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시편 061장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61:1

환난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음(시편 61:1-4)

이 귀절들 속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볼 수 있다.

Ⅰ. 다윗은 환란과 고통의 날에 기도로써 꼭 부착하고 있으며, 마음을 기울이고 있다. "어떠한 일이 생기든지,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리다(2절)-다른 신들에게가 아니고 오직 주께 부르짖으오리다-주께서 나를 괴롭히셨다고 하여 주와 사이가 나빠지는 것이 아니고 여전히 주를 바라보고 섬기리다-냉담하고 소홀한 태도를 주께 말하지 않고, 주께서 나를 축복해 주시지 않는다면 결코 보내드리려 하지 않았던 자처럼 극히 끈질기게 그리고 열렬한 미음으로 주께 부르짖으오리다."

이렇게 행할 것이다.

1. 그가 청원하는 법정에 가듯이 드나들었던 그 성소, 기도하는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행할 것이다. "땅 곧 세상 끝에서부터 가장 멀고 가장 어두운 구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다."

우리가 어디 있든지 우리는 하나님께 접근하는 자유를 가질 수 있으며, 은혜의 보좌로 가는 길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천국은 어느 곳에서나 마찬가지로 접근하기가 쉽다.

"아니, 내가 여기 땅 끝에서 슬픔과 고독 속에 있으므로, 주께 부르짖으오리다." 우리가 다른 어떤 위로에서 벗어나게 되었을지라도, 오히려 그것 때문에 우리는 온갖 즐거움이 근원되시는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2. 그의 심령이 낙담과 실의 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렇게 행할 것이다. "비록, 내 마음이 눌릴지라도, 그 마음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기 위해 들려질 수 없을 정도로 침참되거나 괴로워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마음이 이처럼 일으켜질 능력이 없다면, 그것은 분명 매우 심한 좌절 속에 빠질 것입니다. 아니, 내 마음이 곧 눌리게 되었으므로,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리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은 힘을 믿고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울음은 기도를 재촉해야 하며, 그것을 죽게 해서는 안 된다. "고난당하는 자가 있으냐? 저는 기도할지니라"(약 5:13;시 102 표제).

Ⅱ. 그는 자기의 마음이 눌려 곧 침잠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특별한 청원을 올리고 있다.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즉,

1. "주께서 나를 돕지 않으신다면 내가 올라갈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주여, 내 안에 이러한 믿음을 역사하는 주의 특별한 은혜에 의하지 않고서는 내가 얻을 수 없는 그러한 내 안전에 대한 확신과 만족을 내게 주소서."

2. "내가 나의 능력이나 지혜로써 할 수 있는 것 보다 더 멀리 환란을 피할 수 있고 또 더 가까이 조용하고 평화로운 지역에 이을 수 있는 그 바위로 나를 인도하소서,"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은 우리보다 더 높은 바위이다. 이 반석이 그리스도이다. 따라서 그 안에 있는 자들은 안전하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으로 우리를 인도하시지 않는다면 이 반석에 오를 수 없다. "내가 너를 반석틈에 두리라"(출 33:22).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과 기도로써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섭리 아래 두어, 하나님의 보호 아래 우리가 들어 있도록 해야 한다.

Ⅲ. 그는 화평의 응답을 원하고 있으며, 기대하고 있다. 그는 믿음으로 청하고 있다(1절).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 즉 나로 하여금 현재 내 기도가 청종되었음을 알게 하는 위로를 믿게 하시고(20:6), 때가 되면 내가 기도하고 있는 것을 얻게 하소서."

Ⅳ. 이러한 기대와 그가 강력히 주장하는 그의 탄원의 근거(3절). "주는 나의 피난처이다. 즉 내가 나보다 높은 바위가 주의 안에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주께서 아직도 그 반석으로 나를 인도하시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 유익을 얻은 과거의 경험이 우리로 하여금 여전히 그를 꼭 붙들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또한 우리로 하여금 그런 일이 헛되지 않으리라는 소망을 갖도록 격려해야 한다. "주께서는 내게 있어서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방패가 되어왔습니다. 그리고 주는 이전처럼 강하시며, 주의 이름은 예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의인의 피난처입니다"(잠 18:10).

Ⅴ. 그는 하나님께 대한 그의 의무와 의존을 계속하려고 결심하고 있다(4절)

1. 하나님의 예배가 그의 꾸준한 사업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의 피난처와 견고한 성이 되시는 것을 알게 되기를 바라는 모든 자들은 그렇게 해야 한다. 그의 천한 종들 이외에는 그 누구도 그의 보호의 혜택을 입을 수 없다.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거하리이다." 다윗은 지금 그 장막으로부터 추방되었고, 그것은 그의 가장 큰 슬픔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의 섭리로써 자기를 그의 장막으로 이끌어 오실 것을 확신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다윗으로 하여금 성전을 영원한 거처로 만들 결심을 할 만큼 그 성전에 대해 호감을 갖도록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이다(27:4)

다윗은 그 성전이 천국의 모형이며 상징이었으므로(히 11:8, 9, 24)로 "영원히" 그 속에 거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땅 위에 있는 짧은 "순간" 동안 하나님의 장막-그것은 의무의 집이다-에, 그 안에 거하는 자들은 끝없는 "순간" 동안 영광의 집인 그 장막에 거할 것이다.

2. 하나님의 은혜와 은혜의 언약은 그의 끊임없는 위로가 될 것이다. 병아리가 암탉의 날개 아래에서 따뜻함과 안전함을 구하듯이 "내가 주의 날개 밑에 피하리이다." 하나님이 자기들의 피난처라는 것을 발견한 자들은, 온갖 역경 속에서도 여전히 그를 의지해야 한다. 하나님의 장막에 거하는 자들은 환란 때에도 그가 자기들을 숨기시리라는 보장을 받고 있다.

 

61:2 없음.

 

61:3 없음.

 

61:4 없음.

 

61:5

긍휼을 회상함(시편 61:5-8)

이 구절들 속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살펴 볼 수 있다.

Ⅰ. 다윗은 어떤 즐거움을 갖고 하나님께서 이전에 그를 위해 행하신 것을 되돌아보고 있는가?(5절) "하나님이여 내 서원을 들으셨나이다." 즉

1. "내가 했던 서원, 그리고 그것으로 내 영혼을 속박했던 그 서원을 들으셨나이다. 주께서 그것을 용납하셨고 그것을 즐거워 하셨나이다. 주께서 그것을 유념하셨고 나로 그것을 마음에 두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은 욥에게 그의 서원을 기억하도록 하셨다.(창 31:13; 35:1).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서원, 우리의 모든 선한 목적, 그리고 새로운 복종에 대한 우리의 모든 엄숙한 약속에 증인이심을 유의하자. 하나님은 그것들을 모두 기억하시는데, 이것은, 여기에서의 다윗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의 서원을 이행해야 할 좋은 이유가 될 것이다(8절). 왜냐하면 우리가 한 서원을 들으시는 그가, 그것이 이행되지 않을 때에는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주의하여 듣도록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2. "그 서원과 함께 한 기도를 들으셨나이다. 그것을 주께서 은혜롭게 들으시고 응답하셨나이다." 이것은 그로 하여금, 이제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하고 기도하도록 격려했다. 야곱의 후손들에게는 "결코 너희가 나를 구함은 헛되도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는 그가, 지금에 다시 그렇게 말씀하시지는 않을 것이다. "주께서 내 서원을 들으셨고, 그것에 정말 응답하셨나이다. 왜냐하면, 주께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의 얻을 기업을 내게 주셨기 때문이다."

(1) 다음 사실들을 기억하자.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 하나님께서 사람의 자손들에게 그 자신을 드러내시기를 기뻐하는 모든 발견물들을 거룩한 경외감으로 받아들이고 그것들에 스스로 적응시키는 특별한 백성들이 이 세상에 있다.

(2) 특별한 백성들에게는 특별한 기업, 현재의 위로, 그리고 미래의 축복에 대한 전조가 있다.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기업, 영원한 그들의 소득이다. 하나님을 자기의 기업으로 얻은 레위 사람들은, 그와 교제해야 하며, 그들의 형제들과 같은 분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그 안에 충분한 것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 세상에서 소유한 것이 거의 없다 하더라도 불평해서는 안 된다.

(3)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의 기업보다 더 나은 것을 바랄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을 다루시는 것처럼 우리를 다루신다면, 우리는 더 나은 대우를 바랄 필요가 없다.

Ⅱ. 다윗은 어떤 확신을 가지고 그의 생명이 지속되기를 기대하고 있는가?(절) "주께서 왕으로 장수케 하시리이다." 다음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그 자신에 대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시편이 그가 면류관을 쓰기 전에 지어졌다할지라도, 그는 이미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았고, 하나님께서 그의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신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가 지금은 법률의 보호를 박탈당한 자라 하더라도 믿음으로 그 자신을 "왕"이라 칭할 수 있었다. 또는 아마도, 이 시편은 압살롬이 그를 폐위하고 추방할 기회를 노렸을 때에 지어졌을 것이다. 그의 생명을 단축시키고자 했던 자들이 있었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장수케 하실 것을 믿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에 의해 정해진 사람의 나이(즉 칠십 세)대로 그를 살게 하셨는데, 그는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쫓아 섬기다가 잠들었으므로(행 13:36), 그것은 "여러 대로" 간주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여러 대는 그에게 더 유익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결심은 영원히 하나님의 장막에, 의무에 길에 거하려는 것이었다(4절). 그리고 이제 그의 소망은 그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 위로의 길에 거하리라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거하는,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행하는 자들은 선한 목적을 따른다. 그는 그 자신을 제 삼자로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 시편이 교회가 사용하도록 악장에게 넘겨졌고, 그는 이 시편을 노래하는 가운데 백성들로 하여금, 그의 대적들의 악의라는 확신을 가져 격려받게 하려는 때문이었다. 또는

2. 메시야에 대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는 바로 메시야이신 왕의 예표이었던 것이다. 다윗에게 있어서는 자기 자신이야 어찌되든,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의 연수는 여러 대에 미칠 것이며 "그의 통치의 평강의 끝이 없으리라"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이 위로가 되었다. 중보자는 영원히 하나님 앞에 거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항상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존전에 나타나시며 언제나 살아 계시어서 중재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살아계시므로 우리도 또한 살 것이다.

Ⅲ. 어떠한 끈질김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그를 취하시어 언제나 그의 보호 아래 두시기를 간청하고 있는가? 인자의 진리를 예비하사 저를 보호하소서. 하나님의 약속과 그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기도를 빼앗은 것이 되어야 한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장구케 하시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으므로 그가 그것을 보호하시기를 기도하고 있다. 자기에게 강한 생명의 파수꾼이나 견고한 성을 예비해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선하심이 그 약속대로 그의 안전함을 마련해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의 보호 아래에 있는 것 이사의 안전을 바랄 필요는 없다.

본문은 메시야에게 적용될 수 있다. "때가 충만히 이르렀을 때에, 그를 보내사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며 아부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소서"(미 7:20; 눅 1:72, 73).

Ⅳ. 어떠한 즐거움을 갖고 그는 하나님께 의무의 감사한 보답을 드리기로 서원하고 있는가?(8절)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리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는 우리에게 그에 대한 찬양을 요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그를 찬양할 수 있기 위해 살기를 원해야 한다."내 영혼을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그것이 주를 찬양하리이다."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우리 세대의 과업으로 만들어야 한다(우리의 생명이 지속되는 한 우리는 하나님 찬양하기를 지속해야 한다). 그러면 그것은 우리 영원의 과업이 될 것이며, 우리는 영원히 그를 찬양할 것이다. "매일 나의 서원을 이행하리이다." 그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그 자체가 그의 서원을 이행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다른 면에서도 그의 서원을 이행하게 되도록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다음을 명심하자.

1. 우리가 한 서원을 우리는 양심적으로 이행해야 한다.

2.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과 그에게 우리의 서원을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꾸준한 매일의 일과가 되어야 한다. 날마다 우리는 그것을 향해 어떤 일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것과 비교할 때 극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매일 신선한 긍휼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날마다 많이 행했다고 생각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영원히 행하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61:6 없음.

 

61:7 없음.

 

61:8 없음.




































 


Articles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