이 "제거" 되리라는 것이 이미 "결정" 되었다. 그 파멸이 얼마나 멀리에까지 미치며, 얼마나 오래 지속될 것인가, 그리고 누가 파멸되고 누가 파멸되지 않을지, 그것이 모두 자세히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3. 그것은 범람하는 파멸이다. 곧 온 세상을 뒤덮고, 마치 거대한 대홍수처럼 온 땅을 뒤엎어 놓을 것이다.

4. 그러나 비록 넘쳐 흐를지라도, 그것은 닥치는 대로가 아니라 "정의" 에 따른 것이다. 이것은 지혜와 공평을 모두 의미한다. 하나님은 당신을 분노케 하는 것에 대해서도, 그는 지혜롭고 은혜롭게도 그 한계를 정하실 것이다. "여기까지만 오고, 더 이상은 못 가리라."

 

10:21 없음.

 

10:22 없음.

 

10:23 없음.

 

10:24

이스라엘에 대한 격려(2) (이사야 10:24-34)

이 예언자는 설교 속에서 귀한 것과 천한 것을 구분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섭리 속에서, 심지어 똑같은 사건 속에서도 그렇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는 백성" (6절)이었던 그 위선된 자들에게는, 산헤립의 침입으로 인해 당할 공포를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는 또한 하나님의 사랑하는 백성이었던 신실한 자들에게는 위로를 말해 주고 있다. 심판은 분노케 하는 자들 때문에 보내졌다. 그러나 사랑받는 자들을 위해서는 구원이 이루어진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Ⅰ.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무서운 재난을 당하여도 놀라지 말고, 또 당황하지 말라는 권유를 받고 있다. "시온의 죄인들은 두려워 할지어다" (33:14). 그러나 "시온에 거한 나의" 백성들은 앗수르 사람을 두려워 말라(24절)." 어떤 일을 당했을 때 하나님의 백성이 고통과 놀람으로 인해 그 두려움에 빠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위배되는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요, 하나님의 백성이 그를 섬기며, "시온을 두르고" 있는 그 성벽(시 48:13)의 보호 아래에서 진행되는 하나님 예배에 전념하고 있는 곳인 시온에 거하는 자들은 어떤 적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러한 자들은 하나님 안에서 편히 거해야 한다.

Ⅱ. 그들의 두려움을 진정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사항이 제시되어 있다.

1. 앗수르 사람은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결정하신 것 이상으로 그들을 치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그들이 놀라게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여기에서 앗수르 왕이 할 일을 미리 들려주고 있다. "그가 하나님의 허락을 얻어 너를 치리라. 그러나 그것은 상처를 내어 죽이는 칼이 아니라, 오직 막대기를 통해서 행해질 것이다. 아니, 그가 애굽을 본받아 단지 몽둥이를 들어 너를 위협하고 너를 놀라게 하며 네게 막대기를 흔들 것이다. 애굽 사람들은 홍해에서 너희 조상들을 치기 위해 몽둥이를 들고서, 우리가 쫓아 미치리라(출 15:9) 하고 말했지만, 너희 조상들을 해하기 위해 붙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겁밖에 줄 수 없는 적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2. 그 폭풍은 곧 끝날 것이다(25절). "내가 불구에 - (단어 그대로) 잠시, 아주 잠시 후에 네게는 분을 그치고, 노를 옮기리라." 하나님의 분노가 바로 "그들의 손에 들려 있는 몽둥이" 인 것이다(5절). 따라서 그 분노가 그칠 때 그들은 무장을 해제하고, 무력하게 되어, 어떤 피해도 끼치지 못하게 된다. 하나님의 자기 백성에 대한 진노는 잠간이며(시 30:5), 그 진노가 그쳐, 우리에게서 사라졌을 때는, 우리는 어떤 사람의 분노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사람의 분노는 단지 무기력한 감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3. 그들을 위협하는 그 대적 자신이 보응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그치고," 그들의 적을 "명할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서 진노를 거두셨을 때, 그 진노는 앗수르 사람에게서 옮겨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징계하실 때 쓰던 그 막대기는 버릴 뿐만 아니라, 불에 태워버릴 것이다. 하나님은 "몽둥이를 들어" 시온을 쳤으나, "채찍을 들어 그(앗수르)를 치실 것이다" (26절). 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무섭게 하나, 하나님은 그를 무섭게 하실 것이다. 멸망시키는 임무를 지닌 천사가 채찍이 되리니, 그(앗수르)가 피할 수도 겨룰 수도 없으리라.

이 예언자는 하나님의 백성을 격려하기 위해 선례를 인용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의 원수들에게 이전에 행하신 일을 그들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그 원수들은 매우 강하고 막대했었지만, 멸망되었던 것이다. 이제 앗수르 사람의 멸망은



(1) "미디안 사람을 쳐죽인 것 같이" 될 것이라 했다(미디안의 멸망은 보이지 않는 권능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갑자기 이루어졌고, 또 모두 패주당했던 것이다). 그리고 전투 후에 "오렙 반석에서" 미디안의 한 방백이 죽임을 당한 것같이, 산헤립도 그의 군대가 패한 후에(그는 죽음의 쓰라림이 지나갔다고 그때 생각했다) 그의 니스록 신당에서 죽임을 당할 것이다. 이것을 시편 83장 11절과 비교해 보라(" 저희 귀인으로 오렙과 스엡같게 하소서").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과 그의 백성의 제도가 어떻게 일치했는가를 보라.

(2) 하나님이 "막대기를 드시되, 바다" 곧 홍해를 "향하여" 드셨던 것같이 하실 것이다. 모세의 지팡이가 홍해 바다에서 들려져, 먼저 이스라엘이 피할 수 있도록 그 바다를 가른 후, 다시 그들을 쫓는 무리를 멸망시키기 위해 합치게 했던 것처럼, 이제 하나님이 "막대기를 드시되 애굽에 드셨던 것같이 하여," 예루살렘을 건지시고 나서 앗수르 사람을 멸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위하여 그리고 그와 그들의 원수를 대적하여 나타나신 전자와 후자의 사건의 유사점을 관찰해 보는 것도 좋다.

4. 유다인은 앗수르 사람의 권력과 그 두려움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것이다(27절). "유다인들은 지금 자기들 주위에 진을 치고 있고 그들에게 고통스러운 멍에와 짐이 되고 있는 앗수르의 군대로부터 해방될 뿐만 아니라, 이 침입 전에 앗수르 왕이 그들로부터 받아낸 그 조공을(왕하 18:14) 더 이상 바치지 않게 될 것이다. 더 이상 이전처럼 그를 섬기게 되지 않을 것이며, 또 그의 수하에 놓여 있게 되지도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결코 다시는 그 나라 백성에게 군세를 부과하지도 못할 것이다."

혹자는 이것을 더 나아가, 유다인이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는 것, 그리고 범위를 더 넓혀 신자들이 죄와 사탄의 압제에서 해방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 멍에는 벗어질 뿐만 아니라 "부러질 것이다." 그 원수는 더 이상 이전처럼 악을 행하기 위해 세력을 회복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기름부음으로 인하여," 즉 기름부음 받음에 동참한 자들로 인해서이다.



(1) 즉 히스기야 때문이다. 그는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였고, 실제적인 개혁자였으며, 하나님께 소중한 자였다.

(2) 다윗 때문이다. 이것이 특히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산헤립에게서 지키시려는 이유라고 제시되어 있다(37:35). "대저 내가 나를 위하여 내 종 다윗을 위하여" 그렇게 하리라.

(3) 그의 백성 이스라엘, 즉 그들 중에 거룩한 은총이라는 기름부음을 받은 선한 자들 때문이다.

(4)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즉 메시야 때문이다. 하나님은 구약 성서의 교회를 구원하신 모든 사건 속에서 메시야를 유의하셨고, 그의 백성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 속에서도 역시 메시야를 유의하셨다. 우리의 멍에가 부러지고 우리가 진정 자유케 된 것은 그로 인한 것이다.

Ⅱ. 그 대적이 주는 두려움과 그것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놀라는 두려움이 나와 있다. 또한 그 양측의 어리석음에 대해 28절부터 끝까지 묘사되어 있다. 여기에서 다음을 살펴보자.

1. 앗수르 사람들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였으며, 그들이 얼마나 뽐내면서 나타났는가? 얼마나 대담하고 위협적이었는가, 또 산헤립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얼마나 신속하게 진군해 나갔는가에 대해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가 아얏에 이르렀다." 즉 그는 여기 저기를 점령했고, 아무런 장애도 만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마치 그의 야전 포병을 사용할 기회가 더 없는 것처럼, "믹마스에 치중(輜重)을 머무르고" 매우 쉽게 각 지역에 들어와 그 곳을 정복했다. 또는 그 목적을 위해 요새화한 유다의 곡창 도시들을 이제 그의 화약고가 되었다. 그는 주목할 만한 고개와 중요한 고개를 넘었다. "그들은 영을 넘었다" 고 했다.

2. 반면에 유다 사람들, 즉 그 사자새끼의 타락한 후손들은 얼마나 비겁했는가? 그들은 "떨었다." 즉 그들은 첫번째 치중에 "도망했고," 대적을 치기 위해 앞장서려 하지 않았다.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배신이 그들을 위축시켰다. 따라서 적군 한 사람이 그들 천명을 쫓았다. 서로를 북돋워 주는 용맹스러운 함성 대신에 서로를 낙담케 하고 연약하게 만드는 탄식 이외에는 그 어느 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용기의 모범이 되어 왔던 제사장의 성읍인 "가련한 아나돗" 은 그 어느 도시보다도 더 크게 비명을 질렀다(30절). 함께 "모이는" (역주 - 한글 성경에는 "도망하는" 으로 되어있음) 자들은 싸우기 위함이 아니라 동의를 얻어 도망하기 위한 것이었다(31절). 이것은 다음 중의 어느 이유에서였다.

(1) 그 대적의 행군 소식이 얼마나 빨리 퍼지고 있는가를 보이기 위한 의도를 지니고 있다. "그가 아얏에 이르렀다" 고 혹자는 말한다. 아니 "그가 미그론을 지났다" 고 혹자는 말한다. 그러나 아마도 그것은 모두 그 일반 소문처럼 그렇게 불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나쁜 일에 대한 공포뿐만 아니라 나쁜 소식을 듣고 오는 공포도 조심해야 한다. 그것은 사태를 실제보다 더 나쁘게 만들기 때문이다(시 112:7).

(2) 또는 예루살렘이 얼마나 긴박한 위험 속에 있었는가를 보이기 위한 의도를 지니고 있다. 그때 그 대적들은 예루살렘을 향해 여러 차례 매우 대담하게 진군해 왔고, 그 친구들은 그것을 방어하기 위해 한시도 용감히 버티고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교회의 원수들이 대담할수록, 그리고 교회를 위해 나타나야 할 자들이 비겁할수록 하나님은 더욱 당신의 권능으로 인하여 높임을 받으실 것이다. 그리고 그 때에 하나님은 이러한 것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건지신다.

3. 예루살렘을 치려는 앗수르의 시도는 얼마나 무력하게 될 것인가? "그가 놉에서" 시온산을 보기 위해 "쉬고," 거기에서 그것을 치는 "그 손을 흔들리로다" (32절). 그는 시온을 위협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가 될 것이다. 시온은 안전할 것이며, 그를 무시할 것이다. 예루살렘의 딸은 그에게까지도 "머리를 흔들" 것이다(37:22).

4. 그 결과는 그에게 지극히 치명적인 것임이 판명될 것이다.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의 손은 흔들고," 거기에 자기 손을 놓으려 할 때, 그 때는 하나님께서 나타나시어 산헤립을 치실 때이다. 왜냐하면 시온은 "이는 내 영원한 안식처라" 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온을 위협하는 자는 하나님 자신을 모욕하는 것이다. 그때 "여호와께서 혁혁한 위력으로 그 가지를 꺾으시고 그 빽빽한 삼림을 베실 것이다." (33, 34절).

(1) 원수 앗수르의 교만이 꺾일 것이다. 높이 들리운 가지가 꺾일 것이며, 고고하고 당당한 나무가 찍힐 것이다. 즉 교만한 자는 낮아질 것이다. 스스로 교만해져서 하나님과 겨루거나 대항하는 자들은 굴욕을 당할 것이다.

(2) 원수의 힘이 꺾일 것이다. "그가 그 빽빽한 삼림을 베실 것이다" 고 했다. 앗수르 군인들이 무장을 하고 창을 치켜들었을 때, 그들은 레바논의 삼림같이 보였다. 그러나 어느날 밤 그들이 모두 시체처럼 되었을 때, 그 창은 땅에 떨어지고, 레바논은 갑자기 "권능있는 자에게" 곧 멸망시키는 천사에게 작벌을 당한다. 그 천사는 삽시간에 그들을 수 천 명이나 죽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교만한 침입자의 말로라면, 하나님의 백성은 그런 자를 두려워하지 말자. "죽을 인생을 두려하는 너는 누구인고?"

 

10:25 없음.

 

10:26 없음.

 

10:27 없음.

 

10:28 없음.

 

10:29 없음.

 

10:30 없음.

 

10:31 없음.

 

10:32 없음.

 

10:33 없음.

 

10:34 없음.




































 


Articles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