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시편 09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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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1

모세의 기도(시편 90:1-6)

이 시편에는 모세의 기도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모세 때부터 시편이 수집이 시작되기까지 이 시편이 어디에 또 몇 권에 보존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신적인 영감에 의하여 이 시편은 특별한 보호 아래서 현존하게 되었다. 이것은 아마 야셀의 책이나 여호와의 전쟁서에 기록돼 있었을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기도하도록 가르쳤고 그들이 여호와께로 향할 때에 사용할 수 있는 말들을 저희 입에 넣어 주었다. 모세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리워지는데, 이것은 그가 선지자였고 또 선지자의 조상이었으며 위대한 예언자의 걸출한 모형이었던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받는다.

Ⅰ. 언제 어느 때라도 자기의 백성을 돌보아 주시고 오늘날도 우리를 돌보아 주시는 하나님께 대하여 찬양을 드리라는 것(1절). "여호와여, 주께서는 대대로 우리에게 주거(住居)나 거처 또 피난처나 도움이 되어 주셨나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고, 하나님께서는 자기들을 팽개치겠다고 위협하신 이상, 그들은 자기들이 조상에게 보여 주신 그의 이전 친절을 강력히 호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가나안은 장막 속에서 거처하던 그들의 조상, 족장들에게 있어서는 순례의 땅이었다. 그러나 그때도 하나니은 그 족장들의 거처가 되셨으니 그들이 어디를 가든 하나님 안에 있는 그들에게는 그곳이 집에 있는 것같이 편안하였던 것이다. 애굽은 많은 세월 동안 그들에게 속박의 땅이었으나, 그 때에도 하나님은 그들의 피난처였다. 저 불쌍한 피압박 민족이 생명을 보존하여 존재를 유지하였던 것도 바로 하나님 안에서였다. 진정한 신자들은 하나님 안에서 편안하게 지내는 법이며 또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만나는 모든 수고와 시련을 무마해 주는 그들의 위로가 된다. 우리는 그 안에서 편안히 쉴 수 있으며 우리의 거처에 숨듯 하나님 안에서 우리 몸을 보호할 수 있다.

Ⅱ. 하나님의 영원성에 대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2절). "산들이 나오기 전, 하나님께서 세상 진토 중 가장 높은 부분을 만들기 전 "(잠언 8장 26절에 표현된 대로), "땅이 진통을 겪기 전," 혹은 우리가 해독하는 대로,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즉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주께서는 존재하셨나이다.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주는 영원하신 하나님으로서 당신의 존재는 시작도 없고 마치는 시간도 없으며 계속이나 운행으로도 측량할 수 없고 날의 시작이나 생명의 종말이나 시간의 변화도 없이 "어제와 오늘과 내일" 그리고 "영구히 꼭 같으신" 분이십니다. 우리 자신도 언제인가는 사멸해야 하는 존재이며 우리 친구들도 꼭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생기는 불평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불멸성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우리는 죽어가는 피조물이며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리는 모든 위안물도 죽으면 없어질 위로이지만 하나님은 영존하시는 하나님이시며 그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자들은 그가 영원하신 분임을 알게 될 것이다.

Ⅲ. 인간을 지배하시고 인간을 자기의 마음대로 처분하실 수 있는 불가항력 적인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있다(3절). "주께서는" 원하시기만 하면 흙으로 된 집, 육체를 말씀 한 마디로 "티끌이 되게 하시나이다." 그리고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고 말씀하셨나이다."

1. 하나님이 질병이나 기타의 고난을 통하여 인간을 파멸케 하실 때에는, 그가 인생을 자기에로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것이다. 즉 죄를 뉘우치고 새로운 생명을 받으라고 부르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때때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저버렸던 내게로 돌아오라"(렘 4:1)

2.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파멸을," 곧 죽음에로 몰아 넣으시겠다고 경고하실 때에는, 인생들이 이미 죽음의 선고를 받은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하나님은 인생의 생명을 다시금 회복하시고, 옛 번역대로, 다"시금 생명과 건강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무덤으로 내려 보내시기도 하시고 다시 거기서 올라 오게도 하시는 분이시다 때문이다.

3. 하나님이 인생을 티끌로 만들어버리신다면, 그것은 저 일반적 선고에 따른 것이다. 즉 누구나 돌아오라. 인생들아, 너희 처음 원리로 돌아오라. 즉 애초의 모습대로 몸은 땅으로 돌아가라("티끌은 티끌로," 창 3:19). 그리고 혼은 그것을 주셨던 하나님께로 돌아가라"(전 12:7)는 것이다

4. 하나님은 모든 인생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지만, "너희 인생들아 돌아오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그것은 저 총괄적 부활 때 있을 일이다. "그 때에는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 때 너희가 나를 부리라. 그러면 내가 응답하리라"(욥 14:14, 15). 너희는 나를 돌아오라고 간청하리라. 그러면 내가 돌아가리라. 그때 몸과 혼이 다시 돌아와 연합될 것이다

Ⅳ.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불균형을 시인하고 있다(4절). 어떤 족장들은 근 천 년이나 살았다. 모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회상해 냈다. 그러나 그들의 장수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비한다면 도대체 뭐란 말인가? "우리에게 있어서의 천 년이란 긴 기간이다. 우리는 그렇게 긴 기간 동안 살 기대를 가질 수 없다. 또 만일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동안의 일을 기억해 있을 수 없다. 그러한 긴 기간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어제와 같으며 하루같이 새롭다. 아니 그것은 밤의 한 경점같다"-이것은 3시간을 가리킨다.

1. 일천 년이란 가간도 하나님의 영원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한 시간이 일천 년에 비해서 아무 것도 아닌 그 이상으로, 하루 시간도 안 되는 것이다. 족장들의 장수도 하나님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마치 아기의 생명(이것은 나자 마자 죽는다)이 족장들의 장수에 비교됨과 같다.

2. 과거든 미래든 일천 년 동안의 모든 사건은 바로 어제 있었던 일, 아니 한 사간 전에 있었던 일처럼 영원한 정신의 소유자에게는 늘 새롭다. 하나님은 저 큰 날(심판날)에 "티끌(파멸)로 돌아갔던" 자들에게 "돌아오라-너희죽은 자여, 일어나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기대를 가진지 오래 되었으나, 아직도 실현되지 못했다하여 부활론에 어떤 이의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천만 년이 하루 같으므로, 그것 때문에 골치 앓지 말기로 하자. (Nullum tempus regi)-즉 왕에게는 어떤 기간이고 같아서. 이런 뜻으로 베드로 후서 3장8절이 이 말씀을 인용했다.

Ⅴ. 인생의 무상을 보았다(5,6절). 인생을 바라보라. 그러면 우리는 이런 것을 알 수 있느니라.

1. 인생의 목숨은 죽어가고 있는 목숨이다. "주께서는 인생들을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즉 인생들은 끊임이 없다. 인생들은 그 물줄기와 함께 옮겨져 간다. 우리는 나자마자 죽기 시작한다. 매일의 생명이 죽음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홍수가 났을 때처럼, 불가항력적으로 순식간에 쓸려가 버리기도 한다. 홍수는 그 앞에 닥치는 모든 것을 쓸어버린다. 아니면 마치 저 옛 세상이 노아의 홍수와 함께 씻겨져 버린 것과 같이 되리라. 하나님이 비록 세상을 그런 식으로 다시 멸망시키지는 않겠다고 하셨지만, 죽음이란 것이 바로 끊임없이 닥쳐오는 대 홍수인 것이다.

2. 인생은 꿈 속의 생과 같다. 사람들은 홍수처럼 쓸려 갈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저희가 자는 것 같다"고 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무상함을 제대로 모른다. 무서운 영원히 닥쳐오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 자는 사람처럼, 인생들은 자기들에게 중대한 것을 약속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죽음이 그들의 잠을 깨우게 되면 그들의 쾌락은 비로소 끝장이 나고 마는 것이다. 잠자는 사람에게처럼, 세월의 흐름은 인간들에게 실감을 주지 못한다. 그리고 세월이 다 지나간 다음에는 꿈처럼 인생은 허무해지고 만다.

3.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풀의 생명처럼, 잠시 동안에 지나가는 생명이다. 아침에 피였던 풀도 저녁이면 잘려져서 색깔이 바래지고 그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고 만다. 죽음이란 조만간 우리들을 바꾸어 놓을 것이다. 아마 순식간에 올 것이다. 죽음이 잠시동안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그 변화는 정말로 엄청난 것이다. 인생은 그 최절정에 달했을 때에라도, 풀과 같아. 풀은 약하고, 천하고 상하기 쉽다. 노년이란 겨울이 오면, 인생도 곧 시들어버린다. 그러나 풀이 한 여름에도 상할 수 있듯이, 인생도 때로는 질별이나 재난으로 인해서 때없이 쓸어질 수 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다."

 

90:2 없음.

 

90:3 없음.

 

90:4 없음.

 

90:5 없음.

 

90:6 없음.

 

90:7

주께 복종하라 시편(시편 90:7-11)

앞에서 모세는 덧없는 인생의 모습을 일반적으로 말했다. "인생은 잠과 같으며""풀과 같다"고 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르치고 있다. 그가 가르치고 있는 것은, 그들이 특별한 의미에서 선고받은 그 죽음의 정당성-그것은 그들의 죄 때문에 그들에게 내려진 것이었다-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라는 것이다. 그들이 죽어야 할 운명의 일반성을 지닌다는 사실만으로는 불충분했다. 우리 이스라엘 인들은 "소멸되며 놀라나이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날이 이미 지나갔나이다.

Ⅰ. 그들이 불행에 빠진 원인은 하나님의 진노하심 때문임을 인정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소멸되며, 놀라나이다." 그런데 그것은 "주의 분내심," "주의 분노 때문(7절)이옵니다." "우리의 모든 날은 주의 분노 속에 다 지나갔나이다"(9절). 때로 성도들의 환란은 단순히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오는 수도 있다. 욥과 같이 말이다. 그러나 죄인이든 선인이든 죄 때문에 오는 책망은 하나님의 분노에서 오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악을 잘 알고 계시며, 어느 누구의 죄보다 더욱 노하신다.

우리는 흔히 죽음이란 인간의 본성에 속한 것이라고 하여 무시하기가 일쑤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인간의 본성이 원래적인 순결과 정직을 지속했더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이란 하나님의 저의에 대한 빚이요, 율법에 대한 빚이다 "죄가 세상에 들어왔을 때, 죽음의 죄 때문에 생겨났다."

우리는 본성의 타락, 연륜의 질병, 혹은 어떤 괴로운 질병 때문에 소멸되고 있지 않는가? 우리는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분노 때문이라고 여겨야 한다. 우리는 놀라지 않는가? 죽음의 공격이 너무나 갑작스럽기 때문에! 그것도 역시 하나님의 분노의 산물이다. 하나님의 분노는 하늘에서 "불경스럽고 불의한 인간들"에게 내린다

Ⅱ. 그들에게 그들의 죄를 고백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바로 그 죄가 하나님을 격분케 했던 것이다(8절). "주는 우리의 죄악, 우리의 은밀한 죄악까지도 주 앞에 두고 계시나이다." 하나님은 "나를 격분케 하지 말아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상하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셨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격분케 했고, 이러한 중한 선고가 내렸어도 하나님이 옳다고 시인해야만 되게 생겼다.

1. 그들이 하나님을 공공연히 경멸하고 도전했기 때문이다. "주는 우리의 죄악을 주 앞에 놓아 두셨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의 불신앙과 원망, 하나님의 힘에 대한 불신과 그 좋은 땅에 대한 경멸을 목격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형을 선고하기 전에 미리 이 사실을 그들에게 통고하셨던 것이다. 이 죄가 그들에게 향한 하나님의 진노의 불을 타오르게 만들었고, 그들이 받았던 축복을 잃어버리게 했던 것이다.

2. 그들의 보다 은밀한 죄가 하나님을 저버렸기 때문이다. "주는 우리의 은밀한 죄를 아셨나이다(이런 죄는 마음보다 더 멀리 가지 않으며, 그런 죄가 모든 악행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 주의 목전에 두셨나이다. 즉 주께서 이 죄를 발견하셨나이다. 그리고 이것을 헤아리시고 그 죄를 무시하고 있던 우리에게 그것을 알리셨나이다." 은밀한 죄라도 하나님께는 알려지며, 심판을 받게 된다. 마음으로 애굽에 돌아간 자들, 마음 속에다 우상을 세워 둔 자들은 배신자들이나 우상 숭배자들로 취급될 것이다. 자기들의 죄악을 은폐하려는 자들은 어리석으니, 그들이 자기들의 죄를 은폐할 수 없음이로다.

Ⅲ. 그들에게 자신들은 죽어가고 있는, 사라져가는 존재임을 의식하며, 자기들의 생이 영원하거나 즐거운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들에게 이미 선고된 그 선언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8절). "우리의 모든 날들은" 마치 "주의 분노 속에서," 곧 "주의 징계" 의 표징 속에서 "사라짐" 과 같나이다. 우리가 우리의 연수(年藪)를 몽땅 빼앗긴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평생이 일순간에" 지나가나이다. 그들이 광야에서 보낸, 그 후의 38년의 기간은 거룩한 역사의 소재는 되지 못했다, 광야 제2년부터 제40년까지의 기간에 있었던 일들은 조금밖에, 또는 조금도 기록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이 애굽에서 나온 후, 그 세월은 완전히 덧없이 지나갔고, 역사의 소재가 될 가치가 조금도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단지 "들은 이야기처럼"(흠정역) "일순간에"(한글 개역) 지나갔다. 그 어간의 세월은 마치 이야기처럼 덧없이 지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소멸되어가고 있는 동안에도 다른 한 세대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들이 애굽에서 나올 당시에는, "지파 중에 약한 자가 하나도 없었다" (시 105:37). 그러더니 이제는 그들 모두가 연약해졌다. 가나안 땅에서 번영의 영광을 누리리라 했던 그 즐거운 전망은 이제 광야에서 권태롭고 비참하게 죽고 말리라는 우울한 전망으로 대치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일생은 겨울 이야기처럼 부적절한 것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말은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다. 즉 "우리는 우리의 일생 중, 매해를, 그리고 전 생애를 마치 이야기처럼 일순간에 다 써버리고 말았도다-즉 (어떤 자는 이렇게 해석한다) 겨울철 우리의 입김처럼 순식간에 사라지게 하였도다-(또 어떤 자는 이렇게 해석한다) 일단 말하고 나면 즉시 허공에 사라지는 말과 같이 사라졌도다"라는 말이다. 한 해를 보내는 것이 마치 한 토막의 이야기를 하는 것같이 지나간다. 지나가 버리면 그 한 해는 말로 되어 버린 이야기 한 토막과 같다. 우리의 생애중 어떤 해는 유쾌한 얘기 같으나 또 어떤 해는 가장 혼란된 비극의 얘기와 같다. 그러나 다 해 보았자 그것은 짧고 덧없는 것이다. 많은 시간이 걸린 사건이라도 말로 하려면 잠깐인 것과 같다. 우리가 지껄인 말을 다시 생각해 내지 못하듯이, 우리의 생애도 지나놓고 보면 더 이상 기억되지 않는다. 우리의 잘못과 유행으로 잃어버리고 낭비해버린 시간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한탄을 사게 된다. 우리는 급히 업무를 수행하되 조심스럽고 부지런히 해야 하듯, 그렇게 우리의 시간을 보내야만 한다. 그러나, 오호라! 우리들은 우리들이 시간을 마치 얘기를 하듯 안일하고 부심하게, 부주의하게 보내 버렸다. 우리의 일생이 "마치 얘기처럼"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러나 그 연한은 얼마란 말인가? 그 내용이 헛되듯, 그 수효(연한)도 보잘것 없다(10절). 기껏해야 7,80이다. 이 7,80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1. 광야에서 살던 이스라엘 인들의 수명이다. 애굽에서 나온자들을 20세 이상으로 계수하였는데, 그 때 계수된 모든 자들은 그 후38년이 못되어 모두 죽어버렸다. 그들은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자들만을 계수했는데, 그것은 그들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대개 20-40세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은 모두 80이 되기 전에 죽은 셈이다. 대다수가 60이 못되어 죽었고, 아마 더 일찍 죽은 자도 많았으리라. 이러한 수명은 그들의 조상들의 연수에는 크게 모자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70내지 80세까지 살았던 자들에게도 멸망이 선고되었으므로 광야를 지나는 동안 그들의 처지는 항상 우울에 가득찬 절망뿐이었고, 그들의 정력이나 목숨은 "수고와 슬픔"뿐이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가나안의 기쁨을 생각하여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죄란 것이 무슨 짓을 하는가 보라.

2. 아니면 모세 시대 이후의 인간 일반의 수명으로 볼 수 있다. 모세 이전에는 사람이 100년 내지 근 150년 살았던 것이 보통이다.그러나 7,80이 일반적인 연한이 된 이래로는, 그 나이를 넘는 자가 거의 없었으면, 대다수는 그 나이도 되기 전에 죽었다. 70까지 산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마땅히 인간이 기대할 수 있는 만큼의 인생을 살다가 간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을 영원과 비교해 본다면 얼마나 짧은 기간인가! 모세는 하나님의 계시가 구전되어 오던 것을 처음으로 기록한 사람이다. 이제는 세상에나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으므로, 과거처럼 인간이 그렇게 오래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의 체질이 강하여 80까지 살았다 하면, 그의 생애는 별로 큰 즐거움이 못된다. 단지 그들의 불행이 더 연장된 것뿐이요, 죽음이 더욱 더디 온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그들의 생애는 수고와 근심뿐이다. 오래 살았다하여 그것이 즐거운 것은 없기 때문이다.

또는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우리의 연수는 70이요, 어떤 자의 연수는 그 강한 체력 때문에 80이다. 그러나 우리의 연한의 폭(힘을 말한 단어는 원래 폭을 뜻하기 때문이다)은, 곧 생애의 길이는-유아기부터 노년까지의 길이는-단지 수고와 근심이라." 우리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밥을 먹는다. 우리의 일생은 수고롭고 고생스럽다. 아마가 생각하는 최전성기에도 "그 연한은 곧 잘려지고 우리는 사라진다." 반나절도 더 살지 못한다.

Ⅳ.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분노 때문임을 인식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11절). "누가 주의 분노하심의 권능을 알리요?"

1. 아무도 그것을 완전히 깨달을 자는 없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분노를 두려워하면서 말하고 있으며, 그 권능의 광대하심에 놀라고 있다. 하나님의 분노의 권능이 얼마나 광대하고 심대하게 미치는지 뉘 알리요? 타락한 천사들은 자기들의 경험으로써 하나님의 분노의 권능을 알고 있었다. 지옥의 저주받은 죄인들은 그것을 앓고 있다. 그러나 우리 인생들 중 누가 그것을 알며, 말할 수 있으리요?

2. 하나님의 분노의 권능을 중히 여기는 자도 거의 없다. "누가" 하나님의 분노에 대한 지식을 활용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잘 "알고 있으리요?" 죄를 비웃고 그리스도를 경히 여기는 자들은 하나님의 권능이 얼마나 되는지 필경 모르고 있는 것이다. "주의 무서움에 의하면, 주을 분노하심도 또한 그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분노는 가장 사려깊은 자들이라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그 어느 때보다도 하나님의 분노에 대해서 두려워 하게 하자. 그것에 대한 공포는 아무리 커도 지나치게 커질 수는 업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말씀을 통해서 자기의 분노를 실제 이상으로 과장해서 말씀하시지는 않으셨다. 아니 저 세상에 가서 느끼는 것은 이 세상에서 느끼는 것에 비하면 무한히 더 나쁘다. "우리 중에 누가 저(사람을) 불사르는 불과 함께 거하리요?"

 

90:8 없음.

 

90:9 없음.

 

90:10 없음.

 

90:11 없음.

 

90:12

자비를 구하는 기도(시편 90:12-17)

이것은 앞에 나온 명상과 시인(감사)에 근거한 간구의 기도이다. "환란을 당한 자 있는가?" 그는 이렇게 기도하는 것을 배우게 하라. 여기에는 4가지를 기도하라는 지시가 있다.

Ⅰ. 저들이 지금 처하여 있는 고통스런 경륜을 잘 이용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기도이다. 우리의 날 수를 짧게 명하였사오니, "여호와여, 우리에게 우리의 날수를 셀 줄 알게 가르치소서(12절). 여호와여, 은혜를 베푸사, 우리가 세상에 사는 날이 얼마나 짧은가를 올바로 생각할 수 있게 하옵소서". 다음 사실을 명심하자.

1. 자기의 영혼이 언제 떠날지, 그 밤을 알지 못하는 자는 계산을 잘못한 것이다. 그러한 계산 착오가 없도록 "자기의 날 수를 셀 줄" 안다는 것은 정말로 훌륭한 기술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의 단명과 불확실성, 그리고 거기에 항상 죽음과 영원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업무와 우리의 날수를 비교해 보아서, 이제는 소비할 시간이 남아있지 않다는 알고 배로 부지런히 업무를 수행해 나가야겠다.

2. 이러한 산술을 배우려는 자들은 하나님의 교훈을 간구해야 하며,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하고, 하나님의 성령께서 임하셔서 바로 깨닫고 생각할 수 있도록 가르쳐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3. 우리가 우리의 날 수를 세어 봄으로써, 우리의 마음이 참된 지혜로, 곧 진정한 경건의 훈련을 쌓을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의 날 수를 올바로 계산한 거시된다.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곧 지혜로운 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온 마음을 기울여야 하고, 또 그래야 할 가치가 있는 일이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얼마나 이 세상에 유하며, 언제 이 세상을 떠날지 모르는 불확실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종종 생각해 보는 것이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Ⅱ. 그들에게 내린 하나님의 분노를 제거해 달라는 기도이다. 이미 선고가 내려졌고, 돌이킬 수 없게 되었으며, 거기에 무슨 구제책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오직 광야에서 죽어야만 했다. "그러나, 오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주께서 우리와 화해해 주시고 주의 종들에게 긍휼을 베푸소서(13절).이 비극의 소식이 끝난 다음에는 다시 우리를 위로하리라는 평화의 소식을 보내 주소서. 언제주의 은총의 표징이 우리에게 다시 나타나게 되리이까! 우리는 주의 종들이요, 주의 백성이옵니다(사 64:9). 언제 주께서 우리에 대한 주의 분노를 변경하시리이까?" 이 기도와 저들의 회개에 대한 응답으로써(민 14:39, 40),(그 다음장, 민수기 15장에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희생 제사에 대한 율법을 계속 말씀해 주셨던 것이다(민 15:1 이하).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의 종들에게 긍휼을 베푸셨다는 증거이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여버리고 싶었더라면, 저들에게 이같은 일을 보여 주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Ⅲ. 하나님의 은총이 그들에 다시 돌아오는 위안과 기쁨을 달라는 기도이다(14,15절).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기도했다. 그들은 감히 자기들의 어떤 위로를 내세우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 하나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는 것은 우리가 언제나 "아멘" 해야 할 기도이다. 우리는 일찍부터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자, 때맞게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자. 그러면 하나님의 "너그러운 자비는 새벽에" 곧 우리의 인생의 황금기에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이다."(6절).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비로소 찾을 수 있는 그런 참된 만족과 행복을 위해서 기도하자(4:6, 7). 하나님의 사랑만으로 만복을 누리는 은혜로운 자가 있다면, 그는 그런 만족을 누릴 것이요, 풍족히 누릴 것이며, 그것으로 만족하여 아무 것도 부족할 것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이 기도에는 두 가지가 호소되고 있다.

1. 하나님의 자비는 장래의 기쁨의 완전한 샘물이 될 것을 호소했다. "주의 은혜로 우리를 만족케 하소서, 우리가 스스로 편히 쉴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가 주의 분노 아래 있는 동안은 한 번도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광야에서 보내야 할 우리의 모든 날 동안에도 평안하게 하소서."

하나님을 자기들의 최고의 기쁨으로 삼는 자들은 그 기쁨이 충만케 될 것이다(요일 1:4). 또한 이 눈물 골짜기에서도 그 기쁨이 마르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들에게 기쁨이 없어졌다면, 그것은 본인들의 잘못이다 . 하나님의 자비는 고난 속에서도 그들에게 지극한 기쁨을 선사해 주려 하고 있으며, 다른 아무 것도 그것을 그들에게서 빼앗을 수 없기 때문이다.

2. 그 기쁨이 자기들이 이전에 겪은 고충과 상쇄할 수 있기를 호소했다. "주께서 우리로 고통하게 하신 그 날 수에 따라서(그만큼) 우리로 즐겁게 하소서, 주의 은총으로 인한 우리의 기쁨의 날 수가 주께서 보이신 주의 분노를 당한 우리의 날 수만큼 많게 하소서, 그리고 그 때 우리가 슬퍼했던 것만큼 이제 우리도 기뻐하게 하소서. 주여, 주는 하나로 다른 하나를 대신하게 하시나이다(전 7:14). 우리의 처지가 바로 그러하게 하소서. 그 기쁨이 이제까지 우리가 마신 그 고통의 잔을 능가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에 소원의 잔을 주소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사랑이야말로 자기들이 겪은 온갖 환란을 능히 보상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Ⅳ. 하나님의 역사가 자기들 속에 현저하게 계속되기를 기도한 것이다(16,17절).

1. 그들에게 하나님의 역사를 계속하심으로써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 주시기를 바랐다. "주의 행사를 주의 종들에게 보이소서. 주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시사, 우리를 주께로 이끄시고, 주에게 알맞는 자들로 삼으셨다는 것을 나타내소서."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작용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위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분명히 나타나 있는 그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섭리의 작용이 우리에게 명백해지기를 바랄 수 있다. "주의 역사(행사)를 밝히소서. 그리고 그 속에서 주의 영광을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에게 보이소서."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는 기도에 있어서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기도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 자신만이 아니라, 우리의 자녀들도 생각해야 한다. 그들도 우리와 같이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는 형상으로 변화되기를 염원해야 한다.

아마 이 기도 속에서 그들은 자기들과 자기 후손들을 구별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에게 준 최근의 전갈에서 그들과 후손들을 구별하셨기 때문이다(민 14:31 . "너희의 시체는 광야에 쓰러질 것이다. 그러나 너희의 자녀들은 내가 가나안으로 인도하리라").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여호와여, 주의 행사를 우리에게 보이사, 우리로 개심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더 좋은 성질을 갖게 하소서, 그리고 주의 영광을 우리의 자녀들에게 보이소서, 우리는 그 은택을 잃고 말았으나,.그들에 대한 주의 약속을 실행하심으로써 그리하소서."

2.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힘을 주사, 그 일에 대한 그들의 역할을 다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고 있다.

(1) 주의 행사를 보이심으로써, 하나님이 그들에게 호의를 보이시기를 바라고 있다. "주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한글 성경은 난외에 있음-역주)이 우리에게 임하소서."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호의를 보이신다는 것을 나타내소서라는 것이다. 우리로 주의 규례를 지키게 하옵시고, 주의 규례와 더불어 주의 현존의 표징이 늘 우리에게 함께 있게 하옵소서(혹자는 그렇게 해석한다).

우리는 이러한 기도를 우리 자신의 만족이나 또 우리의 위안을 위한 기원으로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성질은 곧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아름다움"이다. 우리의 모든 언행이 성결에 깃들어 있게 하옵소서.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총과 우리의 성행이 비추는 빛이 우리의 얼굴에 빛이 나게 하옵소서(이것이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는 아름다움이다. 그리고 그런 아름다움을 지닌 자들은 진실로 아름다운 자들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우리의 마음속에 기쁨을 주시며, 우리의 얼굴에 광택이 넘치게 하옵소서, 그리하면 우리 하나님 같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있을 것이옵니다.



(2) 그리함으로써 하나님이 그들을 번영하게 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우리에게 우리 손의 행사를 견고케 하소서." 우리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의 일(16절)은 결코 우리 자신이 그를 위해 일하고 또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모든 일을 결코 면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일을 다했을 때에도, 우리는 그 일의 성공을 위해서는 하나님을 기다려야 하며, 하나님께서 "우리 손의 일을 번영케(견고케)해 주시기"를 기도하며, 우리가 그의 영광을 위해 한 일을 우리 자신이 완수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감히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으며,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또 아무 일도 완성시킬 수 없는 존재이므로 우리는 진심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할 필요가 있으며, 그 간청을 반복해야 하는 것이다. "주여, 우리 손의 일을 견고케 하옵소서." 그리하면 우리가 그 일을 통해서 견고해 지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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