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시편 13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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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1

포로의 슬픔(시편 137:1-6)

우리는 여기에서 시온의 딸이 구름에 덮여 바벨 의 딸과 거하는 것을 본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지만 눈물을 뿌리는 것이다.

Ⅰ. 그들은 일에 있어서나 영혼에 있어서도 슬픈 상태에 처해 있었다.

1. 그들은 이방의 땅이며 본국에서 거리가 먼 "바벨론의 여러강변"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전쟁 포로로 그기에 끌려 온 것이다. 바벨론 땅은 처음에 애굽 땅이 그러했던 것과 같이 그 백성의 속박의 집이 되었다. 그들의 정복자들은 그들을 거기에서 일시킬 목적으로 그들을 "강변"에 숙영케 했다. 그리하여 자기들의 갤리선(노예들이 젓는 전함: galley)에서 일하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가장 나쁜 장소로 거기를 선정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곳은 슬픈 영혼에게는 가장 적합한 장소가 되었을 것이다. 그들이 거기에 집을 지어야 한다면(렘 29:5) 그곳은 도시나 군집(群集)하는 장소가 아니라 그들이 눈물을 물줄기에 섞을 수 있는 고독한 장소 즉 강변에 짓는 것이 된다. 우리는 그들이 "그발 강"(겔 1:3)가 와 또 "을래 강변"(단 8:2)가에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2. 그들은 "앉아서" 그들의 불행을 숙고하면서 슬픔에 빠져 있었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속박 하에서 "혼자 앉아서 잠잠하고 입을 티끌에 대는 것"(애 3:28, 29)을 가르쳤다. "우리는 머므르기를 기대하며 만족해 하는 자들처럼 앉아 있었다. 그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3. 시온에 대한 생각으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를 놀라게 하는 문제에 의해서 우는 그런 갑작스런 고통의 눈물이 아니었고 그것은 생각이 깊은 눈물이었다(우리는 "앉아서, 울었도다").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렀다. 우리는 성전이 그 거룩한 산에 세워진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하나님의 집에 대한 그들의 애정이 그들의 집에 대한 관심을 삼키워 버렸다. 그들은 그들이 시온의 궁성에서 가졌던 시온의 옛날 영광과 만족을 기억하였다(애 1:7). "예루살렘이 난과 핍박을 당하는 날에 옛날의 모든 즐거움을 생각함이여"(시 42:4). 그들은 현재의 시온의 황폐를 기억하였고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는 때가 오면 폐함이 사라진다는 좋은 표징을 보며 "그 티끌도 연휼히 여기시는 것을" 기억하였다(102:13, 14).

4. 그들은 음악 기구들을 걸어 놓았다(2절).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도다."

(1) 그들은 오락과 접대를 위해서 수금을 사용했다. 그들은 이것들을 멀리 치웠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사용되어서는 안 되는 심판의 때이며 하나님께서 울고 통곡하라고 부르신 때이기 때문이다(사 22:12). 그리고 그들의 영이 슬프기 때문에 수금을 사용할 마음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들은 저희의 슬픔을 덜기 위해서 악기를 사용할 목적으로 수금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슬픔이 너무 커서 실험을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음악은 어떤 사람들을 슬프게 만들어 준다. 슬픈 마음에 노래를 부르는 자가 마치 질산칼리에 식초를 치는 것과 같다.

(2) 그들이 하나님의 예배에 수금 즉 레위인들의 수금을 사용하였다. 그들은 이것을 버리지 않고 다시 사용할 때가 오기를 희망했다. 단지 현재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곁에 둔 것뿐이다. 하나님은 수금을 중지시키고 "너의 절기를 애통으로, 너희 모든 노래를 애곡으로 변하게"하라고 명하셨다(암 8:10). 모든 것이 때를 따라 아름답다. 그들은 저희의 수금을 숲 속이나 구멍에 감추어 두지 않았다. 그것을 보이는 곳에 걸었다. 그것을 봄으로써 이 슬픈 변화에 대처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무대로 그들은 이렇게 한 점에서 잘못한 것 같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철을 타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든 일에 감사해야 하는 것"이 그의 뜻이기 때문이다(사 24:15, 16).

Ⅱ. 저희의 대적자들은 그들이 이러한 슬픈 상황에 있었을 때에 악기를 남용하였다(3절). 그들이 자기들의 나라로 "그들을 사로잡아" 가고 포로의 땅을 "황폐케"하고 그들로부터 적은 것을 탈취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그들의 괴로움을 더하게 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모욕을 주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기쁨과 노래를 청했다."

1. 이것은 매우 야만적이며 비인도적인 것이었다. 불행에 처한 적이라 할지라도 긍휼히 여기고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고난 중에 있는 자들을 나무라거나 곡조를 잃어버린 자들에게 이전의 즐거움으로 혹은 현재의 슬픔으로 기뻐하라고 응징하는 것은 비열하고 더러운 정신이라고 논의된다. 이것은 고난받은 자들에게 고난을 더하는 것이다.

2. 그것은 매우 모독적이며 불경건한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시는 "시온 노래"외에 다른 노래를 청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러한 요구에서 하나님을 벨사살로 간주했다. 그 때에 그는 성전의 접시에 있는 포도주를 마셨다. 그들의 대적자들은 "저희의 안식일을 조롱했다"(애 1:7).

Ⅲ. 그들은 인내를 가지고 이러한 남용을 참았다(4절). 그들은 수금을 멀리 두고 다시 잡으려 하지 않았다. 자비를 베풀도록 환심을 사기 위해서 수금을 켜지 않았다. 불경하게 조롱하는 자들에게 기쁨을 주지 말아야 하고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저희의 어리석음을 따르는 미련한 자들에게 응하지 않으려 했다. 다윗은 "악인이 그 앞에 있을 때에" 신중하게 처신하여 "선한 말도 발하지 아니하였다"(시 39:1, 2). 그는 말한 것이 우습게 되며 조롱거리가 된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들이 제시한 이유는 매우 겸손하고 경건하다.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 그들은 우리가 이렇게 큰 슬픔 중에 있는데 어떻게 노래할 수 있을까? 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것이 전부였다면 아마도 그들은 주인들이 억지로 노래를 시킬 때에 부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여호와의 노래"다. 그것은 거룩한 것이다. 그것은 성전의 예배에만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상들이 있는 이방의 땅에서 그것을 가히 부를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 합당한 어떤 것을 가지고 일상적인 쾌락에, 더욱이 모독적인 쾌락에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때때로 종교적인 말에 의해서는 물 종교적인 침몰에 의해서도 영광을 받으신다.

Ⅳ. 그들은 바벨에 있을지라도 계속적인 사랑으로 그들의 제전(祭典)의 도성 예루살렘을 기억했다. 저희 대적자들이 예루살렘을 과장해서 말하거나 심지어는 더러운 말을 해서 희롱할지라도 예루살렘에 대한 그들의 사랑은 조금도 감소되지 않았다. 그들이 그렇게 조롱해도 결코 조롱당하지 않을 것이다(5, 6절).

다음과 같은 것을 관찰해 보자.

1. 이 경건한 포로들이 어떻게 예루살렘에 대한 애정을 유지했는가?

(1) 그들의 머리는 그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이 항상 그들의 마음 속에 있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잊지 않았다. 그들이 예루살렘을 오랫 동안 떠나 있어도 잊지 않았다. 그들 중에 많은 자가 기록 것과 성서에서 읽은 것 외에는 예루살렘을 본 적도 없고 어떤 것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손바닥에 새겨졌다. 그들 앞에 그 파멸이 계속 닥쳐 온다고 해도 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때가 이르며 예루살렘이 회복되리라는 약속에 대한 그들의 신앙의 증거였다. 그들은 일상기도에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이 예루살렘을 잊을 수 있었겠는가?



(2) 그들의 마음은 그것으로 가득 찼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좋아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루살렘을 기억했고 그것을 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자들은 그를 위해서 예루살렘을 그들의 즐거움으로 삼고 가장 큰 즐거움이 무엇이라 할지라도 그것보다 예루살렘을 더 좋아한다. 그것은 그들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다. 경건한 사람은 어떤 개인적인 만족이나 희열보다도 공동의 유익을 더 좋아할 것이다.

2. 그들이 이러한 애정을 어떻게 견고하게 지키기로 결심하였는가? 그들이 그것을 실패하였다면 스스로 자신들을 불행의 엄숙한 저주로 표현했을 것이다. 내가 나의 조국의 종교를 잊고서 바벨론의 아들들을 기쁘게 하고 바벨론의 신들을 찬양하기 위하여 내 노래와 수금을 사용한다면 나로 하여금 노래하며 수금을 켜는 것을 영원히할 수 없게 하소서.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지로다"(노련한 음악가의 손은 그 손이 떨리지 않는 한 그 재주를 잊지 않는다)아니, 내가 어디 있든지 예루살렘을 위하여 선한 말을 하지 못한다면 "내 혀가 내 입 천장에 붙을지로다." 그들이 바벨론 사람들 가운데서 시온의 노래를 감히 부르지 않을지라도 그 노래를 잊을 수 없다. 현재의 속박이 벗겨지자 마자 그들은 오랫 동안 사용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전과 같이 쉽게 노래할 수 있을 것이다.

 

137:2 없음.

 

137:3 없음.

 

137:4 없음.

 

137:5 없음.

 

137:6 없음.

 

137:7

에돔과 바벨론의 멸망을 전망함(시편 137:7-9)

바벨론에 있던 경건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의 파멸에 대한 생각으로 고심하고서 여기에는 고하고 무자비한 대적자들의 멸망을 전망하면서 기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복수의 정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그 나라의 영화를 향한 거룩한 정열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Ⅰ. 에돔 사람들이 실히 고려되고 예루살렘의 파괴에 참여한 모든 다른 나라들의 고려될 것이다. 그들은 도왔고 선동했으며 "고난을 더하였고"(슥 1:15) 승리감에 차있었다. 그리고 "예루살렘이 해 받던 날에, 훼파하라 훼파하라 그 기초까지 훼파하라"고 말했다. "무너뜨리라 무너뜨리라. 돌 위에 돌이 남아 있지 않도록 하라"고 외쳤다. 그들은 이미 자극의 필요 없을 정도로 난폭하게 된 갈대아 군대를 더욱 격렬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이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수치를 주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제거되어야 할 백성으로 간주한 것이다. 그 때에 저희의 이웃 나라들은 그들에게 그렇게 악의를 품었다. 이 모든 것은 야곱에 대한 에서의 옛 반감의 결과였다. 왜냐하면 야곱이 장자권과 축복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그것은 여자의 자손과 뱀의 후손 사이에 있었던 더욱 고대의 적대감의 결과였다. "여호와여 기억하소서"라고 시편 기자는 말한다. 그것은 그들에 대한 그의 정의에 호소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힘이 있다고 할지라도 스스로 복수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오히려 우리는 "복수는 내게 속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이에게 그것을 맡겨야 할 것이다. 재난을 보고 기뻐하는 자들, 특히 예루살렘의 재난을 보고 기뻐하는 자들을 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선한 백성들을 박해하는 자들과 연합하고 그들을 동요하며 그들과 함께 앉아서 그들이 하는 것을 기저하는 자들은 확실히 그 대가를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에 대해서 그것을 기억하실 것이다.

Ⅱ. 바벨론이 주요 대상이다. 바벨론은 떨리는 잔과 그 잔재를 마시는 보응을 받게 될 것이다(8, 9절). "여자 같은 멸망할 바벨론아!" 진리의 성경에 의해서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너는 교만하고 확고하다. "너는 멸망당할 것이다. 혹은 (하몬드 박사가 해석하는 대로 하면) 너는 멸망자이다. 파괴자들은 파괴당할 것이다(계 13:10). 그리고 아마도 "멸망의 아들"(살후 2:3)이라고 불리운 죄의 사람, 신약 바벨의 머리는 이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 같다. 완전한 멸망으로 예언 바벨의 멸망(너는 "멸망 당할 것이다")은 다음과 같이 언급되었다.

1. 정당한 멸망으로써 바벨론은 그 값을 치뤄야 할 것이다. 너는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받을 것이다. 우리가 너희에게 당한 것처럼 파괴자들에 의해서 야만적으로 이용될 것이다(계 18:6 참조). 권세를 가졌을 때 자비를 보이지 않은 자들로 하여금 자비를 기대하지 말도록 해야 한다.

2. 완전한 멸망으로써 바벨론의 아주 어린 자라도 강풍이 닥치고 모두 칼날 앞에 서게될 때 포악하고 무자비한 정복자에 의해서 던져지게 될 것이다. 이 어린 것들이 멸망하게 되면 아무도 도망할 수 없다. 그들은 다음 세대의 근원이다. 그들이 근절된다면 파멸은 전체적인 것이 될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의 멸망과 같이 종국적인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마치 멧돌이 바다에 갈아 앉고 떠오르지 않는 것과 같다.

3. 그 도구에 대한 영광을 반영하는 파멸로써 그것을 행하는 자는 유복할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종," 그의 "목자," 그의 "기름 부은 자"(사 44:28; 45:1), 고레스를 부르시며 그의 "거룩히 구별한 자"(사 13:3)로 그 일에 쓰이는 용사들을 부르신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의 확장을 위해 길을 예비한다. 어떤 방법으로든 그앞에 봉사하는 확장을 위해 길을 예비한다. 어떤 방법으로든 그 일에 봉사하는 자들은 복이 있다. 신약에 바벨론의 멸망은 성도들의 승리가 될 것이다(계 19:2)

 

137:8 없음.

 

137:9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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