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죄악도 버리라(신명기 21:1-9)
극악한 살인자를 엄격하고 효과적으로 처벌하는 법이 앞에서(19:11 이하) 언급 되었다. 그러한 극악한 죄를 지은 자들은 잡아 죽임으로써 이 땅에서 피의 죄책을 제거하라는 것이었다. 만일 살인한 자가 발견되지 않아 이렇게 처벌할 수 없을 때에는 살인자의 처벌이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아니했으므로, 그 땅은 아무런 오염도 당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럴 때에는 중대한 의식을 베풀어 그 죄에 대한 두려움과 증오를 나타냄으로써, 그 죄에 대한 죄책을 제거해야 한다.
Ⅰ. 여기에는 "피살된 시체를 발견하고 그 쳐 죽인 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언급되어 있다(1절).
하나님의 섭리는 때로 놀랍게도 흑암 속에 숨겨진 일들을 밝혀 내셨으며 죄는 이상하게 그 정체를 들어내고야 말았다. 그리하여 "살인자는 반드시 밝혀지고야 만다" 는 속담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때로 마귀는 이들의 죄를 감춰가며 이 세상에서 처벌받지 않으리라는 약속을 그럴듯하게 이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잠시 동안일 뿐이다. 살인자의 비밀이 드디어 밝혀지리니, "땅이 그 위에 잦았던 피를 드러내리라" (사 26,21). 그리하여 정의가 보상되리라. 그리고 이 세상에서 처벌받지 아니한 자는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 아래 영원히 서게 될 그날이 오고 있다. 수많은 살인자와 사악한 자들이 이 세상에서 처벌되지 않더라도 이들에게는 "이미 지나간 것은 다시 찾게 되는" (전 3:15) 심판의 날이 올 것이다.
Ⅱ. 이럴 때에 할 일에 관한 지시를 살펴 보자.
1. 살인자를 찾기 위해서 목격자의 말을 들어보고 그 일의 전후를 엄밀히 조사할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하여 죄지은 자를 찾아 내기도 한다. 그러나 만일 어떠한 실마리도 잡을 수 없고 또한 누구를 문책할 수도 없을 때는,(1) "가까운 성읍의 장로들이" 이 일에 관여하게 되어 있었다(성읍에는 23개의 법정이 있었다.) 만일 어느 성읍이 제일 가까운 성읍인지 의심스러울 경우엔 산헤드린 공의회가 사람들을 보내어 정확하게 원근을 재도록 했다(2,3절). 백성을 대표하는 자는 백성의 이익을 추구하여야만 한다. 그리하여 성읍에서 권력과 명예를 지닌 자는 불평을 제거하도록 전념해야 하며 지방과 나라에서 잘못되어지고 있는 것들을 시정해야 한다. 그러기에 가장 가까운 성읍에 있는 사람들은, 선을 위해 일하는 하나님의 종과 마찬가지로 그 성읍의 복지에 아주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2)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도 이 엄숙한 일을 돕고 또 주재하여야 한다(5절). 그리하여 이들은 율법에 따라 모든 일을 주관하며 백성들을 대신하여 무죄한 피를 주의 백성 안에 머물러 두지 마옵소서 하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8절). 이스라엘의 왕이신 하나님은 이들을 재판장으로 삼으사 모든 소송과 투쟁을 그들의 말대로 판결하도록 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러한 안내자와 감독자 그리고 통치자를 두어 모든 경우에 특히 앞에서 언급된 성스러운 일들에 대해 그들의 의무를 다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한 특전이었다.
(3) 이들은 암송아지를 험하고 경작하지 않는 골짜기로 끌고가서 죽였다(3, 4절). 이것은 제물이 아니었다(왜냐하면 그것은 제단에 바쳐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것은, 만일 그들이 살인자를 잡았을 때는 이렇게 하겠다는 엄숙한 선언이다. 그 암송아지는 멍에를 멘 일이 없는 송아지라야 했다. 어떤 자들은 이것은 그 살인자가 벨리알의 자손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암송아지를 험한 계곡으로 끌고 왔다는 것은 그 사람의 흉악성을 의미하며 이 땅에 피를 흘리는 불경으로 해서 그 땅이 볼모로 화해버린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만일 이 후에도 살인자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암송아지가 죽은 이 골짜기에는 씨를 뿌릴 수도 없었고 경작할 수도 없었다고 말한다.
(4) 장로들은 죽은 암송아지 위에서 "물로 손을 씻으며", 그들이 이 무죄한 피를 흘리지 아니했을 뿐만 아니라 누가 범죄했는지도 알 수 없다는 고백을 했다(6, 7절). 뿐만 아니라 살인자를 알고도 감추어 주어 도망할 수 있도록 도와 주거나 권고한 일이 없다고 고백하였다. 이러한 관례로 다윗은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으리이다" 고 말하고 있다(시 26:6). 그러나 만일 빌라도가 그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면(마 27:24), 그는 이 의식을 악용하여 무죄한 줄 알면서도 그리스도를 비방하면서도 이 무죄한 피에 대해 자신은 아무런 죄가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Protestatio non contra factum 사실과 맞지 않는 항의는 무용한 것이다.
(5) 제사장은 그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해야 했다. 즉 하나님께 그들에게 자비하셔서 숨겨진 살인자가 받아야 할 심판을 그들에게 내리시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 살인자는 그 성읍의 사람이거나 혹은 그 성읍 속에 지금 숨어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은 그가 사람들 중에 섞여 더 이상 잘못된 일을 저지르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민 16:22). "주여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사하소서" (8절). 우리가 사악한 자의 악한 행실을 들었을 때는, 그들의 악행으로 떨며 신음하는 우리 국토를 위해 하나님의 자비를 진심으로 간구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죄악으로 자기들의 피의 그릇을 채우고 있더라도 우리는 용서의 기도를 드림으로써 죄의 그릇을 비워야 한다.
2. 하나님은 다음과와 같은 의식을 행하도록 명하셨다.
(1) 의식을 행함은 백성들에게 살인자에 관한 말을 들려 줄 수도 있는 기회가 되어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그를 찾아내는 데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2) 사람들은 그가 피를 흘리게 하는 불경한 일을 했을 뿐만 아니라(우리 모두가 다윗처럼 "피의 죄책에서 나를 구원하소서" 라고 기도해야 한다). 땅이 물들인 끔찍스런 피에 대한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되었을 것이다. 피로 물든 땅은 울면서 재판장에게 올바른 조치를 요구할 것이며, 그렇게 되지 않을 때 하늘에게 땅을 심판해 달라고 다시 요구한다. 살인자가 드러나지 않았을 때 그 나라를 죄에서 구해내기 위해 철저한 주의가 필요하다면, 살인자가 밝혀졌으나 처벌하지 않고 있는 경우에는 나라를 죄악에서부터 구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식이 행해짐으로써 사람들은 알게 되고, 주의하게 되고, 그리고 살인자를 찾아내어 처벌하게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선원들까지도 피흘리는 죄는 두려워하였었다(욘 1:14),
(3) 우리는 남의 죄에 동참하지 말고 - ex post facto - 사후(事後)에 죄인들을 격려함으로써 공범자가 되지 말며, 사실에 대해 거짓 증거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들을 책하지도 않고 항의하지도 않는다면 우리는 "어두움의 열매없는 일에 함께 하게" 된다. 하나님이 명하신 의식이 의미하듯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어떤 한 사람이 죄를 범했을 때 고린도 교회는 회개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조심스러워지고 그들 자신을 깨끗이 하려 했으며 거룩한 의분과 두려움과 복수심을 가지게 되었다(고후 7:11).
포로된 여인의 문제(신명기 21:10-14)
여기 나온 율법에 의하면 싸움터에 나갔던 자는 만일 그가 원한다면 그가 사로잡은 포로와 결혼할 수 있도록 허용되어 있다. 이들의 무례함을 막기 위해 모세는 이들에게 이러한 것을 허락해 주었다. 만일 이들에게 이렇게 결혼하는 일이 허용되지 않았다면 이들은 자기들의 욕정대로 그들과 결혼하여 자기들을 불경스럽게 만들 것이고 그리하여 군대는 곤경에 부딪치게 될 것이다. 이들은 이미 아내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며, 유대인들의 말대로 다른 여인을 취하여 둘째 부인을 삼았을 것이다. 지나친 욕정으로 타락하게 되는 일은 여러모로 모세의 율법을 능가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계명에 결코 합당치 않다. 복음서에는 아내를 가진 자가 또 다른 여인을 취하는 것이 허용되어 있지 않다. "왜냐하면 태초부터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어여쁜 여인일지라도 그 여인에게 욕정을 품는 것을 복음서는 금하고 있으며, 비록 바른 팔을 잘라내는 것처럼 어렵기는 하나 모든 음흉한 욕망을 물리치고 극복하도록 명하고 있다. 그리하여 유대인의 신앙 이상으로 우리의 성스러운 그리스도교 신앙은 우리의 정절을 지키고 영이 육(肉)을 다스려 영생을 발견하고 더 나은 소망을 갖도록 권하고 있다.
그러나 이 병정들에게 이러한 자유가 주어졌을지라도 그들은 이것을 남용해서는 안 된다.
Ⅰ. 다시 말해서 아무리 포로로 잡힌 여인이 탐나더라도 성급하게 그녀에게 달려가서 자신을 악용해서는 안 된다. "만일 네가 그 여자를 아내로 삼고자 한다면(10, 11절), 물론 그 여자의 부모들의 허락을 받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그 여자는 너의 포로이기에 마음대로 처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1. 너는 그 여자와 결혼하기도 전에 그 여자와 간음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허용하는 것은, 이성과 덕을 배신하고 분노와 열기 속에서 짐승같은 무지한 욕정을 만족시키라는 뜻이 아니라, 아무리 어려운 곤경에 빠지더라도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사람에게는 존귀하고 관대한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기 위함이다. 만일 그가 원한다면 그 여자를 아내로 삼아도 된다. 그러나 그 여자를 "매춘부처럼 다루어서는" 안 된다.2. "너는 서둘러서 그 여자와 결혼하지 말고 그 여자를 너의 집에 몇 달간 그냥 있게 해야 한다" (12, 13절). 그동안 그는 이렇게 행하도록 한다.
(1) 그는 그 여자와의 정을 멀리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여자와 결혼한다 하더라도 나쁜 것은 아니지만(당신의 율법은 이것을 자치했었다), 그 여자를 홀로 내버려 두는 편이 훨씬 좋은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여자의 머리를 깎아 버리게 하여, 그 여자의 머리에 매혹당하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손의 아름다움을 손상시키기 위해 "그 여자의 손톱을 자르게 하라" (난외에는 이렇게 읽었다)고 했다. Quicquid amas cupias non placuisse nimis - 우리를 무절제한 사랑으로 유혹하는 것에 대한 우리의 애착을 조절해야 한다.
(2) 이러한 행동은, 그 여자가 우상 숭배를 버리고 유대교인으로 개종하겠다는 표적이었다. 그 여자가 머리를 자르고 손톱을 깎아 외모를 변경시킨다는 것은 그 여자가 무지하였기 때문에 타락하였던 이전의 상태를 벗어나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 여자는 집에서 하나님을 배우며 그를 존경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리하여 만일 그 여자가 그것을 거부하고 우상 숭배를 계속 고집하면 그는 그 여자와 결혼해서는 안 된다고 유대인들은 말한다. 믿는 자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 한 고린도 후서 6장 14절을 말씀을 기억하라.
Ⅱ. 불쌍한 포로를 학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1. 그 여자의 나라에서 귀하게 나서 귀하게 키워졌지만 이제 하나의 평범한 이스라엘 군인관 결혼하려고 하나, 아무런 허락도 축복도 빌 수 없이 헤어져 있는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위해 애통하는" 시간을 갖도록 해야 한다. 이 슬픔이 정돈되어 다소 사라지거나 그리고 그 여자가 포로되어 있는 그 나라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전에 결혼을 강요하는 것은 퍽 불친절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 여자는 우상을 멀리하는 것을 애통하게 받아들이기 보다는 기쁘게 여겨야 한다. 그리고 그녀에게 가깝고 귀중한 친척들에게만 자신의 정성을 기울일 수 있어야 한다.2. 두번째로 그 여자와 결혼할 뜻으로 그 여자를 그의 집에 들여왔으나 마음이 변했을 때에는 여느 죄수처럼 그 여자를 팔지 말고 그가 처음엔 결혼하려 하여 그 여자를 기쁘게 하고자 하다가 나중에 실망시킨 것인 즉, 만일 그 여자가 자기 나라로 돌아가기를 원하거든 자유로이 가게 해야 한다(14절). 그 여자를 조롱하여 괴롭히지 말아야 한다. 그리하여 여기에서는 의와 정절의, 특히 사랑을 요구하여 애정을 표시하고 결혼을 약속하는 율법을 암시해 주고 있다. 결혼은 아주 엄숙한 일로서 신성시되어야 하고 결코 조롱삼아 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존귀한 장자권(신명기 21:15-17)
이 율법에서는 정당한 이유없이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재산 상속을 거부하는 것에 대해 제재를 가하고 있다.
Ⅰ. 여기에 나온 귀절(15절)은 매우 교훈적이다.
1. 이것은 일부 다처제의 단점을 나타내고 있는 데, 모세의 율법은 일부 다처제에 제한을 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부다처제가 대단히 불편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마침내는 이것이 폐지되었고 그들은 스스로 자기들에게 율법의 역할을 했다. 여기에 나타난 것을 살펴보기로 하자. 천 사람 중에 한 명이긴 하지만 만일 어떤 남자가 두 아내를 가졌다고 하면 둘 중 한 아내는 사랑받는 자이며, 하나는 야곱이 레아를 미워했듯이 미움받는 아내가 될 것이다(분명 한 사람은 사랑을 덜 받을 것이다). 이들은 서로 다투고 시기하고 혼란을 일으키고 사악한 일을 하여 이들의 남편은 항상 불안하고 괴로워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죄와 고통 중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탐욕 속에 몸을 내어 맡기는 것보다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순종하며 만족하는 것이 훨씬 좋은 것이다.2. 여기서는 또한 하나님의 섭리는 일반적으로 약한 자들을 돕고 있다는 사실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부족한 자에게 더욱 풍성한 영광을 주신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말하는 장자는 "미움을 받는 여인" 의 아들이라고 가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야곱의 집안 역시 그러했다. "여호와께서 미움을 받는 레아를 보셨다" 고 했기 때문이다(창 29:31). 집안의 훌륭한 가장은 이 두 아내에게 현명하게 즐거움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 즉 한 아내에게 사랑을 받는 영예를 주었다면 다른 한 아내에겐 장자의 어미가 되는 명예를 주어야 한다.
Ⅱ. 여기 나오는 율법은 부모들에 관한 것이다. 부모는 자손에게 편견없이 공평을 기해야 한다. 여기서는 맏아들이 비록 사랑을 적게 받는 자의 아들이지만 장자 상속권의 특권을 갖도록 되어 있어서 아버지의 재산 중에서 다른 아들보다 두 몫의 재산을 받는다. 왜냐하면 그는 그 아비의 기력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 아들은 가문을 지속시킬 것이며 "장사의 수중의 화살" 처럼 큰 힘을 발휘할 것이다(시 127:4). 그러므로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다(16, 17절). 그러나 야곱은 르우벤에게서 사실상 장자의 권리를 박탈하였는데, 그것은 르우벤이 "미워하는 자의" 아들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근친상간을 범행하였기 때문이었다. 야곱의 처사는 공평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이것을 전례로 삼아 부당한 처사를 내려서는 안 된다. 그리하여 아버지가 자손들에게 자기의 유언을 내리거나 재산을 상속하려할 때 조금 덜 사랑하는 자의 아들이라고 해서 어머니의 불행을 아들에게도 지울 수는 없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그 아들의 잘못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의 사실을 명심하자.
1. 하나님이 은총을 만인에게 골고루 내리시듯 부모들은 그들의 사랑을 공평하게, 아무런 차별 없이 자녀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2. 상속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이므로, 이 일은 하나님의 섭리대로 따라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명백한 버림을 받지 않은 이상 어떤 아들도 자기 아버지의 버림을 받아서는 안 된다. 살아있는 자로서는 누구도 하나님께서 버림 받았다고 감히 말할 수 없다.
패역한 자식은 처벌하라(신명기 21:18-23)
Ⅰ. 여기서는 먼저 패역한 아들을 처벌하는 것에 대한 율법을 이야기하고 있다. 부모가 자녀의 권리를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첫번째 율법이라 한다면, 그 다음 율법으로는 부모들의 은혜를 입은 자녀들은 그들의 부모에게 대한 공경과 의무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에는 불공평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1. 여기에서 말하는 범죄자란 어떤 자인가?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다" (18절). 아이들이 나쁜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은 능력이 부족하다거나 이해력이 느리고 둔하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자녀가 그의 부모에게 오만 불손하고, 부모의 권위를 경멸하며 부모의 타이름이나 훈계를 받기 싫어하고 그의 가족에 수치를 주며 그들을 애통하게 만들고, 가산을 탕진하고 또 방탕한 생활로 부모의 지위를 몰락시키려 한다면 - 그는 "완악하고 패역한" 자이다. 특히 그는 "방탕하거나 술취한" 자가 그러하다고 했다. 이것은 다음의 어느 것을 의미하고 있다.(1) 부모가 특별히 훈계하고 있던 죄를 저지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 그가 부모들의 말씀에 순종치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가 있다. 드무엘왕이 바로 이런 훈계를 그의 어머니로부터 받고 있다(잠 31:4). 자녀들을 교육하는 데 있어서 부모는 그들이 술취하고 싶은 욕망을 제어하고 술의 유혹을 받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우려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리하여 그들이 추악한 죄를 미워하고 그런 일을 범하지 않도록 가르쳐야 한다.
(2) 아들이 "방탕하고 술에 취한" 자가 되는 것은 그가 부모에 대해 오만하고 완고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술취하는 것보다 더 치명적이고 뚜렷하게 인간을 사악한 행위로 이끌어가서 그것을 습관화시키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인간이 술에 취하면 법을 잊게 되고(잠 31:5) 부모를 공경하라는 근본적인 율법조차도 잊어버리게 된다.
2. 이 범죄자는 어떻게 처벌되는가 그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고발인이 된다(19, 20절). 부모들 스스로가 그 아들을 죽일 수 없을지 모르나 그들은 성읍의 장로들에게 그의 죄를 고해야 하는데 정말 애통하는 심정으로 "우리의 이 아들은 완악하고 패역합니다" 라고 고발해야 한다. 악에 물들고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자기들의 가장 가까운 친족과의 자연적인 애정의 관계마저 박탈당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들의 존재(탄생)의 도구가 되었던 자들이 저들의 파멸의 도구가 되고 마는 것이다. 부모에 대한 의무를 저버린 자녀들은 부모들의 애정을 받지 못하더라도 자기 스스로 감미해야 하며 결코 부모를 원망해서는 안 된다. 어진 부모들은 자녀들이 반역아가 되어 정당한 벌을 받는 것을 보면 그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의의 심판이 임하시는 날에는, 본능적인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 속에 삼켜져서 그들은 그 아들이 처벌을 받을지라도 그 심판에 복종하게 되리라. 왜냐하면 그 심판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3. 그의 벌은 무엇인가? 공적으로 "그 성읍의 모든 사람이 돌로 쳐서 그를 죽이도록" 되어 있다(21절). 그리하여
(1) 부모의 권위가 살아나고, 인류의 공동 아버지인 하나님께서도 부모의 권위를 질투하신듯 중히 여기신다는 것을 보여주시게 된다. 부모의 권위란 모든 능력의 근원이신 하나님 자신에게서 파생되어 나온 최초의 가장 역사 깊은 강물이기 때문이다.
(2) 정당하게 처벌이 내린다면, 이 율법은 "아침마다 이 땅의 모든 악인을 멸하게" 되고(시 101:8), 그 땅에서 악한 것을 다 끊어버리는 타락이 번지지 않도록 막아 주리라는 것이다. 집안에서 올바르지 못한 자는 사회에서도 좋은 성원이 될 수 없다.
(3) 이러한 처벌은 의무를 제대로 행하지 않은 자녀들에게 두려움을 안겨 주었을 것이며, 이들은 두려운 마음으로 그들의 부모에게 순종했을 것이다. "모든 이스라엘은 들을지어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를 처벌한 장로들은 어느 날 어느 법정에서 아무개가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었으므로 돌로 쳐 죽였다는 글을 써서 전국에 보내도록 되어 있었다" 는 것이다. 장로들이 내린 판결과 처벌을 공공연하게 그리고 믿을 만하게 인쇄하여 각 곳에 보내어 in terrorem - 모든 사람이 듣고 두려워하였듯이, 우리 법정에도 죄인의 판결문을 정확히 기록하여 - in perpetuam rei memoriam - 그 기록이 결코 분실되지 않도록 하였으면 좋겠다고 나는 가끔 생각해 본다.
Ⅱ. 목매달아 죽인 악인을 매장하는 율법(22절). 나무 위에 매어 달아 죽기까지 버려두었던 시체들을 우리들에게서처럼 유태인들도 그대로 버려두지 못하게 했다. 신성 모독죄나 그 밖의 어떤 중죄를 져서 법정의 판결로 돌로 쳐 죽인 자의 시체는 종종 나무 위에 매달아 두기로 했다. 그리하여 그런 일을 세상에 알리고 그의 추행을 밝혀 다른 사람의 마음에 두려움을 주며, 듣고 놀랄 뿐 아니라 직접 보고 두려워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무에 단 시체를 밤새도록 두지 말고 해가 지기 전에 묻도록 했다(율법은 이르기를). "그런 자에게는 이런 처벌을 내리는" 것으로 족하다고 한다. 이것으로 일을 끝내었다. 그리하여 죄지은 자를 그의 죄와 함께 무덤 속에 묻어 버렸다.
1. 하나님은 이처럼 인간의 육신을 존중하고 극악한 죄인에 대해서도 관대히 대하시려 하신다. 매질의 수효를 율법으로 제한한 이유가 꼭 같은 이유로 인하여 시체를 그대로 노출시켜 두는 시간은 율법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곧 "네 형제가 네게 상스럽게 보일까 함이니라." 사후(死後)의 처벌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에게 보류해 두신다. 우리 인간은 이에 대해 어떤 일도 할 수가 없다. 육식의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죄인의 몸을 사슬로 매단다거나 머리와 사지를 결박하는 일이 좋은 일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볼 만한 일이다.2. 이런 행동에는 분명히 어떤 의식적(儀式的) 요인이 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죽은 자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은 불경스런 일이었다. 마찬가지로, 죽은 육신은 땅을 더럽히므로 시체를 나뭇가지에 그대로 두지 않도록 했다.
3. 그러나 거기에는 그리스도와 상관된 어떤 이유가 주어져 있다. 즉 "나뭇가지에 매달아 죽은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다" 라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당하는 가장 끔찍한 치욕이고 모욕이다. 그리하여 다른 중죄의 처벌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처형은 그 범인을 하나님의 저주 아래 두는 것이다. 하늘과 땅 가운데 매달려 있는 그를 본 자는 그가 이 하늘과 땅에서 버림받고 무가치한 자가 되어졌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일이 너무 멀리까지 전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를 밤새도록 매달아 놓아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시고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해 주었는가를 알려 주기 위해 사도 바울은 나무에 달려 죽은 이 낙인 찍힌 자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비교하여 예증하고 있다(갈 3:13). 모세는 그가 가장 추악한 것을 의미할 때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 이라는 귀절을 성령에 의해 사용하고 있다. 후에 이 귀절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적용되었는데, 그 속에서 그리스도가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의 사랑이 얼마나 커다란 힘인가를 느끼며 그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더욱 확고히 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박학한 패트릭 주교가 잘 관찰한 바 대로 이 귀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적용된다. 이 죄인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과 같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대신 치욕을 당하셨을 뿐만 아니라 죄인을 해가 지기 전에 매달려 있던 나뭇가지에서 끌어 내린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저녁 때에 저주받은 십자가에서 끌어 내려지고 묻히시게 되었다(유대인들은 이것을 똑똑히 목격했다. 요 19:31). 그것으로 말미암아 죄는 사하여졌고 율법은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에게 내려졌던 저주도 멈추게 되었다. 죽은 육신이 묻혀졌을 때 이스라엘이 맑고 깨끗하게 되었듯이, 그리스도가 행하신 온전한 속죄로써 교회는 깨끗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