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이사야 0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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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아하스의 곤경과 위안 (이사야 7:1-9)

예언자 이사야는 웃시야왕이 죽은 해에 그의 소명을 갱신했다(6:1). 웃시야의 아들 요담이 즉위하여, 16년 동안 훌륭히 통치했다. 그 시대에는 이사야는 하나님의 명을 받은 대로 모든 사실을 분명히 예언했을 것이나, 우리는 이사야서에서 요담 시대의 예로 날자가 적인 예언은 아무 것도 읽을 수가 없다. 그는 훌륭하고 유익한 설교들을 많이 했었는데, 그것들은 책이 되어 문서로 남겨지지는 않았다. 기억할 만한 모든 것이 기록되었다면 "이 세상도 그 책을 두기에 부족했기" 때문이다(요 21:25). 아마도 악한 왕 아하스의 통치때에는, 요담 시대처럼 궁에서 설교할 기회를 그렇게 많이 갖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때에는 그들에 대한 증언으로서 글을 더욱 많이 썼다.

Ⅰ. 예루살렘에 대한 아랍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의 매우 엄청난 음모가 있다. 이 두 이웃 군주들은 최근에 여러 차례 유다를 급습했었다. 요담의 통치 말년에 "여호와께서 유다를 치기 위해, 르신과 베가를 보내시기 시작했다" (왕하 15:37). 그러나 아하스가 즉위 제 2 년 혹은 제 3 년에는 그들이 이전의 성공에 용기를 얻어 스스로 유다를 치려고 동맹을 맺었다. 아하스는 자기 머리 위에 있는 칼을 발견하고서도, 우상 숭배와 함께 악정을 시작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의 손에 붙이셨다" (대하 28:5). 그래서 그들은 아하스의 나라에서 크게 살륙했다(6, 7절). 이러한 승리에 의기양양해져, 그들은 궁성,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와서 그 성을 치고, 포위하고, 또 그곳의 주인이 되고자 했다. 그러나 결국은, 그들이 자기들의 뜻을 이룰 수 없었음이 입증되었다. 나라의 죄는 외국의 침입을 초래하며, 그 대적에게 가장 유리한 위치와 길을 제공해 준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리고 하나님은 때로 악한 한 나라를 들어서 다른 나라의 채찍이 되게 하신다. 그러나 보통은 심판이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된다.

Ⅱ. 아하스와 그의 궁은 이 음모에 대한 보고를 듣자, 큰 조심의 빠졌다. 아람과 에브라임이 유다를 치기로 하는 동맹에 서명했다는 사실이 "다윗 집에 고하여졌다" (2절). 이 타락된 왕족이 "다윗의 집" 이라 불리우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은 언약의 조항(시 89:30-33), 즉 "만일 그 자손이 내 법을 버리면, 내가 지팡이로 저희 범과를 다스리로다. 그러나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 아니하리라" 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기 위한 것인데, 그것은 본장에서 아주 현저하게 이행되었다.

아람과 이스라엘의 두 군대가 한 패가 되어 전투지를 점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유다 궁과 성읍과 촌락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아하스의 마음이 두려움으로 흔들렸다. 그러자 그 백성의 마음이 삼림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 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동요되고 흔들렸으며 큰 혼란과 혼미 속에 빠졌다. 즉 그들의 계획이 흔들리고 불확실했으며, 그들이 우왕좌왕하여 어떤 확고한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 폭풍에 항복했고, 저항하는 일은 헛되고 말 것이라고 결론짓고는, 모든 것을 포기해 버렸다. 이런 공포를 유발시킨 것은 죄의식과 그들의 믿음의 연약함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적으로 만들었고, 그를 그들의 친구로 만드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들의 두려움이 그들을 압제했다. 반면에 자기의 양심에 "거리낌이 없고," "마음을 굳게 정하여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들은 흉한 소식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행 24:16; 시 122:7). "그들은 땅이 요동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시 46:2, 3). "그러나 악인은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 소리에도 놀라 도망한다" (레 26:36).

Ⅲ. 근심 중에 있는 아하스에게 가서 격려하라는 명령이 이사야에게 전달되었다. 그것은 아하스 자신 때문에서가 아니라(그는 그의 근심에 고통을 더할 수 있는 공포의 말씀 이외에는 그 어느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만한 자격이 없었다), 그가 다윗의 자손이었고 또 유다의 왕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조상들 때문에 - 그들은 잊혀질 수 없는 자들이었다 - 버림 받아서는 안 되며 그 백성들 때문에 - 아하스가 버림을 받는다면 그 백성도 버림을 받을 것이다 - 아하스에게 자비를 베푸셨다.

1. 비록 아하스는 그 예언자와 이야기하기 위해 그를 부르러 사람을 보내거나 그에게 여호와에 대해 묻기를 원하지도 않았지만 하나님은 그 예언자에게 명하시어 아하스를 만나도록 하셨다(3절).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라." 하나님을 찾지 않았던 자들도 흔히는 하나님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그를 열심히 찾는 자들은 더욱 더 분명히 그를 발견할 것임을 기억하자.

그는 위로를 받을 만한 가치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다지 위로를 구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위로를 들려주신다.

2.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어린 그의 아들을 함께 데리고 가도록 명하셨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의 이름 "스알야숩" 으로써 한 설교족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 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예언자들은 때로 그들이 전한 것을(호 1:4, 6, 9 에서처럼) 자기들의 자녀들의 의미있는 이름을 통해 기록했다. 그러므로 이사야의 자녀들은 "예표" 가 되었다고 일컬어지고 있다(8:18).

포로로 사로잡혀간 자들에게 그들이 적어도 그 남은 자들이(그것은 그들이 요구할 수 있는 것 이상이었다) 돌아오리라는 것을 확신시켜 주면서, 그들을 격려하기 위해 이 아들이 그렇게 불리워졌다. 그러나 당시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보다 큰 긍휼을 베푸셨다. 왜냐하면 그는 남은 자들 뿐만 아니라 아람과 이스라엘 동맹군이 포로로 잡아간 자들도 모두 돌아오도록 조처하셨기 때문이다(대하 28:15).

3.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아하스를 만날 곳을 지시하셨다. 그는 아하스를 성전이나 회당이나 왕궁이 예배당에서가 아니라 "윗못 수도 끝에서" 만나게 되리라 했다. 아마 그는 많은 하인들과 함께 그 성읍에 물을 확보하거나 그 대적이 물의 혜택을 못받게 하기 위해 상수도를 개선할 방침을 궁리하고 있었거나(22:9-11; 대하 32:3, 4), 또는 그 성읍을 최대한으로 잘 방비하기 위해 필요한 지시를 내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모든 것들이 방어하기에 매우 나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즉 수도가 손질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도 썩어가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두려움이 더해졌을 것이다. 그 때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당황했다. 그러므로 거기에 나가서 그를 만나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때로 매우 적절한 때에 그의 백성들에게 위로를 보내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리고 아무리 무서운 때에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격려해 주신다.

4. 하나님은 이사야의 입술에 말씀을 주셨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예언자는 두려울 정도로 악한 사람 곧 시온의 죄인에게 어떻게 하면 유익한 메시지를 전할지를 몰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해 그것을 의도하셨다.

(1) 그 예언자는 그들의 두려움을 꾸짖어야 했고, 결코 거기에 항복하지 말고 참으며, 그들 영혼을 굳게 보존하라는 충고를 해야 했다(4절). "삼가며, 조용하라." 위로하기 위해서는 주위의 환기가 필요하다. 우리가 조용해지기 위해서는, 우리를 불안케하려고 위협하는 것들을 삼가고 경계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렇게 놀라면서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움은 사람을 연약하게 하고 괴롭힌다. 용기가 없어지고 낙심하게 될 정도로 마음을 연약하게 하지 말라. 활기를 돋우고 그것에 대해 선한 마음을 품으며 담대하라. 이성(理性)과 신앙이 너를 돕기 위해 제공하는 그 원조가 거짓일까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께 도와 주시기를 바라는 자들은 자기 스스로를 도와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시 27:14).

(2) 이사야는 그들에게 대적들을 멸시하도록 가르쳐야 했다. 그러나 교만이나 방심 때문이 아니라(그런식으로 대적을 멸시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은 없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소망 때문에 멸시하라는 것이다. 아하스는 두려워서 그들을 유력하고 기민한 두 방백이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그 중의 누구도 아하스가 할 수 없는 적수였는데, 만일 그들이 연합한다면, 그는 감히 그들의 얼굴을 바로 볼 수도 없고 그들에게 저항하려는 생각은 엄두도 못내게 될 것이다. "아니다." 그 예언자는 말한다. "그들은 연기나는 두 부지깽이다. 그들은 부지깽이처럼, 불덩어리처럼 노하고 격분하며 맹렬하다. 함께 있으면 더욱 맹렬하게 불타는 나무 토막처럼, 동맹함으로써 서로를 더욱 악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들은 연기나는 부지깽이에 불과하다. 그리고 연기가 있는 곳에 어느 정도 불도 있으나, 그런 불은 그렇게 두려워할 정도의 것이 못된다. 그들의 위협은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다. 애굽 왕 바로가 망하였도다(렘 46:17). 그리고 아람 왕 르신은 연기에 불과하다.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의 모든 대적들은 이처럼 곧 꺼져가는 심지이다. 아니, 그들은 어느 정도 이미 타버린 연기나는 부지깽이 찌기에 불과하다. 그들의 힘은 쇠하여졌다. 그들은 자기들의 분노의 열기로 스스로를 태웠다. 너는 이제 그들을 발로 짓밟아도 좋다." 아람과 이스라엘 두 나라는 이제 거의 쇠잔해가고 있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는 소멸시키는 불이라는 사실을 더 잘 주목하면 할수록 우리는 사람들을 더 적게 두려워하게 된다. 그들이 아무리 맹렬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을 연기나는 부지깽이처럼 멸시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3) 이사야는 그들에게, 예루살렘을 치려는 이 사기충천한 동맹군(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의 현재 의도가 기필코 좌절되어, 모두 허사가 되리라는 것을 확신시켜 주어야 했다(5-7)절.

[1] 아하스가 그들을 매우 거대한 존재로 생각한 바로 그것이 패배의 원인이 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들의 계획의 목표함은 말한 저의였고, 그들이 소망한 목표였다. "따라서 그들이 악한 꾀로 너를 대적하여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였으나, 패배당하고 수치스럽게 되돌아갈 것이다. 이 부지깽이는 코의 연기이므로(65:5) 꺼질 것이다."

첫째, 그들은 매우 심술궂고 악의에 차 있으므로 형통하지 못할 것이다. 유다는 그들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아하스와 다툴 만한 구실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 이유도 업시 그들은 "우리가 올라가 유다를 쳐서 그것을 곤하게 하자" 고 말했다. 남을 괴롭히는 자들이 형통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 악을 행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은 잘 되기를 바랄 수 없다.

둘째, 그들은 매우 안심하며 성공을 확신한다. 그들은 올라가 유다를 쳐서 곧 곤하게 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예루살렘 성벽을 허물고, 예루살렘 안으로 전진해 들어가리라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또는 그들은 그 나라를 두 부분으로 즉 하나는 이스라엘 왕을 위해, 또 하나는 아람 왕을 위해 분할하리라 생각했다. 그들은 한 명의 부왕 즉 "다브엘의 아들을 그 중에 세워 왕을 삼으려" 는 데에 동의했는데, 그는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자로서, 아람인인지 이스라엘인인지 확실치 않다. 그처럼 그들은 자기들의 뜻한 바를 얻으리라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그 탈취물을 빼앗기도 전에 김치국부터 마시는 격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가장 오만한 자들이 가장 성공하지 못한다.



[2] 하나님께서 친히 이 계획은 성취하지 못하리라는 말씀을 그들에게 주시하고 있다(7절). "열방의 도모를 폐하시는(시 33:10), 만유의 주재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이 도모가 서지 못하며 이루지 못하리라. 그들의 계획은 꺾어지며 그들은 그들의 투기심을 이루지 못하게 되리라 하셨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일어서거나, 그가 없이도 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오래가지 못한다. 사람이 계획을 세울지라도 하나님이 그 성패를 결정하신다. "주의 명령이 아니면 누가 능히 말하여 이루게 하랴" (애 3:37; 잠 19:21 참조).

(4) 이처럼 이사야는 지금 그들을 두렵게 하고 있는 이 대적들이 마침내 멸망하리라는 예견을 그들에게 주고 있다.

[1] 그들 중 그 누구도 자기들의 영토를 확대하거나, 더 이상 그들의 정복을 입고 나갈 수 없을 것이다.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다." 그는 이것을 자랑한다. 그러므로 그것으로 만족하게 하라(8절). "에브라임의 머리는" 오랫동안 "사마리아" 였고, "사마리아의 두목은" 이제 "르말리야의 아들" 베가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소유를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의 한계는 고정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 한계를 초월하여 유다 성읍의 주인이 되지 못할 것이며, 더욱이 예루살렘을 탈취하지도 못할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거할 곳의 경계를 정해 주신 것과 마찬가지로(행 17:26), 방백들에게는 그들의 주권의 경계를 정해 놓으셨으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한계를 알아 그 이웃의 권리를 침해하지 말아야 한다.

[2] 그 둘 중 에브라임이 더 악랄하고 뻔뻔스러운 대적이었을 것이지만, 그들도 곧 완전히 근절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다른 백성의 땅을 빼앗기는 커녕 오히려 자기들의 땅도 지킬 수 없게 될 것이다.

해석 학자들은, "에브라임이 패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하리라" 고 한 그 65년 간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몰라 무척 당황하고 있다. 왜냐하면 열 지파(이스라엘)가 포로된 것은 이보다 불과 11년 후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혹자는 그것을 다시 쓴 사본가들의 실수로 보고 "육년과 오년 내에" 곧 십일년 내로 읽혀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기는 힘들다. 혹자는 그것을 예언자 아모스가 제일 처음으로 열 지파의 멸망을 예언하기 시작한 그때로부터의 65년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근래의 일부 해석자들은 이보다 약 65년 후에 있었던 에살하돈에 의한 그 나라(에브라임 곧 이스라엘)의 최종적인 멸망을 내다보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때에 에브라임이 패망하고는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멸망할 운명에 놓여져 있고 또 그 멸망이 아주 가까이 임박한 자들이, 그 이웃을 멸망시키려 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이다.

그들이 유다를 쳐서 개가를 부르고 있을 때, 어떤 예언자가 한 말을 보라(대하 28:10).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함이 없느냐?"



(5) 이사야는 그가 그들에게 진술한 말은 확실하다는 것을 믿도록 그들에게 강권해야 한다(9절). "만일 너희가 들은 것을 믿지 아니하면, 정녕 굳게 서지 못하리라. 너희의 동요되고 혼란된 국가가 다시 서지 못하며, 너희의 불안하게 흔들리는 마음이 안정되지 못할 것이다. 비록 너희가 들은 것이 매우 격려를 주는 말이라 할지라도, 너희가 그것을 믿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기꺼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한, 그것은 너희에게 격려가 되지 못하리라." 현세에서 당하는 온갖 걱정을 진정시키고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데에는 신앙이라는 은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명심하자(대하 20:20).

 

7:2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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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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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에 대한 약속 (이사야 7:10-16)

Ⅰ. 하나님은 그 예언자를 통해 아하스에게 말한 예언을 믿을 만한 증거가 될 수 있는 표전을 구하라고 하는 은혜로운제안을 하신다(10, 11절).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라." 여기에서 하나님의 미쁘심과 진실하심을 보라. 하나님은 그가하실 수 있고 또 증명할 준비가 되어있는 것 이외에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말씀하시지 않는다. 인간의 자손에 대한 그의 놀라운 겸양을 보라. 그것을 통해 그는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나타내시려 한다" (히 6:17). 그는 인생의 형편을 고려하시며, 나아가 우리가 감각의 세계에 살고 있으므로 실제적인 증거를 요구하는 경향이 있음을 참작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례전의 징표를 베풀어 주셨다. 아하스는 나쁜 자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하나님이라고 불리우고 있는데, 그것은 그가 아브라함과 다윗, 그리고 그들과 맺은 언약의 자손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악인과 감사할 줄 모르는 자들에게도 얼마나 은혜로우신가를 보라.

기드온이 양털에 대해 했던 것처럼(삿 6:37) 아하스도 징조를 택하도록 허락했다. 그로 하여금 공중이나 땅이나 바다에서 징조를 구하게 하라.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은 어느 곳에서나 같기 때문이다.

Ⅱ. 아하스는 무례하게도 이 은혜로운 제안을 거절하고, 특별 대우를 차버리며(이것은 윗 사람에게 대한 예의가 아니다), 멸시하고 있다(12절).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가 징조를 구하지 않으려는 참된 이유는, 그가 앗수르 사람들 곧 앗수르의 군대와 그들의 신이 도와 줄 것으로 의지하고 있었으므로, 이처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은혜를 입거나 신세를 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불신앙을 고집하려 했기 때문에 믿음의 확증을 위한 징조를 구하려 하지 않았고, 그에 대한 의심과 불신 가운데 잠겨 있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경건한 이유를 핑계삼고 있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 마치 하나님께서 친히 그에게 행하도록 초청하고 지시한 그 일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인양 말하고 있다. 은근히 하나님을 싫어하는 감정은 흔히 그를 존경한다는 그럴듯한 구실로 위장된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기로 결심한 자들도 그를 시험하려 하지 않는 척한다는 것을 주시하라.

Ⅲ. 그 예언자는 그와 그의 왕실을, 그와 다윗의 집을, 그 왕족 전체를, 그들이 예언을 경멸하는 것으로 인해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를 거의 귀중히 여기지 않는 것으로 인해 책망하고 있다(13절). "너희가 너희 자신을 온 인류에게 귀찮고 지겨운 존재로, 만드는 너희의 압제와 폭정으로써 사람을 괴롭게 하고도, 그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그리고서도 또 나의 하나님을 모욕하여 그를 괴로우시게 하려느냐?" 그러한 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불의한 재판관과도 같다(눅 18:2).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였도다" (말 2:17). 믿지 않는 것보다도 하늘의 아버지를 더 괴롭게 하는 것은 없다. "너희가 나의 하나님을 괴로우시게 하려느냐? 너희는 그가 곤비하여 너희를 도우실 수 없거나 너희에게 선을 행하기에 지치셨다고 생각하느냐? 너희는 모든 친구들을 피곤하도록 만들 수 있으므로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 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신다" (40:28-31).

또는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예언자들을 모욕하는 일에서, 너희는 단지 너희가 너희 자신과 같은 사람만을 멸시했다고 생각하고 그 사자들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모욕하고 있다는 것과 그를 멸시하며 그것을 그가 분히 여기시리라는 것은 조금도 생각지 못한다. 그 예언자는 여기에서 아주 쾌히 하나님을 그의 하나님이라 부르고 있다. 아하스는 그 예언자가 하나님을 그렇게 부르도록 청했지만, 그는 나의 하나님이 시다라고 말하려 하지 않았다(11절). "네 하나님 여호와" 라 했다. 그러나 이사야는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다" 라고 말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행하든, 우리는 주를 우리의 주님으로 인정하고 그를 따라야 한다.

Ⅳ. 그 예언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한 징조를 주고 있다. "너희는 징조를 구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의 불신앙은 하나님의 약속을 무효화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곱절의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14절).

1. 아스라엘과 다윗의 집에 대한 하나님의 선한 뜻을 나타내는 일반적 징조를 주실 것이다. 너희는 그가 너희를 위해 긍휼을 쌓아 두고 계시다는 것, 그리고 너희의 현재의 환란과 위험이 아무리 클지라도 너희는 너희 하나님에게서 버림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해도 좋다. 왜냐하면 너희 민족, 너희 가문에서 메시야가 태어날 것이며, 너희 속에 장차 임할 축복된 자가 있는 한, 너희는 멸망될 수 없기 때문이다."

(1) "메시야는 매우 영광스러운 방법으로 태어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너희 가운데에서 태어나리라는 것을 너희가 흔히 들어왔지만, 나는 이제 그가 처녀에게서 태어나리라는 것을 덧붙여 말해야 한다. 그런데 그 사실은 그가 이 세상에 가지고 하나님 능력과 순결 - 그가 일반적인 출생 방법에 의해 태어날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범한 인물이 되리라는 것 - 더욱이 그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공통적 부패로 얼룩지지 않은 거룩한 존재가 될 것이므로, 그의 아버지 다윗이 준 보좌를 차지하기에 더 없이 합당하다는 것을 말해 주리라." 그런 사건은 비록 500년 이상 후에 이루어질 일이었지만 다윗의 집에는(그리고 그러한 칭호 하에 이 예언을 받은 그들에게, 13절) 큰 격려가 되는 징조였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고자 하시지 않는다는 언질이었다. 에브라임은 실상 유다를 투기했고(11:13), 그 나라가 멸망되기를 바랬지만, 그렇게 만들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홀이 실로가 오시기까지 유다에서 떠나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이다(창 49:10). 하나님께서 큰 구원을 위해 예정하신 자들은 그것을, 그들이 길가는 도중에 만날지도 모르는 어떤 역경에 의해 삼키우지 않으리라는 징조로 받아들일 수 있다.

(2) 메시야는 그의 영광스러운 이름 속에 쌓여진 그 영광스러운 사명을 띠고 오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 이름을 임마누엘 -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심 - 이라 하리라." 인간의 모습을 지니신 하나님, 우리와의 언약 속에서 우리와 화목하신 하나님이라 하리라. 이것은 그를 예수 - 곧 구세주라 칭하는 일 속에서 이루어졌다(마 1:21-25). 그가 "임마누엘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 - 이 아니었다면, 그는 "예수 - 구세주" 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이것은 더 나아가, 다윗의 집과 유다 지파를 총애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징조였다. 왜냐하면 그들 가운데에서 이 큰 구원을 역사하실 예정이었던, 하나님은 이것의 모형과 표상이 되고 이것에 대한 전조가 될 그 밖의 모든 구원 사건들을 그들을 위해 틀림없이 역사하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너희를 위한 징조가 있다. 그것은 깊은 데나 높은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도 익히 알고 있는 예언과 약속 그리고 다윗과 맺은 언약 속에 있다. 그 언약의 씨는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심이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8:10)과 너희만이 임마누엘의 땅이라는(8절) 그 말씀으로 너희를 위로하라. 다윗의 집의 마음이 이처럼 흔들리게(2절) 하지 말며, 유다가 다브엘의 아들이 세워지는 것을(6절) 두려워하지 말자. 왜냐하면 그 어느 것도 임마누엘이 될 다윗의 아들의 상속을 끊어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고통을 당할 때에 가장 큰 위안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로부터 온 것들, 즉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관계, 그 안에 있는 우리의 특권 그리고 그에 대한, 그로부터 온 우리의 기대이다.

이 아이에 관한 것으로서, 그는 비록 다른 아이처럼 나지 않고 처녀에게서 날지라도, 실지로 그리고 정말 사람일 것이고, 다른 아이들처럼 양육되리라는 사실이 더 언급되어 있다(15절). "그가 다른 아이들처럼, 특히 젖과 꿀이 흐르던 그 땅의 아이들처럼, 버터와 꿀을 먹을 것이라. 비록 그가 성령의 능력에 의해 잉태될지라도 그는 천사들의 음식을 먹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마땅한 일로서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될 것이다(히 2:17). 뿐만 아니라 그는, 이처럼 비범한 출생에 의해 태어났지만, 즉시 성인이 되지 않고 인간의 유아기와 아동기와 청년기의 여러 단계를 거쳐 점차로 성장할 것이며 지혜와 키가 자라매 마침내 심령이 더욱 강해지고 성숙해져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정도까지 될 것이다" (눅 2:40, 52 참조). 아이들은 성장해서 가르침과 교훈을 받을 수 있기 위해서는, 어렸을 때부터 양육을 받아야 한다. 어린이가 의식주의 생활을 하는 것은 교육받기 위해서다.

2. 지금 유다를 두렵게 하고 있는 이 유력한 방백들의 신속한 멸망에 관한 구체적 징조가 여기에 하나 나와 있다(16절). "이 아이가(그것은 그렇게 해석되어야 한다), 내가 지금 내 팔에 안고 있는 이 아이가" (그가 의미하는 것은 임마누엘이 아니라 징조를 택하도록 청을 받은 스알야숩 자신의 아들이다. 3절), 또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그리고 그의 현재의 키와 조숙함을 본 자들은 그가 언제 그렇게 할 수 있을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이 아이가 서너살 되기 전에 너의 미워하는 두 왕 곧 베가와 르신의 땅이, 네가 이처럼 적개심을 품고 있고 이처럼 무서워하는 바로 이스라엘과 아람의 동맹군이 폐한바 되리라." 이들은 매우 철저히 동맹을 맺고 있었으므로 마치 한 나라의 왕들인 것처럼 보였다. 이 약속은 완전히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이로부터 2, 3년 내에 호세아가 베가를 반역하여 죽였고(왕하 15:30) 그 전에 앗수르 왕이 다메섹을 빼앗아 르신을 죽였기(왕하 16:9)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도 당면한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은 즉시 일어났고 이 아이는 그 이름 속에 그것에 대한 예언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것은 이 후의 사건에 대한 표시였고 징조였다. "스알야숩은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 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베가와 르신이 잡아간 20만 명의 포로들이 힘이나 권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영에 의해 놀랍게 되돌아온 사건을 가리키고 있다. 그 이야기를 읽어 보라(대하 28:8-15). 이 아이의 예언적인 이름이 이처럼 이루어 졌으므로, 틀림없이 그에 관해 더 부과된 이 예언도, 즉 아람과 이스라엘 왕이 폐한 바 되리라는 것도 또한 이루어질 것이었다. 하나님께로부터의 한 가지 긍휼이 우리로 하여금 또 한 가지 긍휼에 대비하도록 만든다면, 우리는 힘을 얻어 그 긍휼을 바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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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된 심판 (이사야 7:17-25)

다윗의 한 가지로서의 아하스에게 위안을 주는 약속이 있은 후, 여기에서는 그를 다윗가의 타락한 가지로 보고 그에 대한 무서운 경고가 따르고 있다. 비록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다윗과 그와 맺은 언약을 위해서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의 불의는 "막대기" 로, 그의 죄는 회초리로 "징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려 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들을 각오를 하게 하라.

Ⅰ. 경고된 심판은 극심했다(17절). 그 심판은 매우 크다. 왜냐하면 전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방백들 자신과(비록 높은 자일지라도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백성들 위에, 곧 그 온 민족과 왕족 위에, "네 아비의 모든 집에" 임할 것이다. 그것은 후손들에게도 상속되는 심판이 될 것이며, 왕족의 피를 수반할 것이다. 그것은 매우 크다. 왜냐하면 전례 없었던, 즉 "당하여 보지 못한 날" 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에브라임이 유다를 떠났을 때 열 지파(이스라엘)가 반란 - 이것은 실로 다윗가의 큰 슬픔이었다 - 을 일으킨 이후로는 결코 그와 같이 극심하게 어둡고 암담하고 우울한 날이 없었다. 사람들이 오래 죄를 범할수록 그들이 예상해야 하는 심판은 더욱 쓰라리다. 이러한 날들이 그들에게 임하도록 할 자는 여호와이시다. 왜냐하면 우리의 때는 그의 손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가 내리시는 심판을 누가 항거하거나 피할 수 있겠는가?

Ⅱ. 이 심판의 도구로 사용되어야 할 대적은 앗수르 왕이다. 아하스는 이스라엘과 아람의 동맹 세력을 물리쳐 주리라고 바로 앗수르 왕을 크게 의지했다. 그리고 앗수르 왕에 대한 그의 신뢰는 매우 컸으므로, 그를 격려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의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에 별로 마음을 두지 않았고, 만일 그 왕이 그에게 어느 정도 원조해 준다면 그의 신복이 되겠다는 비열한 약속을 했다. 그는 또한 그에게 은금을 예물로 보냈는데, 그것은 그가 교회의 창고와 국고에서 빼낸 것이었다(왕하 16:7, 8).

이제 하나님은 그가 하나님 대신 자기의 지주로 삼고 있는 앗수르 왕이 바로 그에게 채찍이 되리라는 사실을 경고하신다. 이것은 신속히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앗수르 왕이 "이르렀으나, 돕지 아니하고 도리어 군박하였기" 때문이다(대하 28:20). 그 갈대는 그에게서 꺾어져 그의 손을 뚫고 들어갔다. 그러므로 앗수르 왕은 오랫동안 유다를 괴롭히는 가시가 되었고, 그들에게 큰 고통을 주었다. 우리가 소망을 두고 있던 피조물들은 대개 나중에 가서 보면 우리를 해치고 만다는 것을 기억하자.

앗수르 왕은 그 후 멀지않아 열 지파(이스라엘)의 주인이 되었고, 그들을 포로로 잡아갔으며, 그들의 나라가 황폐케 되었다. 그래서 본문에 나온 예언은 충분히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8절에 대한 설명으로서 에브라임이 꺾어질 것이고, 그것은 다시 나라를 이루지 못하리라는 예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리고(17절에서) 그 예언자가 이스라엘 왕에게로 그의 화제를 돌려, 유다를 침입하려는 그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것을 예고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주석학자들은 보편적으로 그것을 아하스와 그의 나라에 대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다음을 살펴보라.

1. 침입자들에게 출두령이 내린다(18절). "여호와께서 파리와 벌을 부르시리라" (5:26 참조). 파리나 벌처럼 천해 보이고 쉽게 짓이겨 버릴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대적들도, 하나님께서 원하실 때는 사자와 어린 사자들처럼 하나님의 일을 충분히 해낼 것이다. 비록 그들이 애굽 강과 앗수르 땅처럼 먼 곳에 서로 떨어져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참석을 명하실 때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만나 서로 합심해서 이 일을 행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해야할 일이 있을 때에, 그것을 행할 도구가 없어 당황하시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들에게 점령된다(19절). 마치 그 나라는 조금도 저항할 만한 처지가 못되었던 것같이 보인다. 침략자들이 길을 강행하는 데 아무런 난관도 만나지 않고, "다 와서 거친 골짜기에 앉는다" 고 했다. 그런데 그 골짜기는 그 거민들이 첫번째 경종에 놀라 도망해 버려서, 그 침입자들에게 손쉬운 먹이가 되어버린 곳이다. 그들은 파리와 벌떼처럼 와서, 낮은 지역에 앉는다. 그리고 벌들이 흔히 하듯이 바위틈에 거처를 잡음으로써 자체 방비를 견고케 할 것이며, 가시나무 울타리와 모든 초장에 공공연하게 나타남으로써 스스로를 거대한 존재로 보이게 할 것이다. 그처럼 넓게 그 땅에 그들이 퍼져있게 될 것이다. 이 벌들은 가시나무 울타리와 초장에 꼭 달라붙을 것이며, 거기에서 아무런 방해도 없이 편히 쉴 것이다.

3. 그 나라는 심히 황폐해지고, 전반적으로 주민들이 없어진다(20절). "여호와께서 머리털과 수염과 발털을 미실 것이다." 하나님은, 문둥환자가 정결케 되었을 때, "모든 털을 민" 것처럼(레 14:8), 주민들을 모두 쓸어버리실 것이다. 그런데 그 일은 돈을 주고 세(貰) 내어온 삭도를 가지고 한다. 즉 하나님께서 세내어온(마치 그가 자기의 것을 갖고 있지 않는 것처럼, 그러나 하나님은 세 내어온 물건과 그를 위해 봉사하도록 그가 고용하는 자들에게 댓가를 지불하실 것이다. 겔 29:18, 19 참조) 또는, 아하스 자신이 필요해서 세 내어온 삭도로써 행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위해 고용한 자들로 당신의 파멸을 이루는 도구가 되도록 만드실 것이다. 여호와의 팔보다도 인생들의 팔을 더 의지하던 많은 사람들은 바로 그 인생들에게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또 인생을 의지하는 일은 비경제적인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신앙과 기도만 있다면 하나님의 은총을 값없이 쉽게 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4. 이 전반적인 인구 감소의 결과를 보자.

(1) 가축의 떼가 모두 소실될 것이다. 소와 양을 많이 가지고 있던 자들은 대적들에게 모두 빼앗길 것이며, 그 자신이 사용할 한 마리의 어린 암소와 두 마리의 양을 간신히 구해내고, - 그것이 비록 초라한 가축일지라도(21절) - 조금이라도 가질 수 있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할 것이다.

(2) 남게 된 소수의 가축들은 사육에 필요한 땅을 매우 넓게 차지하게 되기 때문에, "그 내는 젖이 많을" 것이며, 버터를 충분히 만들어 낼 수 있을 정도의 매우 좋은 품질의 젖을 낼 것이다(22절). 또한 사람들이 모자랄 것이므로 한 어린 암소와 두 양이 내는 젖이 전가족에게 충당될 것이다. 그 가족은 많은 하인들을 거느렸지만 많은 사람들이 죽어 이제 그 수가 적게 되었기 때문이다.

(3) 가축의 새끼가 죽게 될 것이다. 따라서(유대인들은 대개 그렇게 했다) 고기를 먹곤 했던 자들은 부득이 버터와 꿀만 먹고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먹을 고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나라에는 사람들이 매우 적어졌으므로, 남아있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충분히 먹을 수 있는 버터와 꿀이 있을 것이다.

(4) 좋은 땅이 이제는 온통 찔레와 가시로 덮일 것이다(23절).

1. 천 그루의 포도나무가 심겨져 있고, 소작인들이 그 값으로 천 세겔이나 은 1천개를 매년 지불하곤 했던 곳에는, 찔레와 가시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게 될 것이며, 모든 것이 침입자의 군대에 의해 황무케 되었기 때문에 지주를 위한 소득이나 소작료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비옥한 땅을 곧 불모지로 변하게 하실 수 있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그에게 좋은 포도를 내지 않고 들포도를 낸다면(5:4), 그가 포도나무를 찔레로 만드시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5) 농사에 쓰이는 도구가 전쟁 도구로 바뀔 것이다(24절). 온 땅이 찔레와 가시로 덮였으므로, 사람들이 추수를 위해 낫을 가지고 오던 땅으로, 그들은 이제 덤불 속에 있는 들짐승을 사냥하거나 약탈하기 위해, 숲 속에 숨어 있는 도적들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거나 또는 거기에 숨겨져 있는 뱀과 해로운 짐승들을 죽이기 위해 살과 활을 가지고 올 것이다. 이것은 그 쾌적하던 땅이 당한 매우 슬픈 변화를 시사한다. 죄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슬픈 변화를 초래하는가 보라.

(6) 울타리란 방책으로 널리 사용되어 오던 찔레와 가시나무는 모두 뽑혀서, 쓸모없는 것이 될 것이다. 찔레와 가시는 없어야 할 곳에서 풍성히 자라고, 있어야 할 곳에서는 하나도 없게 될 것이다(25절). 특별한 용도를 위해, 그리고 가축들을 찔레와 가시의 위험에서 보호하곤 했던 "모습으로 갈던 산" 도 다 허물어질 것이다. "수풀의 돼지가" 훼파하여 "그 담을 허물" 것이기(시 80:12, 13) 때문이다. 대부분의 땅에는 황소가 뛰어 놀게 될 것이며, 가축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죄와 그 저주의 결과를 보라. 그것은, 사람들의 끊임없는 관심과 수고에 의해 땅이 어느 정도 정돈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땅을 가시와 엉겅퀴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땅이 아무리 기름지고 훌륭하다 할지라도, 그것을 소유하고 집착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보라. 만일 그것이 조금만 소홀하게 다루어지고 경작되어지지 않게 되면, 또는 낭비가 심하고 게으른 상속인이나 소작인에 의해 혹사당하거나 그 나라가 전쟁에 의해 황폐케 되면, 그것은 곧 무서운 사막이 되어버릴 것이다. 천국은 그런 변화의 영향을 입지 않는 낙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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