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1
나의 반석 여호와 - 여기서 '반석'은 '추르'(* )로서 안전과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별칭이다(28:1;42:9).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치게 - 여기서 '싸우게' , 케라브)와 '치게'(* , 밀하마)는 둘 다 '전쟁'을 뜻하는 용어로, 전자는 아람어에서 온 용어로 구약 성경에서 9번 나오고 후자는 전형적인 히브리어로 319번 사용되고 있다(BDB). 동일한 의미를 나타냄에 있어 서로 다른 용어를 사용한 것은 반복을 통해 그 의미를 강조하되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한 기법의 일종이다. 본절에서 저자는 외형은 다르나 내용은 동일한 표현을 통하여 성전(聖戰)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사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특히 '손', '손가락'이 언급된 것으로 보아 손가락을 사용하여 그 줄을 당기는 활쏘기를 구체적으로 암시하는 것 같다(Barnes).
=====144:2
나를 건지는 자(* , 메 팔르티 리) - 직역하면 '나를 위한 나의 구원자'로서, 유사한 표현이 18편;삼하 22:2 등에 나타난다. 한편, 본절에서 하나님에 관한 호칭이 여럿 나오는 사실에 대하여 칼빈(Calvin)은 다음과 같이 주해하고 있다:'이것은 별 의도없이 그저 나열된 것이 아니라 믿음을 든든히 하고 강화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시련의 바람이 몰아쳐 올 때 그 마음이 쉽게 흔들리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도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흔들리고 자꾸 넘어지려고만 한다. 그리고 그분의 인자(仁慈)를 망각할 때 우리는 거의 낙심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하나님에 관한 특성들을 나열하며 외치는 것은 굳건한 믿음을 도와준다.
' 내 백성을 내게 복종케 하시는 자시로다 - 여기서 '내 백성을 내게 복종케 하시는'(* , 하로데트 아미 타흐타)은 직역하면 '나의 백성을 내 아래 굴복케 하시는'이다. 특히 이중에서 '굴복케 하시는'은 무력으로 폭동, 반란 따위를 진압하는 것을 뜻할 때 주로 사용된다. 따라서 어떤 학자들은 본문을 이해함에 있어 한 반역자를 중심으로 결탁되었던 반역꾼들을 저자가 다시 평정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의 구절로 본다(Anderson). 또한 어떤 역본들(시리아역, 갈대아역, 사해 사본)은 여기 '백성'을 복수 '백성들'로 수정함으로써 본 구절을 하나님이 열방들을 다윗 왕의 통치 아래 두었던 것을 암시하는 구절로 여기기도 한다(peoples, NIV, RSV). 한편 또 다른 학자들은 본 구절을,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은 후 그러나 왕좌에 오르기 전에 말했던 것으로 간주한다(Calvin, Delitzsch). 본 시의 역사적 배경을 고려할 때, 우리는 두 번째 견해를 존중하고 구체적으로는 '백성들'이 암몬을 위시한 연합군을 가리키는 것으로(삼하 10장) 이해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144:3
사람이 무엇이관대...저를 생각하시나이까 - 8:4;욥 7:17에도 같은 표현이 나온다. 본 수사학적 질문은 하나님의 위대성 및 위엄과 대비를 이루는 탄원자의 미약한 신분을 강조한다. 그리고 유한하고 연약한 인생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것은 어떤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 덕분임을 노래하는 내용이다(VanGemeren).
=====144:4
사람은 헛 것 같고(* , 아담 라헤벧 다마) - 문자적인 뜻은 '인간은 한번의 호흡(공기) 같다'이다. 인간은 지극히 유한하고 일시적인 존재라는 말인데, 39:5에도 이와 유사한 구절이 나온다:"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
"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 - 그림자가 실체는 아니면 해가 뜨면 생겼다가 지면 없어져 버리듯이 인생은 단조로운 주기를 반복하다가 결국에는 사라져 버리고 마는 존재라는 것이다(Barnes). 인간 생명의 일시성에 대한 사상은 지혜 문학의 한 주제가 되고 있다(102:11;109:23;욥 8:9;14:2;전 6:12;8:13). 앞절에 이어 본절에서도 저자는 인간의 연약성을 내세워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강조하고 있다.
=====144:5
주의 하늘을 드리우고(* , 예화 하트 솨메카) - 직역하면 '당신의 하늘들을 구부리소서'이다. 과거 모세가 시내산에서 경험했던 것과 같은 여호와의 임재의 현현을 간구하는 내용이 마치 하늘이 유연한 물체여서 하나님이 그 아랫자락을 밑으로 내리고 그속에서 나오시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또한 18:9, 14-16에도 나오는 이 표현은, 폭풍이 불 때 짙은 구름이 땅에 낮게 드리워져서 언덕과 산을 가림으로 인해 마치 하늘과 땅이 함께 섞인 것처럼 보이는 상태를 암시하기도 하는 바, 결국 이는 그의 대적들을 전복시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강림하시기를 소원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강림하시며(* , 테레드) - 원형은 '야레드'(* )로서 하나님의 겸비(謙卑)하심을 뜻하는 기술적 용어이다(창 11:5;18:21;출 3:8;19:11, 18;34:5;사 64:1).
산들에 접촉하사 연기가 발하게 - 출 19:18;20:18에 대한 암시인 것 같다.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뭇 백성이 우뢰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결국 본 구절은 하나님의 현현에 따르는 경외로운 현상을 암시한다.
=====144:6
번개를 번득이사 - 이를 겨울 폭풍의 경험으로부터 따온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징벌을 번개에 비유한 예는 두물지 않다(계 8:5;16:18). 한편 18:14에도 이와 유사한 표현이 나오지만, 여기 사용된 동사 '번득이다'의 히브리어 '바라크'(* )는 성경의 그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본 시편은 다른 시편으로부터 유사하거나 동일한 구절, 단어 등을 다수 도입하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저자의 독특성을 엿보게 함을 알 수 있다 하겠다(Perowne).
흩으시며(* , 테피쳄) - 직역하면 '그것들을 흩으시며'이다. 바로 앞 구절의 내용이, 번개가 번쩍이는 것임을 고려할 때 '그것들'이란 '번개들'을 가리키는 것 같으나 '대적들'로 보아도 큰 무리는 없겠다. 이 견해를 여러 학자들이 지지하고 있다(Kirkpatrick, Davies, Cohen).
주의 살을 발하사 저희를 파하소서 - '주의 살'이란 문맥상 하나님의 진노의 '번개'를 가리킨다. 그리고 '파하소서'의 히브리어 '하맘'(* )은 '파괴하다', '괴롭히다', '초조하게 하다' 등의 뜻을 지닌다.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갑작스런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어쩔 줄 몰라하며 당황하고 놀라 이리저리 우왕좌앙하는 대적들의 모습을 연상케 된다. 혼란과 공포는 흔히 성전(聖戰)에서 하나님이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이기도 하다(Toombs).
=====144:7
큰 물(* , 마임 라빔) - 문자적인 뜻은 '많은 물'이며, '많은 물'이란 대적의 세력을 상징하는데 스올의 세력을 암시하기도 한다(18:4). 여기서는 전자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방인의 손 - 히브리어 '네카르'(* )는 '이방의' 혹은 '낯설은'을 뜻하지만 '대적의' 혹은 '깨끗지 못한'을 암시하기도 한다(느 9:2;겔 44:9).
=====144:8
궤사를 말하며(* , 디베르 솨우) - 직역하면 '헛된 것을 말하다'이다. 여기서 '헛된 것'이란 거짓된 것을 말한다. 본 시의 역사적 배경을 고려할 때, 구체적으로 이는 아람 족속이 연합군을 모으기 위해 이스라엘에 대해 온갖 거짓된 유언 비어와 모함을 퍼뜨린 사실을 가리킬 수 있다.
그 오른손은 거짓의 오른손이니이다 - 대적들이 거짓되이 맹세하고 그 맹세한 바를 파기하였던 것을 가리킨다. 하늘을 향하여 오른손을 드는 것은 일반적으로 맹세를 다짐하는 제스처였다(창 14:22;신 32:40).
=====144:9
하나님이여(* , 엘로힘) - 하나님에 대한 호칭으로 '엘로힘'이 사용된 것은 108편에서 1번 사용된 것을 제외하고는 90-150편 가운데서는 드물게 이곳에서 사용되었다. 이 부분에서 하나님께 대한 호칭으로는 주로 '예화'(* )가 사용되었다. 좀 멀리 57편과 60편에서 엘로힘식 시편(Elohistic Psalms)이 나타난 바 있는데 사이가 떨어지긴 했지만 108편과 본 시편에서 다시 '엘로힘'이 등장하는 것을 보고 어떤 학자들은 57편과 60편에 이어 한쌍의 엘로힘식 시편이 재현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Anderson, Delitzsch).
새 노래(* , 쉬르 하다쉬) - 이 노래를 종말론적 성격의 노래로 이해해야 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저자가 기대해마지 않았던 구원에 대한 감사가 그 내용일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새 노래'란 '새로 지을 노래'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33:3;96:1).
=====144:10
왕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 여기서 '구원'이란 '대적으로부터의 구출' 혹은 '승리'를 뜻한다(33:16;35:3). 그런데 그 승리가 '왕들'에게 임했다는 것을 볼 때 본 구절은 다윗 가문의 왕들의 통치를 통해 예증되었던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사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종 다윗을 그 해하는 칼에서 구하시는 - 바로 앞 구절을 중시할 때 본문은 모든 이스라엘 왕들 그리고 지도자들의 표본 중의 하나로서의 다윗을 언급하고 있다 하겠다. 그러나 오실 다윗, 곧 메시야에 대한 암시도 포함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이 경우 본문은 18:50과 연결된다.
=====144:11
이방인의 손에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 - 7, 8절의 용어들이 다시 반복되고 있다. 구원을 바라는 기도는, 그 모든 응답에 대한 기대를 하나님 한 분께만 의존하는 믿음의 피력으로(9, 10절) 잠시 중단되었었다. 그러나 다시 구원의 요청은 반복되고 있다.
=====144:12
혹자는 본절에서부터 15절까지를 앞 부분인 1-11절의 경우와는 달리 본 시편의 저자가 창작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들이 제시하는 이유인즉 1-11절과 비교해 볼 때 가장 중요한 동사적 연결에 있어 일치를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부분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저자가 다른 시편의 한 부분(조각)을 그대로 베껴 쓴 것이 된다. 그리고 그 원본은 다윗 혹은 솔로몬 치하의 전성기에 민족의 행복과 번영을 묘사한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 같은 내용의 시편 조각을 1-11절 뒤에 베껴서 부착한 이유는 포로 시대 이후 그 백성들로 하여금 과거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할 당시 충만한 보상을 받았던 사실을 상기케 함으로써 그들에게 도전을 주고 민족의 구원에 대한 소망이 어디 있는가를 깨우쳐 주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Perowne). 그러나 이러한 해석의 확실한 타당성에 대해서는 의혹의 여지가 남는다. 따라서 그보다는 본절 이하를,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 감사하는 본 시의 결론부로 이해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 같다.
어리다가 장성한 나무 같으며(* , 킨티임 메구달림 비느우레헴) - 문자적인 뜻은 '그들의 젊은 시절에 다 자란 나무와 같으며'이다. 이것은 전쟁이나 위험 따위에 노출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려 깊게 보살핌을 받고 양분을 공급받은 나무처럼, 풍족함 가운데 태평 성대를 구가하는 전성기의 이스라엘의 위용을 암시한다.
모퉁이 돌과 같으며 - 여기서 '모퉁이 돌'은 '자위이트'(* )로서 형태가 복수형이다. 이것은 궁전 따위의 기둥들이 여럿임을 반영하고 있다. 이스라엘을 잘 다듬어진 궁전 기둥들에 비유한 본문은 그 키 혹은 곧바름보다는 아름다움과 위용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 같다. 결국 본 구절은 전쟁이나 위험 따위를 겪지 않은 전성기의 이스라엘의 손상받지 않은 국가의 위용 그리고 힘 따위를 드러내고 있다.
=====144:13
백곡(* , 미잔 엘 잔) - 직역하면 '종류로부터 종류까지'이다. 이 부사는 인간과 동물의 필요를 따라 공급할 물건 혹은 곡식의 종류가 다양함을 뜻하는데 이와 유사한 표현으로는 대하 16:14에서 한번 더 등장하며 페르시아 방언에서 빌어온 용어로 생각된다(Myers).
들에서(* , 베후초테누) - 욥 5:10;잠 8:26 등에 이어 이곳에 등장하는 본 용어를 EV, KJV 등은 '거리들'(in our streets)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것은 부자연스럽다. 왜냐하면 본 용어는 '어느 도시의 바깥 장소'를 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역본 NIV, RSV 등의 번역처럼 '들에서'(in our fields)가 적합하다.
=====144:14
무겁게 실었으며(* , 메수발림) - 본 용어에 대한 번역은 다양한데 대표적인 것으로 '짐들을 질 수 있는'(be strong to labour, KJV), '출산력이 있는'(be heavy with young, RSV) 등이 있다. 그러나 많은 수의 가축을 묘사하고 있는 바로 앞절 하반절을 중시할 때 후자의 번역이 더 나을 것 같다.
침로하는 일이나 우리가 나아가 막는 일이 없으며(* , 에인 페레츠 우에인 요체트) - 직역하면 '파괴와 나아가는 일이 없으며'이다. 여기서 '파괴'란 대적이 성벽 따위를 꿰뜸고 들어오는 것을 가리키며, '나아가는 일'이란 적을 공격하기 위하여 출정하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표현은 성벽 밖에 적이 포위하고 있지 않은, 그래서 언제 그 적이 성벽을 돌파하고 들어올까 염려할 필요가 없는 그리고 많은 군장을 꾸리고 소동 가운데 적을 향해 출정하는 일이 없는 충만한 평화의 시대를 자연스럽게 묘사해준다 하겠다. 이어지고 있는 '거리에는 슬피 부르짖음이 없을진대'라는 표현은 이 같은 해석과 조화를 이룬다.
=====144:15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 즉, 12-14절에 묘사된 상황 가운데 사는 백성은 행복하다는 의미이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 여호와를 예배하고 그들의 하나님으로 섬기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이다. 14절에 자세히 언급된 번영과 평화는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봉사의 결과로 나타난다. 도처에 있는 평화, 질서, 풍성함, 민족의 번영을 위한 최고의 안전 장치는 하나님 예배이다. 하나님 예배의 핵심은 단순한 제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유일하고 참된 신으로 인정하고 그의 율례를 지키는 데 있다(Barnes).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드러내는 본시는 과거에 베풀어 주신 구원에 대한 찬양과
현재 직면한 고난에 대한 탄원 그리고 미래의 승리로 인한 평화와 번영을 확신하는 내
용으로 되어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이러한 축복은 장차 그리스도
의 재림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예표한다. 우리는 본시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들에게 주시는 은혜와 더불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의 바람직한 삶의 자세를 배
울 수 있다.
본시에 대하여, 하나의 단일한 시로 보지 않고 문체와 문학형식 및 주제 등에 있어
서 서로 다른 두 개의 시가 하나로 결합되었다고 보는 견해가있다. 이러한 입장은 우
선적으로 시의 내용에 근거한다. 사실 중심주제를 볼 때 전반부(1-11절)에서는 원수들
로부터 받는 고난에 대한 비탄과 멸절을 탄원하는 간구, 그리고 다윗왕에 비유되는 메
시야에 대한 희망이 결합되어 나타난다. 반면에 후반부(12-15절)에서는 일반적인 지혜
문학의 주제들, 즉 현세대에 있어서 빌게되는 의인들의 축복이 주된 내용으로 담겨 있
다. 특히 전반부는 18편과 매우밀접하게 관련되는데 22, 4, 9, 14, 16절 등 많은 구절
들이 본시에 인용되었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본시의 저작배경과 저작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이해되어 왔다. 먼저5-9절에서 사용되고 있는 종말론적 표현들-여호와의
강림, 연기가 발하는 산들, 화살과같은 번개 등-에 착안하여 본시가 포로기 이후 시대
에 메시야에 대한 희망을 나타낸 시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사64:1-4). 또 다른 학자들
은 비록 본시가 그 구조상 18편에 의존하고 있기는 하지만, 다윗의 후계왕들이 전쟁에
나가려 할 때 여호와께서 다윗 왕에게 허락하셨던 승리를 또다시 주실 것을 청원하는
출정 의식에 사용되었던 시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표제문과 표현방식, 그리고 사상
에 비추어볼때 본시가 분명히 다윗이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서 저술했다고 볼 수 있다.
본시에는 다윗이 자주사용하는 어투가 들어 있으며(18:50;61:6;63:11), 하나님께 대한
칭호와 사람에 대한 평가도 저자 다윗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본시는 다윗이 과거에 저
술한 시를 부분적으로 인용하면서 지은 단일한 시편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특별히 70인역(LXX)과 벌게이트역(Vulgate)에서는 본시에'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사
건에 관하여 지은 시'라는 표제어가 첨부되어 있다. 거란 본시의 내용과 정황을 볼대
여기서 묘사된 대적들은 다윗이 왕위에 오른 후 이스라엘과 전쟁을 했던 암몬 족속과
수리아 족속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삼하10:1-19).
다윗은 본시에서 수많은 전쟁과 생명의 위협을 극복하게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
하며 아울러 현재의 대치 상태를 승리로 이끌도록 간구하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에대한 감격과 더불어 임박한 재난에 대한 간구가 이루어지는 본시는 1 여호와를
부름(1,2절) 2 여호와 앞에서의 인간의 비천함(3, 4절) 3 여호와의 현현(5, 6절) 4 탄
원과 서원(7-11절) 5 축원(12-15절)등으로 세분할 수 있다. 이제 각 단락의 내요을 보
다 심층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감사와 신뢰(144:1-2)
찬미의 형식으로 여호와를 부르고있는 본연에서 다윗은 자신을 보호하시고 도와 주
셔서 백성을 다스리도록 허락하신 여호와께 감사와 신뢰를 표현하고있다. 특히 다윗은
나약한 목동 출신(삼상16:11,13)으로서 하나님의 보호를 통하여 골리앗을 물리치고(삼
상17:4-49)블레셋(삼상17:32-54),아말렉(삼상30:1-30)등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위
대한 군인이 되었다. 더구나 사울의 필사적인 추격 속에서도 극적으로 보호를 받았고
결국 통일 왕국의 명실 상부한 왕으로서 등극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며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의 '인자', '요새', '산성', '방패', '피난처'라고 고백한다.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나타내는 이 같은 여러가지 표현들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전부이며 하
나님이 계심으로 자신이 존재할 이유가 있다는 믿음의고백이다. 다윗은 자신에게 주어
진 모든평화와 행복의 출처가 하나님뿐임을 기억하고 찬양과 신뢰를 표현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과거를 회고하고 미래를 내다보면서 여호와의 은혜로 인하여 지금까지
살아왔다고 말하는 시인의 자부심과 겸손을 동시에 엿볼 수 있다.
또한 다윗의 후계 왕들도 이 시를 통해서 여호와의 '다윗을 향한 인자하심'(89:3,
49;사55:3)을 고유하고, 계속해서 여호와의 은혜로운통치가 이스라엘을 통하여 이루어
지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이 같은 기대와 신뢰는 다윗이나 그의 후계 왕들만의 전유물
이 아니라, 여호와를 믿고 의지하는 모든 성도들의 공유물인 것이다.
2. 여호와 앞에서의 인간의 비천함(144:3-4)
여호와의 보호와 인도에 대하여 감사하고 찬송하던 시인은 본연에 이르러서 여호와
의 거룩하고 위대한 현현(5절)에 대면하기위한 준비로서 인간의 비천함에 대해 고백하
고 있다. 시인은 인간이란 아무리 높은권위를 지닐지라도 여호와께서 보시기에는 아무
것도 아니며, 오직 여호와의 생각해 주심과 돌보심의 대상일 뿐이라고 고백한다
(8:4;102:11;109:23;사6:5). 특별히 윗은 본질적으로 '헛 것 같고 지나가는 그림자
같은'(4절)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존귀케하고 보살펴주시는 하나님께 떨리는 마
음으로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18:3,4에 비추어 볼 때 그 의미가 보다
분명해진다. 거기서도 다윗은 만물과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에대해 말하면서 창조 사
역의 중심에 인간을 두신 것에 감사한다.
이상에서 우리는 다윗의 인간관을알 수 있다. 그는 인간의 연약하고 죄악된 성품을
철저히 인식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고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의 대상이
된 존귀함을 표명한다. 우리는 선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구원을 받고 거룩한 하
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자각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여야 할 것이다(34:7;91:4;125:2;
왕하6:17;단6:22).
3. 여호와의 현현(144:5-6)
인간의 비천함에 대하여 솔직히 표현한 시인은 여호와께서 거룩하고 권능있게 현현
(顯現)하시어 대적들을 무찔러 달라고 청원한다(18:9ff.). 하나님께서는 비록 '혹암으
로 그 숨는 곳을 삼으시며'(18:12), 뇌성과 불길을 통하여 자신의 능력을 가시적으로
표현하시기도 한다. 바로 이러한 위엄과 능력에 의지하여 다윗은 이방나라의 침략으로
인하여 야기된 위급한 상황(삼하10:1-19)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간절히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4. 탄원과 서원(144:7-11)
여호와의 극적 개입을 요청한 다윗은 다시 한번 이방 대적들로부터 고난을 당하는
이스라엘을 구원해 달라고 탄원한다(7, 8절). 본래 여호와의 현현은 심판과 자비라는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공유하고 있다. 여호와는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
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
을 보이시며 곤고한 백성은 구원 하시고 교만한 눈을 낮추신다(18:26, 27). 이러한 하
나님의 속성에 근거하여 시인은 대적의 핍박에서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이어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응답하셔서 승리와 구원을 주신다면 반드시 '시 노
래'(new song))로 여호와를 찬양하겠다고 서원한다(9절). 여기서 '새노래'란 하나님으
로부터 죄사함을 받고 그 은총을 생각하며 부르는 찬양이다. 다윗은 이방의 침략에 의
해 야기된 위급한 상황에서도 언제나 구원해주신 은총을 토대로 하여 하나님의 위대하
심을 찬양하겠다고 다짐한다.
5. 백성들에 대한 축원(144:12-15)
앞 부분에서 왕의 승리와 구원에 대해 표현한 시인은 이제 본연에 이르러 백성들에
대한 축원을 담고 있다. 많은 학자들은 여기서 의문을 표시하지만 사실 이 두 가지 주
제는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다윗 왕을 향한 인자하심'과'은혜
로운 통치'는 백성들의 축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72:2,3참조).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인도와 지도를 받아 정치를 함으로써 이스라엘백성(12절)과 국토
(13, 14절)에 행복과 풍요가 넘쳐나기를 기원한 것이다. 구약에서 말하는 이상 국가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신정국가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다윗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
성이므로 축원하면서 시를 끝맺는것이다(15절;33:12).
본시를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 하나님앞에 나아
가리 전에 반드시 자신이 죄인임을 자각해야 한다. 다윗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현현 앞
에서 자신의 비천함을 겸손히 고백하였다(3, 4절). 우리느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해야할 것이다. 2 하나님의 현현 악인에
게는 심판, 의인에게는 은혜와 자비라는 이중적 의미가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
스도를믿고 순전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축복을 베푸시고, 하나님의 뜻을 거
역하고 거짓된 삶을 살려는 사람에게는 심판을 내리신다. 이러한 공의의 판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3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는 민족은 복되다(15
절). 우리는 개인의 신앙에 안주하지말고 민족 복음화를 위하여 가열찬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신33:29)라는 고백을 우리 민족도 할 수 있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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