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1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케 하소서 - 여기서 '부르짖음'은 일반적인 의미의 '기도'에 포함시킬 수 있지만 특별히 소리를 내어 간절한 마음으로 드리는, 즉 외적인 표현이 두드러지는 것이 그 특징인, 간절한 기도라 할 수 있다(5:2; 18:6, 41; 30:2; 72:12; 욥 35:9; 36:19). 그리고 '상달케 하소서'란 표현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평소 하나님께서 시인의 기도에 무관심하셨다는 뜻이 될 수도 있어 보인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이를,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는 고통으로 시달린 기도자가 그 고통의 기간의 종결을 호소하는 것에 그 강조점을 둔 표현으로 보고 있다(Anderson).
=====102:2
본절에 나타난 표현들은 다른 시편들에서도 볼 수 있는 관용구와 같은 것들이다. 예를 들어 '나의 괴로운 날에'는 59:16에서, '주의 얼굴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는 27:9에서, '주의 귀를 기울이사'는 18:6; 31:2에서, '내가 부르짖는 날에'는 61:2에서,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는 69:17에서 각각 찾아볼 수 있다. 각각의 용례들을 문맥 속에서 연구 종합해 보면 이 표현들 저변에는, 과거의 경험에 입각하여 그 어떤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그 백성을 구하시리라는 기자의 확신이 깔려 있다. 결국 본절은 기자의 부정적인 자세가 아니라 오히려 긍정적인 소망의 자세, 곧 하나님은 그 어떤 고통으로부터도 자신을 구하실 분이라는 확신의 자세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102:3
내 날이 연기같이 소멸하며 - 여기서 '연기같이'는 갑작스럽게 소멸되고 마는 인생의 연약함과 무상함을 뚜렷이 보여주는 비유이다(37:20). 말하자면 저자가 당했던 고통의 기간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지극히 부질없고 낭비적인 무익한 기간으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이는 시련중에 있는 자가 흔히 느끼는 감정이다(Barnes).
내 뼈가 냉과리같이 탔나이다 - '냉과리'라고 번역된 본 구절의 난제는 '모케드' (* )인데 사 33:14및 레 6:9등에서 '타는 것', '석쇠'등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사실이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한다(Snaith). 여기서는 문맥을 고려하고 앞서 언급된 용례를 참조할 때 '맹렬히 타는 열기', '불'등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 영역 성경 KJV는 '난로'(hearth)로, RSV는 '용광로'(furnace)로 각각 번역했다. 어쨌든 기자는 회화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자신이 처한 고통의 크기를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내 뼈'는 신체의 뼈대(6:2) 혹은 전인(全人, 35:10)을 가리킨다. 기자가 상투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었는지 혹은 하나님의 무응답으로 인한 고통스러운 내면 상태를 묘사하기 위한 회화적 표현인지는 가려내기 쉽지 않다(Anderson). 하지만 극심한 염려와 근심은 실제로 뼈를 쇠하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잠 17:22).
=====102:4
원문상 본절에는 접속사 '키'(* )가 나오는데 이 접속사는 대체로 원인절 앞에 붙어 이유를 설명하는 용어로 사용되나 본절에서는 결과절 앞에 붙어 결과를 설명하는 접속사로 보는 것이 좋겠다(Anderson, Barnes). 이 사실을 토대로 본절을 재번역하면 이렇다 : '나의 마음은 풀처럼 시들어버렸기 때문에 나는 나의 빵을 먹는 일도 잊었읍니다.' 시련으로 인한 시달림이 너무커서 생명을 지탱하는 필수 조건인 식사에 주의를 기울일 수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슬픔으로 인한 고통은 식욕을 빼앗아가버린다. 모든 것을 잊게 할 정도였다는 사실에서 시인이 당한 고통의 정도가 어떠했는지 대략 짐작할 수 있겠다.
=====102:5
나의 살이 뼈에 붙었나이다(* , 도브카 아츠미 리브사리) - 직역하면 '나의 뼈가 나의 살에 붙었나이다'이다. 여기서 '나의 뼈' (* , 아츠미)는 단수로 되어 있으나 집합적 의미의 단수로 보아 몸의 뼈들 모두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본문은 극단적인 쇠약함으로 인해 피골이 상접한 상태를 시사하는데, 좀더 자연스러운 표현은 애 4:8에 있는 것처럼 '그 가죽이 뼈에 붙어'가 될 것이다. 욥 19:20은 극심한 고통으로 인하여 몸의 각 뼈들이 완전히 힘을 잃어 극한의 연약성과 이완을 보이는 상태를 좀더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 "내 피부와 살이 뼈에 붙었고 남은것은 겨우 잇꺼풀뿐이로구나.
=====102:6
당아새(* , 카아트) - 본 용어의 의미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70인역(LXX)이 '펠리컨'으로 번역한 후 대부분의 역본들이 그것을 따르고 있다(pelican, KJV). '펠리컨'은 게걸스럽게 먹고(펠리컨은 주로 조개류를 잡아먹고 산다) 그것을 입으로 토해내기도 하는데 바로 그 모습에 그 이름의 기원이 두어져 있다. 부정한 새로도 알려져 있는 이 새는(레 11:13-18) 물가에 군거(群居)하고 있는데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카아트'를 '펠리컨'으로 번역하는 것은 적합하지 못하다고 반박하는 학자도 있다(Anderson). 그 우는 소리에서 그 이름의 기원을 찾아 '사막 올빼미'(desert owl, NIV)로 보는 학자도 있다(Driver). 분명한 것은 '광야'가 이 새를 꾸미고 있음을 볼 때 기자는 자신의 외로움, 비애를 생생하게 드러내기 위하여 본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사 34:11; 습 2:14).
부엉이(* , 코스) - 부정한 새로 분류되고 있는(레 11:17; 신 14:16) 올빼미류를 총칭하는 용어이다. 본절의 묘사는 고통자가 자신을 부정한 존재로 간주하고 있음과 그이 상황이 외로움과 고독으로 인해 더욱 악화되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이 같은 묘사는 죽음에 거의 다다른 존재에 관한 묘사이기도 하다(88:5). 한편 올빼미는 아라비아어로 '폐허의 어머니'란 뜻을 갖고 있다.
=====102:7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에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 - 히브리어 원문을 직역하면 '나는 깨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지붕 위에 외로운 한 마리 참새와 같다'이다. 참새는 그 짝을 잃었을 때 여러 날 동안 외롭게 지붕 위에 앉아서 짝을 잃은 슬픔을 달랜다고 한다. 기자는 그 누구도 위로하는 사람 없는 가운데 철저하게 원수로부터 핍박을 당했던 자신의 모습을 짝을 잃고 외로워하는 참새에 비유하고 있다.
=====102:8
종일 나를 훼방하며(* , 칼 하욤 헤레푸니) - 문자적인 뜻은 '하루 내내 나를 조롱하며'이다. 이것은 기자의 대적들이 본 기자의 고통이 당연한 것이며 또 그가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이 틀림없다고 말하면서 놀려댔던 것을 가리킨다. 이는'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등의 표현을 연상시킨다(22:7; 42:10; 44:13등).
나를 가리켜 맹세하나이다(* , 비 니쉬바우) - 문자적인 뜻은 '나를 통하여 저주하나이다'이다. 분문에 대해 70인역(LXX)은 '(예전에는) 나를 칭송했다'는 뜻으로 번역한다. 그런가 하면 영역본 KJV는 '나를 향해(저주의) 맹세를 하다'(are sworn against me)의 의미로 이해한다. 그러나 본문의 히브리어 전치사 '베드'(* ) '...로 말미암아' 혹은 '...에 의해'로 옮기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 이경우 본문은, 시편 기자의 대적들이 어떤 사람을 저주할 때 시편 기자를 하나의 표본으로 삼았던 것을 가리킨다(use my name for a curse, RSV). 족장 시대 때 야곱은 손자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다음과 같이 각별히 축복했었다 : "이스라엘 족속이 너로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너로 에브라임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창 48:20). 이 축복이 있은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어떤 사람을 축복할 때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축복받았던 것을 기억하며 '너도 에브라임과 므낫세처럼 축복받으라'는 식으로 그 사람을 축복했을 것이다. 따라서 본문은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의 정반대 상황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Anderson). 기자의 대적들은 누구를 향해 저주할 때 불행의 표본인 본 기자의 이름을 들먹이며 저주했다는 말이다.
=====102:9
나는 재를 양식같이 먹으며 - 여기서 '재'로 번역된 히브리어 '에페르' (* )는 애도 및 슬픔의 상징으로 흔히 사용된다(에 4:1; 욥 2:8; 애 3:16). 그리고 가끔 수치와 회개의 상징으로도 나타난다(욥 42:6; 단 9:3). 실제적으로 시편 기자가 재를 먹었을 가능성은 적다. 고통과 비애가 그의 음식과 음료가 되었다는 것은 비유적인 표현으로 보는 것이 낫겠다. 큰 고통과 슬픔이 있는 자는 흔히 욥처럼 재 위에 앉아 울거나(욥 2:8; 렘 6:26; 욘 3:6). 다말처럼 그 머리를 재에 박았다(삼하 13:19). 특히 본 문맥에서는 마치 재를 먹는 듯한 인상을 주는 후자의 자세가 어울릴 것 같다.
=====102:10
이는 주의 분과 노를 인함이라 - 기자는 그의 불행이 하나님의 징벌의 결과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분노를 자극하고 그리하여 징벌을 초래했던 것은 궁극적으로 자신이 알게 모르게 지은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모세도 그의 시편에서 이 사실을 인정한 바 있다(90:7-9). 어떤 극심한 병고나 대적들의 핍박에 직면하여 현상 그 자체만으로 판단하지 않고 자신의 은밀한 죄악까지도 먼저 돌아보고자 하는 이러한 자세는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기를 원하는 시인의 예민한 영적 감수성을 반영한다.
주께서 나를 드셨다가 던지셨나이다 - 마치 강한 태풍이 휩쓸어가듯이 하나님의 분과 노가 그를 낚아 채어 잡아 올려 그 누구도 도울 수 없는 지경에 던져 놓았다는 뜻이다(렘 23:19). 이는 "정녕히 너를 말아 싸서 공같이 광막한 지경에 던질 것이라..."(사 22:18). 혹은 "동풍이 그를 날려 보내며 그 처에서 몰아내리라"(욥 27:21)등의 표현을 연상시킨다.
=====102:11
기울어지는(* , 나투이) - 본 용어는 한 날이 다 저물어가는 것(삿 19:9) 혹은 지는 태양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용어인데 여기서는 잠시 후에 완전한 흑암에 의해 삼키움을 당할, 길게 드리워져 있는 그림자를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되고 있다(109:23; 144:4; 욥 8:9; 14:2; 렘 6:4). 물론 기자는 이러한 표현을 통해 죽음이 임박한 것 같은 절박감을 나타내고 있다(Perowne).
=====102:12
여호와여(* , 웨아타 예화) - 직역하면 '그리고 당신은 여호와이십니다'이지만 '웨아타'(* )를 중심으로 앞부분에 서술된 내용과 그 뒷 부분에 서술된 내용이 상반되기 때문에 '그러나 당신은 여호와이십니다'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같이 '웨아타'는 강조사로서 선행구와 두드러진 대비를 암시하는 경우가 많다.
주는 영원히 계시고(* , 레올람 테쉐브) - '영원히 보좌에 앉아 계시는'이 문자적인 뜻이다. 이 사실은 슬픔을 초월케 하고 큰 위로와 소망을 준다. 연약한 한 인생인 시편 기자는 소멸하여도 시온의 소망은 그의 영원한 왕에게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상황이 너무 자주 혹은 급하게 변하여서 잠시 동안도 안정을 누릴 수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영원한 왕으로서 변치 않는 분이라는 사실은 큰 위로가 되는 것이다. 한편, 영원 불변하시는 하니님의 축복의 약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은 점점 더욱 웃음거리가 되어가는 듯 보일수도 있다. 그러나 기자는 하나님이 그의 교회에 주신 약속들, 특히 그 위대한 언약적 약속을 회상하고 있는 것이다. :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하리라'(출 25:8). 이 약속에 의존하여 그는 비록 현재의 상황이 불행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궁극적으로 천상적(天上的) 영광을 함께 나눌 수 있음을 확신하고 있다. 하나님은 변치 않으시고 그의 약속과 언약 역시 변치 않으시기 때문에 우리 성도는 하나님께서 그의 손을 뻗치고 계신 하늘 보좌를 눈을 들어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102:13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 이는, 당신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7:6) 시온 성을 재건케 하신다는 뜻이다(16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시온 성벽 재건을 허락하시는 것은 그가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에 대해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내신 언약에 신실하기 위하여 범죄한 그의 백성을 회복시켜 다시 평강과 안녕을 허락하시는 것이다.
정한 기한이 옴이니이다 - 여기서 '정한 기한'은 1차적으로 사 40:2이하; 렘 25:11, 12; 29:10; 30:18; 슥 1:12-17 등에서 선지자들이 예언한 것과 같은 특정한 때로 이해할 수 있다 : "이 온 땅이 황폐하여 놀램이 될 것이며 이 나라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칠십년이 마치면 내가 바벨론왕과 그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인하여 벌하여..."(렘 25:11, 12).정한 기한이 지나 새로 도래할 시대의 특징은 죄사함과 회개, 언약 갱신 및 시온재건 등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었다(VanGemeren). 아울러 궁극적으로 보면 이는 영적 이스라엘의 안녕이 성취되는 때로도 볼 수 있다(Perowne).
=====102:14
시온의 돌들을 즐거워하며 그 티끌도 연휼(憐恤)히 여기나이다 - 과거 그 찬란한 자태를 뽐내던 멸망 전 시대뿐만 아니라 멸망을 받아 폐허가 되어 버린 지금도 시온은 남은 자들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멸망 후 경건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의 티끌들을 자신의 몸에 뿌림으로써 그 성(城)에 대한 애착을 나타냈다고 한다(Perowne). 결국 본문은 시온 성 재건을 열망하는 남은 자들의 소망을 표현한 것이라고 하겠다. 한편, 이것은 오늘날의 영적 시온인 교회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어떠해아 할 것을 교훈한다. 즉, 거룩한 성도들은 극심한 환난으로 인한 고통 가운데서 더욱 그 교회를 사랑해야 하며 좀더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것이다. 돌들...티끌 - 어떤 학자는 이 둘을 새로운 도성 건축을 위한 재료들로 이해하지만 그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한다(Luther). 그보다는 멸망당한 시온 tjd의 황폐한 상황을 나타내는 것으로 봄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느 4:2; Alexander).
=====102:15
열방이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며 세계 열왕이 주의 영광을 경외하리니 - 개역 성경에는 동사가 둘로 되어 있으나('경외하다'), 원문에는 하나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야라'(* )로서 '두려워하다'를 뜻할 뿐 아니라 '존경, 경외하다'를 뜻하기도 하며, 그 대상은 부모(레 19:3), 백성의 지도자들(수 4:14) 그리고 종종 하나님(15:4; 22:25; 31:19)으로 되어 있다. 하나님의 주권적 목적의 성취일 뿐 아니라 기도의 응답이기도 한 그 백성의 구속 및 회복을 통하여 드러날 하나님 영광의 현시(顯示)로 인하여 이제 이방 세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공경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세계 모든 백성에게로 확대되어가는 분기점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Delitzsch, Kirkpatrick).
=====102:16
건설하시고...나타나셨음이라 - 이 두 동사는 각가 '바나'(* )와 '니르아'(* )로서 완료형으로 되어 있다. 17절에서도 계속되는 이러한 표현은 미래에 있을 일을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확신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러한 표현법을 예언적 완료형(prophetic perfects)이라고 한다.
=====102:17
빈궁한자(* , 아르아르) - 이곳과 렘 17:6에만 나오는 본 용어는 '히드'(개역 성경의 렘 17:6은 '떨기나무'로 번역하고 있음)로 번역될 수도 있는데 '히드'란 황야에 무성하는 관목이다(Barnes). 어원적으로 볼 때 '발가벗음'을 뜻하는 본 용어는 매우 결핍된 상태에 있는 존재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 본 문맥에서 그 존재란 계속해서 고통을 토로해 왔던 기자 자신(1-11절)으로 볼 수 있으나, 복수형으로 되어 있는 하반절과의 평행을 고려할 경우 일련의 고통받는 무리, 곧 이스라엘 민족 전체로 볼 수도 있겠다. 물론 본 구절이 강조하는 바는 고통하는 자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크신 긍휼이다(13절 참조).
=====102:18
기록되리니 - 시편 중에서 위대한 구원 사건의 기억을 기록체로 보존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유일한 곳이다. 구원 사건의 전승을 언급하고 있는 유사 구절로 22:30; 44:1; 78:2 등이 있으나 이곳들에서는 구두(口頭)전달만을 말할 뿐이다.
창조함을 받을 백성 - '장차 날 백성'(22:31)이라는 표현을 연상시키는 구절로 백성의 새 피조 사실과 이스라엘의 현재의 멸망상태 사이의 대조적 상태를 암시하기 위해 동원된 구절인 것 같다(Calvin). 사실 포로로부터의 귀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제 2의 탄생과도 같다고 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그 탄생을 새로운 피조로 보아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 같은 견해를 근거로 한 학자는 본문이 오늘을 사는 성도에게 주는 교훈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 '본 구절은 마치 죽은 것처럼 보이는 그때에도 하나님이 원하시면 교회는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쳐 준다. 이제 우리는 결단코 자포 자기하지 말고 도리어 무(無)로부터 세계를 창조하신 그분께서 역시 그의 교회를 죽음의 흑암으로부터 이끌어 내실 수 있다는 진리에 확실히 안주할 수 있어야 하겠다'(Cicero).
=====102:19
그 높은 성소에서(* , 밈므롬 코드쇼) - 직역하면 '그의 거룩한 높은 곳으로부터'이다. 어떤 영역본들은 '그의 성소의 높은 곳으로부터'로 번역하고 있으나(from the height of his sanctuary, KJV), 평범하게 '하늘로부터'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14:2; 33:13; 사 63:15). 그것은 '높은 곳'으로 번역된 '마롬' (* )이 하반절의 '하늘'과 평행을 이루기 때문이다. 유사 구절로는 신 26:15이 있다 : "원컨대 주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서 하감하시고...." =====102:20
갇힌 자(* , 아시르) - 집합적 의미로 사용되는 용어이며 포로 시대를 암시하는 말이지만 넓게는 압박받는 자들을 총체적으로 뜻한다고 볼 수도 있다.
죽이기로 정한자(* , 베네 테무타) - 문자적인 의미는 '죽음의 아들들'이다. 본 구절은 이곳과 79:11에만 나오는데 '죽을 운명에 처한 자(those who were doomed to die, RSV)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이 표현 역시 포로민의 비참상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특정한 시대가 아닌 오고 가는 모든 시대에 사는, 영적 사망의 굴레를 쓴 모든 자들을 포함시켜 이해할 수 있겠다.
=====102:21
본절은 19, 20절에서처럼 하나님의 행사(行事) 자체를 묘사한다기보다는 본절의 내용처럼 되어지기를 바라는 일종의 기원의 형태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Alexander). 한편, 여호와의 이름과 영예를 선포한다는 것은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기린다는 의미와 상통한다.
=====102:22
민족들과 나라들이 모여 여호와를 섬기리로다 - 시온이 회복될 때 모든 나라의 백성들은 그곳에 모여 여호와께 존경을 표하며 경배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많은 선지자들의 예언과 소망의 성취가 될 것이다(47:9; 사 2:2; 60:3-7; 미 7:12; 슥 14:16). 한편, 예언적 비전을 담고 있는 본문은 포로 귀환의 지평을 넘어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회복에로까지 그 시야를 확장하고 있다. 선지자들의 예언이 대개 그러하듯이, 바벨론 포로 상태로부터의 구원을 노래하면서 영감을 받은 시인은 그보다 더 먼 장래의 일 곧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으로 말미암을 완성의 단계로까지 비전을 확장시키고 있는 것이다(Calvin, VanGemeren).
=====102:23
저가 내 힘을...쇠약케 하시며 - 이어지는 내용과 연결시켜 생각해 볼 때, 이 표현의 핵심은 하나님이 기자의 힘을 빼앗았다는 데 있다기보다는 기자 자신의 죄성과 연약성을 고백하는 데 있다. 기자는 본절에서 지금까지의 논조를 갑자기 바꾸고 인간 수명의 짧음 및 그의 연약성을 부각시킴으로써 암시적으로 하나님의 영원성, 무변성을 드러내려 하고 있다(24절 이하).
중도에(* , 베데레크) - 주로 일련의 무리의 여정을 가리키는 표현이지만(출 18:8; 민 20:14), 여기서는 기자 개인의 인생 여정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보면 무난하겠다. 그러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본 시편에서 기자는 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무리, 곧 민족에게 주는 교훈으로까지 나아간다는 사실이다 : "주의 종들의 자손이 항상 있고"(28절).
내 날을 단촉케 하셨도다 - 수명을 줄였다는 뜻이 아니라 거의 죽음 직전까지 이르렀다고 느낄 정도로 고통의 강도가 세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102:24
나의 말이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옵소서 - 시편은 일정한 정형을 갖고 있기 마련인데 개역 성경상으로 봐도 그 정형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기자가 정형을 무너뜨려가면서 토로하고 있는 이 내용은 정해진 수명에도 이르기 전에 갑자기 죽음을 당케 하지 말아 달라는 간구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할 것은 이 같은 간구는 삶에 대한 본능적인 집착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니라(사 38:10, 11의 히스기야의 경우와 같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통하여 드러날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원하는 강한 열망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한편으로 그의 연약성을 절감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 영원한 팔되신 그분께 대한 의존감을 피력한 것이다. 그는 어쩌면 자기 자신은 소멸한다고 할지라도 그의 후손들은 결코 좌절될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목도하기를 소원하고 있었을런지 모른다(28절).
=====102:25
옛적에 땅의 기초를 두셨사오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이다 - 이 구절은 천지 창조 사실 자체에 핵심이 있지 않고 그 피조 세계가 창조주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유한한 것이라는 사실에 핵심이 있다. 시작이 있는 피조 세계는 그 종말이 있으니 유한하다는 것이다. "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며 그 아래의 땅을 살피라 하늘이 연기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같이 해어지며"(사 51:6). 물론 이는 역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영존(永存)하심을 강조하는 말이기도 하다.
=====102:26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 하늘과 땅은 영원하고 지속적인 모든것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흔히 간주되고 있지만(78:69; 104:5; 119:90; 148:6), 하나님과 비교될 때에는 곧 낡아 없어져 버릴 의복과 같은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사 34:4; 51:6).
=====102:27
주는 여상하시고(* , 아타 후) - 문자적인 뜻은 '당신은 그이시다'. 이는 24절 하반절로부터 26절 상반절까지에 묘사된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뜻이다. '...내가 곧 그니라'의 사 41:4 외에 신 32:39 등이 그 유사 구이다. 아무튼 히브리어 '후'(* )는 여호와의 유일성을 강조하려 할 때 사용된다.
=====102:28
주의 종들의 자손이 항상 있고 - 문자적으로는 '당신의 종들의 자녀들이 계속 거할 것이다'이다. 이는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대로 그 백성들이 약속받은 땅에서 계속 거하며 살 것에 대한 저자의 소망을 반영하는 구절이라 할 수 있다(37:29; 69:36). 물론 기자의 이 같은 소망은 하나님의 불변성에 대한 확신에 근거를 두고 있다.
본시는 전통적으로 7편의 참회시들(6, 32, 28, 51, 102, 130, 143편)중 다섯 번째
시로 분류되어 왔다. 하지만 본시의 형식, 배경, 저자 등과 같은 본문 외적 상황이 나
해한 점을 고려할 때 이것을 쉽게 단정짓기는 어렵다. 학자들 역시 본 시편의 난제들
을 저마다 다른 시각과 입장에서 다루고 있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통되는
기본적 입장을 토대로 하여 본 시편을 취급한다면 다음 몇 가지 내용들로 집약시킬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시편 분류에 입각한 본시의 형식(genre)에 관한 문제이다. 학자들에 의한 전
통적 견해는 본시가 7편의 '참회시'(penitential psalm)중 하나라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6편의 시들이(6, 32, 38, 51, 130, 143편)주로 개인적 차원에서 죄에 대한 회개
와 회복을 노래하고 있는 본시는 세계 지향적인 이스라엘 신앙을 노래하고 있다(13-22
절). 따라서 본시는 다른 6편의 참회시들과는 다른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사료된
다. 뿐만 아니라 본 시편의 표제를 보면 일반적인 표제문 기록 방식과 어긋난다(100,
101, 108, 109편).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어떤 학자들은 본 시편의 문학적 형식을 '개
인적 탄식시'(individual lament)로 이해하고 있다. 물론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본
시의 저자는 개인적인 죄를 참회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시인은 개인적
차원을 뛰어 넘어 국가적 죄를 고백하고 민족의 아픔을 토로하며 예루살렘의 회복을
소망하고 있다. 따라서 본 시편은 민족적 수난을 경험한 시인이 민족의 죄를 자각하고
탄식하며 하나님의 개입을 바라는 '비탄적 회개시'라고 볼 수 있다.
두 번째로 논란이 되는 주제는 저자 문제이다. 1 4명의 각기 다른 저자에 의한 조
합설. 이런 주장을 하는 몇몇 학자들은, 본시에 내재하여 있는 불규칙과 까다로움은
서로 다른 저자가 다른 상황에서 저작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그래서 그들은 본시
의 첫 번째연을(1-11절)히스기야 왕의 기도((사38장)와 연결시킨다. 또 두, 세 번째
연은(12-22절)바벧론 포로 중 익명의 두 저자에 의해 지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
고 학사에스라가 결론에 해당하는 마지막연(23-28절)을 첨가하여 현재의 완성된 찬송
시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위의 의견 견해는 자료 비평학적 관점에서 성경을
해부함으로써 본시의 통일성을 파괴했다는 점에서 수용하기 어려운 입장이다. 2 다니
엘 저작설, 이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본시 전체가 바벧론 유배 말기에 지어졌다는 확신
에 기초한다. 이들은 패망한 이스라엘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하여 참회를 하는 점이나
(1-11절), 날카로운 예언자적 식견을 통해 이스라엘의 미래를 통찰할 수 있었던 사실
(12-22절)등을 상고해 볼 때 애국자요 선지자였던 다니엘의 특성과, 일맥 상통한다고
보았다. 더 나아가 다니엘이 느부갓네살의 시대 말기에 사라졌다가(단4장) 벧사살 왕
의 시대에 다시 나타난 것은(단5:10-16)심각한 병으로 고통받았기 때문인데, 바로 그
때 본시를 집필했다고 추측에 불과할 뿐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우리가 위의 두 가지 견해를 기초로 추론할 수 있는 내용은 , 본시의 저자
는 바벧론 유배의 고통을 실제로 경험했으며 민족적 수난을 개인적 아픔으로 공유할
수 있었던 자였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본시의 저자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에
익숙해 있는 사람인 듯하다(렘25:11). 왜냐하면 포로의 암흑기 속에서도 이제 곧 회복
될 이스라엘을 바라보고 찬송하였기 때문이다(12-22절).
한편, 본 시편의 구조는 크게 두 가지 문학적 요소가 기본적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처음과 마지막 부분을 차지하는 탄식의 형태와 중간 부분을 구성하는 예언적
찬송의 형태이다. 이를 좀더 세밀하게 정리해 보면 본시는 1 시인의 곤고함과 탄식의
기도를 묘사한 전반부(1-11절) 2 시인의 예루살렘 회복에 대한 굳은 신념을 노래한
중반부(12-22절) 3 탄식 속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보호를 의탁하는 후반부(23-28절)등
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별히 시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고 선지자들의 약속에 대한 실현을 의심하던
포로기 중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예언자적 대망을 노래함으로
다시금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바라도록 고취시키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이스
라엘의 회복 사상은 약속을 믿고 마라도록 고취시키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이
스라엘의 회복 사상은 궁극적으로 장차 메시야가 오셔어 언약의 백성들을 회복시키신
다는 이중적 의미의 성취를 예표하고 있다. 이제 본시 전체에 흐르고 있는 특징적인
내용 몇 가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시인은 자신, 또는 민족의 고난을 하나님의 섭리적 차원으로 보고 있다. 본문에
서 시인은 '나의 고난, 나의탄식'(2, 5절)등을 호소하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분과 노'
(10절)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당면한 모든 고통과 재난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징
벌이었다는 사실을 뜻한다. 아마도 시인은 바벧론 유배 생활에서 고통을 당할 때마다
옛적 섶지자들이 이스라엘을 향해 경고했던 예언들을 생각하였을 것이다(사1
장;5:8-25;렘2:9-37;4:5-18). 이처럼 고난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에 의존되어 있
다는 시인의 사상은 또한 장차 주께서 고통을 폐하시고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하실 것
이라는 신앙을 품도록 했다. 그래서 본시의 중반부와 후반부에서 시인은 시온의 회복
과(14-16절), 하나님의 영존하심(26절)등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본시 전체에
서 드러나는 시인의 의도는 고난의 탄식을 통한 섭리에로의 승화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다.
2 시인은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이 세계지향적임을 밝히고 있다.(12, 22
절). 즉 이 말은 이스라엘 자체의 회복을 뛰어 넘어 장차 모든 민족과 온 세상에서 영
적 이스라엘이 서게 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21, 22절). 사실 포로기 이전에도이방인
의 구원에 대한 사상이 있었으나 자배적이지는 못했다. 그러기를 거치면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사상이 있었으나 지배적이지는 못했다. 그러나 포로기를 거치면서 하나님
의 구원이 전세계에 미칠 것이라는 사상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는 결국 하나님이 처
음 이브라함을 부르셔서 그와 언약하신 내용이 성취이자(창12:1-3)태초부터 작정하시
고 의도하셨던 계획의 완성인 것이다(엡1:3-10).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여기에서 노래
하고 있는 아스라엘은 바로 신약 시대의 교회에 대한 예견이다.
이러한 내용을 시적으로 형상화함에 있어서 시인은 짧고 긴 연들을 불규칙하게 배
열 하면서도 고도의 시적 가락과 함축적인 언어를 사용한다. 특히 자신의 처지를 비유
적 언어로 표현하여 평범한 말로는 나타낼 수 없는 처절하고도 괴로운 심정을 생생하
게 전달하고 있다(3, 4, 6, 9, 11절).
이상에서 우리는 1 죄로 인한 고통과 절망이 성도에게 엄습해 오더라도 구원의 완
성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고 소망을 가져야 하며(86:2;롬8:`8, 35-39) 2 성도
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로서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느끼
며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다.
1. 곤고의 탄식의 기도(102:1-11)
본 단락은 본시 전체의 전반부에 해당하는데 시인이 자신의 고통을 하나님 앞에 호
소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시인은 먼저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간구를 통해서 본문을
시작하고 이어서 자신의 고통스런 상황을 세 부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즉 본문은 크게
서론적 기도(1, 2절)와 탄식의 내용(3-11절)등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를 좀더
세분하여 보면 1서론적 간구(1, 2절) 2견딜 수 없는 괴로움(3-5절) 3 외로움과 고
독의 상황들(6, 7절) 4 대적들로 인한 수치심(8-11절)등으로 나누어진다.
특히, 시인은 본 단락에서 두 가지 특징적인 표현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첫째는 일반적인 간구자들의 언어를 짜집기하는 방식이다. 시인은 서론적 기도문에
서 다른 사람들의 표현을 종합적으로 정리하였다(1, 2절). 특 '내 기도'(39:12;65:2),
'부르짖음'(18:2), '얼굴을 숨기지 마소서'(13:1;69:17), '귀를 기울이사(31:2) 등이
그러하다. 이는 시인이 고난에 직면하여 미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기 바로 직전 최후
의 외침을 22:1에서 인용하신 것처럼(마27:46)다른 사인의 간구들로부터 도움을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둘째, 비유적 표현 방식이다. 본문에서 시인은 '...같이'라는 비유적 표현을 8회에
걸쳐서 사용하고 있다(3,4, 6, 7, 9, 11절). 특히 이러한 비유에 사용된 대상들 또한
긍정적인 의미보다는 슬픔, 고독 등의 부정적인 의미를 함축하는 것들이다. 황폐한 곳
의 부엉이-6절, 외로운 참세-7절, 기울어지는 그림자-11절. 이러한 비유들은 시인의
처지가 결코 일반적이고 평범한 서술로는 설명될 수 없는 괴롭고 힘든 상황임을 잘 대
변해 준다. 시인은 자기 인생의 무가치함을 쓸데없는 미물들과 비유하여 하나님께 호
소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상의 특징들을 기초로 해서 본문을 살펴보면 시인은 언약 백성들이 바
벧론 포로생활 중 느꼈던 고통이 삼각함에 대해 강조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포로기나
이방국에서의 거주 기간 동안 이스라엘이 당면했던 고통들은 에스더서와 다니엘서의
기록들을 보면 일 수 있다. 특히 '수산'에서 발생한 유대인 말살 계획(에3:1-6)은 그
고통의 심각성을 잘 알려준다.
본문에서의 시인은 견디기 어려운 근심으로 식음을 전폐하였고 그 결과 마음과 육
체가 마른 풀과 같이 되어 버렸다고 말한다(4, 5절). 뿐만 아니라 '당아새', '부엉
이', '참새' 등에다가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여 외롭고 고독한 현실을 호소한다(6,, 7
절). 특히 무엇보다도 시인을 괴롭혔던 것은 원수들에게 당하는 조롱과 모욕이었다(8
절). 시인은 이러한 고통을 자기 개인과 하나님의 백성 전체가 당하는 괴로움으로 인
힉하였다. 그러므로 시인은 다음 단락에서 자기 개인의 구원이 아닌 이스라엘 공동체
의 회복을 노래한다(12-22절).
앞에서 당면한 고통에 대해 하소연하던 시인은 이제 모든 고난의 원인을 '이스라엘
의 불순종으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라는 신앙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이러한 시각
은 당면한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와 약속을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을 갖게 하였고
마침내 구원에 대한 굳은 확신으로 나아가게 하였던 것이다.
한편 본연은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는 22, 69편에 비해서 상징적인 어휘를 사용하
고 있다. 앞의 두 시편이 고난의 묘사를 직접적으로 하고 있는 반면(69:17, 20, 29)
본문은 비유적 표현들을 사용하여 고통을 서술하고 있다.이러한 의미에서 본문은 욥이
자신의 현재 고난을 묘사하는 독백의 내용과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욥 30장). 욥 역시
재난을 하나님의 섭리로 보고 있으며(욥30:19-23)자신의 '영광과 복록'을 '바람, 구
름'으로(욥30:15), 자신의 처지를 '티끌과 재'(욥30:19)등으로 비유하고 있기 때문이
다. 다만 욥은 개인적 차원에서 하나님께 한탄하고 있는 반면 본연에서 시인은 언약
백성 전체의 아픔을 대변하고 기도하고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내용을 통하여 다음의 몇 가지 교훈을 배우게 된다. 1 현재 당
면한 고난이 내적 외적으로 중다(衆多)할지라도 성도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도우시는
섭리의 손길을 견고하게 신뢰해야 한다(70:1-5;렘33:3). 2 하나님의 대적과 성도의
원수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조롱하며 쓰러뜨리려고 한다(벧전5:8, 9;벧후3:3). 3 시
인과 같이 자신의 비참한 처지에 대해 철처히 인식하게 될 때 구원의 필요성을 하나님
께 호소하게 된다.
2. 시온의 회복과 결론적 찬양(102:12-28)
앞 단락에서 고난 중에 있는 자신의 처치를 상세하게 언급했던(1-11절) 시인은, 본
문에서 이스라엘에게 구원을 베푸실 영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본 단락을 기점으로
본시는 '고통과 탄식'에서 '기쁨과 찬송'으로서 대 전환이 이루어진다. 이는 곧 선지
자들의 예언에 기초한 시인의 확신과 기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본문은 크게 두 연으로 나누어지는데,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시인의 신념
을 찬송하는 전반부(12-22절)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보호를 노래하는
후반부(23-28절)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시인은 시온의 회복을 추구하고 소망하지만
그 성취는 바로 하나님의 자신의 영존하신 속성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특별
히 저자가 본문에서 강조하는 내요을 자세히 고찰하여 보면 몇 가지 중요한 신학적 내
용을 함축하고 있다.
시인은 하나님을 여호와로 부르고 있다. 앞단락에서(1-11절)주로'나'라는 일인칭
대명사가 많이 사용되었으나 본연에는 '여호와'라는 칭호가 모두 8번에 걸쳐서 나타난
다(12, 15-19, 21, 22절). 이는 이미 시인의 관심이 '자신의 처지에 대한 호소'에서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찬양'으로 변화되었음을 단적으로 드러내준다. 이렇듯 시인이
특별히 '여호와'라는 구체적인 호칭을 사용하는 이유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사실,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성호는 출애굽 직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계
시하신 이름이었다(출6:2-9). 이성호는 이전에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15-18)을 하나님
께서 기억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역과 압박에서 건져내시겠다는 약속의 재확인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가리켜 '나는 여호와'(출6:2, 6, 8)라고 몇 번씩
반복하여 호칭하셨다. 결국 여호와라는 칭호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면서 쓰신 이름으로서'언약의 하나님'을 뜻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본연에
서 시인이 여호와라는 호칭을 반복적으로 사용한 의도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맺으신 언약을 출애굽을 통해 준수하셧던 것처럼 바벧론의 치욕에서도 다시 구
원하셔서 회복시키신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시온의 회복은 장차 이방까지도 하나님의 백성의 대열에서 설 수 있게 할 것이다
(15, 22절).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올 왕국을 묘사하는 자리에서(사2:2-22). 마지막
날에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예루살렘에 입장할 것을 예언하였다(사2:2-4). 이사야의
이러한 예언은 종말론적인 의미를 내표하고 있는 바 1차적인 성취가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성취될 것이다. 이처럼 시인은 본문에서 민족적 차이를 초월하여 새롭게 창조된
백성이 하나님을 함께 찬송하게 된다는 사실을 예표적으로 제시하고 있다(18절;고후
6;5:17).
3 하나님의 영존하신 속성이 잘 나타난다. 시인은 결론에 도달하면서 다시 한번 절
망으로 빠져든다(23절). 이렇듯 무기력함과 한계 상황에 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인
은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무궁하신 속성에 근거하여 이스라엘의 존속을 간구한다. 이는
언약 백성을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신실성에 대한 굳은 확신을 드러내 주는
것이다(28절).
한편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창조주요 보존자되심을 묘사하면서 이 구절
(25-27절)을 인용하고 있다(히1:10-12).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우리는 본연이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의 영원 불변하신 속성에 근거하여 메시야의 도래를 통한 구원의 완성을
예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 내용을 통해 1 유한한 인간인 성도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그리스도의 신실하심 뿐이며 2 성도는 구원의 완성을 굳게 믿고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롬8:3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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